열린논단 60회 기념 특별기획 : 한국불교, 정말 괜찮은가

열린논단 60회 기념 특별기획 : 한국불교, 정말 괜찮은가

한국불교 지성을 대표해온 계간지 《불교평론》과 경희대 비폭력연구소가 공동으로 주관해온 ‘열린논단’이 지난 2월로 60회를 맞았다. 2009년 2월 27일에 첫 모임을 시작한 지 6년 만의 일이다. 그동안 이 모임에서는 한국불교의 현실을 반성하고 발전적 대안을 모색하는 주제를 선정해 전문가 발제를 듣고 토론해왔다. 참가자들은 자유로운 의사개진과 토론을 통해 날카로운 문제의식과 폭넓은 인문적 교양을 공유해왔다. 《불교평론》은 60회를 기념하여 2월, 3월, 4월 세 차례에 걸쳐 ‘한국불교, 정말 괜찮은가’를 주제로 ‘열린논단’을 개최했다. 여기서 발표된 내용을 특별기획으로 소개한다.

열린논단 발제 목록(2009. 2~2015. 4)

01. 2009.2.27       한국 종교의 정치종속성과 불교의 미래 / 김성철
02. 2009.3.13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와 전망 / 홍미정
03. 2009.3.27       화쟁 철학과 탈현대 철학의 비교연구 / 이도흠
04. 2009.4.10       불교는 철학인가? / 박병기
05. 2009.4.24       유식론과 신경과학 / 강병조
06. 2009.5.8         도마복음과 동양철학의 비교 / 오강남
07. 2009.5.22       만다라와 밀교수행 / 최로덴
08. 2009.6.26       깨달음에 대한 몇 가지 오해, 그리고 진실 / 홍사성
09. 2009.7.10.      정토사상의 이해와 실천 수행 / 성본 스님
10. 2009.7.24       죽음치유 : 자살예방교육 수강생 의식변화 / 오진탁
11. 2009.9.25       초기불교의 연기상의설 재검토 / 박경준
12. 2009.10.9       아나키즘의 현대적 조명 / 방영준
13. 2009.10.23     불설·비불설 논의에 대한 검토 / 마성 스님
14. 2009.11.13     진화론, 생명체, 그리고 연기적 삶 / 우희종
15. 2010.1.21       왜 자유주의인가? / 민경국
16. 2010.2.18       대승불교란 무엇인가? / 현응 스님
17. 2010.3.18       불교의 철학적 중요성 / 김형효
18. 2010.4.15       생명평화운동과 대승불교의 수행 / 도법 스님
19. 2010.5.19       시장자본주의 대안으로서 불교자본주의 / 윤성식
20. 2010.6.25       어느 불교적 기독교인이 본 불교 / 이찬수
21. 2010.7.15       천문학자가 본 불교 우주관 / 이시우
22. 2010.10.21     서구의 불교이해의 틀은 전환되고 있는가?   : 불교신학의 시도와 전망” / 이민용
23. 2010.11.18     이상적인 재가불교를 위한 제언 / 성태용
24. 2011.1.20       깨달음이 불교의 목적인가 / 홍사성
25. 2011.2.17.      고려초조대장경 천 년의 의의와 과제 / 오윤희
26. 2011.3.17       구제역과 무분별한 살처분의 시대,  불교생명윤리학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 허남결
27. 2011.4.21       채식주의를 넘어서 채식하기 / 고미송
28. 2011.5.19       누가 독도를 지킬 수 있을까, 시인인가 군인인가?  : 만해의 상무정신 계승론 / 허우성
29. 2011.6.16       동아시아 선불교와 여성, 그리고 소셜 네트워킹의 화두 / 조승미
30. 2011.7.21.      불교와 문학의 상즉상입(相卽相入)과 한국 불교시의 나아갈 길 / 이도흠
31. 2011.10.20     불교는 성적 욕망을 어떻게 보는가 / 조준호
32. 2011.11.17     종교평화 어떻게 읽을 것인가? / 백승권
33. 2012.1.19       초기경전에 나타나는 궁극 목표에 관한 고찰 / 임승택
34. 2012.2.16       업보윤회설, 그 오해와 진실 / 박경준
35. 2012.3.15       자비실천의 윤리교육적 접근 / 방영준
36. 2012.4.19       불교음악의 현재적 과제와 전망 / 윤소희
37. 2012.5.18       생활 속의 간화선 수행 / 월암 스님
38. 2012.6.21       불교에서 여성은 열등한가 / 이창숙
39. 2012.7.19       한국불교의 문제점과 과제 / 김영명
40. 2013.1.17       불교와 정치―정치발전과 불교의 기여 / 박세일
41. 2013.2.21       재가불교인의 세제불교(世諦佛敎) 원리 / 목정배
42. 2013.3.21       선과 뇌과학 / 이성동
43. 2013.4.25       불자의 상호이해와 평화실현을 위하여 / 이치노헤 스님
44. 2013.5.23       불교는 왜 인도에서 사라졌는가? / 조준호
45. 2013.6.20       그들은 천축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 김규현
46. 2013.7.18       미국 부처님은 몇살 입니까? / 명법 스님
47. 2013.10.17     불교와 심리학 / 권석만
48. 2013.11.21     유식불교의 명상수행―영상관법 / 인경 스님
49. 2014.1.16       힉스입자를 통해 본 불교의 세계관 / 양형진
50. 2014.2.20       그리스 인생학교에서 본 불교 / 조현현
51. 2014.3.20       쇼펜하우어, 니체 그리고 불교 / 박찬국
52. 2014.4.17       양지와 불성 / 정인재
53. 2014.5.22       종교로 보는 티베트 불교: 역사적 이해 / 이종복
54. 2014.6.19       융심리학과 불교사상 / 이죽내
55. 2014.7.17       불교와 주역 / 성태용
56. 2014.9. 18      프란치스코 교황과 한국천주교의 틈에 관한 이야기   / 이창익
57. 2014.10.23     세월호 앞에서 종교는 무엇인가? / 오강남
58. 2014.11.20     노자와 붓다, 무엇이 같고 다른가? / 최재목
59. 2015.1.14       불교로 푸는 진화론과 뇌과학 / 김성철
60. 2015.2.26       한국불교 정말 괜찮은가 ①수행 / 조명제
61. 2015.3.19       한국불교 정말 괜찮은가 ②포교 / 김응철
62. 2015.4.16       한국불교 정말 괜찮은가 ③사회적 역할 / 조성택

