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의 눈으로 자본주의를 말한다

1. 머리글

지금 지구촌을 한 마디로 규정하면 ‘빈틈’이 사라진 세계다. 강물이 흐르며 스스로 정화할 수 있는 양이 하루 1,000톤이라면 999톤의 폐수를 버린다 하더라도 1톤의 여분 때문에 강물은 흐르며 이온작용, 미생물의 분해, 식물의 흡수로 늘 1급수를 유지한다. 이런 예에서 추론하듯, 무위(無爲≒自然)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빈틈[虛]을 만드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탐욕과 확대재생산의 원리는 자연에서든, 국가에서든, 사회에서든, 인간의 마음에서든 그 빈틈을 거의 사라지게 하였다. 그 바람에 지금 세계는 어둠에 가득 차 있으며, 세계대전과 인류 종말의 유령이 어둠 속을 배회하고 있다. 생존하는 생명체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38%) 생명체들이 멸종 위기에 놓일 정도로 전 지구 차원의 환경위기는 극심하며, 산업화의 동력이었던 화석연료는 80년 치가 채 남지 않았다(석유 2052년, 가스 2060년, 석탄 2088년 고갈).

자신이 끼니를 거르는 형편일지라도 대문 가까운 곳에 개다리소반을 걸어두었다가 거지가 오면 밥상을 차려주는 빈틈이 있을 때, 사회갈등은 첨예하지 않았다. 하지만 매년 71억 명의 전 인류가 충분히 먹고도 남을 만한 22억 톤 이상의 곡물이 생산되지만(2012년 22억 4천 360만t, 2011년 23억 1천 490억t), 이의 배분이 정의롭게 이루어지지 않고 메이저 곡물회사들이 가격 유지를 위하여 곡물을 매년 수억 톤씩 버리면서까지 곡물가를 조작하는 바람에 10억 명 이상이 굶주리고 있다. 부자 나라의 넉넉한 사람들은 겉으로는 풍요 속에서 행복한 듯하지만 소외, 불안, 고독, 스트레스, 우울증, 비만, 탐욕 등으로 몸과 마음이 병들고 있다.

유엔개발계획(UNDP)에 따르면, 해마다 850억 달러를 10년 동안 투자한다면, 지구상의 모든 가난한 이들이 기초적인 교육과 의료와 위생 시스템을 보장받고 적절한 영양, 식수, 여성의 경우 적절한 산부인과 치료를 받을 수 있다. 총 8,500억 달러면 10억 명의 사람들이 영원히 굶주리지 않게 함은 물론, 그들에게 기초적인 의료와 교육을 실시하는 체제를 만들 수 있는데, 미국 한 나라에서만 너무 먹어서 비만 관련 의료비로만 매년 1,470억 달러를 지출하고 있으며, 군사비로 매년 1조 7,000억 달러 이상을 쓰고 있다.

화석연료를 대체한 에너지를 개발한다 하더라도, 빈틈이 사라져 지구의 자원과 인간의 관계가 한계에 이르렀기 때문에 자본주의를 떠받치는 확대재생산의 원리는 머지않아 작동을 멈출 것이다. 세계혁명이 아니더라도, 설혹 이것이 불가능한 꿈이라 하더라도 자본주의는 곧 종언에 이를 것이다. 진보든 보수든, 지구의 종말이나 제2의 세월호를 바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시점에서 지구를 종말로 인도하는 체제이자 세월호 대참사의 근본 원인인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 성찰하고 이의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필요하다.

2.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 비판

자본주의 체제는 협력보다는 경쟁과 동일시하고 사회를 정교화한 인간관계의 영역이라기보다 사물들을 소유하는 영역으로 파악하며, 균형과 억제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에 기반하는 윤리를 창조한다. 인간사에서 최초로, 사회와 공동체는 거대한 쇼핑센터로 축소되었다.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이 체제를 정당화한 기반인 청교도 윤리는 소거된 채 오로지 돈만 추구하는 천민자본주의 유형으로 발전하였으며, 자본주의적 근대화가 독재자에 의해 강제되고 동원되면서 부의 자본 편중이 더욱 심화하고 국가와 자본의 유착으로 부패의 카르텔이 더욱 공고해졌다. 여기에 신자유주의가 더해지면서 그나마 자본의 야만을 견제하던 모든 제도가 규제란 이름으로 해제되었다.
신자유주의 체제 이후 1%들은 금융과 신용을 조작하여 부당한 이득을 챙기고 시장을 독점하여 폭리를 취하고 비정규직과 정리해고를 남발하고 노동을 철저히 배제하면서 더욱 극단적으로 99%를 착취하고 있다. 그럼에도 99%는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한 채 점점 더 가난해지고, 그중 상당수는 생존위기에 직면하였다.

한마디로 말해 자본의 과도한 착취, 소외의 심화, 국가의 통제와 억압, 타자에 대한 배제와 폭력, 환경파괴와 공동체의 붕괴, 제국의 제3세계 수탈과 폭력 등 20세기의 모순이 더 첨예해져 왔다. 이런 가운데 이성과 과학의 이데올로기화, 신자유주의 체제로 인한 양극화 심화와 제국의 확대, 가상과 현실의 전도, 상징과 무의식의 조작과 억압, 탐욕과 경쟁심과 스트레스의 증대, 천연자원의 고갈 등 21세기 사회의 모순이 더해지고 있다. 이 속에서 인간은 제국과 자본의 노예가 되고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체제가 만든 상품과 탐욕에 영혼을 저당 잡힌 채 과도한 일과 스트레스, 불안, 절망, 소외로 시달리고 있으며, 이를 욕망의 과도한 발산이나 타인, 특히 소수자에 대한 증오와 폭력, 학살로 표출하고 있다.

