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현대 한국불교 10대 논쟁

1. 인류의 문명은 아니오(No!)를 먹고 자란다

류승무
중앙승가대 교수

자신의 운명을 오직 부족장의 지시에 맡긴 채 수렵채취에 의존하던 시절, 무리 중 누군가가 우연히(혹은 실수로) 부족장의 말에 ‘예’라고 답을 하지 않았다. 그 순간 오직 부족장이 지시하는 ‘예’의 세계만이 실재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무리들이 ‘예’ 아닌 세계도 실재함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아니오(No!)’가 잉태되는 계기로 작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실천적 차원에서는 기존 질서의 해체와 새로운 질서의 등장을 예고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실제로 인류의 문명사에서 ‘아니오’의 발견만큼 획기적인 발견도 드물다. ‘아니오’라는 말이 성립하면서 긍정(이쪽)과 부정(저쪽)의 코드가 나타났고 보이는 세계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의 존재도 동시에 긍정되게 되었다. 이른바 이원적 코드(binary opposition code)의 탄생이다. 그 이후 이원적 코드는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불어났다. 불완전과 완전, 상대와 절대, 한계와 무한 등과 같은 종교적 코드가 탄생하는 것은 단지 시간의 문제에 불과했다. 굳이 종교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막스 뮐러(M. Müller)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그리고 성과 속의 구분을 종교의 기본요소로 간주한 에밀 뒤르켐(E. Durkheim)과 엘리아데(M. Elide)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 이원적 코드는 모든 종교의 DNA로 장착되었다.
그런데 예수가 탄생하기 500~600년 전쯤 공자, 붓다, 배화교 성인들, 그리고 그리스 철인들이 탄생하여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세속의 논리에 대해 또다시 ‘아니오’라고 말함으로써 인류 문명은 비약적인 도약을 시작한다. 오늘날 세계종교로 성장한 이른바 ‘현세 부정의 종교’(M. Weber)가 시작된 것이다. 이 위대한 시기를 혹자는 ‘기축시대(Axial Age)’라 부르기도 하고 혹자는 ‘원형 근대(proto-modernity)’라 부르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붓다는 이원적 코드의 위계적 구분을 부정하고(세 번째의 ‘아니오’) 이원적 코드 자체의 상호의존적 발생을 설파함으로써 현세 긍정과 현세 부정(세속과 초월, 이승과 저승 등)마저도 상호의존적 발생의 관계로 인식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를 ‘연기법’이라 부르기도 하고 혹자는 ‘역류도(逆流道)’라 부르기도 한다.

