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은 일찍 일어났다. 겨울의 해는 늦게 뜬다. 7시 30분쯤 되어야 해가 산머리에 보인다. 창밖의 마당을 내다본다. 껍질이 까맣게 된 백일홍이 눈에 들어온다. 몇 년 전에 아내가 능금나무를 한 그루 심자고 해 심어 놓은 능금나무. 그 나무는 올봄엔 다른 데로 옮겨 심어야겠다. 담 저쪽에 향나무가 있는데, 능금나무는 향나무 밑에서는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 그 능금나무에는 작은 능금이 몇 개가 달리더니 더 이상 꽃이 피지 않았다. 그 나무에 아직 떨어지지 않은 잎사귀 몇 개가 붙어 있다. 생명력이 강하다. 그렇게 눈바람이 심해도 떨어지지 않았다. 앵두나무에 달린 잎사귀와 함께.

모든 나무가 검고 누렇지만, 주목은 아직도 푸르다. 울타리가 된 장미는 새 촉이 나는 듯 가시가 지키고 있다. 은행나무, 벚나무, 딱따구리나무, 소나무, 철쭉나무, 사철나무 등 많은 종류의 나무들이 군집해 있다.
나는 그러한 나무들 사이로 소리 내며 짖어대는 참새, 방울새 그리고 내가 이름을 모르는 한두 종류의 새들이 날아와 아침 준비를 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오늘은 아침이 일러 아직 나의 어린 친구들이 오지 않은 모양이다. 나무 잎사귀가 흔들리지 않고, 새 짖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나는 지금 아침 친구를 기다리고 있다. 내가 보기에는 나무나 낙엽 진 담장이나 장미나무에 먹을 것이 있을 것 같지 않은데, 새들은 서로 짝지어 날아다니면서 식사를 한다. 그들의 평화가 지극히 고요하다.

나는 저들과 같이 이 자연 속에서 인간이라는 나무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그들과 먹이를 나누며 살고 있다. 이 나무에 앉았다 저 나무에 기댔다 하면서 과연 무엇을 목적으로 살아왔던가. 새들은 먹이를 찾아 먹고 지나가면 그만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다. 나는 이 나이가 되도록 ‘나는 과연 잘 살고 있는가?’ ‘나는 내가 젊었을 때 가졌던 꿈인 자유자재한 인간이 되었는가?’ ‘번뇌 망상이 없는 인간인가?’를 가끔 물어본다. 그런데 아니다. 나는 아직도 부자유하고 마음대로 행동하면 법도에 어긋나고 번뇌 망상도 끊이지 않고 있다. 결국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 것이다.

나는 근래 ‘나는 아무것도 없구나!’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아니 진정 나는 ‘나’라는 생각을 놓을 때가 많다. 대학 시절에는 정말 깨닫고 싶어 몸부림친 적도 있다. 그 후에도 내가 근본적으로 변화되어 참다운 깨친 사람이 되고 싶었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러나 팔십을 바라보는 이 나이에 젊었던 20대의 그 생각이나 지금이나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 20대의 내가 확 바뀌어 전혀 다른 자유인이 된 것도 없고, 어느 정도 깨달음이 있는 사람이라는 자긍심도 없다. 오직 아직도 진정한 깨침이 무엇인가, 내가 전혀 나 아닌 사람으로 변할 수 없는가, 하는 자기반성만이 남아 있다.

나는 단 한 번도 부처님을 잊어본 적이 없다. 생각 생각에 부처님 생각을 한다. 내가 했던 학문이나 직업도 부처님이 보고 싶어 했다. 지금 이 순간도 부처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하고 환희에 찬다. 부처님은 내 바깥에 있지 않고 내 마음에 있다고 배우기도 했고 또 많은 사람에게 그렇게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마음이 부처임을 확인하기 위해 철야정진도 하고, 수십만 배의 절도 하고 기도도 하고 염불도 했다. 그러는 가운데 약간의 시간 동안은 삼매(三昧)에 들고 일심(一心)이 되지만 지속적으로는 일심이 되지 않는다. 역시 완전한 부처님은 되지 못하고 10분, 20분의 부처님만 맛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환희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젊은 날의 그 치열한 구도 정진도 세월이 가면서 무디어지고 있다. 생각이 게을러진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그러나 정진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화두와 염불을 놓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경을 읽어야 한다. 메마른 마음에는 부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이 새 생명을 부어 주는 것이다.

나는 얼마 전에 몹시 어려운 시술을 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도 하는 쉬운 것이지만 나는 처음 당하는 일이기에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나는 내 마음이 아주 조용하고 평화스럽다는 것을 느꼈다. 사실 이 나이가 되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깊어진다고 한다. 그런데 죽음을 생각할 때는 두려움이 스쳐 갔지만 막상 일을 당해 보니 《반야심경》과 화두가 잘 들리고 염불도 순일함을 느꼈다. 그때서야 ‘아, 내가 부처님을 잘 믿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픔이 없어지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내가 진정 깨침을 향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고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신심이 났다.

나는 오늘날까지 깨달음이니, 깨침이니 하는 부처님 되는 길을 찾고 살아왔으며 진정 깨침이 무엇이고, 내가 깨침에 얼마나 가까이 갔는가 점검하려고 했다. 깨달음은 우리가 지적으로 모르는 것을 안다는 뜻이고 깨침은 근본이 확 본질이 바뀌는 전의(轉依)의 뜻이라고 할 때, ‘과연 나는 어떤 편인가?’를 다시 생각해본다. 나는 아직 전자이지 후자는 아니다. 나는 아직 깨쳐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깨쳤다고 해서 본인이 깨쳤다고 한다면 아마 그것은 진정한 깨침이 아닐 것이다.

그래도 나는 깨침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깨침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부처님이 깨치신 진리를 그대로 지켜나가면 그것이 깨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깨침의 노예가 되지 말고 부처님의 깨침인 ‘네 마음이 부처’이고 ‘일체중생이 부처임’을 믿고 육바라밀(보시, 지계, 인욕, 선정, 반야, 정진) 중 한 가지라도 옳게 지켜나간다면 그것이 깨침의 길이 아닐는지? 나는 스스로 이렇게 위로하며 정진의 고삐를 다시 조인다. 결코 깨침의 노예가 되지 않고 깨침의 방랑자가 되지 않기 위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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