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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중생의 삶에서 보살의 삶으로 가는 [탕!] 체험 / 채명식
-장률 감독의 영화 〈경주〉를 8개의 쇼트로 읽는다
[59호] 2014년 09월 01일 (월) 채명식 screendate@hanmail.net

불교 경전에 회광반조(回光返照)라는 표현이 있어요. 직역하면, ‘빛을 돌이켜 거꾸로 비춘다’는 뜻이죠. 경전을 읽든, 부처님의 말씀을 듣든, 취해야 하는 자세고요. 여기서 ‘돌이켜 거꾸로’란 읽은 것(들은 것)은 읽지 않은 것(듣지 않은 것)을 통해 돌아 나와야 한다는 거죠. 회광반조에서 ‘반’을 통해 도달하는 곳은 ‘읽었지만 읽지 않았다’이거나 ‘들었는데 듣지 않았다’는 경지죠. 경전이든 부처님의 말씀이든 그것이 전하고자 하는 뜻을 제대로 이해해야 하지만, 이해했다면 그것에 매이지 말라는 거죠.

경전이 ‘여시아문(如是我聞)’으로 시작하는 것은 회광반조의 정신으로 서술된 것임을 알게 하죠. ‘내가 이와 같이 들었다’는 것은 여시아문 이후 시작되는 세존의 말씀이 세존의 말씀 그대로이지만, 그대로는 아닐 수 있다는 사인이죠. 세존의 말씀은 두 번 돌아 나온 것이니까요. 한 번은 ‘여시’ 때문에 돌아 나오고, 또 한 번은 ‘아문’ 때문에 돌아 나오고요. 이와 같다(如是)지만 그것은 ‘언어’ 때문에 돌아 나온 거죠. 내가 들었다(我聞)지만 그것은 ‘나’ 때문에 돌아 나온 거죠.

관조는 회광반조가 있다는 점에서 그것이 없는 관찰과 달라요. 관찰일 때, 주체는 거기 있죠. 대상을 파악하는 정신이니까요. 관조일 때도 주체는 있어요. 그러나 관찰이 끝낸 자리에서 관조는 다시 돌아 나오기를 시작하죠. 파악하느라 있는 것으로 설정한 주체를 원래부터 없는 것인 자리에다 되돌려 놓죠. 주체가 있다면 주체라고 하지 않았을 것을 없으므로 주체라 한 것임을 통찰하는 거죠.

이 글은 장률 감독의 영화 〈경주〉를 회광반조로 읽고자 해요. 불교적 가르침 없이는 이 영화의 메시지가 제대로 읽히지 않으니까요. 글의 형식은 쇼트 분석이고요. 돌아나오기 위해서는 들어가기 위한 자리도 필요하니까요. 포스터 및 8개의 쇼트는 〈경주〉로 돌아나오기 위한 문이죠. 문 없는 문이죠.

포스터

〈경주〉 포스터는 영화의 한 쇼트를 아무런 가공 없이 제목 붙여 놓은 것처럼 보여요. 그러나 아녜요. 최현(박해일)과 공윤희(신민아)가 함께 탄 자전거 신(scene)인 유사 쇼트가 〈경주〉에 있긴 하지만, 차이가 있어요. 배경이 달라요. 강력한 경주 이미지가 포스터에는 있고, 유사 쇼트에는 없어요. 방금 영화 본 사람조차 구별이 쉽지 않은 차이도 있어요. 공윤희 표정이요. 유사 쇼트에서 공윤희는 최현이 운전하는 자전거에 동승한 인물을 연기하죠. 오늘 처음 만난 사이인데 자전거를 통해 ‘함께’ 가는 사이가 된 사건 때문에 여자의 얼굴엔 긴장이 있었죠. 그러나 포스터 사진에서 공윤희는, 자전거에 타고 있지만 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관객이 발견하도록 연기하죠. 공윤희는 지금 여기 있지만, 여기 아닌 다른 공간으로 가버린 사람처럼 보여요. 이 사실이 느껴지면, 자전거 또한 지금 아닌 다른 시간에서 가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여자의 얼굴에서 아까와 같은 긴장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당연한 거죠.

이상한 느낌은 포스터 언어에서도 와요. “역사를 바꾼 위대한 전쟁이 시작된다”(영화 〈명량〉 포스터 광고)라든가, “마침내 최강의 적을 만나다”(영화 〈다크나이트〉 포스터 광고) 등과 같은 자극적인 카피에 길든 일반 관객에게 “7년을 기다린 로맨틱 시간 여행”이라는 시 같은 언어는 좀처럼 와 닿지 않죠. ‘로맨틱’을 최현과 공윤희 사이에서만 찾으려 하니 쉽지 않을 거고요. 잘 알려진 시간 여행 영화와는 비슷하지도 않고요. 공들여 이해하려는 버릇을 갖지 못한 관객은, 포스터를 통해 영화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죠.

