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훈 한국방송통신대 법학과 강사

1. 문제 제기

한국사회가 다원적 민주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가야 할 길은 아직 멀다고 생각한다. 평탄하지만은 않은 이 길 위에서 반드시 극복해야 할 언덕이 헌법 상 권리인 ‘종교의 자유’ 문제가 아닐까 한다. 불교계 역시 한국사회의 구성원이자 종교이므로 이 문제와 무관할 수 없다. 이제 불교계가 우리 사회에서 어떤 정체성을 가져야 하는지 그리고 그 동안의 문제점은 무엇인지 따져보기로 한다.

필자는 서울 대광고 3학년이었던 강의석군이 학교당국과 종교의 자유보장을 위해 힘겹게 싸우고 있을 때, 한겨레신문 지면을 통해 우리 군의 ‘종교의 자유’ 문제 역시 간과할 수 없는 인권문제임을 밝힌 바 있다.1) 사실 이 글의 부수적 목적 중의 하나는 강의석군의 분투와 거의 같은 시기에 발생했던 한 정치인의 ‘서울시 봉헌’ 발언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공직자로서의 자신과 오만한 개인을 구분하지 못하는 정치인의 모습은 다원적 민주사회를 향한 우리의 노력이 더욱 심도 있게 숙고되어야 함을 방증 해주었으며 동시에 공적 영역에서 ‘종교의 자유’라는 법적 권리가 충족되고 있지 못함을 추측하기에 충분했던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필자는 이 사건 자체가 지닌 사회적 문제보다도 이후 불교계에서 보인 반응에 주목하고자 한다. 불교신도를 중심으로 108명이 “이명박 서울시장의 ‘하나님께 서울 봉헌’ 발언 때문에 정신적 손해를 입었다”며 이 시장을 상대로 1천80만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내었다. 원고들은 1인당 10만원씩 1천80만원의 배상금을 청구하였는데, 이에 대해 서울중앙지법 민사5단독 고종영 판사는 판결문에서 “피고의 언행에 고위 공직자로서 부적절한 점이 있지만 이로 인해 원고들이 위자료를 받아야 할 만큼 심대한 정신적 고통을 입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사실 2천만원 이하의 소송가액은 소액심판대상으로 분류된다. 승소 여부와 관계없이 소액심판이라는 제도적 특성 상 사회적 공론화는 힘들어 질 것이 분명했다. 1천 80만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한 불교신도들의 취지는 아마도 1천80만원이라는 금액과 108명의 원고라는 불교적 상징성에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 사례를 통해 불교계의 부족한 전략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사례가 보여 준 핵심문제는 현재의 한국불교가 지닌 대사회적 담론 형성의 무능력이다. 영악하게 소송전략을 수행해야 한다는 차원의 비판이 아니다.

이 무능력의 원인을 필자는 두 가지 차원에서 분석하고 그 대안을 ‘종교의 자유’의 문제를 통해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는 『한겨레 21』과의 인터뷰에서 조성택 고려대 교수가 지적한 콤플렉스다. 조 교수는 “서구에서는 불교가 과학과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종교라며 관심을 갖고 있다.

이것이 지나쳐 불교가 과학적이라는 얘기까지 한다. 황우석 감싸기는 한국 불교가 서양이 불교를 보는 이런 관점을 너무 많이 받아들여 ‘우리 불교는 이런 점에서 차별성이 있다’ ‘기독교보다 더 현대적인 종교다’라고 내세우려는 의식이 강하게 나타난 것이다. 근대 이후 현재까지 우리 역사에서 기독교가 종교로서 한 역할과 비교하면 불교의 역할은 적다. 문화적으로 불교가 우수하다는 자부심은 있지만 근대 이후 불교는 극히 제한적인 역할을 했고, 오히려 반사회적ㆍ반민주적ㆍ반민족적 행태를 보여 왔다. 이런 콤플렉스가 과학의 문제(황우석 사건)를 계기로 터진 것이다”라고 날카롭게 지적했다.2) 이 콤플렉스는 엄밀히 말하면 기독교에 대한 콤플렉스라고 할 수 있다.

