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진 동국대 BK21 연구원

민족은 불러도 지치지 않는 이름이다. 목 놓아 부르면 샘솟는 열정이 거기에 있다. 살아있음의 실감이다. 비록 부재의 것이어도 좋다. 아니 그것은 부재의 것이어야 한다. 밤하늘의 영롱한 별빛이다.

저 별이 인간의 수중에 떨어질 때 그것은 벌써 돌멩이다.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얼른 지나니 민족의 깃발이 올랐다. 깃발 없이 길을 가지 못하는 게 우리다. 그것은 제왕의 왕관이다. 제왕은 자신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군림한다. 그래도 좋다. 훌륭한 제왕이 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그런 일이 별로 없다. 불행한 일이다. 세계주의를 표방했던 한 때의 사회주의 국가들도 지독한 민족주의로 무장했다. 민족주의는 철갑이 되고 총칼이 되어 그들을 지킨다. 그것을 벗고 그것을 놓으면 화살이 박히고 목이 달아날까 두렵다. 그래서 민족주의라는 희망은 죽음이라는 어둠에 끝을 맞대고 있다. 저만치 검은 죽음이 없었던들 어찌 그것이 희망일 수 있었겠는가.

어두웠던 한 때 민족주의는 분명 불빛이었다. 사람들이 그것에 좀더 다가 설 때 그것은 불길이 되었다. 자신을 태우지 못하는 불길. 끊임없이 인간의 영혼과 육신을 태워야만 불빛이고 불길일 수 있다. 민족이나 민족주의라는 깃발을 불교라고 모른 척할 수 있었겠는가. 근대는 물론이고 현재도 마찬가지다. 때론 멀리서 물끄러미 쳐다만 봤고 때론 앞장서서 저 이름을 불러댔다. 필요할 때 불러대야 그 이름은 더욱 간절하고 효과 있다. 중국의 경우 민족주의를 정초할 때 몇몇 인물은 불교 이론을 이용했다. 신해혁명 이전 량치차오(梁啓超)와 장타이엔(章太炎)의 활동에서 매우 두드러진다.

량치차오는 민족과 국가를 중첩해서 사용했다.1) 이에 반해 장타이엔은 국가와 민족을 절대적으로 분리했다. 그에게서 국가는 만주족이 통치하는 청(淸)을 인정하는 꼴이었다. 그는 청정부를 타도하고 한족 중심의 새로운 국가를 염원했다. 둘의 차이는 정치적 입장의 반영이다. 개량과 혁명의 차이다. 결국 신해혁명으로 중국의 마지막 봉건제국 청(淸)은 여린 숨을 거둔다. 이제 민족과 국가의 대립은 존재하지 않는다. 외형적으로는 분명 민족국가가 성립했지만 그렇다고 알맹이를 갖춘 것은 아니었다. 비로소 국가건설의 시대가 열린다. 불교계는 전국적 조직을 만들고 자신의 권익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사회에 유용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 애썼다. 타이쉬(太虛)로 대표되는 불교계몽과 인간불교는 이런 작업을 선도했다. 국가의 일부가 되기 위해, 국민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1. 민족 호명과 까르마 이론

(1) 진보의 강박과 불교 역할

20세기 중국은 하나의 커다란 잡동사니다. 그것은 실험의 공간이었고 희망의 사격장이었다. 엔푸(嚴復)가 소개한 사회진화론은 진보라는 이상을 지식인들의 심장에 박았다. 진화론을 다분히 전통적 방식으로 해석한 캉여우웨이(康有爲)와는 달리 제자 량치차오는 곧바로 진화를 이야기했다. 량치차오의 ‘민족’개념도 이 진화론과 관련 있다. 량치차오는 민족이라는 개념을 중국에서 가장 먼저 사용한 인물 가운데 하나다.2)

그는 1899년 당시 일본의 학술서적을 소개하면서 ‘동방민족’이라는 표현을 쓴다. 1901년 발표한 「국가사상의 변천과 차이」에서 그는 “사상은 사실의 어머니다. 어떤 사실을 이루려면 먼저 어떤 사상을 구성해야 한다”3) 고 말한다. 좀더 나가보면 ‘국가사상’이란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 국가를 기획하는 것이다. ‘국가’수립과 민족주의의 발현은 밀접하게 관련된다. 그는 “민족주의는 실제 근세국가를 제조하는 원동력”4) 이라고 말한다. 근대적 국가 수립은 선택 상황이 아니다. 생존의 문제다. 그는 “민족주의는 세계에서 가장 공평 정대한 주의”5) 라고 극찬한다. 이것은 당시 유럽의 “민족제국주의”에 상대한 말이다. 이렇게 민족 호명이나 민족주의 선전은 민족국가를 향한 분명한 목적을 갖는다.

