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글

지난 130여 년의 한국 개신교의 역사에서 개신교의 활력과 자신감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는 1980년대였다. 이 시기 개신교의 활기찬 사업 가운데 하나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 문제였다. 이것은 1984년 8월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개신교 100주년 기념 선교대회의 다섯 개 주제 중 하나가 평화와 통일인 데서 알 수 있다. 평화 및 통일에 대한 관심은 남북교회의 통일대화로 발전하였다. 통일대화를 주도한 것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였다. 1990년대에는 통일대화보다는 교회와 기독교 NGO의 대북지원이 개신교의 주요 사업으로 등장하였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북한교회 재건운동도 교회들의 호응을 받았다. 2000년대에는 통일정책 연구, 통일일꾼 교육, 탈북자 지원, 북한선교를 목표로 하는 소규모의 전문 선교 단체들이 활동하면서 통일운동 및 북한선교의 백화제방(百花齊放) 시기를 맞이하였다.
이 글은 북한과 관련된 개신교의 다양한 활동을 통일선교 운동으로 규정하고 1980년대 이후의 개신교 통일선교 운동의 궤적을 살펴보려고 한다. 1970년대부터 시작한 개신교의 대북활동은 공산권 선교, 사회주의권 선교, 북방선교, 북한선교 등으로 불려 왔다. 아주 최근에는 교세확장을 뜻하는 협의의 개념인 북한선교 대신 통일과 선교를 포괄하는 광의의 개념으로서 통일선교라는 용어도 사용되고 있다.

 
2.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통일대화

1980년대까지만 해도 통일운동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로 대표되는 진보 기독교계의 전유물이나 마찬가지였다. 1980년대 당시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기독교대한감리회, 한국기독교장로회, 기독교대한복음교회, 대한성공회, 대한구세군본영 등 6개 교단으로 구성된 기독교교회협의회는 군사정권 시절 인권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기독교교회협의회는 198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통일 문제를 당면한 선교과제로 인식하고 1982년 통일문제연구원 운영위원회를 상설기구로 설치하였다.
통일 문제와 관련하여 1980년대 진보진영 교회의 가장 큰 변화는 통일을 교회의 선교 과제로 인식한 데 있었다. 1980년 3월 한국기독교장로회는 통일이 교회의 선교적 과제임을 천명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도 1986년 발표한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서에서 “기독교인은 화해의 대업을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민족을 화해시키고 이 땅에 평화를 정착시키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고 고백하였다. 한국교회의 신앙고백 문서에서 민족통일 문제를 언급한 것은 이 문서가 처음이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회원 교단들의 통일 논의가 가시화되자 전두환 정권은 민간의 통일 논의를 불법화하고 탄압하였다. 이 상황에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세계교회들의 협력을 통해 통일운동을 시작하였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통일운동은 해외에서는 북한의 조선그리스도교련맹(당시 명칭은 조선기독교련맹)과의 통일대화로 나타났다. 남한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대표들과 조선그리스도교련맹 대표들이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주선으로 글리온에서 통일대화를 처음 시작한 것은 1986년이었다. 이 회의의 토론 주제는 평화에 대한 기독교적 관심의 성서적, 신학적 근거였다. 1986년 9월 2~5일 세계교회협의회가 주최한 세미나에서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의 대표단 5명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대표단 6명이 남북분단 이후 첫 만남을 가졌다. 북한의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은 1946년 11월 28일 평양에서 조직된 기구로 그때부터 북한 기독교를 대변해 온 단체였다.
