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의 눈으로 자본주의를 말한다

1. 문제의 제기

저성장의 시대다. 실업, 빈곤, 불평등으로 경제가 불안하다, 환경파괴, 범죄 증가와 도덕과 가치관의 혼란 등, 다양한 목소리도 들린다. 그 같은 경제·사회적 문제를 극복하면서 인간들이 평화롭게 번영을 누리면서 공존할 수 있는 사회질서는 어떤 것인가?

이 문제는 거대 담론이다. 불교경제학에서는 자유주의는 그런 대안이 될 수 없다고 한다. “자유주의란 이기적이고 고립된 인간들이 자유로운 경쟁과 그 경쟁의 결과에 따른 차별을 정당화하는 경제체제”라는 이유에서다. 그런 체제는 문제를 해결하기는 고사하고 더욱 심각하게 만든다는 게 불교경제학의 인식인 듯하다.

그래서 그 대안으로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슈마허(E. F. Schu-macher, 1911~1977)의 이념을 내세운다. 이 이념이야말로 인류의 행복과 번영을 약속하는 대안적 패러다임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본주의의 다양한 병폐를 극복하여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그리고 번영된 경제 질서를 가능하게 한다는 게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불교경제학의 주장이다.

이 글의 목적은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이념이 현대사회에서 어떻게 가능한가를 검토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서 우선 제2장에서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이념적 의미를 설명할 것이다.

제3장에서는 그 이념이 오늘날과 같이 거대한 열린 사회에 적용할 경우에 생겨날 문제를 설명할 것이다. 제4장에서는 자유주의에 대한 불교경제학의 비판을 검토할 것이다. 마지막 제5장에서는 전체 내용을 요약하면서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이념이 현대사회에 기초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할 것이다.

2. ‘작은 것이 아름답다’의 이념적 의미

불교경제학의 출발점은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이념이다. 그 이념의 내용은 무엇이고 실천적 의미는 무엇인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선 그 개념을 창시한 슈마허의 사상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1) 슈마허와 불교경제학

슘페터(J. A. Schumpeter)로부터 영향을 받아 경제학자가 된 슈마허는 1930년대에 영국에 유학하는 동안 케인스와 마르크스를 발견하고는 이에 심취했다. 기독교적 유산을 거부하고 사회주의 혁명가가 되었다. 당시 서구에 풍미하던 중공업의 국유화 운동과 복지국가 건설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영국의 사회주의자 토니(R. H. Tawney), 복지국가 설계자였던 베버리지(W. Beveridge)로부터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슈마허의 인생을 바꾼 것은 1955년 미얀마(당시에는 버마)의 방문이었다. 거기에서 행복하고 소박한 미얀마 사람들의 불교적 삶의 모습에 감탄했다. 불교로 개종했다. 작은 것이 아름답게 보였던 것이다.
자본주의는 큰 도시와 큰 기업이 경제를 비인간적으로 만들고 재생 불가능한 자원을 고갈시키고 인간을 물질주의로 만든다고 주장하는 게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이념이다. 작은 인간에게 맞는 작은 기술이 아름답다고도 한다.

가장 중요한 내용은 불교경제학이다. 외국무역은 불교경제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멀리에 있는 자원을 끌어다가 욕구를 충족하는 것은 성공이 아니라 실패라는 것이다. 불교는 소비사회도 거부하고 노동절약적인 기술도 거부한다. 재생산이 불가능한 자원의 이용, 대규모의 다국적 기업도 거부한다.

슈마허의 불교경제학은 환경주의는 물론이고 공동체주의, 성장억제론, 중소기업 보호론에 매우 큰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그의 사회철학은 케인스, 마르크스 그리고 토니, 베버리지 등의 사회주의 사상을 불교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슈마허 사상의 궁극적 목적이다. 그는 토니를 인용하여 선언하고 있듯이 “이기주의, 탐욕을 조장하지 않는 제도적 환경”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이런 선언은 불교경제학의 핵심적 요소인 인간의 탐욕 억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2) 큰 정부, 작은 시장과 불교경제학

“이기주의, 탐욕을 억제하는 제도적 환경”을 만드는 게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이념의 실천적 의미이다. 그런 이념이 전제하는 도덕은 무엇인가? 도덕을 실현하기 위한 정책은 무엇인가? 국가의 과제는 무엇인가?

우선 불교경제학이 추구하는 도덕은 우정, 동료애, 유대감, 자선과 같은 도덕이다. 이는 타인을 위해서 자신의 욕구충족을 억제하는 행위이다. 공동체주의가 강조하는 도덕적 원칙이다. 매우 목가적인 사회를 그리워한다. 과거 낭만주의자들이 그리던 세상과도 흡사하다.

경쟁은 타인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허용한다. 한 사람의 승리가 타인의 패배를 의미하는 경쟁은 반대한다. 어느 한 사람의 혁신은 다른 기업의 피해를 가져오고 창조적 파괴는 비혁신가를 긴장시키기 때문에 그런 혁신은 반대한다. 혁신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혁신은 반대한다. 따라서 불교경제학은 경쟁을 매우 제한적으로 사용한다.

