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현대 한국불교 10대 논쟁

위대한 성자에게 사람들은
과실(過失)을 찾으려 하지 하찮은 자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보석의 결함을 눈여겨보지
타다 남은 장작더미를 누가 살펴보랴!
— 졸역, 싸꺄 빤디따의 《선설보장론》 53[2-23]번 게송.

들어가며

신상환
고려대장경연구소
전임 연구원

《불교평론》 측의 ‘경허 논쟁’에 대한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 맨 처음 들었던 생각은 지난 2012년 후반 불교계를 비롯해 세간을 잠시 소란스럽게 했던 이 일에 대한 정리의 필요성, 인도-티베트 전통에서 바라본 경허(鏡虛, 1846~1912)에 대한 소감 등이었다. 경허에 대해서는 일찍이 그의 법제자 한암(漢岩, 1876~1951)이 “자성을 철저히 깨달은 분”이라 평한 바 있고, 한국의 체계적인 교학을 논할 때면 언제나 상석을 차지하는 고익진이 “한국 최근세 선을 중흥한 대선장(大禪匠)”이라는 상찬을 올린 바 있었다.

그러므로 여타의 이견(異見) 따위는 그저 조그만 변주에 불과할 뿐이라 《불교평론》 측에서는 그의 이런 세평(世評)과 그를 둘러싼 여타의 논쟁에 대한 첨언보다는 ‘밖에서’ 본 소감 정도를 바라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미 50여 편의 논문과 베스트셀러가 된 평전과 소설을 통해 널리 알려져 있는 그에 대해서 한국불교의 전공자가 아닌 필자에게 다시 이 문제를 곱씹어 보라고 권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논쟁이란 상대방의 주장을 논파하기 위해서 그 약한 고리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이니만큼 피 흘리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 주저하는 마음 또한 없지 않았으나 ‘불교평론 폐간 반대 성명서’에 이름을 올린 220여 명의 불교학자 가운데 한 명으로 이 일에 대한 개인적인 정리 또한 필요한 처지라 결국 이 원고 청탁을 수락하게 되었다.

‘경허 논쟁’에서 비롯된 《불교평론》 폐간 사태는 2012년 가을호에 실린 도서출판 민족사 대표인 윤창화의 〈경허의 주색(酒色)과 삼수갑산〉이라는 논문의 내용 때문에 비롯되었다. 그리고 2013년 봄호부터 복간이 결정되었으니 2012년 가을호 배포 이후 회수, 겨울호 발간 중단 등 약 4개월 동안 불교학계뿐만 아니라 몇몇 세간의 눈이 ‘도대체 경허가 누구이기에 그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불교평론》이 폐간되었는가?’에 쏠렸던 셈이다.

어떤 학술적인 글이나 논문은 그것이 그만큼의 가치가 있을 경우, 그에 대한 합당한 비판과 반론 등을 통해서 새로운 논의의 전개되는 것이 마땅하겠으나 ‘경허 스님 열반 100주년’을 앞두고 벌어졌던 그 일은 이와 같은 일반적인 궤적을 크게 벗어났던 것을 먼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논쟁의 발단과 전개를 돌아보며

‘경허 스님 열반 100주년 기념사업’이라는 사건과 ‘《불교평론》이 아닌 다른 곳에서 윤창화의 논문이 발표되었더라면?’ 이런 대전제를 상정하면 ‘경허 논쟁’의 본질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학술적 담론의 공간에서는 자유로운 견해 표명이 가능하며, 그것에 대한 비판과 변론의 기회도 열려 있다. 이러한 분위기는 순수 신앙적 입장에서 볼 때 경건하지 못한 쟁론이나 다툼으로 비추어질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담론이야말로 시대와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고 편협한 종파적 시각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해주는 장치가 된다. 이 점에서 ‘불교평론’은 지금도 여전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특히 이 점은 그간 십여 년에 걸쳐 묵묵히 ‘불교평론’을 재정적으로 지원해 온 만해사상실천선양회에서 유념해 주길 바란다.

이 인용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십여 년에 걸쳐’ 《불교평론》은 만해사상실천선양회의 재정적 지원하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경허선사 열반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계획된 세미나가 몇몇 교수분들의 불참으로 11월 말로 연기되었음을 알립니다. 불교학자들의 섭섭한 마음을 충분히 공감합니다. 오해가 해소되어 더욱 내실 있는 세미나가 준비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경허 선사에 대한 자료발굴과 연구에 모두 관심을 기울여주시기를 기원합니다.

