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의 눈으로 자본주의를 말한다

1. 들어가는 말

나우루공화국 이야기

1980년까지만 하더라도 태평양 한가운데 폴리네시아의 섬 나우루공화국은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로 미국의 1만 91달러보다 2배나 많았다. 세금, 교육비, 병원비가 면제되고 100% 국가지원으로 해외유학을 갈 수 있고, 매년 한 번씩 1억 원 상당의 연금을 받았으며, 결혼하면 방 두 칸에 부엌과 거실이 딸린 집도 제공받았다. 그래서 그들은 일할 필요가 없었고 집안일도 국가에서 고용한 외국인 이민자들이 대신했다.
이렇게 잘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앨버트로스와 갈매기 등 바닷새의 똥이 산호초 위에 수천 년간 퇴적되어 만들어진 희귀한 인광석 때문이었다. 인산 칼륨이 다량 녹아 있어서 고급비료로 사용했고, 호주와 유럽에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 돈 주고도 사기 어려운 자원이 되었다. 이로 인해 이 나라의 운명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일하지 않아도 통장에 돈이 그득했고, 필요자금은 국가가 지원해주고, 심지어 기름이 떨어지면 차를 버리고 새 차를 구입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할 정도였다. 이런 호사스러운 생활로 습관과 체형이 바뀌었다. 노동은 외국인 이민자들이 하고 자신들은 노동하지 않아 당뇨, 비만 등 각종 성인병에 시달렸다.

마침내 무분별한 채취로 인광석이 바닥을 드러냈고, 생산량이 줄자 수출이 감소하고 국고가 바닥이 났다. 그러나 국민은 여전히 호사스런 생활을 버릴 수 없었다. 일하는 방법과 심지어 자식을 교육하는 방법까지 잊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 풍요를 유지하기 위해 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 난민을 위탁 수용해 원조를 받았다. 불법적인 일에 손도 대고, 국제 테러리스트들의 은신처를 제공했으며 마피아의 돈세탁까지 하는 나라로 전락했다. 결국 2005년 나우루공화국의 경제는 파산했다. 30년 전 2만 달러의 국민소득이 2007년에는 2,500달러로 최빈국이 되었다. 그뿐 아니라 대부분 인광석으로 된 나우루공화국의 채굴로 섬 높이가 낮아진 데다 지구온난화로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이 나라는 통째로 바다에 잠겨버릴 가능성이 높아졌다.

많은 사람들은 이 나우루공화국을 어리석다고 비난하고 조롱한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그럴 자격이 있을까? 나우루공화국은 바로 지구 역사의 축소판이기 때문이다.

2. 지속 불가능한 소비사회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I shop therefore I am)

우리가 접하는 모든 정보는 신문, 방송, TV, 인터넷을 통해 들어온다. 그러나 이들 매체는 상업광고를 유치해야만 작동한다. 광고란 결국 사람들에게 결핍감을 자극하고 욕구를 확장시키며, 구매를 충동하는 것이다. 자신의 삶에 만족하여 더 이상 구매를 하지 않으려 한다면 오늘날 모든 매체는 정보 생산을 중단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현대사회는 더 많이 소비할수록 더 행복하다는 생각을 신념으로 하고 있다. 소비는 곧 생산을 의미한다. 더 많은 생산을 촉진하는 것이 국가경제 성장을 위해 중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선진국과 후진국은 GDP나 GNP로 규정된다. 모두 생산(Product)을 기준으로 서열화하고 있다. 그래서 생산을 많이 하는 나라가 곧 선진국이며, 후진국은 그들 선진국을 발전모델로 삼아 두 자리 또는 한 자릿수 비율의 경제성장을 속도 있게 해나가야 하는 정치·경제적 압박을 받게 된다. 이런 사회에서 기업의 논리는 당연히 빠른 소비를 부채질하고 더 많이 팔기 위해 대량생산이 필수적이다. 기술개발이 가속화되어 더 많은 물건을 생산하고 상품 폐기의 속도는 더욱 빨라지고 있다. 생산은 곧 자원소비를 뜻한다. 이러한 자원소비의 가속화를 지구가 감당할 수 있을까. 오늘날의 경제시스템은 생산만을 유일한 발전과 성장의 기준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그래서 발생하는 자원 소모에 대한 대책이나 대안을 갖고 있을까? 불행히 그렇지 못하다.

현대사회는 마치 계속 구르지 않으면 넘어지는 자전거와 같고, 돌지 않으면 쓰러지는 팽이와 같이 멈춰 설 줄 모르고 더욱 가속적으로 소비를 부추기고 생산을 고조시키고 있다. 폐기물은 지구의 정화 능력과 수용 능력을 넘어서 급격히 넘쳐나고 있다. 보드리야르는 소비가 사용가치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기존의 경제학 이론을 부정하고 ‘행복’ ‘현대성’ ‘사회적 지위’를 얻기 위해 소비한다고 말한다.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자본주의 생산체계가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 사회적 지위의 차이에 따른 상품을 쏟아내고, 사람들은 자신을 포장하기 위해 소비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기호가치’로 인해 더욱 소비를 촉진한다는 것이다.

자원무한주의에 기초한 경제와 정치

끝 간 데 없는 생산과 소비, 폐기가 가능한 것은 무엇에 근거한 것일까? 그것은 자원은 무한하다는 신앙에 근거한다. 산업혁명 이후 우리 사회의 정치와 경제, 지리, 역사, 인문과 예술, 가치관과 생활양식 등의 패러다임은 이런 ‘자원무한주의’에 기초하여 발전해왔다. 그러나 정말 자원은 무한한가?

