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령 60호 기념특집 | 불교, 통일을 말하다

1. 머리말

이 글은 1991년 9월 18일 제46차 국제연합(UN)총회에서 대한민국과 동시에 UN에 가입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약칭 북한)’을 대상으로 한다. 그중에서도 북한사회의 종교, 즉 불교에 대해 분단 이후로부터 형성되어온 북한불교의 역사와 그 현황을 고찰하고자 한다.

북한은 ‘민족자주의 사회주의’에 이념적 기반을 두고 있다. 그 안에서 북한의 종교가 가지고 있는 구조는 사회주의 건설에 복무하는 종속적인 하위체계로 구성되어 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주체사상 등에서 이념적으로 종교에 대한 포용적 입장이 취해지면서 종교단체의 사회적 위상도 크게 달라졌다. 북한체제가 공식적으로 종교건물을 짓거나 종교의식을 주민들에게 허용한 것은 그동안 북한체제가 종교에 대해 가장 우려했던 외세 개입의 매개체와 체제의 위협을 줄 요소가 없다고 인증한 것이다. 이러한 진단은 북한의 종교가 북한 체제로 전환이 완전히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러한 증거들은 북한 체제가 내부적 진단하에서 주민들에게 종교를 제한하고 규제하는 것보다 당(黨) 차원에서 종교 활동에 대해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정하고, ‘주민들에게는 신앙의 자유를, 단체에는 활동의 보장을 운용하는 것이 더 효용적이다’라는 정책적 판단을 함으로써 종교 정책에 대한 궤도까지 수정하였다. 그러나 북한의 종교는 아직 헌법상의 하위체계 미비로 인하여 ‘북한식 사회주의’ 안에서 나타나는 종교로서의 제한과 전통문화로서 한계를 지니고 있어서 종교 기능을 독립적으로 수행할 수 없는 실정이다.

더욱이 2012년부터 3대 세습이 형성된 북한에서 종교를 관찰하고 평가하는 것은 대단히 제한적이고 불가능하다고까지 할 수 있다. 특히 북한체제가 지난 반세기 동안 종교에 대해 주민들의 심적 오염원으로까지 규정해온 종교정책의 전향적인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북한종교에 대해 올바르게 평가하기는 어렵다. 또한 그 종교를 종교 본래의 기능적인 측면으로 이해하는 것은 3차 방식을 뛰어넘는 과정과 과제이다.

오늘날 북한의 종교 즉, 불교에 대해서는 북한의 역사서와 그 밖의 출판물 그리고 북한 방문 등의 제한적인 방법을 통해 조망할 수 있다. 필자는 1996년 북한불교계와 처음 접촉하고 2000년도부터 수차례에 걸쳐 평양을 직접 방문하면서 경험하고 수집한 자료를 통해 북한종교와 그 안에 내재한 불교에 대하여 접근할 수 있었다. 또한 북한불교를 이끌고 있는 당사자들과의 교류와 협력을 통해 그들이 지향하는 종교 활동에 동참하는 실질적인 계기를 가졌다. 그러므로 본 연구는 북한불교에 대해 직접 관찰하고 부분적으로 참여해온 것들을 정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2003년부터 4년 동안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에서 세계의 종교문화를 강의한 바 있는 미국 심프슨대학교(Simpson college) 종교철학부 신은희 교수가 “주체사상이 정치적 이데올로기 단계를 거쳐 현재는 북한의 공식 종교가 되었다”고 말한 것과 같이 북한 내에서 존재하는 전통종교에 관한 역사이기보다는 “북한의 국가종교인 주체사상이 스스로를 정립해 나가고, 제도화하는 과정 속에서 잠재적인 경쟁자인 기존 전통종교들을 어떻게 다루어왔는지”에 대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2. 북한불교의 역사와 현황

6·25전쟁 이후, 지금까지 북한불교의 모습은 재일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와 북한에서 발행하는 외국어판 월간 《조선》 《등대》 등 홍보용 잡지와 《우리나라 불교》(1989년판), 조불련 심상진 서기장의 이름으로 출판한 《불교도들의 참다운 삶》(2001년판) 등 관련 도서를 통해 소개된 것이 가장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언론 자료와 출판 도서는 북한불교 즉, 사찰이나 문화재 그리고 스님과 신도 등의 근황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북한불교의 현황을 객관적으로 정리하고 있는 자료는 첫째 《우리나라 역사유적》(1983년판)과 평양의 조선국제여행사가 발행한 《우리나라 관광안내도》(2001년판), 조선문화보존사가 간행한 《조선의 유적유물도감》(전 4권, 2001년판)과 《조선의 절 안내》(2003년판) 둘째, 조불련에서 직접 조사하고 작성하여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민추본)에 전달한 《북반부사찰 단청불사 현황자료》(2002년)를 통해 북한 지역의 사찰 현황을 상세히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2004년 북한에서 발간된 잡지 월간 《조선》(8월호)에 북한 종교계의 현황이 각 종교단체 대표를 인터뷰하는 형식으로 소개하고 있어 이를 통해 그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 1530년(중종 25) 이행(李荇)·홍언필(洪彦弼)이 지은 인문지리서(人文地理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북한 지역의 사찰은 571개이고, 일제 강점기의 통계자료 등에 의하면 403개의 절이 있었다. 그리고 여러 문헌자료를 종합하면, 해방 이전까지 북한 지역에는 1,793개소 정도의 사찰이 존재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해방과 분단 이후, 오늘날까지 북한불교의 현황은 〈표 1〉과 같다. 1991년 조불련 중앙위원회가 집계하고 발표한 것에 의하면, 현재 조불련에 가입된 신도 수는 약 1만 명이고, 1988년부터 불교의 3대 명절을 통한 불교행사 허용과 1992년에 북한의 헌법이 다시 개정되면서부터 전국에서 약 10만 정도의 신도가 이러한 불교행사에 참가한다고 한다. 여기에는 현재 조불련에 소속된 300명 정도의 승려도 포함된 숫자이다. 또한 조불련 소속의 승려들을 제외한 중앙당 소속의 신분인 책임지도원 등으로 직무를 맡고 있는 유물보존총국(한국의 문화재관리국 기능과 유사함), 관광총국 소속의 불교 신도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1) 김정은 시대의 북한불교