1902년 《신민총보(新民叢報)》에 발표한 「종교가와 철학가의 장단득실을 논함」에서 종교사상이 필요한 다섯 가지 이유를 들고 있다. 첫째 “종교사상이 없으면 통일이 없다”6) 고 말한다. 여기서 통일은 의지가 박약하고 능력이 모자라는 중생들이 무엇에 의지해서 단결하는 것을 말한다. 물론 량치차오는 종교가 그 무엇에 가장 적합하다고 주장한다. 두 번째 종교사상이 없으면 희망이 없다고 말한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 세계가 있다. 그것은 현재와 미래다. 미래는 현재 존재하지 않지만 참으로 모순 되게도 현재를 있게 한다. 량치차오는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현재는 사실에 속하지만 미래는 희망에 속한다.

종교는 무형의 희망이다. 7척 남짓의 육신과 수십 년 인생은 잘잘한 부분을 따진다면 다 말 할 수도 없다. 나는 영혼을 가진다. 나의 대사업은 이 영혼에 있지 저 소소한 것에 있지 않다. 그래서 고통스런 자신은 한 때이고 행복한 나는 영겁토록 오래갈 것이다. 괴로운 나는 거짓이지만 행복한 나는 법신이다. 이 희망을 획득하면 안신입명의 지대가 있고 어떤 좌절을 겪고 어떤 번뇌를 만나더라도 쓰러지거나 물러서지 않고 더욱 나아갈 것이다.7)

종교는 희망의 무엇이라고 량치차오는 말한다. 그것이 희망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사회를 통합하는 원리로 작동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가 말하는 통일이다. 나머지 세 가지는 해탈, 거리낌[忌憚], 의지력[魂力]이다. 종교를 통해서 이런 것들을 강화하고 활성화 한다. 이런 경향은 탄스통(譚嗣同)이 《인학(仁學)》에서 심력이나 자비를 강조하면서 내뱉은 세상의 어떤 질곡도 뚫고 가겠다는 선언과 유사하다.

“철학은 의심을 중시하고 종교는 믿음을 중시한다.”8) 량치차오가 보기에 당시에 필요한 것은 의심이 아니라 믿음이다. 철학보다 종교가 우선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비슷한 시기 발표한 「불교와 사회진보의 관계를 논함」에서 그는 “우리 조국의 전도에 커다란 문제가 하나 있다. ‘중국의 진보는 신앙 없이 가능한지 아니면 신앙이 있어야 가능한지’가 그것이다.”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중국이 꼭 신앙이 필요하다면 어떤 종교를 신앙해야 하는가?”9)

사회진보를 위해서 왜 종교여야 하고 왜 불교여야 하는지 질문한다. 유럽 근대는 종교가 아니라 이성이 빛이 지배하던 시대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종교가 아니라 무지몽매를 깨뜨릴 교육이다. 그런데 문제는 중국이 현재 어느 단계에 있는가이다. 량치차오가 보기에, 중국은 교육으로 종교를 대체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다. 교육을 통해 제2의 천성을 기를 여력이 없다. 오히려 비약이 필요하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추월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량치차오는 유교와 기독교에 대해서도 평가한다. 먼저 유교는 교육의 일종이지 종교가 아니라고 평가한다. 기독교를 바라보는 방식은 좀 다르다. “서구 열강은 기독교를 이용해서 미끼로 삼을 뿐이다.” 만약 이 점을 조심하지 않으면 장래 큰 화를 당할 수도 있다. 불교 자체가 종교적으로 뛰어난 점도 이야기하지만 결국 상당히 정치적 고려가 있음을 내 보인다. 량치차오에게 불교는 서구 제국주의와 대항하는 종교다.

(2) 초월성과 민족

량치차오는 민족이나 국가가 정치나 사회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종교의 문제임을 인식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죽음과 삶을 다루기 때문이다. 생사의 문제는 전통적으로 종교의 영역이다. 그는 민족이 유한한 존재를 무한한 존재로 바꾸는 능력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은 《상상의 공동체》에서 “종교는 죽은 자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 사이의 연결과 재생의 신비에 관심을 갖는다”10)고 말한다.

