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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민간불교결사와 포교사들* / 김성순
-창도사(唱導師)와 사승(社僧)
[59호] 2014년 09월 01일 (월) 김성순 shui1@naver.com

 *  본 논문은 2014년 5월 10일 ‘중국불교의 전법론과 전법정신’이라는 주제로 불광연구원에서 주최한 학술연찬회에서 발표된 논문을 정리한 것이다.

1. 들어가며

본 논문은 성읍을 떠돌며 탁발을 하면서 동시에 불교교리를 재미있게 풀어 설명해주면서 포교를 했던 초기 중국불교 포교사와 그들의 활동무대인 민간 불교결사에 관해 알아본다. 더 나아가 이러한 결사들의 운영형식과 인적구성, 그리고 변화사까지 고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전에도 〈동아시아 민간불교결사의 공덕신앙과 장의(葬儀): 한국의 향도와 돈황의 읍사(邑社)〉라는 주제로 논문을 쓴 적이 있는데, 당시에는 한국의 향도계와 둔황(敦煌)의 읍사(邑社)가 가지고 있는 보편성과 차이에 집중했기 때문에 전법과 관련된 활동에 대해서는 자세히 살펴보지 못했고, 더욱이 둔황이라는 지역적 범주에 제한되어 있었다. 이번 논문에서는 중국 초기 불교사에서 불교가 민간 계층에 수용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던 민간 결사운동과 전문포교사 승려들에 관해 좀 더 집중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중국불교의 교단과 관련한 불교결사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풍부한 편이지만 남북조시대, 수·당, 송에 걸쳐 활동했던 민간 불교결사에 대해서는 그동안 학계의 관심이 적었던 것이 사실이다. 중국이나 일본학자들의 읍사에 관한 연구는 중국불교사 내지 둔황과 관련된 특정 시대와 지역연구, 둔황 문헌연구, 중국불교 사회사, 중국 사원경제사, 그리고 창도(唱導)와 변문(變文)에 관한 연구 안에서 부분적으로 다룬 내용이 존재한다. 본격적으로 읍사만을 다룬 것은 닝커(寧可)와 하오춘원(郝春文)의 공동연구논문, 그리고 부치우샹(卜秋香) 푸샤오징(傅曉靜) 멍시엔스(孟憲實)의 연구논문들이 있다.
본 논문에서는 이전의 연구들이 단편적으로 집중하고 있는 결사들의 조각을 짜 맞추어 초기불교의 전법이라는 프레임으로 다시 구성해 보고자 한다. 구체적으로는 역사학적 시각을 통하여 중국불교의 민간결사들이 송 대 이후 정토염불결사에 온전히 자리를 내어주기 전까지 정토왕생과 현세의 이익을 위해 실천했던 활동상과 지도자 승려들의 활약, 그리고 사회문화적 배경과 맞물려 그 결사들의 위상이 서서히 변화해가는 모습을 고찰하게 될 것이다.


2. 중국의 불교포교와 유화승(遊化僧)

중국 초기의 불교는 인도에서 직접 수입된 것이 아니라, 서역 지방을 거친 이른바, 서역불교를 수입한 것이었다. 서역 지방에서 사탑의 건립, 사원 소유재산의 성립 등의 형식이 갖추어진 상태에서 수입된 불교는 역시 서역불교의 제도를 모방하게 되며, 포교 방식 역시 서역의 전법승들과 관련이 깊은 것으로 생각된다.
대략 위진남북조 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민간 포교를 담당했던 이들은 경사(經師), 복강사(覆講士), 읍사(邑師), 사승(社僧), 창도사(唱導師), 설법사(說法師), 유행승(遊行僧)으로 불리던 승려들이었다. 당의 중기 이후에 이르러서는 사원의 연중행사 법회에 널리 일반대중까지 참석하는 것이 유행했으며, 이들을 위하여 《법화경》 《유마경》 정토 관련 경전의 내용을 평이한 비유나 재미있는 인연설화를 섞어서 하는 속강이 생겨났다. 이러한 방식으로 민간교화를 담당했던 승려를 화속법사(化俗法師) 혹은 속강사(俗講師)로 부르기도 했다. 둔황 천불동에서 발견된 다수의 변문과 변상은 불교신앙이 민중에 보급되는 과정에서 경전에 수록된 왕생담이나 인연담을 포교의 소재로 이용했던 모습을 보여준다.
수당 시대에는 불교의 민간포교가 급속하게 진전되었기 때문에 여기에 맞추어 전문적인 포교자가 많이 배출된 것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이들 전문 포교자들은 창도사라는 이름으로 불리거나, 설법사(說法師) 혹은 후대에는 법사(法師), 유행승(遊行僧) 또는 유화승(遊化僧)으로 불리기도 했다. 양혜교(梁慧皎)의 《고승전》 〈경사과(經師科)〉와 《속고승전》 권 제30, 〈잡과성덕편(雜科聲德篇)〉에는 당시 명성을 얻었던 경사(經師)의 전기들을 싣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범패와 전독(轉讀)에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당시 서울의 흥선사(興善寺)에도 역시 도영과 신상이라는 스님이 있었는데 그들도 역시 소리와 범패로 이름을 날렸다. 도영은 목청과 이마가 크고 씩씩하며, 글 읽는 소리가 웅장하고 깊었다. 대중이 한 번 모이면 그 수효가 만여 명에 달하였으나 그의 소리 가락은 위세당당하게 높이 대중 밖으로 뛰어넘었다.

