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음의 장벽 앞에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란 노래가 등장할 정도로, 통일은 한반도의 운명에 이해관계를 가진 모든 사람의 숙원이기도 하지만 특히 남한 땅과 북한 땅에서 사는 우리 동포들에게는 자신의 미래 삶의 최대과제이자 변수다. 그렇기 때문에 한반도를 둘러싼 이해당사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남북한 당국자들까지도 통일을 위한 나름의 노력을 시도해 왔다. ‘6자회담’이니 ‘남북한 고위급 회담’이니 하는 정치적 노력, ‘개성공단 사업’이나 ‘금강산 관광사업’까지를 포함한 ‘남북한 경협’과 같은 경제적 차원의 노력, 그리고 종교계 및 시민사회의 인도주의적 식량지원 활동과 같은 사회통합적 노력 등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통일 노력들조차도 남북한 당국을 비롯한 각국의 상치된 이해관계나 자그마한 군사적 충돌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기 일쑤였고 아직도 남북을 가르는 철책선에는 팽팽한 군기가 서려 있다. 사회학적 차원에서 볼 때 더욱 심각한 문제는 분단 60년의 세월 동안 적대적 체제 속에서 살아온 남한 주민과 북한 주민들의 정치·경제적 삶은 물론 그와 연동된 사고방식, 지식, 정서, 상상력, 의지 등이 매우 이질화되어 왔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이질화가 점점 더 고착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사회구성원들을 둘러싼 정치적·경제적·역사문화적 삶과 그와 연동된 지식, 정서, 사고방식, 상상력, 의지의 총체를 마음이라 할 때, 어쩌면 남북한 구성원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마음의 장벽과 그로 인한 마음의 이질성 및 적대성은 사회체제의 모순성이나 대량살상 무기의 위험보다 더 위험한 ‘통일의 장애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만약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서독 주민들과 동독 주민들 사이에 점점 더 높아지는 ‘머릿속의 장벽’이 통일 독일의 가장 큰 사회문제라는 지적이 암시하듯이, 이 마음의 장벽은 미래의 통일 한국에 있어서도 한동안은 남북한 주민들 앞을 가로막아 심각한 불통(不通)과 사회적 갈등을 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마음의 통일은 통일의 전제조건일 뿐만 아니라 통일 이후 사회통합의 조건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마음의 장벽을 허물어야  하며, 정치·경제적 통일 이후에도 마음의 장벽을 허무는 노력을 지속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아직까지도 마음의 통일에 관한 학문적 논의는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루어지고 있는 것마저도 대단히 불충분하다.

이 글에서는 한국사회의 합심문화에 기반하여 ‘마음의 통일’ 문제를 체계적으로 논의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다음 장(2장)에서는 우선 합심 개념에 대한 작업적 정의는 물론 합심 개념을 ‘왜, 그리고, 어떻게’ 마음의 통일과 관련짓고자 하는지를 밝힐 것이다. 그리고 3장에서는 한국 전통사회의 합심문화와 남북한 합심문화의 현주소를 확인한 다음, 마지막 장인 4장에서는 그러한 합심문화에 기초하여 ‘마음의 통일’을 위한 실천 방안을 제시해 볼 것이다. 여기에서는 특히 마음문화의 보고(寶庫)라 할 수 있는 불교의 역할을 집중적으로 논의할 것이다.

2. 왜 하필 그리고 무엇 때문에, 합심인가?