비단 종교뿐만 아니다.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은 앤더슨의 논의를 평가하면서 “내이션(nation)의 핵심에서 개체의 불사(不死)를 보증하는 것을 찾아냈다”고 보고 “내셔널리즘의 상상력이 죽음과 불사에 관련된다면 그것은 종교적 상상력과 강한 친화성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11) 고 말한다. 량치차오의 민족에 대한 상상력도 종교적 상상력에 기반한다. 여기서 핵심어는 ‘연속성’ 내지 ‘영속성’이다. 량치차오는 1904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신민총보》에 「나의 생사관」을 연재했다. 그는 말한다. “사람은 죽더라도 죽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12) 이놈이 무엇인가. 량치차오는 이 물건을 “정신”이라고 명명했다.

브라만교도 윤회와 해탈을 말하고 불교도 윤회와 해탈을 말한다. 단지 브라만교에서는 윤회와 해탈의 주체를 개체(unit, 匿)에 귀속시키고 불교에서는 개체와 전체(total, 拓都)를 함께 이야기하지만 그래도 전체에 무게를 둔다. 이 점이 브라만교와 불교의 가장 큰 차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이 주체를 영혼이라고 하지 않고 까르마(karma, 磨)라고 명명한다.13)

량치차오는 「개인 윤리를 논하다」에서 “엔푸(嚴復)는 ‘군(群)을 퉈두(拓都)라고 하고 일자(一者)를 야오니(匿)라고 번역했고 일본에서는 각각 단체와 개인으로 번역했다”14) 고 말한다. 불교의 까르마, 즉 업을 집단과 개체의 문제로 규정한다. 여기서 량치차오의 불교 이해가 정확한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오히려 그의 의도를 따져야 한다. 량치차오는 먼저 까르마 이론을 개체와 전체라는 공간 개념으로 제한해서 설명한다. 여기서 벌써 대소의 문제가 발생하고 만다. “업력의 총체는 기세간으로 발전하는데 바로 이 세계다. 개체는 유정세간으로 발전하는데 인류와 기타 육도 중생이다.”15) 량치차오가 말하는 세계는 구체적으로는 민족이나 국가다. 불교에서 업력의 총체가 기세간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까르마 이론에서 중요한 것은 기세간이 아니라 유정세간이다. 고통이나 해탈도 유정의 문제다. 그래서 정보(正報)와 의보(依報)라는 말이 가능하다. 여기에는 사실 공간 개념이 유입될 틈이 없다.

량치차오는 생명의 영원함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까르마의 지속성을 말한다. “지금 우리의 행동, 말, 느낌 각각의 이미지는 까르마의 총체 가운데 곧바로 새겨져 영원히 소멸하지 않는다. 나 자신이나 아니면 인류가 그것의 영향과 과보를 받는다.”16) 량치차오는 까르마를 상속의 입장에서 이해했다. 상속은 불교에서 무아설을 바탕으로 윤회설을 설명하는 이론이다. 이것의 핵심은 ‘무실체’다. 량치차오도 “파도처럼 끊임없이 상속하는 이 물건을 까르마라고 이름한다”17) 고 명시한다. 그런데 그는 이 까르마 이론을 진화론과 연결해 다소 변형한다. 인간이 태어나서 변화하는 가운데 지속적으로 지키고 있는 무엇이 있다.

이 물건이 무엇인가? Character라고 이름한다. 성격이라고 번역한다. 진화론자가 유전을 말하는데 일체 중생이 생명이 있는 기간에 경험하는 일이나 행위, 습성 모두 그 자손에게 유전되는 것을 이야기한다.18)

민족성 혹은 국민성으로 번역되는 national character라는 말을 떠올려 보자. 민족성은 민족들 사이의 차이를 강조한다. 우열을 강조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외부적인 것이고 내부적으로 개인들 간에 존재하는 차이를 무화시키고 균질화를 획책하는 방법이다.19) 까르마라고 할 때는 몰라도 유전이라고 말할 경우 그것은 분명 실체성을 가진다. 성격이라는 것도 일종의 정체(整體)다. 그것은 자신이 자신이라고 내세울 수 있는 내용물인 셈이다. 량치차오는 민족성을 실체로 보고 있다. 그는 유전과 까르마 모두 “정신”으로 명명했다.

