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적 관점으로 시도한 첨단과학의 통섭

“강연이란 청중이 그 내용 중 3분의 1은 이미 알고 있거나 쉽게 이해했다고 믿고, 또 3분의 1은 모르던 것을 배웠다고 믿고, 나머지 3분의 1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느낄 때 잘한 강연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얼핏 우스갯소리처럼 들릴지 모르나 이것은 교수법상 주요점을 내포하고 있다. 청중이 흥미를 잃지 않아야 하고 어느 정도 성취감을 느껴야 하며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해 가려는 흥미를 유발해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런 도식으로 볼 때 김성철 교수의 《눈으로 듣고 귀로 읽는 붓다의 과학 이야기-진화생물학과 뇌과학, 불교를 만나다》는 참 잘 쓰인, 교육적 가치가 아주 높은 책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책의 내용 중 많은 부분이 쉽고 재미있게 읽히며 독자들이 많은 새로운 내용을 알게 되었다는 느낌을 줌과 동시에 많은 질문을 하도록 유도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과학적 훈련이 되지 않은 독자들로서는 이해하기 결코 쉽지 않은 내용을 집중하여 내용을 따라가면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림과 도표를 이용하여 간단하고 명료하게 설명해 내고 있다. 그러면서 현대 첨단과학의 한 부분이 불교적 관점에서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를 군더더기 없는 과감한 생략의 언어로 얘기해 간다. ‘붓다의 과학 이야기’라는 책명이 어울리는 이유이다. 저자가 서문에 밝힌 “미래의 우리 사회를 이끌어갈 젊은 세대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리”기 위한다는 목표는 젊은이들이 인식의 영역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할 가능성을 제공함으로써 달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책의 1부 ‘불교로 푸는 진화와 뇌’에서 저자는 47개의 소주제를 가지고 진화론의 연기론적 해석, 뇌의 위상과 불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과학적 설명과 함께 불교적 해석을 펼친다. 47개의 소주제를 관통하는 저자의 입장은 생물의 진화에 의해 변형된 “고기 몸[肉身]” 부위의 기능과 역할이 진화를 통해 장시간 변화했음은 제행무상(諸行無常)을 뒷받침하는 것이며, 연기론의 각론(各論)에 해당하는 진화론은 공성(空性)의 통찰을 가능케 하는 생물학적 배움터라는 것이다.

독자들이 이 책을 읽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이 책의 흐름을 따라가 보자.

제1장 ‘석가모니 부처님과 찰스 다윈’에서는 왜 생물학이 불교를 정확히 이해하는 데 가장 유용한 학문인가를 설명하며 사성제, 고집멸도의 개념을 바탕으로 진화생물학과 각학(覺學)으로서 불교의 접점과 차이점을 설명하여 뒤에 오는 장들의 이해를 준비해 준다. 2장부터 7장까지는 ‘몸, 그리고 번뇌’ ‘얼굴에 이목구비가 몰려 있는 이유’ ‘우리 몸의 좌우가 대칭인 이유’ 등 생물학적 현상들을 재미있게 설명하며 제행무상과 연기법을 바탕으로 해석해 가며, 제8장 ‘진화론은 연기론이다’에서 그간의 불교해석들을 정리해 준다.
제9장 ‘뇌신경에서 좌우가 바뀌는 이유’부터는 뇌과학이 주제로 등장하며 난도가 조금씩 높아진다. 구심성 신경과 원심성 신경의 작용을 설명하며 과보와 업의 해석을 제시하는가 하면, 뒤에 이어지는 장에서는 연기법을 설명하며 객관적 차이의 무의미성을 통해 인종차별의 무의미성을 유추해내기도 한다. 그러다가 제16장 ‘능작인(能作因)과 증상(增上)과의 인과관계’에서는 진화론이 “생명의 모습에 대한 정견(正見)”임을 갈파한다.

1부의 후반부에서는 윤리와 도덕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 주를 이루어 간다. 진화생물학의 차원에서 본, 종족보전을 위해 생긴 도덕성을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요구되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황금률, 유교·기독교 등의 윤리와 비교하며, 불교의 윤리는 이러한 “수평적” 사회윤리를 넘어 사티(Sati)를 통해 얻는 “깨달음을 향한” 수직적 개인윤리도 포함하는 “입체적” 윤리로서 타 종교의 윤리를 초월함이 제시된다. ‘뇌는 우리 몸의 주인이 아니다’(27장)에서는 수행을 통하여 중도의 길로 들어서는 “뇌의 분수 지킴”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임이 강조되기도 한다.

