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령 60호 기념특집 | 불교, 통일을 말하다

1. 북한 종교의 이해

1) 북한 종교지형의 이해

북한 종교에 대한 기본적 이해는 북한사회주의 체제하의 종교 현실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북한의 종교 현실을 파악하기 위해 북한사회주의 체제와 종교정책 변화를 주시할 필요가 있다. 북한의 종교 관련 자료는 제한적이지만, ‘체제자료’ ‘정보자료’ ‘방문자료’ 등을 통해 북한 종교에 대한 대체적인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 사회과학원 연구원인 리우펑(劉澎)은 〈중국 정교관계의 특징과 발전〉이라는 논문에서 정교 관계의 유형을 정교일치형, 정교분리형, 국교형, 국가가 종교를 지배하는 형 등 4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리우펑은 중국의 정교 관계를 ‘국가지배형’으로 분류하고 있다. 북한의 경우, 시기별로 그 형태를 달리하고 있지만, 1980년대 이후의 북한은 중국과 마찬가지로 ‘국가지배형’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국가적 차원에서 주체사상에 바탕한 종교관을 보여주며, 국가의 이념을 실현하는 하부구조로서 종교기구가 조직되어 있다.

김일성은 1972년 12월 25일부터 개최된 최고인민회의 제5기 1차 회의에서 사회주의 헌법을 채택하고 그에 기초하여 국가지도기관을 새로이 구성하는 전환점을 마련하면서 “사회주의 헌법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자주적인 사회주의 국가로 선포”했다. 그 이후 북한은 1980년대와 1990년대 국제종교연합체의 공식적인 모임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종교활동을 국제적으로 확대해 나가는 노력을 경주하였다. 이러한 북한 종교의 대외적 활동은 사회주의 헌법을 1992년에 개정하면서 “공민은 신앙의 자유를 가진다. 이는 종교 건물을 짓거나 종교의식을 거행하는 것으로 보장된다. 누구든지 종교를 외세를 끌어들이거나 국가사회질서를 해치는 데 이용할 수 없다”라고 명문화하였다. 이를 토대로 종교의식의 거행하고 종교활동을 할 수 있는 장소 확보라는 현실적 가능성의 길을 열어 놓았다. 제한적으로 “종교를 외세를 끌어들이거나 국가사회질서를 해치는데 리용할 수 없다”는 규제를 명시하였으나, 종교와 신앙의 자유에 대한 규제 및 통제에서 폭넓은 자유를 부여하는 법을 제정하였다. 물론 이러한 조치가 1988년도에 건립된 북한의 교회(봉수교회, 칠골교회)와 성당(장충성당)의 존재를 합리화하기 위한 것으로 치부할 수도 있으나 북한사회의 변화를 분명히 드러내 보여주는 것임에 틀림없다.

김일성 사후 김정일 시대의 개막을 본격화하기 위해 헌법을 대폭 수정하였는데, 1998년 9월 5일 최고인민회의 제10기 1차 회의에서 개정된 헌법에서는 주석제를 폐지하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를 신설하여 권력구조에 대한 대대적인 개편이 이루어졌다. 북한이 헌법에서 명문화하고 있는 종교에 대한 조항은 ‘제5장 공민의 기본권리와 의무’ 중 제66조의 “17살 이상의 모든 공민은 성별, 민족별, 직업, 거주기간, 재산과 지식 정도, 당별, 정견, 신앙과 관계없이 선거할 권리와 선거받을 권리를 가진다”는 조항과 제67조의 “공민은 언론, 출판, 집회, 시위와 결사의 자유를 가진다. 국가는 민주주의적 정당, 사회단체의 자유로운 활동조건을 보장한다.”에서 포괄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제68조 조항 가운데 ‘누구든지’라는 단서 조항을 삭제하여, 보다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법 조항으로써 종교의 자유 인정을 공고히 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사회주의 헌법의 변화와 함께, 북한사회 전반에 걸쳐 종교에 대한 긍정적, 객관적 사실을 바탕한 새로운 표현들이 나타났다. 북한의 종교 해석이 어떻게 표출되고 또 그 양상이 어떤 변화를 보이고 있는지 사전적 정의(辭典的 定義)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현대조선말사전》(1981년판)과 《조선말대사전》(1992년판, 2007년 증판)의 종교 관련 항목 비교분석 결과를 보면, 《조선말대사전》에서는 종교에 관한 부정적 기술이나 평가를 없애고 사실적인 기술을 추가하였으며, 특히 종교와 미신을 동일시하던 과거의 입장을 탈피하여 양자를 분명히 구별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변화를 보여준다.