1. 들어가는 글

흔히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고 말한다. 불교인이든 아니든 이 표현을 상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깨달음이 궁극의 지향이 되면 당연히 깨닫기 위해서 수행이 필요하다는 전제가 강조된다. 또한 지금의 한국불교에는 수행문화의 전통이 온전히 살아 있다는 자부심을 자랑스럽게 내세우곤 한다. 심지어 현실의 종단은 희망이 없지만, 해마다 여름과 겨울 안거에 수천의 납자들이 참여하는 것을 보고 희망을 가진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과연 그렇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납자들이 화두 참구에 몰두한다고 하지만, 승가 사회에 별다른 울림이 보이지 않으며, 불자에게 그다지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 수행에 관심이 있는 이들도 마치 쇼핑하듯이 이런저런 수행문화에 관심을 갖거나 다른 종교를 기웃거리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불교계의 수행 중시와 달리 현실적인 모습이 어긋나는 현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한마디로 불교계의 현실은 수행문화의 전통이 제대로 보전되어 있다는 자부와 다른 상황을 그대로 보여준다. 길게 말할 필요도 없이 ‘수행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라는 주제 자체가 그렇지 못하다는 현실을 반증한다.  

그렇다면 지금의 수행문화가 지닌 문제가 무엇이며, 나아가 그 배경과 원인이 무엇이며, 바람직한 방향이 무엇인가를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제한된 지면이기에 이 글에서는 현재 한국불교의 수행을 대표하는 간화선(看話禪)에 대한 문제를 먼저 살펴보기로 한다. 간화선이 불교사에서 어떻게 등장한 것이며, 그 의미가 무엇인가를 살펴보고, 나아가 간화선이 초래한 문제점과 한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어 근대 이후 한국불교가 놓인 현실과 수행문화에 대한 새로운 방향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해 성찰해보기로 한다.  

