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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제 국가의 형성과 근대불교의 파행
원익선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연구교수
[28호] 2006년 12월 10일 (일) 원익선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연구교수ㆍ원불교
1. 들어가는 말

일본에 불교가 전파된 이후, 불교와 국가는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일본의 역사를 형성해 왔다. 백제의 성명왕〔聖明王〓聖王〕으로부터 552년에 공전(公傳)된 것으로 전하는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는 소가씨(蘇我氏)와 모노노베씨(物部氏)간의 불교를 둘러싼 논쟁으로 시작된다.

불교를 숭배하는 소가씨쪽은 혁신적 개혁을 내포하는 입장을 대변하고, 이를 배척하는 모노노베씨쪽은 수구적인 방어의 입장을 대신하고 있음을 행간에서 읽을 수 있다. 그것은 양쪽 가문이 처한 입장의 차이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문물에 대한 시각의 차이이기도 했다. 더군다나 고대국가의 이념정립에 불교가 개입되면서 이 같은 논쟁의 치열함이 도를 더해 갔음을 일본의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의 차이는 불교의 토착화와 관련하여 다양한 역사적 유전의 요소들을 형성한다. 그러한 가운데 명치유신(明治維新, 1868년)을 그 출발로 하는 근대에 이르러서는 천황제를 중심으로 한 제정일치(祭政一致)의 근대국가 설립에 자의든 타의든 불교가 동조함으로써 그 체제의 질서에 편입되고 이를 바탕으로 일본은 제국주의의 길을 걷게 된다. 여기서는 이러한 천황제 근대국가주의의 형성과 군국주의 상황에서 일본불교의 역사적인 내적원리가 어떻게 작용하였으며 파행되어 갔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2. 신불습합(神佛習合)의 파행 

(가) “금번의 왕정복고(王政復古)는 진무(神武) 창업의 시원(始原)에 기초하여 모든 일을 일신(一新)하고, 제정일치의 제도로 회복함에 있어 먼저 첫 번째로 진기칸(神祇官)을 재흥하여 설립하고 그 위에 차츰 제전(祭奠)도 발흥하도록 명한다.”

(나) “一. 중고(中古)이래 모(某) 권현(權現), 혹은 우두천왕(牛頭天王)의 류, 그 외에 불교 용어로써 신호(神號)로 칭하는 신사가 적지 않은 바, 어떤 것일지라도 그 신사의 내력을 상세히 적어 서둘러 제출할 것.(중략)
一. 불상을 신체(神體)로 하는 신사는 이후부터 바꾸어 부르도록 할 것.
첨부. 본지(本地) 등으로 부르며 불상을 신사 앞에 걸거나, 혹은 악구(鰐口), 범종(梵鐘), 불구(佛具) 등을 놓아 둔 경우는 조속히 제거할 것.”

(다) “금번 제국 대소의 신사에 있어 신불혼효(神佛混淆)의 상태로 폐지됨에 따라 별당(別堂), 사승(社僧)의 무리는 환속한 뒤, 칸느시(神主), 신진(神人) 등의 칭호로 바꾸고 신도(神道)로써 근무해야 함. 만약, 부득이 이에 지장이 있거나 또는 불교 신앙에서 환속할 뜻이 없는 무리는 신사근무를 중지하고 퇴거할 것.”1)

위의 내용은 명치유신을 단행한 해에 신정부에 의해 연속적으로 포고된 「신불분리(神佛分離)에 관한 법령」의 일부분이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명치유신에 의한 국가체제의 확립을 위해, 고대 야마토(大和)정권의 시원으로 인식되어 있으며 신과 인간을 매개하는 천황으로써 설정된 진무(神武) 천황대의 제정일치 국가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이러한 신정(神政)국가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고대의 왕권을 확립했던 텐무(天武) 천황 때에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 진칸(神官), 즉 후대에 확립된 진기칸(神祇官)의 설치를 통해 통치의 근간으로 삼으려고 했다는 점이다. 진기칸은 신사와 관련된 행정의 최고 기관이었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될 것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신불분리 정책이었다.