《불교평론》 폐간에서 그친 것뿐만 아니라 ‘경허선사 열반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계획된 세미나마저 유보되었을 정도이니 윤창화의 논문 한 편에서 비롯되었던 이번 일의 파장은 만만치 않았던 셈이다. 만약 《불교평론》에서 ‘경허선사 열반 100주년 기념사업’을 앞두고 경허에 대한 (부정적인?) 해석을 다루었던 윤창화의 논문이 아니라 상찬 일색의 글을 실었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여러 하마평들이 〈연합뉴스〉 〈한겨레〉 〈서울신문〉 등 불교계 신문이 아닌 중앙 일간지 등에도 오르내렸으니 원래 계획하였든 하지 않았든 ‘경허’를 다시 한 번 세상에 널리 알린 셈이었다.

 사석에서 어느 스님이 들려준 말씀처럼 《불교평론》 재정을 담당하는 측에서 보자면 ‘뭣 대주고 뺨 맞은 경우’였고 불교학계에서는 ‘학문 사상의 자유’를 주장하였으니 양쪽은 모두 각자의 옳은 일을 한 셈이었다. 하지만, 하나의 논문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요즘 말로 하면 경허에 대한 ‘네거티브 선전’이었고 속된 말로 하면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었던 ‘역할 놀이’였다.

물론 처음부터 이 ‘역할 놀이’가 의도적으로 기획·진행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윤창화는 한국불교의 현재적 고민을 짚어보기 위한 정교한 또는 비판적 ‘이론 구축 작업’의 필요성을 절감했을 것이고 ‘경허선사 열반 100주년 기념사업회’에서는 잔칫상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로 보았을 것이다. 이후 ‘경허선사 열반 100주년 기념사업회’ 측의 불쾌감 표시와 마치 문중 간의 대립양상으로 비화되는 듯한 모습은 《불교평론》의 폐간선언으로 이어졌고, 그리고 다시 학자들의 항의성명 등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됐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100주년 기념사업회 측의 불편함을 이해한다. 왜냐하면 부모의 환갑잔치를 앞두고 그 공과(功過)를 따질 경우, ‘공1 과9’라고 해도 공1을 최대한 화려하게 치장하는 것이 후손들의 기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아무리 박하게 쳐도 경허처럼 ‘최소한 공6, 과4’인 인물의 열반 100주년이라는 큰 잔치를 앞에 두고, 《불교평론》이 그 잔칫상의 주인공에 대한 ‘비판적·부정적인’ 사실을 언급한 글을 게재한 것은 섭섭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이 사태로 인해서 불교계 또는 불교학계 안에 내재되어 있으면서도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몇 가지 문제들이 표면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그중 첫 번째는 ‘《불교평론》뿐만 아니라 (준)학술지의 성격을 가진 불교 잡지가 책의 판매와 독자 대중의 후원만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이다. 이번 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직도 또는 영원히 그럴 가능성이 없다는 점이다. 만약 《불교평론》이 투고된 글과 그 글의 저자를 보호할 생각을 우선순위에 두었더라면, 또는 둘 수 있는 역량이 있었더라면 판은 더욱 커졌을 수도 있겠으나, 상황이나 역량은 고작 그 정도 수준이었다.

이것을 굳이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는 것이 두 번째인 ‘출가자 집단인 상가(saṃgha, 僧伽)의 구성원과 재가자 집단 가운데 불교 교학자는 어느 정도 유기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와 맞물려 있다. 개별화된 학문이 대세를 이루는 오늘날, 수행 중심의 출가자 가운데에서도 빼어난 교학자가 나올 수 있으며 경론의 문자를 해석하는 교학자 가운데에서도 비출가 수행자가 있을 수 있지만, 불교는 기본적으로 법의 담지자인 상가와 그것을 외호하는 재자가라는 큰 틀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둘의 관계의 역전이란 있을 수 없다. 아마 이와 같은 관계가 무너진 경우를 꼽으라면 19세기 중반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래 출가자의 강제 결혼과 사찰 운영 전담, 그리고 재가불자의 교학 연구로 대별되어 버린 일본불교를 그 예로 들 수 있겠다.
불행 중 다행으로 한국불교는 이와 같은 상황이 아니기 때문인지 이번 일을 겪으면서 새삼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불교는 여전히 출가자 위주라는 점이다. 이것은 부정적인 폄하의 대상이 아니라 지극히 긍정적인 일이다. 왜냐하면 불교란 원래부터 출가자의 집단인 상가와 재가 외호 세력들이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며 발달해 왔기 때문에, 그리고 근대 교육의 결과로 불교 교학자라는 재가자 집단이 형성되어 교학의 전문성이 더욱 확보되었다고 보면 되기 때문이다.