지난 2011년 12월 17일을 기해 한반도에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다. 한반도 북쪽의 책임자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에서 김정은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으로 교체되는 순간이었다.

이에 대해,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한국사를 강의했던 카터 에커트(Carter Eckert, 1993~2004년 하버드 한국학연구소장) 석좌교수는 2012년 1월 23일 하버드대에서 열린 ‘북한 김정은 권력승계에 관련한 토론회’에서 “김정일 위원장 사망 후 지금까지 상황은 안정적이며 앞으로도 이런 상황이 유지될 것”으로 예상한 것과 같이 권력 승계 과정에 있는 북한의 상황을 대체적으로 안정적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이런 평가와 같이 남한불교계에는 이때부터 북한사회의 변화에 따른 북한불교계의 향후 진로가 새로운 관심거리로 등장했다. 먼저, 북한의 새로운 권력에 어떠한 방식으로 이미지를 쌓고 인정받을 것인가? 다음은 선군(先軍)정치 등 아버지의 유훈을 그대로 이어받겠다고 천명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시대로의 복무방식을 어떻게 설계하고 실천할 것인가? 그다음으로는 그동안 진행해 온 남한 등 국제교류 관계를 어떻게 추진할 것인가? 이런 문제들이 조선불교도연맹 중앙위원회(위원장 강수린)를 대표로 하는 북한불교계가 향후 풀어가야 할 과제인 셈이다.

부모님의 3년상(喪)을 치르는 전통적인 풍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북한사회의 정서상, 곧바로 북한과 북한불교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때와 같이 대규모의 교류협력으로 확대로 이어질 수 없겠지만, 그 돌파구를 남북한의 교류와 협력에서 찾을 것으로 전망된다. 또한 조불련도 조직 내부의 결속을 다지기 위한 계획을 강구하고 있어 빠르게 교류를 전개할 것으로 보인다.

지금 당장, 북한불교계는 새로운 권력에 대해 신임을 얻기 위한 조치가 필요하게 되었다. 앞으로 조불련의 새로운 권력에 대한 준비와 변화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를 예측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2012년 1월 1일부터 시작된 현지지도에 대한 대비이다. 김정은 제1 위원장의 종교시설 방문에 대한 준비 작업을 꼽을 수 있다. 현지지도를 통해 북한 주민들을 아우르고자 하는 김정은 위원장의 행보로 볼 때, 북한 지역의 사찰이나 문화재를 찾을 확률은 10% 미만이다. 그러나 북한에서 기념일로 정하고 있는 2월 16일~4월 15일까지 봄축전(태양절) 기간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애도 기간, 3년상 등 일정 부문이 정리되면, 그 확률은 30% 가까이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6·15와 8·15 민족공동 행사에 따른 남북 간의 교류 분위기가 고조되고, 이들 행사기간에 필수 코스로 방문하게 되는 문화유적지 등 북한의 전통과 역사 이미지를 고양시킬 수 있는 곳에 대한 정비 차원의 지도방문이 곧 사찰방문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 첫 방문지로 예상되는 곳이 평안북도 묘향산 보현사이다. 바로 인근에 김일성 주석,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기념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국제친선전람관(1, 2관 2동 건물)이 위치하고 있다. 또한 핵시설로 유명한 영변과도 가까운 거리에 있어 지리적인 여건도 좋은 편이다. 다음으로는 강원도 안변 보현사, 석왕사 등 금강산 지역의 사찰을 들 수 있다. 명사십리 해수욕장이 있는 이 지역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상징 꽃 해당화의 서식처이기도 하다. 유훈정치를 실현하는 방법으로 해당화를 보살피는 장면도 가정할 수 있다.

위의 지역들 외에 평양의 광법사도 또 다른 측면에서 주목을 끈다. 1989년 7월 1일~8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평·축)을 기해 복원을 시작하여 1991년 2월에 완공한 평양 대성산 광법사를 김일성 주석이 직접 방문한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평양과 원산, 묘향산 이외에도 자립경제와 남북교역 등에 기울이는 관심을 고려할 경우에는 남북교역의 중심으로 자리 잡은 ‘개성공단’을 생각해 볼 수 있다. 2013년 3월 개성공단 폐쇄조치 이전까지만 해도 개성공단을 방문할 가능성은 희박하였지만, 휴전선의 상황을 보고받기 위해 개성을 방문할 가능성이 현재로서는 가장 높은 곳이기도 하다. 이때 개성 시내의 박연폭포와 더불어 관음사, 안화사 등 전통사찰과 더불어 새로이 복원된 영통사가 방문 코스로 선정될 수도 있다.

