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효정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과정

머리말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물러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새어머니 정순왕후를 유폐시키고 배다른 동생 영창대군을 뜨거운 방에서 태워 죽이는 강상의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결집시켜 국가를 위기에서 구해내고 중립외교를 통해 청과 명 사이의 외교에서도 성공한 그는 정치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조선의 왕 중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유능한 군주였다.

하지만 그는 후궁에게서 배출된 왕자 즉 서자라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반면에 영창대군은 비록 후실이나마 왕비의 아들이었다. 종법 질서가 이데올로기로 기능한 조선시대에 그것은 너무도 중요한 문제였다. 동생이 자신의 자리를 빼앗을지도 모른다는 신분적 콤플렉스는 그로 하여금 무리수를 두게 했고, 이는 결국 광해군을 왕위에서 몰아내는 부메랑이 되었다.

이 비극의 근본적인 발단은 선조의 첫 번째 왕비 의인왕후 박씨에게 후사가 없었던 데서 비롯된다. 수려한 외모에 후덕한 인품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의인왕후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石女)이었다. 선조의 사랑을 받는 후궁들을 시기하지 않고 어린 시절 어머니(공빈 김씨)를 잃은 임해군과 광해군을 친아들처럼 돌보며, 항상 불경을 가까이 하는 그녀를 궁중의 여인들은 ‘살아있는 관세음보살’로 불렀다.

공빈 김씨, 인빈 김씨 등 선조의 후궁들이 왕자들을 연달아 생산하는 구중궁궐 속에서 단 한명의 후사도 배출하지 못한 채 국모 자리를 지켜야했던 그녀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그 안타깝고 답답한 마음은 그녀로 하여금 더욱 불교에 매달리게 한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 분명하다. ‘전국 명산대찰에 의인왕후 원찰이 아닌 곳이 없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그녀는 불사에 열심이었다. 전국 방방곡곡 유명한 사찰에 자신을 위한 불단을 마련하고 아들 생산하기를 빌었다. 건봉사, 법주사 등 여러 사지(寺誌)에는 그녀가 보시한 기록들이 등장한다.

의인왕후의 경우는 조선시대 왕실 여인들의 불교신앙 형태를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아들을 낳기 위한 발원과 고통스러운 현실에 대한 위로, 그리고 내세에 극락왕생하기를 발원하는 마음은 ‘불심’이라는 이름으로 왕실의 비빈들에게 폭넓게 퍼져있었다.

우리는 보통 조선시대를 숭유억불의 시대로 부르곤 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불교관련 기사들만 보면 당시에 어떻게 불교가 살아남았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불교에 대한 핍박정책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정사에 등장하지 않는, 각종 사지와 문집, 고문서에 나타나는 불심의 흔적들은 조선시대 불교가 훨씬 민중 속으로 깊게 파고들었으며, 불교의 명맥이 뿌리 깊게 이어져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중후기를 거치면서 한글 경전이나 진언집, 다라니경의 인쇄는 훨씬 더 증가했으며, 사찰의 중수나 괘불, 개금불사, 불상의 조성 등도 오히려 빈번해졌다.

조선시대 불교를 지탱시킨 요인으로 유교의 한계나 민중 속으로 파고들어간 불교계의 노력, 임진왜란 당시 승군들의 활약 등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으나 그 중에서도 왕실 비빈들의 공로를 빼놓을 수가 없다. 그들은 왕의 부인으로, 혹은 어머니로서 왕에게 불교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왕실의 사재를 털어 사찰 중수의 대시주자로 참여했다. 조선후기에 이르면 왕실원당은 왕실이나 궁방의 사유재산으로 기능하면서 사찰은 법적 보호를 받고, 왕실로서는 개인적인 기도처이자 경제적 기반으로 사찰을 활용했다.1) 이들의 불교신앙은 성리학적 질서 속에서 사회적 기득권을 박탈당한 불교계를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수호하는 최고의 방호벽 역할을 했다.