불교계의 양적 성장의 발자취는 사실 ‘기독교 따라하기’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교경영, 병원, 방송 등 대사회적 행보에서 불교적 정체성을 찾기란 매우 어렵다. 유비적 차원에서 ‘교목-교법사’, ‘군목-군법사’ 라는 호칭과 역할의 추론은 차이가 없다.

이러한 콤플렉스는 법적 대응과 같이 신중을 요하는 결단마저도 무모하게 ‘108’이란 상징적 숫자를 내세우며 성급하게 사회를 향해 돌진하는 양상의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법적 대응은 순진한 것을 넘어선 무언가 사회적으로 유능한 것이고 세련된 것이라는 의식이 존재 했었는가는 따져보아야 한다. 이 사건이 과연 법적 조치가 필요한 사건인가를 판단하고, 이 판단을 근거로 법적 조치가 필요한 것이라면 어떤 법리에 근거하여 합리적으로 어떤 전략으로 대응할 것인가를 궁구해야 한다.

단순히 법을 이용하는 것은 대사회적 대응을 세련되게 한다는 의식에 기인하여 이를 숙고과정 없이 진행한다면, 정치적ㆍ도덕적ㆍ사회적 논제들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보다 대중동원과 선동의 구국기도회 같은 집회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세력을 과시하는 것으로 대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행보와 차이가 없게 된다. 안타까운 것은 객관적 성찰과 자성보다 불교계 내부에 항상 “기독교는 지금…하고 있는데” 라는 의식이 지배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불교계 지식인들의 부적절한 연구 자세와 여론형성이다. 이 두 번째 문제는 첫 번째 문제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불교계의 대사회적 방향을 이끌어야 하는 위치에 있는 불교학자들의 의식 속에는 항상 불교를 적절성 없이 서구의 이론과 유사하다고 주장하여 불교의 우수성을 강조하려고 하는 일종의 ‘변종 오리엔탈리즘’이 있어 왔다. 이것은 콤플렉스에 의한 황우석 사건과도 상통한다고 본다. 이 두 가지 문제를 극복해야 하는 것이 불교계가 당면한 과제이며 한국사회에서의 위상과 정체성을 올바르게 확립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두 번째 문제점부터 보다 세밀하게 검토해 보자.

2. 서구 콤플렉스의 양상과 응용불교학

다음은 한 불교학자가 불교계 대중학술계간지 『불교평론』이 특집으로 기획한 ‘현대사회를 향해 불교가 말한다’ 라는 지면을 통해 주장한 내용이다. 그는 “세존이 주장한 국가의 분배정책의 기준은 미국의 정치경제학자 롤스(J. Rawls)의 견해와 상당한 유사점을 지니고 있다. 롤스는 소득분배의 공평이란 사회구성원의 현재 사회적 위치에 관계없이 사회구성원의 동의가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공평하다고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최저 소득 집단인 극빈자들의 후생을 최대한 올려줄 수 있는 소득분배정책이라면 일단 공평하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3)

지면의 한계 상 롤스의 입장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지만, 롤스의 입장은 가령 다섯 명이 빵을 잘라서 나누어 먹는다고 할 때 분배자를 비롯한 모든 구성원이 누가 어느 조각을 먹게 될지 모른다는 전제에서 공평하게 빵을 자를 것이라는 생각에 기초한 것이다. 합리적 선택을 중심에 둔 그의 논의는 공리주의를 겨냥한 것이다. 그의 정의론을 세존과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다. 또한 그가 사회에서 가장 열등한 구성원들에게 실익이 증가되는 조건에서 불평등을 인정한다는 입장은 불후한 이웃에 대한 제도적 배려를 통해 공동체의 우호적 분위기를 고양시키고자 한 것은 분명하다.4)

그러나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롤스의 원초적 입장에서의 정의에 대한 추상적 사색의 순간은 흡사 고향을 떠난 고독한 이민자들이 이민선의 갑판에서 희망의 땅을 그리며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이상향을 고대하던 순간을 연상시킨다. 최정운 교수는 이를 미국인들의 살아있는 신화일 것이라고 말한다.5)

롤스는 가장 미국적인 자유주의 사상가이다. 세존의 입장과 유사하다고 주장한 롤스의 정의론을 여실히 이해한다면 세존과 출발점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확연히 알 수 있다. 세존이 사회적으로 열악한 지위의 중생들에 대한 자비심에서 논의를 시작했다면, 롤스는 자신에 대해 정보가 없는 무지의 베일이라는 다소 관념적인 가상의 인간관에서 정의에 관한 논의를 시작한다. 롤스의 정의론이 갖는 사상사적 의의는 세존과 전혀 다른 지점에 있다.