인용문에서 보듯이 이른바, ‘목청 좋은’ 설법사 혹은 경사들이 민간인들을 사원 안으로 끌어들이는 포교 작업에서 무척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들이 불교 경전 외에도 사서와 유교 경전, 시에도 달통했다는 기록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이들이 풍부한 스토리텔링을 할 수 있는 자원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타고난 좋은 목소리와 풍부한 성량, 유교 경전과 다른 제반 학문영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소양을 갖춘 이들이 경사로 활약했음을 짐작게 한다.
일반적으로 법회의 현장에서는 모여든 청중들에게 불교를 이해시키기 위해서 높은 단을 설치하고 그 위에 고승이 올라가 법문을 강연하는 강경(講經)을 했다. 강경에서 더 나아가 불교를 일반사회 대중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바로 창도(唱導)이다. 창도란 설법으로 대중을 교화시키는 것이며, 창도를 행하는 창도사란 곧 법회나 재회 등에서 전문적으로 창도를 행하는 포교사를 말한다. 창도사는 창도과에 선발된 이로서, 각종 재회나 법회 그리고 망자를 위해 추선공양을 하는 의식에도 초청되어서 무상의 이치를 설명하면서 유족들을 위로하고 고인의 덕을 찬탄하기도 했다.
창도사 역시 설법사, 화속법사, 유행승 등과 마찬가지로 교화를 전문으로 하는 포교승으로서, 그 이름에서 보여주듯이 단순히 설법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에 소질을 가지고 있어서 그 음성으로 민간의 종교적 감성을 어루만져주는 사람들이었다. 창도사는 망자의 기일, 추선공양, 경사 내지 재회에 초청되어 창도를 행할 때 사용할 수 있는 자신만의 창도문을 만들기도 했다.
이러한 창도사 내지 설법사와 동일한 계통이 화속법사 혹은 유행승이다. 엔닌(圓仁, 794~864)의 《입당구법순례행기》 권1 개성(開成) 3년 11월 24일 조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또한 화속법사가 있는데 본국(일본)의 비교화사와 같은 것이다. 세간의 무상함과 공의 이치를 설하면서 남녀제자를 가르치는 사람을 화속법사로 부른다.

이는 양주(揚州)에 체재할 때의 기록으로, 당시 사람들이 민간교화에 종사하는 승려들을 화속법사라고 불렀다고 하고 있으며, 일본의 비교화사(飛敎化師)와 같은 것이라고 주석을 하고 있다. 이 화속법사는 이른바 설법사 계열로서, 창도사나 설법사 혹은 읍사(邑師) 등에서 더욱 진전된 것이었으며, 더욱 깊숙하게 민간 계층에 접근했던 포교사였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비교화사 같은 경우는 모든 곳을 돌아다니며 교화를 했던 승려를 말하며, 화속법사와 함께 민간에서 활동하는 전문적인 포교사로 볼 수 있다.
아울러 지방을 다니며 교화하는 승려들인 유화승(遊化僧) 혹은 유행승(遊行僧)도 이러한 유행 포교 전문가의 계열에 속한다. 이들 유행승은 창도사보다 한층 더 민간에 직접적으로 가까이 접촉하면서 마을을 순회 유행하며, 도량을 세우거나, 민중 사이를 포교하며 다녔다. 일본 가마쿠라 시대의 히지리들이 그러했듯이 이들 유행승 역시 지옥변상도와 정토변상도를 가지고 다니면서 번갈아 펼쳐가며 민간인들에게 포교했던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3. 남조의 법사(法社)와 북조의 의읍(義邑)의 변화사