2. 간화선의 사상사적 이해 문제 

선이 무엇인가를 물으면, 보통 사람들은 좌선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린다. 사전에도 대개 선종은 좌선에 의해 깨달음을 추구하는 종교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통념적인 이해와 달리 좌선은 통불교적인 수행이고, 나아가 불교에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명상수행은 어느 종교에나 찾아볼 수 있다. 오히려 중국에서 선종이 등장하였던 때에는 좌선이 불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남종선에서 두드러지게 보이지만, 실은 북종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북종의 선승들은 일체중생에게 본래적으로 불성이 갖추어져 있지만, 그것이 번뇌에 덮여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수행에 의해 번뇌를 씻으면 불성은 스스로 드러난다고 본 것이 북종선의 기조였다. 다시 말해 불성을 본래 갖추고 있으며, 그것을 드러내는 것에 이르기까지 계속적인 실천수행이 북종선의 중심이었다.

남종의 신회(神會)는 북종과 마찬가지로 불성을 본래 갖추고 있다는 주장을 부정하지 않았다. 신회는 마음은 본래 묘한 지(知)의 움직임을 갖추고 있고, 망념(妄念)에 의한 방해가 없으면 그대로 완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의식적, 의도적으로 초월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오히려 본래심의 작용으로부터 일탈한 행위이고, 망념이라고 보았다. 신회는 불성을 단계적인 수행을 한 후에 도달하는 목표가 아니라, 현실에 활동하고 있는 지의 작용이며, 직접적으로 체인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수행 부정의 사고는 후의 선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당대(唐代) 선을 대표하는 마조도일(馬祖道一)은 마음이 곧 부처[卽心是佛]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수행에 의해 미혹한 마음을 부처의 마음으로 전환하는 것도 아니라 일상의 있는 그대로의 마음이 도[平常心是道]라고 하였다. 수행이 필요 없고, 있는 그대로의 일상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사고는 그것에 수반하는 실천의 형태로서 현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그대로 이상적 상태로 간주하는 평상무사(平常無事)의 사상을 도출하였다.

한편, 마조 이후 선종의 특징은 문답을 통해서 수행자에게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문답이 이해 불가능한 것과 같은 양상을 드러낸 것은,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답이 질문자 자신의 내면에서 저절로 나오도록 하고자 한 의도가 깔려 있다. 그리하여 선의 사상이 이론으로 집성되는 형태가 아니라 개별적인 일회성의 문답으로 무수하게 기록되었고, 그것이 어록이라는 형태로 표현되고 전승되었다.

이와 같이 당대의 선문답이 이른바 수행의 현장에서 우발적으로 나타나는 일회성의 활발한 문답이었던 것에 비해 송대(宋代) 선문(禪門)에서는 선인의 문답이 공유의 고전, 곧 공안으로서 선택, 편집되어, 그것을 제재로서 참구하는 것이 수행의 중요한 항목이 되었다.

근래 오가와 타카시(小川隆)가 제시한 바와 같이 송대의 선은 사상, 실천의 면에서 본다면 공안선(公案禪)의 시대이며, 그것은 방법적으로 문자선(文字禪)과 간화선(看話禪)으로 구분된다. 문자선은 공안의 비평과 재해석을 통해 선리(禪理)를 탐구하고자 하는 것으로, 구체적으로는 원문답의 회답에 대해서 대안과 다른 해석[別解]을 생각하는 것[代語, 別語], 문답의 취지를 시로 읊는 것[頌古], 산문으로 논평을 더하는 것[拈古], 더욱이 그것들을 강설(講說)하는 것[評唱] 등이 그 주된 수단이다. 문자선은 북송 초의 분양선소(汾陽善昭)의 《분양송고(汾陽頌古)》에서 비롯되며, 그 정점에 이른 것이 설두중현(雪竇重顯)의 《설두송고(雪竇頌古)》와 그것에 대한 원오극근(圜悟克勤)의 강의록인 《벽암록(碧巖錄)》이었다.

이에 비해 간화선은 특정한 공안에 모든 의식을 집중시켜, 그 한계점에서 마음의 격발(激發), 대파(大破)를 통해 극적인 깨달음의 체험을 얻게 하는 방법이다. 모든 구도자가 실천할 수 있고, 또 그것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기대되는 개오(開悟)의 방법화는 원오의 제자인 대혜종고(大慧宗杲)에 의해 완성되었다. 아울러 간화선의 완성은 여러 가지 배경과 경위가 있지만, 《벽암록》의 평창 가운데 간화선으로 결실되는 싹이 생겨나게 되었다.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간화선과 공안선을 같은 것으로 보거나 엄밀하게 구분하지 않았다. 그러나 송대 선의 흐름과 양상을 고려하면 이러한 정의로 구분하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된다. 아울러 간화선은 북송 이래 오랫동안 유행하였던 문자선의 폐단이 드러나면서 그에 대한 비판과 실천적인 대응으로서 나타났던 것이다. 다시 말해 선종 각파에서 종지를 종합하고, 공안의 수집, 분류에 집중하고, 공안 비평이 선문 일반에서 유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활동은 방대하고 번쇄한 학문의 체계를 낳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선승들은 자기일대사(自己一大事)의 구명이라고 하는 본래 목표를 소홀히 하고 각파의 종지에 관한 지식적 학습에 열중하게 되었다.