1) 자연과 노동자에 대한 착취, 이에 따른 계급갈등과 경쟁 심화와 자연파괴

M-C-M'

자본주의 체제는 확대재생산의 원리에 기반하며, 이 때문에 자본은 더 많은 이윤을 확보하기 위하여 노동자와 자연을 착취하면서 탐욕을 증대시키고, 이 탐욕은 전체 사회를 지배한다. 모든 기업과 상점, 은행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존립한다. 자본가가 이윤을 확대하여 자본을 빨리, 많이 축적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노동을 잘 통제하면서 잉여가치를 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착취하여 M'를 늘리는 것, 자본 자신의 소비를 줄이고 불변자본을 절약하여 자본을 잘 집적하고 집중시켜 자본을 최대한으로 축적하여 M"를 늘리는 것, 자본의 회전속도를 빠르게 하는 것, 그리고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고도화하는 것이다. 유기적 구성을 고도화할수록 산업은 노동집약적 산업에서 기술집약적 산업으로 구조가 바뀌고 고용이 줄고 실업은 늘어 노동자가 산업예비군으로 전락하며, 고용을 유지하고 있는 노동자의 실질임금은 줄고 노동환경 또한 열악해진다.

확대재생산의 원리에 의하여 자본의 탐욕은 끝없이 증식되기 마련인데, 자본이 증식되면 될수록 생산수단으로서 토지 또한 자본의 착취 대상으로 전환한다.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고도화할수록 불변자본으로서 생산수단의 양은 확대된다. 이는 생산수단으로서 토지, 원료, 기계에 대한 투자와 지출을 늘리는 것인데, 토지와 원료, 기계를 늘릴수록 자연은 착취당한다. 자연을 기계로 전환하는 자체가 자연의 파괴이지만, 기계는 일단 만들어지면 수명이 다해서 버려질 때까지 자연을 파괴하여 생산하고 그 과정에 오염물질을 배출하며 버려진 기계 자체도 스스로 오염물질이 된다.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에서 인간은 자연을 원료나 기계 등 ‘불변자본’으로 변환시키고 변환된 자연은 기계라는 모습을 띠고 다시금 인간 노동력을 대량으로 가변자본화하는 데 기여하며 인간은 다시 도구를 써서 더욱 급속도로 자연을 불변자본화한다.

자본주의는 생산과 이윤의 극대화만을 위해 착취에 기대어 끝없이 경쟁하면서 확대재생산을 거듭하는 거대한 괴물이다. 이 체제가 유지될 수 있는 까닭은 착취와 경쟁에 바탕을 두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자이자 노동력을 판매하는 자이며 노동력을 통제당하는 자다. 그러기에 그는 노동과 그 과정에 권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이에 그가 자본가와 맺는 관계는 불평등하며 착취를 전제로 한 계약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자본가는 착취를 바탕으로 자본축적을 행하므로 자본주의는 노동자 민중의 착취에 기반한 체제다. 자본주의는 경쟁을 전제로 유지된다. 마르크스가 자본가들을 ‘서로 싸우는 형제’들이라 표현한 것처럼, 자본가들은 자신을 위협하는 노동자계급에 맞서서는 서로 형제처럼 단결하여 노동자를 착취하고 국가를 압박하여 노동자를 통제하지만, 시장에서는 자본끼리 서로 많은 이윤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도 불사하며 싸운다.

2) 물화와 인간 소외의 심화

자본주의 체제는 사용가치를 교환가치로 대체하고 뒤집어버려 대중의 소외를 심화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것을 시장에서 화폐로 교환되는 교환가치로 대체하여 바라보기에 사람들 사이의 관계 또한 사물의 성격을 지닌다. 교환가치가 우선하는 사회에 나타나는 보편적 현상이 물화(物化, reification)다. 물화한 개인은 자기 주변의 모든 것을 물질의 눈으로, 상품관계로 바라본다. 온갖 삶들이 이렇듯 물화되어 있으니 인간은 서로를 소외시킨다. 애인, 친구, 선후배, 가족처럼 인간적인 배려와 유대가 최고의 가치인 관계에서조차 교환가치를 따진다.

