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미래와 새로운 불교교류의 길

1. 머리말

우리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항상 육로를 통한 국경과 접하여 이질 문화와 소통한 대륙문화가 있었다. 간도를 개척했기에 오늘날도 조선족이 중국에 살게 되었다. 분단으로 인해 그런 대륙과의 역사가 완전히 끊어졌다가, 1990년대 이후 주로 조선족자치주인 연변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북·중 접경지역을 접하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문화들이 공존하는 국경지역의 변경문화를 직접적인 생활 경험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북한이탈주민, 다문화 이주민 등 이질적 문화와 만남에서 내적으로 갈등이 더 발생하는지 모른다.

민족기원을 말하는 ‘단군신화’는 단일민족의 이야기가 아니라 웅씨, 호씨 종족들과 서로 다른 문화의 접촉·충격·수용의 의미를 환기한다. 지금 우리는 그와 같은 다양한 문화와 공존하는 대륙문화의 기질을 잃어버렸다. 또 대결적 분단의식은 우리 소견을 좁게 가두어 놓고 갈등하게 만든다. 그것은 일종의 ‘문화적 결손’과 다름없다.

이 글은 반쪽 문화, 대결 문화의 분단을 넘어 교류와 협력의 길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불교계 교류의 입장에서 탐색하고자 한다. 최근의 남북관계를 보면 높은 불신의 벽과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이라는 이중 장애가 교착상태를 재생산하고 있는 듯하다. 서로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고 판단의 기준도 다르다 보니, 상대방을 부정적으로 치부해 놓고 서로 먼저 무장 해제를 하라고 말하고 있다. 좀처럼 평화의 길이 보이지 않는 남북관계에서 어떻게 교류의 단초를 열까? 남북불교교류의 의의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

지금까지 불교교류는 남북교류에서 하위의 한 부문으로 이뤄졌다. 여기서 다룰 문제는 기존 남북불교교류를 평가하여, 불교의 사상적 철학적 관점에서 넓은 전망으로 남북교류를 선도하는 필요성도 함께 살펴볼 것이다. 교류가 왜 필요한지 질문할 때, 무엇보다 현실 문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방향이 분명해야 한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북한사회 변화와 의미도 함께 살펴봄으로써 불교적 가치관 아래 교류의 방향을 모색해 보려고 한다.

2. 남북불교교류의 흐름

이명박 정권 이후 지금까지도 남북관계가 얼어붙어 성과적인 불교교류가 별로 없었지만, 지난 10월 13일 금강산에서 신계사 낙성 7주년 기념으로 조국통일기원 남북불교도 합동법회를 개최함으로써 교류의 명맥을 잇고 있다.

이 글에서는 남북불교교류의 역사적 정리보다는 남북교류의 성격을 되짚어보면서 새로운 길을 탐색해 보고자 한다.

남북불교교류는 남한의 통일운동에서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1980년대는 남한사회 통일운동의 반향으로 불교계의 통일운동도 증폭되었는데, 진보세력을 대변한 민족자주·통일불교운동협의회를 비롯해 대불련, 대불청이 운동을 주도했다. 이후 종단의 관심은 북한과 직접 교류를 염두에 두고 한국불교종단협의회 산하에 남북불교교류 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1989. 11. 5). 이것은 이전의 호국불교에 의해 반공적 풍토에 있던 승가가 직접 남북통일과 교류에 대한 의지를 표명하고 나선 것을 의미한다. 이런 변화는 1976년 대불련 제4차 화랑대회에서 제기된 민중불교운동론이 당시 사회민주화 운동과 함께 발전해 왔던 밑거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불교계의 직접적인 교류는 해외 불교계의 방북으로 싹튼다. 1986년 기독교측에서 앞장서서 종교계 교류를 시작하여, 1989년 3월 25일 문익환목사의 방북으로 통일운동의 분수령을 만들었다. 그 얼마 뒤 6월에 조계종의 법타 스님이 방북하여 조불련의 박태호 위원장과 직접 만나 최초로 남북 해외 불교교류에 대해 논의했다. 이후 1991년 4월 묘향산 보현사에서 분단 이후 첫 남북불교도 타종법회를 했고, 1991년 10월 미국 LA 관음사에서 남북 해외불교 지도자가 만나 처음으로 공동 법회를 개최함으로써, 본격적인 남북불교교류의 시작을 알렸다. 이후 통일운동은 조국평화통일추진불교인협의회(1992년 창립)의 활동처럼 방북과 직접 교류의 형태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1994년 김일성 주석의 사망 이후 최악의 경제난으로 인해 북한 주민이 아사하는 상황에 처하자 통일운동은 북한돕기운동으로 전환되었다. 이로써 남한 내 통일운동은 북한돕기, 방북 또는 3국을 통한 남북 직접교류 등 다양한 모습으로 이뤄지기 시작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통일정책은 민간교류의 폭을 크게 확산시켰다. 남북화해 국면 속에서 2000년 6월 8일 조계종단은 독자적 교류창구로서 대한불교조계종 민족공동체 추진본부를 창립했다. 종단의 지원으로 북한의 단청불사(2003년), 신계사 복원불사(2004~2007년) 등을 통해 불교적 독자성을 가진 교류의 길을 열었다. 신계사 복원은 현대아산의 금강산 관광사업 지역에서 병행되면서도 법회 등 실질적 교류의 거점을 만들어낸 기념비적 불사였다.

