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현대 한국불교 10대 논쟁

1. 개요

박해당
서울대학교 강사
조계종의 종조(宗祖) 논쟁은 1,600여 년의 한국불교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고 자부하는 대한불교 조계종의 종조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이다. 종조는 법통(法統) 또는 법맥(法脈)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에, 종조 논쟁은 곧 법통 논쟁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 논쟁은 크게 두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조선 후기에 청허휴정(淸虛休靜)의 법맥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으로, 나옹법통설(懶翁法統說)과 태고법통설(太古法統說)의 논쟁이 그것이다. 이 논쟁의 결과 태고법통설이 조선불교의 법맥으로 정립되었다. 두 번째는 일제강점기 이후 근현대에 벌어진 논쟁이다. 이 논쟁은 두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하나는 보조법통설(普照法統說)과 태고법통설이라는 특정한 법통설을 지지하는 이들에 의해 일제강점기에서 현대까지 수십 년에 걸쳐 벌어진 논쟁이다. 다른 하나는 1980년대 이후 특정한 법통설에 대한 지지를 떠나 기존의 법통설을 객관적으로 검토하여 역사적 사실성과 의의를 밝힌 새로운 연구 경향이다.

2. 조선 후기의 나옹법통설과 태고법통설 논쟁

법맥에 대한 언급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휴정에 의해서다. 고려 말의 태고보우(太古普愚)나 나옹혜근(懶翁惠勤), 조선 초의 득통기화(得通己和) 같은 휴정 이전의 승려들 경우에는 법맥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 이전에도 이장용(李藏用) 〈선가종파도(禪家宗派圖)〉나 일연(一然)의 〈조파도(祖派圖)〉 등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전하지 않기 때문에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또한 현재 남아 있는 《불조종파지도(佛祖宗派之圖)》는 나옹의 제자이자 기화의 스승인 무학(無學)이 만들고 도안(道安)이 보완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로 무학이 지은 것인지 확인할 수 없을뿐더러, 태고법통설이 정립된 뒤 이를 충실하게 따랐던 도안의 손을 거친 것이기 때문에 그 내용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다. 또한 기화를 비롯한 조선 전기 승려들의 문집이나 행장 어디에도 법맥에 대한 논의가 없다.

휴정은 생전에 자신의 법계를 밝힌 적이 있다. 1560년에 지은 〈벽송당대사행적(碧松堂大師行蹟)〉과 1568년에 지은 〈경성당선사행적(敬聖堂禪師行蹟)〉의 발문(跋文)에 실려 있는 것이 그것인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사의 법휘는 지엄(智嚴)이고 호는 야노(埜老)이며 거처한 집은 벽송(碧松)이다. (중략) 먼저 연희교사(衍熙敎師)를 찾아가 원돈교의(圓頓敎義)를 물었고, 다음으로 정심선사(正心禪師)를 찾아가 달마가 서쪽에서 온 은밀한 뜻을 격발하여 현묘한 뜻을 함께 떨쳤으니 깨달음에 이익되는 바가 많았다. 정덕(正德) 무진(戊辰)년 가을에 금강산 묘길상에 들어가 《대혜어록(大慧語錄)》을 보다가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화두에 의심을 품어 오래지 않아 칠통을 깨뜨렸다. 또한 《고봉어록(高峰語錄)》을 보다가 ‘다른 세상으로 날려버려야 한다’는 말에 이르러 이전의 견해를 한꺼번에 떨구었다. 그러므로 대사께서 평생 발휘한 것은 고봉과 대혜의 선풍이다. 대혜 화상은 육조(六祖) 대사의 17대 적손(嫡孫)이고, 고봉 화상은 임제(臨濟) 선사의 18대 적손이다. 아아, 대사께서 (중국의) 바다 밖에 있는 사람으로서 은밀하게 오백 년 전의 종파를 이어받은 것이 마치 정자(程子)나 주자(朱子)가 천 년의 뒤에 태어나 멀리 공자(孔子)와 맹자(孟子)의 실마리를 이어받은 것과 같으니, 유교나 불교나 도를 전하는 것은 하나이다. ……법(法)으로써 파(派)를 논하자면 벽송 선사는 (나의) 할아버지이고 부용(芙蓉) 선사는 아버지이며, 경성 선사는 삼촌이다. 그러니 내가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이를 통해 보자면 휴정이 파악하고 있던 법계는 벽송지엄(碧松智嚴)에서 시작하여 부용영관(芙蓉靈觀)을 거쳐 자신에게 이어지는 법맥이다. 벽송지엄은 연희교사와 등계정심(登階正心)에게 교학과 선을 배우긴 하였지만, 깨달음은 선어록을 보면서 홀로 얻은 것이다. 또한 이 깨달음을 인가해준 스승도 없었다. 따라서 벽송지엄에서 시작되는 이 법맥은 입실면수(入室面授), 즉 깨달음의 직접적인 인가에 의한 사자상승(師資相承)이라는 법맥의 원칙에 따르자면, 기존의 어떠한 법맥과도 관계가 없는, 지엄에 의해 새롭게 시작된 법맥이다.