하나뿐인 지구(Only One Earth)라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우리가 살아가야 할 곳은 지구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동안 인간은 지구의 자연은 당연히 유한하다는 엄연한 사실을 무시하거나 모르고 살아왔다. 현대인들은 중세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어리석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비판한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의 지혜를 과학이라고 믿고 지지한다. 그러면서 현대인은 중세시대의 사람들에 비해 자신들이 더 과학적이고 지혜롭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오늘날 현대인의 자원무한주의 신앙은 중세의 천동설을 사실로 믿고 신봉하는 사람들의 수준과 정확히 일치한다. 잘못된 전제에서 잘못된 결론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천동설을 신봉하는 중세인들처럼 과학적 사실에 근거한 현실을 무시하는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폐기의 생활양식은, 유한한 지구 위에서 가용자원의 한계, 정화능력의 한계, 복원능력의 한계로 지속적인 발전이 불가능한 사회를 초래하는 것이다. 그래서 간디는 “지구는 모든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하지만 단 한 사람의 ‘욕망’을 채우기에도 부족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생태발자국(Ecological Footprint) 지수란 것이 있다. 우리가 자원을 생산하고 소비할 때 이용하는 에너지, 식량, 주택, 도로 같은 인공환경을 위해 쓰이는 자원을 생산하고 또 폐기물을 처리하는 데 필요한 모든 비용을 토지 면적으로 환산한 수치이다. ‘하나뿐인 지구’가 감당할 수 있는 생태 용량은 1인당 1.78헥타르(5,445평)인데 실제 한국인의 평균 생태발자국 지수는 1인당 3.3ha(9,982평)로 나타났다. 지구상의 현재 인구가 의식주를 완전히 해결하기 위해서는 평균적으로 지구 2개의 자원과 서비스를 이용해야 한다고 한다. 만약 전 세계 사람들이 선진국 수준의 자원소비를 하게 된다면 9개의 지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자원무한주의를 토대로 하는 오늘날의 산업사회에서 가용자원의 한계는 ‘자연자원 매장량의 유한성’ ‘외적 교란에 대한 생태적 수용 능력의 한계성, 그리고 생태적 파괴에 대한 비가역성’에 의해 도전받고 있다.

지속 불가능한 발전과 소비

많은 나라들은 구미나 일본과 같은 물질적 풍요를 이룬 사회를 부러워하고 미국식 생활양식(American life style)을 지고지순의 목표로 삼아왔다. 1960~70년대 우리도 미국식 발전을 부러워하며 그들처럼 되기 위해 노력했고 상당한 성공을 이루었다. 이제까지 이런 식의 발전은 별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1992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유엔환경개발회의에서 ‘환경적으로 건전하고 지속가능한 발전(Environmentally Sound and Sustainable De-velopment)’이라는 개념이 확대되면서 전 세계는 본격적으로 ‘위기’라는 말이 일상화되기 시작했다. 그 위기의 본질은 모든 나라가 미국이나 유럽, 일본 등의 소비 양식인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폐기를 따르는 데 있다고 보았고, 그로 인한 피해는 이미 회복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고 경고했다. 날로 심각해지는 지구 온난화로 대표되는 기후변화는 인간의 화석연료 대량소비를 근간으로 하는 발전 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진단한 것이다.

지구 70억 인구 중에 미국은 5%가 안 되는 3억을 조금 넘는 인구를 차지하면서 전 세계 석유소비량의 25%를 소비한다. 또한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미국과 유럽, 일본 등의 잘사는 나라 20%의 인구가 전 세계 화석연료의 82%를 소비하고 있다고 한다. 환경위기는 바로 이들이 소비하는 화석연료로 인한 것임은 너무도 분명하다. 만약 미국과 같은 생활양식이 정당한 것이라면 80%의 가난한 나라도 마땅히 그 같은 경제적 수준으로 성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만일 13억의 중국과 12억의 인도, 더 많은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그들과 같은 소비 수준을 유지한다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위기는 더욱 가속화되고 지구는 곧 결딴날 것이다. 오늘날 자원무한주의를 신봉하면서 수직적 고도성장을 지향하는 사회는 지속 불가능한 사회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오늘날 소수의 풍요는 두 곳으로부터 착취를 하고 있는 셈이다. 하나는 80% 가난한 나라 사람과 골고루 나눠 써야 할 자원을 20% 소수의 잘사는 나라 사람들이 빼앗아 쓰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미래 세대가 써야 할 자원까지 착취하며 빼앗아 쓰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더 깊이 살펴보면 가난한 나라 사람들의 가난 덕분에 위기가 유보되고 있으며 소수의 풍요와 소비적 삶이 지속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선진 소비 국가들의 발전이 스스로의 노력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가난한 나라를 착취하고 미래 세대의 것을 빼앗아 소비한 덕이며 큰 죄업을 짓고 있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지속가능한 발전(SD)을 정의할 때 일반적으로 ‘미래세대의 가능성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의 발전’으로 정의를 내리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원무한주의를 신봉하며 수직적 고도성장을 지향하는 사회는 지속 불가능한 사회이다. 오늘날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사회는 ‘전환’을 강제당하고 있다. 소비의 형태가 달라진다는 것은 곧 생산이 바뀌는 것을 의미하며 나아가 경제 전반의 가치와 문명적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3. 소비에 대한 불교의 가르침과 관점