본고에서는 조선시대 왕실여인들이 불사 흔적이 나타나는 대표적인 사례들을 통해 조선시대 왕실여인들이 얼마나 불교에 심취했는지, 그리고 왜 그들이 불교에 의지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왕실의 대표적인 호불 왕비들

조선시대 왕실 여인들 중 몇 퍼센트가 불교신자였을까. 정확하게 수치를 내릴 수 있는 사안은 아니지만, 조선왕조 최초의 왕비 신덕왕후 신씨로부터 마지막 왕비 순정효황후 윤씨에 이르기까지 거의 대부분의 왕비들이 사찰에 기도처를 마련하거나 불사에 동참한 기록이 남아있다. 전체 구성원의 80~90%가 하나의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그 종교에 대한 기호라기보다는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문화에 가깝다. 왕실 여인들에게 있어서 불교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왕비로부터 말단 무수리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여인들이 수백 년간 지속해온 ‘공통의 문화’였다.

조선초기까지만 해도 국가의 억불정책과는 별도로 왕실의 상제례는 불교식으로 치러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중종ㆍ명종 대를 기점으로 성리학에 근거한 주자가례가 정립되면서 모든 의식이 유교식으로 전환되었고 왕과 왕비들의 추모시설은 능침사 대신 종묘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내세를 논하지 않는 유교는 왕실 여인들이 정신적으로 의지하기에 종교적인 성격이 너무 미약했다. 또한 이들이 감내해야 했던 고독과 불확실한 내세에 대한 희망을 해결해줄 수 있는 최고의 종교는 불교였다. 불교가 한반도에 유입된 이래 1000여 년간 사찰에 불단을 마련하고 득남발원을 하는 데 익숙했던 조선의 여인들에게 불교는 어머니로부터 딸에게, 시어머니에게서 며느리에게로 자연스럽게 전승되는 기복의 종교였다.

조선시대 왕실 여인들의 불교신앙은 몇몇 특정 인물들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거의 대다수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부분이다.

조선왕조가 개국한 후 최초의 왕비로 경복궁에 입궐한 태조의 두 번째 왕비 신덕왕후 강씨는 결혼 전부터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전부터 불교에 귀의하도록 설득하고, 무학대사를 왕사로 봉하게 한 것도 신덕왕후의 조언에 의해서였다. 태조가 신진사대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궁궐 내에 내불당을 건립한 것도 신덕왕후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태종비 원경왕후 민씨와 세종비 소헌왕후 심씨 또한 불교신자였으며, 세조의 부인 정희왕후는 조선시대 사지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화주 중의 한 명이다. 정희왕후는 세조의 병이 깊어지자 남편의 쾌유를 빌기 위해 오대산 상원사를 중창하고, 세종의 영릉을 이전하면서 신륵사를 중수했다. 또 세조가 죽은 후에는 광릉 인근에 위치한 봉선사를 89칸 규모로 중창하여 광릉의 능침사로 삼았다. 조카로부터 왕위를 찬탈한 남편 세조, 그리고 젊은 나이에 요절한 두 아들 덕종과 예종을 먼저 앞세운 정희왕후로서는 마음의 짐을 벗을 수 있는 위안처가 불교 이외에는 없었을 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녀는 평생 동안 전국 각지의 사찰에 대시주자로 참여하면서 여러 사지에 이름을 남겼다.

정희왕후의 며느리이자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 한씨 또한 독실한 불자였다. 인수대비의 남편 의경세자의 원당인 정인사의 중수는 정희왕후와 인수대비의 불심으로 이루어진 불사였다. 정희왕후는 젊은 나이에 요절한 아들을 위해 1471년 정인사를 중수했고, 이 절이 완공되자 인수대비 한씨는 경작지 500석을 하사하고 1473년 석가탄신일에 낙성식을 거행했다.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는 왕실여인들을 위한 지침서로 유교적 여성관을 담은 『내훈』이라는 책을 펴낼 정도로 유교적 소양이 높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왕실의 어른으로서 유교를 내세웠던 반면 자신이 위안을 구한 곳은 불교였다. 인수대비는 불교경전을 산스크리트어, 한문, 언문으로 각각 번역한 불서를 남길 정도로 불교에 심취했다. 인수대비는 남편과 아들의 복락을 위해 간경도감을 통해 불경간행에 적극 나섰으며, 직접 『금강경』 등을 필사하기도 했다. 1471년 간경도감이 폐쇄되자 그 이듬해부터는 직접 흩어진 불경 목판을 수집해 인쇄했다. 이렇게 해서 발간된 불경이 총29편 2,805권에 달한다.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 윤씨,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 윤씨, 선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 등 이어 등장하는 왕비들 또한 사찰 중수기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이러한 불교신앙은 조선후기까지 꾸준히 이어졌다. 팔공산 파계사에서 불공을 드리고 영조를 낳은 숙빈 최씨, 건봉사에 석가상을 조성하고 팔상전을 지어준 영조의 비 정성왕후2),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씨, 정조의 후궁 화빈 윤씨, 순조를 낳고 수락산 내원암에 칠성각을 조성한 수빈 박씨, 봉은사 괘불을 조성한 순조의 후궁 순화궁 김씨3), 금산 보석사를 중창해 원당으로 삼은 고종비 명성황후, 무량사 산신각을 조성한 영친왕의 어머니 엄비4), 조선왕조가 망한 후 낙선재에서 살아가다 말년에 ‘대지월’라는 법명을 받고 불교에 귀의한 조선의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 윤씨에 이르기까지 왕실여인들의 불교신앙은 꾸준히 이어졌다.