남북조 시대부터 일정한 사원에 속하는 중국의 재가불교도들은 ‘의읍’ 내지 ‘법사’라는 신앙공동체를 조직했다. 의읍은 북방에서 활발하게 결성되었으며, 불상이나 당탑을 조성하거나 예배할 목적으로 지도자 승려를 중심으로 해서 대부분이 한 마을의 재가교도인 서민들, 특히 농민들로 결성된 단체였다. 그에 반해 법사는 주로 남방에서 소원을 달성하기 위해 계를 지키고, 경을 읽고, 교의를 논하는 식의 수행을 하려는 재가 수행동지들을 중심으로 경우에 따라서는 약간의 출가자가 동참하는 형식으로 결성된 것이었다. 이들 의읍이나 법사의 궁극적인 수행목표는 정토왕생이었다. 다만 의읍이 불사 등의 공덕에 의해 자신과 가족이 현세의 행복과 미래의 안락을 누리는 것을 목표로 했던 이른바, 공덕신행이었던 데 반해, 법사 쪽은 계율이나 참선을 중시했던 모습을 볼 수 있다.
남북조 시대에는 이처럼 불교의 포교에서도 남북 간에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남을 볼 수 있다. 강남, 즉 남조의 불교는 여산혜원의 백련사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귀족사회의 고답적인 논변에 바탕을 둔 교학의 발전과 법사의 결성이 그 특징이다. 법사는 남조불교의 배경 안에서 남북조 시대에서부터 수당을 거쳐 송에 이르러 유행했던 불교결사 조직이라고 볼 수 있다. 법사는 주로 물산이 풍부하고, 전란과 정치적 혼란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던 양쯔 강 이남의 남방에서 결성되었으며 귀족, 사대부 등의 상류계층,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었지만, 더러 승속연합의 결사도 있었다. 동진, 남북조 시대를 거치면서 화북지역, 즉 북방 이민족의 침탈과 정치적 전란, 그리고 여러 차례의 폐불을 피해 남방으로 내려온 승려와 문인재사들이 남방의 불교문화를 이끌었던 것도 한 원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법사에는 법우가 지켜야 할 사계(社誡) 즉, 법사의 규율이 정해져 있어서 지계와 수행을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혜원의 저술목록 중에 《법사절도서(法社節度序)》 《외사승절도서(外寺僧節度序)》 《비구니절도서(比丘尼節度序)》가 있는 것은 당시 백련사 외에도 이와 비슷한 법사가 존재했음을 나타낸다. 이러한 문서 제목들로 보아 비구니들의 법사도 존재했으며, 결사의 내부 규율이 상당히 엄중하게 지켜졌으리라는 점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러한 법사의 실례로 당대 정원(貞元) 연간(785~805)에는 신호(神皓)가 오군(吳郡) 동사(東社)에서 서방법사(西方法社)를 결성하여 정토신앙을 실천했던 것을 볼 수 있다. 오군이라면 지금의 장쑤 성 일대로서 남방에 속하는 지역이다. 북송 대에 들어서면서 성상(省常)이 송 태종 순화 연간(990~994)에 항주의 소경사에서 왕문정공 단(王文正公 旦)을 결사의 우두머리로 하여 지방관료 123인과 함께 《화엄경》 신앙결사인 정행사(淨行社)를 이끌었다. 항주가 속한 절강성 역시 남방이며, 주요 구성원이 귀족관료로 되어 있는 정행사 역시 전형적인 법사의 계열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비해 남북조 시대 북방 의읍들의 중심적인 행사는 조상(造像)이었지만, 수당 대에 이르면 재회가 중심이 되고, 송경이 행사의 주요 내용이 되기에 이른다. 읍회들의 집회는 대체로 매월 1회였으며, 송경의 대상이 되는 경전은 《법화경》 《금강경》 《화엄경》 《반야경》 혹은 《대무량수경》 《아미타경》 등 이었다. 또한 그 신앙대상도 관음, 미륵, 미타, 석가 등 여러 종류의 불보살들이 있었다.
재가자 중심의 신앙단체였던 의읍은 북위 시대부터 당 대에도 존재했다. 《당고승전》 권28의 〈익주복수사석보경전(益州福壽寺釋寶瓊傳)〉에는 당대의 의읍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촌락들을 유행하면서 의읍을 지도했던 승려 보경(寶瓊)은 오로지 《대품반야경》의 신앙이 사람들 사이에 전달되기를 염원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신앙결사인 읍(邑)을 결성하여 한 달에 한 차례 재회를 열어서 《대품반야경》 경문을 차례로 독송했다. 이러한 30인 단위의 결사가 1천 개 정도 되었으며, 멀리서 이러한 소식을 듣고 온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보경의 고향인 쓰촨 성 십방현(什邡縣)은 도교신앙이 강한 곳이었지만 보경의 두터운 신앙심에 접촉하면서 불교에 귀화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보경의 읍이 당대 민간불교결사의 보편적인 유형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 대 이전의 의읍이 조상(造像)과 각종 불굴(佛窟)을 조성하는 불사를 중심으로 했다면, 중당 이후에는 재회와 송경, 사경 등이 중심이 되었으며, 덧붙여 속강이 더해졌다. 