모든 사건과 사물은 우주적 작품이자 연기적 결과

아난다가 우전왕의 왕비인, 샤마바티로부터 500벌의 옷을 공양받았을 때 아난다는 이것을 쾌히 받았다. 왕은 이 말을 듣고 아난다가 욕심의 마음으로 받은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했다. 왕은 아난다를 찾아가 물었다.
“존자는 500벌의 옷을 한꺼번에 받아서 어떻게 하시렵니까?”
아난다가 대답했다.
“대왕이여, 많은 비구들이 헌 옷을 입고 있으므로 그들에게 이 옷을 나누어 주겠습니다.”
“그러면 헌 옷은 어떻게 합니까?”
“헌 옷으로는 요를 만들겠습니다.”
“헌 요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베갯잇을 만들겠습니다.”
“그럼 낡은 베갯잇은요?”
“침상의 깔개로 사용합니다.”
“낡은 깔개는요?”
“방석을 만듭니다.”
“오래된 방석은 어떻게 합니까”
“걸레로 만듭니다.”
“오래된 걸레는요?”
“대왕이여, 우리는 그 걸레를 잘게 찢어서 진흙과 섞어 집을 만들 때 벽속에 넣습니다.”
물건을 소중하게 사용해야 한다. 생산적으로 활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내 것’이 아닌, 내게 잠시 맡겨진 물건을 사용하는 방법이다.(《불교성전》의 《법구비유경(法句譬喩經)》)

위의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저 철저히 아끼고 재사용하며 끝까지 사용하는 절약정신의 계몽만으로 해석한다면 불교의 내용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연기를 보면 법을 보며 법을 보면 곧 연기를 본다(若見緣起便見法 若見法便見緣起)는 연기의 세계에서 모든 실체는 의상조사의 〈법성게〉에 다음과 같은 깨달음의 이치를 담고 있다.

一中一切多中一 하나 속에 모두 있고, 여럿 속에 하나가 있네
一卽一切多卽一 하나가 모두이고 모두가 하나이네.
一微塵中含十方 작은 한 티끌 속에 시방세계가 담겨 있고
一切塵中亦如是 낱낱의 티끌마다 시방세계가 들어 있네

“좁쌀 하나 속에 우주가 있다.”는 무위당 장일순의 말은 바로 〈법성게〉의 내용을 바꿔 표현한 것이다. 쌀 한 톨이 있기 위해서 태양이 필요하고, 바람이 필요하며, 비가 내려야 하고, 새가 울어야 한다. 또한 벌레가 있어야 하며, 우주의 모든 것이 연관하여 작용해야 존재하는 것이다. 나아가 시간적으로 역사 속의 모든 인간과 동식물, 무생물 등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낱알 하나는 가히 우주적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쌀 한 톨이 한 가마보다 양적 가치로 보면 작을지 모르지만 생명적 가치는 동일하다. 쌀알만이 아니라 모든 물건, 모든 생명이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연기적인 가치, 우주적 생명가치를 보면 그것은 소중하고 고귀한 성스러운 것이다. 이를 토대로 깨달음의 눈으로 보면 이른바 ‘가격’이란 인간만의 합의일 뿐 우주 생명 하나하나는 고유의 가치를 표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이렇게 생명과 사물에 대한 불교의 시각은 단지 물건을 아끼고 자원을 소비하지 않는다는 관점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물건이 갖고 있는 우주적 생명가치를 발견하고 깨닫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다시 말해 불교에서 소비와 절약 이전에 물건을 어떻게 보고 있으며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의 문제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틱낫한 스님은 종이 한 장의 깨달음을 통해 종이와 관련되지 않은 것은 우주에 단 하나도 없다고 말하면서 종이가 갖는 우주적 사건의 위대함을 역설했다. 모든 물건은 우주적 가치로 소중하다. 따라서 우주에서 ‘쓰레기’란 없으며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자연계 내에서 생명 가치를 지니고 있고 그 존재 가치는 동일하다.

또한 마지막 문장 ‘내 것이 아닌 내게 맡겨진 물건’이라는 표현은 무소유의 불교사상을 토대로 소유란 단지 ‘내 것’이 아니라 ‘내게 맡겨진 것’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으로, 자원과 자연을 바라보는 놀라운 시각을 제공해주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바로 ‘자원은 미래 세대의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잠깐 빌려 쓰고 있는 것’으로 정의하는 지속가능한 발전 개념의 사상적 기조가 된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4. 소비시대의 극복을 위한 공동체의 모색

자발적인 가난, 주체적인 청빈의 조직화: 공동체 운동

오늘날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물질 중심, 양적 성장의 사회로부터 정신적 가치와 삶의 질을 중심으로 한 사회로 전환한다는 것은 과거에 대한 단절과 선택에서 비롯될 수밖에 없다. 욕망을 부추기는 홍보와 광고로 둘러싸인 현대사회에서 과연 욕망의 절제와 포기, 자발적인 가난과 주체적인 청빈이 가능할까? 몇몇 소수 종교인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집단적 흐름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때로 대안적 공동체 시도를 비판하는 사람은 탐욕과 야만의 사회를 방치한 채 문 닫고 들어가 개인적인 안빈낙도만을 추구하며 사회변화에 무관심한 반사회적인 행위로 비판받기도 한다.