2. 사찰기록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시주 내역

(1)해인사 불사와 인수대비

지난해 해인사에서는 법보전 목조비로자나불을 개금하는 과정에서 복장 유물이 대거 발견돼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 복장유물 가운데 15세기말 학조 대사가 쓴 ‘해인사중수기’가 후령통 내부에 포함돼 있었는데, 여기에는 성종 21년(1490) 해인사에서 중창 불사가 진행된 과정과 시주자들의 명단이 상세히 기록돼 있었다.

여기에서 눈길을 끄는 부분은 바로 해인사 중수 및 대장경 판당(板堂)의 보수가 왕실의 여인들, 즉 정희왕후와 인수대비, 인혜대비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해인사에 소장된 팔만대장경은 원래 강화도 대장경 판당에 보관되다가 태조 7년 해인사로 옮겨져 보관되었다. 그런데 판당이 너무 비좁고 누추하여 세조는 즉위 4년(1458) 경상감사에 명하여 비좁고 허술한 판당을 50여 칸 증축했다. 이후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비가 새고 서까래가 썩어 몇 년 지나지 않아 무너질 지경에 이르자 정희왕후는 판당의 중수를 위해 학조(1431~1591)를 주지로 임명하고 공사를 주관하도록 했다. 그런데 몇 해 동안 장마와 가뭄이 연달아 겹쳐 공사를 채 시작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정희왕후마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정희왕후로부터 약속받은 조정의 지원이 내려지지 않자 학조는 결국 성종 18년(1487) 조정에 나아가 판당을 고쳐주지 않는다면 주지 직을 사임하겠다는 엄포를 놓게 된다.

학조가 아뢰길 “신이 일찍이 정희왕후의 지시를 받고 해인사 대장경 판당을 중창하려 했으나 일은 크고 힘은 미약하여 (…중략…) 청컨대 다시 젊은 승려를 뽑아서 맡기십시오”
그러자 성종은 “네가 만약 중수할 수 없다면 마땅히 일찍 와서 고할 것이지 어찌하여 이제 와서 사퇴하느냐”라고 다그쳤다.
학조 왈 “국가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중수할 수 없기 때문에 아뢰는 것입니다”
그러자 성종은 승정원에 전교하였다.
“경상감사에게 지시하고 자금을 보조하게 하고 부족하면 내수사에서도 보태도록 하라. 다만 판당만 보수하고 절은 중수하지 말라”5)

이 사건으로 인해 결국 해인사 판당의 보수가 결정됐다. 하지만 사헌부 장령 봉원효는 “대장경이 없어지더라도 신 등은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웃나라 사신이 와서 요구하면 우리나라는 불교를 믿지 않으므로 경판이 다 없어졌다고 한다면 도리어 아름답지 않겠습니까?”라고 아뢴다.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대간들이 떼를 지어 와서 판당 보수의 부당함을 아뢰었고 두세 번 사직서까지 제출하기에 이른다. 성종은 “해인사 판당은 국가에서 새로 짓는 것이 아니라 단지 보수할 뿐”이라고 설득을 거듭했지만, 간관들이 10일 이상 문제를 삼자 결국에는 귀후서(歸厚署)6)의 면포 2천5백 필을 해인사에 주지 말 것을 전교했다. 대신 왕실의 재산을 관리하는 내수사에 명하여 백미 1500석, 면포 800여필, 역승(役僧) 300여명을 공급하도록 하고 도료장(都料匠) 박중석을 파견하여 판당을 증ㆍ개축하도록 했다. 이후 해인사는 3년에 걸친 대대적인 중창 불사를 진행했고 해인사 전체가 전면 보수되었다.