《현대조선말사전》은 종교를 ‘반동적인 세계관’을 표명하고 있는 것으로 “종교는 인민대중의 혁명의식을 마비시키고 착취와 억압에 무조건 굴종하는, 무저항주의를 고취하는 아편”이라고 부정적으로 규정하였다. 《조선말대사전》은 종교에 대해 이를 “초자연적이고 초인간적인 존재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 또는 믿음을 설교하는 교리에 기초하고 있는 세계관”으로 객관적인 서술을 하고 있다. 반면에 미신에 대해서는 이를 “과학적 세계관을 가지지 못하고 문화적으로 깨여나지 못한 사람들이 자연과 사회의 사물현상을 어떤 초자연적인 힘과 그것에 의한 것이라고 맹목적으로 믿는 것”이라고 하여 뚜렷이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조선말대사전》은 종교의 역할에 대해서도 이를 ‘억압, 착취하는 도구’나 ‘침략하는 사상적 도구’ 그리고 ‘혁명의식을 마비시키는 아편’ 등의 부정적 평가를 모두 삭제하고, 종교의 종류에 대해서도 “원시종교로부터 시작하여 불교, 기독교, 회교 등 수많은 종교와 크고 작은 류파들이 있다”하고 서술하는 등 보다 구체적인 설명을 하고 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의 〈표2〉와 같다.

 

 

 

 

 

 

 

 

 

 

 

 

 

