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현대 한국불교 10대 논쟁

1. 논쟁의 발단과 전개

김순석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

2011년 11월부터 약 한 달간에 걸쳐 한국불교계에 뜻깊은 논쟁이 전개되었다. 이 논쟁은 한국 근대불교사 서술에 관해 많은 시사점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논쟁의 당사자는 고려대학교 교수인 조성택과 동국대학교 연구교수인 김광식이었다. 논쟁의 발단은 2010년 12월 조성택이 〈근대한국불교사 기술의 문제: 민족주의적 역사기술에 관한 비판〉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은 2011년 《불교평론》이 주관하는 올해의 논문상을 받았다. 2011년 조성택은 천태종에서 주관한 상월원각 대종사 탄신10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에서 〈근대한국불교사 재고(再考): 조계종의 민족불교 비판〉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두 논문의 논지는 비슷하다. 이 두 논문에서 조성택은 김광식을 비롯한 근현대불교사를 연구해 온 한국 학자들의 서술 방식에 문제를 제기했다.

조성택이 제기한 문제의 요지는 이렇다. 현재 한국 학계에서 일반적인 근대한국불교사 기술은 ‘민족주의적 역사기술’에 근거하고 있다. 한국 근대불교사를 민족불교로 설명하는 것은 단순한 ‘항일·친일’의 이분법적 구도이다. 이러한 설명은 근대 한국불교계의 다양성을 모색하는 기회를 제거하였을 뿐만 아니라 목적론적 역사해석이라고 비판하였다. 조성택은 김광식을 비롯한 대다수 연구자들이 친일·항일이라는 구도에서 근대불교사를 서술함으로써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을 근대불교의 귀결점으로 자리매김하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불교계의 모습에서 항일적 민족의식을 검증해 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에 동의하더라도 민족불교는 전통불교 수호라는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는지, 항일적이면서 개혁적 불교는 가능하지 않았는지를 묻는다. 근대불교를 민족불교라는 틀로 설명할 경우 다양한 개혁안들을 사장시킬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기술은 자의든, 자의가 아니든 조계종을 일제의 동화정책에 맞서 정통불교와 민족불교의 정체성을 지켜온 근대 한국불교의 완성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러한 결론은 조계종의 정통성을 확립해 주는 데 기여하였다고 한다. 조계종은 근대불교적 관점에서 보자면 ‘전통복고’를 지향함으로써 스스로의 정당성을 확보함으로써 근대불교와는 거리가 있다고 한다. 조계종의 민족주의적 자기 정체성은 20세기 초 이래 한국불교의 중요한 과제였던 근대적 개혁을 희생시킨 결과물로서, 어찌 보면 해방 이후 한국불교의 혼란기에 사용하였던 전술적 레토릭을 자기 정체성으로 전유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해방 후 식민지 불교 잔재인 ‘대처승’을 교단에서 몰아내는 정화운동을 통해 민족불교의 정통성을 잇는 대한불교 조계종이 1962년 재탄생하였다. 한국 학계의 주류를 이루는 이러한 담론은 최근 외국의 한국불교 연구자들에 의해 심각한 문제 제기와 함께 도전을 받고 있다고 한다. 요컨대 그의 주장의 요지는 민족불교로 근대불교를 해명하는 것은 협소한 시각이며, 근대불교사는 한국사의 일부이며, 한국사는 세계사의 일부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조성택은 민족불교론에 대한 대안으로 딜레마론을 제시하였다. 그가 제시한 딜레마론은 이렇다. 일반적으로 식민자의 종교와 피식민지의 종교가 다를 경우 피식민지의 종교는 저항과 새로운 담론의 구심점이 될 수 있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 식민자인 일본의 종교가 불교였다는 것이 문제였다고 한다. 일본은 유럽의 불교학을 수용하여 체계화되고 선진화된 불교문화를 이룬 국가였다. 한국불교의 입장에서 일본불교는 경쟁 상대이고 극복의 대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선진 모델이었다. 또한 일본불교와 구별되는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지켜내야 한다는 점에서 딜레마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당시 한국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 ‘불교의 근대화’와 ‘일본불교’를 떼어 놓는 것도, 그렇다고 민족주의와 근대를 함께 결합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한편으로 당시 계몽적 지식인들 가운데는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불교를 외래종교로 취급하여 조선학 연구대상에서도 제외시키고 있었다. 또 다른 문제는 한국불교는 현재가 아닌 과거의 화려한 전통불교로 회귀하는 것이 문화적 자존심을 회복하는 길이라는 ‘양가적(兩價的) 인식’도 근대 한국불교의 딜레마로 작용하였다고 한다.