이 신불분리는 일본불교사의 핵심 축인 신불습합(神佛習合)의 역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신불습합이야말로 중앙아시아와 중국대륙, 한반도를 거쳐 오면서 국제화된 불교가 토착화하는 데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일본인의 심성(心性)의 창(窓)이었다. 이와 관련해서 시대적 변화의 과정을 세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신(神)이 미혹된 존재이므로 불(佛)의 구제가 요청된다’는 설로 대표적인 형태가 진구지(神宮寺)인데, 주로 8세기 초부터 본격적으로 출현한다. 이는 신사의 경내 한편에 부속되어 있는 사원으로 신전에서 가지(加持)기도나 독경을 올렸다. 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포고령으로 인한 폐불훼석(廢佛毁釋)의 첫 번째 목표가 바로 진구지의 철폐였다. 후에 이 설이 확대되어 신이 불법을 수호한다는 설로도 발전을 했다.

둘째로는 헤이안(平安, 794~1192)시대 중기 이후 성립한 본지수적(本地垂迹)의 사상으로 신불이 동체라고 하는 설이다. 즉 본래 형태인 본지로서의 불이 임시의 형태인 수적으로서 불의 화신〔化身, 혹은 權化, 權現〕인 신으로 나타나 중생구제를 한다는 것이다. 위에 언급한 「중고(中古)이래 모(某) 권현(權現)」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과정과 양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는 이러한 불본신적(佛本神迹)의 사상이 카마쿠라(鎌創, 1193~1333)시대 중기 이후 신도(神道)를 우위에 두는 신본불적(神本佛迹)의 사상으로 전환되어 간다. 카마쿠라 시대는 불교의 영향을 받아 방대한 신도의 이론이 세워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신도우위설은 헤이안 시대부터 일기 시작한 본각(本覺)사상, 즉 모든 이원론을 넘어서 절대긍정의 세계관을 확립한 일본 특유의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이를 극대화한 사람은 무로마치(室町, 1336~1573)시대 요시다 카네토모(吉田兼俱, 1435~1511)로 요시다 신도〔吉田神道, 혹은 唯一, 元本宗神源道라고도 함〕를 창시하였다. 이는 역사적으로 천황중심의 신국론(神國論)을 제공하면서 정치적 이데올로기화해 간 이세 신도(伊勢神道)의 이론적 축적에 또한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이세 신도는 신도 독자적인 이론을 구축하면서 불교를 배척한 신도이다.

이 요시다 신도와 이세 신도는 명치유신 전후의 폐불훼석을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해 지지되었다. 요시다 신도는 특히 에도(江戶, 1603~1867)시대 말기 존왕양이(尊王攘夷)운동의 이론적 근거와 근대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원류가 된 미토학(水戶學)의 근원지인 미토번〔水戶藩, 현재의 이바라키현(茨城縣)〕에서 크게 지지를 받았다. 명치전의 극단적인 폐불훼석으로 유명한 미토 번주(藩主) 토쿠가와 나리아키(德川齊昭, 1800~1860)는 바로 이 요시다 신도의 열렬한 숭배자였다.

이렇게 볼 때 불교는 신불습합을 통해, 매우 많은 신이라는 뜻의 ‘야오요로즈노 카미(八百萬の神)’로 불릴 정도로 자연신에 대한 숭배를 지켜온 신도를 비로소 체계화시키는 데에 공헌한 외래 종교였다. 유교와 더불어 불교를 통치의 근간으로 삼은 쇼오토쿠 태자(聖德太子, 574~622)에 의해 불교가 상류의 사상적 흐름을 지향하게 된 점도 있지만 종래 전통신앙과의 부단한 소통은 이렇게 양쪽 진영을 늘 긴장시켜 왔던 것이다. 신도는 중세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불교를 끊임없이 타자화한 가운데 그 이론적인 논리를 전개시켜 왔다. 이것은 신도가 불교와의 상대성을 탈피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음양이 상추(相推)하는 것과 같이 신불 상호간의 내적 발전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근세 말과 근대의 요시다와 이세 신도의 부흥은 통치자측에 의해 불교와의 전통적인 관계를 외면하고 신도의 독자성만을 강조한 결과이다. 이러한 타자의 부정은 기나긴 세월동안 내재화된 일본인의 심성을 부정하는 것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근대의 유산으로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 문제가 있다. 근대의 명치유신 이듬해인 1869년 명치천황(1852~1912)에 의해 초혼사(招魂社)로 세워진 야스쿠니 신사는 막말(幕末) 이후 천황을 위해 전사한 자들을 제신(祭神)으로 합사(合祀)한 것이다. 1874년 천황의 참배 이후 관례화되면서 천황주의와 군국주의 이데올로기 전파의 교두보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했다. 천황의 국가를 안정시킨다는 의미의 야스쿠니라는 이름은 1879년에 붙여졌다.