최근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는 ‘마음의 통일’과 관련된 중장기 연구에 착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작업은 한국사회의 저류에 흐르는 마음문화와 그 사상성 및 역사성에 기초하여 이루어지기보다는 사회과학적 시각에서 북한 주민 및 탈북자의 의식이나 정서를 실증하고 그것을 남한 및 다른 나라의 사례와 비교분석하여 통일의 함의를 도출하는 데 초점을 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사회과학적 연구들이 주로 서구 사회과학자들의 사회통합 이론에 의존함으로써 그리고 한국사회의 저류를 관통하는 마음문화의 사상성과 역사성을 소홀히 취급함으로써, 한국사회의 사회문화적 현실에 적합하지 않은 실증 및 비교분석의 잣대를 사용하는 문제(방법론적 타당성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한국사회의 마음문화에서 창안된 내재적 잣대의 마련이 가장 시급한 과제다.
이와 관련하여 가장 먼저 떠오르는 통일 이론의 틀이 바로 원효의 화쟁론이다. 원효의 화쟁론은 불교의 일심(혹은 불성)에 기초하여 당시 한국에 소개된 종파(특히 중관, 유식)를 회통시킨 통일 사상이자 통일이론으로 회자되어 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병욱은 “한국불교의 특징의 하나인 화쟁(和諍: 會通)사상은 자신과 다른 이념을 수용하고자 하는 것이었다”고 하면서 “이러한 화쟁사상을 통해서 자신과 이념을 달리하는 세력과 공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게다가 그의 화쟁론은 통일신라시대 후기의 사회통합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는 데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혹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원효의 화쟁론은, 일심을 내장한 불교 교리적 전제 위에서 성립하고 그 위에서 실천적 역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화쟁의 궁극적 지향도 일심에 놓여 있었다는 점에서, 그래서 통일신라시대 후기나 고려시대와 같이 불교문화를 공유하는 사회에서 비로소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것을 이질적 종교문화적 토양 위에 서 있는 오늘날의 사회적 맥락 속에 곧바로 적용시키는 것은 무리한 일반화의 오류로 귀결될 위험을 또한 수반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던 필자는 최근 오비이락(烏飛梨落)을 경험하였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필자는 한국사회의 구조와 변동을 설명할 수 있는 내재적 잣대를 서구적 기원의 합리성이 아니라 합심성에서 찾아야 한다는 전제하에 한국사회의 합심문화를 다양한 차원에서 실증하기 시작하였다. 비록 남북한의 사회통합과 관련된 ‘의도한’ 연구는 결코 아니었지만 그리고 이 글을 전제한 연구는 더더욱 아니었지만, 그중에는 《조선왕조실록》이나 율곡의 《격몽요결》에 등장하는 다양한 합심(合心) 유형에 관한 실증적 연구도 포함되어 있고 1980년대 중반 북한의 소설에 등장하는 합심 유형에 대한 실증적 연구도 포함되어 있다. 남북한의 사회문화적 통합을 위해서는 분단 이전 남북한 주민들이 공유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분단 이후에도 남북한 주민들의 일상적인 삶의 저류에 흐르는 공통의 문화를 중심으로 사회문화 공동체를 형성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을 고려하여, 앞에서 언급한 필자의 함심 관련 연구들을 오비이락 격으로 해석하는 순간, 한국사회의 합심문화는 분단 이전 남북한 주민들이 공유하던 문화일 뿐만 아니라 분단 이후까지도 북한 주민들의 일상적인 삶의 저류에 흐르는 문화에 다름 아닌 것으로 둔갑함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게다가 한국사회의 합심문화는 유교와 불교의 사상적 기반 위에서 발전된 일상생활 문화이기 때문에 원효의 ‘일심화쟁’의 통일 패러다임에 정확하게 부합함을 확신했다. 뿐만 아니라, 합심 개념은 한국사회에서 널리 사용되는 일상적 언어라는 점에서 원효의 일심 개념이 가진 불교적 특수성을 넘어서서 한국사회 일반에 보편적으로 적용시킬 수 있는 장점을 가진 개념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말 그대로 오비이락의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는 ‘마음의 통일’을 합심문화와 연결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합심은 무엇이며, 그것은 또 ‘마음의 통일’과 어떻게 연관되는가? 지면의 한계상 여기에서 합심 개념을 상론할 여유는 없지만, 논의를 위한 최소한의 고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약간의 작업적 정의를 해 보자. 우선 여기에서 ‘합심’이란, 일상용어이기도 하지만 마음현상을 ‘합리주의’의 의미소 중 ‘결합’ 혹은 ‘부합’을 의미하는 ‘합(合)’과 마음의 한자어인 ‘심(心)’을 조합한 학술적 조어(造語)이다. 그리고 합심에서 합은 합리주의의 합과 같은 의미소로서 대상에 부합한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대상을 결합한다는 의미를 지니며, 심(心)은 합리주의가 전제하는 이성만이 아니라 감성, 의지, 영혼이나 정신(spirit) 등의 총합이다. 또한 합심 개념은 동양사상의 공통분모인 관계론적 존재론과 마음 사상 및 문화가 결합된 개념으로써, 불교의 경우 의존적 발생의 원리(연기의 원리)와 마음 사상 및 문화가 결합함으로써 자연발생적으로 탄생한 개념이기도 하다. 이렇게 볼 때, 합심 개념은 마음 개념보다 상위의 개념이며 개인의 내적·심리적 상태만을 의미하기보다는 그것과 외적·사회적 관계의 결과를 의미하며 그러한 점에서 구조적 성격을 가진다. 그런데 인간을 둘러싼 사회관계와 구조가 상즉하는 동시에 상입하고 있다면 그리고 그 관계를 매개하는 에너지와 정보를 조율하는 것이 마음이라면, 그리고 마음이야말로 인간의 필연적인 실존적 조건이라면, 그 산물로서 합심은 관계의 유형(범위나 성격)이나 그 관계에 대한 마음의 상태에 따라 다양한 합심유형학이 성립할 것이다. 가장 근원적이면서도 결정적인 합심인 본심 및 천심(본원적 사회성)과의 합심을 비롯하여, 타자 및 세계-규범, 사물, 가족, 집단과 공동체, 국가, 우주-와의 합심 등이 존재할 것이다.