조선그리스도교련맹 대표들과 남한교회 대표들은 1988년에도 스위스 글리온에서 모였다. 남한교회 대표 11명과 북한 대표 7명 등 모두 40명이 참석한 이 회의는 1995년을 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희년으로 정하고, 매년 8·15 직전 주일을 남북한교회가 함께 평화 통일 공동 기도주일로 지키기로 한 ‘한반도의 평화 통일을 위한 글리온 선언’을 채택하였다. 이로써 남북분단 후 처음으로 남과 북의 기독교인들이 공동으로 민족통일을 위해 기도하고 협력하는 시대가 열렸다. 1990년 12월에 열린 제3차 글리온 회의는 평화교육과 통일 교육의 실행, 모든 대규모 군사 훈련의 중지, 한반도에서의 글리온 협의회를 이어가는 남북 교회 간 만남 등을 결의하였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조선그리스도교련맹과 만난 것은 남북분단 이후 첫 번째였으며, 그 점에서 한국기독교 통일운동사에서 보면 획기적인 일이었다. 이보다 앞서 1981년 11월 북한의 조선그리스도교련맹과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대표들은 북미와 유럽의 교포 교인들로 구성된 조국통일 해외기독자회와 오스트리아 빈에서 통일대화를 가졌다. 한국정부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친공주의자들의 모임이라 하여 이 모임을 방해하였다. 이 모임에서 참가자들은 한국교회의 반공 문제 및 북한의 연방제 통일방안을 논의하였다.
이 통일대화에 자극을 받아 모인 것이 세계교회협의회 국제문제위원회가 주최한 1984년 10월의 일본 도잔소협의회였다. 도잔소협의회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조선그리스도교련맹 대표들을 초청하였다.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은 회의를 축하하고 성공을 비는 전보만을 보냈다. 이 회의에서 남한교회 대표들은, 세계교회협의회가 아시아기독교교회협의회(Christian Conference of Asia)와 협력하여 남북한의 기독교인들이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도록 한다는 제안에 동의하였다. 도잔소협의회는 그 후 1986년, 1988년, 1990년의 글리온 회의, 1990년대의 조국의 평화통일과 선교에 관한 기독자 도쿄회의로 이어졌다. 기독자 도쿄회의는 일본의 재일교포 교회, 남북한의 교회들이 공동 주최했으며, 남한의 보수교단들도 참여하고, 주체사상에 관해 논의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컸다. 제2차 기독자 도쿄회의(1991년)에서 주제 강연을 맡았던 목원대학교의 박순경 교수는, 수령은 역사에서 퇴진하게 될 상대적 존재이며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고 북한의 수령론을 비판하면서도 하나님을 올바르게 대리하는 교황이 우상이 아니듯이, 민족의 자주적 생존권을 지켜낸 인물이요, 인민을 착취 지배하지 않는 수령은 독재자도 우상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박순경은 이 발언으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아야 했다. 이 회의에는 고기준 목사, 김운봉 목사 등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중앙위원회 간부들이 참석하였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회원 교단들의 통일운동은 1988년 2월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으로 이어졌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회에서 채택된 이 선언은 분단체제 안에서 북한에 대하여 증오와 적개심을 품었던 일이 죄악임을 고백했다. 이 선언은 1972년 7·4 공동성명의 자주, 평화, 민족적 대단결의 3대 정신에 인도주의와 민주적 참여의 원칙을 통일의 기본원칙으로 첨가하였다. 이 다섯 가지 원칙은 한국 교회의 진보세력이 주장해온 통일의 기본원칙을 집약한 것이었다. 이 선언은 평화체제의 수립 후 미군철수와 군비축소를 주장하였다. 또 이 선언은 평화와 통일을 위한 연대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나가기 위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가맹 교단뿐 아니라, 비가맹 교단, 천주교와 연대하며, 남북교회 간의 교류와 연대, 한반도 주변 4개국 교회 공동체와의 연대, 나아가 타 종교, 타 운동들과의 연대를 그 과제로 설정하였다. 이 선언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회원 교회들이 1980년대에 수행했던 통일운동의 결실이었다. 그러나 한국개신교교단협의회, 한국복음주의협의회 같은 보수 단체들은 이 선언에 항의하면서 미군철수, 남한사회와 남한교회의 분단 책임 주장을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통일운동은 1990년대 들어서서 총무 권호경의 평양 방문으로 이어졌다. 권호경 목사는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초청으로 1992년 1월 7일부터 14일까지 세계교회협의회 아시아 국장 박경서와 함께 평양을 방문하였다. 권호경의 평양 방문은 남북분단 후 남한교회 대표의 첫 공식방문이었다. 권호경과 박경서는 평양의 조선그리스도교련맹 대표들과 김일성 주석을 만나 통일문제, 북한교회, 문익환 목사, 세계교회협의회 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자리에서 권호경은 조선그리스도교련맹 대표들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회 참석을 초청했다. 