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과 마음은 다른 것이다. 생각이 물결이라면 마음은 바다와 같다.

불교에서 깨달음은 열반 또는 해탈로 표현된다. 열반은 그 원어가 니르바나(nirvāna)로서 삼독(탐, 진, 치)의 불길이 꺼진 적멸한 상태이며, 해탈은 목사(moksa)로서 삼독으로부터 벗어난 완전한 자유의 경지이다. 그런데 삼독의 불길이 꺼진 적멸과 삼독으로부터 벗어난 완전한 자유의 경지는 오직 마음에 완전히 계합할 때만 주어지는 것이다. 마음은 시공간과 생사윤회를 초월한 완전한 적멸·자유이다. 그래서 마음은 천당과 지옥을 벗어나 있으며, 불에 타지도 않고 물에 젖지도 않으며 도끼로 내리찍을 수도 없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고 했고, 《반야심경》에서는 “생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고 했다. 이것은 시공간이 없다는 말이다. 시공간은 바뀌어가는 모양을 기억하고 저 모양과 이 모양을 구분하여 붙인 이름이다. 생각(의식)은 모양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모양들은 끊임없이 변화해간다. 그러므로 시공간은 생각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러나 실상(實相)은 곧 무상(無相)이라고 하듯이 생각의 본성은 고정된 모양을 갖고 있지 않다. 모양이란 표면적으로 떠오르는 현상일 뿐이다. 마치 바다의 수면이 바람에 따라 끊임없는 다양한 모양으로 물결치듯이, 생각도 마음의 기연(機緣)에 따라 끊임없이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나 물결이 아무리 다양하게 변하더라도 바다는 항상 그대로이듯이 생각이 아무리 다양하게 변하더라도 마음에는 변화가 없다.

만법이 한 마음, 그러므로 한 찰나의 마음 잘 쓰면 삼세가 평안하다.

물결이라는 모양은 바람을 따라 생기고 사라지는 물의 움직임이다. 마찬가지로 생각이라는 모양은 인연을 따라 움직이는 마음의 움직임이다. 마음은 움직임을 통하여 생각이라는 모양으로 나타나고 사라진다. 마음이 생기면 만법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만법이 사라진다. 그러므로 마음 밖에 어떠한 모양(현상)도 있지 않다. 마음을 확인함으로써 깨달음을 얻는 것, 그것이 선(禪)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 밖에서 깨달음을 찾는 것은 모래로 집을 짓는 것과 같다. 마음 이외의 그 어떤 존재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선의 가르침이다. 한 마음이 삼라만상 우주의 전부이다. 그래서 한마음이 뒤틀리면 이 세계 전체가 뒤틀리고 한마음이 온전하면 이 세계 전체가 평화롭다. 예컨대, 한 마음을 잘 쓰게 되면 전생, 현생, 내생을 바로 잡게 되고 한 마음 잘못 쓰게 되면 전생, 현생, 내생 삼세를 그르치게 된다.

깨달음은 자등명(自燈明), 자기인가(自己認可)이다.

인간은 찰나의 마음을 지킴으로써 영원의 안락과 구제를 받게 된다.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 것은 자신 이외의 누구도 할 수 없다. 자신의 마음을 지킴으로써 자신이 구제받는 것, 그것이 불교이고 선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불교는 철저한 자력종교이며, 자업자득하는 인과법을 기본 원리로 한다. 복락과 은총도 자기가 자신에게 내리는 것이며 재앙과 징벌도 자기가 자신에게 내리는 것으로, 다른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선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되면 자신이 구제되었음을 알게 되는데, 그것이 인가(認可)이다. 그러므로 선불교에서 인가라는 것은 타자(스승 등)가 아닌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인가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나 스스로 부처(Buddha)가 되는 것이지, 어떤 다른 존재가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불교는 부처를 믿는 종교가 아니다. 부처만 쳐다보고 믿는 것은 남의 재산만을 탐하는 걸인과 다를 바 없다. 백날 남의 재산을 탐해 봤자 그림 속의 떡,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가 되는 것은 내가 나 안에서 부처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인 스스로가 부처가 되는 길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부처는 내 마음 이외의 그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내가 부처이기 때문에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며 자등명(自燈明)할 수밖에 없다.

깨달음의 순간은 지금이며, 그렇기 때문에 지금이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이다.

자등명은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이뤄지는 것이지, 10년 뒤에 이뤄지거나 다른 곳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지금 현재 우리 생활 속에서 열반과 해탈이 주어지고 부처가 실현되기 때문에 부처는 “나의 가르침을 귀 있는 자는 듣고, 눈 있는 자는 보라”고 하였다. 여실지견(如實知見)은 이와 같이 눈 있는 사람은 누구나 볼 수 있고 귀 있는 자는 누구나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해야 한다. 삼천 배, 만 배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깨달음의 근처에도 갈 수 없다’는 것은 분명 부처의 진의라 할 수 없다. 부처는 중생을 위해 가르침을 설하였지 결코 깨달은 자를 위해 설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중생이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가르침과 깨달음은 없다.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중생 그 자신이 바로 부처라는 것을, 윤회하는 우리 현실 자체가 바로 열반의 장소임을 설한 것이다. 따라서 지금 여기 오늘 이 순간이 내 인생의 전부이며, 이곳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바로 지금 깨닫지 않으면 영원히 깨달을 수 없다. 내일은 결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벽암록(碧巖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내 인생에 가장 행복한 날은 언제인가. 바로 오늘이다. 내 삶에서 절정의 날은 언제인가. 바로 오늘이다. 내 생애에서 가장 귀중한 날은 언제인가. 바로 오늘이다. 어제는 지나간 오늘이요, 내일은 다가오는 오늘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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