합심을 이렇게 정의할 때, 한국 전통사회에서부터 통일 이전까지 존재했던 합심문화는 남북한 주민들 사이의 마음 통일을 이루는 공통기반으로 작용할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통일 이후 ‘통일 한국’의 상황에서는 분단 상황에서 탄생했던 합심 유형, 특히 북한사회의 경우 당이나 수령과의 합심 유형이나 남한의 반공 이데올로기와의 합심 등은 쇠퇴할 것이고 그 자리를 통일 한국 혹은 그 상징과의 합심이 대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점에서 합심문화는 ‘마음의 통일’을 위한 문화적 기반이자 통일 이후 사회통합의 문화적 조건으로도 작용할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정확하게 이 지점에서 한국사회의 합심문화는 마음의 통일과 연결된다. 바로 이 글의 이론적 맥락이다.

요컨대 합심문화는 역사적 차원은 물론 사상적 차원이나 이론적 차원에서도 ‘마음의 통일’을 위한 기반이 되기에 충분하다. 또한 ‘합심을 통한 마음의 통일’ 패러다임은 원효의 일심화쟁의 이론 틀을 살리면서도 그 적용 범위를 현대적 상황에 부합하도록 확장시킬 수 있고 그러한 점에서 원효 화쟁사상의 직접적인 적용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큰 보편성을 확보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진다. 게다가 가치론적 차원에서도 합심문화는 전쟁에 부재한 상태를 의미하는 공존(혹은 갈퉁의 소극적 평화), 상호 이익의 교환을 의미하는 상생(갈퉁의 적극적 평화)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평화 상태의 지속을 담보하는 ‘영구적 평화’의 가치를 포함한다. 이는 이 글이 합심문화를 ‘마음의 통일’과 연관시키는 존재론적·인식론적·가치론적 기반이다.

3. 합심문화의 전통과 오늘날 남북한 합심문화의 현주소

프랑스 아날학파의 이론적 기초를 세운 페르낭 브로델에 따르면, 일상생활의 역사는 정치권력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으로 지속된다. 그리고 브로델에게 물질문명의 장기지속에 관한 연구를 권하고 자신은 정신사의 지속을 연구한 아날학파의 아버지 뤼시앵 페브르에 따르면, 일상생활의 의식주와 같은 물질문화뿐만 아니라 종교생활이나 언어생활과 같은 마음문화 역시도 체제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사회문화적 저류로 지속적으로 흘러간다. 결국 페브르나 브로델에 따르면, 비록 분단 이후 북한의 주민들이 사회주의 근대성 및 주체사상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남한의 주민들이 자본주의적 근대성에 포섭되어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앞서 언급한 합심문화는 지속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해서, 여기에서는 이러한 시각에 기초하여 우선 분단 이전 한국 전통사회의 합심문화를 확인해 본 다음, 그러한 합심문화가 남북한 주민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어느 정도 지속되고 있는지를 확인해 볼 것이다. 물론 이러한 작업은 오늘날 남한사회와 북한사회에 존재하는 마음문화의 역사성과 현재성을 밝히려는 목적뿐만 아니라 ‘마음의 통일’을 위한 문화적 기반을 확인하는 사전 작업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1) 한국 전통사회의 합심문화

앞에 언급했듯이 필자는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합심 유형을 분석하기도 하였고, 율곡의 저서 《격몽요결》에 등장하는 합심 유형을 분석하기도 하여 각각 학술지에 발표하였다. 여기에서는 그중 일부를 제시하여 한국 전통사회에 존재했던 합심문화의 일우(一隅)라도 엿보고자 한다.

우선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합심 유형 중 몇 가지를 예시하고 그 내용을 보자. 아래의 인용문은 《조선왕조실록》 선조 2권 첫번째 기사(진주에 사는 조식이 성학의 기본에 대해 상소하다)의 내용 중 일부다.
 
조식(曺植)의 상소에, “경상도 진주(晉州)의 거민 조식은…… 감히 진심을 다하여 주상 전하께 올립니다. ……이치를 궁구하고 몸을 닦으며 본심을 보존하고 밖을 살피는 가장 큰 공부에는 반드시 경(敬)을 위주로 하여야 하는데, 공경이라는 것은 정돈되고 엄숙하며 혼매하지 않고 항상 깨어 있으면서 한 마음을 근본으로 하여 만사를 대응하는 것이니, 안을 곧게 하여 밖을 바르게 하는 것으로 공자가 말한 ‘몸을 경으로써 닦는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을 위주로 하지 않으면 이 마음을 보존할 수 없고, 마음을 보존하지 않으면 천하의 이치를 궁구할 수 없고, 이치를 궁구하지 않으면 사물의 변화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 군자의 도는 필부필부(匹夫匹婦)의 간단한 생활에서부터 시작되어 가정과 나라와 천하에까지 미치는 것이니, 다만 선악을 분별하여 몸이 정성스럽게 되도록 하는 데에 달렸을 뿐입니다. ……삼가 상소합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전일의 소장을 내가 항상 자리에 두고 살펴보는데 이 격언을 보니 더욱 재주와 덕이 높은 것을 알겠다. 내가 비록 민첩하지 못하나 응당 유념할 것이니 그대는 그리 알라” 하였다.(굵은 글씨 강조는 필자)