남북 정부의 비협조로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의 서울 방문은 추진과정에서 무산되었다. 그 후 1997년 9월 23일부터 30일까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김동완 총무와 김영주 국장이 평양을 방문하였다. 그들은 남북교회 간의 상호방문과 협력에 합의하고 그 일환으로 남한교회 지도자들의 평양 방문을 주선하기로 합의하였다. 이 합의에 따라 그 후 각 교단 대표들의 방북이 이루어졌다. 1990년대 중반 이후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통일운동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1998~2008) 시기에 활발했으며, 핵심사업은 대북지원이었다. 이 사업은 이명박 정부(2008년~2013년) 시기에 중단되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의 통일대화가 재개된 것은 2014년 6월이었다. 스위스 보세이에서 한반도 정의, 평화, 화해에 관한 국제회의라는 이름으로 열린 이 모임은 세계교회협의회 국제위원회가 조선그리스도교연맹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협력하여 주최하였다. 이 회의에서 조선그리스도교련맹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세계교회협의회와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 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교회와 함께 연례회의, 남북한 청년의 교류, 남북한교회 방문 프로그램을 적극 실천하기로 했다. 이 회의는 1990년대 이후 인도적 지원 중심으로 진행되어온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의 통일선교운동의 기조를 다시 통일대화로 전환해나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3.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북한교회 재건운동

개신교회가 북한선교에 나선 것은 1970년대 이후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의 북한선교회가 조직된 것은 1970년이었다. 1974년 조직된 씨앗선교회는 오늘날의 기독교 북한선교회의 모체가 되었다. 1980년대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통일대화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을 때, 보수 교회 일각에서는 공산권 선교를 준비하고 있었다. 기독교 북한선교회와 극동방송, 아세아방송이 개신교의 북한과 공산권 선교의 중심 기관이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은 남한사회의 공산권 국가들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켰다. 그 반응으로 나타난 것이 1988년 6월의 공산권 선교단체협의회 조직이었다. 여기에는 20개 단체가 참여했으나 곧 해체되었다.
1990년대 이후 기독교 시민운동에서 주목해야 할 현상은 북한 관련 단체들의 등장이었다. 1980년대 외국 기독교인들의 평양 방문과 남북교회 간 통일대화, 문익환과 임수경의 방북은 통일 논의를 독점하고 있던 정부의 통일 정책을 무너뜨리고 민간 참여의 길을 열어주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자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1990년 8월)과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1992년 2월)가 남북교류를 법률로 보장해 주었다. 그 직후 북한이 겪었던 심각한 경제난과 자연재해는 북한 관련 기독교 시민단체의 등장을 촉진시켰다.
과거 통일운동을 주도했던 진보적 단체와 달리 1990년대 이후 새로 생긴 기독교 NGO를 주도한 것은 보수적인 성향의 기독교인들이었다. 이 단체들은 통일대화나 통일정책 연구보다는 북한 주민들의 경제적 어려움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무엇보다도 1995년 여름의 대규모의 수해는 대북 시민단체로 하여금 통일문제보다는 북한 주민의 생존 문제에 우선적 관심을 갖게 하였다.
1990년대 이후 남한의 주요 개신교의 통일선교 운동은 대북지원, 북한교회 재건, 탈북자 선교 등으로 나타났다. 이런 운동을 시작한 것은 한국기독교총연합회였다. 군사정권 시절, 인권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1980년대에 접어들어서 통일운동을 주도해나갔다. 그러나 교회협의회에 가입하지 않은 많은 보수적 성향의 교단들이 크게 성장하자 한경직·강원룡·조향록·지원상 등 교회 지도자들은 새로운 형태의 교회 연합체를 만들기로 합의하고 한경직 목사를 준비위원장에 추대했다. 이렇게 하여 탄생한 새 연합체가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였다. 기독교총연합회는 1989년 4월 서울 영락교회에서 발기인 총회를 열고, 그해 12월 서울 강남중앙침례교회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창립총회에는 진보적인 노선을 걷고 있던 기독교대한감리회와 한국기독교장로회를 제외한 대부분의 장로교·성결교·오순절·침례교 계열의 교단과 기독교 단체들이 참여하였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결성 이후 한국교회의 연합기구는 진보 진영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보수 진영의 한국기독교총연합회로 양분되었다. 후자는 한미동맹의 강화 및 북한사회의 민주화를 외치면서 친미 반공주의 노선을 견지했다.