그러나 2007년 11월에 불사도감을 맡았던 제정 스님이 신계사를 철수한 후, 2008년 7월 박왕자 사건으로 남북관계가 급랭하는 상황과 맞물려, 전통사찰 복원을 넘어서는 교류의 거점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 신계사가 복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후로는 교류의 장, 통일교육의 장이 되고, 남북공동 상주 공간으로 정립되어야 할 과제는 아주 요원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비슷한 시기에 이뤄진 개성의 영통사 복원 불사(2003~2005년)와 대비해 의미 있게 평가할 점이 많다. 영통사는 북한 당국이 먼저 기초발굴조사를 마친 후 복원에 필요한 기와와 부대 자재, 각종 공사 물자, 중장비 등을 육로로 지원하여 줌으로써 북측이 공사를 맡아 복원했다. 반면 준공 이후 대각국사 의천 스님 열반다례재와 성지순례(7차)를 통해 교류를 이어갔다. 이 성지순례는 2007년 12월에 현대아산이 개성의 본 관광을 시작하기에 앞서 이뤄진 ‘성지순례 겸 관광’이었다. 즉 불교교류의 판을 넘어서는 교류 통로가 가능하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신계사 복원은 남북불교 대표, 실무자, 전문가의 협의와 공동 참여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복원의 과정에서부터 협력과 교류의 의미가 증폭되는 남북불교교류의 새로운 전형을 만들었다. 이것은 남북불교의 교류 역량을 결집한 시험대였고 양자 통합의 기점이 될 수 있었다. 그 불사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햇볕정책과 포용정책이 뒷받침되어 이뤄진, 갈등과 화해, 양보와 협력의 소통 결과물이기 때문에 남북화해협력의 상징물도 된다.

왜 그러한 신계사 복원의 의미가 계속해서 빛을 발하지 못하는가? 대북정책에 좌우되어 교착상태에 빠진 것인가? 실제로 천안함 사건(2010. 3. 26)과 뒤따른 5·24조치에 의해 거의 모든 남북교류가 중단되었다. 그나마 남북공동으로 만들어놓은 영통사나 신계사라는 명분이 있어 불교계 교류에 약간의 움직임이 남아 있다. 그럼에도 그것이 남북교류의 물꼬를 틀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교류가 멈춘 자리에서 재점검하여 새롭게 모색해야 하는 시점이 된 것이다.

3. 한반도 미래와 불교교류-새로운 선택

보통사람들에게 북한에 대한 적대적 감정을 반전시킨 것은 김일성 주석 사망 직후 ‘고난의 행군’ 시기에 탈북자가 속출하고 극심한 경제난 실상이 전해지면서 일어난 북한동포돕기 운동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남한사회에서 통일에 대한 긍정적 열망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2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남한사회는 통일에 무관심하거나 북한 정권에 대한 반감을 품는 경우가 많아졌다. 2012년 통일교육협의회가 전국 중·고등학교 재학생 2,38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청소년 통일의식조사’를 보면 ‘통일 및 북한 문제에 대한 관심’을 묻는 질문에 35.3%의 청소년이 ‘관심 없다’고 답했다. 교사들이 느끼는 청소년들의 통일에 대한 관심은 이보다 더 낮아서, 절반 이상의 학생들이 통일과 북한 문제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또한 통일교육에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는데, 안보에 치우쳐 북한을 제대로 바라볼 기회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지난 8월 KBS 조사에 따르면 박근혜 대통령의 통일대박론에 대한 공감은 61.5%인 반면에 북한 정권에 대한 반감은 74.7%로 나타났다.

이와 같은 모순 반응이나 북한 정권에 대한 불신과 북한사회에 대한 이해 부족은 핵문제나 국제관계상의 요인 못지않게 큰 남북관계의 걸림돌이다. 현 정권의 대북정책은 ‘신뢰프로세스’에 방향을 두고 있지만, 남북은 서로 먼저 신뢰를 보이라는 불신의 딜레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문제의 관건은 북한사회의 이해와 소통의 방법에 달린 것 같다.

그런데 지금까지 불교계의 교류 창구에서 교류 내용과 분배투명성 등을 근본적으로 문제 제기한 바는 없다. 조불련은 북한사회제도상 당의 외곽단체라는 한계, 남한의 민간자율의 한계도 문제적이지만, 민간교류의 길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다변화할 것인지에 대해, 또 왜 변화시켜야 하는지 등에 대해 별로 고민하지 않았다.

불교의 나눔의 정신인 무주상보시에는 ‘눈높이’를 맞추는 소통적 방편이 있다. 내가 주었는데 감사하지도 않는다, 퍼주기만 했고 안보위협만 더 커졌다. 이와 같은 불신과 이해부족 문제를 풀고 ‘눈높이 교류’로서 소통의 방향을 찾아보기 위해서, 변화하고 있는 오늘의 북한 현실을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1) 북한사회 변화와 ‘실리주의’ 추구

북한의 경제난 이후 시장화가 진행된 지 20여 년이 되었다. 북한이 ‘개방’되지 않았는데도 시장은 지역과 계층, 성별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변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종합시장, 도매시장, 사무역(私貿易) 등 다양한 형태로 시장화의 종목과 영역이 확장되고 있는 가운데, 경제행위자의 세대 차에 따른 변화양상도 보인다.