둘째로는 지금까지 국제적인 관심사항이 된 분야의 보고 체계와 더불어 이에 대한 홍보작업이다. 그중에서 남북 공조에 의한 민족의 약탈 문화재 환수사업을 꼽을 수 있다. 1906년 일제 강점기에 강제 약탈당했다가 2006년 3월 1일 서울-개성으로 인도되어 함경북도 김책시 길주군에 다시 봉안된 ‘북관대첩비’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07년 중순경에 직접 방문한 사례가 그 대표적이다.

셋째로는 1999년 조불련 스님과 책임자들이 모두 이름을 교체하는 등 새로운 체제에 대한 조직적 결의를 보인 것과 같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3년상이 끝날 무렵을 기해 조직적인 변화의 모습도 예상할 수 있다. 당시 조불련의 박태호 위원장은 박태화로, 황병대 부위원장은 황병준, 심상련 서기장은 심상진으로 개칭한 바 있다.

넷째로는 분단 이후, 조불련의 역사에서 가장 고위급 인사가 위원장에 선출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12년 11월 취임한 제6대 강수린 위원장은 국제적십자사연맹(IFRC)에 등록된 북한의 조선적십자회 중앙위원회 위원장직을 겸하고 있는데, 이는 그동안 박태호 위원장 등이 명목상 또는 종교부문의 활동에 국한되었던 것에 비해 국제 및 국내 정부기관의 수장이 조불련의 대표를 맡은 것은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다.

2) 북한불교의 역사

분단 이후에 만들어진 북한의 불교는 조계종, 태고종 등 여러 종단으로 나뉜 남한불교와 다르게 ‘조선불교도연맹 중앙위원회(약칭 조불련)’라는 조직으로 단일화되어 있다.

해방 이후 북한 지역에는 1945년 11월 26일 창립한 북조선불교도총연맹과 북조선불교연합회가 활동하였다. 북조선불교도총연맹은 당시에 ‘불교의 통일단결과 신앙의 자유’를 주요한 강령으로 정하고, 초대 위원장에 김세율(金世律), 부위원장에 한춘(韓橁), 장상봉(張祥鳳) 상무위원에 김세율, 유보암(柳寶庵), 한영규(韓永圭) 스님 등 16명과 중앙위원에 김세율, 김해진, 장범석 스님 등 30명을 선출하는 등 연맹원 총 375,438명으로 결성되었다. 이어 총연맹은 1946년 12월 26일 단체명을 조선불교도연맹 중앙위원회로 변경하고 통합조직을 건설하였다.

조불련은 1945년 11월 26일 결성된 ‘북조선불교총연맹’을 모체로 1955년경에 조직을 체계적으로 정비하고, 각 시도위원회를 조직화하는 등 북한불교를 공식적으로 대표하고 있다. 초대 위원장에는 김세율 스님을 선출하였으며 1948년 이후 김숭격 스님으로 위원장이 교체되고, 1963년부터는 2대 안숙용 위원장이 1978년까지 활동했다. 그러나 안숙용 위원장이 1980년 9월 조불련에서 해임되었다는 내부 기록을 보아 조불련 조직 운영이 자체적으로 이루어지기보다 당 차원의 영향을 받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경향은 1967년부터 기존의 사상·문화담당 간부들에 대해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고, 김일성주의로서 주체사상을 옹립하기 위해 기존의 문화전통과 역사적 인물에 대한 비판적 재평가 작업을 단행하는 등 사회주의의 독자성을 구축하기 위한 ‘북한식 문화혁명’에 복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도 해방 직후의 상황을 언급하며, 당시 종교에 대한 탄압이 지나칠 정도로 강하게 전개되고 있었다고 기술되었다.

당시 북한사회에서 종교에 대한 견제 내지 탄압이 매우 높았던 상황으로 볼 때, 조선불교도연맹은 그 출발이 전통적으로 내려온 종교적인 계보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당시 정치적인 국면과 북한의 사회주의 체제 속에서 탄생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조불련의 조직체계와 강령(종헌·종법), 교구와 사찰운영 등은 남한의 제 종단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오늘날의 북한불교 역사인 조불련의 역사는 3대 위원장을 맡은 학림당(鶴林堂) 박태호(朴泰鎬) 대선사로부터 시작되었다. 1979년 5월 5일부터 위원장을 맡아오던 박태호 대선사가 2005년 11월 11일 갑자기 입적하게 됨에 따라 2006년 5월 8일을 기해 취임한 4대 위원장 유영선 대선사가 2007년도 말까지 공식적으로 활동했다. 그 후 조불련 내부 승진의 형태로 당시 서기장과 부위원장을 역임했던 심상진(沈相鎭) 대선사가 5대 위원장으로 취임하여 2008년 7월 30일부터 2012년 10월까지 위원장을 맡았다. 제6대 강수린 위원장은 조선아시아태평양 평화위원회와 해외동포 원호위원회 등에서 조직 활동을 한 인사로, 2012년 11월 19일부터 조불련 중앙위원회 위원장을 맡았으며 조선적십자사회 위원장직을 겸하고 있다. 그간 조불련을 이끌어 온 역대 위원장은 다음페이지의 〈표 2〉에 나타난 것과 같다.