개신교는 1990년대 전반기에 인도적 차원에서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1990)을 전개했는데, 이것은 민간단체의 인도적 대북지원의 효시였다. 쌀 1만 가마(1990. 7. 3)를 북한에 보낸 것은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산하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본부였다. 1993년에는 평화통일을 위한 남북나눔운동이 창립되었다. 남북나눔운동은 보수교회들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등 진보 교회들의 연합조직이었다. 한국개신교 통일선교운동의 새로운 틀은 이렇게 만들어져 갔다.
개신교의 대북지원은 1990년대 후반에 본격화되었다. 김영삼 정부의 소극적 자세로 대북지원이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1997년 대북지원의 효율성을 위해 개신교의 거의 모든 교단과 주요 기독교 단체들은 한국기독교 북한동포후원연합회를 결성하였다. 한국기독교 북한동포후원연합회가 조직된 것은 1996년 8월 북한 수해돕기 교계 지도자 모임에서 공동으로 북한동포를 돕자는 의견에 따른 것이었다. 그 후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에 힘입어 교회는 적극적인 대북지원에 나섰으며, 1999년 이후 대북지원의 창구가 다원화하면서 60여 개 민간단체가 대북지원 창구로 활동하였다.
이 시기에 활동한 남북나눔운동, 한민족복지재단, 굿네이버스, 월드비전, 유진벨재단 등 기독교 계통 NGO는 개발 및 구호 사업을 전개하였다. 월드비전은 6·25 전쟁 때 고아와 미망인을 돕는 구호사업으로 출발한 단체였다. 국내, 해외 및 북한에서 활동하는 굿네이버스는 1991년 한국인에 의해 설립된 첫 개발 기구였다. 남북나눔운동은 한국의 민간 통일운동사에서 “가장 선진적인 기구의 하나”라는 평가를 받았다. 남북나눔운동의 활동은 영적·물질적 자산의 공유를 통해 남북 간에 화해를 이루려 한 보수와 진보 교회 지도자들의 공동 노력의 결실이었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은 김대중 정부가 1998년 2월 출범하면서 일관성 있게 추진해온 북한에 대한 정책이었다. 김대중 정부하에서 특히 2000년 6월의 남북 정상회담 이후 햇볕정책의 성과는 빈번한 남북회담, 이산가족 방문, 남북 교류와 협력의 증가 등으로 나타났다. 김대중 정부하에서 교회 및 기독교 시민단체들의 대북지원 사업과 남북 종교교류도 급증하였다. 그러나 대북지원을 퍼주기로 인식하는가 하면, 인도적 지원이 북한 주민들에게 전달되지 않는다는 의심도 생겼다. 대북지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교회들의 대북지원을 감소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1990년대에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대북지원보다 더 관심을 기울인 것은 북한교회 재건운동이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보수 교회들은 소련 등 공산권의 붕괴와 개방으로 공산권 선교가 가능해 보이자 북한선교에 관심을 가졌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통일 후 무너진 북한교회를 재건하기 위해 북한교회재건위원회를 조직하였다. 북한교회재건위원회는 한국 교회 다수의 호응을 얻었다. 1995년 6월 북한교회재건위원회가 조직될 때 이미 개신교의 47개 교단과 13개의 선교단체, 그리고 해외교포 교회들이 위원회에 참여하였다. 북한교회재건위원회는 북한교회 재건을 준비하기 위해 해방 전의 자료를 수집하여 1997년 북한교회 재건백서를 간행하였다. 이 위원회는 3천여 교회의 재건을 계획하면서 재건 원칙으로 과도한 경쟁을 피하기 위한 창구의 단일화(연합의 원칙), 교파교회를 지양하고 단일교단 설립(단일의 원칙), 자립적이고 독립적인 교회 설립(자립의 원칙)의 원칙을 제시하고, 교단별로 재건할 교회를 할당하였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에 가입하지 않은 감리교의 서부연회도 1998년부터 북한 지역에 있던 388개의 감리교회 재건을 준비하였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이미 1993년 9월 산하에 북한교회재건위원회를 조직하기 전 북한교회재건강령을 공표한 바 있다. 11개 항으로 된 강령은 2항과 3항에서 현재의 북한교회, 즉 북한정권하에서 건립된 교회를 정상적인 교회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이 교회를 관할하는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역시 북한정권 산하의 조직으로 규정하였다. 그렇다면 북한교회 재건의 주체는 아직도 숨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 지하교회 교인들이 되어야 하므로 이들의 순교적 신앙을 발굴, 선양하고 키워나갈 것을 명시하였다. 이처럼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북한선교는 남북분단과 6·25 전쟁을 거치면서 굳어진 철저한 반공신앙의 토대 위에서 계획된 것이었다.