‘7년을 기다린 로맨틱 시간 여행’은 광고가 아니라 화두예요. 어렵죠. 불친절하죠. 그러나 영화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는 분명히 지시해 둔 거죠. 불교적으로 읽으면 저 7년을 신중하게 다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죠. 7은 성수예요. 석가모니 출생 때 7줄기 연꽃이 피었죠.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7걸음 후의 외침이었고요.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의 금강좌에서 무상정등각의 깨달음을 얻은 것은 7일째 새벽이었어요. 7년이란 깨달음을 의미하는 변화 리듬이래요. 그래서 이 글은 저 7년을 경계로 읽어요. 7년 전 최현의 마음은 무명번뇌 상태라 할 수 있어요. 그러나 7년 후 최현의 마음은 청정무구를 경험해요. 여행이 아니라 수행이 일어나고 있는 거죠. 포스터 사진과 언어는 〈경주〉에서 일상의 시간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힌트를 주고 있죠. 머릿속에서 터지는 우당당쿵쾅 [탕!]을 경험하라는 거죠.

두 번째 쇼트

귀국 직후의 최현은 깨달은 자가 아니었어요. 7년 전과 그리 다를 것 없는 무명번뇌 상태에 있었죠. 그래서 그는 자기와 여러 번 마주치는 모녀를 구하지 못해요. 모녀가 동반 자살했다는 사실이 형사인 영민(김태훈)에 의해 나중에 알려져도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지 못하죠. 《금강경》에 이런 가르침이 있어요.

삶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이며, 이슬이며, 번갯불이다. 모든 것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삶이 꿈 같고 헛것 같은 까닭은 깨닫지 못해서죠. 꿈 같은 삶 혹은 헛것 같은 삶이란 영화 〈매트릭스〉에 나오는 매트릭스 체험 같은 것이라 할 수 있겠고요. 그러므로 이 글은 모녀를 이미지 화두로 읽어요. 최현의 깨달음을 촉구하느라 모녀는 환(幻)처럼 최현이 지나가는 자리에 있죠. 여정(윤진서) 이야기를 한다면서 모녀 이야기를 꺼내니 이상하죠?

모녀는 최현의 경주행이 보살행이 되도록 전환시키는 여정의 환이예요. 모녀가 아니었다면 최현의 경주행은, 7년 전의 그가 늘 그랬듯이 여자 편력이었을 거예요. 서울에 사는 여정을 경주로 불러낼 거면서, 최현은 수고롭게도 1박 시 함께할 후보 인원을 확보해 놓죠. 관광안내소 장면이 불필요하다 싶을 만큼 길게 그리고 여러 번 나오는 까닭은 이 때문이죠.

여정: 선배, 나 두 시간밖에 없는데 그냥 근처에서 차나 한잔 하는 게 어때요?
최현: 야, 서울서 여기까지 왔는데 두 시간밖에 없다고? 야, 너무한다.
여정: 그럼 뭘 그렇게 오래 볼려고요?

여정은 최현이 자기를 불러낸 이유를 잘 알고 있죠. 이날은 최현이 이끄는 대로 끌려가지 않을 작정이었고요. 바삐 상경할 생각이었죠. 그런 데에도 경주행을 결심한 것은 최현에게 할 말이 있어서였죠. 아무렇게나 해서는 안 되는 그 할 말을 길거리 점집 할아버지 때문에 자연스럽게 꺼낼 수 있었죠. 다음 날이면 매트릭스 체험이 될 점집 할아버지는 최현과 여정이 함께 있던 그날 거기에 분명 있었죠.

최현: 그 점집에서 뭐라 그러디?
여정: 앞으로 나한테 애가 없대.

말을 마치고 여정은 울기 시작하죠. 최현은 거리 두고 보고만 있고요. 여정의 사연과 울음이 자기와 무관하다 믿은 거죠. 분위기 망치는 발언이라고 비난하고 싶기까지 하죠. 신경주역에 여정이 모습을 보일 때부터 7년 전과 다르다는 느낌은 받고 있었지만, 분위기 전환 능력을 발휘해도 다르다는 느낌은 점점 더 강해지는 참이었죠. 지나치게 서두는 귀경은 불쾌하기까지 했고요. 서울행 KTX 승차 직전이 되어서야 여정은 7년 전 임신에 대해 이야기하죠. 낙태에 대해서도요. 최현은 당황하죠. 몰랐던 사연이니까요. 자기 아이가 될 임신이 있었다는 사실도, 그 아이가 자라나거나 태어나지 못하게 하는 낙태 결정이 있었다는 사실도, 그로부터 7년이나 경과한 뒤인 지금 듣게 된 거니까요. 이별 직전에 여정은 최현 휴대전화 속 자기 사진을 지우죠. 다시 만나서는 안 되는 사이인 것처럼요. 또 만나더라도 만나느라 생긴 흔적 다 지워야 하는 사이가 된 것임을 각인시키죠. 7년간 겪은 상처가 모두 흔적 때문이기라도 한 것처럼요.