표면적으로는 성종이 내수사의 자금을 융통하여 불사를 진행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인수대비와 인혜대비의 압박이 있었다. 학조는 ‘중수전말기’에 “해인사의 일신(一新)은 인수ㆍ인혜 양 대비의 신념과 원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며 “인수대비께서 대중의 공론을 어기면서도 대사를 성취시켜 드디어 법장을 숭봉토록 하고 불상은 당당한 위의를 나타냈다”고 서술했다. 또한 인수대비를 찬양하여 ‘화염 속에 핀 연꽃’이라고 찬탄했다. 이 기록은 성종이 두 대비들의 압력에 의해 해인사 중수를 강행할 수밖에 없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 하겠다.

복장에서 발견된 중수기에는 왕실 여인들의 시주내역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204명으로 이루어진 명단의 대부분이 왕실의 비빈들로 구성돼 있으며, 그 중에는 귀인 권씨, 소의 이씨 등 첩지를 받은 여인뿐만 아니라 상궁과 일반 궁녀들까지 다수 포함돼 있다.

또한 자수궁, 수성궁 등 궁방의 여인들과 함께 현숙 공주, 혜숙 옹주, 제안대군 부인, 영응대군 부인 송씨 등 왕실의 친인척들도 다수 참여했다. 그리고 세조의 사위 하성부원군(河城府院君) 정현조(鄭顯祖)7) , 덕종의 사위인 당양위(唐陽尉) 홍상(洪常)8), 계성군(桂城君)9), 안양군(安陽君)10) , 완원군(完原君)11), 회산군(檜山君)12), 봉안군(鳳安君)13) 등 일부 남자 왕친들도 시주에 참여했다.

이처럼 왕실 여인들뿐만 아니라 왕실의 남자들까지도 불사에 동참한 사실은 왕비와 비빈들의 불교신앙이 그들의 남편, 아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음을 시사한다.

(2) 금강산 사찰들에 대한 왕실의 지원

조선 왕실의 여인들이 밀접한 연관을 맺었던 사찰들은 주로 명산대찰이나 수도 인근의 사찰들이 많다.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 속리산 등 명산에 위치한 사찰이 ‘기도의 효력이 큰 사찰’로 선호되었고, 또 왕실 능침사찰로 왕릉 근처에 위치한 사찰이 지정되었다.14)

특히 법기보살이 상주하는 신령스러운 산으로 숭앙받은 금강산의 건봉사, 유점사, 표훈사, 신계사 등 여러 사찰들은 왕실의 원당으로 지정돼 왕의 위패가 봉안되었고 비빈들이 왕자 생산을 기원하는 불공도량으로 자주 이용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건봉사는 세조, 예종, 효종, 영조 등 역대왕의 위패가 대대로 모셔질 정도로 조선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던 대표적인 왕실원찰이다. 이 때문에 건봉사는 조선초기부터 꾸준히 왕실의 경제적 지원과 정치적인 보호를 받았다. 현재 남아있는 건봉사 사지에 남아있는 기록 중에서 왕실 관련 시주 내용만 뽑아보면 다음과 같다.