위와 같은 조성택의 문제 제기가 담긴 논문을 읽은 김광식은 자신의 견해를 담은 글을 불교계 신문인 〈법보신문〉에 기고하였다. 김광식은 민족불교론을 자신이 20년간 근대불교사 서술에 활용한 관점이라고 하였다. 그는 민족불교론을 조계종사 서술의 관점으로 활용하였다고 했다. 또한 민족불교론을 산중불교에서 새로운 문명사회로 나가려는 불교대중화론과 국가와 민족의 재건 및 수호에 기여하려는 불교사회화론이 결합된 관점으로 본다고 하였다. 여기서 불교사회화론은 불교계의 생존을 도모하고 불교계의 근대화를 지향하는 것을 말하고, 불교대중화론이란 전통 불교를 수호하고, 민족독립을 지향하는 것을 뜻한다. 나아가서 그는 민족불교론으로 근대불교를 설명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조성택이 민족불교론에 서면 불교대중화가 함의하는 다양한 맥락을 무시한다고 한 데 대해서, 일면 그럴 수 있는 측면도 있지만 이는 과도한 비판이라고 반박하였다. 김광식은 조성택이 민족불교론의 비판을 확장하여 조계종의 정체성을 혼란스럽게 하였다고 했다. 조성택의 민족불교 비판은 조계종 비판이 되고, 조계종을 비판받아 마땅한 종단으로 볼 여지가 농후하다고 한 것이다. 김광식의 이러한 반론을 게재한 〈법보신문〉은 조성택에게 해명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민족불교를 비롯한 한국 근대불교사 서술을 둘러싼 지상 논쟁이 전개되었다. 법보신문사는 이 논쟁을 좀 더 뜻깊게 진행시키고자 근현대불교사 연구자인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인 필자(김순석)에게 이 논쟁에 대한 의견을 구하였다.

필자는 근현대불교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불교계에서 처음으로 진행된 이 논쟁의 의의를 높게 평가하면서 다음과 같은 의견을 개진하였다. 김광식의 민족불교론은 근대사회에서 불교도들이 민족주의적 의식을 가지고 자주성을 회복하려는 노력을 밝힌 것으로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일제강점 말기에 성립된 조계종을 민족불교의 귀결로 해석하는 것은 당시 상황에서는 지나친 해석이라고 평가하였다. 그리고 조성택이 제기한 근대불교사를 다양한 시각으로 폭넓게 보아야 한다는 지적에 동의하였다. 그가 제기한 딜레마론은 어떤 현상을 설명하는 용어이지 역사를 보는 사관(史觀)이 될 수는 없다고 하였다. 필자는 근대불교사를 일제강점기 식민통치 정책에 의해 자주성이 굴절된 ‘굴절된 근대불교’라는 관점을 제시하였다.

법보신문사는 동국대학교 HK교수인 김용태에게도 의견을 구하여 이 논쟁의 외연을 확대하고 의미를 더하였다. 김용태 또한 근대불교의 성격과 불교사 인식을 둘러싼 이 논쟁을 한국불교의 전통 및 정체성에 대한 문제 제기이자 향후 한국불교의 지향점 모색이라는 점에서 매우 주목할 만하다고 평가하였다. 그는 그간 불교계의 연구성과는 친일불교의 유산을 극복하고 민족불교의 정체성을 모색해왔다고 하였다. 그 과정에서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지나친 자기부정이나 긍정은 사실을 왜곡시킬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역사가가 사료를 취사선택할 때는 고정된 인식과 관념, 특수를 특수로만 치부하는 보편의 절대화는 경계해야 하며, 특정 가치나 사관, 주장을 일률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다양한 역사적 변수에 대한 통찰과 해석 가능성을 스스로 좁힐 위험성이 있다고 하였다.