최현은 당황스럽죠. 임신 사건, 낙태 사건, 불임 사건, 남편이 저지르는 의처증 폭력의 빌미 사건 등등이 모두 자기가 저지른 로맨스와 무관한 것이 아니었음을 아프게 인정해야 했죠. ‘7년을 기다린 로맨틱 시간 여행’이 여정의 표현일 때 그것은 반어죠. 최현의 무책임한 로맨스와 여정의 지옥 체험 7년이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이야기한 것이니까요.

여정: 선배는 책임지기 싫어하잖아?

여정 때문에, 모녀는 최현이 훗날 [탕!] 체험하게 될 매트릭스 고통이 되죠. 여자아이가 ‘여섯 살’이었으니까요. 7년 전 사건에 속하는 표지일 수 있으니까요. 여정이 출산 선택을 했다면 가능해지는 미혼모 가족 모습이죠.

최현은 경주에서 모녀와 두 번 조우하죠. 여자아이는 최현에게 말까지 걸어왔죠. 구해달라는 요청이었는데, 최현은 그렇게 하지 못했죠. 윤대녕의 〈천지간〉에 이와 비슷한 사건이 있죠. 홍상수의 〈강원도의 힘〉에도요. 죽음이 죽음 곁을 지나가다가 죽음의 그림자 같은 것을 문득 걸어 놓는 일 말이죠. 〈천지간〉의 주인공은 죽음의 그림자에 화답하여 마침내 죽음을 구해내죠. 〈강원도의 힘〉의 주인공은 죽음의 그림자는 봤지만 죽음을 구해내지는 못하고요. 〈경주〉의 최현은 죽음이 자기 앞에서 손까지 내밀었는데도 죽음을 구하지 못했네요.

세 번째 쇼트

공윤희가 노래 〈찻잔〉을 부를 때 최현은 기이한 춤을 추죠. 이 춤은 바라보는 사람에게 엉뚱한 상상을 불러일으켜요. 관객에게도요. 자세 때문에, 누군가를 껴안았다고 생각하게 되는 되죠. ‘누군가’에 대한 상상 때문에 즐거워지는 인물도 있고 참을 수 없게 된 인물도 있죠.

즐거워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느끼는 인물은 공윤희예요. 그녀는 최현이 자기를 위해 춤추는 거로 생각하니까요. 껴안은 것도 아닌데 이미 안겨진 채인 듯한 아슬아슬한 느낌이 간지럽죠. 이상한 인물이라는 것은 눈치챘지만, 돌발적인 재치가 긴장되지만 쾌감이 있어 재밌어하죠.

참을 수 없게 된 인물은 영민이죠. 영민도 최현이 공윤희를 껴안은 것이라 생각하죠. 불쾌한 상상 때문에 영민은 공윤희 쪽을 더 이상 쳐다보지도 못하죠. ‘무례한’ 춤을 추는 최현과 그 춤을 용납하고 있는 공윤희에게 화나 있죠.

영민은 어리석죠. 최현의 두 팔 안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거기에다 애써 공윤희를 집어넣고는 괴로워하는 거니까요. 화가 나는 것만 알지 화가 나는 것에 대해 관조해 볼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니까요. 영민은 직시해야 했어요. 최현의 두 팔 안에 공윤희는 없다는 명백한 사실을요. 있는 것은 화난 자기 마음이라는 사실을요.

다른 사람의 춤이었다면 웃어넘길 일을 최현이라 결코 웃어넘기지 못했다는 것은 열등감인 거죠. 내 것이라 믿었던 것을 빼앗길까 봐 악착같이 옆 사람을 떨쳐내느라 발길질하게 되는 마음인 거죠. 집착은 심해지고 화가 커질 뿐이어서 자기 마음을 다 태워버리고 있어요.

무명번뇌를 청정무구 상태인 공이 되도록 치유하기 위해서는 팔정도 수행이 필요하죠. 그 두 번째 약은 ‘정사(正思)’예요. 정사란 어떤 관점, 어떤 견해, 어떤 조건, 어떤 상황에도 집착하지 않고 오직 생각 이전의 ‘공’인 마음을 간직하는 수행이죠. 정사가 가능해지는 순간 너와 나는 하나가 되는 거고요. 하나이므로 더 이상 이기심, 악의, 적의 등은 생겨나지 않고요.