문제는 세 번의 ‘아니오’로 성립하는 연기를 체득하기가 쉽지 않다는 데 있다. 붓다의 깨달음과 가르침 덕분에 그것을 체득하면 니르바나의 세계로 직행함을 알게는 되었지만, 첫 번째 ‘아니오’조차도 체득하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로서는 세 번의 ‘아니오’를 거친 이른바 부처의 경지에 실제로 도달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다. 더욱 심각하게도 붓다는 열반하고 그들에게는 붓다의 가르침만 남았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엄청나게 치열한 ‘아니오’의 논쟁이 수반되지 않음은 도리어 이상하리라.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불교의 일부 교파가 또다시 ‘아니오’ 카드를 꺼내 들었다. 붓다를 통해 니르바나의 존재를 알게 된 중생들도, 고해의 바다에 빠질 때마다 니르바나의 세계로 가는 수레에 올라타기를 원했다. 그 불교 교파가 이후 이들 평신도의 기원을 해결해 주기 위해 큰 수레를 준비한 것은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이렇듯 수많은 ‘아니오’의 카드를 거쳐 이른바 기복불교(그렇게 부를 수만 있다면)가 탄생하였다. 그러나 연기법에 따르면, ‘아니오’는 기복불교 그 자체에도 재진입(re-entry)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21세기 벽두 한국불교계의 일각(《불교평론》 2001년 여름호)에서는 기복불교에 대해 ‘아니오’라고 외쳤다. 예상대로 ‘아니오’ ‘아니오의 아니오’ 그리고 ‘아니오의 아니오의 아니오’ 등 ‘아니오’가 이어졌다. 이를 우리는 ‘기복불교 논쟁’이라 부른다. 이렇게 볼 때, 기복불교 논쟁은 ‘아니오’를 먹고 자랐고 미래에도 ‘아니오’를 먹고 자랄 것이다. 그리고 일련의 ‘아니오’의 자기준거적 자기생산(autopoiesis)은 그만큼 인류의 문명(직접적으로는 불교문명)을 살찌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기복불교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당시 《불교평론》의 편집위원으로서 논쟁 부재의 불교(학)계에 논쟁다운 논쟁을 유도하고자 했던(혹은 동의했던) 필자로서도 솔직히 아직도 더 가열한 논쟁을 관전하고 싶은 마음을 숨길 수 없다. 논쟁의 당사자들에게는 가혹하게 들리겠지만, 논쟁이 좀 더 깊고 치열하게 전개될수록 논의는 날카롭고 깊어지며 더불어 관전자의 흥은 더 높아지고 ‘아니오’를 먹고사는 불교문명은 그만큼 발전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은 명백히 ‘중간 고찰’이다. 그러나 혹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글은 지금까지 전개된 기복불교 논쟁을 정리해 보고, 그 과정에서 드러난 쟁점을 도출한 다음, 그 논쟁의 공과를 평가해 봄으로써 향후 ‘아니오’가 더 날카로워지는 데, 논쟁이 한층 심화되는 데, 그래서 불교문화(혹은 인류문명)가 살찌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해 보고자 한다.

2. 기복불교 No!, 그 No의 No!
 
1) 기복불교 논쟁 1라운드

앞서 언급했듯이, 2001년 여름 《불교평론》(3권 2호) 권두언은 자력신앙을 기준으로 ‘불설과 비불설을 결택하자’라는 제목으로 기복불교에 대한 공격의 포문을 열었다. 오늘날 한국불교 기복신앙의 근거가 되고 있는 대표적인 경전인 《목건련경》 《부모은중경》을 위경이라 규정하기도 했다(홍사성의 글). 그리고 이 공격은 특집의 글, 즉 ‘기복불교를 말한다’라는 4편의 개별 논문들을 통해 엄호되기도 하였다. 예컨대 조준호의 글은 연기법을 기준으로 이기적 욕망에 바탕을 둔 기복신앙을 비판하고, 복을 얻기 위해서는 작복 행위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자력신앙으로 타력신앙인 기복불교를 대체할 것을 주문했다. 이어서 이 특집은 불교의 자력신앙이 타력신앙으로 돌변하게 된 역사적 계기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황인규의 글), 오늘날 한국불교의 기복신앙 형태를 지양되고 극복되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하고(한명우의 글), 나아가 기복을 공덕으로 대체할 것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유동호의 글).

그러자 그해 겨울 《불교평론》(3권 4호)에 또 한편의 글, 즉 ‘‘기복불교를 말한다’를 말한다’라는 제목의 글이 투고되었다. 그러나 이 글은 기대와는 달리, ‘아니오’라고 외치는 글이 아니었다. 그 요지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기획의 차원에서 4편의 글 중 전반부의 2편이 학문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는 반면에 후반부의 2편이 경험에 근거하여 접근하고 있어 보조가 맞지 않는 느낌이며 그러한 점에서 논의의 현실성을 떨어뜨리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특집의 글이 연기설과 자력신앙이라는 원칙에 종속된 원칙론에 따르고 있기 때문에 원칙 선언에 그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 글은 기복불교 비판을 부정하기보다는 기복신앙을 극복하기 위한 좀 더 현실적이고 실현가능한 방법을 주문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인지는 모르나, 그에 대한 반(反)비판은 진행되지 않았다. 게다가 2002년 9월 불교포럼에서는 ‘기복불교의 대안을 찾자’는 주제로 토론이 진행되었는데, 이 자리에서는 성태용은 작복을 위한 ‘복채점표’를 만들자고 주장한 바 있다. 거기서도 기복과 작복은 엄연히 다른 개념이란 토론이 이어지긴 했지만, 그 역시 더 이상의 논쟁으로 발전하지 않았다. 이렇게 볼 때, 기복불교 논쟁(그것을 기복불교 논쟁이라 부를 수 있다면!) 1라운드는 기복불교 비판이 대세를 이루는 가운데 한두 가지 대안이 제출된 논쟁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이때까지만 해도 논쟁 부재의 관행이 재현되는 듯했다.