2. 북한의 종교정책과 종교인식의 변화

1) 북한의 종교정책: 정교(政敎) 관계

북한 종교에 대한 기본적 이해는 북한사회주의 체제하의 종교 현실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북한의 종교 현실은 북한사회주의 체제의 변화과정과 더불어 변화해 왔으며, 이를 대변하는 것이 북한의 종교정책 변화이다. 북한의 종교정책에 대한 일반적 이해를 도모하기 위해서는 북한 당국의 종교에 대한 태도 내지는 인식을 대변하는 정교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국 사회과학원 미국연구소 부연구원인 리우펑(劉澎)은 〈중국 정교관계의 특징과 발전〉이라는 논문에서 정교 관계의 유형을 다음 4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① 정교일치형: 종교지도자가 국가 원수직을 겸임하든지 혹은 안 하는 경우도 있는데, 국내외의 정책 제정에 최고권위를 지니고 있고, 종교 교리와 종교법이 국가의 모든 활동의 준칙이 된다. 국가의 행정, 사법, 교육이 전적으로 종교의 지도와 제약을 받는다. 종교의 권한과 정권은 하나의 관계를 이룬다.
② 정교분리형: 국가는 어떤 종교도 지지하거나 금하거나 차별하지 않는다. 국가는 종교세를 걷지도 않고 어떤 종교에 대해서도 어떤 형식의 재정적인 지원을 하지 않는다. 정부에 종교사무를 처리하는 기구가 없다. 또 종교조직의 내부 사무에 대해 간섭하지 않는다. 종교는 정부의 정치적인 지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또 국가의 사법, 행정이나 교육을 간섭하지도 않는다. 정교 관계는 전적으로 법률에 의해 조절된다.
③ 국교형: 국가는 어떤 종교나 교파를 정통신앙으로 여긴다. 이 종교는 사회적으로 특수하고 유일하게 존중받는 지위를 누린다. 국가는 법적으로 이 종교의 특권을 보장하며 아울러 재정적으로 지원한다. 정부는 종교사무를 처리하는 기구를 설치하지만 종교 지도자는 정부의 업무에 참여하지 않으며 정부의 수뇌는 종교 지도자에 대해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
④ 국가가 종교를 지배하는 형: 종교가 정부의 정치적인 권위를 인정하며 정부의 지도를 받아들이고 아울러 정부의 정책을 관철한다는 전제가 있다. 이후 정부의 승인을 받고 정부와 협력한다. 정부는 종교조직에 대해 행정적인 관리를 한다. 교회는 정부에 참여하지 않으며 국가의 행정, 사법, 교육에 간섭하지 않는다. 종교는 사회적으로 엄격한 제한을 받는다.
리우펑의 이 같은 분류법은 대체로 타당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리우펑은 중국의 정교 관계를 ‘국가지배형’으로 분류하고 있다. 북한의 경우 시기별로 그 형태를 달리하고 있지만, 1980년대 이후의 북한을 놓고 본다면 개념적으로는 중국과 마찬가지로 ‘국가지배형’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북한의 정교 관계는 중국의 경우처럼 국가지배형의 특색을 드러낼 수 있을 정도의 종교적 존재 양식조차 명확히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같은 사회주의국가인 중국의 경우는 국가의 종교지배를 분명히 하는 법률적 규정을 당정 차원에서 구체화하고 있고 또 이를 양성화하여 드러내 놓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경우는 1992년 사회주의 헌법 개정 시에 ‘신앙의 자유’에 대해 이전보다 폭넓게 규정하고 있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을 뿐 그보다 하위체계인 법률적 규정 즉 ‘종교법’이나 ‘종교사무법’ 등의 규정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북한에서는 아직까지 행정부 안에 종교 업무를 담당하는 부서가 설치되어 있지 않다. 또한, 북한의 종교단체 대표들이 당과 정부의 대표와 협상을 하여 종교단체의 이익을 옹호하고 의견을 교환하는 위치에 있지 못하며, 더구나 중국의 경우처럼 당과 정부의 수뇌가 종교단체 지도자들과 정기, 부정기 회동을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이 같은 사실은 북한의 종교단체들이 명목상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 하부구조가 양성화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힘을 발휘할 수가 없으며, 그 대표들이 북한사회 내 종교인들의 의사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못하다는 것을 뜻한다. 때문에 현재의 북한 종교는 국가지배형의 종교로서 온전한 꼴도 갖추지 못하고 있는 상태로, 단지 외부세계로 종교교류를 가능하게 하기 위한 통로의 구실밖에 하지 못한다. 그러나 북한 종교의 이 같은 현실 역시 이미 시대적으로 상당한 변화를 거쳐온 것이고, 또 이를 바탕으로 하여 앞으로 많은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예측되기에 그럴수록 북한에서의 정교 관계 변화의 양상을 정확히 진단하고 그 진로를 전망하는 노력은 필요하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남북 종교교류의 현실적 목표는 점차 북한 당국이 내부적으로 종교사무를 필요로 할 만큼 북한사회 내에서도 신앙의 자유를 실제로 인정하게 하여 그동안 상부구조만을 허용해 온 형식적 종교정책의 틀을 벗어나게 하는 데 있다.

2) 《조선말대사전》에 나타난 북한의 종교인식 변화

1992년 4월 9일 최고인민회의 제9기 3차 회의에서 개정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 헌법〉의 제5장 제68조에 “공민은 신앙의 자유를 가진다. 공민은 신앙의 자유를 가진다. 이 권리는 종교건물을 짓거나 종교의식 같은 것을 허용하는 것으로 보장된다.”로 명시하여 지속적으로 종교 및 신앙의 자유에 대해 보장하고 있다. 제한적으로 “종교를 외세를 끌어들이거나 국가사회질서를 해치는 데 리용할 수 없다.”는 규제를 명시하였으나, 종교와 신앙의 자유에 대한 규제 및 통제에서 폭넓은 자유를 부여하는 법을 제정하였다.

1998년 9월 5일 최고인민회의 제10기 1차 회의에서 개정된 헌법에서는 주석제 폐지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를 신설하여 권력구조에 대한 대대적인 개편이 이루어졌다. 북한이 헌법에서 명문화하고 있는 종교에 대한 조항은 ‘제5장 공민의 기본권리와 의무’ 중 제66조의 “17살 이상의 모든 공민은 성별, 민족별, 직업, 거주기간, 재산과 지식 정도, 당별, 정견, 신앙에 관계없이 선거할 권리와 선거받을 권리를 가진다.”는 조항과 제67조의 “공민은 언론, 출판, 집회, 시위와 결사의 자유를 가진다. 국가는 민주주의적 정당, 사회단체의 자유로운 활동조건을 보장한다.”에서 포괄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신설된 제75조의 “공민은 거주, 려행의 자유를 가진다.”에서 많은 변화를 볼 수 있다.