이런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구상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욕망의 주류사회에서 벗어난 해방구, 섬을 구상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한 개인이 아니라 의지와 결의를 같이하는 그룹이나 집단의 시도와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른바 ‘대안운동’으로 명명되는 공동체 운동은 ‘나를 따르라’는 깃발운동이 될 수 없다. 오탁악세의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대안을 실험하는 그룹이지 대안적 점검이 완료되어 모두가 가야 할 대안적 방향임을 주장하는 운동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생태학자인 오라이어던은 생태적 지속가능한 사회의 전략모델로 다음과 같은 4가지 유형이 있다고 말한다. 첫 번째는 국제적 조직을 통한 ‘새로운 세계 질서’로, 전 지구적 정책변화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유엔을 통한 지속가능한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두 번째는 ‘중앙집권적 권위주의’ 주장으로, 환경위기가 심각하지만 자발적으로 복종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국가의 강력한 권위를 통해 해결한다는 입장이다. 세 번째는 ‘권위주의 코뮌’적 해결이다. 이것은 중앙정부가 아니라 지방분권에 의거하여 지역실천단위를 통한 실천이다. 네 번째는 ‘무정부주의적 해결’이다. 세 번째의 입장과 코뮌적 시각은 공유하지만 권위와 정책 결정의 위계적 중앙집중성을 부정한다. 비위계적인 지역 단위의 공동체 건설이 이와 같은 모델이다. 오라이어던은 마지막 무정부주의적 해결이 생태적 지속가능한 사회의 이상적인 모델에 접근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들은 모두 위기상황의 해결을 위해 배타적으로 하나만을 선택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모든 것이 다 의미 있으며 동시에 관심을 두고 실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비시대의 극복을 위한 공동체의 시도

공동체는 일종의 실험실이다. 새로운 의료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수많은 임상시험을 하듯이 공동체는 새로운 사회와 인간관계에 대한 실험실이다. 또 공동체는 일종의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곳이다. 각박한 사회 속에서 자신을 정화하고, 치유하며, 갈증을 풀고, 올바른 정신을 회복하는 곳이다. 또한 대부분의 공동체는 ‘무엇으로부터 탈출’의 성격을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무엇에 대한 추구’를 하는 곳이다.

수많은 대안적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공동체적 생활을 모색한 것은 첫째, 그 속에서 정신적인 성장, 영적 성장뿐아니라 심리적 정화와 깨달음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숭산 스님이 만든 프로비던스 선원이나 틱낫한 스님이 만든 프랑스의 자두마을(Plum Village), 미국의 단풍림 승원(Maple Forest Monastery), 청산법당(Green Mo-untain Dharma Center), 녹야원 승원(Deer Park Monastery) 등이 바로 그러한 공동체이다. 이러한 수행공동체에서는 밥하고 빨래하고 농사일과 바느질하는 모든 것이 다 자신을 살피는 수행이 된다.
둘째는 사람끼리 사랑과 배려, 애정과 인정이 어우러진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미래의 대안적 가족이다. 내 것과 네 것 없이 공유하고 사랑하고 배려하고 아끼면서 상호부조하는 삶을 살 수 있다.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항상 기쁨을 나누고 슬픔을 위로할 사람이 가까이 있다는 것은 큰 행복이 아닐 수 없다.

셋째는 공동체에서는 사회적 약자들이나 소수자들이 서로 동지애를 느끼면서 상호부조하고 협력하며 살 수 있다. 이곳에서 소외란 있을 수 없으며 성차별, 인종차별, 폭력이 없는 작은 사회를 만들어 치유받으며, 차별받는 여성이나 성적소수자, 장애자들이 서로 행복한 공동체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는 돈을 많이 벌지 않고 가난한 삶을 살아도 풍요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돈 중심의 경쟁사회에서 개인이 물질적 삶을 포기하고 청빈한 삶,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사는 것은 대단히 힘들다. 그러나 공동체에서는 가능하다. 집집이 하나씩 냉장고를 구비할 필요도 없고, 모두가 큰 집을 갖고 있을 이유가 없다. 개별적인 공간을 최소화하고, 손님을 위한 방이나 부엌, 세탁실 등은 공동으로 사용하고, 집기나 장난감, 책이나 물건들을 교환하고 공유하며 사용한다. 이처럼 개인이 공동체의 모든 것을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풍요로움을 느낀다.

다섯째는 인간의 삶에 대한 다양하고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다. 불교의 수행공동체도 깨달음을 얻기 위해 자신들만의 공동체에서 인간의 정신적인 가능성을 실험하고 실현했다. 관법, 염불, 화두선, 간경, 주력 등 우주의 실상을 깨달아 궁극의 경지에 갈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승가공동체에서 실험되어 전해져 왔다. 한국의 정토회 경우도 공동체이기 때문에 의사결정에서 ‘삼의제’라고 하는 승가의 전통적인 의사 결정 방식을 계승하여 현대화하는 민주주의의 실험을 할 수 있었다. 아랍과 이스라엘, 러시아, 미국 등의 분쟁 조정을 교육한 하버드 협상팀의 집단동력학(Group Dynamic) 기법도 캘리포니아의 에살렌 공동체에서 실험된 결과물이다.

여섯 번째는 다양한 봉사와 사회적 실천이 효율적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일종의 새로운 사회를 위한 씨앗이다. 따라서 그들은 삶을 통해 미래의 희망을 주는 것이며, ‘삶을 사는 것’을 통해 사회의 변화를 주는 것이다. 아프로베초 공동체의 경우는 세계적인 땔감 부족에 대한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해 일하는 평화봉사단에 대안적인 기술을 가르치고 있고, 뉴욕의 사우스브롱크스에서는 무료 구급차를 운영하고 있다. 팜 공동체는 국제구호기관에 제3세계의 의료기술과 농업기술을 가르치고 있으며, 정토회도 긴급구호활동과 평화운동, 환경운동 등의 실천을 하면서 친환경 삶이 과연 어느 정도까지 가능한가를 공동체에서 수년 동안 실험했고, 그를 토대로 ‘쓰레기제로 운동’과 ‘빈그릇 운동’을 전개하여 왔다.