2. 논쟁의 주요 쟁점들

이 논쟁은 민족불교의 정체성을 둘러싸고 진행되었지만 그 내용은 근대 시기 불교와 근대불교는 구별해야 한다는 것과 조계종 성립을 어떻게 볼 것인가, 그리고 불교대중화 문제와 대처식육 문제가 주요한 쟁점이었다.

먼저 민족불교론으로 근대불교사를 서술해 온 김광식은 민족불교는 20여 년간 근현대불교사를 연구해 오면서 서술한 관점이라고 한다. 그는 1910년 임제종 설립에서부터 조선불교청년회, 조선불교여자청년회, 승려대회, 종헌, 총본산 건설운동, 한용운, 김법린, 최범술, 백초월, 만당, 조선독립의 서, 법정사 항일투쟁 등을 일관되게 민족불교적 관점에서 서술하였다고 한다. 그에게 민족불교는 곧 불교계의 독립운동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는 민족불교를 호국불교의 대안 및 계승의 성격을 가진다고 하였다. 또한 일제강점기 불교계의 주요한 사건과 인물들을 민족불교라는 개념으로 일관되게 설명하였다.

식민지 시기를 경험한 국가에서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인 민족운동을 부각시키는 것은 당연하고도 중요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불교계의 저항운동을 민족불교로 해석하는 것을 목적론적 해석이라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학자도 불교계의 민족주의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글을 발표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민족불교론을 주장하는 김광식마저도 민족불교의 정체성에 대하여 분명한 답변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제강점기 불교계의 대표적인 항일운동가인 한용운의 민족사상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필자(김광식)가 이 글에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한용운 사상을 조명하기 위한 사전 탐색 차원으로서 민족사상에 대해서만 살핀다는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한용운 사상에 대한 심도 깊은 탐구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한용운 사상을 총괄적으로 재단하는 것은 모험이다. 학문의 도전은 자유이지만 설익은 자료 분석, 독해하지 못한 부분에 대한 단정, 시대성과 한용운의 인간적인 고뇌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하는 판단은 재고가 요청된다”라고 하였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까? 왜 불교학자들은 불교계의 민족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연구성과를 내놓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불교 교리상의 문제인 듯하다.

조성택은 이 사실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였다. “불교와 민족주의는 서로 쉽게 결합되지 않는 개념이다. 오히려 불교는 탈민족적인 보편 지향의 성격이라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현실에서 일제로부터 민족해방 투쟁의 한 노선인 민족운동에 관한 사실을 규명하고 선양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은 국가적 사업으로 정리하여 후세에 남겨야 할 일이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가 실존할 수 있는 기반의 모태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족주의 노선과 불교 교리는 일치하지 않는다. 불교는 분별과 집착을 경계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불교계의 민족주의에 대한 연구성과는 배출되기 어렵다.

조성택은 근대불교사를 민족불교의 관점에서 서술하게 된다면 친일과 항일이라는 구도에 매몰되어 문제가 야기될 수 있다는 외국 학자들의 견해를 제시했다. 마이카 아워백(Micah Auerback)은 친일과 항일의 이분법으로 근대불교사를 기술할 경우 대처승은 일방적으로 친일승으로 매도될 수 있음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혼인한 승려와 독신 승려 사이의 반목에 대한 지배적인 역사기술에서는 승려의 혼인은 열등하고 ‘청정치 못한’ 불교 관행으로 일본의 식민 당국자들에게 ‘협력’으로, 자아의 상실과 이에 따른 ‘타자’에 의한 ‘타락’으로 무비판적으로 등치된다. 반면에 수도자로서 독신주의를 고수한 승려들은 국가와 민족을 지킨 것으로 회고된다.” 그레고리 이반(Evon, Gregory) 또한 이 점에 대해서 이런 견해를 피력하였다. “해방 후 한국 불교의 담론은 독신주의에 가치를 부여하고, 독신주의를 민족에 대한 충성심과 암묵적으로 연관시킨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할 지도 모른다. ……성적인 순결은 순전히 한국적인 것으로 성적으로 순결하지 않음은 순전히 일본적인 것으로 가정된다.”

