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 가을학기부터 작년 여름까지 처음으로 연구년을 받았다. 그간 연구년을 얻는다면 무엇을 하고 어디로 갈지를 정해두었기에 주저하지 않고 내가 공부했던 독일 함부르크로 갔다. 무엇보다 조용하고 한적한 그곳 인도학연구소에서 인도 유식학 관련 문헌들을 다시금 읽고 사색할 기회를 갖고 싶었던 것이 주요한 이유였다.

하지만 사실 그것보다 더 큰 이유는 그곳에서 나의 은사이신 슈미트하우젠 선생님을 뵙고 싶었기 때문이며, 그럼으로써 여러 면에서 고갈되어 가는 내 영혼의 샘물을 새로이 채우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지금 슈미트하우젠의 명성은 우리나라에도 많이 알려졌지만 내가 독일로 떠났던 1988년에는 그러지 못했다. 비록 그의 대저 《알라야식: 유가행파의 한 중심 개념의 기원과 초기 발전에 대하여》가 그 직전인 1987년 일본에서 출판되어 일본불교학의 영향에 의하지 않고서도 불교문헌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통해 불교철학의 체계적 이해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웅변적으로 보여주었지만, 그 책은 물론이고 그의 논문조차도 구할 수 없었던 것이 당시 우리 학계의 사정이었다.

 당시 함부르크 대학에서 동남아학을 공부하던 조흥국 학형의 도움으로 어렵게 그 책과 논문 두 편을 구해 읽었던 것이 독일 유학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다. 그러나 당시 나는 그가 그렇게 위대한 인도불교 연구자이며 또 인간적인 면에서도 흠잡을 것이 드문 인품을 가진 학자라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함부르크대학에서 입학허가를 받고 처음으로 슈미트하우젠 교수를 뵈었을 때 받은 인상은 그분은 내가 생각했던 ‘엄격한’ 전형적인 독일 교수의 스타일과는 전혀 다른, 매우 자애롭고 타인의 마음과 상황을 이해하려고 하는 분이라는 것이었다. 수업을 듣고, 그의 논문들과 다른 논문들을 읽으면서 학자로서 그의 위대함이 점차 실감되었지만, 나와 같은 만학도의 마음을 불교학, 특히 인도 유식학에 대한 열정으로 채운 것은 그분의 따뜻한 인격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언젠가 읽었던 마틴 부버의 자서전에서 그는 전혀 다른 스타일을 가진 그의 두 위대한 랍비를 묘사하면서 “스스로 불타오르면서 타인을 불태우는 스승”과 “스스로 내적으로 불타오르지만 촛불과 같이 온화한 불빛을 사방에 비추는 스승”으로 나눈 적이 있는데, 슈미트하우젠을 보면 마치 촛불처럼 자신은 불태우지만 제자들에게는 항시 온유한 ‘보살’과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선생은 아직도 왕성하게 학문 활동을 하고 계셨다. 2013년 가을에는 2014년에 출간된 700쪽이 넘는 《유식학파의 발생: 반응과 반성》을 퇴고하기 위해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 아직도 열정적으로 유식학의 철학적 주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 책이 출판된 후 그는 이제 일생의 마지막 작업이 될 불교의 환경문제를 주제로 한 저작을 약 3년 정도 준비하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사실 환경문제에 대한 그의 관심은 오래된 것이다. 그는 1990년 이후 자연과 환경 문제, 그리고 이와 관련된 윤리적 문제가 어떻게 불전과 역사 속에서 전개되고 있는지를 다루어왔다. 그런 점에서 그는 불교계에서 환경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첫 번째 학자군에 속할 것이다.

'환경’이나 ‘자연’의 문제가 1970년대 이후 유럽사회에서 강력한 사회적 주제의 하나였다는 점에서 그도 이 문제에 관심을 가졌을 것이라고 보인다. 하지만 그는 이 문제를 불교와 인도 문헌 내에서 전문적으로 다루고자 했다. 그의 위대함은 이들 논의가 함축하는 ‘평화’ ‘생명’ ‘불살생’ ‘채식주의’ 등의 윤리적 문제에 대해 단지 지적 관심으로 만족하지 않고 기꺼이 스스로 실천하는 태도를 취했다는 데 있다. 이는 그가 1970년대 중반 그의 가족들과 함께 동물의 생명권 문제를 토론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모두 채식주의자로 살아가기로 결정했다는 말에서도 드러날 것이다.

그의 집을 방문할 때면, 그는 원시림같이 우거진 정원에서 차를 마시거나 근처 산책길을 걸으면서 야생화들의 이름과 그곳에 사는 곤충들 얘기 등을 소재로 즐겨 이야기하곤 했다. 지난봄에는 정원에 파놓은 연못에 짚단을 덮어 주었더니 올챙이들이 새들의 공격으로부터 거의 살아남았다고 하면서 좋아하던 모습이며, 산책길 옆에 있는 야생초에 이르기까지 그것들이 계절에 따라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소년처럼 흥분하면서 말씀하던 모습이 새롭다.

하지만 가장 마음에 남는 얘기는 멀리 아프리카에서부터 정원으로 찾아왔던 철새 이야기였다. 머리에 노란 무늬가 있는 작은 철새가 어느 날 그와 그의 가족들이 정원에 앉아 있었을 때 옆 나뭇가지에 날아들었다. 그리고 잠시 이리저리 주위 나뭇가지로 날아다니다가 멀리 사라졌다. 슈미트하우젠은 그 새가 얼마나 아름다웠으며 그것을 보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이었는가를 말하면서 혼잣말로 참으로 그것은 인생에서 참으로 드물게 만나는 행운이라고 덧붙였다.

그 순간 나의 머리는 멍해지고 가슴은 울컥했다. 아! 그래 그런 것이야말로 우리 덧없는 인생에서 드물게 만나는 행운이지. 우리가 인생에서 행운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과연 무엇이었나를 반성하면서, 한 철새가 날갯짓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참으로 인생에서 만나기 힘든 행운이라고 말하는 스승의 말을 통해 나는 삶의 무욕이 무엇인가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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