북한교회 재건을 위해서는 전략의 수립도 필요하지만, 북한에서 일할 사역자 양성도 필요하였다. 그래서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산하에 통일선교대학을 운영하면서 반공적 선교일꾼 양성에 나섰다. 1998년 2월 설립된 통일선교대학은 그 후 10여 년 동안 4천여 명의 통일선교 사역자를 배출하였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분열 이후 현재 통일선교대학의 북한선교 사역자 교육은 중단 상태에 있다.
반공에 깊이 뿌리내린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북한교회 재건운동은 통일선교대학 운영을 제외하고는 김대중 정부의 남북화해 정책에 따라 침체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1995년 북한교회 재건운동을 시작했던 사람들은 북한교회 재건운동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 2006년 10월 북한교회세우기연합 발기인대회를 가졌다. 그해 12월 북한교회세우기연합 창립총회가 17개 교단의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렸다. 북한교회세우기연합은 2014년 4월 열린 기도회에서 북한 개방 후 10년 안에 북한에 3천 개의 교회를 다시 세우고 1만 2천 개의 교회를 개척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사업으로는 북한선교전문가 양성을 비롯해, 남북한 지역 결연, 교회 세우기 자금 비축 등을 계획하였다.


4. 대북NGO와 전문선교단체의 통일선교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개신교의 통일선교운동은 백화제방(百花齊放)의 시기를 맞이했다. 통일 및 북한선교 활동은 영역별로 세분화되고, 다양해지고, 전문화되었다. 이 시기에 기독교북한선교회, 남북나눔운동, 두리하나선교회, 여명학교, 모퉁이돌선교회, 쥬빌리기도회, 한국기독교통일포럼, 통일선교아카데미, 통일협동조합 같은 전문 선교단체가 다양한 분야에서 통일선교 운동을 주도해나갔다.
전문 선교단체들 중에서 통일 및 북한선교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고 선교전략을 논의하는 대표적인 단체로는 한국기독교통일포럼을 들 수 있다. 2003년 활동을 시작한 기독교통일포럼은 남북관계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고 선교전략을 논의하는 월례포럼을 개최해왔다. 기독교통일포럼은 신학대학, 선교단체, NGO에서 평화통일과 북한 복음화를 위해 활동하고 있는 전문가들이 진보와 보수, 교파를 초월하여 모여 통일선교 운동을 점검하고 내다보는 역할을 감당해왔다. 월례 포럼의 발표자들은 신학자, 목회자, 통일선교 기관 종사자, 정부인사, 탈북자, 타 종교인 등 다양했다. 2000년 이후 역대 통일부장관을 지낸 이는 9명인데 그 가운데 5명이 장관으로 있을 때나 퇴임 후에 이 포럼에서 통일 문제를 이야기하였다. 한국기독교통일포럼은 북한선교 및 대북지원 문제를 다룬 연구서 《통일한국 포럼》(2006)을 간행한 바 있다. 기독교통일포럼과 유사하게 통일 연구 및 정책을 수립하는 전문 선교단체로는 기독교북한선교회, 기독교통일학회, 평화와 통일을 위한 기독인연대, 예수전도단 북한선교연구원, CCC 통일연구소, 평화한국, 한반도평화연구원 등이 있다.