이러한 저자의 진화론적, 뇌과학적, 불교학적 논리 전개는 제46장 ‘행동한 뒤에 행동하기로 작정할까’ 제47장 ‘진화생물학’에서 백미를 이룬다. 인간의 의식(意識) 양태와 행동과 자각의 역전이라는 뇌과학적 현상을 “고(苦)의 자작자각(自作自覺). 타작타각(他作他覺)”의 개념을 통하여 자업자득의 인과응보와 제행무상, 제법무아의 원리를 역설적으로 해석한다. 모든 생명체의 모습은 연기(緣起)의 소산이라는 진화생물학의 해석을 통해 불교의 어려운 공성(空性)을 가르쳐 주기도 한다.

저자의 불교적 해석은 단지 이론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군데군데 실천적 고뇌가 엿보이기도 한다. 개체와 유전자의 조화로운 윤리적 관계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조화의 필요성으로 해석하는 것이나(제39장) 템플스테이를 통한 힐링의 구체적 방법론을 제시하는 것(제44장)이 그렇다.

때로는 따뜻한 인간미를 느끼는 표현이 출현하며, 또 때로는 익살스러운 표현이 삽입되기도 한다. 홍조를 띤 젊은 여성의 사진과 “약자의 고통에 공감했던 털보, 칼 마르크스”의 사진(제23장) 나란히 실린 것이나, “점령지에서 활개를 젖히고 서 있는 맥아더 장군의 위용”(제24장)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미소를 자아내게 하기도 한다.

저자가 서문에서 말하고 있는 또 다른 목표, “‘불교학’과 ‘진화생물학’과 ‘뇌과학’이라는 지극히 전문적인 세 분야를 ‘통섭(統攝)’하여 풀어내는 전위적(前衛的) 저술”이기 위한 시도도 크게 막히지 않고 해석이 가능했다는 의미에서 큰 부분 성공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불교학과 과학이라는 차원에서 본다면 상당 부분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불교와 과학을 연계지어 논하는 사람들은 크게 보아 두 부류가 있다. 하나는 과학에서 시작하여 불교에 접근하는 부류이고, 다른 하나는 불교에서 시작하여 과학에 접근하는 부류이다. 저자는 후자에 속하는 것 같다.

저자는 1부 제47장에서 “불교는 연역의 종교다”라고 한다. 그에 비해 과학은 이론화하는 과정에서 부분적으로 연역이 방법적 사고로서 필요하지만, 자연의 관찰에 입각하여 체계화한다는 의미에서는 철저하게 귀납적이다. 또 34장에서는 “이 세상의 뿌리, 이 세상의 끝은 먼 곳에 있지 않고 내 몸에 붙어 있다”라고 한다. 저자의 저서를 관통하는, 불교학적 접근의 단면을 보여주는 예이다.

그러나 과학자가 과학을 얘기할 때는 철저하게 과학의 측면에서 볼 필요가 있다. 마음의 과학인 불교가 제시하기 때문이 아니라, 철저하게 과학적인 연구 결과를 놓고 불교적 해석이 가능할 때 우리 불자 과학자들은 아인슈타인이 말하는 보편불교로서 불교를 ‘입증’해 보일 수 있으며 이렇게 해야만 더 큰 설득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이 저서를 내는 것이 가능했던 것도 그러한 과학의 결과를 수용하였기 때문 아닌가? 뇌과학이 보여주는 객관과 주관의 차이도 결국은 우리의 뇌를 완전히 객관적인 대상으로 삼은 과학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 같다. 이 점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전제하지 말라”는 부처님의 말씀에 좀 더 철저해질 필요가 있다.

