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현대 한국불교 10대 논쟁

1. 들어가는 말 : 논쟁의 개요와 전개 과정

이찬훈
인제대 인문학부 교수

오늘날 우리의 시대와 사회 문화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본주의이다. 자본주의는 경제 영역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문화 전반을 규정하고 모든 생활 영역에 침투하여 우리의 삶을 총체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중생들의 삶을 고통에서 구하고 행복으로 이끌려고 하는 것이 불교의 이념인 이상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어떠한 문제점을 안고 있고 고통을 겪고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가는 불교의 중요한 관심사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동안 우리나라를 포함한 세계 각국의 불교계에서는 자본주의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되어 왔지만 그것이 우리나라 대중들의 관심을 끌고 그에 대한 불교계의 적극적 대응을 이끌어냈다고 하기는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불교평론》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불교와 자본주의 논쟁’은 자본주의에 대한 불교적 관점과 대응의 문제를 대중들에게 환기시키고 앞으로 더 활발한 논의가 펼쳐질 수 있는 장을 열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동안 《불교평론》에는 불교적 관점에서 자본주의에 관해 논한 글들이 간간이 발표되어 왔지만, ‘불교와 자본주의 논쟁’이 본격적으로 벌어지게 된 것은 2010년 봄 《불교평론》 42호에서 민경국 교수(이하에서는 모든 저자의 이름만을 표기하기로 함)가 〈불교 사회철학의 문명 비판에 대한 자유주의적 성찰〉이라는 논문을 통해 그 이전에 《불교평론》을 통해 제시되었던 자본주의(현대문명)에 대한 ‘불교사회철학’의 관점을 비판하면서부터였다. 민경국은 그 대표자로 박경준, 이도흠, 박병기를 들고 이들의 글이 ‘자유주의(자본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취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비판하고 자유주의를 옹호하였다. 이후 이러한 문제 제기를 둘러싸고 당사자 중의 한 사람인 박병기와 민경국이 《불교평론》을 통해 서로를 비판하고 자신들의 입장을 밝히면서 자본주의에 관한 논쟁을 벌였다.

필자는 2011년 겨울 《불교평론》 49호의 〈현대 자본주의 사회와 문명에 관한 불교적 관점〉이라는 글을 통해 이 논쟁의 요지를 정리하고 필자 나름의 견해를 밝힌 바 있다. 그리고 그 후 다시 《불교평론》의 ‘불교의 눈으로 자본주의를 말한다’는 2014년 가을호 특집에 여러 학자가 참여하여 불교와 자본주의에 관한 논의를 다방면으로 확대시킨 바 있다.

이 글은 그동안 벌어진 ‘불교와 자본주의 논쟁’의 주요 쟁점이나 논쟁의 의미, 앞으로의 과제 등에 대해 정리해 보려는 것이다. 불교와 자본주의에 관한 논의에는 여러 사람이 참여하면서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었기 때문에, 시간적 선후관계에 따라 일관된 어떤 흐름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글이 발표된 시간 순서에 상관없이 필자가 ‘자본주의에 대한 불교적 관점’을 이해하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논리적 순서에 따라 그동안 제시된 다양한 의견들을 정리하고 그 의미와 앞으로의 과제 등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밝히고자 한다.

2. 자본주의에 대한 불교적 대응
: 불교와 자본주의 논쟁의 주요 쟁점들

불교적 관점에서 자본주의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는 불교의 정신과 교리에 대한 해석이나 자본주의에 대한 평가 등에 따라 다양한 입장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원칙론적 얘기를 다시 거론한 것은 《불교평론》 59호에 발표된 유승무의 글이다. 그 요지는 자본주의에 대한 불교의 입장을 4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첫째는 전통적인 불교의 원리(마음 버릇)에 따르면서 자본주의를 맹목적으로 인정하고 추수하는 견해, 둘째는 전통적인 불교의 원리에 입각하면서도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그 대안을 모색하는 견해, 셋째는 불교의 전통적인 원리를 수정하거나 적극적으로 해석하면서 자본주의를 옹호하고 추수하는 견해, 넷째는 불교의 전통적인 원리를 수정하거나 적극적으로 재해석하면서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견해이다. 적어도 이 글에서 유승무는 불교가 자본주의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가능성은 모두 열려 있다고 주장하면서, 불교와 자본주의의 만남은 자본주의를 옹호하면서 자본주의의 발전을 추구하는 쪽으로 나아갈 수도 있고, 반대로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그 대안을 모색하는 길로 나아갈 수도 있다는 원론적인 지적만을 하고 있을 뿐이다.