대처승들은 일본을 비롯한 외국 유학을 경험한, 당시로는 국제적인 시각을 가진 엘리트 지식인들이었다. 반면에 국내에서 활동하였던 비구승들은 전통적인 승가 교육을 받은 승려였다. 모든 대처승을 친일승려로 단정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단적인 예로 근대불교계 항일 승려의 대명사격인 한용운의 경우만 보더라도 대처승이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승려들이 결혼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한용운은 비록 짧은 기간이기는 하지만 일본 유학의 경험이 있었다.

해방 공간에서 비구·대처 문제는 당시 교단에서 대처승에게 상좌를 두지 못하게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소멸될 때까지 기다리자는 합리적인 방안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합리적인 해결책보다는 때마침 이승만 정권은 왜색불교를 청산하라는 주문을 하였다. 이러한 제안을 받은 비구 측 승려들은 성급하게도 비불교적인 방법을 선택하여 문제 해결에 나섬으로써 참극이 빚어졌다. 오늘날 한국불교계 분쟁과 비극적인 사건의 시말을 자세히 살펴보면 대부분이 이른바 ‘정화불사’에서 기인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모든 사태의 근본적인 책임은 일본 제국주의 세력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 까닭에 민족불교론은 수정될 필요성은 있다고 하더라도 의미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조성택은 한국의 근대불교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외국 학자들의 견해를 귀담아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그는 친일과 항일의 이분법으로 근대불교를 설명하는 것에 대한 외국 학자들의 우려를 소개하고 있다. 한국 근대불교사는 한국 학자들의 전유물일 수 없으며 외국 학자들의 견해를 경청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지적은 자칫 한국사를 전공하는 학자들이 국수주의에 매몰되어 우물 안 개구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로버트 버스웰(Robert E. Buswell, Jr.)은 이 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한국불교를 ‘한반도의 불교’로 국한하지 말고 교리, 수행, 법맥, 불교 의식 등에 있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광역 종교 네트워크의 중요한 허브로 보는 것이 생산적일 것이라 제안하였다. …… 한국불교가 동아시아라는 보다 큰 맥락 안에서 발전해 왔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한국의 불교 전통을 매우 고립된 것으로 다룬다면 한국불교 전통을 명확히 이해하기보다는 오히려 왜곡할 가능성이 더 높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제안은 한국불교사를 공부하는 학자들이 자칫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연구자는 이 점에 대해서 이론과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할 것이다.
다음으로 근대기 불교와 근대불교에 대한 두 사람의 견해를 살펴보자. 여기에서 근대기 불교란 시간적 관점에서 개항기부터 시작된 근대 시기 불교계의 상황을 말하는 것이고, 근대불교란 불교계에 근대적 양상들이 나타나서 교리 해석을 비롯해서 교계의 제 양상이 근대적으로 바뀌게 되는 것을 말한다.

김광식은 조성택이 근대기 불교와 근대불교가 다르다고 한 사실에 대하여 이 분야 연구자들에게 자극을 주었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양자의 구별은 사유적으로는 가능할지 몰라도 실제 역사 서술에서는 많은 문제를 유발한다고 하였다. 1,700년의 역사를 가진 한국불교사는 인도·중국불교와 지속적인 연계를 갖고 있으며 보편적이고 독창적인 불교문화를 가지고 있다. 근대기에 와서 일본을 통해 유입된 ‘신불교’의 영향을 받은 사실이 있기는 하지만 그 성격 및 영향을 정리, 분석하면 될 것이다. 그런 까닭에 기존 역사 해석에서 공인된 시대구분 자체를 폐기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하였다. 그는 조성택에게 ‘근대불교’적인 역사 서술의 정체가 무엇을 뜻하는지, ‘근대불교’의 정체는 무엇인지를 설명하라고 한다.