저자의 이러한 접근방식은 2부에서 문제점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저자는 “과학의 언어로 불교를 표현한다”는 명제하에 제3장에서 “자유의지가 있다면 윤회는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찰나생멸하는 식(識)의 1차원적 흐름”이 “대뇌피질의 뉴런을 훑는다”고 보는 저자는 이 식이 신경세포에서 신경세포로 점프(jump)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고, 이 식이 장거리 점프를 하여 다른 수정란에 전이될 때 윤회(輪回)의 과학적 설명이 가능할 것으로 본다. 물론 이 식은 우리가 깨달음을 얻어 윤회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을 때 소멸된다고 전제되겠으나, 그때까지는 여기서 저기로 날아다닌다는 얘기다. 물론 저자는 “자유의지[識]가 있다면”이라고 가정은 하고 있지만, 불교의 인과응보와는 조금 다른 개념인 인과법칙(causality)에 저촉되기 때문에 현재의 과학으로는 불가능하다.

물론 물리학에서 아주 작은 범위에서이지만 인과법칙(causality)이 깨지는 것도 발견되었고 양자물리학에서는 터널효과라든가 관측결과에 주는 주관의 영향이라는 것도 있어서, 식이 있다면 점프도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수많은 영혼의 윤회를 설명하기에는 현재 물리학은 아직 역부족이다. 기독교의 창조과학자들이 지구의 나이는 6천여 년이라고 주장하며 화석의 나이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노아의 방주를 역사적 사실로 고증하기 위해 많은 실험을 하는 것을 우리 불자들은 내심 비웃기도 한다. 그러니 우리도 명확히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자칫 과학이라는 이름을 빌려 쓰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고 본다.

또 한 가지, 개념의 정교성이 가끔 아쉬울 때가 있었다. 물론 저자가 군더더기 개념을 과감히 생략함으로써 이 책의 명료성이 드러났으므로 이러한 생략법은 필요불가결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조금 더 과학적인 통섭을 바란다면 저자의 차기 저서에서는 더 정확해지기를 기대해 본다. 예를 들어 스펜서가 도입한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이라는 용어를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이라는 다윈의 용어로 대체했더라도 커다란 내용 변동은 없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스펜서에 의해 처음 도입된 적자생존이라는 개념은 제1차대전 이후 인종차별의 근간이 되는 사회적 진화론과 우생학의 모태가 되었다는 점에서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책이 젊은이들을 상대로 한 전법(傳法)을 목표로 하는 것이라면 좀 더 책임감 있는 용어 선택이 필요하고 1부의 후반에 강조되는 불교 윤리와도 부드럽게 연결되지 않았을까 노파심에서 지적해 본다.

또 하나, 유물론과 기계론이라는 개념이 명확한 구분 없이 사용되는 것도 여러 군데에서 발견된다. 유물론에도 사적(史的) 유물론과 기계론적(결정론적) 유물론이 있고, 기계론도 고대과학부터 근대, 현대의 개념이 모두 다르다. 고전물리학의 다체문제(many body problem)와 양자론 이후의 물리학에서는 모든 것이 통계와 확률로 표시되기 때문에 필연에 의한 결정론이나 우연의 개념은 지양되고 있다. 이러한 개념의 명확한 구분은 부처님 가르침과의 비교에서 커다란 차이를 보일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다.

끝으로 과학의 불교학적 해석이 생물학을 넘어 물리학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를 고뇌해 보며 다음과 같은 난문을 부처님께 던져 본다. 왜 우주는 3차원의 공간과 시간을 합친 4차원의 시공간으로 생성되었는가? 영양 흡입과 배설이 가능한 생물의 몸체가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3차원이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인식능력을 갖고 있는 생물체가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3차원 공간에 인식이 기억(시간)을 통해 의식활동으로 발전할 수 있는 4차원 시공간만이 의식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얘기인가? 우주물리학에서 존재 가능하다고 얘기되는 여러 차원의 수많은 공간은 인식될 수 있는 생물체의 비존재로 인해 존재조차 할 수 없는가? 생물체가 탄생하기 이전의 우주와 지구는 인식할 주체가 없는 상황에서 존재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인가?
언젠가 이러한 문제들이 과학적으로 좀 더 명료하게 논의될 수 있을 때 부처님은 침묵하지 않으실 것 같다.■

 

정윤선 / 참여불교재가연대 사무총장.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물리학과 졸업.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 이학박사(소립자론 전공). 독일 베를린 막스플랑크연구소(과학사)·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연구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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