경허의 파계, 나로빠(Naropa) 그리고 논쟁들

윤창화 논문의 주된 내용은 1) 경허의 주색(酒色), 2) 그의 삼수갑산행이었다. 그의 주장과 여러 연구자들의 견해가 다르다는 것을 그나마 차분한 가운데 추스른 것이 《불교평론》 57호의 ‘특별기획: 경허를 다시 읽는다’이지만 막상 이 일이 터졌을 때의 반론들은 한마디로 윤창화를 ‘악의 축’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 내용에 대해서는 차후에 살펴보기로 하고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경허의 파계(破戒)’에 대해서만은 ‘그래서 무엇이 문제인데?’라는 게 필자의 견해다.

필자에게 경허의 파계는 이 글의 전문에서 예를 들었듯이 싸꺄 빤디따(Sakya Paṇḍita, 1182~1251)의 《선설보장론》의 게송에 등장하는 ‘보석의 결함’ 정도로, 크게 다룰 것도 못 된다.

중요한 것은 불교 출가자와 재가자로 이루어진 불교 공동체에서 출가자인 ‘상가의 구성원을 어떻게 볼 것인가?’로, 인도-티베트 전통에서는 우리가 보통 비구와 비구니로 부르는 승원(僧院, monastery)에서 거주하는 자와 ‘마하시다(mahāsiddha)’ 즉 ‘위대한 성취자’를 따로 구분하고 있다. 왜냐하면 승원의 거주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일상적인 삶의 지침인 계(戒)와 그리고 그 계를 어겼을 경우 처벌받는 율(律)인데, 승원에 거주하지 않는, 즉 승원 ‘밖에서’ 거주하는 출가자들에게는 이 계율을 엄격하게 적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인도불교의 역사를 통해 살펴보면 불교의 중심지였던 갠지스 강 유역 중인도의 진보적 대중부보다 더 멀리 나아간 남인도에서 발흥한 반야부의 여러 자유사상가들이 이 경우로, 바로 이와 같은 출가자들에 의해서 대승의 최초 경전이라는 《팔천반야송》이 지어졌다. 또한 인도-티베트 전통에 빠뜨릴 수 없는 ‘84명의 위대한 성취자들(Mahasiddhas)’의 전통에서 계율을 문제 삼는 경우는 없으며 오히려 이들의 ‘기행’이 더더욱 알려졌다.

84명의 위대한 성취자들 중 한 명으로 이후 티베트 4대 종파의 하나인 까규빠의 창시자인 마르빠(Marpa, 1012~1097)의 스승인 나로빠(Naropa, 1016~1100)의 기행은 경허의 파계 행위는 ‘그 정도 기행 따위야’로, 비교할 것도 못 되게 만든다. 오늘날 티베트불교를 논할 때면 빠지지 않는 《나로육법》의 저자로 알려진 나로빠는 나란다 대학에서 풀지 못한 교학의 문제로 인해 고민하다 결국 유행승인 띠로빠(Tilopa, 988~1069)에게 대수인(大手印, mahamudra)의 전법을 받는데, 그의 이야기에는 파계에 대한 어떤 비판도 없다. ‘인도불교 교학의 메카’ 나란다 대학의 ‘북문의 수호자’로 이름을 떨쳤던 대석학 나로빠가 마주쳤던 교학과 삶의 괴리와, 콜레라로 죽어가는 민중들의 삶 앞에 섰던 화엄교학의 대강백 경허의 고민은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는 동일한 문제였던 셈이다.