공동체의 다양한 유형

공동체는 다양한 형태를 가진다. 첫 번째의 유형은 공동소유, 또는 무소유 공동체(Communes)이다. 대체로 하나의 공간에서 함께 생활한다. 동시에 구성원들끼리 공동생산하고 공동으로 소유하는 공동체, 지갑이 하나인 공동체이다. 초기불교의 승가공동체나 가톨릭의 수도원이 여기에 속하며 이스라엘의 ‘키부츠’, 일본과 우리나라의 ‘야마기시회’나 문경과 서초동에 있는 ‘정토회’, 태백의 ‘예수원’, 울진의 ‘한농복구회’ 등이 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둘째로는 공동주거 공동체(Cohousing)이다. 덴마크에서 시작된 공동주거 운동은 생각에 맞는 사람들끼리 함께 공동으로 주택을 짓고 살면서, 개인적인 소유를 기반으로 하되, 부분적으로 공동공간이나 공동소유를 통해 협력적인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귀빈래 마을’ ‘안솔기 마을’, 40세대 200여 명이 사는 영동의 ‘백화마을’, 안성의 금광호수 주변에 10가구가 같이 집을 짓고 사는 ‘들꽃피는 마을’, 홍성의 문당리에서 만든 20여 가구가 사는 ‘한울마을’의 사례가 있다. 또 최근 박원순 서울시장이 도시 재개발의 좋은 모델로 극찬한 마포 성미산의 ‘소행주(소통이 있어 행복한 주택)’ 1호와 2호, 3호가 있다. 또한 정토회 출신 청년들이 인천의 검암에 공동주택 2개를 만들어 17명이 살고 있는 ‘우동사(우리 동네 사람들)’라는 공동체가 있다.

셋째로는 생태마을 공동체(Ecovillage)로 전통의 두레 공동체의 현대적 버전으로서, 마을 사람들끼리 보다 공동체적 상호지원과 협력적 관계를 높여, 자치와 자립적인 마을을 만드는 것이다. 실상사 사찰의 ‘사부대중공동체’와 실상사 지역공동체인 ‘한생명공동체’, 부산의 ‘물만골 공동체’, 괴산의 ‘솔뫼농장’ ‘홍성 문당리 마을공동체’ 등이 이에 속하며 일본의 마을 만들기(まちづくり) 같은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넷째, 협동조합적 공동체(Co-ops)이다. 공동생활이 아니라 공동생산, 공동소비, 공동판매 등을 중심으로 서로 협력하는 공동체이다. 노동자협동조합, 생활협동조합으로 괴산 ‘솔뫼농장’, 장성 ‘한마음공동체’, 원주의 ‘협동조합 복합체’ 등이 있으며 이스라엘의 ‘모샤브’나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몬드라공 협동조합 공동체’ 등이 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다섯째로는 네트워크 공동체(Network)로, 같이 생활하고 생산하는 것은 아니지만 부분적으로 상호부조하면서 협력하는 공동체이다. 대체로 온라인상의 네트워크와 같이 동반하여 활동하고 있는데, 의미 있는 것만을 본다면 LETS(Local Exchange & Trading System)으로 불리는 ‘지역통화(Local Money)’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전의 한밭레츠의 ‘두루’ 서울의 미내사(미래를 내다보는 사람들의 모임)의 ‘FM money’, 서초와 송파 자치단체에서 운영하는 ‘서초품앗이’ ‘송파 품앗이’, 과천의 ‘과천 품앗이’ ‘어울림 품앗이’, 성남의 ‘문화통화’, 대구의 ‘희망품앗이’, 구미의 ‘사랑고리’ 등이 여기에 속한다.

여섯째, 사찰과 법당 등의 불교공동체(Buddhist Community)와 같은 종교 공동체이다. 그동안 불교는 스님과 신도들의 수직적 관계만 있을 뿐, 신도들 간의 횡적 유대와 공동체성은 부족했다. 해외의 교포들은 교회를 나가지 않으면 현지의 정보를 얻기도, 직업을 구하기도, 도움을 청하기도 어렵다. 미국이나 유럽의 기독교 인구는 줄어들지만 한국인들의 교인 수가 늘어나는 것은 바로 교회가 교인들 간에 상호부조하고 협력하는 공동체성을 띠기 때문이다. 서툰 외국어보다 편한 모국어로 대화하며 위로받고 격려받는 곳일 뿐 아니라, 교회가 공동체 역할을 하기 때문에 신앙적으로 냉담해도 교회 공동체만은 저버릴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종교는 신도들 간에 상부상조하고 협력하는 공동체로서 기능이 아주 중요한데 한국불교는 그러한 기능을 그다지 개발시키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 불교가 나가야 할 방향의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5. 불교공동체의 실천과 가능한 시도들

공동소유 공동체(Communes)의 실천과 가능한 시도

공동소유 또는 무소유 공동체로서 유형은 초기불교의 승가공동체와, 이것을 현대사회에 구현하려고 한 정토회를 꼽을 수 있다. 정토회는 1988년 3월 홍제동과 명륜동에 각각 정토법당과 한국불교 사회교육원과 불교사회연구소를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법륜 스님과 1980년 초부터 대불련을 비롯한 불교 내 학생운동과 사회운동을 전개해온 일군의 불교활동가들이 ‘일과 수행의 통일’ ‘사회의 변화와 개인의 수행을 함께하는 수행공동체’로 출범하였고, 1993년 3월부터 본격적으로 1만 일 결사를 시작했다. 그래서 1천 일마다 전 결사자들이 모여 활동을 원점에서 점검, 조정하고 모든 직책을 바꾼다. 또한 100일마다 모든 결사자가 모여 자신의 수행을 점검하고 사회적 실천을 새롭게 시도하는 일을 한다.