전문을 공개하고 싶을 정도로 명문인 데다 유교 철학의 정수가 고스란히 녹아 있어 다소 길게 인용하였지만, 그 핵심은 굵은 글씨로 강조한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치국평천하의 시작이 본심과의 합심에서 시작되는 것이란 점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두 마음’의 상태가 아니라 본심과의 합심, 즉 ‘한 마음’이 만사에 대응하는 기초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리고 이 구절은 싯다르타가 붓다가 된 후 최초로 사유했다고 하는 사성제(四聖諦)의 첫 구절과 일치한다.

이와 같이 마음이 통일되어 청정하고 순결하고 때 묻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유연하고 유능하고 확립되고 흔들림이 없게 되자, 나는 마음을 번뇌의 소멸에 대한 관찰의 지혜로 향하게 했습니다. ‘이것이 괴로움과 번뇌이다’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습니다. ‘이것이 괴로움과 번뇌의 발생이다’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습니다. ‘이것이 괴로움과 번뇌의 소멸이다’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습니다. ‘이것이 괴로움과 번뇌의 소명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습니다.

이렇게 볼 때 자신의 본심과의 합심이 동양 사상의 기초였음을 쉽게 엿볼 수 있다. 특히 인용문의 말미는 선조가 조식의 상소에 대해 답한 부분인데, 당시의 최고 통치자인 왕이 합심론에 전적으로 수긍하였음이 잘 나타나 있다. 이는 합심론이 현실 정치에도 그대로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이러한 자신의 본심과의 합심을 통한 상황대응의 전통은 오늘날 가정, 학교, 심지어 각 기업의 사무실 등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사자성어(四字成語)인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으로 이어지고 있다.

다음으로는 율곡의 《격몽요결》에 나타난 합심 유형 중 하나를 예시하고 그 내용을 살펴보자. 가족관계를 각별히 중시했다고 알려진 율곡은 《격몽요결》의 10개 장(章) 가운데 무려 4개 장(事親章, 喪制章 祭禮章, 居家章)을 가족관계에 할애하고 있으며, 여기에는 조상-후손 관계에 대한 상제와 제례가 포함되어 있다.
아래의 인용문은 부모와의 합심을 강조한 대표적인 표현으로, 율곡은 지극한 효행의 실천이 부모와 합심하는 방법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부모의 은혜가 어떠한가. 어찌 감히 제 마음대로 하며 부모에게 효(孝)를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람마다 항상 이 마음을 보존할 수만 있으면 스스로 어버이에 대한 섬김이 성실해질 것이다.
…… 부모님이 병환이 있으시면 근심스러운 마음과 염려하는 기색으로 다른 일을 제쳐 놓고 오로지 의사에게 묻고 약을 지어 오는 것에만 힘써야 하며 병이 나으시면 다시 평소대로 한다.

가족관계는 부모-자녀 관계 외에도 부부관계와 형제 사이의 관계를 포함한다. 율곡은 부부와 형제 사이의 특성에 따라 합심을 매개하는 수단이 다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즉, 형제 사이의 합심을 위해서는 우애(友愛)가 필요하고, 부부간의 합심을 위해서는 상호 예경(禮敬)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형제는 부모의 유체(遺體)를 똑같이 받아 나와는 한 몸 같으니, 저와 나의 구별이 없이 생각하여 음식이나 의복이 있든 없든 간에 함께해야 할 것이다. 가령 형은 굶주리는데 아우는 배부르고, 아우가 추위에 떨고 있는데 형은 따뜻하게 입고 있다면, 이것은 한 몸 가운데 한 군데는 병들고 한 군데는 건강한 것이니 몸과 마음이 어찌 한쪽만 편안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 사람들이 형제간에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것은 모두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 데서 비롯한다. 만일에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어찌 같은 부모의 자식을 사랑하지 않겠는가. 형제에게 착하지 못한 행실이 있다면 정성을 들여 충간(忠諫)하여 점차 이치를 깨달아 알아듣고 감동하게 해야 하고, 갑자기 노한 기색과 거슬리는 말을 해서 화기(和氣)를 잃어서는 안 된다.