그런데 휴정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후손들은 지엄을 이전의 한국불교 전통에 이어붙이는 새로운 법맥을 내세웠는데, 처음 등장한 것은 나옹법통설이다. 나옹법통설은 휴정 사후인 1612년에 허균(許均)이 지은 〈청허당집서(淸虛堂集序)〉와 〈사명비(四溟碑)〉에 처음 보이는데, 그 내용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청허당집서〉에 보이는 것은 다음과 같다.

도봉영소(道峰靈炤) 국사가 중국에 들어가 법안(法眼)과 영명(永明)이 전하는 바를 얻어 송(宋)의 건륭(建隆) 연간에 본국으로 돌아와 현풍(玄風)을 크게 떨쳐 말법의 중생들을 구제하였다.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비로소 선양되어 우리나라의 승려들이 이에 임제와 조동(曹洞)의 선풍을 얻어 계승하였으니, 선종에 끼친 공적이 어찌 작다고 하겠는가? 국사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은 도장신범(道藏神範)에게 전해졌으며, 청량도국(淸凉道國)과 용문천은(龍門天隱) 평산숭신(平山崇信) 묘향회해(妙香懷瀣) 현감각조(玄鑑覺照) 두류신수(頭流信修)의 6세를 거쳐 보제나옹(普濟懶翁)을 얻게 되었다. 나옹은 오래 원나라에 머물면서 두루 여러 선지식을 참방하고 원통한 경지에 곧바로 나아가니 빛나는 선림(禪林)의 사표가 되었다. 그 법을 전해 받은 이는 남봉수능(南峰修能)을 적사(嫡嗣)로 하며, 정심등계(正心登階)가 이를 이었으니 곧 벽송지엄의 스승이다. 벽송은 부용영관에게 전해주었으며, 그 도를 얻은 이 가운데 오직 청허노사(淸虛老師)만을 칭하여 가장 뛰어나다고 한다.

이에 따르자면 휴정은 중국 법안종의 법안문익(法眼文益)으로부터 영명연수(永明延壽)를 거쳐 도봉영소-도장신범-청량도국-용문천은-평산숭신-묘향회해-현감각조-두류신수-보제나옹-남봉수능-등계정심으로 이어진 법계(法系)에 속하게 된다.

한편 〈사명비〉에 나오는 법계는 이보다 간략한 형태로서, 영명연수-보조지눌(普照知訥)-나옹혜근-부용영관으로 이어지고 있다. 〈청허당집서〉에 실린 것과 비교해볼 때 나옹혜근에서 부용영관으로 이어지는 법계는 〈청허당집서〉에 나와 있는 것으로써 보충할 수 있으나, 새롭게 등장한 보조지눌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는 난감한 문제이다.