1980년대 말부터 북한불교는 광법사, 정릉사 등 사찰복원과 함께 불교학원(佛學院)을 통한 승려교육(1989년), 조불련 전국신도회라는 불교 신도조직의 신설(2003년) 등 내부조직 강화와 그리고 대외적인 문화교류에 적극 나서게 된다. 1991년 10월 미국 LA에서 분단 이후 처음으로 ‘조국통일기원 남북불교도 합동법회’를 개최하는 등 국제교류를 추진하면서, 북한 내에서도 불교 명절 행사 등을 주기적으로 개최하였다.

특히, 1989년 7월 3일 평양에서 개막된 ‘제13회 세계청년학생축전’(일명 평양축전)과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북한종교계와 더불어 조불련의 역사는 새로운 전환기를 맞았다. 이로부터 2008년까지 3·1절 민족대회→6·16와 8·15 민족대축전→10·3 개천절 민족행사로 이어진 남북 간 교류에 적극 참여하면서 한편으로, 2000년 10월 9일~14일까지 조선노동당 창건 55돌 기념행사에 참가한 남측 13개 정당·사회단체들과의 공식적으로 교류를 가졌다. 이어서 2002년 8·15 민족통일대축전에 조불련 박태화 위원장이 서울을 공식 방문했으며, 2003년에는 3·1 민족대회 서울행사에 참가했다. 또한 개성 영통사와 금강산 신계사 복원사업 그리고 교류의 파트너십을 이룬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2005년 법장 스님, 2007년 지관 스님, 2010년과 2011년 자승 스님)이 평양을 방문하면서 남한불교와 활발하게 교류하게 된다.

이러한 교류 활동은 분단 이후 최초로 1986년 9월 2일~5일까지 스위스 글리온에서 세계교회협의회(WCC) 산하 국제문제위원회(CCIA) 주관으로 남북 기독교인들이 남북교류를 시작한 이래, 남북한 불교가 대규모로 문화 및 종교 분야에서 이룬 실질적인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남북한의 불교계가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힘을 합쳐 공동협력 사업으로 추진한 것은 분단 이후 최초의 대규모 사업인 민족문화재의 복원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3) 조불련의 조직체계

북한의 조선불교도연맹은 북한의 종교정책을 총괄하고 있는 조선노동당 조국통일전선중앙위원회 제6국의 관할하에 있다. 북한 종교단체의 주요사업은 1962년부터 사회안전부의 소관사업으로 분류되었다. 제3국과의 종교교류와 협력사업 추진, 승려교육 및 사찰관리 등을 주요한 업무로 맡고 있으며,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교류와 협력사업 업무가 재조정되었다. 그리고 북한의 공식기관인 민족경제협의회는 남북 간 경제협력 등, 조선아세아태평양평화위원회(아·태)는 대외정보와 금강산 경협 및 경제특구 등 대규모 경협사업 등, 민족화해협의회는 문화·예술, 종교 등 NGO와의 교류 및 인적교류를 관장하고 있다.

이러한 기관 업무의 변화에서 볼 때, 조불련은 종교단체와 사회단체의 역할을 동시에 하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불교》(1989년판)에는 종교단체가 “독자적인 조국통일과 부강조국건설에 유익한 진보적인 종교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기술되어 있다. 〈표3〉과 같이 형성되어 있는 북한의 종교단체에서 불교단체 즉, 조불련의 조직체계는 〈표4〉와 같다. 조불련 중앙위원회에서 모든 업무를 관장하고, 서기국에서 담당업무를 조율 시행하고 있다. 별도 기구로 승려 교육기관인 불교학원(佛學院)과 법계자격고시위원회를 두고 있다. 이들 기관은 현재, 평양시 모란봉구역 흥부동에 위치한 조불련 청사 내에 설치 운영하고 있다.
조불련의 공식적인 임원으로는 조불련을 대표하는 위원장 1인과

* 2008년 기준

※ 위 자료는 월간지 《조선》(2004년 8월호)을 참조하고, 필자가 조불련 정서정 서기장 등 조불련 관계자들을 2005년과 2008년에 걸쳐 직접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임.
※ 조선중앙통신사, 《조선중앙연감》(1989년판); 미주한국불교 창간호(1995.11.1.) 참조함

그를 보좌하는 부위원장 약간 명을 추대 선출하고 있다. 위원장을 보좌하는 부위원장은 다소 유동적인 경향이 짙어 보인다. 1980년대까지는 홍화두 고문이 맡기도 하였으며, 그 후에는 2004년 입적한 금산(錦山) 황병준 대선사가 부위원장을 맡았다가 공석이었고,심상진 부위원장에 이어 2011년부터 연암 리규룡 부위원장이 맡고 있다.

모든 사무행정을 총괄하는 서기국 산하에는 조직부, 포교부(신설), 교육부(교양부에서 개칭함), 국제부, 경리부가 별도 부서로 나뉘어 있다. 현재 조불련에는 강수린 위원장과 리규룡 부위원장, 차금철 서기장을 비롯해 리승한 교육부장, 한성기 국제부장, 혜안 리영호, 청담 류인명 책임부원이 업무를 맡아 활동하고 있다. 차금철 서기장은 2004년부터 원불교와 관련된 업무도 같이 관장하고 있다.