이 점에 대하여 조성택은 한국 사학계와 불교학계에서 사용하는 근대불교라는 용어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근대불교라는 용어를 ‘근대성’에 대한 직접적인 고찰 없이 불교가 다시 한국 사회의 일원이 되는 근대적 공간을 중심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넓게는 1876년 개항, 1895년 승려 도성 출입금지령 해제, 원흥사의 창립 등 외부적인 사건을 중심으로 한국 근대불교의 기점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들은 근대불교가 등장하는 외적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정한 역사적 의미가 있을 뿐 근대불교의 내용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점에서 다소 억지스러운 점이 있다고 한다.
조성택이 말하는 근대불교의 내용은 이러하다. 근대불교란 단순히 근대 시기의 불교가 아니라 근대라는 공간에서 일어나는 제 변화에 반응하는 새로운 형태의 불교를 의미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한다. 그는 근대불교는 유럽의 발달된 고전 언어학, 문헌학 등을 바탕으로 유럽인들에 의해서 재해석된 불교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전통적으로 불교는 항상 출가한 승려들의 종교였다. 불교학은 학문이라기보다는 기독교의 신학에 가까운 ‘종학’에 속하는 것이었다. 불교라고 하는 지식의 생산·유통은 전적으로 승려들의 몫이었고, 재가 신자는 단지 소비자였다. 불교라는 종교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경전의 제작, 해설, 이해는 승려들의 몫이었고, 특히 명상 수행은 승려들만의 특권이자 의무였다고 한다. 근대불교학의 등장은 전통적으로 출가자들의 독점 영역이었던 불교 지식의 ‘생산’과 ‘유통’ 과정, 그리고 명상 수행에 재가 지식인들이 참여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근대불교학의 성립으로 불교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그것은 스리랑카 등 서아시아에서 발견되는 불교와 티베트, 네팔 그리고 중국 등 동아시아에서 발견되는 불교가 모두 기원전 인도에서 전파된 것이며 불교라는 하나의 종교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데 상당한 시일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그 결과 대승경전이 붓다의 금구직설(金口直說)이 아니라 후대에 만들어지게 되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대승경전의 산스크리트어 사본이 불어 등 유럽 언어로 번역되면서 한역(漢譯) 불교의 한계 또한 절감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제 붓다는 자비와 지혜의 상징으로 전통적인 신앙의 대상이 되던 것이 아니라 인간 고타마로서 빅토리아 시대 유럽인들의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인 절제된 감정과 냉철한 이성을 지닌 철학자의 모습으로 다시 탄생하였다. 이런 과정을 통해 유럽인들은 2,500년 불교사를 철학(초기불교)에서 신앙(대승불교)으로 변질된 역사의 과정이며, 진정한 불교정신은 붓다 당시의 불교라는 인식에 도달하였다고 한다.

불교는 과학, 이성, 계몽 등 근대정신과 아무런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수용할 수 있었다. 이제 불교는 더 이상 승려들의 종교적 활동이 아니라 근대 공간에서 지식인들의 지적 활동이 되어 버렸다. 근대불교는 이렇게 유럽인들의 역사관과 가치관으로 재구성되어 근대라는 공간에 새롭게 태어난 불교라는 것이다.

이런 사정을 제일 먼저 접하게 된 사람들이 유럽에 유학 와 있던 일본 승려들이었다. 이들은 역사학과 고전문헌학을 배웠고 불교를 재해석하였다. 일본 승려들은 이러한 관점에서 교리를 재해석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일본불교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려놓았다. 당시 한국인들이 볼 때 일본불교는 선진적인 것이었다. 그런 까닭에 일본불교를 외면하고 한국불교의 정통성을 찾는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이제 불교는 스님의 법문을 통해서가 아니라 논문이나 번역 형태의 글을 통해서, 절에서가 아니라 저잣거리에서 다른 세속적 담론들과 함께 대중에게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수행자로서 불교인이 아니라 세속적인 사유를 통해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전개하는 불교 지식인의 등장이 곧 근대불교의 한 특징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조성택도 한국 근대불교가 무엇을 뜻하는지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는 못하였다. 그는 한국 근대불교에 대해 “식민지 경험과 ‘근대’라는 새로운 종교 환경을 주체적으로 수용하면서 새로운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노력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는 이러한 정의에 대하여 여전히 충분치 못하며 계속 보완해 갈 것이라고 한다. 결과적으로 조성택은 한국 불교학계와 불교사학계가 함께 풀어야 할 의미 있는 숙제를 던진 셈이다. 다음으로 조계종의 성립에 관해서 두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살펴볼 차례다.