이 사회에서 노동은 소외의 한 양식이 된다. 노동은 대상을 생산물로 변화시키며,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고, 살아 있는 시간을 만들면서 개인이 진정한 자기실현과 유적 존재로서 실존, 대자적 실천 행위를 구현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노동 자체가 소외의 한 양식이 되고 노동할수록 소외가 심화한다. 노동활동으로부터 소외, 노동생산물로부터 소외, 유적 존재로부터 소외, 시간으로부터 소외, 기계기술에 대한 예속, 인간으로부터 소외가 일어난다. 노동자는 자기실현으로서 노동을 하지 못한다. 그저 돈을 벌기 위하여 노동할 뿐이다. 그는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연봉 몇천만 원 식으로 판매한다. 노동자 자신이 상품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노동자는 자신이 생산한 잉여가치를 착취당하고, 노동은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하며, 이 살아 있는 노동에 명령하고 지배권을 행사하는 것은 노동자가 아니라 자본이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은 노동자에게 본질에 속하지 못하며, 노동자는 노동을 통하여 진정한 자기실현, 행복, 만족감이나 성취감을 느끼지 못한다. 노동은 강요된 것이며, 할수록 불행을 느끼며 불만스럽고 아무런 욕구의 충족도 느끼지 못하는 일일 뿐이다. 노동은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에너지를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고행과 스트레스만 겪으며 육체를 쇠약하게 하고 정신을 파멸시킨다. 이처럼 자본이 노동을 전유하고 노동자는 자기실현으로서 노동을 할 수 없기에,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활동으로부터 소외된다.

자본주의는 잉여노동을 착취하고 상품을 판매하여 자본을 축적하는 사회이기에 과잉생산을 추구하고 과소비를 조장한다. 생산된 상품은 소비되어야만 이윤으로 돌아오기에 자본가는 광고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노동자의 소비 욕망을 부추긴다. 노동자들 스스로도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자본주의적 인간이 된다. 그들 스스로 자본가와 국가, 대중문화의 상징과 이미지 조작에 놀아났든 아니든, 이들을 얻는 데, 다시 말해 생태계 전체를 파괴하는 데 스스로 동참한다. 그러기에 자본주의 체제는 노동자를 서로 경쟁적으로 탐욕을 키우며 소비하는 우중으로 전락시키고 자연을 더욱더 황폐화시키고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소외시키는 동시에 쓰레기를 양산한다.

3) 자본-국가의 유착과 이성의 도구화에 의한 억압의 구조화와 1차원적 인간화

프랑크푸르트학파는 마르크스에 프로이트와 현상학을 접목시켜 자본주의 사회와 대중을 해석한다. 문명사회의 인간은 본능적 충동을 자유롭게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과 (억압 없이 욕망을 자유롭게 달성하려는) 쾌락원칙(pleasure principle)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에 인간은 결핍을 느끼며, 이 결핍을 극복하기 위해 욕망을 추구하거나 노동을 하는데,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기실현 행위로부터 분리된 노동은 (인간의 본능과 욕망을 억압하고 사회 질서와 윤리를 따르게 하려는) 현실원칙(reality principle)이 강요함에 따라 쾌락원칙을 단념하고서 행해진다.

관료제와 과학기술이 자본제와 결합하였다. 노동자는 전체 노동과정에서 극히 부분적인, 단순한 노동에만 참여한다. 인간의 기계화와 노동과정의 분절화가 촉진되고, 노동은 관리되고 통제되는 시스템의 한 과정이 되었다. 노동과정의 분절화는 지식과 의식의 분절화를 초래한다. 이런 시스템 속에서 노동자는 전체 노동과정에 대하여 인식하지 못하며, 단순히 반복되고 분절화한 노동 속에서는 계급적 체험을 하기도 어렵다. 자연스레 노동자는 계급의식을 형성하기 어려워진다.

이성은 도구화하고 과학기술은 이데올로기로 전락한다. 포드자동차 회사에서 노동자의 동선과 심리를 고려하여 노동자의 노동을 가장 효과적으로 착취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 때, 과학이란 잉여가치를 더욱 증대하면서 기존 체제를 옹호하고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일 뿐이며, 이성이란 특정 조건에서 가장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일 뿐이다. 이렇게 목적적 합리성을 추구하는 도구화한 이성과 이데올로기로 전락한 과학기술은 노동자의 의식을 지배한다. 과학과 기술의 논리가 보편적 기준으로 자리를 잡아 사회생활의 모든 영역에 깊이 침투하여 생활세계를 식민화하며 이런 논리가 정치적 문제 해결에 광범위하게 이용된다.

현대 자본주의 지배 아래서 현실원칙은 문명 자체를 지속하는 데 필요한 만큼보다 더 큰 본능의 억압을 요구하는 특수형태, 즉 과잉억압(surplus repression)된다. 자본주의 체제는 관리된 노동을 강요하여 에로스의 욕망을 과도하게 억압하며, 성충동은 일부일처주의의 가정 테두리 안에서만 배출되도록 통제한다. 이처럼 동물적인 충동만 남은 채 억압되고 관리되며 조직화한 자아(ego)는 무제한의 쾌락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이를 단념한 채 ‘안전이 보장된’ 쾌락을 선택한다. 따라서 현실원리는 쾌락원리의 지위를 빼앗는다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방위하며, 부정한다기보다는 변용시킨다. 고도로 발달한 산업사회에서 현실원칙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교환원리와 도구적 이성에 의해 조직된 현실원칙의 특정한 역사적 형태인) 실행원칙(performance principle)으로 보충되면서 더 많은 경제적 생산성 유지를 위한 노동의 합리적인 조직화를 요청한다.

문화와 예술 또한 부정의 정신을 상실한 채 상품으로 변한다.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예술 또한 시장에서 교환되는 상품으로 전락하였으며, 문화산업(cultural industry)은 이를 구조화하고 있다. 예술은 부정의 정신을 함유하기보다 기존 체제의 이미지와 상징, 코드, 이데올로기를 답습하고 확대재생산하는 상품이 되었다. 그 상품을 소비하는 대중들은 상품 속의 이미지와 의미와 이데올로기를 수용하면서 기존 질서와 상상에 순응하는 규범화되고 획일화한 개인으로 전락하였다.