생명 있는 동안 조성한 ‘성격’은 생명이 다하고 나서도 지속된다는 주장이다. 그 실체로서 성격은 새로운 육체를 만난다. 그것은 단지 자손뿐만 아니다. “우리들은 모두 죽는다. 우리들은 모두 죽지 않는다. 죽는 것은 우리들 개체요, 죽지 않는 것은 우리 집단[群體]이다.”20) 우리에게 익숙한 “대아”와 “소아” 개념도 끌어들인다. 이 말만 들으면 습관적으로 “전체를 위한 개인의 희생”이라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이것은 “대아를 위해서 소아를 희생해야 한다”는 윤리 시간의 기억 때문이다. 삶과 죽음의 교차. 죽음은 곧 삶의 한 유형이다.

자꾸 죽음으로써 살아난다는 입장이다. 죽음 충동으로 집단은 유지 종속되는지도 모른다. 량치차오는 “벤자민 키드(Benjamin Kidd)의 ‘죽음은 인류 진화의 한 원소’라고 한 말은 정말 명언”21) 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 죽음에서 생을 보려한다. 르낭은 “민족은 이미 치러진 희생과 여전히 치를 준비가 되어 있는 희생의 욕구에 의해 구성된 거대한 결속”22) 이라고 했다. 량치차오도 이제 죽음을 요구할 것이다.

죽음과 생을 겹쳐보는 그의 방식은 당시 맥락으로는 종교학설이자 정치학설이다. 그는 사회 관념과 함께 “미래 관념”을 이야기한다. 미래관념은 희망과 관련된다. 희망은 현재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상상이다. “이 두 관념은 무시이래의 까르마로 훈습된다. 비록 깊이와 폭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근기를 본성에 갖추지 못한 자는 들어보지 못했다.”23) 량치차오에게서 영원한 삶은 육신의 장생불사가 아니다. 바로 이 두 관념을 통한 민족이나 국가의 지속적 존재다. 개인은 자신을 이렇게 집단에 던지는 방식으로 생을 지향한다. 자기 초월은 여기서 발생한다.

2. 민족혁명과 종교심

(1) 反만주족 혁명과 종교심

장타이엔(章太炎)은 쑨원(孫文)이나 황싱(黃興)과 함께 중화민국 건립의 3걸로 이야기된다. 신해혁명 이후 건립된 ‘중화민국’이라는 국호도 그가 만들었다. 그는 반청 운동과정에서 3년간 옥고를 치른다. 옥중에서 불교에 귀의했다. 1906년 상하이 감옥에서 출옥한 그는 곧바로 도쿄를 향한다. 당시 도쿄는 반청 운동의 근거지였다. 1906년 7월 도쿄에서 중국 유학생들이 개최한 환영회에서 장타이엔은 “민족주의”를 분명하게 내세웠다.

“여러분들이 말하는 민족주의 이론은 완전하고 정치합니다. 정말 후배들이 더 낫습니다. 제가 어찌 감히 선배로 자처하겠습니까?”24) 당시 일본에는 거의 만 명에 육박하는 중국인 유학생이 있었다. 젊은 지식인들의 가장 뜨거운 주제는 민족주의였다.25) 벌써 민족주의는 정교한 이론으로 성립됐다. 여기에 대해 장타이엔이 더 이상 이론을 보태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저 민족주의를 추진할 힘을 어디서 길어야 하는지 고민한다.

그는 두 가지를 이야기한다. “첫째는 종교를 통해서 신심을 일으켜 국민의 도덕을 증진해야 한다. 둘째는 국수(國粹)를 이용해서 종성(種姓)을 격발하여 애국의 열정을 증진해야 한다.”26) 불교이론이 곧바로 민족주의가 되지는 않는다. 그것을 민족주의의 조력자로 활용하려는 게 장타이엔이나 량치차오의 목적이다. 종교심과 국수는 장타이엔 필생의 과업이다.27) 그는 종교심과 혁명도덕을 연결시켰다. 이것은 지식인들에게 필요한 덕목이다. 그가 가장 먼저 내세우는 불교 이론은 화엄학과 법상학이다.

화엄종에서는 중생제도를 위해서 머리나 뇌수까지 기꺼이 다른 사람에게 내 놓는다. 도덕상에 가장 유익하다. 법상종에서는 모든 존재가 식일 뿐이라고 말한다. 유형의 물체나 무형의 관념 모두 실재가 아니라 환상이다.28)

철저한 유심론을 통해서 도덕을 건설한다. 5·4 시기 과학주의가 대두하고 이후 마르크스 주의가 하나의 세계관으로 자리 잡기 이전 계몽이나 혁명의 주요한 방법론은 유심론이었다. 탄스통도 그랬고 량치차오도 그랬다. 심지어 초기 루쉰도 그랬다. 중요한 이유가 있다. 객관적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전투는 불가능하다.