중세와 근세를 통해 신불습합의 과정에서는 자연스럽게 사원과 신사의 역할이 분리되어 민중의 삶에 전혀 위화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형이상학적인 면에서는 신불습합의 논리를 각자의 입장에서 전개해왔지만 실제 삶의 측면에서는 현생의 재액멸죄와 사후의 세계관에 있어 사원과 신사가 큰 마찰이 없이 그 역할수행을 해왔다. 비록 역사적으로 실권을 가졌든 상징적이었든 최고의 신관으로서 천황제가 지속되었어도 민중의 사후문제는 불교적인 텍스트에 의존해왔던 것이다. 뒤에 논의하겠지만 에도시대를 거치면서 이는 더욱 뚜렷하게 분화되었다. 초혼제(招魂祭)는 원래 일본에서는 음양도(陰陽道)에서 행한 식재(息災)를 위한 제식이었다. 에도말기에는 이러한 초혼위령의 습속이 각지에서 일어났는데 이를 야스쿠니 측이 끌어 들인 것이다.

그러나 야스쿠니의 근본적인 성격은 천황의 현인신(現人神)2) 으로서의 신성성(神聖性)의 재확립을 통한 순수절대의 세계관을 천황제 국가가 확립하려는 의도가 함께 가세한 것이다. 이는 전통과의 관계에서 놓고 볼 때 불교의 배제를 통해서만이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천황신도의 본산인 이세신궁(伊勢神宮)의 내외궁이 이미 밀교의 태장계(胎藏界)와 금강계(金剛界)의 양계 만다라에 의해 의미지어지고 이를 통해 권위를 강화시켜왔다는 점은 불교의 상대성에 의해 변화ㆍ발전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야스쿠니는 근대 천황제국가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 역사속의 예외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놓고 볼 때, 폐불훼석과 함께 시작된 명치유신은 반불교(反佛敎)는 물론이요, 타자가 배제된 반전통에 의한 천황신도화의 정략적 오류였다고 볼 수 있다. 양자는 서로의 타자화를 통해 변화ㆍ발전해 왔지만 한쪽을 부정하고 공격할 때 자기 자신도 결국은 존재의 의의를 상실함과 동시에 부정되는 모순을 드러냈던 것이다. 천황제에 의한 근대국가의 일탈은 신도에 대한 불교의 이러한 견제와 자극의 전통을 무너뜨린 것에 기인한 것으로 보아도 충분한 타당성이 있다. 그렇다고 불교가 이러한 근대국가의 형성과정에서 완전한 면죄부를 부여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시기상조이다. 왜냐하면 다음에 제시되는 불교의 내재적인 모순이 역사의 현장에서 비켜갈 수 없기 때문이다.

3. 왕법불법(王法佛法)의 근대적 변용과 황국불교화

1686년 신불분리와 더불어 폐불훼석의 철퇴를 맞은 불교측에서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그 다음해인 1869년에 임제종 승려인 토오코쿠(韜谷)의 발기로 쿄토에서 제종동덕회맹(諸宗同德會盟)을 결성하였다. 이 모임에서는 불교의 탄압에 맞서 스스로 연구하고 심의해야 할 8개 조항을 결정했다.