직시는 공윤희에게서 일어나요. 자기를 아껴주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그래서 영민에게 곁을 준 것인데, 그것이 결혼 후에는 간섭이나 구속이 될 수 있음을 깨닫죠. 자기 마음이 사랑이라고 믿는 사람들이란 그것이 금방 질투로 돌변한 때에도 여전히 사랑인 거라고 착각하죠. 사랑이 금방 폭력으로 돌변한 때에도 여전히 사랑인 거라고 착각하고요. 그래서 시작할 때는 사랑이었는데 끝났을 때는 질투 혹은 폭력이 되어버린 재투성이 마음들만 남아 있는 거죠. 최현이 아니었다면 보지 못했을 영민의 사랑을 공윤희는 직시하게 된 거죠.

최현이 두 팔로 누구를 안고 있는지에 대해 영화는 침묵하죠. 화두죠. 공윤희를 겨냥한 에로틱한 자세가 아니라 고인이 된 창희에 대한 추모일 가능성이 높지만, 설사 그 대상이 공윤희였다 해도 문제 될 것이 없죠. 실체를 껴안은 것이 아니므로 최현의 춤은 자기 아닌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죠. 아무에게도 해가 되지 않으면서 누구에게는 위로가 되는 것이라면, 그것으로부터 영민은 불쾌를 경험할 필요가 없는 거죠. 영민의 불운은 무명번뇌를 관조 못 하는 무지한 마음 때문인 거죠.

《반야심경》은 “모양(色)이 공(空)이고 공이 모양이다.”라고 가르쳐요. 실체라고 생각되는 것들이 실은 실체가 아니라는 거죠. 나무 식탁으로 예를 들기로 하죠. 거기서 밥 먹을 수도 있고 물건을 놓을 수도 있겠죠. 그러나 이 나무 식탁은 언젠가 사라지죠. 부서져서 조각조각이 될 수도 있고, 불타서 재가 될 수도 있죠. 식탁마다 그렇게 마감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다르겠지만, 어떤 식탁도 그렇게 되는 일을 피할 수 없죠. 식탁은 완전히 공인 거죠. 공인 것은 부나 명예 등도 마찬가지죠. 사랑도요. 원래부터 공인 무상한 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영민은 공윤희가 최현과 함께인 그날 밤 지옥 경험을 해야 했죠. 그가 이미 갖고 있다고 믿으면서,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 것인데, 결국 그가 갖게 된 것은 고통뿐이었어요. 공윤희를 정말로 사랑한다고 믿으면 믿을수록 고통은 더 커졌고요. 가질 수 있거나 지킬 수 있다는 생각이 다 ‘환’임을 모르기에 영민의 고통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지요.

네 번째 쇼트

공윤희가 침실문을 열어두자 최현은 촛불을 켜죠. 열려진 침실문이 욕망이라면, 켜진 촛불은 욕망에 대한 화답이죠. 열려진 침실문만 있었을 때, 두 사람은 모두 자기 마음으로부터 열려진 욕망을 보게 되죠. 여자가 침실문을 열어둔 것은 남자에게서 욕망을 보았기 때문이죠. 허락 행위고요. 이미 열려진 침실문을 보고 있을 때, 남자에게 남겨진 선택이란 거의 없죠. 열려진 욕망을 수락하거나 거부하는 거죠. 그러나 거부는 선택하기 어렵죠.

나는 그 방에서 여자의 조바심을, 마치 칼을 들고 달려드는 사람으로부터, 누군가 자기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주지 않으면 상대편을 찌르고 말 듯한 절망을 느끼는 사람으로부터 칼을 빼앗듯이 그 여자의 조바심을 빼앗아주었다. 그 여자는 처녀는 아니었다. 우리는 다시 방문을 열고 물결이 다소 거센 바다를 내어다보며 오랫동안 말없이 누워 있었다.
— 김승옥 〈무진기행〉

〈무진기행〉의 저 문장에서 김승옥이 이야기하는 것은, 남자가 건네준 동침 사인에다 허락 사인으로 여자가 화답했는데, 남자가 동침 행위를 지연시킬 때 여자 마음이 만들어내는 복잡한 내면 풍경이죠.

침실문을 열어 놓는 순간, 공윤희는 방금 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시간을 느껴야 하죠. 최현이 동침 행위를 지연시키면 긴장감은 더 커질 거고요. 그 상태로 시간이 더 흐르면 공윤희는 후회하게 되겠죠. 〈무진기행〉의 여자가 느꼈다는 ‘조바심’과 ‘절망’을 하나하나 떠올려야 하겠죠. 부끄러움까지도요. 쓸데없는 행위를 한 거죠. 열어두지만 않았다면 위안이든 변명이든 가능할 것이었는데요. 촛불이 켜진 것은 이때였어요. 촛불 때문에 여자는, 열려진 침실문을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되죠. 촛불만 보면 되니까요. 여자의 마음은 촛불로 옮겨지죠.