이러한 사회주의 헌법의 변화와 함께, 북한사회 전반에 걸쳐 종교에 대한 긍정적, 객관적 사실을 바탕한 새로운 표현들이 나타났다. 북한의 종교 해석이 어떻게 표출되고 또 그 양상이 어떤 변화를 보이고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사전적(辭典的)인 정의에 대한 연구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현대조선말사전》(1981년판)과 《조선말대사전》(1992년판)의 종교 관련 항목 비교분석 결과를 보면 《조선말대사전》에서는 종교에 관한 부정적 기술이나 평가가 없어진 반면, 사실적인 기술이 추가되고 있으며, 특히 종교와 미신이 동일시되던 과거의 입장을 탈피하여 양자를 분명히 구별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변화를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

《현대조선말사전》(1981)은 종교를 “반동적인 세계관”을 표명하고 있는 것으로 “종교는 인민대중의 혁명의식을 마비시키고 착취와 억압에 무조건 굴종하는, 무저항주의를 고취하는 아편”이라고 부정적으로 규정하였다. 1992년 《조선말대사전》은 종교에 대해 이를 “초자연적이고 초인간적인 존재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 또는 믿음을 설교하는 교리에 기초하고 있는 세계관”으로 객관적인 서술을 하고 있다. 반면에 미신에 대해서는 이를 “과학적세계관을 가지지 못하고 문화적으로 깨여나지 못한 사람들이 자연과 사회의 사물현상을 어떤 초자연적인 힘과 그것에 의한 것이라고 맹목적으로 믿는 것”이라고 하여 뚜렷이 구분하고 있다.

이와 함께 《조선말대사전》은 종교의 역할에 대해서도 이를 “억압, 착취하는 도구”나 “침략하는 사상적 도구” 그리고 “혁명의식을 마비시키는 아편” 등의 부정적 평가를 모두 삭제하고, 종교의 종류에 대해서도 “원시종교로부터 시작하여 불교, 기독교, 회교 등 수많은 종교와 크고 작은 류파들이 있다.”라고 보다 구체적인 설명을 하고 있다.

3) 불교 인식의 변화

(1) 불교 관련 용어의 사전적 의미 변화

불교에 대한 관점의 변화도 상당한 진전이 있다. 북한의 철학사전에서는 불교를 종교로서보다는 일종의 철학 또는 종교철학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며, 그 교리 내용에 대한 설명은 ‘비과학적’이며 ‘미신적’인 황당한 논리라는 부정적인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불교와 관련된 승려를 비롯한 사상가들은 대부분 관념론자로 단정하고 있고, 관념론 자체를 “종교를 철학적으로 각색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조선말사전》의 관점에서 1981년판 《현대조선말대사전》의 불교 내지 종교 전반에 대한 부정적 견해가 시정되어 중립적이고, 객관적 입장에서 정의하려고 노력한 것을 철학사전의 기술 내용과 비교를 통하여 쉽게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극락세계에 대한 설명에서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곳으로 죽은 뒤에 즐겁게 할 수 있다는 극락정토”라고 하여 불교의 교리적 설명을 충실하게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불교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바꾸어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유물론적이거나 정치적 견해를 제거한 《조선말대사전》의 표현 내용은 크게 긍정적으로 변화하였다.

이후 2000년판 《조선대백과사전》을 보면 불교에 대해 “온갖 집착을 버리고 자기가 추구하는 지향을 억제하며 정신 수양을 통해 모든 것을 해탈하고 열반에 도달해야 한다고 설교한다.”라고 설명되는 등 객관적 정의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 사전류 이외의 글에서 불교에 대한 인식

사전류를 제외하고는 북한에서 불교사상이나 교리를 직접 다룬 글들이 거의 없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문헌들에서 간혹 불교에 대한 언급이 있으나 그 내용은 극히 초보적 수준이며 왜곡된 부분도 많다.