이러한 풍조에 대한 비판이 북송 말 이후에 점차 확산되었다. 임제종 황룡파에서는 현실긍정적인 사상에 대한 반성의 움직임이 드러나는데, 진정극문(眞淨克文)의 무사선 비판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대혜종고는 ‘무자(無字)’ 공안을 통해 학인이 실제 깨닫도록 하는 간화선을 제시하였고, 남송 이후 간화선이 선종계를 석권하게 되었다. 따라서 송대의 선은 문답의 선이 공안의 선으로 전환되고, 그것이 방법화되어 간화선이 되었다고 하겠다.

간화선은 동아시아 불교계에 폭넓은 영향을 미쳤으며, 사대부 사회에도 적지 않은 사상적 자극을 주었다. 그러나 간화선도 완성 이후에 그 자체가 갖는 한계를 드러내었으며, 나아가 주자학의 완성과 함께 사상계의 주도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과 문제를 간단하게 언급할 수 없지만,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한계를 지적할 수 있다.   

본래 선은 불교의 경전이나 교학의 전통을 초월하여 인간 자체의 근본적 존재 방식을 지금 이 자리의 문제로 삼는다. 선이 불교 이외의 학파나 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이유도 선이 교학 이전에 인간의 본분에 곧바로 들어가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선은 개별 사물의 특수한 양식·의미·내실을 사회적·역사적 무게로 구명하지 않고, 오로지 본근의 획득만을 중시한다. 아무리 깨달음을 추구하고, 설사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복잡하고 다층적인 현실의 사태에 적절히 응할 수 있는 태세는 쉽게 갖추어질 수 없다. 깨달음을 얻기 전이나 얻은 후나 마찬가지로 객관적 타당성을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선에서 말하는 마음이란 일체를 나게 하는 절대 주체로서 인간을 본래적 원점에서 파악한다. 그렇지만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서 공동생활의 장을 갖고, 그것이 유지되어 가기 위해서는 자연계의 질서와 같은 가족·촌락·국가·사회 등에서도 각각 일정의 이법이 있게 마련이고, 이 이법의 인식과 실천을 통해서만 공동체의 존속이 가능하고, 그 성원으로서 존재목적을 달성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런데 선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역시 한 덩어리 바위와 같은 튼튼함, 때리면 울리는 명쾌성은 인정되어도, 그것으로부터 직접 역사적 현실에 참여해야 하는 방법은 찾아내기 어렵다. 왜냐하면 선의 깨달음에는 역사적 형성 작용을 영위할 수 있는 문화적 소재와 사회적 이법의 검토가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은 오히려 깨달음 자체를 세속적 얽매임으로서 소외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의 폐해를 발생시키는 근본 원인은 본래계로부터 현실계로 떨어져 있는 인간 실상의 궁극을 살피지 못하고, 깨달음 지상주의에 의해 망령된 무리를 낳을 위험성을 잉태하고 있으며 윤리적 규범을 갖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송대 사상사에서 이러한 선불교의 한계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사상체계를 형성한 것이 주자학이었다. 주자학은 선사상을 중심으로 한 불교와의 대결을 통해 일정하게 사상적 영향을 받기도 하고, 나아가 그러한 과정을 통해 새로운 인간관, 세계관을 형성하면서, 결국 선이 가진 현실적, 사상적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사상체계를 완성하였다.