“금생에 차라리 바보가 될지언정 문자에 구속되지 않겠다.” 이 선언이야말로 한국 근대선의 대선장(大禪匠)인 경허를 경허답게 만든 첫 단추였다. 그렇다고 이후 그가 보여준 파계 행위가 계율을 근간으로 유지되어야 할 승원 ‘안에서’ 용납·승인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전통적인 출가자와 재가자로 구분되는 불교 공동체, 그리고 출가자를 승원의 계율에 따라야 하는 집단으로 정의할 경우, 윤창화가 지적한 것처럼 그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다만 나로빠를 비롯한 84명의 위대한 성취자들의 경우처럼 그를 ‘승원 밖의 인물’로 취급할 때만, 즉 근대 선의 시작점으로 인정할 때만 경허의 파계 행위는 그나마 용납·승인될 뿐이다.

티베트불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84명의 위대한 성취자들의 전통 가운데 나로빠-마르빠-밀라레빠로 이어지던 맥은 이후 까규빠라는, 그리고 비루빠(Virupa)의 맥은 싸꺄빠라는 계율을 근간으로 하는 거대 승단의 근거가 되었다. 이와 같은 티베트불교의 역사적 예를 통해서 반추해보면 ‘경허의 후예’를 자처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상가의 안착을 위한 승단·종단을 위한 계율의 강화이지 경허의 파계 행위에 대한 옹호가 아니다.

이 점에서 윤창화의 ‘부적절한 곳의 부적절한 때’의 글에 대한 비판자들이 보여준 ‘경허의 파계에 대한 옹호’는 여러 문제를 곱씹어 보게 한다. 왜냐하면 “1941년 오늘날 조계종의 모태가 되는 조선불교 조계종의 초대 종정으로 추대된” 경허의 제자 한암 이후 조계종과 경허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인지 윤창화의 글에 대한 비판은 여러모로 호종적(護宗的)인 성격이 강하다.

불교란 나를 탐구하여 나의 정체를 알아 자유롭게 되는 길이다. 고따마 붓다는 그 길을 걸어 완전한 자유를 얻었고 그 길을 가르쳤고 많은 후학이 그 길을 따라 걸었다. 붓다 이래로 나타났던 불교를 시대순으로 나열해보면 초기불교−부파불교−대승불교−선불교라고 말할 수 있다.

불교란 ‘고통에서 해방’을 추구하는 고따마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는 길로 정의하는 필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초기불교−부파불교−대승불교−선불교’라는 허정의 이 주장은 인도불교 후기를 장식하였던 밀교뿐만 아니라 중국불교를 8종(宗)으로 정리하고 용수에게 붙이는 ‘팔종지조사(八宗之祖師)라는 수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의문을 품게 한다. 그의 이런 주장은 선불교에 대한 강조는 될지언정 결코 역사적인 맥락이 아니다. 필자의 경우 중국불교를 ‘소의경전 불교(Root-text Buddhism)’로, 티베트불교를 ‘주석 불교(Footnote Buddhism)’로 정의하는데, 여기서도 선불교는 중국의 8개 종파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할 뿐이다. 아마도 그의 이와 같은 정의는 한국의 ‘현재적’ 조계종단의 규모를 염두에 둔 것 때문인 듯싶은데, 경허가 살던 시대도 결코 이와 같지 않았다.

이능화는 1918년에 간행한 《조선불교통사》에서 당시 한국불교계의 상황에 대해, ‘30본산의 주지와 기타 중요하다고 평가되는 스님들의 종지를 조사하여 보니 경교(經敎)가 가장 많아서 염불이나 송경(誦經) 송주(誦呪)를 일삼고 있으며, 참선하는 사람은 극소수’라고 하였다.

이어서 본산의 주지를 비롯한 중요한 승려 84인을 교종과 선종으로 나누어 나열하였는데 교종 68인, 선종 16인의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제방의 선교의 승려 수를 비교하여 보면 30본산의 전후 주지 50여 인 가운데 선종에 속하는 자는 3, 4인에 불과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교종에 속한다. 만약 조선의 승려 7천 인을 들어서 말하면 10명 가운데 8, 9인은 모두 교종에 속하는데, 실제로는 선도 아니고 교도 아닌 사람이 다수를 점하고 있다.’

이 기록을 통해서 살펴볼 때, 조선 후기의 불교는 선종이 아니라 교종 또는 ‘선도 아니고 교도 아닌 사람’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바로 이 때문에 한국 근대선의 대선장(大禪匠)으로, 군계일학으로 경허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허정의 자의적인 해석의 결과로 등장하는 ‘대승불교−선불교’의 발달사처럼 호교·호종을 위한 또는 경허를 옹호하기 위한 그릇된 대전제들은 역사적인 사실보다는 그러기를 바라는 소원 수준까지 확장된다.