한 줌 정도의 혁명자와 거대한 청제국, 나약한 중국과 포악하기 짝이 없는 서구 열강. 이것은 약자와 강자라는 분명한 사실이다. 약자가 강자를 이길 수는 없다. 약자가 강자가 되든지 아니면 저 강자가 약자가 되는 수밖에 없다. 객관적 사실에 대한 전면적 부정을 감행할 수 있는 혁명도덕과 용맹무외의 정신이 유심론에 있다. 장타이엔은 이렇게 유심론에서 혁명도덕을 추출한다. 르낭은 말한다. “인간들의 대결집, 건전한 정신과 뜨거운 심장이야말로 민족이라 부르는 도덕적 양심을 창출합니다.

이 도덕적 양심이 공동체를 위해서 개인을 버린 그 희생들을 바탕으로 하여 자신의 힘을 증명하는 한, 그것은 정당하며 존재할 권리가 있습니다.”29) 이것은 량치차오가 말하는 희망이다. 객관에서는 절망일 수밖에 없는데 희망은 주관에서만 나온다. 미래는 논리적 정합이 아니라 상상하거나 주장하는 거다. 그렇다면 불교와 민족주의가 직접적으로 무슨 관계가 있을까.

어떤 사람은 불교는 일체중생을 모두 평등하다고 보기 때문에 민족사상을 낼 수 없고 만주족을 몰아내고 한족 정권의 회복을 추구할 수 없다고 말한다. 틀림없이 불교는 평등을 가장 중시한다. 그래서 평등을 방애하는 것들은 제거해야 한다. 만주정부는 한족에 대해 갖가지로 불평등하다. 어떻게 몰아내지 않을 수 있는가?30)

억지에 가까운 단순화가 있다. 불교 이념으로 보자면 민족의 강조나 국가의 강조는 분명 어색하다. 불교와 민족주의를 결합할 경우 어김없이 닥치는 문제다. 평등을 방해하는 세력을 척결하겠다는 그의 의지는 불교적 합리성을 획득하지는 못했다. 량치차오처럼 한족과 만주족의 연합을 주장하는 것도 아닌 이상 그의 이런 주장은 분명 비약이다. 그는 특히 당시 중국을 지배하던 청 정부를 겨냥한다. “불교는 군권을 가장 혐오한다. 대승계율에서는 ‘국왕의 폭정과 학대를 보살은 응당 제거할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31) 혁명의 입장에 선 그로는 군왕을 인정할 수 없다. 그는 군권과 민권을 대비시켰다. 불교는 민권의 편에 있다고 말한다. 그는 만주족과 한족의 대립을 군권과 민권의 대립으로 규정한다.

(2) 국가주의 비판과 애국심

량치차오 등 개량파 한족 지식인들이 청 황제 옹호와 만한(滿漢) 결합을 강조한 데 반해 장타이엔은 만주족과 한족은 전혀 다른 역사체임을 강조했다. 그는 일찍이 역사민족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32) “지금 같은 종족인데 옛날에는 다른 종족이었고 지금은 다른 종족인데 옛날에는 같은 종족인 경우도 있다.

역사를 가지고 판단하면 역사민족이라고 말한다. 본래부터 그런 것은 아니다.”33) 생물학적인 계통을 따져서 동족과 이족을 따지자는 게 아니다. 캉여우웨이 같은 경우 만주족과 한족이 원래 동족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장타이엔이 보기에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역사와 정신을 공유하지 않을 경우 동족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입장이다. 이 점은 그가 국수를 강조함으로써 민족의식 고취를 의도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역사민족”은 민족의 정체를 역사에서 찾겠다는 의지다.

장타이엔은 국가를 강조한 량치차오와 달리 둘을 분리시킨다. 당시 국가는 만주족이 통치하는 청이다. 바로 이 점에서 량치차오와 갈린다. 1907년 10월 《민보》에 발표된 「국가론」에서 장타이엔은 국가 부정을 시도한다. 이 때 그는 부파불교의 극미론을 통해서 국가의 자성을 부정한다. 아울러 개체와 집단을 대립시킨다. 아울러 량치차오 같은 국가주의 신봉자를 공격한다.