이러한 흐름은 한국 사상사에서도 거의 그대로 재현되었다. 주지하듯이 13세기에 간화선이 수용되었고, 14세기에 이르면 선종이 명실상부하게 사상계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러나 14세기 후반에는 고려 선종계뿐만 아니라 사대부 계층까지 간화선이 성행됨으로써 불교계의 주도권을 장악하지만, 폐단과 한계가 드러나게 되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간화선의 정형화라는 문제라고 하겠다. 나아가 고려불교는 간화선 일변도로 흐르게 되었고, 임제선(臨濟禪) 법통설(法統說)과 유심정토설(唯心淨土說)을 강조하는 선종 절대화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경향은 고려 말에 나타난 불교의 사회적, 사상적 기능 축소와, 불교의 사상적인 한계와 관련된다. 나아가 불교가 새로운 사상적인 발전을 모색할 수 없는 한계를 드러내면서 당시 주자학이 제기하던 불교 비판론에 현실적인 대응을 할 수 없었다. 이러한 불교계 내부의 사상적 한계나 현실적 기반의 약화는 결국 불교가 사회를 주도할 수 있는 사상체계로서 위치를 스스로 잃어버리고 주자학으로 전환되어가는 시대적 조류에 대응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고려 말에 불교가 몰락한 이유는 근본적으로 불교가 간화선을 정점으로 그 이상의 발전이 없고, 간화선 일변도의 선종 절대화 경향이 심화되면서 불교의 이론적, 실천적 발전이 이루어지지 못한 데에 기인한다고 하겠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결과는 동아시아 불교문화권의 전체적인 흐름이라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각국의 다양한 역사적, 사회적 구조의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당시 동아시아 전체는 근세사회로 전환되는 단계에서 주자학 중심의 유교사회로 진행된 것이 사실이다. 아울러 그러한 거대한 역사적 흐름 속에서 불교는 사상계의 중심에서 사라지고, 단순히 종교적, 신앙적 의미만을 가진 채 몰락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3. 수행문화의 현실과 새로운 방향에 대한 성찰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불교는 전통적인 교학을 통해서 전해진 것보다는 근대불교학의 성과를 통해서 형성된 것이 적지 않다. 예를 들어 불교가 다른 종교에 비해 과학적, 철학적, 이성적이라는 표현에서 이러한 인식이 잘 드러난다. 이러한 표현은 용어에서 드러나듯이 근대를 상징하는 말이며, 전근대의 불교에서 거론되지 않던 것이다.

그런데 근대불교학은 19세기에 유럽이 식민지 지배를 통해 구축된 지식정보를 바탕으로 형성된 학문이다. 아울러 유럽의 근대불교학은 문헌학적 불교학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러한 근대불교학은 일본불교가 근대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유학생을 통하여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불교계는 신불분리(神佛分離)와 폐불훼석(廢佛毁釋)을 통해 국가의 탄압을 받았다. 일본불교는 메이지 정부와 타협하면서 근대불교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불교 근대화를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일본불교는 한 세대를 지나 근대불교학의 형성에 성공하였지만, 문헌학적 불교학이라는 성격은 현실적인 한계를 노출하게 되었다. 그것은 불교학과 불교계의 분리라고 하는 결과와 관련된다. 아카데미즘 불교학은 연구대상을 텍스트에만 두고 역사적 현실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으므로, 현실적으로 무력한 존재로 전락하였다. 불교계는 종파의 개조와 전통적 교의에만 관심을 갖게 되어, 아카데미즘 불교학에 무관심하였다. 더욱이 근대 이후 일본의 불교계가 국가와 타협하고 권력과 결탁하면서 식민지 지배를 지원하는 방향이나 전쟁에 찬성하는 등 국가불교로의 길로 나아갔다.

이러한 한계나 문제는 일본을 통해 근대불교를 수용하면서 대응을 모색하였던 한국불교에도 이어진다. 근대 이행기에 한국불교는 국가권력의 억압과 수탈로 인해 운신의 폭이 넓지도 않았고, 그 방향성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그러한 상황에서도 새로운 방향이 모색되고 있었지만, 여전히 전근대적인 성향이 강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따라서 구한말 이후 일본강점기 때까지의 한국불교는 전근대적인 경향과 일본불교의 영향을 통해 근대불교로 지향한 경향이 함께 존재하고 있었다.

전자는 경허로 대표되는 선불교의 흐름을 들 수 있다. 경허의 경우에서 잘 드러나듯이 당시 선불교는 고려 말에 정착된 간화선의 전통이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이어져 온 것이었다. 한마디로 전통의 계승 이외에는 새로운 사상이 드러나지도 않으며, 시대적 고민을 담은 현실인식이 보이지도 않는다.    