김광식은 조계종의 성립을 민족불교로 일관되게 설명한다. 그는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일제 말기인 1941년에 설립된 조선불교 조계종을 민족불교의 결실로 보았다. 그는 조선불교 조계종의 성립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일제의 식민통치 아래 사찰령에 의한 불교계의 분립과 자주권이 박탈된 상태하에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지난한 노력이 결실을 맺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조선불교 조계종은 사찰령 체제하에서 숱한 난관을 극복하고 성립된 불교계의 귀중한 산물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인식은 해방 이후 대한불교 조계종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이른바 ‘불교정화’라는 소용돌이를 거쳐 탄생한 조계종에 대한 그의 평가는 이렇다. “식민지 불교의 유산이자 현대 불교의 진원지인 불교정화는 1955~70년에 일어난 일련의 과정을 총칭한다. 그리고 정화는 식민지 불교의 유산이라는 점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근대불교에서 잉태되었다. 이는 불교정화 그 자체로서 이해할 것이 아니라 보다 거시적인 안목에서 바라보려는 의식으로서, 임제종 운동에 나타난 종지수호 정신, 선학원의 창건정신, 승려독립선언서에 나타난 일본불교 극복 정신, 백용성의 대처식육 금지 건백서에 담긴 전통불교 수호 정신, 선학원 수좌들이 주도한 조선불교 선종의 창종 정신, 고승유교법회에 담겨 있는 승풍과 계율 회복정신 등이 정화의 배경이다. 일본불교의 모방에서 야기된 대처식육으로 요약·대변되는 전통의 상실은 그 자체가 불교의 파탄을 의미한다.” 그는 해방 이후 조계종의 성립을 소위 ‘정화불사’라고 하는 엄청난 희생을 치르면서 다수의 대처승으로부터 소수의 청정 비구승들이 만들어낸 숭고한 산물로 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김광식은 조계종이 안고 있는 문제를 이렇게 진단한다. 조계종의 정체성에는 민족불교가 있지만, 현재의 조계종은 민족불교적인 활동을 충실히 이행할 수 없는 내적인 모순에 처해 있다. 그것은 사회분열, 통일, 환경, 약자 보호 등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는 점이다. 근대불교가 시작된 시기는 여타 시기보다 다양성, 창발성이 심화된 시기였다. 또한 새로운 불교를 만들려고 고뇌한 근대주의자들의 불교계 개혁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일제강점기 대처승들이 불교계의 주류가 되면서 전통적 불교공동체를 파행적으로 운영하였고 수행풍토를 이완시켰으며, 식민지 권력에 예속되어 명리를 추구함으로써 잦은 내분이 발생하는 등 많은 질곡이 나타났다. 이런 측면에서 나타는 문제와 후유증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런 측면을 간과하고 근대불교를 설명하는 것은 견강부회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결국 조계종은 성립되는 과정에서 숱한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창종된 근대불교계의 결실이라고 한다.

