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렸을 때 당숙의 별명은 목탁교장이었다. 여름이나 겨울 방학이 되어 다니러 오시면 동네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는데, 나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은근히 그걸 자랑스러워했다. 

당시 중학교 교장이기도 했지만, 건봉사 봉명학교 출신으로 일본도 다녀오고 동국대를 나온 당숙을, 당시 동국대가 불교대학으로 많이 알려졌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만도 아닌 게 내가 커서 알게 된 ‘목탁’의 속은 훨씬 깊었다. 집안의 종조부 중에 출가한 분이 한 분 계셨다. 호적을 보면 당숙은 그 출가한 종조부의 양자로 입적되어 있었다. 그리고 속초 시내에 있는 포교당에서 종조부를 모시고 살았고 거기다가 실제 당숙의 두상은 목탁처럼 이마가 상당히 벗겨져 있었으므로 목탁이라는 별명이 그렇게 쉽게 붙여진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포교당에서는 결혼식도 더러 하였고 재가 들면 나는 그곳에서 며칠씩 자기도 했다. 향불이 타오르는 고요한 법당에서 자다 깨면 금빛 부처님의 찢어진 눈꼬리가 기괴하고 무서웠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당숙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그러니까 나와는 몇 살 차이 나지 않는 사촌 동생이었다. 일제의 학병으로 끌려간 당숙이 일본이 패망하고도 돌아오지 않자 전사한 것으로 알고 집안에서는 숙모를 놓아주어 개가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2, 3년이 지나 당숙은 살아서 귀국하였고 이후 새로 맞은 숙모와 사이에서 얻은 귀한 자식이었다. 개가한 숙모는 그 후에도 우리 집에 상당히 오래 드나들었다. 그러나 사촌 동생은 중학교 입학한 지 얼마 안 돼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당숙은 모든 게 업보라고 했다. 내가 나중에 알게 된 당신의 업은 이러했다. 종전됐는지도 모른 채 이른바 남양군도의 어느 무인도에 고립되었던 패잔병들은 원숭이 사냥이라는 이름으로 식량을 조달했는데 그 원숭이라는 게 사실은 주려 쓰러진 동료 병사들이었다는 것이다. 인간으로서는 차마 씻지 못할 그런 죄업으로 인하여 당신의 자식이 비명횡사했다는 거였다.

당시 우리는 선친의 3형제 외에 숙부가 한 분 더 계셨다. 어떤 인연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숙부는 조부 때부터 아버지 형제와 의형제를 맺고 한집안이나 다름없이 지냈다. 명절이나 기제사에는 온 가족이 왕래하고는 했다. 그 숙부는 당시 화진포 삼불사에 계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숙부를 ‘절 작은아버지’라고 불렀다. 얼굴이 훤하고 키가 큰 대처승이었다. 늘 중절모를 쓰고 다니셨다. 조부나 조모의 제삿날 선친과 절 작은아버지와 목탁교장이 제사를 마치고 나누는 음복 후의 조용한 대담이며 다음날 새벽, 뒤란 문을 활짝 열어놓고 세 사람이 함께하는 독경은 어린 나에게 특별한 경험이었고, 그들이 마치 다른 세상의 사람들처럼 존경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자식을 그렇게 잃은 충격으로 당숙은 학교를 일 년여 쉬고 절 작은아버지의 삼불사에 들어가 안정하며 비통함을 달래기도 했으나 수년이 지나 끝내는 중풍을 얻고야 말았다. 어느 날 운동장 조회를 하다가 강단에서 쓰러졌던 것이다. 그렇게 불행은 연속으로 거침없이 밀려들었다.

당시 농촌에서는 재산증식의 하나로 소 없는 집에 송아지를 사주어 소를 늘리는 방법이 있었다. 송아지가 어미 소가 되어 새기를 낳으면 새끼는 기른 집에 주고 어미 소는 돌려받는 거였다. 오랫동안 선친이 관리한 당숙의 소는 마릿수가 상당했다. 당숙은 병마와 싸우며 나중에는 그 소들마저 모두 처분했으나 중풍은 원래 낫는 병이 아니었다. 건강과 재산을 함께 잃은 당숙은 그 후 문학전집이나 백과사전을 팔러 다녔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양말이나 은단 같은 걸 가지고 다니기도 했다. 내가 일하던 직장에 오시면 들어오시지는 않고 사람을 시켜 불러내셨다. 그러면 나는 인근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대접하고는 했다. 우리 집은 물론 멀고 가까운 집안이 당숙의 보살핌이나 경제적 도움을 받지 않은 집이 거의 없었지만, 병든 당숙의 말년은 외롭고 허망했다. 나는 훗날 당숙에 대한 시를 썼다. 당숙에게 죄송해서 시집으로 묶을 때는 당숙을 중학교 때 담임선생님으로 바꾸어 싣기도 한 작품이다.

나 젊어 직장 다닐 때/ 우리 작은 아버지 이따금씩 가방 메고 오셨지// 중학교 교장을 하셨는데 풍을 맞고/ 있는 재산 다 날리고는 커다란 가방 메고 다니셨지// 처음에는 문학전집이나 백과사전을 가지고 다니시다가/ 몇 해 지나면서 양말이나 은단을/ 나중에는 빈 가방 메고 다니셨지// 한쪽 발을 끌며 세상 걸어 다니셨지// 비 오다 그치고/ 여기저기 전식불이 들어오는 저녁/ 커다란 가방 메고 가는 사람 보니/ 우리 작은 아버지 생각난다.
— 졸시 〈가방 멘 사람〉

당숙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에는 일본불교인 창가학회에 깊이 빠져 있었다. 불편한 몸으로 두꺼운 방석에 앉아 연신 허리를 구부려 절을 하며 주문을 외셨다. 당숙은 이렇게 지성으로 하면 어떠한 병도 낫는다고 확신에 차 말씀하시고는 했다. 어쨌든 당숙은 동방요배를 하며 창가학회의 주문인 “남묘호렌게쿄”를 일심으로 부르다가 생을 마쳤다.

나는 나의 자랑이었던 당숙 목탁교장이 일생 모시던 종조부의 부처님이나 대자대비하신 관세음보살을 다 버리고 왜 머나먼 일본 부처에게 희망을 걸었는지 아직도 궁금하기만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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