허균이 제시한 법계는 이 밖에도 상당한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다. 이 법계에 따르자면 정심을 거쳐 휴정에게 이어진 종파는 법안종이 된다. 그런데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휴정은 지엄 이후의 법통이 임제종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고, 나옹혜근이나 보조지눌은 결코 법안종 승려가 아니다. 또한 이 법계에 등장하는 정심 이전의 사람 가운데에는 도봉영소, 보조지눌, 나옹혜근만이 실제로 존재했고, 나머지는 실제 존재했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 있었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태고법통설은 편양언기(鞭羊彦機)가 1625년에 지은 〈봉래산운수암종봉영당기(蓬萊山雲水庵鍾峰影堂記)〉에 처음 나타난다. 여기에서 언기는 휴정의 제자인 사명당(四溟堂) 유정(惟政)의 법계를 밝히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제 4문파의 자손들이 임제종의 선풍을 잃지 않은 데에는 그 근원이 있다. 우리 동방의 태고화상이 중국의 하무산(霞霧山)에 들어가 석옥(石屋)의 법을 이어받아 환암(幻庵)에게 전하였다. 환암은 소온(小穩)에게 전하였고, 소온은 정심에게 전하였다. 정심은 벽송에게 전하였고, 벽송은 부용에게 전하였다. 부용은 등계에게 전하였고, 등계는 종봉(鍾峰)에게 전하였다.

또한 시기가 분명하지 않은 때에 언기가 지은 〈청허당행장(淸虛堂行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무릇 사람들에게 보이는 말 속에 임제종풍을 잃지 않은 데에는 본원이 있다. 우리 동방의 태고화상이 중국의 하무산에 들어가 석옥의 법을 이어받아 환암에게 전하였다. 환암은 구곡(龜谷)에게 전하였고, 구곡은 등계정심에게 전하였다. 등계정심은 벽송지엄에게 전하였고 벽송지엄은 부용영관에게 전하였다. 부용영관은 서산등계에게 전하였다. 석옥은 곧 임제의 적손이다.

여기에서 언기는 휴정의 법맥이 임제의 적손임을 강조하면서 그 근원을 태고보우에서 찾고 있는데, 글 전체의 맥락으로 볼 때 사자상승(師資相承)보다는 임제의 종풍에 더 무게가 실린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언기는 지엄 이후의 선풍이 임제종풍임을 분명히 드러내고자 하였지만, 이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사자상승의 법맥이 확실하지 않다는 매우 중대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휴정은 지엄이 간접적으로 대혜와 고봉의 법을 이어받았다고 밝히는 정도로 처리하고 넘어갔지만, 스승으로부터 직접 인가를 받은 제자를 통해서만 법이 전해진다고 하는 선종의 전통에 비추어볼 때 이는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언기는 보우에서 정심으로 이어지는 법계를 제시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는 역사적인 근거를 가진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선언이다.

언기에 의해 그 모습을 드러낸 태고법통설은 기존의 나옹법통설과 더불어 휴정의 문하에서 큰 논란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옹법통설을 버리고 태고법통설을 정통으로 확립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은 1640년에 중관해안(中觀海眼)이 쓴 〈사명당행적(四溟堂行蹟)〉에 실려 있다.

못난 제자인 해안은 오석령(烏石嶺) 망주정(望洲亭)의 가장자리 아랫자리에 앉은 보잘것없는 사람이나, (사명)대사의 정통 제자인 혜구, 단헌(丹獻) 등이 전국의 문도들과 서로 의논하여 말하기를, “청허는 능인(能仁)의 63대, 임제의 25세 직계 자손이다. 영명은 법안종이고, 목우자(牧牛子)는 별종(別宗)이며, 강월헌(江月軒)은 평산으로부터 분파된 것이다. 이 비(허균이 지은 비문이 있는 비)에는 우리 스승이 임제로부터 전해지는 순서가 잘못되어 있으니, 만일 후세의 지혜에 눈멀고 귀먹은 이가 오래도록 전한다면 눈과 귀를 놀라게 할 일이 어찌 없겠는가? 해안은 비록 변변치 못하지만 올바르게 적는 붓은 가지고 있는데, 이 비를 가지고 와서 재삼 청하기 때문에 (중략) 삼가 쓴다.