2) 기복불교 논쟁 2라운드

기복불교 논쟁 1라운드가 다소 싱거운 리허설로 끝날 때쯤 격월간 《불교와 문화》(2002, 1·2호)에 ‘기복신앙은 불교가 아니다’라는 홍사성의 글이 실렸다. 이 글은 불교평론의 권두언을 보다 확대함으로써 ‘아니오’의 시그널을 더욱 풍부하고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그러자 이제는 〈법보신문〉이 ‘기복불교를 비판하는 것은 한국불교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행위’라고 하면서, 기복불교 비판에 대해 ‘아니오’라는 카드를 꺼냈다. 나아가 〈법보신문〉은 기복불교 비판(‘아니오’)을 다시 부정하는 글(‘아니오’의 ‘아니오’ 즉 ‘예’)들을 집중적으로 게재하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면 울만 파트리크의 ‘초기 부파불교 시대에도 기복신앙은 있었다’라는 주장이나 김성철의 ‘초기불교에도 기복신앙의 흔적이 전해진다’는 주장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는 대승경전을 위경으로 간주하는 홍사성의 주장과 초기불교의 교리에 근거하여 기복불교를 비판하는 조준호의 주장에 대한 ‘아니오’의 시그널이면서 동시에 ‘아니오’의 ‘아니오’ 즉 ‘예(Yes)’의 효과를 가졌다. 그 후 2003년 《불교평론》 지상에서는 좀 더 원색적으로 기복불교를 비판하는 글들이 다양하게 지면을 장식했고(김종만의 글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은밀하게 기복불교를 옹호하는 글(송위지의 글)도 실렸다.

이렇게 볼 때, 결국 기복불교를 긍정하는 현실(‘예’), 기복불교를 부정하는 주장(‘아니오’), 그리고 그 주장을 반증하는 글들(‘아니오’의 ‘아니오’, 즉 ‘예’)과 그 주장에 동조하는 주장(‘아니오’의 예, 즉 ‘아니오’) 등 기복불교를 비판하는 글과 옹호하는 글이 기복불교 관련 담론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담론화는 논쟁의 전선을 뚜렷하게 구분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싸움의 승패에 따라 매우 다른 실천적 결과가 동반됨을 암시하였다. 그러한 점에서 기복불교 논쟁 2라운드를 이른바 기복불교 비판론(‘아니오’ 진영)과 기복불교 옹호론(‘예’ 진영)으로 구분하는 것은 무리가 없어 보인다.

다른 한편, 기복불교 비판론과 기복불교 옹호론 사이에 전선이 뚜렷하게 갈라져서 논쟁이 본격화되었다는 것은 양 진영으로서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쟁점이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이러한 논쟁 과정에서는 다음과 같이 네 가지 쟁점이 드러났다: (1) 대승불교를 불설로 볼 것인가 혹은 비불설(대승경전을 위경으로 간주하는 문제 포함)로 볼 것인가? (2) 초기불교에도 기복신앙이 포함되어 있는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 (3) 기복과 작복은 같은 것인가 혹은 다른 것인가? (4) 기복은 작복으로 진화(발전)하는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기복불교의 방편을 용인할 것인가 혹은 거부할 것인가?)

이렇듯 기복불교 논쟁 2라운드는 매우 민감한 쟁점들을 거침없이 들추어냄으로써 향후 불교계가 해결해야 할 중요한 학문적·실천적 과제를 밝혀내었고, 그러한 점에서 유익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과제를 둘러싼 더 이상의 진검승부(?)는 벌어지지 않았고 따라서 관전자로서도 후일을 기약하고 말았다.