선조 35년 의인왕후가 복호(復戶) 5결을 하사하다
숙종 9년 명성왕후가 불장(佛帳)과 초의(卓衣)를 하사하고 천금(千金)을 하사하여 불상을 개금하다.
경종 4년 주지 채보가 9층탑을 건조(建造)하여 부처의 치아를 봉안하니 명성왕후가 천금(千金)을 하사하다.
영조 30년 정성왕후가 상궁 이씨, 안씨를 보내 석가상을 조성케 하고 팔상전을 건립하여 원당으로 삼다.
영조 52년 정순왕후가 국재(國齋)를 설하고 별시(別提) 이인배(李仁培)를 보내 재(齋)를 감하다.
순조 5년 왕비 김씨가 국재를 설하고 금자대병(金字大屛)과 화엄경 1부를 하사하다.
순조 18년 귀빈임씨가 정롱일산기(籠日傘旗) 등을 희사하다
순조 20년 효의왕후가 평상을 하사하여 어각에 안치하다
헌종 14년 무신 순원왕후가 금품과 즙물(汁物)을 하사하여 본사 승려 동화(東化)로 기도를 행하다.
고종 16년 기묘 대웅전, 어실각, 사성전, 병부전, 범종각, 향로전, 보안원, 낙서암, 백화암, 청련암을 중건하다. 왕실과 각궁과 각재보로부터 불구와 금품을 다수 희사하다.
대왕대비 조씨로부터 만전(萬錢)을 하사하자 사승 보운(寶雲)으로 하여금 명부전, 사성전의 단청을 입히고 십육전의 후탱을 회성(繪成)하다.15)

『건봉사지』에 나타난 왕실 여인들의 불사내용은 토지와 의복, 금, 경전, 즙물, 불구, 돈 등 매우 다양하다. 또한 후기에 들어서는 거의 대를 건너뛰지 않고 왕실의 꾸준한 지원이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남아있는 『건봉사지』는 근대에 들어 만해 한용운이 정리한 것이다. 조선전기의 내용은 거의 남아있지 않고, 선조대 이후부터의 기록 부분만 비교적 상세히 남아있는 것은 전란과 화재로 대부분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조선후기 왕실원당에 대한 궁납의 폐해가 심각해지자 정조는 건봉사에 선대왕들의 어필이 봉안되어 있음을 들어 막중한 양의 궁납과 세역을 덜어줄 것을 명했다.16)

금강산 건봉사의 경우에는 워낙 왕실과 밀접한 사찰이었기 때문에 거의 대를 거르지 않고 왕실로부터 지원을 받은 기록이 사지를 통해 전해지지만 다른 금강산 사찰들의 경우에는 왕실과의 밀접한 관계를 각종 문집을 통해 간헐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신익성17) 의 『유금강내외산제기(遊金剛內外山諸記)』 이정구 외, 『17세기의 금강산 기행문』18)에는 금강산에 위치한 사찰들에 왕실여인들이 시주한 내용들이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돼 있다.

표훈사를 들른 기록에는 “비단에다 금물을 들여 그린 부처 영정이 있는데 그 아래 부분에 소인이 있었다. 그 소인은 덕흥대원군 부인이 대원군을 위하여 명복을 빌고 아울러 여러 왕손의 장수를 기원한다는 내용인데 선조 임금의 어렸을 때의 이름으로 썼다”19) 고 적혀 있다.

덕흥대원군은 선조의 생부 이초(李)이다. 표훈사는 세조의 원찰로 지정된 사찰인데, 이 기록에 따르면 덕흥대원군 집안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조의 어렸을 때 이름이 쓰여 있다는 것으로 보아 선조가 즉위하기 전 덕흥대원군 집안에서 표훈사의 불화 조성에 시주를 크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신익성이 유점사를 들른 기록에는 “왼쪽 응진전에는 나한상을 안치하였고, 오른쪽 해장전에는 여러 불승 및 대비의 글씨, 정명공주가 손으로 옮겨 적은 불경이 매우 많았다”20) 는 내용이 남아있다.

여기에서 대비는 인목대비를 지칭하며, 정명공주21)는 인목대비의 딸이다. 인목대비는 광해군이 폐서인된 후 자신의 아들 영창대군과 아버지 김제남을 위해 안성 칠장사를 원찰로 삼고 전국의 여러 사찰에서 아들의 명복을 빌었다. 유점사에도 대비의 글씨와 정명공주가 직접 쓴 불경이 남아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절에서 아들과 아버지의 명복을 빌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점사본말사지』에 따르면 영조대에 유점사에는 명례궁22) 과 어의궁23)의 원당이 설치되어 선조와 인조, 현종의 영정을 봉안했다. 명례궁은 인목대비가 폐서인됐을 당시 머물렀던 덕수궁의 별칭으로, 당시 인조반정으로 복권된 인목대비와 관련된 덕수궁의 왕실여인들과 인조의 직계 친인척들이 인조반정의 성사를 감축하는 목적으로 유점사를 왕실원찰로 삼은 것이라고 추측된다.