〈표 4〉 조선불교도연맹 조직(2012.11.19일 기준)


각 부서의 관장 업무를 살펴보면, 조직부는 중앙 및 시·군 위원회의 조직업무와 인사업무를 관장한다. 교양부에서 개칭된 교육부는 법계자격고시 운영 등과 불교교육을 주관하며 승려교육과 교리학습 등을 관장한다. 2003년 새로이 신설된 포교부는 각종 법회(염불) 등 불교행사를 주관하며 염불교육 등을 관장한다. 국제부는 대외업무와 각종 대회 및 행사 개최 때에 의전 업무 등을 관장한다. 경리부는 조불련의 재정 및 경리사무를 관장한다. 그리고 경제적 자립과 국제교류 등을 목적으로 2004년 12월 조불련 안에 설립된 ‘불련무역회사‘가 별도 기구로 활동하고 있다.

각 시·군의 불교조직은 시·군 위원회라는 명칭으로 전국 10개 시·도당 조직과 50개 시·군별 조직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도 조직과 구성·운영에 관한 사항은 2003년 12월 새로이 조직된 조불련 전국신도회가 주도하며, 조불련 서기국과 협의를 통해 각종 교류행사 등을 진행한다. 회장-부회장-위원-신도의 조직구성 체계를 갖추고 있다.

운무(雲舞) 라영식 회장, 안심행(安心行) 리현숙 부회장을 중심으로 성죽(星竹) 리명희 위원, 신정애 위원 등과 성각(成覺) 정영호 평양시 신도회 회장이 활동하고 있다.

조불련의 주요사업은 〈표 5〉와 같이 첫째, 한국을 포함한 제3국과의 종교교류 둘째로는 북한종교의 실질성 확인, 셋째로는 승려교육 및 사찰관리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들을 꼽을 수 있다. 특히 조불련은 외형적이든 내면적이든 다양한 각도에서 남한 등 국제 교류와 협력을 추진하고 있다.

이상에서 볼 수 있듯, 오늘날의 북한불교를 이끌고 있는 조불련이 현재 남북불교의 교류와 협력에서 실질적인 파트너이다. 그러므로 교류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전후 2세대로 분류되는 조불련 4대 유영선, 5대 심상진 위원장의 시기부터 변화된 북한불교의 위상을 제고하고, 종교적인 교의체계를 더욱 갖출 수 있도록 종교조직으로서의 기반조성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조불련이 체계를 갖추어야 북한불교의 종교적 기능과 역할도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4) 북한 승려의 법계제도

북한에서 승려가 되는 절차는 김일성종합대학 종교학과를 졸업하거나 각급 기관에서 간부로 활동을 한 사람 중에서 불교학원, 지방순회 강습소에서 불교교육을 이수한 경우이다.

불학원(佛學院)의 입학 자격은 고등중학교 이상의 학력을 소지하고 각 도와 시, 군, 노동자구에 속한 지역 사찰과 연관이 있거나 조불련의 도·시·군 위원회에서 추천하면 조불련 중앙위원회가 최종적으로 선발하게 된다.

그러나 예비승려(교역자)가 불학원을 마치고 조불련의 공식 승려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법계자격고시위원회가 주관하는 자격심사를 거친 다음, 비로소 조불련의 임원 내지 사찰의 주지 등에서 승려의 자격으로 활동할 수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자격고시에 합격한 자에 한하여 승려증을 발급하는데, 여기에는 교구본사명 대신에 ‘조선불교도련맹중앙위원회’와 함께 ‘은사 ○○○(이름은 속명 표기방식)’라는 내용이 표기된다.
조불련 중앙위원회가 주최하고 법계자격고시위원회가 주관하는 ‘법계자격고시’는 부정기적이지만 통상적으로 4년마다 열린다. 북한불교의 법계는 1965년 삼수갑산 중흥사에 4년 학제의 불교학원(佛學院)이 공식 설립되면서 품수되었으나, 1991년 평양 대성산 광법사가 총본산으로 건립되고 이듬해에 이곳으로 옮겨온 불학원의 승려교육 시행과 함께 법계고시위원회를 설치하면서부터 체계화되었다.

북한불교 승려의 법계는 대선사-선사-대덕-중덕-선덕의 5품계로 나누어져 있다. 법계자격고시 내용은 서류 자격심사, 염불습의, 경전해석, 역사 및 불교교리 이해 정도 등과 개인적인 도덕성과 불교발전에 대한 기여도 등을 같이 포함하고 있다.

선덕과 중덕의 법계 자격의 기준은 25세 이상 남자, 대학졸업자, 불학원 수료자, 승납 10~15년, 3~5년의 안거(선사 5~8년)를 마친 사람에 한하여 자격고시 등과 개인적인 도덕성과 불교발전에 기여한 정도를 바탕으로 선덕과 중덕의 법계를 품수한다. 또한 대덕의 경우는 일정한 자격기준에 이르면 법계 응시자격을 부여받는다. 대선사와 선사의 경우는 중덕과 대덕 법계의 품계를 가진 자에게 응시자격이 부여된다. 특히, 대선사와 선사 법계는 선사의 법계 자격에 해당하는 자와 불교발전과 국가발전에 크게 기여한 자를 심사하여 결정한다.