한 사읍의 구성원은 25인에서 30~40인 정도였으며, 이러한 규모의 사읍이 10~15 사읍이 모여 하나의 사원에 속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의읍의 구성원은 일반적으로 서민들이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명칭의 지도자 격의 직책을 마련하여 결사를 운영해야 했다. 그에 반해 법사의 구성원은 주로 엘리트 귀족층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비록 사주(社主)나 사장(社長), 그 밖에 여러 명칭을 지닌 책임조직은 있었지만 결사의 성격상 책임자가 중시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양자 간의 공통점이 있다면, 의읍이나 법사 모두 재가신자의 신앙결사로서 다수 구성원의 단결을 강화하기 쉬운 수단으로서 정기적인 재회를 개최했음을 볼 수 있다. 결사들이 재회를 중심으로 모이게 되면서 사원은 그 조직을 통해 교화력을 넓히고 구성원들은 정치적·사회적·경제적으로 친목이나 상호부조의 관계를 도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사회적인 친목과 상호부조가 중심이 되고 부수적으로 신앙활동을 겸했던 사읍의 활동이 무척 활발했던 지역이 바로 둔황이다. 당 대에서 송 초에 이르는 시기에 둔황에서는 관사(官社)를 제외하고 사사(私社)가 크게 유행했던 것을 볼 수 있다. 사사는 크게 두 종류의 유형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주로 불굴을 조성하고, 사원을 건축하고, 재회, 사경, 연등, 인사불(印沙佛), 행상 등의 불교 신앙활동에 종사하는 것이다. 그중 어떤 것은 불사가 완성되면 해산하는 것도 있었다.
다른 한 종류는 주로 경제와 생활 방면에서 상호부조 활동에 종사하는 것으로, 상장례와 사인(社人)의 혼사, 건물을 짓는 일에 서로 힘을 보태고, 어려운 상황에 빠진 이를 구제해 주고, 병든 이를 위문하며, 잔치에 모여 함께 즐기고, 먼 여행과 귀가를 위안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이러한 상호부조적 결사는 오래 유지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으므로 사인이 사망하면 자손이 그 지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어떤 결사는 5, 60년 이상 존속되기도 했다. 많은 결사들이 상술한 두 가지의 기능을 함께 갖추고 있었으며, 전통적인 공동체의 사제(社祭)는 여전히 이러한 결사들의 중요한 활동 내용을 이루고 있었다.
둔황의 사읍에 참여했던 사인들은 각계각층의 신분과 직업이 있었으며, 위로는 귀족, 관료, 장수, 승관(僧官), 아래로는 농민, 공인, 호적이 없는 노비, 관노 등도 있었다. 사조의 규정에 따르면 사인들은 사내에서는 지위가 평등했으며, 형제자매처럼 귀천이 없는 것처럼 되어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신분이 높고 재산이 많은 사인들은 사내에서 비교적 많은 권익을 누렸으며, 사읍도 또한 그들과 사원의 통제하에 있기도 했다. 사인이 사망한 후에는 그 신분이 자손에게 계승되기도 했으며, 특별한 사정이 있어 퇴사할 때에는 신청서를 내어 사인과 삼관의 동의를 얻어야 했다.
이러한 둔황 지역 사읍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전체적으로 당말오대(8세기 중엽~10세기 중엽) 이후에는 의읍의 중심적인 활동이 조상(造像)에서 재회로 옮겨가게 되었으며, 나아가 읍사(邑師) 중심의 신앙결사였던 의읍이 사원을 중심으로 하는 사읍(社邑)으로 전화하게 된다. 또한 사읍 역시 순전한 신앙단체에서 경제적인 의미의 상호부조단체로 변화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사읍을 지도하는 사승(社僧)은 읍사(邑師)의 경우처럼 의읍을 순회하면서 포교할 필요가 없었으며, 사원을 중심으로 하는 법회에 모인 구성원들에게 설법하는 방향으로 변화해갔다.
더욱이 당시의 사원은 포교기관으로서뿐만 아니라, 오락기관 내지 물물교환을 하는 상업적 장소, 무진장(無盡藏)과 같은 금융기관, 공공 숙박기관으로서 의미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당시 사원의 성격으로 봤을 때, 그 안에서 치러지는 사읍들의 재회 역시 종교적 성격보다는 친목을 다지기 위한 연회 내지 소속 사원의 후원기금을 모집하려는 부수적인 목적까지 가지고 있었으리라는 점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사원에서 열리는 이러한 재회는 그 사원에 소속된 모든 사읍이 함께 참여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으며, 재회에 소요되는 물자와 경비를 시주하고, 사원의 승려에게 보시할 기금을 마련하는 것이 사읍의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였다.
이처럼 초기 의읍 시절에 가지고 있었던 종교성이 점점 퇴색되어가고, 상호부조적 친목결사의 성격이 강화되어 갔던 사읍은 당 대를 지나 송 대로 들어서면서 또 다른 경향을 보인다. 당대에 유행했던 도교의 영향을 받아 불교결사 안에 도교적 성격까지 스며들기 시작한 것이다. 아래에 송 대의 승려 찬녕(賛寧, 918~999)이 쓴 〈결사법집(結社法集)〉을 인용한다.