정권도 세대교체가 일어났다. 김정은 제1위원장에 대해 남한이나 국제사회에서 대화의 상대로 아직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북한사회 전환의 계기가 될 수 있는 젊은 세대가 등장한 것임은 틀림없다. 북한사회 변화의 관건인 ‘시장’에서 젊은이들은 기성세대가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영역들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기성세대는 배급경제와 시장화 경제를 함께 체험하였다면, ‘시장 새세대’는 배급경제의 사회 질서에 대한 경험이 희미해졌다. 대신, 새세대(신세대)들은 ‘시장’을 일상적으로 겪고 있다. 이런 점에서 새세대의 생활과 의식, 가치관은 기성세대와 다른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오늘날 ‘시장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북한시장의 직접적 모태는 배급이 끊김으로써 시작된 기관·기업소의 ‘쌀실이’ 시장이었다. 미공급[쌀]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필요경비까지 충당하는 유통과정이 덧붙여짐으로써, 시장은 점점 확산되고 분화하는 길로 나아갔다. 세대 변화까지 일어나는 시장에서 무엇이, 왜 달라질까?
실제로, 34세의 ‘돈주’가 사장이 되어 회사를 설립하고, 관료를 영입해 기업형 건설업에 뛰어들었다는 이야기는 30대 지도자 시대와 어울리는 풍속도를 그려보게 한다. 북한사회 변화에서 새세대에 의한 질적 변화가 꿈틀거리고 있는 셈이다. 그것을 어떻게 제도화하고 통제할 것인지는 북한사회 미래의 방향을 결정할 중요한 문제이다.

그런데 북한 평양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한국 드라마와 영화, 음악, 패션 등 한류가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흔히, 북한 속의 ‘한류’와 신세대의 밀접성을 생각하는데, ‘한류’의 수용에 세대 차가 작용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한류의 유행성만 말하면 ‘북한 한류’의 의미는 남한식으로 해석된다.

남북교류에서도 그렇지만 남한식 눈으로 보면 착오가 일어난다. 북한 한류 문제는 눈높이를 맞추어 이해해야 할 중요한 대목으로, 새세대의 가치관 형성과 사회적 영향력과의 관계 속에서 수용, 변형, 영향 등 여러 측면을 분석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접근해야 한다. 이를테면 소비성향에서 ‘새로운 가치’가 개입함으로써 생겨나는 사회적 영향은 무엇인지를 추적할 때 ‘한류’의 의의를 다르게 볼 수 있을 것이다.

남북관계에서 같음보다는 차이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 다름을 인정할 때 진정한 소통이 가능하다. 북한사회의 분화에 대한 심층적 이해를 위해서는 문화적인 것에서 소통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기존의 집단주의 문화와 개인화 경향이 어떻게 양립 혹은 충돌하는지, 그 현실에 바탕을 둔 이해에서 구체적 소통의 접점이 나올 것이다.

(1) 시장적 가치관과 새세대 형성

북한에서 시장이라고 하면, 계획경제 부문과 대비되는 시장 방식 부문을 말한다. 먼저, 농민시장에서 시작하여 2000년대 공설시장이 나온 ‘시장화’의 발전 역사를 요약해 보자.

1997년 김정일은 “사회주의는 지키면 승리, 버리면 죽음”이라는 구호와 함께 “공짜를 없애라” “사상교양의 시대는 지나갔다” “러시아풍을 없애라”는 3대 ’97선언을 했다. 배급사회주의는 끝났다는 의미가 포함되는 이 선언은 사회주의 고수 구호와 분명 모순된다. 그것은 김정일 시대의 북한사회 혼란상을 반영함과 동시에, 주민들은 시장에서 생존경쟁을 해야 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미 배급제라는 공짜가 무너진 상황에서, 이 발언은 사후약방문이면서 체제에 대한 극약 처방과 다름없다. 그 결과는 바로 기존 사회가치관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배급제에 이상이 생기면서, 어떤 기관에 소속되어 있느냐에 따라 빈부격차가 났다. 과거에는 빈부격차가 사회에 적신호이고 투쟁 대상이었는데, 고난의 행군시기를 지나면서 옆집 사람이 굶어 죽어도 모르는 무관심이 생기고, 생각의 변화가 일어났다. 주민생활은 서서히 비(非)사회주의적 시장경쟁의 생존 방법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로 들어선 것이다.

시장은 밥줄이 된 셈인데, 합법과 비법 사이의 전진·후퇴의 반복 가운데 변화가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기에, ‘고난의 행군’, 7·1경제관리 개선조치, 화폐개혁과 같은 반전의 계기에 따라 3단계로 나눠본다.

제1단계는 ‘장마당 확산기(1990년대~2002년)’이다. 배급제가 전반적으로 무너지면서 기존 농민시장인 장마당이 급속히 확산한 고난의 행군시기 전후기인데, 선군정치로 인해 군부까지도 시장화하게 된다. 

제2단계는 ‘시장화 발전과 조정기(2002~2009년)’이다. 2002년 7·1조치에 이어 박봉주 내각에 의한 종합시장화 조치가 나오면서 시장이 발전하다가 박봉주 실각으로 시장은 조정기에 접어든다.

제3단계는 ‘시장 후퇴와 반전기(2009~2014년 현재)’이다. 2009년 말 화폐개혁은 서민 장사꾼들에게 큰 충격을 주고, 시장의 침체를 불렀다. 김영일 내각 등장과 화폐개혁은 종합시장보다 상점화, 매점화에 중점을 둔 정책으로 나타났지만, 장사꾼들은 시장 외적 충격을 반면교사로 삼아 역설적으로 시장을 더 깊이 이해하는 계기가 된다.

시장의 형태로 보면, 장마당을 종합시장으로 건축하여 공설화하고, 이것을 다시 재래형에서 벗어난 상점화, 매점화를 한다. 그것은 경영과 상품유통, 매장관리 등을 혁신하려는 시도의 일종이다. 시장 근처에 수매상점들의 병설, 매장 및 시설 안내를 위한 간판부착, 짐 보관 봉사, 시장판매원(개인 상인의 공식호칭)들의 재고관리 개선, 옥내 ‘매점’에 매탁의 전개 등이 변화된 모습이다. 이와 같은 공설시장은 지역적 차이는 있지만 전국적으로 분포한다.