여기에 등장하는 혜구는 허균에게 사명당의 비문을 청하러 갔던 당사자로서, 나옹법통설을 창안해낸 주역 가운데 한 사람으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따라서 그가 참여한 자리에서 태고법통설로 의견이 결정되었다는 것은 나옹법통설과 태고법통설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이 있었고, 마침내 태고법통설이 휴정 문하에서 정통의 주장으로 확립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태고법통설이 확립된 뒤인 1637년에 회백(懷白)이 지은 〈제월당대사집서(霽月堂大師集敍)〉에서 여전히 나옹법통설을 내세우고 있는 것을 볼 때, 태고법통설이 단번에 조선불교 정통의 법맥으로 공인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휴정 사후 그의 문하에서는 각각 나옹법통설과 태고법통설을 주장하는 대립적인 견해가 있었으나, 태고법통설이 대세를 장악하게 되면서 결국 나옹법통설은 힘을 잃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태고법통설 또한 결코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지니고 있었다. 먼저 선문의 사자상승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는 큰 문제를 낳는다. 선문에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깨달음을 인가하고 인가받는 관계이기 때문에 반드시 몸소 만나서 법을 주고받아야 한다. 그런데 휴정이 밝힌 바에 의하면 지엄은 정심으로부터 선을 배워 깨달음에 많은 이익을 얻기는 했지만, 결코 깨달음을 인가받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지엄의 깨달음은 《대혜어록》과 《고봉어록》에 의해 이루어졌을 뿐, 누구로부터 인가를 받았다는 말은 없다. 이로 보자면 정심은 결코 지엄의 사법사(嗣法師)가 아니다. 휴정이 지엄의 법맥을 정심이 아니라 중국의 대혜와 고봉에게 바로 이었던 것도 바로 이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도 태고법통설에서는 정심을 지엄의 사법사로 규정하고 있으니, 이는 분명 잘못된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구곡각운(龜谷覺雲)과 등계정심의 관계, 구곡각운과 환암혼수(幻庵混修)의 관계, 환암혼수와 태고보우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한마디로 이들이 법을 인가해주고 인가받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였다는 분명한 근거가 제시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법맥을 구성한 것이다.

이처럼 나옹법통설이나 태고법통설 모두 휴정이 말하지 않았던 지엄 이전의 법계를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짜 맞춘 것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따라서 태고법통설이 조선 후기 이래 한국불교의 공식적인 입장으로 자리를 잡았다 할지라도, 이를 둘러싼 후대의 논쟁 가능성을 이미 그 안에 품고 있었다.

3. 근현대의 보조법통설과 태고법통설 논쟁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둘러싸고 종조와 법맥에 대한 다양한 주장들이 제기되었다. 한암(漢巖)은 기존의 태고법통설에서 종조로 떠받든 태고보우에 대해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초조(初祖)일 수는 없고, 조선불교가 태고보우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라고 비판하면서, 남종선을 처음 들여온 도의(道義) 선사가 한국 선불교의 초조(初祖)이고, 이후 구산선문의 조계종 전통이 보조지눌과 수선사(修禪社)로 계승되었다고 주장함으로써 도의종조설과 도의에서 보조지눌로 이어지는 법맥을 내세웠다. 그런가 하면 임석진(林錫珍)은 보조지눌이 조선불교의 정맥임을 전제로, 보조지눌이 속한 사굴산문을 개창한 범일(梵日) 선사를 종조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금명보정(錦溟寶鼎)은 보조지눌이 선교를 통합한 조계종을 개창하였다고 주장하면서 보조종조설을 처음 제기하였다.