그는 극미론을 일종의 원소론으로 파악하고 최소단위의 실체를 인정하려 한다. “개체가 집합적으로 구성한 것에 대해서 개체는 실유라고 할 수 있지만 구성된 것은 가유라고 해야 한다. 국가는 인민이 조직된 것이기 때문에 각각 인민은 잠시라도 실유지만 국가는 실유라고 말할만한 게 없다.”34)

국가주의자의 대표격은 량치차오다. 국가주의에 따르면 불안한 개인이 영원성을 누릴 수 있는 기회는 국가에 자신을 던지는 것이다. 여기서 개인은 객체, 즉 대상적 존재일 뿐이다. 국가주의는 영생을 위해서 죽음을 요구하는 격이다.

근세 국가주의자는 국가는 주체고 인민은 객체라고 말한다. 저들의 의도를 살펴보면 ‘상주하는 것은 주체고 잠시 머무는 것은 객체인데 국가는 천년을 지나서도 바뀜이 없지만 인민은 아비와 아들이 바뀌고 종족도 서로 바뀐다.’는 말일 것이다.35)

불교 입장에서 자성을 가진 것은 물론 없다. 이 점은 장타이엔도 인정한다. 단지 임시적이지만 선후를 따진다. 량치차오가 국가를 강조하는 과정에서 개체를 집단의 귀속물로 한정한 것과 달리 장타이엔은 개체를 집단에 우선하는 무엇으로 파악한다. 개체의 실체성을 강조하려는 게 아니라 국가의 비실체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장타이엔은 「국가론」에서 다시 애국을 이야기한다. 국가주의에 반대하면서 애국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인간의 육신은 실유가 아니지만 모여서 기관을 형성한다. 육신을 척도로 해서 다른 것에 미친다.

그래서 사랑하는 대상은 미립자로서 실유가 아니라 집합적으로 구성된 가유다. 애국자가 이런 조합을 사랑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36) 이것은 역설이라기보다는 중첩이다. 그는 ‘국가’는 한 겹이 아니라 여러 겹이다. 상대적으로 실체에 가까운 개인이 자신이 구성하는 비실체적 집단을 사랑한다. 바로 여기서 량치차오의 국가주의와 차이가 드러난다. 량치차오는 국가가 실체이기 때문에 비실체적 개인이 그 속에 뛰어들라고 했다. 그것이 영원히 사는 방식이라고 했다. 장타이엔은 정확히 반대다. 그는 오히려 상대적으로 실체에 가까운 개인이 자신이 구성하는 국가를 사랑한다. 이 사랑은 영원을 향한 것이 아니다.

국가주의 입장의 애국이라기보다는 민족주의 입장의 애국이다. “민족주의를 완벽하게 구현하려면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미루어 다른 사람의 아픔을 구제하고 완전한 독립을 이루게 해야 한다.”37) 장타이엔이 말하는 사랑의 도덕이다. 마치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처럼 남의 아픔을 함께 할 수 있는 정도는 돼야 사랑을 말할 수 있다. “애국심은 강대국 국민들은 가질 수 없다. 약소국 국민들은 갖지 않을 수 없다.”38)

‘민족과 국가’의 구분이 량치차오 같은 유신파를 겨냥한 것이라면 ‘애국’은 민족제국주의를 겨냥하고 있다. 그래서 장타이엔의 애국은 기본적으로 대항적 애국심이다. 그것은 자존이라는 절박한 상황에서 터져 나오는 외침 같은 거다. 장타이엔의 민족주의나 국가론은 ‘문화’라는 측면이 매우 중요하다. 그의 민족주의를 굳이 구분하자면 문화민족주의라고 해야 한다. 그래서 그에게는 “학술과 정치”라는 대립하지 않는 쌍이 중시된다. 국가건설에서 중요한 것은 국학(國學)·국혼(國魂)·국수(國粹)다.39) 물론 이것은 학술 연구를 통해서 정립된다. 끊임없이 민족의 정체를 마련하는 것은 어찌 보면 생명을 불어 넣는 작업이다. 그래서 장타이엔에게 학술이 소중했다.

3. 국가건설과 민족불교

1911년 신해혁명으로 노쇠한 청 제국은 무너졌다. 1912년 4월 당시 불교계의 대표 격인 징안(敬安)을 중심으로 ‘중국불교총회’가 설립됐다. 이것은 중국 최초의 근대적 불교 조직이다. 전국 규모의 조직이 성립하게 된 계기는 지방 정부나 중앙 정부가 진행한 묘산흥학(廟産興學) 운동에 대한 저항이다. 당시 지방 권력자들은 신식교육과 미신타파라는 명분으로 불교와 도교를 공격했다. 도관이나 사원의 재산을 빼앗아 학교를 짓거나 그 경비로 충당하는 일이 계속 일어났다. 이런 상황은 상당히 오래 지속됐다.