3) 기복불교 논쟁 3라운드

기복불교 논쟁 2라운드가 상대적으로 뜨거웠던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후 한동안 기복불교와 관련된 논쟁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2011년 명법이 《불교평론》에 〈여성불교의 관점에서 본 기복불교〉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기복불교 논쟁이 다시 점화되었다. 이를 여기서는 편의상 기복불교 논쟁 3라운드라 부르자.

그렇다면 명법은 어떻게 기복불교 논쟁을 재점화하고 있는가? 우선 명법은, 최연의 글 즉 여성이 주류를 이루는 기복불교를 비판하고 불교 지식인과 재가법사 중심의 거사불교를 내세우는 최연의 글을 여성주의적 입장에서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명법은 “기복불교 비판 담론은 현대적이고 합리적인 남성들의 불교와 기복 중심의 비합리적이고 전근대적인 여성불교를 구별하고, 근대적 남성의 종교성을 주체화시키기 위하여 전통적인 여성의 신행을 타자화했다”고 비판한다. 또한 명법은 기복불교 비판론자인 김종만의 글을 근거로, ‘이처럼 기복불교 비판 담론은 객관적이고 진보적인 양 주장하지만 사실은 서구적 모델을 추종하는 연구자 자신의 편향적 사고가 개입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더 나아가 명법은 초기불교의 교리조차 서양 근대학문의 관점에서 재구성된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기복불교 비판론이 교리적 근거로 삼고 있는 진지를 직접 공격한다.

이렇듯 명법은 기복불교 비판을 종횡무진 비판(‘아니오’의 ‘아니오’)한 다음, 기복불교 옹호론으로 향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명법은 프랑스의 사회학자인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까지 끌어들여 주고/받고/답례하는 규범성을 활용하여 여성의 기복불교에 내재한 회향의 윤리성을 강조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기복불교의 긍정적 측면(기복불교의 윤리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나아가 명법은 여성들의 기복신앙에는 치유와 성숙의 체험이 동반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순수한 불교정신이 잘 녹아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명법은 자신의 글을 다음과 같이 맺는다: “한국 여성들의 기복불교가 신행의 순수성을 보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성성에 대한 매우 탁월한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 및 사물과 공감할 수 있는 능력, 즉 타자로의 열림을 회복시키고, …… 그런 점에서 기복불교를 무시하거나 경시해서는 안 되고 그것이 내포한 긍정적인 힘, 즉 지금까지 한국 여성불자들이 보여준 ‘책임과 희생’이라는 덕목을 더 넓혀서 사회 전체를 포용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명법의 공격에 대해 기복불교 비판론 진영에서 가장 먼저 역공을 시작한 사람은, 2003년 《불교평론》에 〈기복불교 옹호론의 문제점〉이란 글을 발표하고 ‘기복불교는 불교의 본질과 아무 상관 없는 신행체계’라고 주장했던, 그래서 명법의 공격 대상이 되었던 김종만이다. 그는 2012년 《불교평론》 여름호에 ‘기복불교 옹호론 재비판’이란 글을 게재하여, 명법의 글에 대해 다시 ‘아니오’ 카드를 꺼냈다. 김종만은 “이 글(명법의 글)은 불교가 어떤 종교인가에 대한 본질적 오해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점, 여성불교의 관점이라고는 하나 근거 없는 오해를 사실로 간주하고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부족해 보인다.”라고 주장한다. 나아가 그는 “이 논쟁의 핵심은 ‘기복’이 불교교리에 맞는가 아닌가에 있다. 그렇다면 불교경전이나 교리의 내용을 놓고 따져보는 것이 마땅하다. 그 사고의 기초가 동양이냐 서양이냐 하는 접근은 진실을 밝히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불교의 교주인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에 얼마나 가까운 것이냐가 해석의 열쇠가 돼야 한다”고 재차 주장하면서 기복불교 옹호론을 다시 공격하고 있다.