노동자는 실제 자신의 삶대로 행위하는 것이 아니라 텔레비전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중산층의 인물에 자신을 동일화하여 그를 모방한다. ‘사이비 행복의식’이 그의 계급의식과 ‘반역을 향한 동경’을 앗아간다. 텔레비전이 만들어주는 환상과 동일시에 마취되어 그에 따라 울고 웃는 우중(愚衆)만 남는다. 결국 대중문화는 체제를 존속시키는 기제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런 양상들이 1차원적 인간의 참모습이다. 과도하게 착취당하고 억압당하면서도 행복하다고 착각하기에, 계급의식을 잃어버리고 그 자리를 허위의식으로 채웠기에, 주체는 사라지고 맹목적인 자아만 남았기에, 이성 대신 국가와 자본과 대중문화가 조장하는 감성과 욕망에 따라 행동하기에, 1차원적 인간은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지도 못하며 사회의 변혁을 바라지 않는다. 오늘의 행복과 향락만 유지되면 그뿐, 참여는 실속 없는 일이며 변혁은 현재의 행복을 깨는 위험하고 불온한 꿈이다.

4) 신자유주의의 모순

초국적 기업과 초국적 투기자본을 이끌고 있는 파워 엘리트들과 이들의 이데올로그인 경제학자들이 감행한 신자유주의란 ①전통적인 경제영역에서 시장을 즉각적, 무조건적, 무제한적으로 확대, 강화하고 ②비경제적인 영역까지 포함하여 인간생활 전반을 시장원리로 작동시키고자 하는 정책이념이며, 따라서 ③시장에 전인격을 포획시키고자 하는 기획이다. 이 체제는 자유로운 착취와 경쟁을 방해하는 모든 규제의 완화, 노동시장 유연화, 정부 역할 및 개입의 최소화, 자유화와 개방화, 공기업과 교육 등의 민영화, 감세, 복지축소를 특징으로 한다.

신자유주의는 결국 빈곤과 실업의 세계화로 귀결되었다. 세계의 거의 모든 힘과 돈은 초국적 기업과 초국적 자본으로 옮겨갔다. 온갖 장애와 규제가 약화되자, 초국적 기업은 가장 금융비용이 저렴한 나라에서 돈을 빌려 가장 원료가 싼 나라에서 원료를 사서 가장 생산성이 높은 지역, 즉 기술력이 있으면서도 가장 노동력이 저렴한 지역에서 생산을 한다. 그리고 판매와 수출을 최대화할 수 있는 나라에 생산기지를 두고 제품을 팔아 세금이 가장 낮은 나라로 기업소득을 이전시키고, 자본수익과 환차익이 가장 높은 나라로 자금을 이동시켰다. 이 결과, 1970년대 7,000개사에 지나지 않던 초국적 기업은 1990년대 초반에만 35,000개사로 늘어났으며 이들은 세계무역량의 75%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지엠이나 엑슨, 아이비엠 등 15대 초대형 기업들의 수입은 120개 나라의 수입 합계보다 많다.

무엇보다 신자유주의는 양극화를 심화하였다. 세계 부의 집중은 더욱 심각하게 악화되어 현재 세계 부유가계 0.7%가 전 세계 부의 3분의 1을 소유하고 있다. 더불어 신자유주의는 국가의 순기능을 해체한다. 국가는 자본의 편에 서서 온갖 규제를 해제하고 기업에 특혜를 주며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을 반대하는 노동자에게 폭력을 가한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은 신자유주의 체제의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한다. 이는 경쟁주의와 니치주의를 심화하고 과잉욕망을 부추기며, 결국 공동체를 해체하였다. 바야흐로 자본이 꿈꾸던 세상-노동에 대한 아무런 규제 없이 ‘자유로운’ 착취와 억압, 노동자 조직의 무장해제, 국가와 시민의 제한 없이 무한히 ‘자유롭게’ 열린 시장- 이 도래한 것이다.


3.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대안의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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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②

①과 ② 가운데 하나만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자본주의 체제는 붕괴한다. 대중은 화폐-상품에서는 노동거부로, 상품-화폐 단계에서는 소비거부로 맞설 수 있지만, 공포는 노동거부를 회피하게 하고, 유혹은 소비를 조장시키는 기제다. ①에서 모든 노동자가 조직화된 주체가 되어 자본과 맞서서 노동거부를 실천하거나, ②에서 대중들이 욕망의 자발적 절제를 통한 소욕지족(少欲知足)의 삶으로 전환한다면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체제는 붕괴한다. ①과 ②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상호침투한다. ①에 가장 유용한 사상이 마르크스라면, ②에 가장 유용한 사상이 불교다.

물론, 개인의 차원에서는 탐욕과 소유욕을 버리고 타인과 나와 연기관계를 깨닫고 소욕지족의 삶으로 전환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개인과 구조 및 시스템의 혁신, 문화의 변혁이 한꺼번에 이루어질 때 자본주의 너머의 삶이 가능할 것이다.