‘미신’이라는 신조어도 등장은 주목할 만하다. 프라센지트 두아라(Prasenjit Duara)는 “미신은 모든 민간 신앙의 성격을 경멸적이고 하찮은 느낌으로 규정해버리면서 과학과 야만 사이의 한층 절대적인 차이를 드러냈다”40) 고 말한다. 민간신앙을 미신이라고 호명할 때 호명자 자신은 신분상승을 맛본다. 이런 일은 근대에 비일비재했다. 불교계는 재산을 지키고 자신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서 행동을 취했다. 자발적으로 학교를 짓고 사회사업을 하는 경우가 발생했다. 이것은 변화된 사회 내에서 불교계가 자신의 역할과 지위를 찾는 노력이었다. 중국불교총회의 장정(章程)은 당시 중국불교의 성격을 명확히 규정했다.

본회는 불교를 통일하고 법화를 선양하여 사회[人群] 도덕을 촉진하고 국민의 행복을 완성하는 걸로 종지를 삼는다.41)

설립취지가 그렇게 생소하지 않다. 오히려 너무 상투적이라서 생소하다. 지금도 이런 설립취지문은 많이 본다. 그런데 여기서 중국불교는 중요한 전환기를 맞았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은 “국민의 행복”이라는 말이다. 중생의 이익이 아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국가적 단위로 한정된다.

왜냐하면 당시 당면 과제는 국가건설이다. 근대적 국민국가의 건설이라는 커다란 목표를 위해서 구성원들은 나름대로 노력을 해야 한다. 섣부른 세계주의는 필요 없다. 쑨원의 혁명 활동을 적극 지지했고 장타이엔의 법우인 쫑양(宗仰)은 「출가자도 시급히 국민의식을 수용할 것을 권함」에서 “지금 중화민국이 갓 건립됐다. 불학이 조금이 일어나서 자유와 평등을 말하고 대동주의(大同主義)를 펼치는데 출가자나 재가자 할 것 없이 모두 공민(公民)에 귀속한다”42)고 말했다. 쫑양은 「불교존숭은 오늘날 국민도덕을 증진하는 요체가 됨을 논함」에서도 국민 만들기와 국가건립에 대한 불교의 역할을 제시했다.43)

량치차오가 신민(新民)을 요구했듯 당시는 국민을 요구했다. 중국불교총회 장정이나 쫑양의 언급은 신해혁명이후의 불교 방향을 설정했다고 할 수 있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채우지는 못했다. 실제 그 내용을 마련한 인물은 타이쉬(太虛)다.

타이쉬는 젊은 시절부터 쑨원이 내세운 민족·민권·민생의 삼민주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쑨원은 시원하게 말했다. “삼민주의는 무엇인가? 아주 간단하게 정의를 내리자면 구국주의다. 주의란 일종의 사상이고, 신념이고, 힘이다.”44) 쑨원은 그가 제기한 불교 3대혁명도 삼민주의의 불교판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정치학설을 불교에 그대로 대입한 것은 아니다. 전통과 개혁을 오가면서 20세기 중국 불교를 기획했다. “중국은 본래 광활한 영토와 풍부한 물산, 그리고 발달한 문화, 유구한 역사를 가진 민족이다.”45)

타이쉬의 이런 생각은 매우 일반적이지만 많은 것을 보여준다. 중국을 공간과 문화의 공동체로서, 그것도 민족으로 규정한다. 그의 말대로 “중국은 민족이다”라는 언명에서 수많은 소수민족을 국민으로 거느린 민족국가 중국을 본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문화는 한족의 문화를 말하지 몽고인이나 묘족 등을 말하지는 않는다.

불학을 발양함으로써 중국 고유의 장대한 정신을 일으킨다면 중국 민족을 근본에서부터 구할 수 있을 것이다.46)

민족구출이 불학의 사명이다. 물론 그가 구국의 근거로 삼는 것은 불교다. 불교구국이다. 불교의 선양은 곧 중국문화의 발전을 견인한다는 그의 입장이다. 특히 그는 송대 이학의 출현이 중국의 강건한 문화를 훼손하여 점차 국력이 위축됐다고 고집했다. 마치 한국에서 늦은 근대화를 유교에 책임 돌리듯, 그것의 대항으로서 불교문화를 강조한다. 타이쉬가 주로 활동했던 1920년대나 30년대에는 민족주의 자체에 대한 논의는 많지 않았다.