뿐만 아니라 ‘데꼬’와 같은 거간(居間) 거래는 다양한 서비스 형태의 시장확산을 말해준다. 매대가 있거나 없거나, 사실상 가정집에서 거래가 이뤄지는 경우는 장소의 제약이 없이 시장은 일상 속으로 확산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처럼 시장이 발전하면서 지역의 차별화가 발생하고, 유무형의 시장 분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현실은, ‘경쟁’과 기존 사회주의의 삶의 가치관에 변화를 주는 ‘사적 욕망’이 확대됨을 의미한다.

개인의 삶에 변화가 일어나는 ‘유행’에서 살펴보자. 북한에서 유행과 시장이 하나의 코드로 작동하는 첫 단추는 임수경 스타일이다. 1980년대 남한의 학생운동과 거리 데모가 북한 방송에 비칠 때, ‘옷을 잘 입었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임수경이 등장한다. 당시 북한은 티 같은 것을 속옷이라고 생각하던 때인데 그가 입었던 티와 바지가 평양에서부터 유행돼서 팔려나갔다. 그래서 임수경의 등장은 “여성들 차림새에 본격적으로 유행을 불러일으킨 첫걸음”과 다름없다. 이 말은 북한 젊은이들에게 유행의 원형이 ‘남조선(남한), 자본주의, 여성’으로 구성됨을 뜻한다. 이 임수경 코드 때문에 시장에서 ‘엄청 잘 팔렸다’는 것이고, 이것이 북한 시장화 과정에서 변화의 잠재력이 된 것이다.

젊은이들 사이의 추세(유행)가 상품과 직결되면서 송혜교 사진이 붙은 거울은 값이 배로 뛴다. 사치품이 자랑거리가 되는 시장적 가치관은 기성세대는 생각할 수 없는 ‘반전’이다. 즉, 시장 속에서 새로움을 선도하는 부류가 젊은 층이었다는 ‘신세대’적 의미는 북한 시장화에서 중요한 변곡점이다. 왜냐면 임수경 코드처럼 남한과 자본주의 시장이라는 의미와 중첩되어 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2005년을 전후해서 30대 젊은 장사꾼이 ‘팍 일어났다’고 말한다. 그것은 시장 1세대를 딛고 젊은 시장 2세대가 뭔가 다르게 장사를 했다는 뜻이다. 교환거래가 대부분이던 시장에서 ‘상품생산’ 판매가 가세하고, 생산을 하면서 공급자보다 수요자 요구나 유행을 따르고 ‘시장경쟁’에서 앞서가려는 차별화가 있음을 말해준다. 일반 거울에서 연예인 사진 거울로 수직상승하는 상품의 가치 재창출이나 젊은이를 따라 잡을 수 없다는 시장적 경쟁력 등의 현상들은 기성세대보다 젊은 세대들의 감각에서 촉발되고 있다. 바로 이 점에 주목하여 다음 논의를 진행해 보자. 

(2) 성장기 속의 시장 체험-가치관의 맹아

어머니와 아들이 살고 있었다. 배급이 끊어지자 공장에 다니시던 어머니는 기름튀기 장사를 시작하였다. 기름튀기를 만들어 시장에 팔면 하루 먹을 식량이 겨우 나왔다.//
어느 날, 13살 난 아들이 시장에 나타났다. “울 엄마 기름튀기 장사 한다!”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아들은 아이들을 한 무리 끌고 엄마에게로 다가왔다. 엄마는 아들이 다가서지도 못하게 소리를 쳐 쫓아버렸다. 아들에게 기름튀기를 주면 이윤이 없기 때문이였다. 자랑도 못하고 쫓겨난 아들은 돌멩이를 집어 들어 어머니의 기름튀기 버치에 힘껏 던졌다.// 가을이 왔다. 김장무를 사려고 서두르는 어머니에게 아들이 김장무를 사라고 하였다. 값은 시장보다 아주 싼 값이었다. 으쓱한 밤이 되자 아들이 친구들과 함께 무 마대를 지고 들어왔다. 어머니는 무값을 아들에게 주었다. 아들은 잔돈까지 마저 요구하였다. 친구들과 계산이 정확해야 한다는 것이였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아들이 인민군대에 입대하였다.// 3년 후 아들에게서 편지가 날아왔다. 연대장의 구두감사를 받고 곧 표창 휴가를 온다는 것이였다. 영양실조로 누워있는 소대병사들에게 염소고기를 보장해주고 소대 살림을 시장이윤으로 보장한다는 것이였다.// 편지를 다 읽고 난 어머니는 석양노을을 바라보며 울지도 웃지도 않았다. 
— 손혜민 〈어머니와 아들〉 전문

인용한 〈어머니와 아들〉은 하나의 단편 서사시이다. 인물 전형상의 뚜렷한 대비점은 어머니와 아들의 계산법 차이에 있다. 아들과 그 동무에게 나가야 할 기름튀기를 손해 보지 않겠다고 아들의 접근을 막는 것은 소극적 장사법이다. 아들은 시장가격보다 싸게 한 가격경쟁력을 내밀고 끝전(-錢)까지 챙겨 정확한 분배를 하는 더 적극적인 장사법을 택했다. 이런 행동은 정규 교육이 아닌 생활에서 체득한 ‘시장화 문화’라 할 수 있다. 부모와 자식 사이의 거래조차 인정보다 경쟁력이다. 군대 가서는 소대 살림까지 시장에 편입시킨다.