(3) 불화 화기에 전해지는 왕실여인들의 불심

조선시대 왕실여인들의 시주 내역을 가장 상세하게 파악할 수 있는 사료는 불화 하단에 기록된 화기(畵記)이다. 일반적으로 불사 시주자들의 이름은 후대로 지나면 문서가 소실되거나 조각 부분이 마멸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기 마련이다. 특히 이름 없는 단월(시주자)들의 이름은 사지를 증판하는 과정에서 대부분 생략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불화나 괘불의 조성에 참여했을 경우에는 그 작품이 전해지는 한 화기 속에 포함돼 함께 전해지고 있다. 현재 전해지는 대부분의 조선후기 불화에는 하단에 화기가 남아있어 시주자들의 상세한 내역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불교를 믿었던 신도들은 여성들이 대부분이었고, 그 중에서도 불교에 후원자가 될 수 있는 여성들은 돈과 권력을 가진 왕실의 여인들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1995년에 발간된 조선불화 화기집에는 이름조차 확인되지 않는 수많은 상궁들이 명단이 올라있다. 현등사 칠성도, 보문사 신중도, 보문사 중단도, 견성암 시왕도, 예천 용문사 영산회상도, 십육나한도, 시왕도, 신중도3, 봉은사 괘불, 판각후불도, 삼불회도, 감로왕도, 영산회상도, 신중도 2, 경국사 감로왕도, 망월사 괘불, 불암사 지장보살도, 감로왕도, 불암사 괘불 등에는 상궁들의 이름이 적혀있다.

근대에 들어서도 왕실여인들의 불화 시주 동참은 계속되었다. 봉원사 신중도, 봉원사 삼장보살도, 봉원사 구품도, 신중도2, 신륵사 신중도, 청암사 수도암 아미타회상도, 청암사 아미타회상도, 청암사 신중도3, 직지사 칠성도, 전등사 신중도, 전등사 아미타회상도 등에 상궁들의 시주 내용이 남아있다.

그 가운데 봉은사 괘불은 1886년 헌종의 후궁인 순화궁 김씨를 비롯한 여러 상궁들의 시주에 의해 조성된 작품이다. 봉은사에서는 이 밖에도 판전 비로자나불, 대웅전 삼세불화, 영산전 영산회상도 등에 상궁들이 시주에 참여한 기록이 남아있다.24)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흥천사 괘불은 정조ㆍ순조와 관련된 왕실 친인척들이 조성한 불화이다. 괘불의 단월목록(檀錄)에는 영안부원군25), 영명부위26), 숙선옹주27), 동녕부위, 명온공주, 창년도위, 복온공주, 덕온공주, 상궁 최씨, 상궁 서씨 등의 이름이 올라있다.28)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예술가가 위대한 작품을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의 작품 세계를 인정하고, 경제적 후원자가 돼 주는 인물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예술작품의 상당수는 왕실여인들의 경제적 지원을 통해 조성될 수 있었다.

불화에 등장하는 왕실 여인들의 이름은 두 가지 사실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첫째는 조선시대 왕실 여인들의 신앙이 대비, 왕비부터 이름 없는 나인이나 상궁들에게까지 폭넓게 퍼져 있었다는 점이며, 둘째는 이들의 경제력이 조선시대 불교를 지탱시킨 엄청난 경제원으로 기능했다는 점이다.