이후 이재열(李在烈)과 이종익(李鍾益) 등이 보조종조설을 지지하면서, 기존의 태고법통설을 지지하는 김영수(金映遂) 등과 논쟁을 벌임으로써 이른바 보조법통설과 태고법통설의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담은 논문과 저서를 발표하여 논쟁을 이어나갔으며, 당시 해인사 방장이었던 성철(性徹) 또한 이 논쟁에 뛰어들어 태고종조설을 적극 지지하면서 보조지눌은 물론이고 도의선사까지도 한국불교의 법맥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침으로써 논쟁을 더욱 뜨겁게 달구었다. 성철의 이러한 주장은 1962년 조계종의 종헌에서 도의선사를 종조로, 보조지눌을 중천조로, 태고보우를 중흥조로 규정하여 도의-보조-태고로 이어지는 법맥이 공식적으로 확립되어 공인된 상황에서, 이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파문이 더욱 컸다.

보조종조설이나 태고종조설 모두 구곡각운 이후의 법맥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지만, 구곡각운이 과연 누구의 법을 이었는가 하는 점에서는 의견을 달리했다. 태고종조설과 달리 보조종조설에서는 구곡각운이 환암혼수가 아니라 졸암연온(拙庵衍昷)의 사법제자이고, 졸암연온은 보조지눌의 수선사(修禪社) 법맥에 속하므로 휴정의 법맥은 보조지눌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태고법통설과 보조법통설 논쟁의 핵심은 구곡각운이 환암혼수의 제자인가, 아니면 졸암연온의 제자인가 하는 것인데, 이 논쟁을 판가름할 가장 중요한 문증(文證)은 《동문선(東文選)》에 실린 이색(李穡)의 〈남원승련사기(南原勝蓮寺記)〉이다. 여기에서 이색은 졸암연온과 구곡각운의 관계를 분명하게 서술하고 있는데, 원문은 다음과 같다.

戊戌之秋 其將示寂也 以雲師 於族爲甥 於法爲嗣 付以寺事

이에 대한 해석은 “(졸암이) 무술년 가을에 세상을 떠나려고 하면서, 구곡각운이 혈족으로는 조카이고 불법으로는 법을 이어받은 제자인지라 절의 일을 맡기었다”라는 것이다. 이에 따르자면 구곡은 환암혼수가 아니라 졸암의 법계에 속하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구곡각운이 환암혼수의 제자가 아니라 졸암연온의 제자이고, 보조의 법맥을 잇고 있다고 하는 주장은 충분한 설득력이 있다. 그렇지만 이것이 곧바로 보조종조설을 뒷받침하지는 않는다. 비록 구곡각운이 졸암연온의 제자로서 보조의 법맥을 잇고 있다고 하여도, 구곡각운에서 등계정심을 거쳐 벽송지엄에 이르는 과정에 많은 문제점이 있기 때문이다.

조계종의 종조와 법맥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이 논쟁은 한국불교사의 다양한 자료들을 발굴하고 한국불교의 정체성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켜 이에 대한 연구를 가속시키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87년에는 보조사상연구원이 발족하여 보조지눌에 대한 연구발표를 꾸준히 지원하고, 학술지 《보조사상》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발표함으로써 보조지눌과 한국 선불교 전통에 대한 연구를 확장하고 심화하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논쟁은 또한 논쟁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부정적인 모습도 드러내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를 성철의 《한국불교의 법맥》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보조법통설에 대한 비판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에서 성철은 보조법통설이 지닌 문제점을 하나하나 지적하고 비판하였다. 이 과정에서 자료의 자의적인 해석과 잘못된 이해 등 보조법통설을 주장하는 이들이 범한 오류와 주장의 부당성이 상당 부분 드러났다. 한편 성철은 보조법통설을 비판하면서 태고법통설을 강력하게 옹호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자료의 변조와 잘못된 해석, 방법론적 오류 등 그의 주장이 지닌 문제점들 또한 그대로 드러났다. 결과적으로 특정한 법통설을 지지하는 이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이 논쟁은 저마다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데에만 초점을 맞춤으로써 법맥을 객관적이고 실증적으로 규명하는 데에는 한계를 보였다.