1) 자연과 생명의 가치 인정을 통한 자연의 인간화와 인간의 자연화의 화쟁

이런 인식 안에서 불교와 마르크시즘을 결합하자. 이때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작업은 마르크시즘 안에서 자연과 생명의 가치를 인정하고 이 토대 위에서 ‘자연의 인간화’와 ‘인간의 자연화’를 변증법적으로 종합한 후 양자를 화쟁시키는 것이다. 자연은 그 자체로서 물적 자연과 텍스트로서 자연의 두 측면을 동시에 함유한다. 인간은 그런 자연을 인간화하는 동시에 인간의 사고와 의미와 삶을 자연화한다. 자연의 인간화와 인간의 자연화는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이를 간단히 하면 다음 페이지의 〈표 1〉과 같다.

여기서 자연의 인간화와 인간의 자연화를 종합하는 것은 ‘생태적 노동’을 하거나 ‘지속가능한 발전’을 하는 것이다. 이때 먼저 전제가 되어야 하는 것은 자연의 내재적 가치를 인정하는 것, 인간을 정신과 육체로 나눈 이분법에서 벗어나 몸으로 보는 것이다. 자연의 내재적 가치를 인정하면, 가치를 생산하기 위한 인간의 노동이 자연을 무조건 도구화하거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대상으로 삼는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곧, 노동을 통하여 생산한 가치와 자연이 본래 지닌 내재적 가치 사이의 균형을 모색하게 되며, 전자의 가치가 후자의 가치보다 적을 경우 자연의 착취와 개발은 제한된다.

여기서 문제는 자연의 본원적인 가치와 이것이 시장 체제 속에서 화폐와 교환되는 양적 관계인 교환가치 사이의 괴리를 어떻게 해결하느냐는 점이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자연이 사용가치는 있으나 교환가치는 가지지 못함을 변함없이 주장한다. 이를 구별하지 못한 것은 중농주의자들의 오류다. 마르크스의 주장대로, 햇빛이 쌀을 자라게 했지만, 햇빛의 가치가 쌀의 교환가치에 포함되지 않는다. 햇빛을 만드는 데 인간은 전혀 관여하지 못하므로 햇빛의 가치를 형성하는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은 없다. 하지만 인공태양을 써서 쌀을 자라게 한다면, 인공태양의 빛은 교환가치를 가진다. 그렇다면, 햇빛의 교환가치를 인공태양을 매개로 추산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 반대의 예로 방사능 쓰레기는 사용가치는 없지만, 그것을 다시 자연상태로 돌려놓기 위해서는 상당한 비용이 든다. 이런 방식으로 자연의 본원적인 가치를 교환가치로 대체하여 평가할 수 있다. 이 경우 자연을 착취하고 개발하여 생산해내는 것이 가치를 발생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데서, 자연의 본원적인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 것이 더 큰 가치를 이룰 수 있다는 생각으로 전환할 수 있다.

2) 혁명을 통한 전복과 세계혁명

자본주의는 역사적 체제일 뿐이다. 자본주의적 삶과 태도, 세계관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 대다수가 돈을 섬기고 이 때문에 타인을 착취하고 살해하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 이전에는 없었다. 신자유주의를 질병으로 생각하면서도 그 원인이 서방 정부와 국제금융기구의 카르텔에 의한 독점과 횡포, 이에서 비롯된 야만적인 정책이라고 추정하고 이를 개혁하려 한 스티글리츠식의 진단과 처방은 표피만 본 것이다. 모든 문제의 핵심은 자본주의 체제에 있다.

중국의 좌파 자유주의자나 한국의 자본주의 4.0이나 윤리적 자본주의의 지지자들은 시장의 균형과 공정성 확보를 통하여 건전한 자본주의를 추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시장에 대한 환상의 소산이다. 폴라니가 잘 지적한 대로, 시장경제란 오로지 시장만이 통제하고 조정하며 방향을 지도하는 경제 체제이며, 재화의 생산과 분배의 질서는 이 자기조정(self-regulation) 메커니즘의 손에 맡겨지는데, 이 자기조정이라는 것 자체가 환상이다. 시장경제는 노동, 토지, 화폐를 시장질서에 포섭하는데, 이는 자연적 환경인 노동과 토지조차 보호받지 못하고 시장경제라는 ‘사탄의 맷돌’에 노출됨을 의미한다. 거대 이윤의 원천은 시장이 아니라 시장의 작동을 억제하는 독점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공정한 시장이란 불가능한 유토피아이며, 권력의 시장화와 시장의 권력화는 전형적인 자본주의 현상이다. 신자유주의가 도래한 가장 핵심 원인은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고도화하면서 이윤율이 저하한 데 있다. 세계의 헤게모니가 이태리→스페인→네덜란드→영국→미국으로 이동한 핵심 요인 또한 이자율이다. 이자율이 최저를 기록하게 되면 반등이 있더라도 대체로 헤게모니가 종식되고 새로운 헤게모니가 등장한다.

일본 민주당이 실패한 것에서 잘 알 수 있듯, 제3의 길은 성장과 복지 모두를 손에 쥔 것이 아니라 양자를 모두 놓쳐 버렸으며, GDP 대비 무려 200%에 달하는 정부 부채(882조 엔)만 남긴 채 신자유주의의 아류로 전락하여 버렸다. 이런 사례와 논증은 자본주의 체제와 신자유주의의 대안이 토대를 중심으로 하되, 그 개혁은 급진적이어야 함을 시사한다.