한편, 대선사의 경우는 도덕적, 윤리적으로 덕망을 얻은 자를 선정 추천하며, 국가와 불교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은 자는 법계자격고시를 거치지 않고서도 법계를 받을 수 있다. 2012년 11월 19일, 조불련 중앙위원회 제6대 위원장으로 선출된 강수린 신임 위원장이 국가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대선사의 품계로 위원장에 선출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강수린 위원장과 비슷한 경우로, 제4대 위원장으로 선출된 성보 유영선 대선사가 국가와 불교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공식 선출된 바 있다. 유영선 위원장은 조불련 중앙위원회 상무의원으로 재직하면서, 1995년 남북불교 교류의 직접적인 계기를 만들었고, 교육성 등 국가기관에서 역할을 수행한 바 있다. 강수린 제6대 중앙위원장의 경우도 국가발전과 남북 간 교류협력에 의한 불교발전에 기여한 공로가 있어 대선사의 법계를 품수 받고 위원장으로 선출된 예이다.

북한불교에서는 비구니 제도를 공식 인정하지 않고 있다. 또한 교의적 체계를 이루고 있는 승려 법계에서 사미와 사미니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오늘날 북한 승려들에서 법계를 받은 해당 인물은 다음의 〈표 6〉과 같다.
한편, 북한의 승려들이 법회와 각종 행사에서 입는 법복은 흰색 동정을 단 검정색 및 회색 2종의 두루마기와 홍가사(紅袈裟) 또는 낙자(絡子, 남한의 5조 가사와는 다름)를 상의로 착용한다. 2000년대 이후부터는 낙자 착용을 없애고, 회색 장삼에 홍가사를 수하는 것이 공식 법복 형태이다. 평상시에는 법복 착용보다 양복 또는 인민복 차림의 평상복을 입고 있으나, 국가기관 행사를 제외한 각종 모임이나 행사에는 법복을 착용한다. 그러나 보현사의 경우, 1998년 이후부터 사찰에서 수행하는 스님들은 사찰에서는 평상시와 상관없이 모두 법복을 착용하고 있다. 특히 조불련 위원장 박태화 대선사는 연맹 사무실 등에서 손님 접견 시 회색 장삼(남한과 동일한)을 착용하고 있다.

그리고 북한 승려들의 삭발은 2000년 10월 당시 연맹 심상진 서기장에 의하면, 불교계의 통상 관례인 삭발보다 개개인의 ‘자율적 의지’에 의해 삭발을 하거나 짧은 머리를 하고 있다고 한다. 사찰 행사 시 중요한 불교의식인 염불은 《반야심경》 독경을 주로 하고 있으며, 1998년 11월과 2000년 11월 평양 광법사에서 개최한 윤이상 선생 천도재 및 추모법회에서는 삼귀의와 《반야심경》 《천수경》 독경이 행해졌다. 연맹 소속으로 염불의식을 가장 잘하는 승려는 연맹에서 근무하고 있는 혜안 스님 외 2, 3명의 스님이 꼽히고 있다. 염불습의는 개인 사사 또는 불학원에서 일정한 교육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사찰의 불기(佛器)인 향로와 촛대는 과거부터 전해진 것들과 근래에 생산된 텅스텐류를 사용하고 있으며, 향과 초는 남한의 장엄물로도 사용되는 향과 초와는 사뭇 다르다.

이 외에 사찰 의식에 사용되는 향, 초 등 기본적인 불교용품이 묘향산 보현사 경내 매점 등에서 관광용품으로 판매되고 있으며, 기업소(한국의 생산업체와 동일함)와 제작자가 이를 생산해 공급하는 등 공급과 소비의 과정을 통해 불교문화의 전승을 이루고 있다.

5) 북한의 문화재 관리

북한의 문화재 관련법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문화유물보호법(1994.4.8)’을 기본으로 하여, ‘명승지의 보호관리 및 이용에 관한 규정(1990)’ ‘천연기념물의 보호관리에 관한 규정(1990)’ ‘역사유적과 유물보호에 관한 규정(1992)’이 있다. 헌법 제41조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사회주의 근로자들을 위하여 복무하는 참다운 인민적이며 혁명적인 문화를 건설한다. 국가는 사회주의적 민족문화건설에서 제국주의의 문화적 침투와 복고주의적 경향을 반대하며 민족문화유산을 보호하고 사회주의 현실에 맞게 계승발전시킨다”고 한 것과 같이 문화재 관련법도 그와 같은 원칙을 포함하고 있다.

북한은 문화재 보호에 있어 원형 유지를 기본원칙으로 하고 있다. 북한의 문화재 복구와 개건은 역사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 고조선-고구려-발해-고려 유적을 복구하는 데 집중하였다. 여기에는 당성, 노동계급성의 원칙과 역사주의 원칙을 철저히 지키고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 문화건설에서 생활풍습이나 민속유산들은 원형보존보다 상당 부분이 개량화되었으며, 중요 유적들은 복구개건 과정을 통해 제모습을 잃은 것이 아쉬운 점이 있다.