첫째, 왕법과 불법은 불리(不離)의 관계임. 둘째, 사교(邪敎)를 연구해서 배척할 것. 셋째, 3도(道)인 유불선(儒佛仙)이 제휴해서 연마할 것. 넷째, 각각 자종(自宗)의 교의경전을 연구할 것. 다섯째, 각각 자종의 폐해를 일신할 것. 여섯째, 신규학교를 경영하고 인재를 양성할 것. 일곱째, 각종(各宗)의 영재등용의 길을 넓힐 것. 여덟째, 민중교화에 노력할 것이었다.

첫 번째 항으로는 왕법불법 분리의 원칙을 들었는데, 시대가 급박한 만큼 여기에 대한 언급이 먼저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나머지는 내외에 불교의 입장과 개혁을 천명한 것이었다. 일본불교사를 통 털어 이렇게 각종각파가 모두 한 자리에 모여 현안을 논의하기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한 논의의 제1 의제가 바로 왕법불법의 불리라고 하는 것은 이미 대세에 대한 불교의 순응을 재빨리 선포하기 위한 절차에 불과했음을 보여준다. 이에 대해 과거의 역사와 비교하여 어떤 의미를 띠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본 고대에 왕법과 불법의 관계는 ‘상의상자(相依相卽)론’에 근거하여 전개되었다. 사토오 히로오(佐藤弘夫)에 의하면3) 헤이안 시대 중기인 10세기 무렵, 율령제에 의해 운영되던 국가체제가 와해되어 가면서 동시에 중세 장원제로의 이행됐다. 이 과정에서 국가 지원을 받던 대사원측이 지역관리들의 수탈에 자기 방어 입장에서 이를 제기하였다.

그 위에 중세인 13세기 무렵에는 정토종, 일련종, 조동종, 정토진종 등 카마쿠라 신불교의 발흥으로 천태와 밀교가 중심인 현밀(顯密)체제의 붕괴에 직면하여 이 2종을 포함한 8종체제의 집단적인 입장에서 이를 제기하였다.

전자는 개별성을 띠는 한편 후자는 집단적 입장을 띠면서 각각의 왕법불법 상의론을 주장해 왔다. 개개의 권문(權門)사원은 자립적인 영역을 지배ㆍ영위하는 개별적인 종교영주인 동시에 한편으론 국가전체의 지주로서 그 안녕을 빌고, 또한 그 자신이 지배계층 안에 그 자리를 점하고 국가권력의 일환을 구성하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4)
이렇게 중세에 왕성했던 상의론은 근세로 다가서면서 신불교의 정착과 번성으로 인해 그 이론의 구실을 상실하게 된다. 그렇지만 중세의 왕법불법상의론은 양자의 세력균형이 어느 정도 잡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히려 불교측이 고대에 정착되었던 불법 주도의 진호(鎭護)국가의 의의를 되살림으로 인해 왕법이 불법에 포섭되는 것으로까지 비쳐질 정도였다. 이러한 왕법과 불법의 관계에 대한 언급이 또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은 바로 명치유신 전후의 불교자들에 의해서였다.

명치유신 전 에도말기에는 주로 왕법불법일치론이 대세를 이루었다. 이는 반외세, 반기독교적인 입장에서 호법불교를 통한 양이(攘夷)운동의 성격을 띠는 것이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정토진종(淨土眞宗) 서본원사파(西本願寺派)에 속하는 게추쇼오(月性, 1817~1858)였다. 막말 불교호법사상을 대표하는 『불법호국론』에서 그는 왕법과 불법의 불리를 주장했다. 카시와하라 유우센(栢原祐泉)에 의하면 게추쇼오는 여기에서 호법ㆍ호국ㆍ방사〔防邪, 반기독교 사상〕사상의 일체관을 보이고 있다. 이는 단지 불교 측의 일방적인 주장이었던 것이 아니고 그것을 허락하는 일반적인 상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5) 이러한 시대적인 일반론은 명치유신을 거치면서도 여전히 주장되었다. 위에 언급한 제종회맹의 제1 의제가 이러한 맥락의 연장선에 있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더군다나 회맹전원이 황국을 위해 신명을 아끼지 않는다고 선언하기까지 하였다.6) 정토진종은 막말과 유신기에 다소 복잡한 정치적 행로를 띠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더 이상 상세히 논할 여유가 없다.