마르크스가 볼 때, 노동자와 자본가의 대립은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평화적 저항을 국가와 연합하여 물리적인 폭력으로 탄압하고 제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동자들이 연대하여 이에 대항하는 조직을 결성하고 부르주아지들의 물리적 폭력에 맞서서 죽느냐, 혁명이냐의 결단을 하고 투쟁을 전개하여 낡은 사회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사회구성체를 수립하는 혁명이 대안이다. 세계혁명이 가능하든 가능하지 않든, 문제는 노동자 대중의 연대와 조직이다. 무엇보다도 오큐파이 운동을 세계적으로 조직하여 이를 세계혁명으로 승화할 때만이 자본주의의 해체는 가능할 것이다.

3) 진보의 연대

진보·노동 진영은 어떻게 길을 낼 것인가. 지금이라도 진보 진영이 정파주의, 관료화, 조합원 이기주의, 구태의연함을 말끔히 씻어내지 않으면 미래는 없다. 비정규직과 정리해고가 너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임을 직시하고, 타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을 바탕으로 굳건히 연대해야 한다. 금융과 토지, 공장을 포함한 모든 생산수단의 공공화, 노동이 진정한 자기실현인 사회, 노동이 자본을 통제하는 세상을 향한 굳건한 목표 아래 모든 정파와 갈등을 녹여내야 한다. 노조는 임원들의 관료화를 극복하고 아래로부터 활발한 소통을 하며, 정당이든 조합이든 절차적 민주주의와 내용의 민주주의를 확보해야 한다. 조합원 이기주의를 일소하고 끈끈한 동지애와 굳건한 투쟁의지를 갖고서 민주 노조 깃발 아래 연대해야 한다. 한 사업장의 투쟁이 그곳만으로 고립되지 않고 전체 노동자의 문제를 해결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증진하는 방향으로 싸워야 한다. 단순히 노동악법을 개선하는 방어적 자세에서 노동배제를 심화하고 노동자의 죽음과 장기 사업투쟁을 야기하는 노동법과 제도를 전면적으로 해체하고 다시 만드는 싸움을 하여야 한다.

이제 반신자유주의와 반자본주의로 전선을 명확히 하고 노동을 중심에 놓고 계급적 성격을 명확히 하되, 탈핵 등 생태와 복지와 사회정의,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배려를 결합하여야 한다. 노동과 환경, 소수자, 소위 적녹보 동맹을 맺을 필요가 있다. 환경은 자본주의 체제의 극복 없이 환경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이 불가능함을 수용하고, 여성과 소수자 또한 가부장적 폭력과 배제가 자본주의 체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현장에서 투쟁하는 노동자가 주체가 되되, 용산참사, 강정마을, 4대강에서 싸우던 이들과 함께하여야 한다.

이와 더불어 새로운 진보정당은 자본주의 극복과 사회주의 실현을 당의 최종 목표로 삼되, 신자유주의 반대를 자본주의의 극복과 결합시킬 구체적인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정강정책을 마련한다. 계급 문제와 민족문제, 생태문제의 중층결정을 하여 적녹보 연대를 추구한다. 이를 전국적 연계망으로 하여 지역에서부터 풀뿌리 조직을 활성화하고 이를 당이 수렴하는 구조를 형성한다.

4) 공공영역의 활성화와 참여민주제

극단적인 노동배제를 극복하는 방법은 노동자와 서민 스스로 삶의 개선과 잘못된 구조의 개혁에 민주적인 방식으로 참여해야 한다. 민주제는 대의민주제를 넘어 정치, 경제, 사회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독점을 깨는 것이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지역과 마을, 학교, 기업과 공장의 모든 곳에서 공공영역(Öffentilichkeit)을 확보하고 이를 증대하는 것이다. 이는 하버마스식의 공공영역에 동양적 공공성(公共性)을 종합한 것이다.

자유롭고 합리적인 개인을 주체로 하여 지역 공동체를 결성하고 여기서 공정(公正), 공평(公平), 공공(公共)으로서 공공영역을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공공영역을 바탕으로 지역마다 주민 자치를 중심으로 거번넌스 시스템을 만들고 인민주권을 바탕으로 시민위원회를 구성한다. 다양한 장에서 신자유주의 모순으로 주변화한 서발턴들이 적·녹·보 동맹, 곧 노동운동, 환경운동, 여성 및 소수자운동의 동맹을 맺어 자본-국가-관료-지식인-종교-보수 언론의 카르텔에 맞서는 시스템을 정치의 장, 경제의 장, 사회문화의 장에 건설한다. 마을, 기업, 학교, 기업과 공장의 중요한 정책과 사업은 이 위원회에서 합리적이고 공정한 토론을 통하여 결정한다. 나아가 검찰청, 국정원 등 국가권력기관 또한 시민위원회의 통제를 받도록 제도화하며, 중앙 및 지역의 권력기관 수장을 국민이 직접 선출하여 국민 주권을 절차적으로 확립한다.