한국기독교통일포럼에 뒤이어 2006년에는 민족의 화합과 통일을 연구하고 통일론을 정립하기 위한 기독교통일학회가 창립되었다. 학술대회 외에도 기독교통일학회는 기독교 통일 NGO 대회를 개최했으며, 2012년 봄부터는 이 대회를 청년대학생 모임으로 발전시켜 젊은 층에 통일의식을 고취하고 있다. 기독교통일학회는 학술지 《기독교와 통일》(연간)을 간행하고 있다.
2009년 3월에는 평화와 통일을 위한 기독인연대가 창립되었다. 기독인연대는 보수와 진보의 협력, 연합 사업, 신을 부정하는 통일관의 극복, 성경에 토대를 둔 평화교육과 통일운동, 한국교회 통일역량의 결집을 활동 목표로 선언하였다.
2000년대의 통일선교운동은 쥬빌리 통일구국기도회 같은 기도운동으로도 나타났다. 2004년부터 시작된 이 기도회는 2011년 3월 쥬빌리 통일구국기도회로 다시 출범하였다. 현재는 수백 명의 참가자들이 매주 목요일 서울 사랑의 교회에서 기도회를 갖고 있다. 53개이 개신교 통일선교 단체가 참여하는 쥬빌리 통일구국기도회는 서울, 파주, 춘천, 통영, 부산, 전주 등 국내 11개 도시와 해외로도 확산되고 있다. 기도운동은 통일광장기도회, PN4N, 에스더기도운동 등으로 확산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통일코리아협동조합은 가장 최근에 조직된 통일선교 운동 단체로 2013년 11월 창립, 통일 문제 전문지 《통일 코리아》(계간)를 이미 세 차례 간행하였다. 통일코리아협동조합은 인터넷 신문(유코리아뉴스)과 계간 잡지, 콘서트, 통일마을 조성 등의 사업을 통해 통일운동의 저변 확산과 영역별, 지역별 통일 준비를 사업으로 계획하고 있다.
통일 사역자 양성도 개신교 전문 선교단체의 주요 사업으로 떠오르고 있다. 과거에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나 개신교 각 교단이 통일선교 활동가를 육성해왔지만, 최근 들어 이 단체들의 통일선교 교육이 중단된 상태다. ​국내외 주요 10개 교회의 참여로 2014년 4월 조직된 통일선교아카데미는 통일선교 전문사역자 양성과 통일선교 전략 연구 등을 구체적 실천 사업으로 정하고 있다. 아카데미의 교과과정은 1년 2학기제로, 학기별 2과목 12주 코스다. 북한선교학교(오픈도어선교회), 북한선교전략학교, 북한교회세우기연합 북한선교전문대학원도 통일 일꾼을 교육시키고 있다.
한국에 입국한 탈북자 수가 증가하기 시작하면서 이들의 정착 지원을 위해 2002년 10월 한국기독교 탈북민정착지원협의회가 창립되었다. 1990년대 말부터 2007년경까지 탈북자 지원활동은 조중(朝中) 접경지대의 탈북자 지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최근에는 국내의 탈북자 지원사업이 활발하다. 탈북자 지원사업은 탈북자 자녀들의 교육을 위한 대안학교 운영, 탈북자 교회 설립 등이 있다. 탈북자 교회는 탈북자들에게 기독교를 전하는 일뿐만 아니라 남한사회 정착을 위해 편의와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대표적인 탈북자 교회로는 서울에 평화통일교회, 열방샘교회, 새터교회 등이 있으며, 부산과 천안에도 탈북자 교회가 있다. 탈북자들이 탈북자 교회를 선호하는 것은 기존 교회에는 소외감 등으로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 주된 이유로 꼽힌다. 최근에는 탈북자 중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이 증가하고 있다. 감리교신학대학의 경우 2014년 현재 9명의 탈북 학생들이 신학을 공부하고 있다.

다음의 표는 활동 분야별로 주요한 통일선교 단체를 정리한 내용이다.