《김일성 전집》에서는 “절간은 불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세운 것입니다. 불교교리에서는 사람이 부처를 믿고 ‘착한 행동’을 하면 죽은 다음 ‘극락세계’에 가서 행복을 누린다고 하였는데, 우리는 죽어서 ‘극락세계’에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조국땅 우에 인민의 지상락원을 건설하기 위해 힘껏 일하여야 합니다.”라고 불교를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김일성의 불교에 관한 언급에서는 불교보다는 불교문화재의 가치를 중시하고 그 보존과 이용을 강조한 경우가 많다. 예컨대 불교의 유적과 유물이 우리 선조들의 훌륭한 건축술과 기교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든지, 그것들을 통해 근로자들에게 조국을 사랑하는 정신을 키워주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하는 것 등이다. 그런 점에서 불교의 사찰과 스님(중)의 존재를 인정하도록 하고 있다.

《김일성 전집》에서 이를 보여주고 있는데 “동무들이 관음사에 있는 중을 봉건사회의 중과 같이 보아서는 안 됩니다. 중들이 공화국의 륭성 번영을 위해 념불을 외우고 나라의 문화 유적과 유물들을 잘 관리한다면 그들을 나무람하지 말아야 합니다. 국가에서 고적들을 관리하기 위하여 관리인원을 따로 두지 않고 중들이 그것을 관리하게 하니 자기의 손때 묻은 고적들을 잘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국가에서는 중들에게 식량을 공급해주고 있습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유적과 유물의 관리 임무가 불교와 스님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는 주요 이유가 되고 있으며, 식량 배급의 사유가 되고 있는 것이다. 팔만대장경을 보존하고 그 번역과 해제본의 발간도 유물의 보관과 관리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보현사가 복원되면서 1984년에 팔만대장경 보존고를 만들었고, 1988년에 팔만대장경의 번역이 완료되어 《팔만대장경 해제본》으로 1989년에 발간되었다. 북한에서 이미 60여 개의 사찰을 복원했고 그 사업을 계속 추진하고 있는 것도 불교의 진흥이나 발전을 위한 것이기보다는 문화재의 보존과 이용에 더 중점을 두고 있다. 말하자면 주체사상의 입장에서 북한불교의 가치는 불교라는 종교보다는 그 종교가 관리하는 유적과 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주체사상에서 대부분의 종교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불교도 압제와 예속에서 벗어나 자기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려는 인간의 본성적 요구를 반영하여 나타났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불교가 봉건 통치계급에 이용되어 피통치계급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도구가 되기도 했다는 점도 지적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왜란 때 승병들의 투쟁도 높이 평가하지만, 불교의 부정적 측면도 자주 거론된다. 예를 들면, ‘부처’라는 말에 대해 부정적으로 인용되는 경우가 많다. 곧 “부처”는 ‘일하지 않고 먹기만 하고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을 비겨 이르는 말”로 《조선말대사전》의 부처의 정의 중 설명되는 부분도 있고, 김일성 또한 그런 의미로 부처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곤 했다.

4) 시기별 북한의 종교인식 변화

(1) 사회주의하의 종교 자유 제한시기(1945~1950)

1945년 해방 이후부터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북한 정권의 수립과 더불어 각종 종교운동을 제한하고 탄압하는 정책이 시행되었다. 류성민의 지적대로 이 시기는 교류보다는 남북한 종교인들의 단절 혹은 대립이 시작된 시기이며, 남북한 종교인의 급격한 변동이 있게 된다. 북한에서는 종교인들의 월남으로 인해 종교인 수가 급격히 줄어든 데다 북한 정권의 탄압으로 교세가 급격히 취약해졌다.

1945년 해방 이후 북한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소련식 사회주의가 정착되면서 친소·반미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가지게 되었고, 소련의 경우 어느 정도 친종교 정책을 펼쳐나갔다. 이러한 소련의 정책에 부합한 김일성은 1946년 3월 23일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이름으로 발표한 임시정부의 20개조 정강 중 제3조에는 “전체 인민에게 언론, 집회 및 신앙의 자유를 보장할 것”과 제5조에는 “전체 공민들에게 성별, 신앙 및 재산의 유무를 불문하고 정치경제생활에 동등한 권리를 보장할 것”을 명시하였다.