진송 간에 여산혜원 법사가 심양에서 교화행을 했는데 학식 높은 선비와 은일거사들이 동림사에 모여들어 모두 향화를 맺고자 했다. 이때 뇌차종, 종병, 장전, 유유민, 주속지 등 연화사를 맺어 미타상을 세우고 아미타정토왕생을 구하니 그것을 연사라 하였다. 결사의 이름이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제 경릉문선왕이 승속을 모집하여 정주법(淨住法)을 수행하니 또한 정주사라 하였다. ……중략…… 지금의 결사는 함께 복의 인을 짓는 것이니 규약의 엄중하고 분명함이 공법보다 더하다. 수행자들은 서로 간에 격려하고 수행하고 깨닫는 것을 성실하게 하니 사에 선을 생하는 공이 큰 것이다. 근자에 들으니, 주정의 땅의 읍사에서 수경신회를 많이 맺어서, 처음 모을 때는 바라를 울리고, 찬불가를 부르며, 사람들이 염불하며 행도를 하거나 사죽을 연주한다고 한다. 하룻밤 내내 잠을 자지 않고 삼팽(삼시충)을 피하여 상제에게 아뢰어 죄에 머물러 목숨을 빼앗기는 것을 면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 도가의 법이니 가끔 무지한 불자들이 경신회에 들어가 작은 이익을 도모하기도 한다. 결사에서 그 근본을 찾지 아니하고 삿된 법을 잘못 행하니 심히 통재라.