분야   단체
기도 쥬빌리 통일구국기도회, 통일광장기도회, 나오미네집, New Korea Builders, PN4N, New Wine Skin, 에스더기도운동
인권 기독교사회책임, 북한정의연대, 한국오픈도어선교회
대북지원 남북나눔운동, 월드비전, 한민족복지재단, CCC 통일봉사단, 위드, 푸른나무, 유진벨재단, 평화를 일구는 사람들
방송, 신문,학술지 극동방송, 한국TWR, 통일코리아협동조합(유코리아뉴스, 통일코리아), 기독교와 통일, Jesus Army 
 
연구 및 정책 기독교북한선교회, 기독교통일학회, 평화와 통일을 위한 기독인연대, 북한교회연구원, 한국기독교통일포럼, 예수전도단 북한선교연구원, 평화나눔재단, CCC 통일연구소, 평화한국, 한반도평화연구원, 북한사역목회자협의회
탈북자 선교 및 교육 북한기독교총연합회, 통일소망선교회, 굿피풀 자유시민대학, 미래나눔재단, 사랑나루, 열매나눔재단, 우리탈북민정착기구, 한국기독교탈북민정착지원협의회, 한민족가족치유연구소, 두리하나선교회, 여명학교, 하늘꿈학교, 한꿈학교
통일선교 일꾼 양성 북한선교학교(오픈도어선교회), 북한선교전략학교, 통일선교 아카데미, 리더쉽코리아 한국리더십학교, 예수원 삼수령센터, 북한교회세우기연합 북한선교전문대학원
북한교회 재건,
지하교회 육성
북한교회세우기연합, 모퉁이돌선교회, 서울유에스에이선교회

〈표〉 분야별 전문통일선교 단체 현황 (2014)
   
    
  


위 단체들 가운데 지하교회와 관련해서 활동하고 있는 단체로는 모퉁이돌선교회와 오픈도어선교회가 있다. 이 단체들은 북한 신자들이 보냈다는 편지나 그들이 지참한 성경을 통해 지하교회의 존재와 박해 소식을 남한교회에 알려주었다. 지하교회의 존재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2000년대 들어 비밀 신앙공동체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 미국의 일간지 〈워싱턴포스트〉는 2001년 4월 10일 남한교회의 북한선교 활동으로 북한 내 지하조직과 신도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북한이 1990년대 중반 이후 심각한 경제적 곤경에 빠져있을 때 많은 사람이 중국을 오가게 되자 중국에서 이들을 돕고 개종시켜 북한으로 다시 들여보내는 선교사와 선교단체가 생겼다. 북한의 지하교회는 중국에 왔던 사람들이 기독교를 접한 후 귀국하여 만든 신앙공동체로 보인다. 지하교회는 비밀리에 활동한다는 점에서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의 지도를 받는 가정교회와 다르며, 남한 선교사들의 영향하에 형성된 신앙공동체라는 점에서도 특이하다. 북한에서의 지하교회의 육성이나 지원은 남한 선교전문 단체들이 주로 하고 있지만, 미국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아시아방송에 의하면, 미국 버지니아 주에 본부를 둔 기독교구호선교회(Christian Aid Mission)는 2013년부터 매달 생활비와 선교비 200달러를 중국 연결망을 통해서 북한의 지하교회에 전달하고 있다.

최근 남한 개신교 일각에서는 지하교회의 진로와 관련하여, 지하교회들로 하여금 지하교회를 개척하게 하자는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다. 이것은 모통이돌선교회의 주장인데, 북한인이 북한 지하교회를 세우는 데 가장 적합하고 북한 복음화에 가장 좋은 적임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문화와 언어에 익숙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도 이미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5. 맺는말

이 글은 1980년대 이후의 개신교 통일선교운동을 통일운동의 주체에 따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한국기독교총연합회, 기독교 NGO 및 전문 선교단체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좁은 의미의 통일운동 측면에서 보면 1984년의 도잔소협의회 이후 시작된 글리온회의의 성과는 생산적이었다. 남북분단 이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회원 교회 대표들과 조선그리스도련맹 대표들은 글리온회의에서 남북정부의 승인하에 처음 상면했으며, 평화통일을 위한 기도주일, 평화 및 통일교육의 실행, 대규모 군사훈련의 중단에 관해 협의하였다. 1980년대에 도잔소협의회나 글리온회의 같은 통일대화에 자극을 준 것은 1981년부터 비엔나, 헬싱키 등지에서 열린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북한과 해외동포 기독자 간 대화였다. 북한대표들과 친북 성향을 지닌 해외거주 교포들만이 참석할 수 있는 모임이었지만, 비엔나회의는 주체사상과 기독교의 관계를 처음으로 토론하고 북한의 고려연방제 통일방안을 논의한 점에서 모험적이었다. 이처럼 1980년대는 국내외 통일논의의 활성화 시기였으며 1988년 2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민족의 평화통일과 평화에 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에서 그 절정에 달했다. 국내에서의 남북 간 통일대화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1990년대에는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기독자 도쿄회가 통일대화를 이어받았다.