또한, 1948년 9월 9일에 제정된 북한 최초의 건국헌법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 제14조는 “공민은 신앙 및 종교의식 거행의 자유를 가진다”고 공식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미국과 이승만 정권에 대해 종교를 식민지화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진정한 신앙의 자유는 단지 인민이 정권을 장악한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에만 있을 수 있다”고 하였다. 1950년 3월 3일에 채택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형법’ 제21장 ‘관리 질서 침해에 관한 죄’에 관한 항목 중 제258조에는 “종교단체에 기부를 강요하는 자는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되어 있으며, 제258조에는 “종교단체에서 행정적 행위를 한 자는 1년 이하의 교화노동에 처한다.”고 규정하였다.

헌법 차원의 ‘종교의 자유’는 실질적인 법 적용에서 종교단체에 대한 기부를 금지함으로써 종교의 재정적 기반을 박탈하였고, 종교단체에 대한 행사를 금지함으로써 종교적 회합을 할 수 없게 하였다. 이와 같이 ‘종교의 자유’는 사회주의 체제와 사상에 부합된 의미로 사용하고 있으며, 종교활동은 극히 제한적 부분에서만 인정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사회주의체제를 저항하는 종교계에 대해 철저한 억압 정책을 펼쳐나갔음을 시사한다.

(2) 종교탄압 시기(1950~1953)

6·25 한국전쟁은 북한의 종교지형을 급격히 위축시키는 동시에 종교지형 내부의 이질적 요소들의 대거 남하를 가져와 북한 내부에서는 이데올로기적 동질화를 가져오는 데 도움이 되는 동시에 전쟁에 대한 체험으로 반체제적 성향이 강한 기독교 집단에 있어서도 반미·반제적 성격을 강화하는 계기로 이어진다. 이 점에 대해 김일성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의 머릿속에 숭미사상이 오랜 기간에 걸쳐 뿌리 깊이 박혔기 때문에 숭미사상을 뿌리 빼기가 대단히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전쟁을 통하여 그들이 숭미사상을 스스로 버리게 되었습니다…… 전쟁 전까지만 하여도 미제를 숭배하던 기독교인들이 전쟁을 통하여 미제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악독한 침략자이며 강도이며 천하에 제일 비겁쟁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고 그들을 저주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조건에서 기독교인들과의 사업을 적극적으로 진행하면 능히 그들을 우리 편에 묶어 세울 수가 있습니다.” 실제로 한국전쟁 과정은 치열한 공습과 죽음에 처하는 한계상황의 체험을 통해 북한 주민들에게 일종의 ‘종교허무주의’ 내지 미제국주의와 동일시된 기독교에 적대적 태도를 취하는 ‘반그리스도교적 사회풍조’를 만연케 하였다. 또한 전쟁 후 반미주의가 강력한 사회통합 이데올로기로 정착되어 반기독교적 풍토는 더욱 심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3) 사회주의화 정책 정립과 기존 종교의 해체시기(1954~1972)

1950~53년에 걸친 전쟁 이후 1970년대 초반까지 남북한의 종교교류는 공백기로 접어들었다. 휴전 이후 북한 주민들에게 극도의 반종교 의식을 심어 주었고, 종교가 없어졌다고 공언할 만큼 반종교 정책으로 일관하여 기존 종교는 해체되었으며, 북한 정권이 정략적으로 만든 기존 종교단체들의 활동마저 중지된 시기였다.

특히 주체사상의 형성 기반을 이룩한 1960년대 중반 즉 1964년 2월에 개최된 당 중앙위 제4기 8차 전원회의는 사상·기술·문화혁명이라는 ‘3대 혁명’ 개념을 정식화하고 ‘온 사회의 혁명화·노동계급화’라는 새로운 구호를 제기하는 한편, 주민등록사업을 전개하는 계기를 이루게 된다. 1964년 4월에 시작하여 1969년까지 계속된 이 사업의 결과, 1971년에는 3대 계층 51개 부류의 분류 목록이 작성되기에 이른다. 이 분류에 따르면 종교와 관련하여 미신숭배자(29), 불교신자(38), 기독교인(37), 유학자(40) 등을 구분하였고, 종교인 전체에 대해서는 이들을 복잡계층 가운데 “사회도덕 면에서 과오를 범한 계층”으로 분류 “종교계에서 간부직에 있던 자는 제재 대상, 일반 종교인은 감시 대상”이 되고 만다.