이런 아들처럼 ‘시장화 문화’ 속에서 성장하는 새세대는 북한사회변화의 또 다른 힘이 된다. 장사는 곧 돈을 의미하기 때문에 아이들도 그 부(富)를 자랑하거나 부러워한다. 초기에는 기름튀기든 뭐든 무조건 부러워했다. 최근에는 아이 옷에 기름 냄새가 배어 있는 기름튀기 장사는 좀 창피해 한다. 반면 통념적으로 ‘의류’를 취급하는 것을 말하는 공업품 장사, 천 장사 등은 돈을 많이 벌기 때문에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교원들도 장사하여 돈을 번 학부모 자녀가 가는 ‘장사반’의 담임이 되기를 바란다. 장사의 품목에 따라 점차 선호도에 차별이 생겨나는 가운데, 아이들은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고 자라고 있다. 북한 교원 출신의 말을 빌리면, 이런 이야기들은 북한의 학교생활에 시장가치가 개입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일반적인 풍속도이다.
그것은 정치사상 중심의 북한사회에 균열을 가져오는 경제적 빈부격차 심화와는 또 다른 변화 요인, 어떤 세대적 힘이 움직이고 있음을 짐작게 해준다.

〈어머니와 아들〉에서 아들의 전형처럼, 1990년대를 전후하여 출생한 새세대는 고난의 행군 시기에 성장기를 거치면서 장마당이 놀이터나 다름없게 된다. “울 엄마 기름튀기 장사한다!”고 자랑하는 아들과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싸워야 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시장 새세대’는 시장바닥의 눈칫밥을 먹고 성장하는 셈이다. 그들은 어머니 세대보다 더 앞서가는 시장가치를 아는 것이다.

앞에서 본바, 시장 새세대가 손거울 하나에 두 배 값을 지불하며 기성세대와는 다른 가치를 소비할 수 있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이 만약 부모의 경제력에 의존해 단지 남한 연예인을 추종하는 구매였다면, 그것은 남한식 한류의 단순한 모방 행동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데 노동시장에 북한판 알바생이라고 할 새세대의 일공(하루 삯일꾼)이 생기고 있다. 그들의 지향성이 통하는 시장이 만들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새세대의 생산활동 의미가 북한시장의 새로운 요소로 떠오르고 있는 셈이다. 그들은 “내가 내 돈을 번다” “나 일공해”라고 말하며 스스로 자랑스러워한다. 경제행위 주체가 됨은 배급세대에서 떨어져 나와 자구적 시장에 진입한 일상을 살고 있음을 말한다. 이때 시장 새세대의 생산활동과 소비는 ‘내가 내 돈을 번다’는 비사회주의적 사고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 미래의 시장 판도가 뭔가 달라질 것임을 예고한다.

(3) 시장 새세대-새로운 경제주체의 추구

앞에서 본바, 성장기에 시장환경에서 자란 세대가 일공 새세대로 진입하거나 신진 장사꾼으로 생산활동에 참여함으로써 시장문화의 영역은 새로운 가치가 보태지며 변화하게 된다. 

기존의 노동력 동원방식으로는 8·3가내반처럼 예비노동력을 주로 무직의 부녀들인 가두여성에서 충당했다. 경제난 이후 북한에서 노동력도 시장화하면서, 8·3의 가두여성 이외에 10대, 20대의 여성 일공이 등장한 것은 새로운 시장이 분화하고 번창해 갈수록 생길 수밖에 없는 현상이다. 왜냐면 기성세대와는 다른 가치로 움직이는 생산시장일수록 가치관이 다른 노동력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 차이를 자본주의 문화에 오염된 ‘화폐세대’ ‘시장세대’ ‘소비세대’ 등 자본주의형 정체성으로 대응시켜 직선적으로 보기에는 의미의 한계가 있다. 앞에서 본바, 〈어머니와 아들〉에서처럼 시장 새세대를 북한시장의 저력을 이해하는 키워드로 삼는 것은 변화하고 있는 북한시장의 구조를 새롭게 읽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34세의 돈주가 사장이 되어 회사를 설립했다고 볼 때, 현재 북한 시장에서 그가 차지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를 시장 2세대로 규정한다면, 시장 1세대와 어떻게 변별할 것인가?

북한 시장의 변화는 제도적 변화가 아니라 ‘자생적’이라는 점에 특이점이 있다. 제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막을 수 없이 흘러가는 시장화의 이행과정에서 ‘행방’ ‘경험축적’ ‘정보와 지식’ 등은 자생력의 방향을 좌우하는 세 가지 주요 키워드이다.

첫째, 행방은 ‘고난의 행군’이라고 했던 경제난이 일어나면서 등장한 말이다. 처음에는 시장을 움직이는 방향도 몰라, 식량을 바꾸거나 돈이 되겠다는 물건을 둘러메고 행상을 나선 ‘달리기’를 북한에서 “행방 떠난다”고 했다. 행방은 시세도 모르고 닥치는 대로 가 본다는 뜻으로, 시장정보가 없거나 부족하다는 표현이었다. 지금은 전화 한 통이면 현지 물가정보를 다 알기에, 달리기식 장사는 옛날 이야기가 된 것이다.

“앉아 있는 영웅보다 돌아다니는 머저리가 낫다”는 북한 유행어처럼, ‘고난의 행군’ 시장 시기보다 이후 시장 시기에 장사꾼의 의식이 많이 깨어났다. 예를 들면, 중국과 왕래와 교류가 빈번한 라선 특구는 직간접적으로 주민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신의주, 혜산 등 앞서가는 시장을 돌아보는 사람이 늘어나고, 그 결과로 보는 눈과 의식이 변화한다. 외부 세계와 접촉은 여러 측면의 거래를 만들어낸다. 특히 경제적·문화적 충격과 영향 아래 유형, 무형의 거래를 경험하고, 팔지 못하게 하는 상품까지 눈을 속여 가며 하는 장사를 경험한다. 새로운 경험을 통해 돈을 벌기도 하겠지만, 그처럼 세상 물정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

둘째, 그와 같이 시장경험이 쌓인다는 것은 무방향성의 ‘행방’에서 어떤 방향이 생긴다는 의미가 있다. 경험 속에서 시행착오를 겪고, 거기에서 가치 있는 정보를 선택하거나, 새로운 정보에 대한 요구가 생기고 시장적 판단이 동반된다.