개신교의 1900년대의 통일선교운동은 통일대화가 후퇴하고 대북 인도적 지원과 북한교회 재건운동이 등장하였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대북 지원의 문을 열었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 개신교의 대북지원을 주도한 것은 기독교 NGO인 남북나눔운동이었다. 남북나눔운동은 인도적 지원의 차원에서 의의가 있을 뿐만 아니라 보수와 진보 양 진영이 참여했다는 데서도 큰 의의를 지닌 것이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보수교회들의 북한교회 재건운동은 원래 통일 후 10년 동안의 교회재건 계획인데 분단 상태가 지속되고 이명박 정권의 대북 대결정책으로 교회 재건운동도 자연스럽게 침체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자체가 남한사회에서 가장 철저한 반공집단이었으므로 이명박 정부의 대북 대결정책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서 개신교의 통일선교는 대체로 통일 사역자 양성, 탈북자의 남한정착 지원, 조중 접경지대에서의 탈북자 보호, 그리고 전문선교 단체들 중심의 기도운동 등으로 나타났다. 전문 통일선교 단체들은 통일 준비 방법에 대해서 정치, 경제, 교육, 과학, 문화 예술, 미디어, 종교, 가정 등 영역별로 세분화시켜 통일을 준비해야 한다는 데 공감하고 있다. 일부 보수적인 선교전문 단체의 활동에는 북한정권을 배제하고 음지에서 이루어지는 지하교회의 육성이나 지원 활동도 있다. 2000년대에 들어서서 통일선교 운동 단체는 60여 개로 늘어났으며, 초기의 긴급지원 활동에서 2005년 이후에는 보건의료 환경개선 사업 등 북한사회의 취약계층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의 소극적인 대북정책의 영향으로 기독교 NGO들도 대북지원의 동력을 상실해왔다. 진보진영의 선교방식 역시 이명박 정부가 조선그리스도교련맹과의 교류를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크게 약화된 상태에 있다. 다행히 올해 들어 개신교의 통일선교 운동은 1980년대에 활발했던 조선그리스도교련맹과 공식적 교류협력을 재개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개신교의 통일선교 운동은 선교관의 차이 때문에 진보와 보수 진영의 선교방식이 달랐으며 이는 극복의 과제로 인식되었다. 이런 이분법적 선교방식을 버리고 양 진영이 협력해서 통일선교운동에 매진해야 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미 통일선교를 연구하고 정책을 협의하는 기독교통일학회, 평화와 통일을 위한 기독인연대, 한국기독교통일포럼 등은 보수와 진보 진영 연구자들과 통일선교 실무 책임자들이 협력해서 활동하고 있다. 이렇게 통일선교 현장에서 통일을 선교의 과제로 보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중심의 통일대화 진영과 북한을 협의의 선교의 대상으로만 보는 보수 진영의 협력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통일운동과 북한선교의 통합 문제가 통일선교 신학의 차원에서도 깊이 있는 담론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통일운동은 기독교 내의 협력뿐만 아니라 종교 간 협력도 필요로 하는데, 통일운동에서 종교 간 협력을 촉구한 것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민족의 평화통일과 평화에 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이었다. 한국개신교는 통일선교 운동을 향해 한 발 더 나가려면 기독교 내부 그리고 종교 간의 협력을 위한 통일신학 담론을 진지하게 논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김흥수 / 목원대학교 한국기독교사 교수. 목원대학교 신학과, 보스턴대학교 신학대학원, 서울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졸업(철학박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 역임. 주요 저서로 《해방 후 북한교회사》 《한국전쟁과 기독교 기복신앙 확산연구》 공저로 《북한종교의 새로운 이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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