후자는 개항 이후 일본불교의 자극이 있었지만, 1920년대에 본격적으로 전개된 유학승의 일본 유학을 통해 일본 근대불교의 영향을 받으면서 다양한 변화가 나타나게 되었다. 근대불교의 영향은 승려들에게 염세관 위주의 불교교육에서 적극적인 구세주의, 즉 실천적인 방향으로 전환되는 등 종래의 소극적, 보수적인 불교에서 진보적, 적극적인 사회 실천을 모색하는 방향도 보인다. 이러한 인식은 종교와 사회와의 관계나, 과학과 종교의 문제 등 다양한 방면에 걸쳐 논의가 이루어지는 등 근대 사회에서 제기되는 다양한 문제에 대한 관심과 대응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일본불교를 경유한 근대불교의 흐름은 유학승을 중심으로 진행되었고, 이들은 결코 식민지 불교의 주류를 형성하지는 못하였다. 전통적인 불교가 가진 모순과 함께 식민지 침략과 지배라는 구도는 결코 그들에게 우호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더욱이 1930년대 이후 파시즘이 대두하고 세계대전으로 나아가는 시대 상황에서 근대불교의 형성은 아포리아였던 것이다.

결국, 이들 대부분은 일제 협력의 길로 나아갔고, 근대불교의 모색은 좌절되었다. 더욱이 해방 이후의 혼란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한국불교는 심각한 인적, 물적 피해를 입게 되었다. 나아가 1950년대에 이승만 정권의 정치적 이용 대상이 되어 일어난 이른바 󰡐비구·대처’ 분쟁이 지속되면서 불교의 사회적 위상은 끝없이 추락하였다.

무엇보다도 근대불교를 모색하고자 하였던 이들이 종단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이들의 흐름은 대학에 부분적으로 계승되었지만, 아직까지 제대로 학문적 평가의 대상이 되지도 못한 실정이다. 나아가 전근대적인 불교만이 살아남아 지금까지 전통불교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것은 명백하게 근대 이후 모색되었던 불교의 문화적 자산을 파기하고, 오히려 과거로 돌아가는 퇴행적인 결과를 낳았다.

현재 한국불교의 자화상은 그러한 모순과 질곡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1960년대 이후 한국사회가 급격한 사회 변화를 겪을 때에 불교는 제대로 대응할 수도 없었고, 단지 전통문화의 하나로서 사라져야 할 대상으로 전락하였다. 국가의 전통문화유산 보존, 계승이라는 차원에서 사원은 불교문화유산의 관리라는 틀에 가두어져 그 생명력을 잃고 박물관의 박제화된 유물처럼 존재하였다.

그러므로 현재 한국불교가 정확한 자기 진단과 함께 미래지향적인 전망을 내놓기 위해서는 결국 과거의 유산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근대 이후 불교의 역사가 가진 한계와 모순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성찰하는 데서 출발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근래 간화선을 둘러싼 논의는 그러한 문제에 대한 철저한 자기 진단이나 성찰 없이 단순히 교단적인 입장의 옹호라든지 전통적인 맥락에 그치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전통적이고 형해화된 불교, 특히 신비적, 초월적 불교에 불과한 형태나 그 연장에 있는 사회인식으로서는 현실 세계를 선도할 수도 없고, 미래지향적인 대안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는 단순히 거대담론의 차원에서 제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수행의 문제나 이해 방향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흔히 불교인들은 수행 문제를 개인 차원의 문제로 환원하는 경향이 강하다. 개인의 실존적인 고민은 개별적인 경우도 있지만, 사회 현실과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교는 이에 대해 눈을 감거나 특별한 문제의식도 없이 개인의 구원을 논하고, 초월적인 방식인 전통적인 수행을 제시하는 데에 그치고 있다. 이러한 문제나 한계는 승속을 막론하고 불교인이 지닌 인식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즉 불교적 진리는 역사와 사회의 규정으로부터 자유로운, 즉 모든 시대의 인간에 공통하여 적용되는 내면적 진리라고 보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의 초월성은 불교적 진리가 역사의 바깥에 존재하고 있어서 그 규정을 받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에 특징이 있다. 이는 불교가 사회문제나 사회적 대책을 취급할 때 종종 빠지기 쉬운 오류이다. 즉 불교는 개인의 내면적 자각의 문제이며, 모든 개인이 자각하여 자기 자신의 내면에 확립하게 되면, 그 총체인 사회에는 저절로 평화와 조화가 찾아와 증오나 분쟁이 전부 해소되어버린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사고는 특히 선불교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논리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다.