촛불을 켜는 행위에는 내 무명을 밝히고 남을 이롭게 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어요. 부처님의 가르침인 ‘등명’을 통해 고난을 극복하겠다는 의지 표현이기도 하고요. 열려진 침실문이 켜진 촛불이 되자, 최현은 천천히 몸을 움직여 수행 자세를 펼치죠. 팔정도의 정정진(正精進)에 해당하는 행위죠. 정정진이란 참선 수행을 말하는 거예요. 수행은 마침내 자리이타 효과를 완수하게 되고요. 자리이타란, 직역하면 ‘나에게 이익인 것이 남에게도 이익이다’죠. 그 뜻은 ‘자신이 먼저 깨달음을 성취한 후에 남을 구제한다.’고요. 보살행인 거죠.

최현은 자기만 무명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공윤희로 하여금 침실문을 열어 놓기 전인 자리로 되돌아가게 하죠. 허락한 욕망으로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세심한 배려가 정정진의 수행 속에 있는 거죠. 남자 또한 욕망 때문에 시달렸으니까 여자는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죠. 켜놓은 촛불을 마침내 끌 때까지의 수행 시간 동안 욕망과 치열하게 싸운 것임을 지켜보느라 여자 또한 자기 욕망을 끌 수 있었던 거죠.

다섯 번째 쇼트

동침 욕망을 절제시킨 또 다른 요인도 있어요. 공윤희 남편의 유품이라 할 수 있는 그림이에요. 최현에 의하면, 중국 화가 풍자개의 작품이죠.

공윤희: 남편이 죽기 전 며칠 전에 이 그림을 여기다 뒀어요. (최현을 보며) 방금 읽으신 글귀가 무슨 뜻인지?
최현: 사람들 흩어진 후에 초승달이 뜨고, 하늘은 물처럼 맑다.

최현 때문에 비로소 그림의 의미를 알게 되는 순간이죠. 죽음이 임박한 남편이 아내에게 남긴 당부가 거기에 의미 해독 불능 상태로 놓여 있었던 거죠. 오해해선 안 되는 것은 최현이 공윤희의 질문에 답한 것은 그림 속 언어의 번역에 불과한 것이지, ‘남편이 남긴 뜻’에 해당하는 내용을 들려준 것은 아니라는 거죠.

남편의 소망까지 최현이 이야기하는 일은 곤란했어요. 그 소망은, 훗날 이 자리에서 그림을 바라보게 될 아내의 남자인 최현 퇴치용이었던 거죠. 《삼국지》에 “사제갈주생사마(死諸葛走生司馬)”라는 말이 나오죠? ‘죽은 제갈공명이 산 사마중달을 도망치게 한다’라는 뜻 말이어요. 죽은 다음에도 발휘되는 뛰어난 자의 능력을 예찬하려 할 때 쓰는 말이죠. 이런 경우에도 해당하고요. 최현은 알았을까요? 그럼요. 그래서 동침 욕망 중지 노력이 공윤희 쪽에서가 아닌 최현 쪽에서 이루어진 거고요. 남편의 소망이 잘 보이도록 정리해 볼게요.

사람들 흩어진 후에// 초승달이 뜨고, 하늘은 물처럼 맑다.

‘사람들 흩어진 후’란 사별 혹은 이별 같은 것이겠지요. 사별로 읽을 수 있는 까닭은. 인간이 살아 있다는 것은 오온(색, 수, 상, 행, 식)이 인연 연기에 의해 에너지 상태로 뭉쳐진 것이라 죽게 되면 인연이 끝난 것이므로 오온은 ‘흩어지는’ 것이라고 불교는 설명하기 때문이죠. 이 시는 남편의 유언을 대행한다 했으므로, 자기가 죽은 뒤에 아내가 이러이러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담아 둔 것이죠. 그 ‘이러이러했으면’에 해당하는 것이 “초승달이 뜨고, 하늘은 물처럼 맑다”예요.

대승불교는 불교적 가르침을 부처님의 본래 정신에 입각해서 전하죠. 공(空) 사상이 그 핵심이고요. ‘모든 것이 공하다(제법개공 일체개공)’라고 말할 때, ‘모든 것(일체)’이란 삼라만상을 뜻하지만 동시에 개별자들의 관계까지를 아울러 포함하는 것이죠. 그 일체가 공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은 모든 것이 공인 본질을 직시하는 지혜가 있기 때문이고요.