‘불교와 자본주의 논쟁’ 과정에서 자본주의를 적극적으로 옹호한 불교학자는 없었다. 자본주의를 적극적으로 옹호한 유일한 사람은 자유주의의 신봉자 민경국이었다. 민경국의 주장은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을 부정하고 제한할 필요가 없으며 자유시장에 맡겨두기만 한다면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여 사회 전체에 이득을 가져다준다는 애덤 스미스 이후 전해져오는 자유주의의 판에 박힌 주장으로부터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이런 관점에 서서 민경국은 불교사회철학자들이 현대문명의 위기의 주범을 인간의 탐욕과 이를 무제한 조장하는 자유주의라고 진단하고 위기를 극복할 해법으로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슈마허의 이념을 들고 있다고 하면서 이에 대해 비판을 가하고 있다. 민경국은 자유주의는 경제적인 번영뿐 아니라 비물질적인 모든 측면에서도 번영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심각한 문제들을 부정하거나 그것을 자유주의(자본주의)가 아닌 그에 대한 간섭 탓으로 돌린다. 또한 민경국은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회구조를 인위적으로 계획하여 통제해야 하는데 이것은 인간의 이성과 지식의 한계 때문에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열린 사회에 인위적인 간섭을 가하려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소규모 사회에나 통용될 수 있는 연대감이나 이타심 같은 공동체의 도덕을 거대한 열린 사회에 적용하려는 잘못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자유시장에서 개인 간의 자유로운 경쟁에 모든 것을 맡겨두는 자유주의만이 모든 문제의 해법일 뿐이다.

‘불교와 자본주의 논쟁’에 관계된 불교학자 가운데 박경준은 자본주의의 수용과 비판 사이에서 절충적 입장을 보였다. 박경준은 불교가 경제 문제에 관해 재가자에 대해서는 재화의 획득과 증식 그리고 이윤의 추구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적극 권장함으로써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의 원리를 수용하고 있다고 간주한다. 그러나 그는 불교에서는 이윤의 무한추구를 인정하지는 않으며, 나와 나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물질적 가치가 아닌 해탈과 열반을 추구할 것과 욕망의 제거 또는 소욕지족을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관점에서 박경준은 개인의 자유를 광범위하게 인정하되 결과적인 분배에서는 어느 정도의 평등을 도모하는 동기론적으로는 자유주의이고 결과론적으로는 사회주의인 혼합경제 형태를 추구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불교평론》의 ‘불교와 자본주의 논쟁’의 직접적인 당사자는 아니지만, 부의 문제와 관련해서 자본주의에 대해 박경준과 유사한 입장을 취하는 학자로는 윤성식과 김종욱을 들 수 있다. 그들은 모두 불교가 재가자에 대해서는 재물 또는 소유를 적극적으로 추구할 것을 장려했기 때문에 자본주의와 친화성을 갖고 있다고 하면서도 불교적 정신과 윤리에 맞도록 어느 정도 변화시킨 불교자본주의를 추구할 것을 주장한다.

김광수는 부나 직업 등 많은 점에서 박경준과 의견을 함께하면서도 자본주의에 대해 좀 더 비판적 입장을 취하였다. 김광수는 불교는 자본주의 이념을 일정 부분 수용하지만, 이기적 탐욕과 이윤의 무한추구는 적극적으로 경계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불교에서 가르치는 소욕지족의 경제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고, 욕심을 부추겨서 상품이 많이 팔리도록 해야만 기능할 수 있는 시장경제란 매우 부도덕한 경제’라고 함으로써 자본주의에 대해 훨씬 더 비판적인 관점을 보이기도 한다.