그가 인용한 『구란단두경』의 내용이 자신의 주장처럼, 불교의 평등과 자비에 관한 실천이념에 근거한 것이라면 더욱 롤스와 관계 설정하기가 어렵게 된다.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불교의 자비 이념과 롤스의 자유주의는 사유의 출발점이 전혀 다르다.

소위 ‘응용불교’라는 주제로 이루어지는 연구들은 많은 문제점들을 내포하고 있다. 가령 21세기 산업사회에서 불교윤리의 사회통합적 기능에 관한 연구6)의 경우, 흥미로운 주제에도 불구하고 내용 상 20세기 서구에서 진행되었던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논쟁 서두에서 제기 되었던 지극히 피상적인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이미 일련의 경향성을 지니고 존재하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 ‘육바라밀’의 내용을 맥락 없이 나열하는 것으로 구성되었다.

이 연구에서는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논쟁에 관한 어떤 논의도 다루어지지 않았다. 냉정하게 말하면, 서구의 정치철학적 논의와 정치경제학적 논의가 어떤 양상으로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연구자가 ‘육바라밀’을 대안으로 등장시킬 수 있는 이론적 가능성은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지적하고자 하는 문제의식은 첫째 불교 연구자들이 불교의 내용과 서구 사상이 유사한 것을 지적하여 ‘이것이 서구 사유에 대한 21세기 불교적 대안이다’라고 제시하는 태도와 둘째 이미 서구에서 심도 있게 논의된 내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내용조차 소화하지 못한 채 아주 조야한 문제의식만을 가지고 맥락 없이 불교적 사유가 해결책으로 제시되는 것과 같은 태도이다.

첫째 문제는 이미 서구에 유사한 사유가 있으므로 서구적 사유에 대한 대안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는 모순이 존재하고, 둘째 문제는 불교인조차도 자본주의화 되어 실천 상의 한계를 가진 상황에서 구체적인 사회과학적 분석 없이 이상적인 내용을 열거하여 소위 현실성 없는 이야기로 전락하는 상황이 문제의 핵심이다. 또한 ‘불교사회복지’라는 명칭으로 석 · 박사 학위 청구논문으로 제출된 많은 논문들도 그 타당성 여부를 다시 검토해야 할 수준이다. 기독교와 다른 차원의 복지 논의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 논문들의 대부분은 ‘복지’ 개념 자체에 대해서도 저자의 입장이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위의 예는 예일 뿐이다. 모두 열거할 수는 없지만 불교학자들이 지닌 ‘변종 오리엔탈리즘’은 심각하게 불교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필자가 지적하는 ‘변종 오리엔탈리즘’이란 다음과 같다. 오리엔탈리즘이 서구 중심적 사유라면 그것의 변종은 서구의 00사상과 불교의 00사상이 유사하므로 불교가 우수한 사상이라는 주장을 하는 것과 합리적 논거도 없이 불교는 서구종교나 사상보다 우월하다 내지 서구적 사유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등의 입장을 말한다. 이 지점에서 필자는 소위 응용불교학이라는 기존의 연구태도에 대해 전면적인 재고가 필요하다고 강력히 주장하고자 한다.