4. 현대의 연구 경향

1980년 중반 이후 조계종의 법맥과 종조에 대한 연구는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이 흐름을 주도한 이들은 김영태, 최병헌을 비롯한 한국불교사를 전공하는 역사학자들이었다. 이들은 특정한 주장을 지지하지 않은 채, 가능한 한 엄밀하고 객관적인 학문적 방법론을 적용하여 기존에 제시된 법맥에 대해 연구 검토하였다. 그 결과 환암혼수는 태고보우뿐만 아니라 나옹혜근의 문도이기도 하였는데, 법의 인연으로 보자면 태고보우가 아니라 나옹혜근과 더 가깝다는 것, 구곡각운은 환암혼수가 아니라 졸암연온의 제자라는 것, 구곡각운과 벽계정심은 시대적인 차이로 볼 때 직접적인 스승과 제자의 관계일 수가 없다는 것, 나옹법통설이나 태고법통설 모두 휴정 사후에 그 후손들이 임의로 만든 계보일 뿐이라는 것 등이 밝혀졌다. 요컨대 직접적으로 깨달음을 인가하고 인가받는 인맥을 기반으로 하는 법맥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난 것이다. 결국 보조법통설이나 태고법통설 모두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은 허구의 법맥을 제시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이 논쟁 또한 허구의 법맥을 둘러싼 논쟁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들은 기존 법맥의 역사적인 허구성을 드러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러한 법맥이 등장하게 된 역사적인 배경과 맥락을 통하여 각각의 법통설이 지닌 의의를 나름대로 규명하고자 하였는데, 법통설마다 강조점의 차이는 있지만, 시대별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밝히기 위한 노력의 결과로 제시된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현재 조계종에서 공식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법맥은 종조 도의선사, 중천조 보조지눌, 중흥조 태고보우로 이어지는 법맥이다. 이는 해방 이후 이른바 비구와 대처승의 갈등과 정화운동을 거치면서 종조와 법맥이 여러 차례 바뀌는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1962년 독립 종단인 대한불교 조계종 종헌에서 공식적으로 선포한 것으로, 실질적으로는 도의종조설과 보조종조설, 태고종조설을 절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5. 남는 문제

조계종의 법통설과 관련하여 반드시 규명해야 할 또 하나의 문제는 휴정 이후의 법맥에 관한 것인데, 휴정 이전의 법맥에 대한 관심과 연구에 비해 볼 때 이에 대한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재 조계종 종헌이나, 모든 법통설에서 휴정 이후의 법계는 부용영관의 제자인 휴정과 부휴(浮休)의 양 법맥이 이어지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휴정 이전 불교계의 주류는 나옹에서 무학, 기화로 이어지는 법맥으로서, 이는 휴정과는 다른 법맥이다. 그리고 이 법맥이 갑자기 끊겼다고 볼 수 있는 근거도 없다. 따라서 임진왜란 이후 휴정, 부휴의 법맥이 불교계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하여도, 모든 조선의 승려가 이 법계에 속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런데도 단지 휴정, 부휴의 법맥이라고만 한다면, 사실은 같은 법계에 속하지 않는 이들이 모두 한 법계라고 주장하는 억지스러움을 면할 수 없다.