조성택은 조계종의 정체성을 이렇게 본다. 그는 식민지라는 상황하에서 ‘근대화’와 ‘한국적 정체성’의 문제가 해방 이후 1960년대에 들어와서 ‘왜색불교’ 대 ‘민족불교’의 문제로 단순화되는 과정이 곧 현 조계종단의 성격과 정체성이 형성되는 과정이었다고 한다. 소위 ‘정화불사’라고 하는 비구·대처의 분쟁은 소수파와 다수파의 갈등이었다. 해방 이후 한국불교계의 주류는 대처 제도를 현실로 인정하면서 대처와 비구를 함께 종단의 구성원으로 인정하자는 입장이었다. 대처승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포교는 대처승이 담당하고 수행은 비구승들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여 한국불교계의 두 과제였던 ‘근대적 유용성’과 ‘한국적 정체성’을 함께 이루고자 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소수파였던 비구승들은 당시 반일정서를 등에 업고 왜색불교의 추방이라는 미명하에 다수파를 종단에서 몰아내었다. 비구승들의 주장은 대처불교가 곧 일본불교이며 불법을 훼손한다는 것은 단순한 논리가 아니라 비구승들의 신념이었다. 그들은 일본불교와 구별되는 한국불교의 정체성은 붓다의 정통 불법을 유지하는 것이며 1,700년 민족불교의 정통성을 이어가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비구승들은 이렇게 주장하면서 20세기 초 이래 끊임없이 한국불교의 주요 과제가 되었던 불교근대화의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조계종단은 사회적 유용성이라는 근대화보다는 정통 불법의 수호라는 다소 초역사적인 자기 정체성에 집착하는 것 또한 조계종 성립과정과 무관하지 않다고 한다. ‘한국적 정체성’과 ‘근대적 유용성’의 두 가지 과제가 민족불교 대 왜색불교의 구도로 왜곡, 변질되는 과정에서 조계종은 전통복고의 길을 택함으로써 일본불교와 구별되는 ‘정통 불법의 수호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하였다고 한다. 조성택이 조계종의 성립을 보는 관점은 합리적인 해결책보다는 때마침 정치권에서 제공하는 명분을 빌미로 삼아 급진적이고 비불교적인 방법으로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많은 문제점이 있었지만 결국은 붓다의 정법을 수호하는 집단이라는 것을 정체성으로 확립하였다고 한다.

3. 추가로 해명되어야 할 과제

지금까지 2011년 〈법보신문〉을 통해 전개되었던 근대불교사 서술을 둘러싼 쟁점 사안들을 검토하였다. 그런데 이 논쟁은 김광식과 조성택이라는 두 학자 사이에서 전개되었지만 그 내용을 검토해 보면 불교학계와 불교사학계가 함께 풀어야 할 큰 숙제를 남긴 논쟁이었다. 두 학자는 자신의 견해는 분명하게 피력하였지만 아쉽게도 결론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두 사람은 민족불교론을 두고 논쟁을 벌였지만 정작 민족불교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누구도 설명해 내지 못했다. 김광식은 민족불교를 외세의 침략에 저항하고,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수호하기 위한 불교계의 노력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문제가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불교의 교리와 민족불교의 개념이 일치되지 않기 때문이다. 교리와 대치되는 개념을 현상으로 설명해낸다면 그것을 어떻게 수용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민족불교보다는 세계평화와 구세주의로 설명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실제로 민족불교를 설명하는 사료를 면밀히 분석해 보면 이러한 측면이 있다. 이러한 점은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근대사회의 민족불교와 전통시대 호국불교는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해명해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근대불교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두고 토론하였지만, 한국 근대불교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두 사람 모두 답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김광식을 비롯한 다수의 근현대불교사 연구자들은 연대기적인 관점에서 근대 사회의 다양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현상만으로 설명하였다. 더구나 학계에서조차도 지금까지 이러한 사안을 한 번도 검토한 적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역사학계에서는 이미 1960년대 말부터 이러한 논쟁을 거쳤지만 불교학계에서는 아직도 검증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이 문제는 두 연구자가 해결해야 할 사안이 아니다. 이 논쟁을 계기로 근현대불교사를 연구하는 모든 연구자들이 고민하고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 사안은 한두 사람의 개별 연구자들의 연구성과물로 해결될 문제도 아니고, 하루아침에 풀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많은 토론과 여러 차례 학술대회를 거쳐도 쉽게 해결될 사안이 아니다. 그럼에도 필히 해내야만 하는 일이다.