북한은 국보 50점, 보물 53점, 사적 73개소, 명승지 19개소 천연기념물 467개소 등 총 712점을 문화재로 지정하고 있다. 총 176점의 북한 지정문화재 가운데 불교문화재는 58점으로 약 33%를 차지한다. 국보급 문화재 50점 중에서 19점, 보물급 문화재는 53점 중 35점, 그리고 사적 73점 중 4점이 불교문화재이다.

남한과 비슷한 숫자의 불교문화재를 보유한 북한이 그들의 선정 기준을 통해 지정을 하였지만 묘향산 보현사에 소장된 팔만대장경판 인쇄본과 별종 사중 목판이나 고구려 불상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원오리 소조불, 남방불교의 불상 양식인 금강산 출토 아미타삼존불 등 역사적, 미술적 가치가 뛰어난 많은 작품이 국보 지정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음은 안타까운 현실이다.

북한의 불교문화재 중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것은 다라니 석당이다. 다라니의 경문을 돌에 새겨 당간지주와 같이 세운 것으로 남한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나 북한 지역의 평북 용천다라니석당(龍川陀羅尼石幢), 황해도 해주다라니석당(海州陀羅尼石幢), 개성 현화사 당간지주(玄化寺 幢竿支柱) 3기만 현존한다.
또한 북한의 지정문화재 중 불교문화재에 속하는 목조 건축물은 24%에 이른다. 1987년도부터 묘향산 보현사 복원과 1993년 평양의 정릉사 복원에 이르기까지 북한의 전통문화 전승은 남한의 경우보다 체계적이라 할 수 있다. 단청 및 목조 건축술 등에서 보이는 기술은 남한 사찰은 대개가 일반인의 사업적인 측면에 의해 복원되고 있으나, 북한은 정부 차원으로 ‘유물보존총국’을 두고 지원금에 의한 대규모 복원 방식을 취하고 있다. 새로이 복원한 개성의 안화사의 경우는 남한의 전통문화재 수리 기술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수준이다.

종교를 부정하는 북한의 입장에서는 불교의 대표적인 상징인 불교경전을 비롯하여 불상도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지 않다. 불교문화재에 대한 평가는 순수한 의미의 학술적인 분석이나 가치판단이 아니라 실용적인 목적에 그 기준을 둔다. 즉 대부분의 사찰은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관광지화, 휴게소화되어 있다. 북한은 1950년대 말부터 유적지를 유원지로 개발하여 ‘인민들의 문화휴식처’라고 하여 노동자들의 애국사상을 고취하는 장소로 제공하는 입장에서 사찰을 공개하고 있다.

6) 북한의 현존 사찰 현황

북한은 해방 직후부터 민족문화의 건설이라는 기치 아래 ‘주체성의 원칙’ ‘대중성(인민성)의 원칙’ ‘현대성(반복구주의)의 원칙’ ‘역사주의(유물사관)의 원칙’에 입각하여 사회주의 이념에 배치되는 문화재는 문화재적 가치가 없는 것으로 평가한 반면에, 사회주의 건설에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문화유산은 발굴 보존하고 있다.

특히, 묘향산 보현사의 경우처럼 하나의 문화재 명칭으로 국보를 지정하는 포괄적 지정방식을 채택하고 있다.(보현사는 국보 22호)

북한에서 사찰이 인정받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첫째, 문화재로서 가치이다. 김일성은 “이 절간을 가지고 불교를 선전하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민들의 슬기로운 건축술의 전통을 후대들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언급하였다. 둘째는, 과거에는 ‘봉건 통치배들의 유흥지’였으나 이를 인민들에게 돌려준다는 명분으로 ‘근로 인민들의 즐거운 문화휴식터’ 또는 ‘소년단의 야영지’로 활용하는 휴식공간이다. 셋째는, 관광적인 기능과 역사 유적지로서 가치이다. 이와 같이 해석되고 있는 북한의 사찰은 그들의 독특한 정치 체제 속에서 역할이 축소되어 있지만, 불교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는 없다.

조불련이 1989년에 발간한 《북한의 사찰》에는 대표적인 16개 사찰이 컬러 화보로 실려 있다. 또한 《조선중앙년감》(1985년판)과 《북한학보》(13집)에는 총 44개의 현존 사찰을 소개하고 있고, 불상·석탑·범종·석당·석등 등 문화재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 지역의 현존사찰은 〈표 7〉과 같이 《우리나라 역사유적》(1983년판)과 조불련중앙위원회가 직접 조사하고 전달한 《북반부 사찰 단청지원 관련한 자료》(2002년)가 가장 구체적인 자료라 할 수 있다.

3. 맺음말-북한불교의 발전방향 모색

북한 주민의 종교적 심성을 키우는 일의 필요성
북한의 종교정책이 2000년에 가까워지면서 서방세계에 적극적으로 개방화 정책을 취하게 된 배경에는 종교를 대외교류 창구로 활용하려는 의도까지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북한종교의 현실적 문제


※ 《우리나라 역사유적》(1983년 북한판), 《북한불교연구》(신법타, 2000년), 북반부 사찰 단청지원 관련한 자료(조불련중앙위원회, 2002년) 등을 토대로 재구성한 것임.

는 당국 차원에서나 법적으로 종교의 자유를 공식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세기 동안 종교인의 혜택을 누리지 못한 북한 주민들에게 종교적 심성이 부재한 것이 한계일 수밖에 없다.