‘불교와 자본주의 논쟁’에 참여한 그 밖의 대다수 불교학자는 대체로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 가운데 최갑수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기 위한 기초 작업으로 자본주의를 상대화하려 한다. 그래서 그는 자본주의는 영원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 구축물에 지나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또한 얼마든지 그것을 바꿀 수 있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그는 평등과 안전이라는 개념을 통해 민주주의 정치의 가능성을 열었던 프랑스혁명으로부터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해 나갈 수 있는 방안, 즉 자본에 대한 민주적 통제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박병기는 논쟁의 당사자 가운데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제시한 대표적인 논자이다. 박병기는 《불교평론》 40호의 논문을 통해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의 논쟁을 개괄하고 개인과 공동체가 서로 억압하거나 배척하지 않는 연기적 독존주의가 불교적 관점과 합치하는 올바른 입장이라고 주장하였다. 연기적 독존주의란 ‘홀로 존재할 수 없는 연기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그럼에도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스스로 존귀하다는 명제’이다. 이러한 입장에 서서 자유주의를 둘러싸고 벌어진 민경국과의 논쟁에서 박병기는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을 행하였다. 그는 자유주의가 말하는 자유는 타자와 독립된 실체일 뿐만 아니라 기본적으로 고립성을 전제로 하여 성립될 수 있는 개념이라고 간주한다. 그러한 자유 개념에 기초해 자유주의는 삶의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면 미래가 보장된다는 낙관론을 펼치지만, 보이지 않는 손은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고장 난 기계에 불과하며, 시장 자본주의 사회에는 수많은 문제점이 존재한다. 박병기는 그에 대한 대안으로 공정성을 전제로 인간적인 경쟁을 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박병기는 《불교평론》 59호의 논문에서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성장의 한계’와 ‘분배’ 문제, 그리고 자신의 행동결과에 대한 책임의식은커녕 끝까지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는 ‘탈도덕화’ 문제라고 비판한다. 그는 이러한 문제점을 가진 자본주의가 위기에 직면하면서 다시금 사회주의가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고 하면서, 사회주의의 이념과 중국과 북한의 현실사회주의를 살펴보고 나서, 불교는 깨달음의 성취와 자비의 눈길과 손길 나누기를 통해 사회주의의 전체주의와 집단주의의 한계와 수많은 병폐를 안고 있는 자본주의를 치유할 수 있는 대안으로서 의미를 지닌다고 주장한다.

필자는 《불교평론》 49호의 〈현대 자본주의 사회와 문명에 관한 불교적 관점〉이라는 글을 통해 민경국과 박병기의 논쟁을 정리하면서 자유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거기서 필자는 인간은 고립적인 이기적 존재이며, 이기적 인간들의 욕망에 따른 자유로운 경쟁에 맡겨두면 저절로 번영과 행복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자유주의의 가정은 독단적인 가정일 뿐이며 불교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대립한다는 것을 밝혔다. 우주 속의 모든 것은 상호의존적인 연기적 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 세상 만물은 상즉상입하는 불이적 관계에 놓여있는 존재라는 것이 불교의 근본적인 가르침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만물의 연기적·불이적 관계를 무시한 채 고립적인 이기적 개인의 무한정한 욕망 추구를 주장하는 자유주의 이념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필자는 자유주의(자본주의)에 대한 맹목적 숭배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 존재하는 엄청난 문제와 고통을 무시한 채 현실을 미화하고, 그 원인을 제대로 볼 수 없도록 은폐하며, 문제와 고통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길을 원천적으로 봉쇄해버린다는 점을 밝혔다. 그리고 자유주의의 병폐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성장 제일주의, 경쟁 제일주의의 폐해를 극복하려면 사회제도와 사회적 관행들을 어떻게 고쳐나가야 하는가 얘기한 바 있다.

불교와 자본주의의 관계 문제에 관한 논의에 참여한 논자들 가운데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그 극복 문제를 논한 대표적 논자로는 김광수와 이도흠을 들 수 있다.