2009년 북한에서 화폐교환을 했을 때, 현화(달러)를 못 쓴다고 포고 나오고, 5,000원권이 새로 나온다. 장사꾼은 경험의 축적과 시행착오 속에서 시장의 생리를 스스로 터득했다. 중국이 없어지지 않은 한……, 5,000원짜리 화폐가 왜 나왔나…… 그러니까 화폐교환에 따른 제재에도 불구하고 시장을 판단하는 안목을 가진 사람은 현화(달러)나 중국돈을 내놓지 않았다. 중국이 있기에 중국돈을 못 쓸 수 없다는 ‘상식’이 있는 사람은 외부세계를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이다. 이런 경우는 그냥 하는 장사가 아니다. 시장을 분석하고 예측 관리하는 ‘시장경제화’ 수준으로 다가가는 변화를 엿볼 수 있다. 물론 이때의 경제지식은 경험을 통해 이해한 것이지만, 한 시장이 다른 시장(세계시장)과 연동되어 있는 어떤 면모를 감지한다. 북한 시장 특성은 계층 간, 지역 간에 통합되지 못하고 ‘분절화’되어 있는 면도 있지만, 점차 내부적 특성만 아니라 외부 자본주의 시장과의 연계성 속에서 변화하는 측면이 커지고 있다. 즉, 자생한 장마당 속에 닫힌 시장이 아니라 열린 시장 속으로 통합해 가는 중이다.

셋째, 정보와 지식은 시장을 보는 눈의 높이가 된다. 시장적 욕망이 클수록 경제적 개방에 대한 열망도 높아진다. 경험이 정보와 지식에 대한 요구로 나아가면 새로운 교육을 열망하고, ‘지식경제’의 구호를 자기 생활을 꾸려가는 생계로 대체해 간다. 말하자면 지식경제는 새세대의 새로운 환경이 된다. 실력이 없으면 자리 얻기 어렵다며, 식당을 경영하여 돈을 많이 벌고 있는 한 여성(30대)은 남편이 공부하도록 뒷바라지를 한다고 했다. 북한에서는 젊은 아내가 돈을 벌어서 제대군인 남편의 대학교육을 책임진다는데, 심지어는 약혼한 관계만 되어도 교육비 지출을 여자 쪽이 한다고 했다.

변화된 세계에 대응하는 힘은 ‘새로운 지식’이다. 최근에 ‘지식경제 시대’를 지향하는 일련의 교육개혁의 시도는 경제개혁을 위한 기반이 교육에 있음을 반영한 것이다. 이런 가시적 변화의 이면에 놓여 있었던 생활경제와 ‘교육시장’에서 변화를 먼저 보아야 한다. 즉, 지식경제 시대에 대비하는 데 힘을 실은 국가주도 교육개혁에 앞서서 주민들의 교육 열망이 먼저 널리 퍼져 있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자본주의 또는 시장경제에 대한 지향은 오직 ‘장사를 잘해야겠다’는 희망 속에서 정확한 이해가 없어도 무엇이든 배우겠다는 열망으로 이어져 있었고, 그것은 무료교육이 무너진 다음에 주민들이 교육에 손 놓은 것이 아니라, 사교육(私敎育)의 확산과 같은 시장경제를 향한 교육으로 새롭게 전환되는 힘이 되었다.

이 점에서도 우리는 북한 시장의 ‘자생적 성격’에 주목해야 한다. 북한에서 자본주의 시장이 이식된 경우와 시행착오 속에서 시장화한 경우를 가상적으로 대비해 보자. 그 생존력을 비교할 때 자생적 시장의 힘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행방이 없던 데서, 경험적으로 어떤 방향을 찾아가고, 정보와 지식에 대한 열망을 실어 세계를 보는 눈으로 돌린 힘! 그것은 현재 국가가 주도하는 개혁(?)에 앞서 주민들이 스스로 자기 열망과 행동에 기반을 둔 변화를 끌어내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주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지식경제’는 ‘자본주의 시장[세계]’을 따라가느냐 하는 더 절실한 생존 문제가 된다. “자기 땅에 발을 붙이고 눈은 세계를 보라”는 정치구호가 있는데, 주민들은 ‘한 발은 조선 땅에 디디고 한 발은 바깥에 나가 있으면 된다’는 식으로 본래 구호의 의미를 깨고 벌써 밖으로 발을 내밀며 정치와 경제에 실리적으로 대응하기도 한다. 북한에서 볼 때, 다른 사람보다 먼저 신기술을 이용한다는 것은 돈이 되는 개방의 길로 나서는 것과 다름없다. 그래서 중국을 통한 지식과 기술의 유입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소위 지식경제와 관련된 기업은 더욱이 새로운 기술도입이 경쟁력이 된다. 새로운 기술은 북한 내부의 힘으로 감당되지 않는 문제이기에 ‘세계를 바라보는’ 바깥 자본주의 시장과의 개방적 교류는 필연적이다. 이런 태도는 미래형이 아니라, 현재형으로 북-중의 접경지역 시장에서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새로운 정보와 지식이 북한시장에 주요 키워드가 되면 될수록, 시장은 구세대가 아니라 시장 새세대가 힘을 발휘하는 방향으로 갈 것이다.