휴정, 부휴의 법계 상승에서도 문제는 드러난다. 선문의 법계란 단순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아니라, 반드시 깨달음을 인가하고 인가받는 관계여야만 한다. 그런데 조선 후기의 승려 진묵(震黙)이 임종에 이르러 제자들의 요청에 의해 자신의 법계를 휴정에게 이어붙이는 것에서 보듯이, 이런 원칙이 꼭 지켜진 것도 아니었다. 근대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로 평가받는 경허(鏡虛)의 경우 비록 스스로 휴정/부휴의 법계에 속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스승 없이 혼자 깨달았으며, 깨달은 뒤에 이를 인가해준 스승도 없었다. 따라서 입실면수의 규정을 엄격하게 적용하자면 경허는 결코 휴정/부휴의 법계에 들어가지 못한다. 더욱이 경허에서 만공으로 이어지는 정통의 선문임을 자임하는 덕숭 문중에서 공인하고 있는 경허의 법맥에는 선승이 아닌 만화보선(萬化普善)이 경허의 스승으로 자리 잡고 있는 등, 현대에 등장한 법맥에도 문제가 있다.

이처럼 입실면수에 의한 사자상승의 원칙을 곧이곧대로 적용할 경우 휴정 이후의 법계에서도 휴정 이전의 법계에서 나타난 문제점들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현재의 조계종이 의심할 여지 없이 휴정의 법계라고 인정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고 하겠다.

조계종의 법맥과 종조에 대한 여러 가지 주장과 논쟁을 살펴보면, 그 바탕에는 직접적인 깨달음의 인가를 통한 사자상승이라고 하는 인맥 중심의 법맥관이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에서 휴정의 법통을 만들어내기 이전에 이미 중국에서는 이러한 법맥관에 의거하여, 이른바 석가모니와 가섭의 삼처전심(三處傳心)에서 시작되어 보리달마에 이르는 서천이십팔조설(西天二十八祖說)을 지어내었으며, 보리달마에서 혜능(慧能)에 이르는 중국의 선종 법계를 만들어내었다. 따라서 그 영향을 강하게 받은 조선의 선종 승려들이 자신들의 법계를 만들어야 할 필요를 느꼈을 때, 나옹법통설이나 태고법통설 같은 법맥을 만들어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의 조계종이 정하고 있는 법맥에 대한 규정 또한 이러한 사자상승의 법맥관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이를 그대로 적용할 경우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첫째, 현재의 공식적인 법계는 도의에서 지눌을 거쳐 보우로 이어지는 것인데, 이들은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따라서 조계종의 법맥은 입실면수의 원칙에 맞지 않는 이전의 법맥과 원칙에 맞춘 이후의 법맥이라는 모순되는 흐름을 형성하게 된다.

둘째, 한국불교는 임제종의 적손임을 주장할 수 없게 된다. 조계종의 종조인 도의는 서당지장(西堂智藏)의 법을 이었는데, 서당지장은 마조도일(馬祖道一)의 제자이고, 마조도일은 남악회양(南嶽懷讓)의 제자이다. 그런데 임제종의 종조인 임제의현(臨濟義玄)은 마조도일에서 백장회해(百丈懷海), 황벽희운(黃檗希運)으로 이어지는 법맥을 이어받고 있으며, 서당지장은 이 법맥에 들어가지 않는다. 따라서 도의를 종조로 하는 한국불교의 조계종은 인맥으로 볼 때 임제종의 정맥이라고 할 수 없게 된다.