물론 의미 있는 비교연구 모두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비교의 적절성과 서구에 대한 이해의 타당성일 것이다. 이승환 교수는 오리엔탈리즘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이제 동양은 동양인 자신을 대변하지 못한다. 서구인의 시각으로 재구성한 격의(格義) 동양학만이 진리로 인정받을 뿐이다”라고 했다.7) 그의 지적처럼 이러한 문제는 크게 보면 불교계만의 문제는 아니며 우리 학계 전반의 문제일 수 있다. 그러나 불교계의 문제는 더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불교계는 이 ‘격의’조차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있으며, 불교는 신앙이라는 학문적 논의 이상의 다른 차원을 갖기 때문이다. 불교계가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경우, 종교적 폐해를 양산할 위험성이 잠재할 수 있고 황우석 사태와 같은 사건들을 통해 이러한 문제들이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사회와 담을 쌓고 사회적 요청에 대해 불교계 밖의 인사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선문답을 하던 것이 과거 불교계의 대사회적 문제였다면, 정치적으로 시민사회가 중요한 위치로 부상한 민주화 시대에 준비 없이 외부적 요인에 의해 격상된 대사회적 불교계의 위상이 그 구성원들로 하여금 기독교 물량주의를 추종하게 하거나 ‘변종 오리엘탈리즘’을 만들게 하였다고 주장한다면 비약일까? 『불교평론』을 통해 현대 사회에 말문을 연 불교계의 지식인이 사회의 방향을 선도할 발언을 하지 못한 것도 이러한 사회적 담론형성의 무능력의 원인인 콤플렉스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3. 콤플렉스의 극복과 종교의 자유

그렇다면 이러한 콤플렉스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먼저 숭실대학교가 일정 종교교육을 졸업요건으로 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주장한 원고에 대해 대법원이 판결한 입장을 살펴보자.

대법원은 “사립대학은 종교교육 내지 종교선전을 위하여 학생들의 신앙을 가지지 않을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학생들로 하여금 일정한 내용의 종교교육을 받을 것을 졸업요건으로 하는 학칙을 제정할 수 있다” 또한 “기독교 재단이 설립한 사립대학이 학칙으로 대학예배의 6학기 참석을 졸업요건으로 정한 경우, 위 대학교의 대학예배는 목사에 의한 예배뿐만 아니라 강연이나 드라마 등 다양한 형식을 취하고 있고 학생들에 대하여도 예배시간의 참석만을 졸업의 요건으로 할 뿐 그 태도나 성과 등을 평가하지는 않는 사실 등에 비추어 볼 때, 위 대학교의 예배는 복음 전도나 종교인 양성에 직접적인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고 신앙을 가지지 않을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학생들에게 종교교육을 함으로써 진리ㆍ사랑에 기초한 보편적 교양인을 양성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고 할 것이므로, 위 대학교의 학칙은 헌법상 종교의 자유에 반하는 위헌무효의 학칙이 아니다” 라고 하였다.8)

판례의 입장과 달리 필자가 만나 본 기독교계 종립학교의 학생들은 기도 강요, 개종 강요 등의 ‘종교의 자유’에 반하는 인권침해를 경험했다고 한다. 특히 학교를 선택할 수 없는 중ㆍ고등학교의 학생들은 그 피해가 더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의미 있는 대법원 판례를 더 검토해 보자. 지하철 전동차 구내에서 한 선교행위를 경범죄처벌법상 인근소란행위로 본 원심의 판단에 심리미진의 위법이 있다는 이유로 원심판결을 파기한 판례이다. 대법원은 “타인의 주목을 끌고 자신의 주장을 전파하기 위하여 목소리나 각종 음향 기구를 사용하여 이루어지는 선교행위가 경범죄처벌법 제1조 제26호 소정의 인근소란행위의 구성요건에 해당되어 형사처벌의 대상이 된다고 판단하기 위해서는 당해 선교행위가 이루어진 구체적인 시기와 장소, 선교의 대상자, 선교행위의 개별적인 내용과 방법 등 제반 정황을 종합하여 그러한 행위가 통상 선교의 범위를 일탈하여 다른 법익의 침해에 이를 정도가 된 것인지 여부 등 법익간의 비교교량을 통하여 사안별로 엄격하게 판단해야 한다”라고 하였다.9)

이러한 대법원의 판례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한국의 사법부가 취하는 정교분리 원칙에 근거한 ‘종교의 자유’에 관한 법해석 입장만이 아니다. 바로 종교의 과잉이 한국사회에서 얼마나 폐가 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다른 구성원의 권리를 얼마나 침해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특정 영화가 신성모독이라는 이유로 상영되는 것을 법적으로 제지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이 사건은 다원적 가치를 존중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방증 한다. 정교분리의 원칙을 명시한 대한민국의 헌정체계에서 법으로 자신의 종교교리에 근거한 주장을 보호해 달라는 기독교계의 요구는 이성을 상실한 과잉 그 자체였다.