그러므로 물이 맑다는 것은 하늘이 맑다를 의미하게 되죠. 공인 물은 공인 하늘을 그대로 매개할 수 있으니까요. 초승달은 하늘이나 물과 달라 본질이 아니라 현상이죠. 공인 달을 불변성과 가변성으로 나눠 표현할 때, 초승달은 가변성 쪽에 속하죠. ‘하늘은 물처럼 맑은데 초승달이 뜬 것은’ 공이 아닌 초승달조차 공인 하늘과 공인 물과 관계하느라 공인 초승달로 떠 있는 거죠. 초승달 또한 ‘맑다’의 세계를 이룬 거죠. 결국 이 시를 통해 전해지는 남편의 소망은, ‘맑다’로 표현된 어떤 삶이에요. 그 ‘어떤’을 불교적으로 읽으면 제법개공 일체개공의 정신이고요. 아내가 진여의 세계 혹은 반야의 세계를 발견하기를 바라는 거죠.

시로 인한 깨달음은 공윤희가 아닌 최현에게 왔어요. 최현과 공윤희가 그날 밤 동침했느냐 하지 않았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어요. 중요한 것은 최현과 공윤희의 동침은 7년 전 사건인 최현과 여정의 동침 같은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죠. 7년 전 동침은 동침을 위한 동침이었으니까요. 이러한 동침은 업의 씨앗이 되죠. “사람들 흩어진 후에” 다시는 만나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악업의 씨앗이요.

그러나 영화 〈경주〉가 섹스 욕망 자제 혹은 인내를 내포하고 있다고 말하면 안 돼요. 최현은 이제 인내한 적이 없는 상태에 있으니까요. 공윤희도요. 그 밤에 켜놓은 촛불이야말로 인내 표현이 아니었느냐고요? 물론 켜놓기 전 혹은 막 켜놓은 직후의 잠시를 가리켜 인내심이 발휘된 거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러나 그 잠시는 곧 욕망을 있는 그대로 보는 순간과 이어져요. 그리하여 최현이 촛불을 껐을 때는 더 이상 인내할 것이 없는 욕망인 거죠. 7년 전 사건에서 욕망은 분명 있었죠. 그러나 7년 후 사건에서 욕망은 있었지만 없죠. 있다 쪽에서 보면 없는 것이지만, 없다 쪽에서 보면 원래부터 없는 거죠. 최현은 원래부터 없는 욕망을 직시한 거네요. 청정무구인 공을 [탕!] 체험한 거네요.

[엔딩 노래] 텅 빈 마음으로, 텅 빈 마음을 보네. 텅 빈 마음 안에는, 텅 빈 니가 있네. 텅 빈 니 눈 속에는, 텅 빈 내가 있네. 아무도 모르게 너와 내가 있네, 지금.

여섯 번째 쇼트

〈경주〉가 시간 여행이 되는 이유는 춘화(春畵) 때문이죠. 춘화는 7년 전 거기에 있었고, 7년 후 거기에 없죠. 거기 있었는데 없고, 거기 없었는데 있는 게 하나 더 있죠. 그게 바로 공윤희라는 기호죠. 공윤희는 7년 후 찻집 주인이지만, 7년 전 찻집 주인을 가리키는 기호이기도 하죠. 공윤희라는 기호를 쓰는 까닭은, 이 인물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공윤희 유형의 인물임은 분명히 지시한다는 점에서, 두 인물 중 알려진 이름인 공윤희로 쓰겠다는 거죠. 이름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거죠.

춘화도 이렇게 읽어야 해요. 관객이 춘화를 보게 될 때 그것은 7년 전 것이기도 하고, 7년 후 것이기도 하죠. 어느 쪽이든 있지만 없고, 없지만 있는 형태로 존재하죠. 환(幻) 체험이죠. 다음 대화도 이렇게 읽어야 하고요.

춘원: 그림 좋네, 음. (이하 생략) 밖에서 이렇게 딱 벗고. 좋다. 요즘 이런 낭만이 없어요. 그런데 이 남자 얼굴 말이다. (최현을 가리키며) 얘랑 좀 닮지 않았냐? 음?
창희: (최현을 보며) 아냐, 여자를 닮았어.
춘원: 흠후후. 그러네, 어. 야, 홍조 싹 든 게 (최현을 보며) 야 너 닮았다. 야, 봐봐. 허허허허. (그림 가리키며) 그럼 이 남자는 누구냐?
창희: (잠시 침묵한 뒤) 나야.
춘원: 그래, 너다, 씨. 흠후후후. 그러니까 너랑 얘랑 둘이 막 이러고, 아유 볼 만하시겠다. 볼 만하시겠어. 난 그럼 뭐 (그림을 가리키며) 이 학이냐? 음 후후후후.