지금의 배우는 자들은 비록 밖으로는 긍지를 가지고 있으나, 안으로 독실함이 적어서 부부간의 이부자리에서 정욕에 방종하여 그 위신과 예를 잃기 때문에, 부부 사이에 서로 버릇없이 굴지 않고 서로 공경할 수 있는 이가 매우 적다. 이러고서 몸을 닦고 집안을 바로잡으려 하니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반드시 지아비는 온화하면서 의(義)로써 규제하며, 지어미는 유순하면서 바름으로써 지아비의 뜻을 받들어 부부간에 예의와 공경함을 잃지 않아야 집안일이 다스려질 수 있다. 종전에 서로 버릇없이 굴다가 갑작스럽게 서로 공경하려면 하기 어려울 것이니 반드시 아내와 서로 조심하면서 이전의 습관을 버리고 점차 예의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아내가 내가 하는 말과 몸가짐이 한결같이 바른 것을 보게 되면 차츰 믿고 순종할 것이다.

한편, 공통의 조상에 대한 제례는 직계가족 구성원들뿐만 아니라 먼 친척들과의 합심에 이를 수 있는 기회이다. “상제(喪制)는 마땅히 주문공(朱文公)의 《가례(家禮)》를 따라야 한다”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율곡 역시도 주희의 가례를 상례 및 제례의 표준으로 삼고, 2개의 장을 빌어 상례와 제례를 자세하게 정리하고 있다. 아래의 인용문에 나타나 있듯이 상례와 제례를 통하여 후손들은 조상들 혹은 조상신과 합심하게 된다. 살아 있는 가족 구성원들 사이의 합심과 달리 조상과의 합심은 슬픔과 기억의 재현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합심이므로 상·제례에 참사(參祀)하는 후손들은 정성을 다하고 항상 엄숙한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이른바 치재라는 것은 음악을 듣지 않고 출입하지 아니하며, 딴생각 없이 제사를 받을 분만 마음에 두고 그분이 생전에 거처하시던 곳을 생각하고, 웃고 말씀하시던 일을 생각하며, 평소에 좋아하시던 것을 생각하고, 즐기시던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고서야 제사를 드릴 때에 얼굴이 보이는 듯하고, 음성이 들리는 듯하니 정성이 지극해야 신령이 흠향하실 것이다.

상례(喪禮)와 제례(祭禮)는 자손으로서 가장 정성을 바쳐야 할 부분이다. 이미 돌아가신 어버이는 또다시 봉양할 수는 없는데 초상에 예를 다하지 않고 제사에 정성을 다하지 않는다면, 영원한 애통을 붙일 곳이 없고 흘려버릴 만한 때가 없을 것이니, 자식의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증자(曾子)가 말하기를, “죽은 이에게 상례를 신중히 하고 제사에 정성을 다하면 백성들의 덕이 돈후해질 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사람으로서 깊이 생각할 바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합심 유형은 앞서 언급했듯이 《조선왕조실록》과 《격몽요결》 각각에 나타난 다양한 합심 유형들 중 대표적인 사례만을 각각 예시한 것에 불과하다. 지면 관계상 더 이상의 논의는 불가능하지만, 한국 전통사회의 합심유형에는 이외에도 타자 및 세계-사회규범, 사물, 가족, 집단 및 공동체, 국가, 우주-와의 합심 등이 풍부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합심문화는 오늘날 남북한 주민들의 일상생활 속에 어떻게 지속되고 있는지 살펴보자.
 
2) 남북한 합심문화의 현주소

여기서도 필자의 선행연구들 중 몇 가지 사례만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아래의 합심 사례는 최근 남한의 합심문화 용례 일부이다.

아픔이 헛되지 않기 위해: 물질문화 못지않게 이 시점에서 정신문화의 근간을 바로 세워야 할 때다. 잘사는 나라로서뿐 아니라 바르게 사는 나라, 안전하고 좋은 나라, 신뢰받고 품격 있는 나라를 만드는 데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합심하여 주력해야 한다. 세월호 참사의 원인 분석을 나침반 삼아 다시 한 번 위기대처 기능과 정신적 가치를 튼튼히 해야 누구나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다. (밑줄은 필자)
— “시론” 〈매일신문〉 2014년 5월 8일

그러나 합심이 곧 마음의 동일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마음조차도 관계의 산물이고 그러한 점에서 무상한 그 무엇이라면 합심은 항상 변심 가능성을 전제한다. 변절에 대한 경계나 변절자에 대한 배제가 강화하더라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상황이 바뀌면 합심은 언제든지 깨어질 수 있다. 합심은 안정적인 지속을 추구하지만, 그 자체로는 상황적인 노력이며, 일시적 결과일 수 있다.