그러나 불교 교단으로서는 최대의 신도를 포함하고 있는 이 종단의 이후 전개되는 불법왕법의 비약된 논리인 황도(皇道)불교화의 논리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본원사파(本願寺派) 20대 종주(宗主) 오오타니 코오뇨(大谷廣如, 1798~1872)는 1871년에 전통적으로 신도들에게 교의를 해석ㆍ전달하는 서신형식의 「쇼오소쿠(消息)」를 통해 다음과 같이 전달하고 있다.

“황국에 태어난 사람은 모두 황은을 입지 않은 자 없다. (중략)우리 종문의 승려는 위에서 말한 바대로 상승(相承)의 바른 뜻을 결의하고 진속2제(眞俗二諦)의 법의(法義)에 어긋나지 않고 현생에는 황국의 충신이 되어 망극의 조은(朝恩)을 갚고, 내세에는 서방의 왕생을 이루어 영겁의 고난을 벗어나는 몸이 되자. 화합을 본(本)으로 하고 자행화타 (自行化他)를 한다면 개산성인(開山聖人)의 법류에 목욕하는 이 위에 없는 일이로다.”7)

이미 이 시기는 국가신도의 전국적인 장악이 대세를 이루고 이에 대응할 힘을 상실한 정토진종은 진속2제의 불법왕법 상의론을 신체제에 변형하여 적용하고 있다. 코오뇨의 진제는 사후의 왕생극락을 이루는 것을 말하며, 속제는 세속 권력의 총체인 천황의 신민이 되고 이에 보은을 다한다는 의미로써 사용한다. 그는 이를 종조인 신란(親鸞, 1173~1262)의 가르침의 근원이라고 설하고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 신란의 저서이자 진종의 가장 권위 있는 텍스트인 『교행신증(敎行信證)』에서는 ‘인왕(仁王)ㆍ법왕(法王)은 서로 드러내 중생을 가르치고, 진제ㆍ속제는 서로 의지해서 가르침을 펼친다’8)고 돼있다. 이러한 상의 관계는 서로의 조화와 상보 관계를 의미하며, 실제로 신란 자신이 염불탄압과 관련, 세속권력에 의해 유배를 당한 뼈저린 경험에 바탕하고 있다.

진속제의 이론은 용수(龍樹)의 『중론(中論)』에서 진리에 대한 양자의 상보관계를 설한 것에서 출발했다. 일본에서는 천태종의 사이쵸(最澄, 767~822)에 의해 처음으로 불법을 진제로, 왕법을 속제로 설정했다. 이에 대해 신란은 세속에서 지켜야 할 세속적인 법을 인왕, 즉 속제로 놓고, 극락왕생의 교법을 진제로 치환한 것이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이러한 종조의 가르침에 대한 비약을 통해 황권에 대한 복종과 한발 더 나아가 천황에 대한 보은마저 속제의 가르침으로 변질된 것이다. 진종에서 보은의 의미는 미타명호(彌陀名號)를 그대로 믿고 받드는 것에 의해 왕생정토가 결정되며 이에 따라 이러한 보은감사의 염불을 통해 절대적 타력에 의지하고 믿음을 갖는 일관된 삶을 뜻한다. 이러한 진속2제의 교설은 이후,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 이후 한반도를 비롯한 아시아의 침략과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신도(信徒)인 일본국민을 사지(死地)로 몰아넣는 이데올로기로 재생산된다.