5) 눈부처 주체의 연대와 눈부처 공동체의 건설

근본적으로 새로운 주체가 설정되어야 하며, 이들을 중심으로 자본주의나 국가 외부가 아니라 그 안에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를 모두 극복할 수 있는 진지이자 그를 대체할 체제인 대안의 코뮨을 만들어야 한다. 필자는 원효와 들뢰즈, 근대성의 사유를 결합한 대안으로 눈부처-주체를 내세운다. 눈부처-주체는 눈부처-주체는 타자와 무한한 연관 속에서 차이와 가유(假有)로서 주체를 형성하는 자다. 그는 주체로서 모든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소극적 자유(from freedom)를 추구함은 물론, 자신에 내재한 탐욕과 무지를 극복하고 깨달음에 이르며, 노동을 통하여 자기 앞의 장애를 극복하고 ‘진정한 자기실현’을 누리며, 부조리한 세계를 인식하고 이에 저항하여 이를 자신의 목적에 맞게 개조하고 자기를 새로 거듭나게 하는 적극적 자유(to freedom) 또한 구현한다. 하지만 눈부처-주체는 이에 머물지 않고 억압받고 고통받는 타자에게 다가가서 그의 고통을 치유하고 그를 자유롭게 하여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대자적 자유(for freedom) 또한 추구한다. 눈부처-주체는 동일성의 사유를 뛰어넘어 내 안의 타자, 타자 안의 내 모습을 동시에 보는 자이면서 타자 속에서 불성(佛性)을 발견하여 그를 부처로 만들고 이 과정을 통하여 자신도 부처가 되려는 자다.

눈부처 공동체는 구성원 각자가 눈부처 주체로서 실존하고 실천한다. 눈부처 공동체는 공동으로 생산하고 분배한다. 모든 생산수단과 도구는 공동의 소유다. 이 공동체 생산의 60%는 필요에 따른 공동생산과 공동분배를 한다. 나머지 20%는 재투자를 하며, 10%는 개인의 능력별로 인센티브를 주어 개인의 창의력을 발현할 동기를 부여하며, 10%는 장애인, 이주노동자 등 더 가난한 자에게 베풀어 대자적 자유를 구체화한다.

능력이 아니라 필요에 따른 노동, 장애를 극복하는 자기실현으로서 노동, 철저히 자연과 공존하는 생태 노동을 한다. 그것이 불가능한 도시의 공동체는 유기농 농사를 짓는 농촌공동체와 연합관계를 형성한다. 단기적으로는 친환경 무상급식을 로컬푸드와 연결시키고 민중을 자각시키고 조직하여 신자유주의를 내파하는 진지로 만들고, 장기적으로는 자본주의 체제 곳곳에 코뮌을 만들어 이를 대체하는 사회구성체로 구성한다.

몬드라곤처럼 노동이 자본을 통제하며, 노사관계는 진속불이(眞俗不二)의 관계가 되도록 한다. 경영자와 노동자는 하나가 아닌 동시에 둘도 아니다. 노동자들이 총회에서 자신들 가운데 이사를 선출하고 이들이 노동자들과 유기적으로 소통하고 협력하는 가운데 일정 기간 경영과 중요한 결정을 한다. 일정 기간이 지나가면 노동자로 돌아간다. 이사들이 전문 경영자를 외부에서 초빙할 수도 있는데, 경영진은 총회 및 이사들의 통제를 받는다.

민중의 집과 협동조합을 결합한 형식의 연합체 및 의사결정 기관을 두되, 구성원 간 노동의 목적과 방법에서부터 분할 비율에 이르기까지 전체 과정을 모든 구성원이 동등한 권력을 갖고 참여하는 거버넌스(governance) 시스템으로 운영한다. 모든 사람의 가치와 권력은 사회적 지위, 젠더, 나이, 재력에 관계없이 1 대 1로 동등하다. 중요한 안건은 모든 구성원이 참여하는 총회에서 결정하며, 모든 구성원이 1인 1표의 동등한 가치를 갖는다. 가족 단위의 사생활은 보장하고 간섭도 하지 않되, 이를 벗어난 공동체의 정책과 실현, 규약의 제정과 집행, 재정의 운영 등의 문제는 모든 이들이 동등한 권력을 갖고 참여하여 회의를 통해 민주적으로 결정한다.

시장과 자본제의 외부에서 물화를 극복할 수 있는 방편으로 따로 마을 화폐를 만들어 사용한다. 단 마을 화폐는 7일마다 10%의 가치가 감소되고 7주 후에는 0원의 가치를 갖게 하여 가치척도, 유통수단, 축적수단, 지불수단, 세계화폐 등 화폐의 다섯 가지 기능 가운데 가치척도와 유통의 기능만을 수행한다. 외적으로는 불일불이(不一不二)의 패러다임을 따라 공동체와 다른 집단을 네트워킹하고, 내적으로는 진속불이(眞俗不二)의 원리에 따라 구성원 간 상호주체성과 상보성을 높이는 것이다. 다른 마을이나 집단과 교류를 위하여 소규모 마을 은행을 둔다. 이 은행에서는 마을 화폐와 국가 화폐의 교환, 마을의 각 가정의 범위를 넘어선 투자 및 재정을 담당한다. 이 은행은 협동조합 형식으로 운영한다.

구성원은 욕망의 자발적 절제를 통한 소욕지족(少欲知足)의 삶으로 전환하며, 이를 수행하기 위한 청규를 둔다. 이렇게 운영하되, 확고하게 정의관을 확립하고 깨달음에 이른 자라도 언제든 탐진치에 물들고, 이기심과 욕망에 기울어질 수 있기에 깨달음이 곧 집착이라는 명제 아래 매일 일정한 시간에 수행하고 참회한다.