기복불교 논쟁 3라운드는 진검승부를 방불하게 할 정도로 치열하게 진행되었다. 그런 만큼 성과도 컸다. 특히 이 논쟁에서는 초기불교의 교리 해석(불교의 본질 문제나 근대성 개입 주장 포함) 문제, 붓다의 초월성 문제, 여성주의적 시각과 기복불교의 친화성에 대한 해석 문제, 한국의 기복불교 문화의 긍정적 발전 가능성 문제 등이 추가적인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게다가 이 논쟁에서는, 기복불교의 여성성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는 그리고 기복의례를 주관하는 당사자인 여성 출가자(비구니)의 시각을 반영함으로써 기복불교의 논의를 종교 체험적 차원으로 심화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기복불교 논쟁 3라운드도 2라운드에서 제기된 과제는 물론 기복불교와 같은 핵심 키워드에 대한 최소한의 합의도 없이 진행됨으로써, 서로 다른 해석의 지평 위에서 상대방을 공격하는 데 과도하게 초점이 맞추어졌고 자신의 독백 이상으로 발전하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다.

3. ‘No’의 심화를 위한 관전자의 평

앞 장에서 우리는 기복불교 논쟁의 전개과정을 편의상 3라운드로 구분하여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드러난 쟁점들도 간략하게 정리해 보았다. 이는 관전자가 보기에 두 가지 후방효과를 낳는다. 하나는 3라운드까지 진행된 기복불교 논쟁에서 도출된 쟁점이 그 자체로 많은 연구과제를 수반한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진행된 논쟁 너머의 과제가 보다 분명해졌다는 점이다. 해서, 여기서는 이를 보다 구체화함으로써 얼마 안 되는 구경 값(충분할 리 없겠지만)이라도 지불하고자 한다.

1) 기복불교 논쟁이 남긴 과제

(1) 개념정의의 과제

앞 장의 쟁점에서 이미 시사하였듯이 기복불교 논쟁은 관련 개념들에 대한 좀 더 정밀한 논의를 진행해야 한다는 과제를 남겼다. 특히 문자를 매개로 소통의 경우 그 매개 개념에 대한 치밀한 논의와 그에 근거한 명확한 규정(최소한의 고정성)이 없으면 축구 골대도 없이 축구경기를 하는 것과 같다. 논쟁의 당사자들은 각자 자기 생각만 옳다고 주장하지만 관전자에게는 혼란만 가중시킬 것이다.

이번 논쟁의 경우 기복불교라는 개념이 많은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기복불교가 무엇인가에 대한 합의된 학문적 개념 정의도 없을뿐더러, 기복과 기복 아닌 것(예컨대 작복) 그리고 기복불교와 기복불교 아닌 것(예컨대 기복신앙)과의 구분에 대해서도 사전에 충분히 논의되어 있지 않았다. 그럴 경우 논쟁의 당사자들이 조작적 차원에서라도 개념 규정을 시도해야 하는데, 그러한 최소한의 성실성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기복불교를 둘러싼 불통(不通)의 답답함을 해소해야 하는 과제는 여전히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다.

(2) 이론적 과제

관전자는 잘 안다. 개념적 정의도 불충분한데 그러한 개념들 사이의 관계를 이론적으로 정립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을. 그러나 ‘기복불교는 불교가 아니다’ 혹은 ‘대승경전은 위경이다’와 같은 문장처럼, 논쟁은 명제 형태의 진술을 두고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명제를 구성하는 개념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설득력 있는 이론적 논의가 반드시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논쟁 당사자의 특정 진술은 도그마가 될 수는 있겠지만 진리와는 거리가 멀어진다.