이때 파악된 종교인과 그 가족의 숫자는 약 10만 가구 45만 명으로 집계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종교인들을 감시 대상으로 분류하여 당간부 채용, 상급학교 진학, 군입대자 선발 기준에 적용하게 됨에 따라 북한사회에서 종교의 사회적 역할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된다. 더구나 이 시기에 반종교 선전이 강화되고, 위와 같은 행정적 압력이 가중됨으로써 종교활동을 찾아보는 것은 점차 불가능하게 된다. 이처럼 불리해진 사회 분위기로 해서 거의 모든 종교인은 특정 종교의 신자임을 스스로 감추거나 불경, 성서 등을 숨겨야 했다. 따라서 한국전쟁 이전에 존재했던 통일전선형 종교단체들은 그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의 연계가 약화되고, 일상적인 신앙 실천 형태는 자취를 감추고 만다.

(4) 사회주의적 종교단체의 재등장 시기(1972~1980)

사회주의적 종교단체가 재등장한 시기는 1972년에서 1980년 사이이다. 1972년에 북한은 자체 내의 사회주의 헌법을 처음으로 개정하여 “자주적인 사회주의국가”로 대내외적으로 천명하고 김일성 주석 중심의 권력구조로 개편하였다. 개정 공포한 사회주의 헌법 제54조는 “공민은 신앙의 자유와 반종교선전의 자유를 가진다”고 규정하였다. 또한, 1972년의 7·4 남북공동성명 발표와 남북대화의 추진은 남북한 당사자 간의 공식적인 만남의 계기를 마련하였고, 그 과정에서 종교와 종교인들에 대한 관심도 교환될 수 있게 하였다. 이로 인해 조선기독교도련맹을 비롯한 종교단체들은 통일전선의 전면에 배치되어 대외적으로 통일전선 사업을 활성화하는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다.

북한 종교단체의 재등장 시기 동안, 종교 상호교류 제의 및 외국에서 접촉을 시도하였다.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계속 혁명’의 시발점이었던 시기에 북한 종교인들의 통일전선사업의 필요성에 따라 북한의 종교단체들이 활동을 재개하였다. 북한 종교는 남한 정부의 종교인 탄압에 대한 성명을 발표하면서 남한의 정부체제를 비판적으로 보는 종교인들과 접촉을 시도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아시아불교도평화회의, 세계교회협의회 등 해외에서 열리는 국제적 종교인 회의에 참여하면서 남한 종교인들과 접촉을 시도했다. 그러나 대내적으로 종교의 사회적 역할을 수용하는 새로운 가능성이 감지되지는 않았다. 다만 연방제 통일방안 제시와 남북대화로 인해 대남관계가 중요하게 떠오르면서 대남통일전선운동의 전개를 위해 종교단체들의 역할이 부각되었을 뿐이다.

이 시기에 북한은 과도한 국방비의 부담을 완화하고, 국제사회에서 고립을 탈피하기 위해 대서방 관계개선을 모색하게 되지만, 남한에서도 유신체제가 등장하면서 남북대화가 중단되고 다시금 적대적 긴장이 고조되었다. 1970년대 후반 이후에는 오히려 주변 정세의 악화를 가져와 통일전선운동이 남한 정권과 미국에 대한 비난 중심으로 회귀하여 종교의 사회적 역할 증대를 통한 종교지형의 확대는 기대하기 힘들게 되고 만다.

오히려 남북대화의 단절로 인한 남북관계의 대치 상황 심화와 함께 남한사회에서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반체제운동이 격렬히 전개되고 여기에 남한의 종교계가 깊이 관여하게 됨에 따라 이를 측면에서 지원하는 비난 성명 등의 공세를 가하게 된다. 이러한 활동은 개별 종교의 명의뿐 아니라 3개 종교단체 연합성명 발표의 형식을 취하게 된다. 주요 사례를 들어 보면, 조선불교도련맹(약칭 조불련)의 박형규 목사 체포 비난 성명(1973. 8), 남한 비상군법회의의 종교인 탄압에 대한 비난 성명 및 남조선 종교인과 해외 조선인 종교단체와 세계 각국 종교단체들에 보내는 호소문(1974. 2), 6·3사태 기념일에 즈음한 사회·종교단체 연합성명(1974. 6), 지학순 주교·김지하 등 종교인들이 연루된 민청학련사건 비난 성명 및 세계 각국 종교단체들과 종교인들에게 보내는 호소문(1974. 7), 조불련의 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 제안 지지성명(1977. 2), 조불련 홍화두 부위원장과 조기련 김성율 부위원장의 남북관계에 대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성명에 대한 지지 담화 발표(1979. 1) 등을 들 수 있다. 물론 종교단체들을 내세운 대남 비난 성명은 그 이후에도 계속되지만, 종교단체들의 대북 지원이 시작된 1990년대 후반 이후에는 현저하게 감소했음을 보여준다.