‘20~40대 선거 표심’ 앞에 반성해야 할 보수언론: ‘선거가 끝난 뒤 보수 언론은 ‘20대를 좌절케 한 정치’ ‘30대를 분노케 한 경제’ ‘40대를 절망케 한 복지’ 등 정부·여당의 실정 때문에 “젊은 세대들이 변심했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밑줄은 필자)
— 〈경향신문〉 2011년 10월 31일 사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합심주의 문화는 성공적인 합심에 도달하는 합심 에너지를 최대화하려는 대응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예컨대 오늘날 한국사회의 조직문화로 자리 잡은 회식(會食)은 그 적절한 대응사례가 될 것이다. 회식은 ‘음식’을 매개로 하는 소통의 행사이며, 다른 구성원을 향한 표현이며, 의견의 전달 기회를 제공한다. 굳이 짐멜의 《식사의 사회학》을 원용하지 않더라도, 실감의 차원에서 우리는 오늘날 한국사회의 회식문화야말로 그러한 사회적 기능을 하는 대응 노력임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북한의 경우도 최근(2014년) 김정은의 고모부이자 킹메이커로 알려진 권력 서열 2인자 장성택을 숙청하고 처형한 빌미를 ‘왼새끼를 꼬았다’는 표현이 암시하는 것, 즉 변심에서 찾았는데, 이 사건은 미셸 푸코가 말하는 미시물리학적 통치성의 효과를 가짐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내친김에 북한의 합심문화 사례를 보자. 아래의 인용문은 1980년대 중반의 북한 소설인 백남룡의 〈벗〉에서 발췌한 한 구절들이다.

“……신랑 정진우와 신부 한은옥은 부모님과 친척들, 동지들, 벗들의 앞에서 ……로세대와 후대들 앞에서, 당과 조국 앞에서 신성한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게 됩니다. 사회의 세포인 가정의 화목은 나라의 공고성과 관련된다는 것을 명심하고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서로 돕고 이끌면서 어머니 조국의 번영을 위하여 마음 변치 말고 성실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북한 주민들은 결혼조차도 당과 조국에 대한 마음과 연결시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북한 주민의 사생활 속에는 ‘우리식 사회주의’의 통제 범위를 벗어난 마음문화도 존재한다.
 
“저는……남편과 의가 맞지 않습니다. ……못 살겠어요. 도저히! ……우린 잘못 결합되었어요. 성격이 정반대예요.”

통상 타자와의 공정한 관계를 의미하는 의(義)가 맞지 않으면 마음이 상하게 된다. 그것은 의(義) 속에 타자의 관계를 매개하는 진심에 대한 기대와 신뢰, 즉 진심과의 합심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의가 깨어지면 당사자는 마음에는 큰 상처를 입게 되는 것이다. 아래의 인용문은 남편이 아내의 마음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어 이혼에 이르게 된 사건에 관련한 이야기다.
 
그 여자는 한 번도 남편의 마음속에, 전정 속에 들어가보지 못하였다. 남편은 가슴의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남편은 자기를 안해가 아니라 식모로, 아이보개로 여기는 것 같았다.

위의 인용문을 보면, 아무리 북한사회에서 건강한 가정을 강조하더라도 부부관계가 이 정도에 이르면 이혼은 불가피함을 잘 보여준다. 동시에 그 행간을 읽어보면, 위 인용문은 부부관계가 이 정도의 불합심에 이르러서는 안 된다는 사실, 나아가 부부간의 합심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3) 소결

앞에서 보았듯이 한국 전통사회에서 발달한 합심문화가 남북분단으로 인해 자본주의 근대성과 사회주의 근대성 및 남북한의 이데올로기의 영향으로 상당히 이질적으로 변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한국 전통사회에서는 본심이나 불성과의 합심을 매우 강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에 기초하여 세상과의 합심문화를 발전시켜 온 반면, 오늘날 남한의 합심문화는 기업의 노사관계나 국가의 이해관계를 전제한 합심문화가 발달하였고 북한의 경우 당, 조국, 수령 등과의 합심이 매우 강조됐다. 동시에 이렇듯 겉으로 드러난 차이에도 불구하고 합심문화의 문화적 암호(code)와 구조는 동일함을 알 수 있었다.