김광수는 대중빈곤과 실업, 노동소외와 고향 상실, 소비욕구와 물질만능, 환경파괴와 기후변화 등을 자본주의의 대표적인 문제점으로 지적한다. 그는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안분지족과 소욕지족이라는 올바른 가치관을 정립하여 적극적으로 소비를 절제할 것, 간단히 말해 ‘자발적 검약과 자립적 경제’를 확립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도흠은 《불교평론》 40호의 논문에서 자본주의가 초래한 인류 문명의 위기를 전 지구 차원의 환경위기,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자본주의의 모순 심화, 과학의 도구화 등으로 들고, 각각의 위기에 대한 대안으로 법계연기론과 불일불이론(不一不二論), 눈부처 주체성과 눈부처 공동체의 확립,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새로운 과학의 정립을 들었다. 이도흠은 《불교평론》 59호의 논문에서는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점으로 여러 가지를 들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개인과 구조 및 시스템의 혁신과 문화의 변혁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면서 여러 가지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방안들을 통해 우리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 자본주의와 이의 극단적 양식인 신자유주의 체제를 해체하고 다른 세계를 모색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필자 역시 일찍이 《불교평론》 9호에 실린 논문 〈불이사상과 미래문명〉 및 《둘이 아닌 세상》이라는 저서를 통해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하고 그 대안을 모색한 바 있다. 필자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와 문명이 초래한 위기는 절멸의 위기에 빠진 생태계의 파괴, 기아와 실업과 빈부격차, 폭력과 범죄, 전쟁, 인간 간의 극심한 소외와 같은 인간의 사회적 관계의 위기, 진정으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의 방향을 상실하고 인위적으로 조작된 선정적 욕망에 사로잡혀 허망한 소비주의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왜곡된 주체성의 추구라는 인간 삶과 주체성의 위기를 대표적인 것으로 들었다. 그리고 불이사상이라는 패러다임을 통해 그러한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 나가야 할 것인가를 상세히 논하였다.

유정길은 생태학적 관점에서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그 대안의 하나로서 공동체적 생활을 확립해 나가기 위한 방안들을 제시하였다. 그는 《불교평론》 59호의 논문에서 자원무한주의를 신봉하면서 수직적 고도성장을 지향하는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사회는 지속불가능한 사회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에 대항하는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사회의 전략모델로 생태학자인 오라이어던이 든 4가지 유형을 소개하고, 그것들은 오늘날의 위기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모두 필요한 방안들이라고 주장한다. 그 가운데서 그는 공동체의 건설과 공동체적 삶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간주하여 대안적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공동체적 생활을 모색한 이유와 공동체의 다양한 유형과 그 사례를 소개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불교가 앞장서서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본원적 삶의 모델을 통해 인류에게 빛과 희망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3. 불교와 자본주의 논쟁의 의의와 평가

이상에서 살펴본 ‘불교와 자본주의 논쟁’은 불교적 관점에서 자본주의를 어떻게 보고 그에 대응할 것인가를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계기를 제공해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고 할 수 있다. 크게 본다면 논쟁 과정에서 중심적 주제가 된 것은 세 가지로 볼 수 있는데, 이 가운데 ‘부의 추구 문제’는 자본주의 사회를 추동하는 근본적 목표와 지향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윤획득과 부의 축적이라는 문제를 불교적 관점에서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자유주의’ 문제는 자본주의 사회체제의 가장 기본적인 운영원리인 시장 자유주의 문제를 불교적 관점에서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이다. ‘자본주의의 비판과 대안 문제’는 불교적 관점에서 볼 때 자본주의의 문제점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 나갈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하에서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논의가 가져온 성과와 미진한 점 등을 살펴보기로 한다.