(5) 북한 종교단체의 부활 시기(1981~현재)

1980년대는 사회주의적 종교의 조직화를 통해 인도주의적 협력을 위한 다각적 노력을 시도하였으며, 국제교류 및 연대를 활발하게 전개한 시기라 볼 수 있다. 1980년대 이후 특히 90년대에 접어들어 북한 종교단체들의 활동 양상과 그 범위는 그 이전에 비해 엄청나게 확대되어 질적으로 비약된 모습을 보여준다. 이처럼 변화된 사실의 배경을 손쉽게 알 수는 없지만, 다행히 북한의 관련 인사들이 직접 주체사상과 종교와의 관계를 새롭게 해석하여 설명하는 자료들을 접할 수 있으므로 어느 정도 윤곽 파악이 가능하다.

1988년 스톡홀름에서 개최된 주체사상에 대한 학술심포지엄에서 북한사회과학원 주체사상연구소장 박승덕은 주체사상의 종교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목할 만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첫째, 주체사상은 종교를 다루는 방법론에 있어 마르크스주의적 방법론과는 달리 시대적 이해와 요구에 따라 달리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하여 평가하고 있다.

둘째, 종교가 지배계급과 야합하여 인민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하나의 수단이라는 관점만을 고수해온 마르크스주의와 달리 현대의 종교와 신학들이 그 나름의 발전의 내적 법칙성을 지니는 사회적 의식의 독자적인 한 형태라는 점을 인정한다.

셋째, 이러한 평가에 근거하여 주체사상은 종교가 계급지배의 수단이므로 당장 역사에서 사라질 것을 요구하는 입장에서 벗어나 앞으로 지배계급을 반대하고 지배계급으로부터 억압받는 민중을 해방하는 데 이바지하기를 바라고 있다.

넷째, 진보적인 종교사상, 신학에 대한 평가를 바탕으로 이를 추종하는 종교인들과 공동의 과제를 갖고 협력하는 것은 긴요하다. 이는 종교인들이 통일전선의 대상이 되면 되었지 결코 배척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말한다. 이러한 박승덕 박사의 견해는 북한의 대남방송인 ‘한민전’ 방송을 통해 보다 상세히 공개되기도 하였다. 1988년 7월 31일과 8월 1일 두 차례에 걸친 방송을 통해 “종교인들과 단결 협력하는 것은 한민전의 일관된 정책”이라는 내용이 고일철의 명의로 발표되었다. 고일철에 따르면 주체사상은 종교 자체를 부정하지도 반대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종교 사상을 덮어놓고 배제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며, 오히려 주체사상은 종교에도 긍정적인 주장과 사상이 있다고 인정하고 그 가치를 공명정대하게 평가한다는 것이다.

이상 종교에 대한 주체사상의 새로운 평가 내용을 집약하면 종교의 기원에 대해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이 너무 협소했었다는 점, 종교의 사회적 기능이란 면에서도 그 부정적 측면보다는 긍정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 종교의 역사적 소멸에 연연하지 않고 오히려 종교집단과의 통일전선 구축을 내세운다는 점, 종교현상을 하나의 부수 현상이나 토대의 기계적 반영물로 보던 견해를 철회하고 ‘종교의 상대적 독자성’을 수용한다는 점 등이 부각되고 있음을 주목하게 된다. 북한 정권의 종교 인식과 북한 종교단체들의 활동 양상과 범위는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

 

윤법달 / 서울디지털대학교 초빙교수. 동국대학교 대학원 북한학과 졸업(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한반도 종교평화네트워크 연구위원,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 대의원, 민주평통 종교분과 상임위원 등의 활동을 통해 한반도 통일과 종교의 역할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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