7년 전 최현은 춘화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했죠. 7년 후 최현은 청정무구의 진여 상태에서 춘화와 만나죠. 7년 전과 7년 후가 섞여서 어느 쪽도 아닌 중도의 경지에서 춘화를 직시하게 된 거죠. 최현은, 비로소, 웃죠. [탕!] 체험을 알리는 염화미소죠. 무엇을 본 것인가요?

창희 혹은 창희라는 기호를 회광반조한 거죠. 동시에 공윤희 혹은 공윤희라는 기호를 관조한 거고요. [탕!]인 이 깨달음에 의하면, ‘춘화 속 남자·창희·공윤희 남편·7년 후 깨달은 최현’은 그리 다를 것 없는 인물이라는 거죠. ‘춘화 속 여자·창희 아내·7년 전 찻집 여주인·최현으로 인해 [탕!] 체험한 공윤희’는 그리 다를 것 없는 인물이라는 거죠.

이 깨달음이 의미하는 것은 ‘창희-창희 아내 커플’이란 춘화 속 남녀의 재연이며, ‘창희 아내’란 ‘7년 전 찻집 여주인’일 수도 있다는 거죠. 아울러 이번 경주행에서 일어날 뻔했던 사건인 ‘최현-공윤희 동침’은, 춘화 속 남녀의 재연이며 ‘공윤희’는 ‘7년 전 찻집 여주인’일 수 있다는 거죠. ‘7년을 기다린 로맨틱 시간 여행’의 정체는 바로 이거죠. 매트릭스인 거죠.

7년 전 최현은 춘화를 차마 쳐다보지 못했죠. 그러나 7년 후 최현은 깨닫죠. 그때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은 춘화 때문이 아니라 분별심 때문이었음을요. 7년 후 최현은 춘화를 직시하게 되죠.

춘화는 수직으로 3등분 구성이에요. 중앙에 배치된 것은 남녀(창희와 최현으로 읽기로 해요)의 삽입 성교예요. 좌측에 배치된 것은 “한잔하고 하세”라는 언어고, 우측에 배치된 것은 꽁지 부분 까만 백조 그림이에요. 좌측과 우측 정보는 모순 관계로 해석할 수도 있고, 협력 관계로 해석할 수 있어요.

모순 관계로 해석할 때, 백조는 ‘선법(善法)’이에요. 중앙의 남녀는 세간법(世間法)이고요. 최현의 볼에 나타난 홍조는 분별심(分別心)이죠. 협력 관계로 해석할 때, 언어는 ‘무애(無碍)’예요. 중앙의 남녀에 대해 공연히 분별심을 낼 필요가 없죠. 《법화경》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와요.

선법(善法)을 배우는 보살도가 세간법(世間法)에 물들지 않는 것은 마치 연꽃이 물속에 있으면서 땅으로부터 솟아오르는 것과 같다.

〈삼국유사〉에 유사한 이야기가 있어요.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이 수행할 때 여자가 찾아오죠. 분별심을 낸 사람은 달달박박이고 분별심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사람은 노힐부득이었죠. 노힐부득이 먼저 해탈에 도달했죠. 이 이야기에 적용하면 창희는 노힐부득에 가깝고, 최현은 달달박박에 가깝죠.

춘화가 세상으로부터 어떠한 평가를 받게 되는지는 공윤희의 춘화 처리 행위에서 읽을 수 있죠. 공윤희가 인수한 가게는 찻집이죠. 그런데 그림은 춘화고요. ‘한잔하고 하세’에 해당하는 공간이 아니죠. 춘화 때문에 남자들로부터 희롱을 당하게 된 공윤희는 마침내 도배지를 발라 가리죠. 분별심이 춘화를 밀어낸 거죠.

그러나 관객은 7년 전 찻집 여주인을 보지는 못했지만, 공윤희처럼 분별심을 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죠. 그래서 춘화가 벽에 걸려 있을 수 있었던 거고요. 그래서 관객은 의문을 갖게 되죠. 공윤희에게 찻집 넘긴 여주인은 어디로 갔을까, 하고요. 찾아볼까요? 두 가지 가능성이 있죠. 춘화 속으로 들어갔거나 창희 아내가 되었거나요.

춘화 속 커플이 세상으로부터 어떠한 평가를 받게 되는지는 춘원이 잘 알려주죠. 춘화 속 커플은 삶에서 성교가 차지하는 강도를 최고치로 설정한 인물들로 취급되죠. 섹스 중독자들이요. 세상 사람들이란 자기들이 세상으로부터 위험 인물들을 잘라내고는 그들 스스로 세상으로부터 등 돌렸다고 왜곡해서 말하기를 좋아하죠.

춘원: 결혼식도 안 하고 혼인신고만 하고 살았다는데, 둘이 그냥 붙어 있느라고, 거 참, 우리 친구들한테 연락 한번 제대로 한 적이 없어.