이번 논쟁의 경우에도 이런 진술은 쉽게 발견된다. 예컨대 기복불교를 불교가 아니라고 할 때, 불교의 가능 조건을 기복불교 비판론처럼 행위자의 자력성이나 교리나 그 경전적 근거로 제한해도 되는가(기능적 정의는 물론 실체적 정의에 따르더라도, 안 된다!) 그리고 ‘자력’에서 자(自)는 행위 주체인 개인인가(연기법이나 행위의 사회성을 고려하면 개인이 아니다! 사회는 개인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 혹은 소통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등에 대해서는 매우 치밀한 이론적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또한 기복불교 비판론을 서구 근대성 및 남성성과 연결시킬 때도 ‘불교의 자력성을 서구 근대성의 주체와 동일선상에서 논의할 수 있는가(단호히 없다! 베버를 보라. 서구 근대성은 그것을 신비주의로 간주한다) 그리고 그것을 남성성으로 간주할 수 있는가(없다. 그것이야말로 여성 폄하다)’ 등에 대한 설득력 있는 논의가 당연히 수반되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기존의 기복불교 논쟁은 무수한 이론적 과제를 남겨둔 채 끝나고 말았다.

(3) 주제별 과제

(1)과 (2)의 결함에도 불구하고 이번 논쟁의 과정에서는 매우 많은 쟁점이 도출되었다. 그러한 쟁점은 모두 향후 연구 주제일 수밖에 없다. 우선 기복불교 논쟁 1라운드에서는 ‘기복불교를 원칙론(당위론)의 차원에서 논의해야 하는가 혹은 현실적 실천 가능성의 차원에서 논의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혹은 둘 다 가능한가’라는 연구과제를 남겼다. 이미 언급햇듯이 기복불교 논쟁 2라운드에서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과제를 남겼다: (1) 대승불교를 불설로 볼 것인가 혹은 비불설(대승경전을 위경으로 간주하는 문제 포함) 볼 것인가? (2) 초기불교에도 기복신앙이 포함되어 있는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 (3) 기복과 작복은 같은 것인가 혹은 다른 것인가? (4) 기복은 작복으로 진화(발전)하는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기복불교의 방편을 용인할 것인가 혹은 거부할 것인가?) 마지막으로 기복불교 논쟁 3라운드에서는 초기불교의 교리 해석(불교의 본질 문제나 근대성 개입 주장 포함) 문제, 붓다의 초월성 문제, 여성주의적 시각과 기복불교의 친화성에 대한 해석 문제, 한국 기복불교문화의 발전적 가능성 문제, 그리고 기복불교의 논의를 종교체험적 차원에서 생각해 볼 문제 등 풍성한 연구주제들을 남겼다.

2) 기존 논쟁 너머의 과제

(1) 기복불교와 각종 상징 및 의례의 관계

기복불교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으나 기존 논쟁에서 다루어지지 않은 것도 결코 적지 않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기복불교와 불교의 각종 상징과 의례의 관계를 둘러싼 논쟁일 것이다. 물론 붓다의 제세 당시에는 불상도 없었고 불탑도 없었다. 아니 필요 없었다. 부처님을 직접 경배하기 했지만 지금과 같은 형식의 예불의식은 필요치 않았다. 힌두교 의례에 대한 부정적 가르침은 존재하나 불교식 예불의식을 가르치지는 않았다. 그 모든 것이 붓다로 충분하였기 때문에 경전에도 등장하지 않고 그와 관련된 교리적 해석도 당연히 없다.

그러나 붓다가 열반한 이후에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무엇보다도 붓다의 위대성을 표현할 공간, 상징, 예법이 필요하였다. 하물며 인생의 통과의례에도 특정한 형식의 의례절차가 필요한데, 인류의 스승을 경배하기 위한 상징과 의례가 발전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그리고 불교의 역사가 진화하면서 더욱 풍부해졌다. 그 결과 오늘날 불교는 각종 상징과 의례가 가장 발달한 세계종교가 되었다. 상징의 내적 의미로 종교를 정의하여 시민종교까지도 종교로 간주하는 벨라(R. Bellah)를 따르지 않더라도 그리고 종교의례가 가장 발달한 종교로 불교를 꼽을 뿐만 아니라 불교를 의례에 의해 종교성이 성립하는 종교로 지목한 에밀 뒤르켐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상징과 의례는 특히 불교의 불가결한 요소다. 기복불교도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기복불교야말로 세속적 이해관계를 숨긴 채 이를 더욱 강조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복 논쟁에는 당연히 ‘이러한 상징과 의례는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가 수반된다. 이렇게 볼 때, 마치 만해가 〈조선불교유신론〉에서 미신을 조장하는 각종 회화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었듯이, 향후 기복불교 비판론에서는 당연히 이 문제를 어떤 식으로든 논의해야 마땅할 것이다.