정토회는 ‘맑은 마음, 좋은 벗, 깨끗한 땅’을 기치로 만들어진 서원공동체이다. 현재 서초동에 약 50여 명, 문경에 약 70여 명이 함께 생활하면서 매일 아침 기도와 발우공양, 매월 포살과 분기별로 자자를 실시하는 생활공동체 성원이 있다. 이들은 가능한 한 부처님의 초기 공동체적 삶을 기조로 수행하면서 살아가려는 공동체이다. 이들 생활공동체 성원들과 별개로 전국 45개 법당의 약 5,000여 결사자들이 공동수행 활동을 하며 더욱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정토회 법당은 일반 사찰 기능보다 수행과 사회적 실천을 위한 커뮤니티 센터로서 역할을 한다. 결사자를 비롯한 신도들은 매일 아침 5시에 기도하며 ‘수행, 보시, 봉사’를 해야 하며 매주 1회 이상 법회 참석과 더불어 다양한 사회활동을 전개하게 되어 있다.

사회활동으로서 우선 중요한 것은 문경수련원에서 진행되는 각종 수련이다. 특히 ‘깨달음의 장’은 매주 수요일부터 일요일까지 4박 5일간 20명을 한 팀으로 진행되며, 불교의 화두선을 종교적 색채 없이 진행하는 수련프로그램이다. 현재 매주 3~4팀을 동시에 운영하는 성황을 이루고 있는데, 2014년 6월 현재 1,170차 수련이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위빠사나 수행을 현대화시킨 ‘나눔의 장’, 노동선을 토대로 한 ‘일체의 장’과 ‘명상수련’ 등을 진행하고 있다.

동시에 정토회는 사회운동체로서 내부의 환경기구인 ‘에코붓다’를 두고 쓰레기 제로 운동, 빈그릇 운동 등의 켐페인을 전개했고, 북한의 기아와 인권 해결을 위해 평화인권기구인 ‘좋은 벗들’을 운영하고 있다. 또 인도, 필리핀, 캄보디아, 미얀마,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활동하는 국제개발협력기구인 ‘한국JTS’ 등이 활동하고 있다. 대부분의 정토회 신도들은 수행과 사회활동을 반드시 함께 하도록 되어 있다. 앞으로 이러한 승가공동체의 모델은 현대사회에 다양한 형태로 시도되어 불교의 미래와 방향을 제시하는 모델이 되어야 할 것이다.

공동주거 공동체(Cohousing)의 실천과 가능한 시도

앞에서 언급한 대로 공동주거운동은 생각이 맞는 사람들끼리 시도해볼 수 있는 공동체이다. 보통은 건물을 짓기 전에 함께 살 사람이 일 년여 동안 토론하고 준비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각자 원하는 모양과 가족에 따른 구조, 관계 맺는 방식을 받아들여 건물의 설계를 마련한다. 서로 관계의 수준에 따라 공간의 성격도 달라진다. 세탁기와 부엌을 같이 쓰고 같이 밥을 해먹을 수도 있고, 따로 할 수도 있다. 일주일 또는 매월 1~2회의 식사와 대화 모임을 갖는 방식의 공동주거를 시도할 수도 있다.

영동의 ‘백화마을’은 2년 넘게 일반인들에게 분양하여 만든 코하우징으로 40가구가 모여 대화하고 교육하면서 만들어진 공동체이다. 안성의 ‘들꽃피는 마을’은 이미 안성 지역에 살고 있는 의료생협 가족들과 정토회 멤버들이 2년여에 걸친 40여 회의 대화를 통해 만들어진 공동체이다. 마포 성미산 마을의 ‘수행주’는 이미 오래된 마을공동체 운동의 성공을 토대로, 보다 더 생활을 깊게 공유하면서 주택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9가구가 모여 구성되었다. 함께 토론하고 여행도 다니면서 오랜 논의 끝에 1층에는 마을 가게, 2층에는 공동부엌 겸 공동체 회의 공간, 3층부터 위층은 9가구가 사는 주택을 만들었다. 각 주택은 주인의 성격과 취미, 가족구성원에 따라 설계가 다 다르다. 또 저녁밥을 해주는 분을 고용하여 저녁식사를 같이 하기 때문에 주부가 저녁식사 준비의 부담을 갖지 않는다. 아이들이 어느 집이나 초인종을 눌러 놀러 갈 수 있고, 어디든 아이들을 돌봐줄 수 있으며 집과 집을 맨발로 다닐 수 있다. 가까운 이웃들이 수시로 대화하고 놀며 파티도 하는 행복한 이웃을 둔 공동체이다. 소행주는 이미 가까운 곳에 2호와 3호를 냈고, 4호를 준비 중에 있다.

또 다른 형태로 인천 검암의 ‘우동사(우리 동네 사람들)’는 정토회에서 같이 활동하던 젊은이들 중 한 쌍이 결혼하자, 아예 큰 집을 임대하여 같이 활동했던 사람들 8명이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아침마다 기도를 같이하고 수행도 같이하며 공동의 청규를 만들어 생활하고 있다.