일곱 번째 쇼트

〈경주〉에는 기이한 장면들이 많죠. 그중 쌍을 이루는 장면이 있는데, ‘손 만지다’와 ‘귀 만지다’죠. ‘손 만지다’는 최현-창희 아내 사이에 일어나죠. 최현-창희 아내가 경주 찻집 거기 춘화를 볼 수 있는 자리에서 이야기하는 장면은 환(幻)이죠. 매트릭스 체험은 관객에게 창희, 창희 아내, 그리고 최현에 대한 기이한 정보를 제공하죠.

창희 아내: 제 말을 믿지 않으실 수도 있겠지만, 창희 씨는 절대 누구에게 살해당한 게 아닙니다. 그 죽음은 창희 씨 스스로 결정한 거예요. 하지만 자살은 아녜요. 그건 정말 아니죠. 고승들은 자신이 열반하는 날짜를 스스로 결정하잖아요. 최 선생님도 아시죠? 왜, 아시잖아요? 그분들은 죽음의 날을 결정하는 순간에 비록 육체는 속세에 있더라도 정신적으로는 속세와의 인연을 다 끊어버린대요. 최 선생님은 이해하시죠? 최 선생님은 이해해 주실 거죠?

창희 아내가 최현을 찾아온 것은 단독 결정이 아녜요. 이 사실을 짐작하게 하는 것이 창희 영정 사진이죠. 장례식에 사용할 사진으로 최현이 찍어준 것을 선택한 사람은 창희였겠지요. 이 선택은 곧 최현에게 전할 무엇인가가 유언 형태로 더 있을 수 있음을 의미하는 거고요. 그러므로 창희 아내의 저 이야기는 창희의 유언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거죠. ‘타살 아니다, 자살 아니다, 열반이다’라는 말을 전하고 싶은 거죠.
이상한 화법 때문에 관객에게 전해지는 또 한 가지가 있어요. 최현에 대한 정보죠. “최 선생님도 아시죠? 왜, 아시잖아요?”의 반복은 최현 또한 이들 부류임을 명백히 하고 있죠. 기이한 사건은 다음처럼 요청되고요.

최현: 형수님, 손 한 번만 보여주시겠어요?

창희 아내가 손을 내밀자 최현은 거기에 자기 손을 얹죠. 잠시 후 끄덕거림이 행해지고요. 끄덕거림은 손에 대한 느낌 표현이 아니라 창희의 열반에 대한 동의인 거죠.

여덟 번째 쇼트

공윤희: 제가 아는 분과 닮았어요. (……중략……) (최현의 귀를 만져보고는)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만져보니 다르네요.

조심할 일이 있죠. 공윤희가 사용한 말에 집착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훗날 공윤희는 깨달음을 얻겠지만, 이날 여기에서는 그렇지 못했어요. 남편의 죽음조차 오해하고 있잖아요. 자살이라고요. 깨닫지 못한 자의 언어로 표현된 것이니, 그것은 남편의 ‘참모습’이 아닐 수 있어요. 공윤희 남편의 ‘참모습’은 창희의 ‘참모습’과 겹칠 수 있어요. 공윤희의 저 ‘귀 만지다’는 최현의 저 ‘손 만지다’와 조응하니까요. 공윤희의 ‘귀 만지다’는 그녀 남편의 유산이고, 최현의 ‘손 만지다’는 창희의 유산인 거예요. 만지다의 대상은 다르지만 그 행위가 지향하는 정신은 크게 다를 것이 없죠.

그러므로 공윤희의 저 말을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닮지 않았다’로 해석하면 안 되죠. ‘닮은 정도는 크고 닮지 않은 정도는 작다.’라고 해석해야 해요. 최현은 공윤희가 만난 남자 중 남편과 가장 유사한 남자인 거죠. 착각 때문에 동침 욕망이 생긴 게 아니라는 거죠. 영민이 그토록 오래 공을 들였지만 공윤희가 그에게 동침을 허락하지 않은 것은 그가 남편 부류가 아니기 때문이죠. 공윤희는, 남편이 살아 있었을 때는 남편의 기이함을 알지 못했던 여자지만, 최현을 통해, 늦었지만 죽은 남편에게서 새로운 매력을 느끼고 있죠. 춘화 위에 덧붙인 도배지를 공윤희가 뜯어낼 때 화면은 암전되고 오직 뜯어져 나가는 소리만이 들리죠. 그것은 분별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공윤희가 텅 빈 공의 세계로 들어가는 [탕!]인 깨달음의 소리죠. ■

 

채명식 / 영화평론가.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동 대학원 국문학과 졸업(석사, 박사과정 수료). 1990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한성여중 교사 역임. 저서로 《소설교육론》 《스크린데이트》 등이 있음. 〈영화예술〉 신인상 수상. 현재 동국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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