(2) 기복불교와 연기법 및 계율과의 관계

관전자가 보기에 앞의 과제보다 결코 덜 중요하지 않은 과제가 또 있다. 바로 기복불교와 연기법 사이의 관계이다. 기복불교 현상이 연기법에 부합하는지 그리고 어떤 현상은 부합하고 어떤 현상은 부합하지 않은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따져 봐야 한다. 저 유명한 ‘칼라마스인에게 가르침’을 고려하면, 모든 불교 관련 논쟁의 최고 비밀법정은 역시 연기법이기 때문이다. 또한 기복불교는 계율과도 밀접히 연관된다. 특히 기복불교와 금계 사이의 관련성에 대한 치밀한 연구는 불가피하다. 계율은, 기복불교 비판론이든 옹호론이든, 각각의 주장이나 판단의 근거로 제시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3) 기복불교와 종교체험의 관계

종교를 ‘제2의 탄생(The second birth)’이라고 천명한 윌리엄 제임스(W. James)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종교현상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행위 당사자, 즉 불제자의 종교체험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무엇인가를 절실히 기원하고 그 결과를 해석하는 신도들, 그리고 한평생 그러한 신도들과 함께 기도하는 출가자가 기복불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기복불교 논쟁 3라운드를 점화시킨 명법의 사례를 보라)에 대한 실증연구는 절실하다. 예컨대 최근 갤럽에서 시행한 조사결과 중에서 ‘부처님의 가피를 믿는가?’라는 문항에 대한 응답 결과와 그 추이는 기복불교 논쟁에서도 활용 가능한 자료이다. 물론 설문조사도 좋고, 인터뷰도 좋고, 신행수기에 대한 내용 분석도 좋다. 그리고 그 밖의 조사방법도 얼마든지 많다. 아무튼 실증 자료가 뒷받침될 때 현실 적합하고 실효성 있는 논쟁이 이루어질 것임은 분명하다.

(4) 기복불교와 그 파생 효과의 관계

일찍이 막스 베버는 자신의 저서 《힌두교와 불교》에서 불교 특히 대승불교는 붓다가 그토록 경계해 마지않았던 주술성을 수용하였고 그 결과 사회(시민사회)를 ‘주술의 정원’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불교는 사회발전의 저해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베버가 활용하는 문명 진단의 잣대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서구 근대성(합리성)과 문명의 합리화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바로 이곳이 기복불교 논쟁 3라운드에서 명법이 김종만을 공격한 지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복불교 논쟁은 자칫 불교문화를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올려놓고 짧은 다리는 늘려서 맞추고 긴 다리는 잘라서 맞추는 불행한 결과를 초래할 위험성이 항상 도사린다.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기복불교를 옹호한 명법도 ‘프로크루스테스의 덫’을 잘 피해 간 것 같지는 않다.

(5) 기복불교와 사회구조 및 변동의 관계

아마도 기복신앙은 역사상 가장 오래된 종교일 것이다. 동시에 기복신앙은 자신보다 고등종교가 등장할 때마다 여기저기 얻어터져 상처를 입거나 자신의 일부를 빼앗기는 아픔도 감내해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기복신앙은 죽지 않고 살아남아 있으며 흥망성쇠를 거듭하고 있다. 그것은 기복신앙이 우수한 교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기복신앙이 원초적인 신앙이란 강점을 가지고 있기도 하거니와 사회구조 및 변동이 기복신앙에 자양분을 제공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기복불교도 예외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복불교 논쟁을 좀 더 확장시키기 위해서는, 최소한 조선시대 이후(특히 근대 이후) 한국사회의 구조 및 변동이 기복불교의 흥망성쇠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그리고 동일한 조건에서 기독교(개신교와 가톨릭)는 어떻게 응전했는지에 대한 역사사회학적 비교연구도 축적되어야 한다. 물론 학문적 차원에서는 한국사회의 구조 및 변동과 기복신앙의 관계에 관한 훌륭한 연구 성과가 축적되고 있다. 다만 이 경우에도 매우 불행하게도 기복불교와 관련된 연구의 사례를 발견할 수 없을 뿐이다.