이러한 종교적 과잉은 적극성을 수반한다. 오히려 불교계에서는 이러한 적극성을 부러워하는 목소리가 종종 들린다. 불교계의 자성은 기독교의 적극성에 비해 불교인들이 소극적이라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소극성을 극복하고, 기독교 물량주의가 추구하는 방향을 추종하여 함께 새로운 과잉을 만드는 것은 불교의 대사회적 책무가 아니다. 황우석 사건도, 서울시 봉헌 발언에 대한 순진한 법적 대응도 이러한 과잉에의 무비판적 동참, 즉 적극성에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4. 맺으며

우리 불교의 한국사회에 대한 책무는 우리 스스로 성숙하는 것이다. 얼마 전 참여불교재가연대는 만해 NGO 센터를 개관해 공간 부족으로 활동이 위축되는 NGO들의 고충을 해소해주는데 기여했다. 마치 불교계의 NGO가 시민사회를 선도하는 모습이었다. 또한 종교자유정책연구원은 불교 지식인을 중심으로 타종교의 양심 있는 지도자들과 연대하여 ‘종교의 자유’를 위한 다양한 사회참여 활동을 추진하고 있다.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서 정치ㆍ사회ㆍ문화 전반에서 기여한 바를 폄하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기여에 비례하여 과잉된 기독교는 이제 우리 사회의 큰 폐가 되고 있다. 불교계는 이러한 기독교적 과잉을 콤플렉스로 인해 추종 할 것이 아니라 다원적 가치를 존중하는 모습의 실천으로 성숙해야 한다.

위에서 지적한 서구이론과의 적절성을 결여한 비교태도, 그리고 점점 더 사회적 폐를 불교계가 만들어가는 양상 모두 서구와 기독교에 대한 콤플렉스에 기초하고 있음을 분석하였다. 이제 불교 종립학교가 먼저 변화하여 학생들이 ‘종교의 자유’를 향유할 수 있도록 변화하고 다른 것을 포용하는 다원적 가치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할 때이다.

예를 들어, 현재도 기독교계 학교보다 권리 침해적 성격이 적지만, 동국대가 필수과목인 불교과목에서 직접적인 종교의식을 피하고 교양적 강의에 비중을 두어 타종교 신앙인을 배려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말한다. 또한 군에서 복무하는 군법사들이 균형 잡힌 의식으로 병사들의 인권을 소중히 하고 다른 종교인들을 선도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 불교계에는 기독교가 학교나 병원 등 종립시설의 직원 채용 시 종교적 제한을 둔다거나 타종교인을 차별하는 것을 관행처럼 하는데 또는 군에서 목사들은 병사들에게 기도 강요를 하고 있는데, 우리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손해 보는 것 아닌가 하는 피해의식이 있을 수도 있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밝힌 것처럼, 우리 불교는 콤플렉스로 인해 ‘우리만 손해 보는 것이 아니냐’는 피해 의식을 버리고 대법원, 헌법재판소와 같은 사법기관이나 정부보다 먼저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다원적 민주사회의 완성에 참여하여 진정한 사회적 담론 형성과 대사회적 위상을 재정립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정훈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법학과 강사. 1997년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졸업. 2003년 ‘상대주의적 양심의 개념’을 주제로 성균관대학교에서 석사 학위 취득하고, 서울대학교 법학과 박사과정 수료. 주요 경력으로는 2002년 육군 군종장교 전역, 현재는 종교자유정책연구원 연구위원,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법학과 강사 (법철학/ 법사상사/ 헌법)를 하고 있다. 또한 2004년 과학기술부 ‘세포응용연구사업단 윤리위원회’의 세포응용연구관련 윤리프로그램개발과 서울대 통일학 연구사업의 남북한법의 비교와 통일법의 모색 등의 연구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논문으로는 「조래학의 특질에 관한 소고지」(서울대 법과대학 법학연구 제10권), 「조선시대 예의 법적 특성에 관한 연구」(한국법사학회 법사학연구 제33호, 200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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