한국불교는 엄격하게 계율을 지키는 것을 전통과 특성으로 인식해 왔다. 특히, 처첩을 거느리거나 淫戒를 범하면 사찰에서 퇴출했는데, 일반 세간에서는 그러한 승려는 승려의 범주를 벗어난 것으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시대상을 고려하여도 경허의 기행은 물론 파격적이었다. 하지만 경허는 처첩을 거느린 바는 결코 없었다.

만약 한국불교가 “엄격한 계율을 지키는 것을 전통과 특성으로” 성립하여 지금까지 흘러왔다면, “1899년 이래 약 5년 동안 정혜결사를 통하여 정체성이 혼란스럽던 조선 후기의 불교계에 새바람을 불어” 넣었던 경허의 수선결사(修禪結社)를 통해 당대의 주류 불교와 선을 그었던 행위를 무어라 설명할지 모르겠다. 그리고 고려말 ‘술도가와 고리대금업’을 주업으로 삼다가 결국 당대의 지식인들뿐만 아니라 민중들에게 버림받았던 한국불교의 역사를 어떻게 반추할 것인지 의문이다.

허정과 홍연지가 경허를 옹호하며 윤창화의 글을 비판하기 위한 목적으로 내세운 대전제들의 오류를 관점과 입장의 차이, 또는 사소한 문제로 취급하게 하는 것은 김광식의 글 때문이다.

(1. 서언) ……하지만 윤창화의 원고가 발표된 이후 벌어진 《불교평론》 회수와 폐간, 복간에 이르는 일련의 사태는 경허의 행적을 둘러싼 진지한 연구를 촉매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 (4. 결어)…… 윤창화의 논문이 여러 가지 문제를 내장하고 있다면 바로 그 지점에서 논의를 심도 있게 진행해 나가야 한다.
  
그는 ‘1. 서언’에서 “진지한 연구를 촉매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로 시작하여 약 원고지 75매를 쓴 뒤 ‘4. 결어’에서 “심도 있게 진행해 나가야 한다”로 글을 마치고 있다. 그리고 그는 ‘타다 남은 장작더미’의 ‘관찰기’인 ‘2. 윤창화의 글, 다시 읽기’에서 그의 글에 대한 오류를 먼저 지적한 뒤 자신의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는 타인의 글이 “단정적인 내용이 많고” “감성적 접근도 있고” “약간 도취되었기에” “역사 서술의 상식에서 소홀”하여 “이해를 혼란케” 할지라도, 내놓고 이렇게 언급할 정도로 간이 크지 않다.

만약 ‘경허 스님 열반 100주년’을 앞두고 윤창화가 악역을 맡았다면, ‘바른 논문 작성법’을 가르쳐준 김광식이 당시 맡은 역할과 앞으로 한국 불교학계에서의 역할이 약간 궁금하지만, 바로 그의 이런 언급 때문에 비트겐슈타인이 그의 《논리·철학 논고》에서 언급한 ‘7.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는 침묵하지 않으면 안 된다.’를 ‘말할 가치도 없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는 침묵하지 않으면 안 된다.’로 그저 약간 비틀어 볼 뿐이다.

김광식의 글뿐만 아니라 경허의 파계마저 옹호하는 여러 글을 볼 때면 다음의 게송이 떠오른다.

우매한 자들이 하는 은혜를 갚는다는 행동은
어떤 때에는 커다란 해가 된다.
새끼 까치가 어미의 깃털을
뽑는 것을 보은이라고 여기듯이.
— 졸역, 싸꺄 빤디따의 《선설보장론》, 156[5-12]번 게송.


결론을 대신하여

사실 윤창화의 〈경허의 주색(酒色)과 삼수갑산〉에 등장하는 경허의 파계 문제에 대한 지적과 비판은 ‘경허’라는 역사적 인물을 둘러싼 논쟁이라기보다는 ‘경허의 후예’를 자처하는 이들이 취하는 현재적 모습의 성격과 맞물려 있다. 그것은 곧 보는 자의 관점에 따라 달리 보이는 역사, 전설과 신화를 통해 가공되는 역사임을 현재적으로 보여주는 일례일 따름이다. 그리고 윤창화의 글과 그것이 이후 불러왔던 조그만 파장 따위는 이미 지나간 일이다.

