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님은 갔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헤치고 차마……” 헤아려 보니 40년 전의 기억이다. 송욱 교수는 이 시를 색과 공의 변증으로 풀어나갔다. 가령 ‘황금의 꽃’은 색(色)을 상징하고,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견성(見性)의 순간을 읊었다는 것.

국어 선생님께 물었다. “색즉시공이 무엇입니까?” 아마도 세속적 가치가 허망하다는 뜻을 피력하셨던 것 같다. 잘 납득이 되지 않았다. “색은 물질이라면서요?” 교무실까지 찾아와 괴롭히는 내가 성가셨는지, 손을 내저었다. “도서관 가서 불교책 읽어봐라.” 구석진 한편에 있던 《묘법연화경》이 선명하다. 위압적인 굵은 한문 글자들, 안타깝게도 그것들은 외계의 문자였으니, 울울한 마음으로 길을 되짚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때로 문장 하나와 만나기 위해서 먼 길을 돌아가고, 글자 하나를 새기기 위해서 수십 년이 걸리기도 한다. 불교의 문자들이 꼭 그렇다. 한문이나 산스크리트라는 낯선 언어 탓만은 아닐 것이다. 일상적 삶과 그 문법이 경전이 고취하고자 하는 진실과 너무 멀리(?) 있기에 그럴 것이다. 머리로 겨우 가늠했더라도, 그 진실을 살아가자면 그보다 더 먼 길이 앞에 놓여 있다. 역시 말은 쉽지만, 행동은 어렵다. 실체는 행위이며, 말은 그 장식일 뿐이다. 말은 바람결에 지나가지만, 오직 행동만이 남아 사람들을 울린다.

2.

이 구설심행(口說心行)의 길이 멀고 지루하다는 불평도 있겠다. 지식이 오히려 체험을 방해하리라고 겁주기도 한다. 그래서 직접 화두와 대면을 권한다. 어디든 길이 아니겠는가. 각자의 근기를 따를 일이다.

현대의 근기에는 첫 번째 길이 더 너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육조혜능, 선의 실질적 창시자께서 아이로니컬하게도 이 고전적(?) 지식의 길을 고취했다면 놀랄지도 모르겠다.

그는 경전을 읽지 말라고 말리지는 않는다. 평생 《법화경》을 읽어왔다는 어느 학승을 향해, “그 근본 취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법화경》에 끌려다니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을 뿐이다. 
그의 독자적 교판(?)을 소개한다. 《육조단경》에 뚜렷이 있는데 별로 눈여겨보는 사람이 없는 듯하다. 소승과 대승에 대한 전통적 논의는 잊으라. 

師曰, 汝觀自本心莫著外法相. 法無四乘, 人心自有等差. 見聞轉誦是小乘, 悟法解義是中乘, 依法修行是大乘. 萬法盡通, 萬法具備, 一切不染, 離諸法相, 一無所得, 名最上乘. 乘是行義, 不在口爭, 汝須自修, 莫問吾也.(《六祖壇經》)

요컨대 소승(小乘)은 아직 문자의 숲에서 헤매는 사람이고, 대승(大乘)은 바로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사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 사이에 중승(中乘)을 끼워둔 것에 걸음을 멈추어야 한다. 중승이란 이를테면 경전의 문자, 그 취지를 대강 알아챈 사람을 가리킨다. 마지막 최상승(最上乘)은 그런 인위적 노력이 필요없는, 최종적 휴식[休歇處]을 얻은 한가한 도인이다.

아, 이 넷은 물론 서로 다른 ‘근기’를 짚은 것이다. 그렇지만 자세히 보자. 이 네 구분은 불도에 이르는 ‘과정’ 혹은 상승의 ‘단계’를 말하고 있지 아니한가. 틀림없다. 그러고 보니, 이 진행은 불교의 설계도에 해당하는 《대승기신론》이 제창한 신해행증(信解行證)의 과정과 부절처럼 꼭 닮아 있다.

다른 지식이나 기술과 매한가지로 이해가 우선이다. 경전의 낯선 문자를 끌어안고 씨름하지 않으면 불도에 어떻게 입문할 것인가. 까막 경전은 누군가의 탄식처럼 다만 ‘빨래판’일 뿐이다. 또한 그 이해가 행(行)으로 사무치지 않으면, 그 이해는 다만 혀 위에서 구르고, 논쟁의 거리나 제공하고 말 것이다.

3.

오늘 여기, 불교의 활로는 ‘지식’이 쥐고 있다. 안다, “말은 쉽지만 행동은 어렵다.” 그러나 행동은 생각의 결실 아닌가. 생각이 현명하면 행동이 그 인도를 따라갈 것이다. 초기불교에서부터 선불교에 이르기까지 팔정도, 삼학, 오력(五力)에서 육바라밀까지 이 기획의 성공은 지혜가 키를 쥐고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교학의 부활을 강조하는 ‘지식 불교’를 혜능의 권위를 빌려, ‘중승 불교’라 간판 걸어도 좋겠다.

옛 교학 그대로를 답습하자는 것은 아니다. 오랜 세월, 각 지역에 퍼진 불교는 적응과 체화 과정에서 수많은 분야와 주제를 개발시켰다. 그 위용은 어지러울 정도이다. 명심하자. 삼장의 모든 지식이 동등한 자격과 가치를 갖는 것은 아니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할지, 무엇을 개발하고, 무엇을 비판할지를 가늠하는 안목이 절실하다. 그래서 불교사가 전개되었다.

답습이 아니라 창조가 돌파구다. ‘전망’을 잃을 때, 사실들이 이해를 대신하고, 지식은 단편으로 쪼개져 ‘지혜’로 거듭나지 못한다. 장악이 부재할 때, 혜능의 우려대로, ‘불교의 위용’은 거꾸로 우리 발목을 잡을지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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