찬녕이 본 인용문의 출전인 《대송승사략》을 서술한 것은 송 대(960~1277)인 978년에서 999년 사이로 알려져 있다. 인용문 안에서 말하는 ‘주정의 땅’은 주나라와 정나라의 지역을 말하며, 오늘날의 섬서성과 그 주변지역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찬녕이 활동했던 10세기 말엽까지도 여전히 북방 지역인 섬서성에 읍사가 활동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또한 찬녕의 서술에 따르면 이 시기가 되면 불교 신앙과 도교 신앙이 읍사의 실천 안에 혼재하는 경우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남북조 시대에서 당말 오대까지는 불교신앙을 근간으로 하는 민간결사인 읍사가 송 대에 이르러 도교 신앙까지 수용하는 형태로 전개해갔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는 중국 종교의 주요 특성이기도 한 ‘제종교섭(諸宗交涉)’의 한 유형을 보여준다.
아울러 제나라 경릉문선왕(460~494)이 결사를 맺어 실천했다는 정주법은 한 달에 두 번 수행공동체 내의 구성원들이 모여 지난 수행 기간의 과오를 고백하고 참회하는 의식인 포살(布薩; uposadha)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경릉문선왕의 시대인 5세기에는 불교수행법 중의 하나인 참회의식을 실천했던 북방 지역의 민간 불교결사가 10세기 후반에는 도교 신앙까지 수용하고 실천하는 데까지 이르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4. 중국불교 정착기의 민간포교사: 창도사와 사승