정치적 상황이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건강한 국가 건설을 위한 국민도덕을 촉진하는 데 목표가 있었다. 장타이엔 식으로 민족은 진정 역사와 문화의 구성물이다. 문화를 지키고 민족을 지키는 방식은 민족국가(국민국가) 성립이후 국가보위와 관련된다. 중일전쟁의 폭발은 동원체제를 초래했다. 만약 여기서 벗어난다면 비국인(非國人)이다.

중일전쟁 이후 불교계는 항일 정신을 북돋웠다. 또한 후방 지원을 위해 노력했다. 부상병이나 난민을 돌보고 고아를 가르쳤다. 서구가 아니라 일본과 치르는 전쟁은 동양적 가치로서 당시 일컬어지던 불교가 새로운 위치를 찾게 했다. 그것은 세계 종교가 아니라 민족종교로서 분명한 자신을 드러내야 했다. 30년대나 40년대 불교계의 주요한 사업이 바로 사회적 역할이었다. 국난극복의 정신적 전력으로서 종교계는 활동했다.

2차세계대전의 종결과 그에 따른 국공내전의 격화는 중국 근대를 더욱 불안하게 했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공산 홍군의 승리로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했다. 그들은 신중국이라고 불렀다. 봉건중국과 단절을 의미했다. 단절의 역사다. 불교계는 산발적인 활동이 모두 멈추고 곧바로 국가관리체제로 접어들었다. 중국불교협회는 공산당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운영됐다.

1960년대 중국의 좌경화는 문화혁명의 폭발로 극에 달했다. 문혁은 20세기의 폐불이었다. 불교는 아예 부정됐다. 모든 지위가 박탈됐고 고승들은 선방이 아니라 옥방에 갇혔다. 문화혁명을 중국에선 흔히 ‘10년 동란’이라고 묘사한다. 이 동란의 유일한 성과는 아마도 개혁개방일 것이다.

개혁개방이후 80년대 학술계나 불교계의 임무는 1949년 이전의 중국과 현 중국을 연속시키는 거였다. 80년대 근대불교 연구열풍이 있었던 것도 이런 점과 무관하지 않다. 마오쩌뚱 동상이 섰던 자리에 ‘위대한 중국의 사상가이자 교육가인 공자’의 상이 들어섰다. 정부의 지원으로 엄청난 사원이 들어서고 있다. 그들은 다시 신중국과 단절을 시도한다. 그 30년을 우회해서 전통중국과 직접 만나고자 한다. 그들이 치켜든 깃발은 이제 더 이상 붉지 않다. 시장경제의 지향은 뜻밖에도 전통지향을 수반한다. 진정 중국불교는 중화민족의 위대한 유산으로 탄생할 것이다.

결론

불교와 민족주의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하지만 불교에서 그토록 아끼는 중생들은 민족주의에 너무 쉽게 노출된다. 불교가 번뇌를 사랑하지 않지만 그것에 관심 가지듯 어쩔 수 없이 민족주의 논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현재 민족주의 논의는 대부분 그것을 나무라기 위해서 진행된다.47)

왜냐하면 그것이 야기한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이다. 전 세계 곳곳에 널린 수많은 주검에는 민족주의 라벨이 붙은 총알과 파편이 박혀있다. 민족주의는 상상된 것임에도 이렇게 살갗을 뚫고 심장을 멈추게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유냐 무냐? 가라타니 고진은 칸트의 개념을 빌어서 민족을 ‘초월론적 가상’이라고 규정했다.48)

그것은 결코 쉽사리 제거할 수 없는 상상력이다. 《대승기신론》에서 진여를 공(空)과 불공(不空)으로 나누는 것과 유사하다. 그것은 비실체적인 것이지만 충분히 작동한다. 민족주의라는 희망의 깃발은 다소 색이 바랬다. 하지만 색이 바랬다고 국기를 끌어내리지 않듯이 그것도 별로 내려올 기미가 안 보인다. 그것은 한 때의 상상력이었고, 또한 지금도 계속되는 상상력이다. 그것을 내리는 방법은 새로운 상상력의 출동이다.

김영진
동국대학교 BK21 세계화시대 불교학교육연구단 연구원.1970년 출생.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와 대학원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章太炎불학에서 개체와 윤리문제」, 「중국근대 진화관념의 불교적 대응」 등의 논문이 있다. 중국 근대불교와 관련된 문제를 연구하고 있다. 특히 사상사나 학술사의 입장에서 淸末民初 불교를 다루고 있다. 연구공간‘수유+너머’ 회원이며 현재 동국대학교 BK21 세계화시대불교학교육연구단 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