그렇게 해서 근대불교의 개념이 정립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문제는 또 남는다. 근대불교와 맞닿아 있는 현대불교는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근대사회와 판이하게 달라진 현대사회에서 불교는 어떤 모습을 띠고 있으며,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현대사회의 다양성은 근대사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복잡해졌다. 현대불교는 이러한 다양성을 포괄하면서 포교와 사회적 역할을 해명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 불교계의 현대 기점은 언제로 잡을 것이며, 현대사회의 특성은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그리고 이 시점에서 불교의 역할은 어떠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해명되어야 한다. 문제를 제기하기는 쉬워도 해결하기는 결코 쉽지 않지만 우리는 이미 근대를 지나 현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4. 논쟁의 평가와 의의

이 논쟁을 시작한 두 학자는 한국 학계에서 비중이 큰 사람들이다. 김광식은 지금까지 200여 편이 넘는 근현대불교사 관련 논저를 발표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많은 새로운 자료들을 발굴하여 공개하고, 나아가서 많은 자료집 발간을 주도함으로써 오늘날 이 같은 근현대불교사의 연구성과가 배출되는 데 지대한 공이 있다. 설사 그의 논지에 다소간의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의 연구업적과 공로는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조성택의 학문적인 업적 또한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는 근대불교사 전공은 아니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앞에서 각주로 소개한 논문들에서 한국 근현대불교사에 신선하고도 중요한 문제를 제기한 학자로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 논쟁을 이끌어 낸 것도 그의 공적에 속한다.

이 논쟁은 한국 근현대불교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그간의 문제점들을 돌아보게 하였다는 점에서 대단히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동안 많은 학자는 근대불교사를 근대라는 개념에 대한 정의도 없이 연대기적인 관점에서 현상을 분석하는 데 치중하여 왔다. 근현대불교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주제는 중요한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학계는 한 번도 학술대회에서 이 문제를 공식적으로 다루지 않았다.

이제는 학계가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서야 할 때이다. 학술대회를 열고 많은 학자의 의견을 듣고 토론 과정을 거쳐야 한다. 여기에는 반드시 관련된 외국 학자도 참석해야 한다. 이렇게 논의가 확산되어갈 때 숙제는 자연스럽게 풀려갈 것이다. 근대는 현재와 맞닿은 접점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오늘의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 사건이 발생하였던 당시의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학자에게 풀어야 할 문제를 제공하는 사람과 그 과제를 받는 사람은 모두 행복하다. 왜냐하면 문제 제기에는 애정과 격려가 담겨 있고, 받는 사람은 새로운 눈으로 문제와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또 다른 시사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논쟁은 민족불교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근대불교는 어떻게 규정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계기를 제공하고 논의를 풍성하게 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또한 민족불교와 근대불교의 정체성에 대하여 지금까지 두 학자의 고민을 학계가 함께 풀어야 할 숙제로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한국 불교학계의 두 지성이 보여준 격조 있는 토론으로 근현대불교사 연구의 지평이 넓어졌다는 사실에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한다.

끝으로 이 글을 쓰면서 사전에 두 사람의 열람을 거치지 못한 점을 미안하게 생각한다. 혹여 필자가 이 귀한 논쟁을 정리하면서 두 학자의 글을 잘못 이해함으로써 빚어진 실수가 있다면 정중하게 사과하고자 한다. 이 경우 어떤 방식으로든지 필자에게 연락을 주기 바라며 원한다면 공개된 자리에서 토론을 통해 필자의 견해를 바로잡을 용의가 있음을 밝힌다. ■


김순석 /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 1960년 경북 포항 출생. 고려대학교 사학과, 동 대학원 졸업(석·박사). 독립기념관 연구원, 순천향대학교, 고려대학교 강사 등 역임. 주요 논문으로 〈1994년 대한불교 조계종 개혁종단의 성립과 의의〉 〈근대 유교계의 지각 변동-대동교만들기를 중심으로〉 등이 있고, 저서로 《한국 근현대불교사의 재발견》 《불멸의 민족혼 되살려 낸 역사가 박은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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