성장이 중요한 게 아니라 분배가 중요하다는 인식이 불교경제학의 핵심이다. 큰 도시와 큰 기업은 규제 대상이다. 중소상공인을 중시한다. 중소도시와 같은 작은 도시가 인간을 위한 도시라는 것이다. 인구분산 정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대목이다.

불교경제학이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이념의 실현을 위해서 필요한 국가의 과제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 기간산업의 국유화
― 토지소유와 이용의 규제
― 분배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재분배 정책
― 경쟁을 억제하기 위한 규제
― 대기업 규제, 중소기업 육성
― 무역의 규제
― 농업보호
― 노동의 중요성과 완전고용 정책
― 적극적 재정정책
― 공교육 공동체 가치를 함양하고 탐욕을 억제하기 위해서 도덕교육을 중시한다
― 주택정책
― 환경규제

그 같은 과제의 실현을 위해서는 큰 정부, 작은 시장이 필요하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은 작은 시장이 아름답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작은 시장은 큰 정부를 불러오기에 큰 정부도 아름답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이념은 큰 정부를 지지하는 내용이다. 공룡같이 몸집이 큰 거대한 정부 앞에서 작은 기업, 작은 인간, 작은 시장은 피그미와 같다. 가부장적 온정주의의 국가관을 전제하고 있다. 정부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정치인 관료는 국리민복을 위해서 헌신하는 매우 도덕적이라고 보는 데 반하여, 시장에 참여하는 사람은 탐욕적이라고 본다. 그래서 큰 정부가 개인들의 모든 고통을 헤아리고 보살필 의지와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는 게 불교경제학의 주장이다.

3) 불교경제학의 자유주의 비판

불교경제학이 이해하는 자본주의는 이렇다: ‘소비를 통해 쾌락을 추구하는 이기적이고 고립된 인간’이라는 인간관을 토대로 삼아 자유로운 경쟁과 그 경쟁의 결과에 따른 차별을 정당화하는 경제시스템이자 정치이념.

현대사회는 자유주의의 경제체제로서 그런 자본주의가 지배하고 있다는 게 불교경제학의 인식이다. 그런 체제에 대한 비판이 매우 강력하다. 재물 탐욕은 금물인데 인간의 끝없는 이기적 욕망에 뿌리를 내린 것이 자본주의라는 것이다. 이런 자본주의에 대하여 긴장해야 한다고 한다. 오늘의 지구적 경제위기도 탐욕에 근거한 자본가의 몸집 부풀리기 때문에 생겨난 거품이라고 말한다.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공동체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게 자본주의라고 한다. 서로 보듬고 기쁨을 함께하고 슬픔을 나누는 의리와 공동체 정신도 파괴했다고 주장한다. 성장을 제일로 여기는 물질주의를 구현한 게 자본주의라고 한다. 경제성장의 결실은 부자만 차지할 뿐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하게 만든 게 자본주의라는 것이다.

자유주의로 인하여 실업과 빈곤이 증가되었다고도 한다. 자유주의의 세계화로 대공황이 야기되었고, 나라들 사이에 빈부격차가 증가했다고 한다. 환경위기, 경제위기 과학의 위기 등, 인류는 매우 위험한 거대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그 같은 위기는 인류를 멸망시킬 수 있을 만큼 심각하다.

3.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이념의 실현 가능성

불교경제학의 핵심적 요체는 인간의 탐욕과 그리고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실천적 개념이다. 이 두 가지 개념을 가지고 자유주의를 비판하면서 그 대안으로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이념을 실현하고자 한다.

그 실현이 가능한가? 그리고 자유주의에 대한 불교경제학의 비판이 타당한가? 이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서 현대사회의 특징을 개관할 필요가 있다.

1) 현대사회의 특징: 거대한 열린 익명의 사회

현대사회는 거대한 사회이다. 수백, 수천만 명으로 구성된 사회이다. 분업이 지역적인 범위를 넘어 국가적이고 범세계적이다.

우리의 밥상에 올라오는 음식의 출처,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연필, 컴퓨터, 자동차 등 어느 것 하나도 범세계적 분업의 결과가 아닌 것이 없다. 현대사회는 그래서 확장된 사회다. 어느 지역이든 어느 국가든 밖으로 열려 있다. 확장된 사회에서 살고 있다

누가 연필 재료가 되는 흑연을 캐고 나무를 베고 흑연으로 연필심을 만드는가를 알지 못한다. 누가 어떻게 그런 상품을 수송하여 우리의 손에 들어오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익명의 사회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시장에 나가거나 문밖에 나가면 모르는 사람들이다.

이런 열린 거대한 사회는 누가 인위적으로 만들지 않았다. 아무도 만든 사람이 없다. 그래서 현대사회는 자생적 질서(spontaneous order)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사회는 과거의 사회와 전혀 다르다.