‘부의 추구 문제’에 대한 논의는 불교의 근본적인 정신은 무한정한 부의 추구에 대해 비판적이라는 점을 분명히 드러냈다. 이 논의는 불교는 가장 근본적인 교설인 연기론과 무아 사상을 통해 나와 내 것에 대한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날 것과, 물질이 아닌 해탈과 열반을 추구할 것을 가르치는데, 이것은 무한정한 욕망과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들을 지지하는 입장에 있다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혔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재가자에 대해서는 재화의 획득과 증식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도록 권장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원리를 수용하고 있다는 주장에는 상당한 문제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불교에서는 개인의 재산을 인정하며 근면 성실하고 정직하게 일함으로써 얻게 되는 부가 인간의 행복한 삶을 위한 긍정적 조건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불교에서 부를 적극적으로 추구하라고 가르쳤다는 주장은 상당히 오도적인 견해이다. 근면하고 성실하게 생활하면 부가 따를 것이라는 얘기와 부는 좋은 것이니 적극적으로 추구하라는 얘기는 전혀 다른 얘기이다. 그것은 부의 축적을 목표로 삼아 적극적으로 추구하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부에 대한 불교의 기본적인 관점은 출가자와 재가자를 막론하고 소욕지족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것은 자본주의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 사회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자본주의의 특징은 모든 생산물을 사용가치가 아닌 교환가치를 획득하기 위한 상품으로 생산하며, 이러한 상품을 판매함으로써 무한정한 이윤을 획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는 사회라는 데 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단순히 사유재산을 인정한다고 해서 이런 자본주의 사회의 원리를 수용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러므로 나와 내 것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고 물질적 욕망이 아닌 정신적 깨달음과 중생의 구제를 삶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불교의 지향은 근원적으로 자본주의와 상충하는 것임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자유주의 문제’에 관한 논의는 맹목적인 자유주의(시장 자본주의)에 대한 믿음이 올바르지 않으며 불교적 관점에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냈다. 자유주의는 자본주의 문명이 직면하고 있는 수많은 문제와 고통을 무시하면서 자유주의만이 인류 번영의 유일한 길이며, 자유주의와 시장경제에서는 성장에 한계가 없다고 강변한다. 이를 통해 자유주의는 눈앞에 닥친 자본주의 사회의 위기를 파악하거나 수많은 중생이 겪는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고통을 절실하게 느껴야만 그 원인과 그것을 극복할 방법을 탐색할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을 무시하는 자유주의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 존재하는 고통의 원인을 제대로 진단하고 극복할 방안을 제시할 능력이 없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자유주의는 그저 자유 시장에 맡겨놓으면 언젠가는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무책임의 극치를 보여줄 뿐이다. 이러한 자유주의에 대한 논쟁은 만물이 서로 총체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연기적·불이적 존재라는 관점에 서 있는 불교의 입장에서는 이기적 욕망만을 추구하는 개인들이 자유롭게 경쟁하는 시장에 모든 것을 맡겨두어야 한다는 자유주의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으며, 그것이 낳는 병폐들을 적극적으로 극복해 나갈 수 있도록 모든 사회제도와 정책들을 변혁해 나가야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드러내 주었다.

‘자본주의의 비판과 대안 문제’에 대한 논의는 자본주의의 중요한 문제점들을 대부분 다 거론하고 그에 대해 불교가 취해야 할 원칙적인 입장을 대체로 잘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논제의 성격상 어쩔 수 없는 측면이 다소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너무 여러 가지 문제를 한데 묶어 얘기함으로써 논의가 피상적으로 흐르는 측면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또한 자본주의의 병폐에 대한 대안으로서 불교적 정신에 입각한 가치관의 전환을 추상적인 차원에서 얘기하는 데에 머물고 좀 더 구체적으로 불교적 관점에 알맞게 제도적 변혁을 어떻게 해나가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도 부족했다. 이런 점에서 생태학적 관점에서 자본주의 사회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서 공동체의 건설과 공동체적 생활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룬 유정길의 논의는 그 밖의 분야에서도 좀 더 심도 있는 논의를 위한 좋은 모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4. 맺는말
   : 앞으로의 과제-불교적 대안의 모색