김정은 시대에 와서 ‘지식경제 시대’의 의미를 더욱 강조하는 세대교체가 일어나고 있는데, 그것은 시장화 전진에 필요한 정보와 지식에 대한 요구와 일치한다. 북한은 일찍부터 자본주의 사회와의 관계에서 ‘모기장’을 치고 실리는 챙기겠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변화는 늘 ‘예방적 변화’로 나갔다. 시장의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면서 가는 것 역시 예방적 효과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급진적 변화는 없겠지만 지금 북한은 시장 새세대의 시대로 이행해 가면서 점차 경제적 실리를 더 강조해 가고 있다. 이에 따라 북한은 경제간부들에게 사업성과와 같은 실리주의를 강하게 요구한다. ‘21세기의 태양’이라는 이념적이고 관념적인 구호보다 “경애하는 김정은 동지를 높은 사업성과로 받드는 참된 실천가가 되자” “위대한 김정은 원수님께서 올해 신년사에서 제시하신 강령과업을 철저히 관철하자” 등의 구호를 통해 성과와 실천이라는 실리적 관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고 보인다.

2) 남북불교교류의 성격과 실리적 전망-남북교류에서 불교의 역할을 찾아서

위에서 남북불교교류의 문제보다 더 많은 지면을 북한 변화의 의미를 찾는 데 놓고 논의를 전개했다. 북한 변화에서 시장 새세대와 실리주의의 의미를 놓치면 남북불교교류의 전망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북한사회 변화의 관건인 시장의 자생력을 설명한 세 가지 키워드에서 얻을 수 있는 의미는 시장 변화의 지향성이 정보와 지식과 교육의 문제로 귀결되고 있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는 시장 중심의 변화를 놓고 문제를 판단해야 한다.

신계사 복원 이후, 종단의 남북교류 방향을 북측 사정과 필요에 따른 교류사업을 선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또한 지역적으로도 소통이 편한 평양이나 개성, 또는 조건에 따라 교류 지역을 확산해 가야 한다고 했다.

최근에 민추본은 중장기 대북사업 로드맵 ‘민추본 2.0’에 대한 세부사업으로 대북 인도적 지원사업인 북녘 어린이 영양지원 추진과 함께, 북한 주요지역 교류거점 마련(금강산 지역으로 국한됐던 남북교류를 평양, 개성 등으로 확대해 평양불교문화회관 건립과 개성 지역 사찰 불사를 추진), 남북불교 경협사업(북한사찰 성지순례 관광사업), 남북불교 컨설팅(지역, 역사적 연계성을 발굴한 남북 사찰 간 교류), 북한불교문화재 공동보존사업 등을 추진하는 그림을 그렸다.

통일종책을 고민하는 이와 같은 입안은 매우 의미 있는 시도이다. 그런데 이런 사업들을 보면 북한사회의 실질적 이해 없이는 다가가기 어렵거나, 우리 의지로써 쉽게 선택할 수 없는 일이다. 말하자면 남과 북의 생각 차이가 크고, 눈높이를 맞추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불가능한 과제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또한, 남북불교교류를 북한사회가 시장 중심으로 변화하는 문제와 어떻게 접맥시킬 것인가?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다시 남북불교교류의 성격을 돌아보자.

남북불교교류는 공동행사, 문화사업, 지원사업 등 크게 세 가지의 성격으로 나눠볼 수 있다.
첫째, 공동행사는 합동·공동 법회, 회의, 기념식, 대회를 통한 만남이었다. 이것은 주로 북측의 조선불교도연맹(조불련)과 남측 종단의 교류였다. 양자 만남 또는 세계불교도우회의(WFB)와 같은 기구회의를 통한 삼자 만남은 어떤 의제를 합의하고 교류하는 사업이었다.

둘째, 문화사업은 문화유산 발굴조사, 사찰조사와 실태조사, 단청, 사찰복원, 해외반출 문화재 환수사업 등 남북불교문화의 공동관심사를 통한 교류 사업이다. 신계사, 영통사 복원, 평양 법운암 단청 불사가 대표적이다. 진각복지재단과 관련이 큰 윤이상평화재단은 윤이상의 음악을 매개로 삼아 남북문화협력 교류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셋째, 지원사업은 식량, 생필품, 의료기, 의약품, 피복, 긴급구호품 등 인도적 지원, 농업지원 또는 농업개발이나 환경개선 지원 등이 있다. 이 사업은 대부분의 민간단체가 하고는 것과 비슷한 일로서, 불교계에서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업들이 앞으로의 남북교류사업으로 어떻게 발전할까? ‘민추본 2.0’과 비교해 보면, 협력의 파트너(대방)가 조불련이라는 점에서 별로 변함이 없다. 위 ‘1) 북한사회 변화와 실리주의 추구’에서 고찰한바, 시장변화를 생각하면 조불련의 변화도 예상된다. 왜냐면 북한의 사회단체도 개인처럼 실리주의로 먹고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국가 예산이 배분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신도들의 보시도 없다면 어떻게 조직이 건재할까? 조불련의 위상은 남북불교교류에서 생산적이고 실리적인 의미(이익)가 만들어질 수 있는지가 관건이 된다.

남측의 불교교류 창구가 조불련 위상 보장을 직접적으로 풀 수도 없고, 분배투명성의 문제를 점검하지 않을 수도 없다. 그렇다면 분명히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불교적 문화사업을 포기하자는 것은 아니다. 인적교류와 문화사업은 그것대로 하면서 조불련의 실질적 사업과 연계할 생산적 방안을 찾아야 한다. 지원사업 중에는 평불협의 금강산 국수공장 설립 운영이나 JTS에서 했던 영양식 가공공장(1997~2005) 같은 생산적 지원이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일반적인 인도적 지원의 일환이었다. 북한의 합영법, 합작법과 같은 법적 보장 아래 실리적 기업으로서 생산성이 있어야 한다.