남조에서는 특히 상류사회에서 활발하게 행해졌던 팔관재회 등에서 반드시 창도사가 초청되어 뛰어난 말재주로 비유와 인연담을 섞어서 평이하게 불법을 설명했다. 재회에서는 창도사뿐만 아니라 경사(經師)도 초청되어서 경사가 전독을 하면 창도사가 설명을 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또한 경사가 전독하는 사이에 창도사가 설법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다시 말해, 창도사는 법사 안에서 구성원들의 수행을 가르치고 독려하며, 수행의 근간이 되는 소의경전을 강설했던 전문적인 교화자라고 볼 수 있다.
아래는 《속고승전》에서 창도사로 활약했던 승려 혜명(慧明)에 관한 기록을 발췌해 본 것이다.

혜명이 어디 사람인지는 모른다. 모습과 거동이 오랑캐를 닮은 까닭에 세상에서 ‘胡明’이라 불렀다. 그러나 그의 날카로운 구변과 말재주는 칼날이 솟아오르듯 이에 더하기 어려웠다. 풍운을 몸에 끌어당겨 時事를 평론하면 토해내는 말이 세상을 놀라게 하였고 듣는 사람은 모두 이를 諷頌하였다.……중략…… 진나라 文帝가 세상을 다스리면서 많은 齋를 베풀자 모든 백성이 이 바람을 따라 그 例가 마침내 넓게 퍼지게 되었다. 대중들은 혜명의 말재주가 일단 달리면 생각지 못한 임기응변의 재능이 있다고 하여 모든 唱導할 일이 있게 되면 그를 지목 추대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남방에서 주로 활약했던 창도사와는 전혀 다른 계통으로, 북방 지역에서 민간교화를 위해 노력했던 읍사(邑社)의 사승(社僧)이 있다. 읍사(邑師)로도 불렸던 사승(社僧)은 의읍, 읍회, 혹은 읍사에서 구성원들의 신앙과 수행을 지도하는 교화 책임자로 있던 승려를 말한다. 남북조 시대부터 북방 지역을 중심으로 조상(造像)을 주목적으로 하는 의읍과 같은 신앙결사가 결성되어, 그 조직 안에 1인 이상의 읍사 승려가 있어서 의읍을 순회하며 교화활동을 했다. 하지만 전 장에서 서술했듯이, 당대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현상이 변화하여 의읍, 읍회 등의 명칭이 남방에서는 법사(法社), 사읍(社邑)이 되고, 읍사(邑師)가 사승(社僧)으로 변화하게 된다.
북조 국가에서 의읍이 발달했던 배경을 살펴보면 이들 국가의 왕들이 왕권을 강화, 확립하기 위해 불교의 신이와 방술을 환영했던 것과도 관련이 있다. 승려들은 왕의 고문 역할을 하면서 신이를 드러내고 불교의술 등을 통해 치병 활동을 하면서 왕권 강화에 협조하면서 포교의 발판을 마련했다. 왕실과 귀족이 행했던 사탑의 건립, 불상의 조상(造像)이 민간사회에까지 유행하고, 그로 인해 의읍과 같은 민간결사가 발달하게 된다. 의읍의 구성원인 민간신도, 즉 읍자(邑子)들은 화주(化主)의 권선에 의하여 기금을 모아서 석가·미타·미륵·관음 등의 상을 건립하고, 그 공덕에 의하여 친족의 현세이익과 내세왕생을 기원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하나의 사읍에 읍사 한 명이 있어서 구성원의 신앙생활을 지도하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반드시 하나의 사읍에 한 명의 읍사만으로 규정되어 있지는 않았으며, 한 사읍에 2, 3인의 읍사가 있는 경우도 있고, 한 명의 읍사가 다른 두세 개의 사읍을 겸임하는 경우도 있었다. 읍사는 주로 회원제로 운영되는 사읍을 중심으로 강연했으며, 매월 1회씩 열리는 사읍의 집회에서 강연하거나, 각지의 사읍을 순회하며 교화활동을 했다. 남북조에서 수당에 걸치는 기간 동안 북방에서는 읍사가 의읍의 교화를 담당했으며, 남방의 법사는 창도사들이 맡았지만, 간혹 읍사들이 남방의 법사에 초청되어 설법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창도사가 재회 등에 초청되어 경전을 강설하거나, 수행을 지도했던 초빙강사라고 볼 수 있는 반면에, 읍사 혹은 사승의 경우는 사읍, 의읍, 읍회 등의 일원으로서 조직의 내부에 있는 구성원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북주 폐불 이후 당대 중기를 지나면서 거의 대부분의 경전이 번역되고 중국불교의 모든 종파가 성립되면서 이러한 민간결사의 양상에도 변화가 생겨나게 된다. 회창폐불 이후 귀족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가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되면서, 민간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로 이행되었다. 또한 엘리트 계층에서는 선종을, 민간 계층에서는 정토신앙을 지지했으며, 이들 선과 정토가 중국불교의 주류를 이루게 되는 전환점이 바로 당말에서 오대에 걸치는 시기였다.
국가권력이 커지고 이민족의 문화까지 수용하는 경향을 보였던 당의 통치하에서는 불교에서도 남, 북방 간의 구별이 차츰 사라져서 북방에서도 법사의 결성이 나타나는 등 양자의 융합적인 경향이 나타났다. 그 실례로 《속고승전》에 나타나는 창도사 석도기(釋道紀)의 사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속고승전》에는 석도기(釋道紀)가 천보 연간(742~756)에 업성(鄴城: 삼국시대 위(魏) 나라 서울. 허난 성 임장현 소재)에서 《성실론》을 강론하는 장을 세워 대중을 인솔하다가 그의 옛 문인이 이끄는 대중과 만나게 되면서 승강이를 벌이는 장면이 등장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8세기가 되면 북방에서도 논서를 강론하고 이를 배우는 사람들이 모이는 형태의 결사, 즉 법사가 존재했으며, 도기의 사례처럼 사제간에 다른 결사를 조직하여 한 지역에서 서로 경쟁하는 일도 있었다는 것이다.
도기는 사속(士俗), 즉 엘리트 속인 신도들을 위하여 교화활동을 했으며, 심지어 사녀(士女)들만이 7일에 한 번씩 모이는 결사를 지도하기도 했다. 또한 법사에서 재를 행할 때에는 도살하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는 것으로 보아 육식이나 희생 공양물을 바치는 것을 금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한 지역에서 결사의 목적을 이루면 다시 자리를 바꾸어 다른 지역을 두루 거쳐 가면서 교화를 하여 몇 해 사이에 업성의 인근에서는 그의 가르침을 받드는 사람이 열 집 가운데 아홉 집은 되었다고 한다. 도기가 활동했던 8세기의 업성 지역에서는 법사와 의읍의 지역적 분계가 없이, 북방 지역인 허난 성의 업성에서 법사 형태의 결사를 이끌었음을 볼 수 있는 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창도사가 의읍에 초빙되어 설법하는 사례로서 《속고승전》에 수록된 당나라 법해사(法海寺)의 승려 석보암의 경우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시 탑사를 짓는 데 필요한 물자를 거두는 것이 쉽지 않을 때, 그를 초대하면 그가 설법좌에 앉아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사람들이 시주를 바쳐서 순식간에 자리가 파묻힐 정도였다고 한다. 그가 활동했던 지역은 북방에 속하는 장안이었으며, 경전에서 묘사하고 있는 그의 활동 역시 의읍에 초대된 창도사의 역할로 보인다.
거듭 얘기했듯이, 당 중엽 이후에는 민간에서 활발하게 결성되고 활동했던 의읍, 읍회의 명칭이 사읍(社邑)이 되고, 읍사(邑師)가 사승(社僧)으로 변화했으며, 구성원들의 호칭 역시 읍인(邑人), 읍자(邑子)에서 사자(社子), 사인(社人), 사호(社戶) 등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명칭은 변했으되, 조직의 내용이나 성격은 동일했으며, 사읍의 활동도 종래와 다를 바 없이 재회, 송경, 사경, 인사불(印沙佛)과 사원의 법회를 지원하는 것 등이었다. 그렇다면 기존 남북조 시대의 읍사(邑師)와 비교했을 때 사승의 활동은 어떻게 변화했을까?
종래의 읍회 혹은 의읍의 경우에는 사원과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으며, 내부구성원의 친목과 불교 신앙활동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사읍(社邑)의 경우에는 사원이 중심이 되었으며, 사원에 예속되어 비호를 받으면서 사읍에 사원을 지원할 의무가 부과되었다. 이 점은 읍회와 사읍이 전적으로 다른 부분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사승의 임무도 종전의 읍사와는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원과 사읍의 관계가 상당 부분 경제적 유대에 의해 연결되어 있었으며, 양자의 공존공영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는 점에 비추어 보면, 사승의 활동도 자연 형식적인 것으로 변화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또한 대부분의 사읍이 사원에 모여서 재회를 행했던 것도 기존에 읍사가 여러 곳의 의읍을 돌아다니며 지도를 했던 것과는 다른 결과를 낳았으리라 생각된다. 같은 장소, 같은 구성원들을 지도하면서 읍사들이 매너리즘에 빠지게 될 가능성도 배제하기는 힘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여러 지역의 다른 형태의 의읍을 다니면서 지도하는 이른바 ‘찾아다니는’ 포교에 비해, 사원에 정주하면서 ‘맞아들이는’ 형식은 포교사로서 긴장감이 훨씬 덜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도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5. 나가며