셋째, 한국불교는 간화선에 대해서도 정통임을 주장할 수 없게 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간화선은 송의 대혜종고(大慧宗杲)에서 시작되었으며, 이를 우리나라에 받아들여 수행법으로 완성한 사람은 보조지눌이다. 그런데 입실면수의 전통에 의하자면, 지눌은 대혜로부터 직접 인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간화선의 정맥이라고 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문제는 태고보우를 종조로 할 경우에도 나타난다. 태고법통설을 주장하는 성철이 최종적으로 제시한 법맥에 따르면 석존에서 시작하여 달마와 혜능을 거쳐 이어진 법맥은 원오(圜悟)를 지나면서 대혜와 호구(虎口)의 둘로 나뉜다. 그런데 태고보우가 인가를 받은 석옥청공은 대혜가 아니라 호구에서 비롯된 법맥이다. 따라서 청공을 통해 보우로 이어지는 법맥은 간화선의 정맥이 아니다. 결국 어떤 경우에도 한국불교의 간화선은 대혜종고에서 인맥으로 이어진 정맥이 될 수 없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입실면수의 사자상승을 전제로 하는 태고법통설을 토대로, 그것을 한국의 선불교 전통과 연결시키려 할 때에는 한국불교 스스로가 임제종의 방계, 비정통으로 자리매김될 수밖에 없다. 결국 임제종이라는 중국의 종파에 대한 혈연적 순수성을 지키고자 하는 인맥 중심의 법통관이 오히려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모순된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현재 조계종이 공식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도의와 보조지눌, 태고보우를 모두 포괄하는 법맥은 스스로 규정한 입실면수의 원칙과 모순된다. 그럼에도 이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한국 선불교의 여러 전통을 모두 포괄하려는 입장 때문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여전히 입실면수와 전법게(傳法偈)라고 하는 인맥 중심으로 법맥이 이어질 것임을 천명하고 있기 때문에, 인맥을 증명할 수 없는 과거의 전통과 인맥으로 이어질 미래의 법계라는 모순이 가져다주는 부담을 끝내 떨치지 못한다.

이처럼 많은 문제를 야기하는 인맥 중심의 법계는 불교의 정신에도 맞지 않는다. 붓다는 결코 후계자를 정한 적이 없으며, 《열반경(涅槃經)》에서 천명한 바와 같이 ‘사람이 아니라 말, 말이 아니라 뜻’에 따라 그것이 바른 법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것이 불교의 기본적인 입장이다. 따라서 단지 나의 스승이 누구인가만을 따지는 법통론은 결코 진리를 추구하는 수행자의 자세가 아니다.

더 나아가, 인맥 중심의 법통관은 폐쇄적인 문중의식으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인맥 중심의 법통관을 더욱 고착시키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 사자상승의 전통에서 스승은 진리의 유일한 판단 기준이며, 거스를 수 없는 절대적 권위로 자리를 잡는다. 이는 결국 특정한 스승에서 특정한 제자로 이어지는 닫힌 인맥 관념을 형성하게 되고, 여기에 속하지 않는 다른 이들이나 전통을 배척하는 배타적인 문중의식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는 특정한 문중만이 법통을 이은 정통이고, 나머지는 방계라는 잘못된 법통 관념을 낳게 된다. 이러한 관념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선의 가르침에도 어긋나는 것일뿐더러, 열린 태도로 진리를 추구해야 할 수행자의 마음을 특정한 계파에 묶어버리는 매우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온다. 따라서 인맥을 통해서 법통을 확인하려고 하는 태도는 버려야 한다.

실상을 들여다볼 때 현재의 대한불교 조계종은 순수한 선종이 아니라 한국불교 1,600년의 다양한 역사적 전통들을 모두 이어받고 있는 종합적인 종파이다. 이미 종헌에서 경전공부, 염불, 지주 등을 허용하고 있고, 총림에는 선원과 더불어 강원, 율원, 염불원 등을 갖추어야만 하는 것이 조계종의 현실적인 모습이다. 그럼에도 단지 선종의 법통만으로 조계종의 법통을 따지기로 하자면, 이는 조계종 전체를 아우르는 법통이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이제 조계종은 선종의 사자상승이라는 제약된 관점을 버리고 한국불교의 종합적 전통이라는 열린 관점에서 어떤 것을 이어받고 어떤 것을 버리며, 어떤 것을 재창조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논의하여 새로운 법통관을 정립하고 그 위에서 새로운 법통을 세워야 한다. 그럴 때만이 도의선사나 보조지눌은 물론이려니와 태고보우나 청허휴정조차도 잘못 씌워진 법통의 굴레를 벗어나 진실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종조와 법맥을 둘러싸고 벌어진 기존의 논쟁에 대한 반성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가르침은 바로 이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

 

박해당 / 서울대학교 강사.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한림대 태동고전연구소(지곡서당) 연구원 등을 역임했으며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성균관대학교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역서로 《중국불교(상, 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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