1895년 진종 대곡파(大谷派)는 본산 사무보고를 통해, “황국에 태어나 명예의 전사(戰死)를 이루어 이름을 해외에 빛내는 것은 실로 기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유족들은 금생에 있어서는 드디어 국가를 위해서 신명을 아끼지 않고 보국진충(報國盡忠)에 정성을 다하며, 미래에 있어서는 우리들의 사량을 버리고 오직 미타타력(彌陀他力)의 본원(本願)에 의지하여 살아서는 황국의 양민으로 불리고, 죽어서는 안양정토(安養淨土)의 연대(蓮臺)에서 왕생을 이루자.”9) 라고 하여 제국주의 열강에 합류하는 동시에, 중국과 한국 침략의 교두보를 마련했던 청일전쟁에 대해 교단을 들어 참전자를 독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정토진종 본원사파 23대 종주인 오오타니 코오쇼오(大谷光照)는 1943년의 쇼오소쿠를 통해, “대저 황국(皇國)에서 생을 받은 중생, 누가 천은(天恩)을 입지 않았는가. 은을 알고 덕을 갚음은 불조(佛祖)의 수훈(垂訓)이며 또한 선조의 유풍(遺風)이다. (중략) 국가의 사변을 당하여 앞서 서 신명을 전쟁터에 던지고 황국을 위해 일사(一死)로 순직함은 참으로 의용(義勇)의 절정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10) 라고 하여 군국주의에 의한 침략전쟁 중에는 불법의 가르침마저 속제, 즉 왕법의 종속으로 완전히 기울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이러한 불법왕법의 파행 이면에는 일본의 근세와 근대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구조적인 불교의 한계가 도사리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4. 가(家)의 종교와 천황제

근세를 거치면서 기존 불교에 가장 큰 근본적인 변화가 온 것은 단가제도(檀家制度)의 확립이다. 이를 통해 사원과 단가, 즉 단신도(檀信徒)의 관계 속에서 집안의 선조숭배와 결합, 장송의례을 통한 조령(祖靈)신앙과 일체화되어 가(家)의 신앙을 이루게 되었다. 여기에 우란분(盂蘭盆)ㆍ정월ㆍ춘추의 피안회(彼岸會) 등 일반적인 선조제사 등이 융합되고 또한 각 종파 고유의 교설과 유리되지 않은 위에 효도론이 가미되어 가(家)의 종교로서 성격을 농후하게 띠게 된다.11)

가(家)의 종교는 이렇게 민속적인 요소가 비로소 불교와 결합되어 민중 속에 정착됨을 지칭하는데 오늘날 일본 근세이후의 불교를 통칭할 때 쓰는 말이 되었다. 이는 근세를 통해 몇 가지 단계를 거쳐 형성되었다.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제1단계로 토쿠가와 막부체제로 들어서는 17세기 초반, 제종ㆍ제사원법도〔法度, 법률 혹은 금령〕를 집중적으로 공포하여 본말사제도의 확립을 통한 봉건적인 사원체제를 구축하고 이를 막부의 체제로 편입시키는 과정이다. 대상이 되는 사원은 천태종, 진언종, 법상종, 정토종, 임제종, 조동종에 속하는 사원들로 본사의 권한을 강화시켜 말사를 종속시키는 한편 승려의 재교육을 실시함과 아울러 최종적으로는 중세사원의 특권을 박탈하고 정치ㆍ경제적으로 규제하는 것이었다.

제2단계는 본격적인 단가제도가 성립되는 과정으로 지금의 사가(佐賀)ㆍ나가사키(長崎)현에서 1637년에 일어났던 농민봉기인 시마하라(島原)의 난(難)을 기회로 이에 가담했던 기독교의 금지와 통제를 위해 사청(寺請)제도를 확립한 시기이다. 이는 숨어서 활동하는 기독교인을 색출하기 위해 모든 주민을 단가사(檀家寺)에 강제적으로 고정시키고 이의 확인을 사원에 요청하는 제도이다. 이는 매년 조사되어 종문인별장(宗門人別帳)에 등록되고 사원은 자신의 단가를 증명하는 사청증문(寺請文)을 발행하였다. 결국 사원이 말단 행정기관으로 전락한 것이다.