사례를 찾아보면 통일교가 했던 평화자동차 합영사업이 있다. 평화자동차는 순이익을 남겼던 사업인데도 철수했던 건이다. 그 회사의 총사장을 맡았던 한 박사는 종교적 신념이 지나쳐 합리적 경영판단을 하지 못한 점을 실패의 교훈 중 하나로 꼽았다. 이 말은 평화자동차 사업이 종교교류인지 남북경협인지 갈라 판단하기 쉽지 않지만, 양자가 혼합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이것을 타산지석으로 삼는다면 생산적 지원도 북한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기업을 키우는 일과 맥을 같이해야 한다는 판단이 나온다.

위에서 길게 논의했던바, 남북불교교류가 북한 시장변화와 어떻게 궤를 같이할 것인가? 생산적 지원도 생산적 합작, 나아가 합영사업으로 가는 길을 반드시 모색해야 한다. 공짜는 없다. 사찰을 복원하더라고 훨씬 생산적일 수 있는 길이 있다는 뜻이다. 조불련과 합작, 합영하는 불교용품 생산은 내수와 수출(남한 수입 등)이 가능한 좋은 아이템이 될 수 있다. 종단 차원의 남북협력기업을 한다면, 사회적 기업이나 ‘통일문화복지’를 만들어 가는 차원으로 통일종책을 수립한다면, 불교계가 합심하여 기쁘게 동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사례는 이미 나선 지역을 통해서 시험했고 성과를 거둔 기독교계의 사업인 도문기술학교와 백석유한공사가 있었다.

밖으로 눈을 돌려보면 지금까지 남북불교교류는 남한의 눈높이에서 이뤄진 사업이었다. 그래서 현재의 침체는 근본적으로 정권의 탓이 아니라, 북한사회를 이해하는 데 안일했던 불교계의 탓이라 할 만하다. 바꿔 말하면 민간차원의 남북불교교류나 통일운동·통일사업도 북한사회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한반도 미래 전망과 함께 개척해 나갈 때, 역으로 정권의 정책노선이나 국가적 통일 비전도 다르게 실천할 수밖에 없게 만들 것이다.

4. 맺는말

북한사회에서 시장 새세대는 성장 과정에서 형성된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고 행동함으로써 지속적으로 사회에 더 큰 영향을 끼칠 것으로 예상된다. 국가에 의존하는 배급문화가 아니라, “내가 내 돈을 번다”는 시장경제의 주체로 또렷하게 자리매김하는 문화는 시장의 신용과 신뢰를 높여줄 것이다. 이들이 바로 ‘차기 시장’을 주도할 ‘자본주의 시장형 세대’가 된다. 이 점에서 시장 새세대는 주목하고 지켜보아야 할 대상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로는 장마당 구세대와는 다르게 시장 새세대는 ‘시장’에서 생산과 소비, 투자의 개념을 변화시키는 전위가 되고 있다. 그 변화는 북한 시장의 특징을 반영하면서, 동시에 개방을 향한 시장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 놓는다.

시장의 변화가 급진적이지는 않지만, 우리는 밑으로부터 일어난 ‘자생력’에 의한 힘을 보아야 한다. ‘비사회주의 현상’이라는 굴레 속에서 법과 제도가 보장해 주지 않고 시장을 제재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막을 수 없이 흘러왔다. 이 시장화의 과정에서 행방, 경험 축적, 정보와 지식 등은 자생력의 방향을 좌우하는 말이 되었다.

축적된 시장 경험이 점점 시장 2세대로 발전하는 방향이 생기면서, 이제 시장 새세대는 정보와 지식을 통해 새로운 시장이 되는 ‘지식경제 시대’로 진입하려고 한다. 이들의 움직임이 북한 정권의 교육개혁 시도와 맞닿아 있음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북한 정권의 종합시장화와 같은 시장 개혁들은 기실 시장세대들이 개척한 것과 다름없다. 북한 정권이 시장의 변화를 사후적으로 반영함과 동시에 시장을 억제한 현상은 정책적 변화가 바로 북한시장의 ‘자생력’에 기반을 둔 것임을 뜻한다.

이제 북한 변화는 시장 새세대가 큰 변수로 등장했다. 이와 같은 이해 속에서 우리는 남북불교교류의 의의와 전망을 생각했다. 서두에서 민족 기원에서부터 대륙문화의 기질과 변경문화적 소양을 제기했던바, 북한 변화가 북·중 접경지역을 통해 일어나고 있음은 그 자체가 바로 새로운 변경문화가 살아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앞으로 남북교류는 북·중 관계를 주시하면서 남-중-북의 3자구도를 활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또는 남북과 해외의 3자협력이 새롭게 조명받아야 한다. 처음에 남북관계를 열 수 없을 때, 3자협력을 활용했던 경험을 상기하면 더더욱 그렇다. 통일 이후에 한반도의 접경과 변경문화가 그 가운데 싹트고 있는 것도 또 하나의 이유가 된다. 지금부터 그것을 개척해 나가는 일이 바로 새로운 미래의 준비이다.■

 

노귀남 / 동북아미시사회연구소 연구위원. 문학박사.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객원 연구위원, 세종연구소 연구원 등 역임. 주요 논문으로 〈문학의 분단해소와 이북문학의 수용〉 〈북한의 주민생활〉 〈북한의 가정생활〉 등이 있다.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