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밥상의 주인은 ‘내’가 아니다.

”먹은 음식으로 뭘 하는가를 가르쳐 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나는 말해 줄 수 있어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가-작가의 분신이기도 한- 소설 속의 ‘나’에게 한 말이다. 흔히들 ‘그 사람의 행위가 곧 그 사람’이라 하는 말과 같다. 조금 다른 점은, ‘먹은 음식으로’라는 전제다. 조르바에게 ‘음식’은 행위의 ‘근원’이다.

장 알텔므 브리야 사바랭(1755 ~1826)은 조르바보다 더 과감하게 말했다.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 준다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할 수 있다.” 프랑스의 법률가이자 미식가로 이름 높았던 브리야 사바랭이 자신의 책 《미각의 생리학》에서 한 말이다.

위의 말대로라면, 우리 사회에서 ‘나’라는 사람은 ‘자반고등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누군가 나에 대해서 알고자 한다면 (그럴 일은 거의 없겠지만) 약간의 품만 들이면 가능하다. 이마트-매출 1위 업체를 보통명사처럼 썼을 뿐이다. 홈플러스, 롯데마트, 하나로마트, 코스트코- 같은 곳으로 가면 된다. 내가 아니 ‘우리’가 거기 있다. 이 말을 불쾌하게 여길 사람들을 생각해서 범위를 조금 넓힌다. 백화점 식품 매장까지.

내가 사는 곳은 의정부 북쪽 끝이다. 아파트 창문만 열어도 주위에 논밭이 보인다. 가끔 발코니로 메뚜기가 찾아온다. 논의 색깔 변화로 계절을 읽는 즐거움도 크다. 이곳으로 이사를 온 첫 가을, 마트에서 우리 동네 쌀을 찾았지만 없었다. 대량으로 생산되지 않아서 독자적인 브랜드로 유통망을 확보하기 어려워서 그러려니 했다. 해서 이웃한 양주 쌀을 찾았다. 양주는 벼농사를 많이 짓는다. 그런데도 없었다. 살짝 오기가 발동하여 몇 군데를 돌아봤지만 헛수고였다. 마트의 이윤 동기는 ‘로컬 푸드’의 가치 따위를 거들떠보지 않는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소비자의 지갑 두께다. 그것에 맞추어 가장 값싼, 저농약, 유기농 쌀이 매장에 놓일 뿐이다. 나의 선택 범위는 그것에 한정된다.

내 밥상의 주인은 나, 밥상의 주인공은 ‘밥’이다. 그런데 주인인 내가 ‘밥’조차도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다면? 내 밥상의 주인은 내가 아니다. 나는 돈만 낼 뿐 사실상의 주인은 유통업체다. ‘먹은 음식이 곧 그 사람’이라는 견해에 따르자면, 나의 주인은 내가 아니다.

조르바나 브리야 사바랭의 말을 점쟁이의 언어로 번역하여, 진짜로 사람의 뱃속을 뒤져 그 사람을 알아내려 한다면 코미디가 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한국인의 욕망이 찍어 놓은 벽돌 같다는 점에서 보면 그들은 ‘족집게 도사’다. 똑같은 걸 먹으니까 똑같이 비싼 집, 좋은 차, 대기업, 명문대를 욕망할밖에. 우리가 누구인지 알려면 대형 마트의 식품 매장으로 가면 된다.

“밥은 잘 자셨습니까?”

살기 위해 먹을까, 먹기 위해 살까? 라면 한 끼를 벌기 위해 새벽 거리의 종이를 줍는 사람에게 이 질문은 잔인하다. 발정기도 아닌 때의 공작 깃털 같은 치레로 탕진한 식탁 앞에서 희희낙락하는 부자들에게 이 질문은 잠꼬대다.

프랑스 작가 미셸 투르니에의 ‘작은 이야기’ 모음인 《사랑의 야찬》이라는 책에 〈두 향연〉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스파한의 칼리프가 자신의 궁중 요리사를 뽑기 위해 두 요리사의 솜씨를 겨루게 하는 것이 이야기의 얼개다. 칼리프는 첫 번째 요리사의 식탁을 그대로 재현한 두 번째 요리사를 낙점한 다음 이렇게 말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여느 궁중 음식이 아니라 신성한 음식이오. 그렇소. 나는 신성한 것을 원하오. 신성한 것은 오로지 반복을 통해서만 존재하고, 매번 반복될 때마다 거룩함이 더해지는 거요.”

거룩함으로 치자면 스님들의 ‘발우공양’만 한 것이 있을까. ‘먹는 일’을, 의식(儀式)의 차원을 넘어 온 생명에 대한 공경으로 이어지게 하는 밥. 하여 공양(供養)이다. 거룩한 삶을 ‘짓는’ 일이다.

내가 존경하는 아니 좋아하는 한 스님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젊은 시절 인천 용화사 선원에서 입승 소임을 맡아 공부할 때였다. 당시도 조실은 송담 스님이었는데 가끔씩 포행이나 울력 시간에 얼굴을 마주치면 늘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밥은 잘 자셨습니까?” 처음 한두 번은 그냥 “예” 하고 말았는데, 어느 날 “그래, 뜸은 잘 들었던가요?” 하는 말씀을 듣고는 ‘아, 공부를 점검하신 거였구나.’ 하고 깨닫고 당신의 공부길을 다시 살폈노라고 했다.

‘밥은 백성의 하늘(食爲民天)’이라 했다. 《세종실록》에 나오는 말이다. 세종 19년(1437) 7월 23일 두 번째 기사의 시작이다. 이어서 ‘농사는 정치의 근본(農爲政本)’이라 하고는 각 도의 감사에게 《농사직설》 등과 같은 책을 고을 수령들에게 나누어 주어 백성들로 하여금 농사에 마음을 다하도록 권하라고 곡진한 말로 당부한다.

우리는 지금 ‘어떤’ 밥을 ‘어떻게’ 먹고 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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