또한 ‘카페 50’이라는 협동조합 카페를 만들어 서초동과 불광동에서 운영하고 있다. 모두가 직장을 다니지만, 아직 직장이 없는 친구들도 와서 살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기도 하다. 최근 결혼한 한 쌍이 근처에 또 집을 얻어 또 우동사 2호를 내 9명이 입주해 살고 있다. 이들은 정기적으로 공부도 하고 농사도 짓고, 같이 놀기도 하는 젊은 공동체이다. 최근 박원순 서울시장은 소행주를 비롯한 코하우징 공동체에 감동하며 이웃과 이웃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공동 공간을 두고 스스로 협의하면서 살 집을 짓는 코하우징 형태의 재개발을 추진하려고 하고 있다. 이러한 유형의 공동체는 불자들이 더 관심을 갖고 시도해 볼 모델이다.

마을공동체(Ecovillage)의 실천과 가능한 시도

지금 한국사회 발전의 한 기조가 있다면 ‘마을공동체 만들기’ 붐이다. 서울의 성미산, 성북동 등의 마을공동체와 농촌의 괴산, 무주, 홍성, 진안, 부산의 반송마을, 물만골 공동체 등 전국 곳곳에 다양한 마을살림 공동체를 만드는 일이 지역사회단체엔 큰 관심거리가 되고 있다. 이 마을공동체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모델이 바로 실상사를 중심으로 한 산내면의 ‘한생명공동체’이다.

실상사의 마을공동체를 만든 인드라망 생명공동체는, 서울에서 실시된 ‘인드라망 생협’과 ‘불교귀농학교’가 초기에 중심 역할을 했다. 후속 교육으로 실상사에서 3개월에 걸친 장기귀농학교를 했으며 이곳에서 배출된 사람들이 지역에서 사단법인 한생명과 생명문화학교, 흙집, 천연염색, 산내여성농업인센터, 지역생태농업센터, 대안의료, 둘레길 조성사업, 수련기구인 귀정사와 대안학교인 실상사 작은 학교를 운영하면서 지역사회 공동체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최근 농촌인구가 급격하게 줄어들고 학교가 폐교되는 데 반해 이곳 산내면은 인구가 늘고 학생 숫자가 증가하는 특이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실상사의 사찰내의 공동체로서 ‘사부대중 공동체’는 출가 부문은 실상사 사중소임 스님, 화엄학림, 화림원, 약수암, 서진암, 백장암 스님들이 그 역할을 하고 있고, 재가 부문에서는 실상사의 재가대중과, 실상사귀농학교, 한생명사무국, 산내여성농업인센터, 대안학교인 실상사작은학교, 지리산영농조합법인 등이 그 역할을 하고 있다. 고려시대 ‘승도(僧徒)’를 모델로 하는 지역공동체를 만들어 나가고 있는데, 현재 많은 사회단체들 사이에서 유명해져 마을공동체 운동의 명소로 많이 찾아오는 곳이 되었다.

이러한 마을공동체 모델은 앞으로 미래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합의하고 있는 한국사회가 지향해야 할 방향이다. 다시 말해 지역분권과 주민자치가 바로 한국사회의 변화 방향이며, 향후 조계종단도 그러한 변화의 방향과 조응하여 사회활동을 전개하여 나가야 한다.

앞으로 사찰의 불사를 한다면 산중 사찰이 아니라 시내에 불사를 해야 할 것이다. 대중들에게 접근하지 않는 종교가 어찌 미래 사람을 위한 종교라고 할 수 있겠는가. 대기업이 10년 먹고살 아이템을 준비해두지 않으면 미래가 없듯이 불교 또한 장기적인 미래 구상을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시내 지역공동체센터를 건립하도록 하여 현재 줄어드는 대학생들과 청년들이 참여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고 지원해야 한다.

처음에는 교육사업을 우선으로 하여 ‘지역공동체를 만드는 것’에 중심을 두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도록 한다. 교육을 통해 사람과 사람을 연결시키고, 단체와 단체를 관계 맺게 하여 불교교리, 교양강좌, 사회강좌, 불교문화, 불교 전통, 다도, 사찰답사, 사찰생태 기행, 사찰 가이드 등의 불교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한편으로 인권교육, 다문화가정교육, 평화교육, 환경교육, 여성문제교육, 개발지원훈련교육, NGO교육, 통일교육, 교사교육 등 다양한 사회교육을 실시하여 이들을 조직화하면서 상호부조하는 지역공동체 공간으로서 자리를 잡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다양한 리더십을 발굴 양성하되, 교육과 조직화의 모든 방향은 역시 ‘지역커뮤니티(공동체)’를 목적으로 수렴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 활동은 ‘지역을 알고 이해하기’ ‘지역을 가꾸고 지키는 일’ ‘지역의 일꾼이 되는 일’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지역문화 위원회, 지역경제자립 위원회, 지산지소(Local Food) 위원회, 지역자치 위원회, 지역대안에너지 위원회, 지역자연보존 위원회, 슬로라이프 위원회, 국제협력위원회, 통일을 위한 지역위원회, 지역종교연대 위원회, 지역언론 위원회 등을 구성하여 지역화의 중요한 실천활동을 전개하도록 한다. 이렇게 하여 사찰이 지역민들과 깊이 협력하여 공동체적 관계망을 긴밀하게 만들어 먹을거리를 순환하고, 에너지를 순환하고, 쓰레기 폐기물의 지역순환이 원활하도록 교육해야 한다. 그래서 마을을 고향으로, ‘떠돌이의 주민’들을 ‘붙박이 주민’으로 만드는 활동에 불교가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

협동조합적 공동체(Co-ops)의 실천과 시도

이명박 정부 후기, 일자리 창출과 경제 회복을 위해 2012년 협동조합기본법이 발표되면서 한국사회는 그야말로 협동조합(Co-operative) 붐이 일고 있다. 협동조합은 생산이나 소비 또는 일을 같이하며 삶의 일정 부분을 협동하면서 약자들 스스로 자구적 노력을 통해 건강하고 자립적 삶을 사는 것이다. 협동조합은 사업적 성격과 더불어 공공 결사의 성격을 갖고 있다. 그래서 사업적으로 성공하도록 지역공동체에 다양한 행정적 지원과 상호협력이 필요하고, 사찰이 중심이 되어 또는 불자들이 불교적 목적을 중심으로 다양한 협동조합을 시도하고 구성하는 것도 큰 의미가 있다.