3. 불교의 정치적 외호 역할

왕실 여인들의 불교신앙은 국왕이나 왕자, 공주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유교적 이데올로기를 구축해야 할 사명을 띠고 있는 국왕이라 할지라도 어머니와 부인이 독실한 불교신앙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불교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태종이나 세종, 세조, 성종, 영조, 정조 등 여러 왕들이 불경을 즐겨 읽고 말년에 불교에 귀의했던 사실만 보더라도 이들이 어머니나 부인에게서 받은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왕실 여인들은 사찰의 시주자로서 불교의 경제적 지지세력이 됐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남편이나 아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불교를 보호하기 위한 여러 가지 압력을 가했다.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성종이 직접 정사를 맡게 되자 조정의 대신들은 세조-정희왕후로 이어진 호불정책을 거두고, 유교적 정치질서를 바로잡을 것을 요구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도첩제의 폐지였다. 승려가 되는 제도 자체를 법으로 원천 금지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성종은 결국 1492년 11월 도첩제를 폐지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이 소식이 전해지자 인수대비는 아들에게 직접 언문교지를 내려 억불정책의 문제점에 대해서 조목조목 지적한다.29) 교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불교는 선왕의 유제(遺制)로 대전에 실려 있다.
② 역대 제왕이 불교를 배척하고 싶어도 끊지 못한 것은 인심이 동요할 것을 걱정해서이다.
③ 군정이 부족하다고 하여 승려되는 것을 금지한다면 이는 오랑캐에게 약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④ 중국은 집마다 불당이 있어 불교 숭상하기를 이와 같이 하는데도 오히려 오랑캐를 잘 막고 있다.
⑤ 승려에 대한 탄압으로 그들이 굶어죽게 된다면 이는 화기(和氣)를 상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⑥ 승려가 산중에 살기 때문에 도적을 예방할 수 있다.

어머니의 요구를 묵살하자니 유교의 최고덕목인 효를 저버리게 되고, 그렇다고 신하들이 지켜보는 마당에 다시 도첩제를 인정하자니 성군으로서의 이미지가 무너질 판이다. 결국 인수대비의 반대로 인해 도첩제 폐지 문제는 흐지부지 흘러갔고, 이후 조정에서 승려가 되는 것을 허용하지도 않고 막지도 않아 도첩제는 유야무야한 제도가 돼버렸다.

성종의 비 정현왕후 윤씨 또한 독실한 불교도였다. 그녀는 성종이 죽자 그의 왕패를 봉은사에 안치한다. 연산군 7년 신하들이 왕에게 그 진위를 묻고 따져들었을 때 연산군은 이 조치가 정현왕후 윤씨의 명이지 자기의 의사가 아니라고 항변하는 내용이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한다.30)

정현왕후는 중종반정이 일어난 이듬해인 중종 2년 1월 연산군에 의해 폐지된 양종의 복구를 요청하지만 이 시도는 유신들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결국 양종을 다시 복구한 것은 명종의 섭정이 된 문정왕후에 의해서였다. 명종을 왕위에 앉힌 후 20여 년간 국정을 주무른 문정왕후는 한편으로는 조선전기 최대의 호불 왕비로 평가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시대 유신들로부터 가장 많은 비난을 당한 왕비이기도 하다.

문정왕후는 섭정의 자리에 오른 후 당시 불교계에서 명망이 높았던 보우를 국사로 임명하고 명종 7년 봉은사를 선종의 본산으로, 봉선사를 교종의 본산으로 정하는 한편 승과를 부활시켰다.

도첩제가 아주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승려가 되는 길을 어렵게 만든 제도라면, 승과는 과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승려가 되고 승려시험에 등위를 매겨 국가에서 일정한 지위를 인정해주는 제도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성종대에 도첩제까지 없애고 승려가 되는 길을 원천적으로 막으려 했던 상황에서 승과를 부활시켰으니 유신들의 반대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조정의 대신들은 끊임없이 상소를 올리며 승과를 폐지하라고 주청했으나 윤씨는 그때마다 이를 묵살했다. 그녀의 불교계에 대한 옹호는 조응규라는 유생이 도오라는 승려를 구타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내관을 보내 도오가 맞은 만큼 조응규를 때리라고 명할 정도였다.