여기서 자연환경과 공존하는 도농(都農)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 대안인데, 이것 또한 일정한 이윤을 내야 한다. 자비행을 실천하면서도 이윤을 확보하는 대안은 코피티션(co-opetition)의 원리를 경영에 응용하는 것이다. 원효는 일심(一心)과 이문(二門), 진여문과 생멸문의 화쟁을 모색한다.

현재 상황에서 화쟁의 사회경제학을 국가 단위에서 전면적으로 실시하는 일은 힘의 역학관계상 쉽지 않다. 화쟁의 사회경제학은 지역사회를 ‘눈부처 공동체’로 전환하면 가능하다. 눈부처 공동체는 모든 구성원이 개인적 자유와 깨달음을 추구하면서도 타자를 자유롭게 하여 자신의 자유를 완성하는 주체가 되어 서로 상생하고 자연과 공존하는 경제를 추구하는 공동체다.

6) 담론 투쟁

자본제와 신자유주의를 비판/반대하는 담론 투쟁을 전개하는 것이다. 필자가 한진중공업 사태나 쌍용자동차 사태 때 언론 기고, 논문 등을 통하여 주장한 대로, 비정규직과 정리해고의 철폐 주장이 좌파적 발상이거나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다. 결국 신자유주의 경영은 99%를 착취하여 1%만 잘살게 한 것이었다. 삼성전자는 2000년 7조 4351억 원의 영업이익이 2012년 18조 5104억 원으로, 현대자동차는 1조 3132억 원에서 8조 4369억 원으로 커졌다. 30대 대기업의 경우 매년 기업이 벌어들이는 당기순이익의 단지 1.5%만 투자하면 모든 비정규직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할 수 있다. 낙수효과(trickle down effect)는 허구에 불과하며 분수효과(fountain effect)가 타당하다. 성장과 복지는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보완적이다. 이제 세계 경제학자들은 “부유층의 세금 및 저소득층에 복지 및 지원 증가→ 소비증가→ 생산증가 →경기부양”을 야기하는 분수효과가 더 현실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4. 맺음말

이처럼, 다른 요인도 작용하지만 환경파괴, 소외와 불안, 폭력과 전쟁, 빈곤, 불의, 공동체의 해체, 재현의 위기 등 모든 문제의 근본 원인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기인한다. 지금 대중이 돈을 신으로 섬기는 삶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자연과 타자를 개발하고 착취하고 폭력을 행하는 행위를 인간의 본성으로 여기지만, 자본주의는 역사적 체제일 뿐이다. 자본주의가 발생하기 400여 년 전 이전의 거의 모든 문명은 돈과 물질을 밝히는 이들을 경멸하였으며, 때로는 공동체에서 추방하였다. 인간은 이기적 유전자를 가진 동물이면서도 사회를 형성하면서 협력적이고 이타적인 진화를 해왔으며 타인과 잘 소통하고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대할 때 뇌가 보상하도록 사회적으로 진화한 존재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체제는 인간의 본성과 부합하지 않으며 인류가 발전시켜 온 사회와도 어울리지 않는다. 이 체제의 전복이나 해체 없이 인간적이고 생태적이며 이타적인 사회는 불가능하다. 자본주의 체제를 해체하자는 주장은 지극히 인간적이자 사회의 원리와 부합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행복하기를 바라지만,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모두가 불행하다. 개인이 착하게 살려고 아등바등해도 세계체제, 국가, 구조, 제도, 이미 자본주의적 인간으로 변한 타인이 이를 방해하기에 시나브로 물들어버린다. 모두가 돈을 섬기며 인간과 생명과 자연을 경시한다. 빈자든 부자든 모두가 소외와 고독과 불안 속에서 산다. 모두가 구조적 폭력의 피해자이자 가해자다. 국가와 제국은 가진 자의 편에서 너무도 당연하게 폭력과 학살과 억압을 행하고 개인은 너무도 쉽게 자유와 생명을 유린당한다.

극단적인 노동배제는 남은 빈틈을 마저 착취하려는 자본의 마지막 발악이며, 금융사기를 통한 자본의 축적은 산업자본의 축적이 불가능한 데서 나온 미봉책일 뿐이다. 모든 것으로부터 철저히 배제된 만국의 노동자, 금융사기로 아무런 잘못도 없이 신용불량자 내지 빚쟁이로 전락한 전 세계의 시민, 제국과 이와 결탁한 자본과 국가로부터 삼중의 착취를 당한 제3세계 민중이 연대하여 빈틈이 사라진 이 시대에, 더 늦기 전에 자본주의와 이의 극단적 양식인 신자유주의 체제를 해체하고 다른 세계를 모색해야 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인류에게 미래는 없다. ■

 

이도흠 / 한양대 국문학과 교수. 한양대 국문과, 동 대학원 졸업. 의상만해연구원 연학실장, 한국학연구소 소장, 《문학과 경계》 주간, 실상사 화엄학림 외래강사,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 상임의장 등 역임. 저서로 《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 《신라인의 마음으로 삼국유사를 읽는다》 등 다수. 현재 정의평화불교연대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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