네트워크 공동체(Network)의 실천과 시도

함께 생활하고 생산하는 것은 아니지만 상호부조하면서 협력하는 공동체 활동을 말하는데, 특히 신도들 간의 공동체도 LETS(Local Exchange & Trading System)라고 불리는 ‘지역통화(Local Money)’ 운동을 잘 활용한다면 사찰 운영과 신도 관리에도 큰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아직 불교에서 실시된 것은 없지만, 한국에서 이를 운영하는 불자들이 있는 것을 고려하여 향후 잘 활용되길 기대한다.

사찰과 법당의 신도 공동체(Buddhist Community) 활성화
앞서 언급했듯이 기독교는 그 배타성과 국내외의 무례한 선교로 인해 최근 ‘개독교’라는 비난을 받고 있음에도 교회의 숫자들에 별 차이가 없는데, 이것은 바로 교회가 갖는 공동체성 때문이다.

종교는 그 자체의 신앙과 수행의 기능이 있지만, 또 다른 기능은 신도들 간의 끈끈한 공동체적 기능이 있다. 한국사회의 전통적 농촌공동체가 산업화로 인해 해체되고 도시화되었는데, 그 공동체적 진공상태를 도시와 변두리의 교회가 역할을 대신하면서 개신교는 급속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렇듯 종교는 그 자체로 공동체적인 기능이 있고 그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나 불교는 스님과 신도들 간의 수직적 관계 외에 신도들 간의 횡적인 유대와 공동체성이 잘 발달하지 않은 편이다. 이제 사찰과 불교는 지역에서 서로 살펴주고 돌보는 공동체로서 그 기능을 원활히 하는 방향으로 변화를 도모해야 한다.

6. 나가면서

돈이 아니라 사람에 의존하는 삶이어야 한다.

불교는 무소유와 청빈의 정신을 사회화하고, 물질적 가치보다 정신적 가치, 느리고 천천히 사는 생활양식을 추구한다. 목적 지향적인 삶에서 관계 지향적이고 과정 지향적인 삶으로 전환을 도모하는 불교는 그 모범을 통해 사회적 메시지를 던져야 할 것이다.

불교는 적게 소비하고 청빈하게 사는 개인적인 삶의 전환만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소비의 사회, 자원을 덜 쓰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결국 돈 중심의 사회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끼리의 의존도를 높이는 공동체적 관계의 회복이 중요하다는 것을 실천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그래서 적은 소비로도 삶의 질을 손상하지 않으면서 이윤추구의 비인간화, 인간성 상실의 사회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모델을 통해 보여주어야 한다.

자원소비적 생활양식은 갈수록 국제적, 국내적 압박을 받을 것이다. 물질적인 풍요만을 추구하는 가치관이 현재는 주류라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도덕적 사회적 비난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미래를 열어가야 할 불교가 선견지명의 종교로서 인류의 희망을 주어야 한다면, 현대인이 요구하는 삶이 아니라 향후 40~50년 뒤의 미래인들이 요구하는 가치를 반영하여, 그때의 시점에서 현재를 준비해나가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불교는 생명가치와 우주적 가치를 근간으로 생명과 물건을 존중해야 하고 서로 긴밀한 연기적 관계를 공고히 하며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본원적 삶의 모델을 통해 인류에게 빛과 희망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동안 한국불교와 종단현실을 비판만 해온 불자들이 자신은 어떠한 수행도 신행생활도 하지 않으면서 4부대중으로서 불교 내 스님들과 동등하게 대접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누구도 그 주장을 신뢰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모든 문제의 원인이 나에게 있으며 해결의 주체도 자신이라고 생각해야 할 불자의 자세로 볼 때, 모든 것이 종단에 책임이 있고, 스님만이 문제 해결의 주체라고 원망하는 것은 결국 비구, 비구니 2부대중만이 불교의 주체라는 사고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똑같이 책임을 져야 할 4부대중의 자세가 아니다. ‘어둠을 탓하기보다 스스로 촛불이 되라’는 말처럼 밖을 향한 에너지의 일부분을 안으로 돌려 새로운 대안을 만들고 불교의 희망을 만들고자 하는 많은 원력보살들에게는 대안적 비전이자 모델로서 불교의 가르침을 토대로 한 공동체가 다양하게 시도되길 기대한다. ■

유정길 / 지혜공유협동조합 이사장. 정토회 환경기구인 에코붓다 공동대표와 평화재단 기획실장을 역임했으며 국제개발협력기구인 한국JTS의 카불 팀장으로 아프가니스탄에서 4년간 활동한 바 있다. 저서로 《생태사회와 녹색불교》 공저로 《불교의 생태적 지혜와 환경》 번역서로 《그린피스 이야기》 등이 있다. 현재 한살림 모심과 살림연구소, 전국귀농운동본부, 녹색교육센터 등의 이사, 환경운동연합 정책위원 등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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