4. 상호의존적 발생으로서 ‘Yes’/‘No’ 그리고 논쟁 너머

연기법에 의하면 ‘No’는 ‘Yes’와 동시에 발생한다. ‘예’가 있으면 ‘아니오’가 있고, ‘아니오’가 있으면 ‘예’가 있다. ‘아니오’가 변하면 ‘예’도 변하고 ‘예’가 변하면 ‘아니오’가 변한다. 이렇듯 ‘아니오’와 ‘예’는 상호의존적 발생의 결과이기 때문에, ‘아니오’와 ‘예’는 서로에 대해 독립적인 동시에 의존적이다. 또한 ‘아니오’의 논리가 심화될수록 ‘아니오’의 ‘아니오’ 즉 ‘예’의 논리도 그에 연동되어 심화되고 그만큼 논쟁은 심화된다. 마찬가지로 기복불교 논쟁 3라운드를 구획한 명법의 글처럼 ‘예’가 분화·발전하면 그에 연동되어 ‘아니오’ 측의 글도 더욱 분화·발전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그만큼 논쟁은 확대된다. 그리고 논쟁이 심화·확대되는 만큼 불교도 발전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3라운드까지 진행된 기복불교 논쟁은 매우 값진 경험이었다고 평가하고 싶다.

또한 관전자로서는 향후에도 기복불교 논쟁이 지속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와 관련하여 몇 가지만 덧붙인다. 첫째, 지금까지 ‘아니오(No)’의 카드를 활용하여 기복불교 논쟁을 정리하고 또 평가하였다. 이는 관전자가 논쟁 당사자의 속 깊은 뜻을 모두 헤아리기보다는 ‘아니오’의 카드에 적힌 것을 중심으로 정리했음을 의미한다. 그럴 경우 ‘예’는 지나치게 경시되거나 가려지는 한계가 수반된다. 실제로 ‘예’의 관점에서 보면, 기복불교 논쟁에 제출된 모든 글은 주옥같은 내용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관전자로서는 이를 모두 정리할 수 있는 여유가 없어 안타까웠고, 그런 점에서 이 글에서는 다루지 못한 많은 내용들이 향후 논쟁에서는 반드시 담기게 되기를 바란다. 둘째, 이 글의 목적이 논쟁을 정리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논쟁 당사자 사이의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을 부각시킬 수밖에 없었고 그 차이점마저도 비판에 초점을 맞추어 정리했다. 그렇기 때문에 공통점이나 합의된 것을 정리할 여유를 갖지 못했다. 향후 누군가가 이 점을 중심으로 기복불교 논쟁을 정리한다면 이 글보다 더 생산적인 내용으로 글을 꾸며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모든 논쟁이 ‘예’와 ‘아니오’ 사이의 상호의존 관계로 발전해 나가지만, 논쟁의 논리 바깥에는 ‘예’도 아니고 ‘아니오’도 아닌 유보지대 혹은 중립지대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관전자처럼, 논쟁의 직접적인 당사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유보지대에서 논쟁을 관망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기복불교 논쟁을 정리하는 과정에는 이들 대다수의 의견을 잘 반영하는 것도 중요함을 환기시키고 싶다. ■

 

유승무 / 중앙승가대학교 불교사회학부 교수. 한양대학교 사회학과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석사)을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사회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불교사회학》이 있으며, 공저로 《오늘의 사회이론가들》 《현대사회와 베버 패러다임》 《한국민족주의의 종교적 기반》 《유교적 사회질서와 문화, 민주주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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