또한 한국 전통사회의 합심문화가 내용상의 변화를 겪은 것은 분명하지만, 오늘날 남북한 주민들의 일상생활 속에는 여전히 합심문화가 지속되고 있다. 실제로 북한 주민들의 일상생활을 묘사하고 있는 문학작품이나 예술은 물론 〈천리마〉나 〈노동신문〉 등 이른바 기관지 혹은 유사 기관지를 보더라도 ‘마음(心)’ 및 합심 관련 단어(예컨대 일심단결)가 많이 사용된다: “일심단결의 위력으로 우리 혁명을 굳건히 보위하자. 이것이 우리의 신념이다. 일심단결은 혁명의 천하지대본이며 우리 공화국의 백전백승의 원천이다. 총폭탄보다 더 위력한 것이 일심단결이며 그 어떤 힘으로도 굴복시킬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일심단결이다.”(〈노동신문〉 1996년 4월 9일)

오늘날 남한사회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남한 주민의 일상생활 속에서 ‘마음’은 주요 일간지에서 하루 평균 14번 등장할 정도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실제로 ‘마음’은 자주 쓰이는 단어의 중요도에서 230위를 차지했으며 등장 횟수가 증가하는 상황이다. 2000년에는 하루 평균 11회, 2005년에는 12회, 2010년에는 16회, 2014년에는 약 17회 등으로 ‘마음’이라는 단어가 더욱 자주 등장한다. 14년 동안 매년 계속해서 등장하는 어휘 약 4만 9천 개 중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2000년 0.000468에서 2013년 0.000664로 40%가량 증가했다. 바로 이러한 마음문화가 앞서 제시한 사례에 나타난 합심문화의 풍부한 문화적 토양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4. 마음의 장벽을 허물기 위하여: 불교를 중심으로

1) ‘마음통일론’의 이론적 구축

연기적 본성(혹은 본원적 사회성)을 담지한 불성과의 합심은 한국 전통사회에서 가장 강조한 합심유형이다. 그리고 이러한 합심유형은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사적 이익에 가치의 우선성을 두고 있는 남한의 자본주의 근대성과의 합심, 북한에 대한 적개심에 기초한 반공이데올로기와의 합심, 그리고 동족상잔의 아픔에 대한 책임 전가 방식의 과거사와의 합심뿐만 아니라 북한의 사회주의체제와의 합심이나 주체사상 및 수령과의 합심, 남한에 대한 적개심에 기초한 반자본주의 이데올로기와의 합심 등을 모두 초월하는 합심유형이다.

이는 불성과의 합심에 기초한 마음의 통일론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장점을 가짐을 의미한다. 첫째, 이 통일론은 원효의 일심사상을 현대화하고 보편화한 것일 뿐만 아니라 한국 전통사회의 합심문화에 기초를 둔 통일론이란 점에서 내재적 통일론이라 할 수 있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남북한 주민의 일상생활과 쉽게 부합할 수 있는 통일론이다. 둘째, 이러한 합심문화에 기초한 마음의 통일론은 일심(一心) 개념이 불러일으키는 전체주의적 이미지를 넘어서서 개별 마음의 자율성을 인정하는 열린 개념인 합심에 기초하기 때문에 남북한 사이의 이념적 차이를 지양하여 더 큰 보편적 가치로 승화시킬 수 있는 장점을 지니는 통일론이다.
이렇듯 합심에 기초한 마음의 통일은 불교적 실천사상의 토대로도 작용할 수 있다. 예컨대 타자나 다른 세력(남한의 입장에서는 북한, 북한의 입장에서는 남한)을 섭수할 수 있는 불교 실천사상의 전형으로 알려진 사섭법을 보자. 그 첫 번째인 보시행은 자신의 사적 이익을 더 큰 가치로 이전시킬 때 가능한 행위로서 여기에는 사적 욕망과 집착을 초월한 불성과의 합심이 전제되어 있다. 또한 애어는 사회적 소통을 가능케 하는 논리를 내장하고 있는바, 이는 남북한 사이의 상호 교류와 협력을 가능케 또 하나의 보편적 가치인 공존의 가치를 실천할 수 있는 실천사상으로 작용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셋째, 이행은 문자 그대로 남북한이 서로에게 이익을 제공하는 상생의 가치로 곧바로 바꿔 사용하기에 족하다. 마지막으로 동사는 이상과 같은 합심행이 이루어질 때 궁극적으로 이루어지는 최종적 실천으로서 ‘마음의 통일론’의 궁극적 실천사상이자 화쟁의 궁극적 목적인 일심에 도달하는 길이기도 하다.