중국불교의 민간 불교결사인 의읍/사읍과 법사, 그리고 그 결사의 지도자 혹은 초빙강사로서 포교활동을 했던 읍사/사승과 창도사에 대해 알아보았다. 읍과 법사로 대표될 수 있는 중국불교의 민간결사들을 시대와 지역으로 나눌 수 있는 분계점은 사실 명확하지 않아 보인다. 수차례에 걸쳐 진행된 폐불과, 북방 이민족의 침입, 그리고 정치적 중심지인 화북 지역의 전란 등이 북방의 불교계 인사들을 남방으로 이끌었고, 이로 인해 남북 간의 불교문화 융합현상이 나타났던 것이 하나의 원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은 결사의 지도자와 구성원의 관계 맺음 방식에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초기 의읍 시기에는 읍사가 결사의 한 구성원으로서 수행과 신앙을 지도하는 형식이었지만, 당말오대 시기로 진행하게 되면 여러 사읍이 하나의 특정 사원에 소속되면서 사승이 관리자의 의미로 변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읍 역시도 의읍 시절의 종교성이 퇴색되면서 사회적 친목과 상호부조의 성격이 강화되었던 것을 볼 수 있다.

법사의 경우에는 시간이 지나면서 중국불교 전체에서 나타나는 종파의 성립과 제종융합 내지 도·불 교섭의 흐름이 그대로 반영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여전히 창도사 내지 강사를 초빙하거나, 지도자 승려가 결사의 구성원으로서 함께하는 형태를 유지하면서 당대에는 《화엄경》 신앙결사, 북송 대 이후에는 아미타 염불결사로 이행했던 것이다.

결국 북송 대 이후부터는 의읍/사읍의 족적이 중국불교사에서 거의 사라졌으며, 법사의 형태를 계승한 불교결사들이 재가지도자 내지 승려의 지도를 받으면서 중국불교에 생명력을 불어넣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무엇보다도 남북조 시대에서 송 대 초기까지 활동했던 민간결사인 읍(邑)이 공덕신앙의 이름으로 둔황, 용문, 운강 등의 석굴과 각종 조상, 불화, 사원 등을 남겨준 주체임을 잊어서는 안 되리라 생각한다. ■

 

김성순 /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HK연구교수. 서울대 종교학과 대학원 졸업(석사, 박사). 박사학위 논문은 〈동아시아 염불결사의 연구-천태교단을 중심으로〉이며 원광대 마음인문학연구소 HK연구교수와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 아시아학과 박사후 연구원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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