온갖 고통으로부터 해탈과 중생구제를 염원하는 불교의 입장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점과 이로 인한 현대인들의 고통을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할 것인가는 중요한 관심사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자본주의 사회의 변혁이 중심적 과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문제를 논할 때마다 흔히 제기되는 반발이 있다. 그것은 ‘불교가 사회운동이냐’며 불교는 내면적인 정신적 깨달음과 개인의 윤리적 실천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지금껏 심대한 영향을 끼쳐 한국불교계의 논의들 대부분이 개인의 내면적 변혁이라는 차원에만 치중하여 사회의 변혁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매우 소홀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의 삶이 사회, 문화와 뗄 수 없는 연관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무시하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물론 불교는 인간의 정신적 깨달음과 변혁을 통해 작용한다. 그러나 만약 그 정신적 깨달음과 변혁이라는 것이 중생을 괴로움에 빠뜨리는 사회제도나 문화를 그대로 용인하거나 옹호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결코 올바른 깨달음과 실천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의 정신과 윤리에 맞도록 법과 사회경제적 제도를 변혁해 가도록 노력하는 것 역시 불교도의 중요한 과제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자본주의 사회 문제와 연관하여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불교적 관점에서 자본주의 사회를 어떻게 변혁하고 그 대안을 실현해 낼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여전히 부족한 점은 바로 자본주의 사회의 변혁 방안과 그 대안에 대한 논의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을 고려할 때 앞으로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되어 온 사회주의를 포함한 대안사회에 대한 집중적 논의이다. 그동안 세계적으로 여러 나라의 불교계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서 사회주의에 대한 논의들이 이미 적지 않게 행해진 바 있다. 이러한 논의들을 정리해 보고 그것을 기초로 우리 현실에 맞는 대안사회에 대한 논의를 진지하게 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대안사회는 실패한 관료주의적인 중앙집중식 계획경제 체제로서 사회주의는 물론 아니다. 그리고 사실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를 일률적으로 규정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물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근본적인 원칙과 이념에 대해서는 느슨한 규정이 가능하다. 즉 자본주의 사회는 사적 소유에 기반하고 임노동이라는 토대 위에서 일반화된 상품생산을 하는 교환가치 위주의 사회이다. 그것은 시장에서의 자유교환을 통한 이윤의 획득을 목표로 하고 무한정한 부의 축적을 향한 욕망과 치열한 경쟁에 기초하여 끊임없는 확대재생산을 통한 성장과 발전을 추구한다. 이에 반해 사회주의 사회는 주요한 생산수단에 대한 공동 소유에 기반하고 사용가치를 중시하는 계획경제 체제를 근본으로 삼고 공동체적 관점에 기초한 부의 공평한 분배를 지향하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 가운데 어떤 요소를 어느 정도나 허용하고 제한하느냐 또는 얼마나 강조하고 실현하느냐에 따라 현실에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이는 자본주의 또는 사회주의 사회가 있을 수 있으며 또한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 그러한 것들 가운데 복합적 요소를 가진 체계의 경우에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이분법적 구분 자체가 별로 의미가 없을 수 있으며, 그러한 사회를 복지(자본주의)사회, 사회민주주의 사회, 사회주의 사회 등의 명칭 가운데서 무엇으로 부를 것인가는 그 규정에 따라 상당히 다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큰 틀에서 대안사회의 원칙과 방향을 전망해 보는 것도 물론 필요하지만, 어떤 면에서 중요한 것은 소위 ‘디테일한 것 속에 숨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대안사회의 모색을 위해서는 자본주의가 인간 삶에 미치는 영향과 그에 대한 해결책에 대한 다방면의 연구와 논의, 그리고 구체적인 제도적 개선 방안 등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필자는 〈불교생태학의 현황과 과제〉라는 글에서 자본주의의 병폐를 해결해 나가기 위한 몇 가지 방안들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논한 바 있는데, 그것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시장만능주의의 기만과 환상으로부터 벗어나 복지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시장에 맡길 부분과 국가나 사회에 맡겨야 할 부분을 구분하는 방안, 교환가치 위주의 자본주의 사회가 갖고 있는 병폐를 제어하기 위해 사용가치가 높은 것을 우선시할 수 있는 방안, 무한정한 욕망과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병폐를 제어하기 위한 방안, 끊임없는 성장과 발전 및 경쟁을 지향하는 자본주의의 병폐에 대한 대안적 방안, 대자본의 이해관계를 위해 여러 국가들의 주권을 무력화시키는 현재의 세계화 방식을 바꾸기 위한 방안, 기존의 사회주의 국가처럼 중앙 집중화된 관료체계로 인한 실패로 귀결되지 않기 위해 자립적인 자율공동체들을 키우는 방안.

그러나 이것 역시 아직 대단히 개략적인 얘기일 뿐이며 불교적 관점에서 자본주의의 병폐를 극복하고 인간이 좀 더 행복한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보다 구체적인 방안에 대한 탐구와 논의는 계속되어야만 한다. ‘혁명을 통한 자본주의의 전복’처럼 자본주의 사회를 한 방에 송두리째 바꿔버릴 방법을 발견하고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은 별로 높아 보이지 않는다. 불교적 관점에서 다방면에 걸쳐서 인간을 괴롭게 만드는 자본주의의 병폐를 밝히고, 이에 대한 인식을 여러 사람과 공유하며, 이를 극복해 나갈 수 있는 구체적 방안을 추구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대안적 사회를 실현해 나가려고 하는 것이야말로 보다 현실적인 실천이 될 것이다. ■


이찬훈 / 인제대학교 인문학부 교수. 부산대학교 철학과, 동 대학원 졸업(석사·박사). 주요 논문으로 〈불이사상과 미래문명〉 〈불이사상과 불교미학〉 〈선종미학 연구〉  〈화엄경 보살사상의 현대적 계승〉 등이 있으며, 지은 책으로 《둘이 아닌 세상》 《불이사상으로 읽는 노자》 《불교의 미를 찾아서》 등과, 옮긴 책으로 《사회적 실천, 자연 그리고 변증법》(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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