2) 불교계의 실천 과제

한국사회의 최대 종교로서 불교는 마음의 통일에 관한 한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무엇보다도 불교는 이념제공자의 역할 혹은 이념 담지자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게다가 불교는 통일 이전과 통일 이후 사회구조와 관련해서도 불교는 모종의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지 않을 수 없다. 예컨대 통일 이전 불교는 북한 주민들에 대한 식량 지원과 같은 인도적 지원활동을 펼쳐나가야 할 것이며, 통일 이후에는 북한 주민들뿐만 아니라 남한 주민들도 새로운 사회국가체제에 적응하도록 돕는 실천적 활동을 펼쳐나가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러한 역할은 상황 즉 통일 이전의 상황과 통일 이후의 상황에 따라 다르게 구현될 수밖에 없다. 통일 이전의 경우 사회갈등의 원인이 민족분단이기 때문이 사회통합의 목표도 민족공동체의 건설(즉 민족통일)이고 그 조건도 민족주의 이념으로 설정할 수밖에 없는 반면에, 통일 이후의 경우 사회 내의 다양한 문화와 인종을 세계화 시대의 문화 코드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통합해 나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사회통합의 목표는 다민족 공동체 건설이고 그 조건은 다문화주의이다. 이러한 이념적 차원에 따라 구체적인 실천 활동도 달라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상의 논의에 따라 불교의 실천과제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통일 이전 불교는 민족주의 이념을 확산시킬 수 있는 불교 특히 한국불교는 역사적으로도 민족주의 이념을 제공하는 역할을 수행해 왔을 뿐만 아니라 향후에도 이변이 없는 한 그 역할을 지속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비록 세계화의 파고가 거세게 밀어닥치더라도, 한국 전통사상과 문화의 정수를 잘 간직하고 있는 한국불교야말로 한국사회의 다른 어떤 세력보다도 민족주의 최후의 보루로 남아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렇게 볼 때, 한국불교야말로 통일 이전 남북한사회통합을 위한 이념적 기초로서 민족주의를 우리 사회에 확산시키는 담지자의 역할을 수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둘째, 불교는 사회문화적 교류와 협력 사업을 전개해야 한다. 불교는 남북한 구성원들 사이에 존재하는 종교(여기에서는 불교)에 대한 의식과 태도의 이질성을 극복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그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남북한 동시법회의 개최일 것이다. 또한 불교는 인도적 지원활동을 통한 교류와 협력의 방안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불교는 학술 및 성지순례를 목적으로 한 인적 교류를 직접 실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불교는 통일 이후 북한지역의 불교 재건을 위한 준비(혹은 남북한 불교계의 통합을 위한 준비)를 하는 주체로서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데, 탈북자를 불교로 이끌어주는 활동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 탈북자의 80%가 교회에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미 늦은 감도 없지 않다.

셋째, 통일 이전 사회통합 이념이었던 민족주의는 민족통일과 함께 그 위력을 상당한 정도로 상실하게 될 것이다. 그 대신에 통일 이후 한반도의 사회통합을 위해서는 새로운 상황에 적합한 새로운 사회통합의 이념이 요구될 것이다. 여기에서 새로운 상황이란 사회통합의 조건을 말하는 것으로서, 세계화라는 시대 조류가 체제모순의 해소와 함께 한층 더 강화되는 반면에, 60년 이상 상이한 체제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동일한 운명공동체에 포섭됨으로 인해서 삶의 양식이 한층 더 다양해지는 사회상황을 말한다. 그런데 매우 다행스럽게도 불성과의 합심에 기초한 마음의 통일론은 다문화주의 이념과도 충돌하지 않는다. 따라서 통일 이후에도 불교는 남북한 사이의 차이뿐만 아니라 소수자의 문화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통일 이후의 사회통합 논의에서 그 이념적 담지자 역할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불교는 통일 이후 사회적 상호작용의 촉매 역할도 수행해야 할 것이다. 비록 민족 통일이 되어 남북한 사이의 군사적 긴장은 해소되었다 하더라도, 통일 직후 남북한 지역 주민들 사이에 여전히 남아 있는 적대감, 사고방식 및 사회적 태도의 차이에서 연유하는 오해와 갈등, 그리고 그로 인한 지역감정, 이산가족의 만남에서 발생하는 아픔과 고통, 남북한 지역의 사회경제적 격차나 불평등으로 인한 사회문제 등 다양한 후유증이 여기저기서 폭발할 것이다. 때문에, 통일 이후에는 통일한국 사회 속에 존재하는 집단들 사이의 소통과 상호작용을 활성화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불교는 마음의 통일론, 특히 사섭법의 애어 사상에 기초하여 북한 지역 주민과 남한 지역 주민들이 종교적으로 소통하고 상호작용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5. 마무리

어느 탈북자가 쓴 책 《이념과 체제를 넘는 북한의 미래》(장대성, 2014, 한울)의 마지막 결론으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통일은 서로가 마음을 열고 경제적 통일부터 시작해서 외교와 국방 등 국가기구의 통일을 거쳐 체제까지 아우르는 정치적 통일로 완성된다. 하지만 그것만이 통일의 전부는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구조적 통일보다 더 어려운 것이 문화적·심리적 통일일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통일은 우리의 마음까지도 모두 하나가 되는, 그래서 서로 편해지는 때라야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통일은 시작도 끝도 우리의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

 

유승무 / 중앙승가대학교 포교사회학과 교수. 한양대학교 사회학과, 동 대학원 졸업(박사). 주요 저서로 《불교사회학》과 공저로 《현대사회와 베버 패러다임》 《한국민족주의의 종교적 기반》 《유교적 사회질서와 문화, 민주주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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