종교학자 막스 뮐러(Max Muller)가 “종교가 제도화될 때 특히 그것이 강력한 국가의 종교가 되었을 때 낯선 세속적인 요소가 원래의 토대를 침해하며, 인간의 이해관계는 그 종교의 창시자가 그의 가슴에 품었던 순수성과 단순성을 해친다.”고 주장했듯이, 북한 주민들이 현재까지 종교에 매력을 갖지 못하고 있는 문제점은 향후 통일시대에 있어 불교계의 근본적인 목적임과 동시에 과제이다.

그러나 현존하는 북한 지역의 사찰과 불교문화재가 남아 있고, 그리고 1만 명을 넘는 불제자들이 신행 생활을 하고 있으며, 북한의 지도자들이 종교와 불교에 대해 새롭게 이해하려는 시도들로부터 남북한 통합불교의 불씨를 되살려 낼 수 있을 것이다.

종교의 유연성을 통한 북한불교의 변화 유도

위와 같이 살아 있는 북한불교의 모습이 종교적인 교의체계를 모두 갖춘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그동안 위원장, 부위원장, 서기장 등 직함을 사용하던 관례는 2000년 10월 9일~13일까지 노동당 창건 55돌을 기념하여 평양을 방문한 42명 남측 참관단의 일행인 조국평화통일불교협회(평불협) 회장 법타 스님에게 당시 김영성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이 평양 순안공항 배웅인사에서 “법타 스님, 이제 중선생이라고 하지 않고 스님으로 불러야 하겠습니다.”라고 말한 때부터 호칭이 공식적으로 통용되었다. 그간 스님들에 대해 중선생, ○○선생 등으로 부르던 것이 ○○스님으로 부르고, 조불련 조직 내에서도 법명의 사용과 더불어 2002년부터는 대선사, 선사의 법계를 대외업무 등에서 공식 사용하면서 정착되었다.

반세기 동안 북한에서 형식적인 모습으로만 존재해왔던 북한불교가 종교업무를 담당해온 분들에 의해 시나브로 종교의 모습과 내용을 채우고 있다. 그리고 홍화두, 박태화, 황병준 대선사 등 1세대에 이어 2세대가 전통과 문화, 역사를 잇고 있으며 그 제자들이 종단과 사찰 활동을 담당하고 있다. 이를 계속 이어갈 수 있도록 한국불교계의 역할과 불자들의 노력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결국, 북한사회의 불교는 북한의 종교정책이 점차 유연해지고 불교의 기능과 역할이 주민들 중심으로 나타날 때, 독립성과 자율성을 가진 불교 교단으로 재탄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현재의 북한불교 조건 고려할 것

2012년부터 3대 세습체제를 구축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의 시대를 맞고 있는 북한불교로서는 주요 사찰들과 문화재를 보수하고 잘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기독교, 가톨릭 등 여타 북한종교에 비교해 유리한 조건을 갖고 있다.

2013년의 경우에는 만경대혁명학원, 제105탱크사단, 용성기계연합기업소 등 방문 소식을 전하는 조선중앙통신의 보도 내용이나 현지지도 과정을 담은 사진 액자, 그리고 2013년 4월 26일 원산농업대학을 방문한 기념으로 세워진 표지석(돌비) 등을 보더라도 불교에 관한 특정 기념일과 함께 북한지역의 67개 현존사찰을 모두 관장하고 있는 조불련은 앞으로 언제 어떤 곳에서라도 북한의 최고책임자에게 종교 시설과 조직의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주고, 북한 당국에 직접 어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

그럼에도, 2013년에 들어와서는 서구에서 신(新)학문을 접한 김정은 노동당 1비서 체제하에서 조직의 경제적 자립과 체제적인 복무를 강요받고 있다. 이것은 무한 권력자로부터 그 필요성을 인식 받아야 하고, 사회 내에서도 종교가 북한 당국으로부터 ‘선택적 인증’이나 주민들로부터 ‘실질적 참여’가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함의(含意)를 내포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일제 강점기로부터 광복과 한국전쟁으로 이어진 역사적 과정에서 북한사회에서는 새로운 종교의 출현이나 참여가 불가능하다는 종래의 평가를 재조명하고, 2000년대 이후 남북 종교 간 교류와 협력에 실질적인 이해당사자로서, 통일과정에서 유발할 수 있는 사회갈등과 심리적 상실감을 극복하는 데 종교의 새로운 영역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높아지고 있다. 또한 앞으로 북한의 조불련중앙위원회가 북한사회 체제 내에서 스스로 변화의 조건을 형성할 수 있도록 남한불교계의 지속적인 노력이 전개될 때, 북한 종교 내지 불교가 종교 고유의 목적과 활동을 보장받는 독자적 활동과 영역 구축이 가능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

 

  이지범 / 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 1984년부터 학생운동, 불교 민주화운동을 하다 해인사로 출가했다. 환속 후, 1993년말부터 북한의 종교와 불교를 연구하고 있다. 또한 2011년 고려 초조대장경 판각 천년의 해를 맞아 천년 기념 행사를 총괄했으며, 초조대장경 복원사업의 도감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 《고려대장경의 비밀》 《남북불교의 흐름-남북불교교류60년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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