여자로서 정치에 참여하고 게다가 적극적인 호불정책을 폈으니, 문정왕후에 대한 당대 유학자들의 평가는 상당히 폄훼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저자거리에는 보우와 문정왕후가 연인사이라는 소문까지 공공연하게 돌 정도였다.
문정왕후 이후 정치의 전면에 나서서 불교에 대한 옹호정책을 실시한 왕비는 사실 없다. 이후 유교적 질서가 자리 잡고, 또 사림들의 세력이 공고해지면서 더 이상 여인들이 정치의 전면에 나설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하지만 왕실의 여인들이 불교를 신앙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불교계는 엄청난 정치적 지지세력을 확보한 것이었다. 이들의 불교신앙은 양란 이후 전화에 소실된 사찰들의 중창을 할 수 있는 중요한 경제적 기반으로 활용되었고, 전국 각지의 명산대찰은 왕실의 원당이라는 명목으로 지방 정부의 가혹한 납세를 피할 수 있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유신들은 승려라는 계층에 대한 허용 자체를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았다. 이것은 임진왜란 당시 승군을 조직하여 왜적을 무찌른 유정과 휴정에 대한 공로를 참작해서이기도 하지만, 이에 앞서 승군이라는 조직이 국가의 납역제도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을 비롯한 전국 각지의 군사시설을 확충하고 다리, 궁궐 등의 대공사를 하는데 승군들이 주요 노동력으로 동원되었다. 하지만 승려들이 국가의 주요 납역(納役) 대상으로 인식되면서 사찰에는 군역을 비롯해 각종 특산물을 공급하라는 요구가 끊임없이 내려오게 된다.

이때 이들의 보호자임을 자처하는 이들이 바로 왕실 여인들이었다. 왕실 비빈들은 왕에게 요청하거나 혹은 직접 해당 관청에 교지를 내리는 방법으로 왕실 관련 사찰들에 내려진 과중한 납세의 시정을 요구했다. 그리고 이 요구는 대부분 수용됐다.

맺음말

만약 우리의 전통문화 속에 서원이나 향교와 같은 유교의 문화만 남고 불교가 모두 사라졌다면 우리 역사가 얼마나 단조롭고 딱딱했을까. 사찰이라는 공간을 통해 전승된 불화와 단청, 괘불, 불상 등이 남아있기에 후대인들은 예전 사람들의 종교적, 예술적 감성을 확인할 수가 있다.

우리에게 전해지는 불교의 외형적인 산물들은 사실상 조선시대 여성들의 불심에 의해 이뤄지고 전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여성들의 불심이 만들어낸 나룻배를 통해 경전과 승려, 그리고 불법은 안전하게 오늘날로 전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배를 조성할 수 있었던 주체는 돈과 권력을 가진 인물일 수밖에 없는데, 조선시대에 돈과 권력을 가진 여성은 다름 아닌 왕실의 여인들이었다.

태조비 신덕왕후에 의해 심어진 왕실 여인들의 불교는 조선왕조의 마지막 황후 순정효황후의 불교 귀의로 이어진다. 조선 왕실에 처음으로 불법의 씨를 심은 이도 여자였으며, 마지막까지 불씨를 꺼뜨리지 않은 채 그 빛을 계승한 이도 여자였던 것이다.

이들이 불교를 신앙한 수준이 상당히 높았다고 말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간혹 인수대비처럼 산스크리트어로 불경을 사경할 수준 정도의 똑똑한 여성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비빈이나 궁중 나인들은 불교를 기복적인 차원에서 신행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이 지닌 영향력은 조선의 불교를 수호한 가장 크고 든든한 울타리로 기능했다. 이들의 불심은 수많은 사찰의 대들보가 되었고, 수백 수천여점의 불화가 되었으며, 또 부처님의 금빛 옷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혹자는 이들이 아들낳기를 발원하기 위해, 자신의 권력을 지탱시키기 위해 불사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기복적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이들이 지극히 인간적인 존재들이었으며, 인간으로서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과 비애를 불교를 통해 극복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조선시대는 여성이 살아가기에는 너무도 가혹한 사회였고, 특히 종법질서의 핵이라 할 수 있는 왕실여인들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런데 유교 이데올로기의 중심부인 왕실에서 불교신앙이 끊임없이 지속됐다는 사실은 불교가 조선시대에 담당한 역할을 시사한다.

그들의 정신적 탈출구가 바로 불교였으며, 유교로서 충족되지 않는 내세에 대한 갈망과 현세에서의 복락을 발원할 수 있는 의지처 또한 불교였던 것이다.

탁효정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과정.1998년 안동대 사학과 졸업. 2001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석사 논문은 「조선후기 왕실원당의 유형과 기능」을 썼다. 현재는 동대학원 박사과정 재학 중이며, 법보신문사에서 학술 문화재 파트를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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