그를 비롯해 몇몇 불교학자들은 오늘날 출가자들의 파계 행위의 그 첫 단추를 경허에서 찾는 경향이 강한데, 그것은 경허가 짊어져야 할 자기 몫인 ‘보석의 결함’ 정도일 따름이다. 그리고 출가자의 파계 행위에 대한 비판은 바위에 떨어지는 물 한 방울 정도일지라도 언젠가는 바위를 뚫을 것이라는 자세로 애써 행할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하다. 법보시-재보시를 근간으로 하는 불교 공동체의 두 축을 이루는 출가자-재가자라는 관계에서 재가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신행과 기도, 수행뿐만 아니라 올곧은 출가 수행자를 본받고 그렇지 않은 자를 멀리하고 비판하는 자세다.

붓다의 재세 시에도 출가자들의 파계 행위는 일상적으로 있어 왔다. 그래서 ‘그렇게 하지 마라’고 만들어진 것이 계율이다. 만약 그 행하던 일들의 추잡함을 따지자면 지금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계율의 현재적 해석은 언제나 상가의 ‘뜨거운 감자’였다.

앞에서도 예를 들었듯 티베트불교는 84명의 위대한 성취자들의 기행에 눈을 돌리기보다 그 가르침에서 ‘수행의 맥’을 찾을 찾고 이후 계율을 근간으로 한 승단으로 거듭났다. 만약 오늘날 한국불교가 경허의 기행을 통해 자신의 파계 행위의 정당성을 찾는 풍조를 용인·묵인한다면 출가자들의 일상적 파계 행위는 경허가 아닌 다른 ‘상징’으로 대치되더라도 이어질 것이다. 한암이나 만공(滿空, 1871~1946)처럼 올곧은 경허의 제자들은 스승의 성취에 눈을 돌렸지, 되지도 않는 ‘경허 흉내 내기’를 하지 않았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윤창화가 그의 글의 결어에서 언급한 것처럼 ‘반면교사’인 경허를 오늘날 우리의 삶을 위해서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그 ‘지혜’만 남아 있는 셈이다.

* 옆으로 걷는 아빠 게가 새끼 게에게 ‘너도 나처럼 옆으로 걸어라’고 가르칠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여기는 필자는 이 글을 쓰면서 아직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고려대장경 연구소 이사장인 종림 스님과 경허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스님께서는 《서여 사랑방-작은 인문학》과 《노마디즘》이라는 두 권의 책을 읽어보라고 건네주었는데 전자는 노고수가 바라보았던 경허의 이류중행(異類中行), 그리고 후자는 방법론적인 전환 자체가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경허에게 ‘다른 부류[異類] 속으로 들어가는 행위[中行]’란 스스로 쌓고 부수며 틀을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으며 그것은 그가 화엄교학의 대강백에서 선가로 넘어오는 순간 이미 시작된 일이었다.

또한 스님은 인도-티베트 불교에서 바라본 경허 정도로 글을 쓸 생각이라고 하자 ‘너를 비판하는 자가 스스로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하게 만들어라.’는 말씀도 해주었다. 그리고 이르시길, “보라는 연꽃은 보지 않고, 더러운 진흙 덩어리나 열심히 보는구나.”

스님이 바라본 경허는 근대와 현대를 잇는 선(禪)의 첫 출발 ‘점(point)’이었다. 이 점이 어떤 ‘선(line)’이 되어 앞으로 이어질지는 후학인 지금 이 자리의 우리에게 달려 있다. ■

 

신상환 / 고려대장경 연구소 전임 연구원. 아주대학교 환경공학과 졸업. 인도의 비스바 바라띠(Visva-Bharati) 대학 인도·티베트학과 석사, 캘커타 대학 빠알리어과 철학박사. 비스바 바라띠 대학 인도·티베트학과 조교수 역임. 주요 논문으로 〈삼예 논쟁의 정치적 배경과 까마라쉬라의 수습차제에 대한 비판적 고찰〉 〈한문 대장경에서의 밀교의 자취〉 등과 저서로 《용수의 사유》 역서로 사꺄 빤디따의 《선설보장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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