첫째, 우선 인간적인 삶의 내면적 사실에 대한 논증을 차원을 달리하는 대상적 세계(자연, 사회)까지 부당하게 확대, 적용하는 오류이다. 사회문제와 그 대책은 사회과학적 인식에 따라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인은 사회문제를 종교로 해결하려 하고, 그럴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개인의 주체적·내면적 자각이 있어도, 그 결과로 사회나 세계가 쉽게 변화하지는 않는다.

둘째, 사회는 개인의 집합으로 생각하지만, 동시에 그들 개개인으로부터 상대적으로 독립하여 존재하는 하나의 객관적인 실재이며, 또한 역으로 개개인을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불교적 세계관의 확립만으로 복잡하고 다양한 사회를 해석하거나 규정하는 것은 더욱 위험할 수 있다. 종종 불교인이 보이는 사회인식의 오류나 문제점이 드러나는 근본적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개인의 내면적 자각의 성취나 완성을 위한 무한한 노력만큼 올바른 역사적·사회적 인식과 실천도 요구되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와 사회에 대한 불교의 대응방식에 커다란 전환이 요구된다. 그것은 사회의 현실적인 고와 그 근원에 새로이 눈을 돌리는 가운데 설정되는 구체적인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종래 주체의 내면에서의 심리적 전환을 객관적인 세계의 변혁과 결부시키고 그에 따라 객관적 세계의 변혁을 망각·포기하여 기꺼이 현실의 고정화와 개인의 순응을 호소한 현실순응적인 이데올로기로서 존재한 것이 불교의 자화상이었다.
그러므로 수행문화에 대한 이해 문제는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이나 상투적인 틀에서 접근할 문제가 아니다. 나아가 불교의 수행론은 언제, 어디서나 시대적 과제에 대응하면서 새롭게 제시되고 발전하는 것이며, 불교 사상의 새로운 모색과 깊이 관련된다. 이러한 시각에서 바라보면 지금의 한국불교의 수행문화는 전통의 자부만으로는 설득력을 갖기 어려우며, 오늘날 직면하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에도 대응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지금의 사회는 과거와 달리 모든 사회 변화가 압축적이고, 복합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급격한 사회 변화에 모든 종교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 불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 더욱 열악한 상황에 놓여 있다.      

예를 들어 1990년대 이후에 생태, 생명, 여성주의 등 다양한 현실 담론이 제시되고 있지만, 불교는 그에 대한 응답을 제대로 못 하고 있다. 원론적인 차원이나 총론적인 담론을 확대해서 마치 불교의 세계관에는 본래부터 그러한 이론이 내재되어 있다는 식이나 환원론적인 입장에 머무르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근대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이해도 빈곤하며, 대응할 만한 자기 인식이 없다고 하겠다. 단지 사회인식, 현실인식의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불교가 새로운 시대상황에 대한 이론과 방향의 제시가 없으면 몰락의 길로 나아갈 수도 있다. 사회, 현실에 대한 인식과 불교의 이론적 모색, 발전이 별개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근대 이후 불교가 낡은 틀에만 갇힌 채 새로운 모색이 불가능했던 이유로는 그러한 시대적 유산과 함께 새로운 사상이 구축되지 못한 점, 기본적 인식의 한계 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한계나 모순을 탈각하고 불교가 대응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모색과 접근이 요구되는 게 아닐까. 그저 전근대적인 불교, 그것도 이미 주자학에 의해 비판받고 몰락한 선불교만을 유일 절대의 사상으로 부각시키고자 하는 것은 한마디로 시대착오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나아가 탈근대의 전망까지 불교가 담당할 수 있으려면, 단순히 기존 이론과의 유사성을 강조하거나 원론적인 세계관의 제시가 아닌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대응논리까지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만약 간화선을 한국불교의 정통으로서, 현재만이 아니라 미래사회까지 담보할 수 있는 사상체계라고 주장하려면 이러한 의문에 대한 해답이 제시되어야 하지 않을까.