제3단계는 1665년 이후 막부가 모든 번에 종문인별장의 작성을 명령하여 주민 하나하나의 종지를 정기적으로 조사하는 종문아라타메(宗門改め)의 전국화가 정착ㆍ고정화되어 가는 시기이다. 이 종문인별장은 명치유신 이후 1872년 사청제도가 폐지된 후, 호적법이 제정되어 호적으로 이어지게 된다. 한편 1632년 막부에 의해 각종본산에 본말사 실태 조사를 명령한 후부터 본사의 말사지배는 점점 강화되어 갔고 사청제도 정착에 의한 전국적 차원의 신도체계가 확립됨에 따라 단가제도는 사원경제의 방편과 수탈책으로 전환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볼 때 본말사제도는 사청제도의 기반을 형성했고, 사청제도는 민중을 타율적인 입장에서 사원에 소속되게 하여 생활전반을 지배하는 의식체계를 확립했다. 더불어 이 기간은 전래민속과의 결합 속에 장제화(葬祭化)되어 가는 불교가 수동적인 단가제와 맞물려 전국민화되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 단가제는 명치유신 이후 법률상의 종교의 자유가 이루어졌음에도 해체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까지 남아 일본 사원경제를 떠받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현대의 일본불교를 장식불교(葬式佛敎)라고 부르는 연유이기도 하다.

명치유신 직후 단행된 신불분리를 통한 제정일치의 근대국가 지향의 이면에는 이러한 단가제도를 기반으로 한 교단불교 정착의 입각지와 맞물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명치정부의 천황제 절대 권력의 확립은 일본 고래의 가족 관념을 기반으로 조상숭배를 유대로 하는 ‘가(家)’의 관념에 의해 지지되고 있으며, 이는 그대로 교단불교의 단가제가 ‘가(家)’의 단위로 성립된 것과 동질의 것이었다.12) 단가제에 의해 뒷받침된 가의 종교적 관념이 그대로 가의 확대인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제정일치 근대국가의 성립바탕이 된 것이다.

특히 이런 가의 관념 표출로써 군국주의와 아시아에 대한 패권주의, 그리고 해외점령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사로 이용된 팔굉일우(八紘一宇)를 들 수 있다. 이는 세계를 일가(一家)로 한다는 뜻이다. 불법과 왕법의 합치를 정의로 보고,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천황제 국가를 주장한, 일련주의자(日蓮主義者) 타나카 치가쿠(田中智學, 1861~1939)에 의해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온 용어를 통해 조어된 것이다.13)

이는 군국주의를 지향하는 불교가들의 수사로써 이용됐다. 이를 종단의 지도자로서 선두에 서서 주장한 이는 진종 본원사파 22대 종주였던 오오타니 코오즈이(大谷光瑞, 1876~1984)였다. 그는 1940년에 일본의 이상은 대동아 공영권과 태평양 경제권의 실현에 있다 하고, 지구를 취하는 것이야말로 팔굉일우의 뜻에 따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14) 즉 전 세계를 정복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천황의 일가를 이루는 것이라 본 것이다. 천황을 대자대비의 여래화(如來化), 전쟁의 성전 이데올로기화, 보국진충, 조선의 식민지화를 미화시키는 등 교의의 왜곡을 통한 군국주의에 대한 전면적인 지원을 스스로 앞장서서 해왔다.

다음으로 원래는 정토진종의 승려였지만 후에 무아애(無我愛)의 운동가로 알려진 이토오 쇼오신(伊藤信, 1876~1963)은 1938년 잡지 『무아애』를 통해 천황을 아미타여래, 황국인 일본을 현존의 극락이라고 하고, 만세일계의 황실을 종가(宗家)로 하며 전 국민을 분가(分家) 한 ‘일대가족(一大家族)’로 보았다. 여기에다 적자(赤子)인 천황의 국민에 대한 인자(仁慈)함과 더불어 국민 각자가 분에 응함에 따라 천황의 팔굉일우 대업을 익찬하는 관계가 됐다고 했다. 1939년에는 천황이 통치하는 일본은 팔굉일우의 정신으로 세계경영의 대업마저 익찬해 올림으로써 금일에 이르렀다고 하였다.15) 대동아 공영권을 적극 지지한 그는 천황을 정토신앙의 절대적 존재와 가(家)의 정점으로 보는 등 오오타니와 궤를 같이 하고 있다.

또한 정토종 승려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시이오 벤쿄오(椎尾弁匡, 1876~1971)를 들 수 있다. 겉으로는 연기론에 바탕해 공생사상을 주장했던 그는 청일, 러일, 중일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을 정의의 전쟁으로 논리화시키고 미화시켰다. 정계의 진출은 물론, 교육사업에서도 수완을 발휘한 그는 천황에의 절대순종과 개인주의 자유주의를 배격하는 국체(國體)의 발양, 대동아 공영권의 건설, 팔굉일우의 세계 신질서 수립을 위해 결의를 다지며, 대동아 교학의 수립을 주장하기도 했다.16) 시이오는 대동아 공영의 논리를 일대가족국가의 확대로 보는 팔굉일우의 설을 끊임없이 설파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팔굉일우는 중일전쟁으로 치달으면서 강화되는 대동아 공영권에 대한 이데올로기를 떠받쳐 주고 있다. ‘서구의 침략으로부터 아시아를 보호한다’는 식민지화의 명분이 바로 이런 가의 논리로부터 배태됐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신도들이 사지(死地)로 향하고 전쟁을 치르는 동안 이런 불교가들의 언어적 수사로부터 그들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받았을 것은 불문가지의 일이다. 이는 명치유신 이후 줄곧 일본의 근대국가가 제국주의화되면서 치러야 했던 값비싼 댓가였다. 결국 근세에 형성된 불교의 봉건체제하의 예속이 근대에까지 이어지면서 이에 대한 탈피를 하지 못한 데에 원인이 있다. 즉 천황제에 의한 근대의 국가이념 속에서 비록 형식적인 신교의 자유가 보장되었음에도 수동적으로 결부된 단가제도에 대한 불교의 집착을 끊지 못한 데에 그 원죄가 성립된다고 볼 수 있다.

5. 나오는 말

이와 같은 폐불훼석과 불법왕법의 파행, 그리고 가의 종교와 천황제 국가에 대한 논의는 역사적으로 서로 맞물려 전개되고 있다. 폐불훼석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권력의 필요에 의해 형성된 단가제도를 통해 민중 위에 군림한 직접적인 인과로 하여금 그런 파국을 맞도록 했다면 불교의 책임도 크다 하겠다.

여러 가지 논의가 있지만 타락한 불교에 대한 수순으로 보는 것이 이제까지 신불분리와 폐불훼석을 보는 일반적인 시각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단지 긴 역사적 입장에서 타자의 상보성이라는 측면에서만 조명했다. 그리고 이를 보다 불교 내적인 요인의 결함으로 보고 천황제 근대국가에 대한 추인과 지지를 불법왕법의 파행과 가(家)의 종교의 천황제론 이행으로 본 것이다.

이렇게 불교의 역사적인 내외 요인이 천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일본 근대국가 형성과 그 이후의 군국주의 노선을 지원하고 스스로 굴절돼갔다는 것은 일본불교 역사에서도 가장 불행한 일이었다. 더욱이 새로운 흐름을 세워 불교 스스로의 역사를 주도하지 못하고 답보상태로 오늘날까지 근대의 의식으로 존속하는 것은 더욱 큰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이는 결국 근세ㆍ근대에 있어 불교의 역할에 대한 완전한 반성과 이를 바탕으로 한 개혁의 논의가 이루어 지지 않고 있음을 여실히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일본 상황과 위에서 논한 근대불교의 모습이 맞물려 보이는 것은 괜한 기우일까. 

원익선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연구교수ㆍ원불교 교무.1994년 원광대 원불교학과 졸업, 2000년 일본 쿄오토(京都) 불교대학 대학원 문학연구과 불교문화 전공 석사과정 졸업, 2006년 동대학원 동전공 박사과정 수료. 논문으로는 「카마쿠라불교(鎌倉佛敎)에 있어서의 제조사(諸祖師)의 말법사상(末法思想)의 수용과 극복의식(2000년 석사학위논문)」, 「왕생전(往生傳)의 연구-헤이안기(平安期)로부터 에도기(江戶期)에의 전개(2006년 박사학위논문)」, 「한국의 말법사상-운묵(雲默)의 『釋迦如來行蹟頌』을 중심으로(불교대학 大學院紀要, 30)」 등으로 있다. 전공은 일본불교의 역사와 사상, 동아시아 불교사상으로, 특히 한국, 중국, 일본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불교의 정착과정과 사상사적 흐름에 대한 연구가 주요 테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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