4. 나오는 글
  
모든 종교는 초월적인 세계를 지향한다. 성과 속의 이분법에 따르면 현실 세계가 모순과 질곡으로 가득 찬 고통스러운 세계라면, 그와 달리 종교가 지향하는 이상적인 세계는 영원하고 성스러운 세계이다. 그러므로 모든 종교에서는 현실 세계에 대한 관심이나 이해보다 초월적인 세계에 대한 관심이 앞서는 게 일반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표면적인 구도와 달리 종교가 현실에 대한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현실의 고통과 모순이 극대화될수록 종교의 가치가 빛을 내게 되며, 그것은 종교가 제시하는 이상적인 세계란 결국 인간 구원(또는 해방)이라는 방향과 무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한 구원이 내세적이고 관념적이라는 비판을 받더라도, 종교가 추구하는 세계가 인간 구원이라는 사실이야말로 종교가 결코 현실사회와 무관할 수 없다는 방증이 되는 것이다.   

불교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한다. 얼핏 보면 불교는 다른 종교보다도 세속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불교가 제시하는 연기의 세계관이 허무적인 논리가 아니듯이, 불교에도 개인의 구원이나 사회적인 구원이 활발하게 제시된 것은 원시불교 이후 불교의 역사가 웅변하고 있다.

그럼에도, 현재의 불교는 출세간적인 이미지가 강하며, 현실과는 담을 쌓고 지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한 문제의 근원에 간화선 위주의 수행문화가 가로놓여 있다는 것도 부정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불교는 전통 담론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현실적인 한계를 인정하고 새로운 사상과 이론의 모색에 나서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만 이러한 인식조차 불교인의 통념적인 이해로 인해 내부에서 거부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불교라고 하면 과거에 이미 창조적인 활동은 완결하고, 그 사상적 요소는 전부 나와서 오늘날 이루어야 하는 것은 그것을 선택하고, 사용할 수 있는 것을 사용하면 좋다고 하는 발상이다. 나아가 전통의 묵수가 지나쳐 오로지 지금 전해져 오는 것만을 정통으로 간주하는 자세도 바꾸기 힘든 지경이다. 과연 불교는 오랜 역사의 무게에 짓눌려 하나의 전통이나 문화유산만으로 간주되어도 좋을 것인가.

긴 역사 속에서 존재한 불교는 끊임없는 자기 부정을 통하여 오히려 이론과 실천의 발전을 이룩한 사상체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그러한 장점과 긍정적인 요소는 잊어버리고 마지막 전통의 자산만을 유일무이한 진리인 것처럼 고집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게 지금의 자화상이 아닐까. 무엇보다도 전체 불교의 역사에서 신앙과 종교라는 형태로 온존되고 있더라도, 역사와 사회의 중심에서 사라졌다는 기본적인 사실에서 문제 인식이 시작되어야 하지 않을까.

불교만큼 풍부한 콘텐츠와 지적 자산을 가진 종교가 많지 않다. 하지만, 그러한 전통만을 자부하기에는 현실의 사회는 유사 이래 엄청난 변화를 맞이하고 있으며, 그에 대응하고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낡은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이 불교의 현실이다. 그러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면서 냉정한 자기 진단과 새로운 방향 모색이 필요하지 않을까.

막연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실은 그러한 방향과 방법은 이미 불교의 역사에서 다양하게 제시된 바가 있다. 가령 불교를 전통적인 어법으로 표현한다면 학도(學道)와 행도(行道)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행도라는 실천과 수행은 반드시 학도라는 이론의 정립과 발전을 전제로 하였다. 간화선이라는 실천방법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좁은 틀의 수행방법론에 대한 논의만이 아닌 현실의 불교가 요구받고 있는 문제에 대한 대안과 해답을 제시하기 위한 길은 그러한 문제 인식에서 출발한다면 의외로 쉬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불교든 간화선이든 본래 하나의 고정된 틀을 고집하지 않는 열린 사상이자 종교라는 기본적인 전제를 생각한다면, 그것만을 고집할 이유도 없고, 낡은 틀로 이해하는 방식에서도 탈피하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만약 그럴 필요가 없다고 고집한다면 앞서 논의한 바와 같은 문제 인식과 담론에 간화선이 모두 대답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


조명제 / 신라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부산대학교 사학과, 동 대학원 졸업(박사). 일본 고마자와대학 불교학부 박사후과정, 교토대학 연구원 역임. 주요 논저로 〈근대불교의 지향과 굴절〉 〈백암성총의 불전 편찬과 사상적 경향〉 〈선문염송집의 편찬과 종문통요집〉 등의 논문과 《고려 후기 간화선 연구》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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