과거 원시사회에서는 수십 명, 기껏해야 100여 명의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였다. 서로 얼굴을 아는 사람들끼리 일생을 같이하면서 살았다. 대면사회(face to face society)였다. 지도자의 명령과 지시에 따라 수렵과 채취를 통해서 집단적으로 삶을 영위했다. 이런 삶은 수십만 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게 원시 부족사회였다.

이런 사회의 도덕적 기초는 이타심, 유대, 사랑 등이다. 서로 보살피고 나누어 먹었다. 부족 우두머리의 지시와 명령에 따라 부족사회가 운영되었다. 이 같은 사회는 자연적 질서(natural order)이다. 사회질서의 기초가 되는 우정, 유대감 등의 출처는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인류는 심리적 구조와 본능이 형성되던 수십만 년 동안 그 같은 삶을 살아왔다.

그러다가 정착된 농경사회가 등장한다. 사회 규모가 전 시대보다는 크기는 했지만,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는 소규모 사회라는 점에서 이 사회도 전 시대와 큰 변동이 없었다. 소규모의 부락공동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지역과 지역을 연결시키는 시장이 형성되고 분업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외부에 열린 현대적 사회의 여명이 트인 것이다. 분업과 시장이 확장되기 시작했다. 인구도 늘어났다 그런 분업과 시장거래는 국가 단위로 확대되었다. 아는 사람들끼리만의 분업이 아니라 익명의 사람들끼리의 분업으로 확대되었다. 거래 대상도 곡물, 면직에서 다양한 공산품으로 확대되었다. 이런 현대사회에서 큰 기업, 작은 기업들이 수없이 존재한다.

과거에는 아는 사람들끼리의 분업에서는 시장이 큰 역할을 하지 않았다. 말해서 들리는 사람들, 보고 아는 사람들끼리 분업이 가능했다. 기업도 작았다. 그러나 범국가적 분업에서는 의사소통이 말이나 제스처로 가능하지 않다. 이제는 모르는 사람들 간의 분업이 가능하려면 가격을 기초로 하는 시장이 절대적이다.

분업이 국가적 단위에서 범세계적으로 확대되었다. 이제 분업이 국제적이다. 열린 거대한 사회이다. 내가 사용하는 연필 한 자루가 내 손에 오기까지 우리가 전부 알 수 없는 인간들의 분업적 관계가 있다.

이런 열린 거대한 사회를 가능하게 한 것은 원시 부족사회와 농경사회를 지배하던 연대감, 우정, 사랑과 같은 대면사회의 도덕 대신에 소유권 존중, 도덕, 약속 지키기, 개방적 사고 등과 같은 새로운 도덕의 등장 때문이었다.

익명의 사람들에게는 폭력, 사기, 강압과 같은 행동을 금지하는 소극적 도덕이 지배했다. 연대감과 같은 적극적 도덕은 가족, 친지, 동료 등, 아는 사람들끼리의 관계 형성에 기여했다. 끼리끼리 문화의 기초가 되었다. 아는 사람의 알려진 욕구충족에 기여한다.

그러나 거대사회의 도덕은 익명의 사람들의 알지 못하는 욕구를 충족하는 데 기여했다. 강원도 농민의 채소는 그가 전혀 알지도 못하는 부산 사람들의 식탁에 오른다. 독일의 철광 광부는 그가 전혀 알지 못하는 현대자동차의 자동차 생산에 기여한다. 이와 같이 확장된 사회에서는 인간들의 관계가 범세계적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욕구도 매우 다양하고 삶의 방식과 삶의 목표도 다양하다.

원시 부족사회 또는 농경사회는 퇴니스가 말하는 공동체(Gemei-nschaft)인 데 반하여 현대사회는 이익사회(Gesellschaft)이다. 신분사회에서 계약사회로 전환의 결과가 현대사회라는 걸 직시할 필요가 있다.
거대한 익명의 사회에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이념을 실현할 수 있는가의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2) 소규모 사회와 대규모 사회의 윤리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불교경제학의 실천적 원칙은 거대한 열린 사회를 전제한 원칙이 아니다. 작은 마을이나 작은 도시를 전제한다. 이 같은 사회는 서로 얼굴을 아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특징으로 한다. 이런 사회에서 사람들은 자기가 태어난 마을을 떠나는 일이 드물다. 큰 기업도 필요 없다. 대형 백화점도 필요 없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소규모 사회에서는 “서로 보듬고 기쁨을 함께하고 슬픔을 나누는” 공동체 정신이 지배한다.

이 같은 연대와 유대감을 기반으로 형성된 사회질서의 전형적인 것이 원시 부족사회라는 것은 인류학자가 또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당시 호모 사피엔스들은 소규모의 그룹을 지어 수렵과 채취를 하면서 삶을 영위했다.

문화적 진화는 원시 부족사회를 극복하고 오늘날과 같이 거대한 익명의 사회를 탄생시켰다. 이 같은 사회는 시장경제와 광범위한 개인적 자유를 가진 사회이다. 열린 거대한 도덕은 특정의 행동을 금지하는 추상적인 행동규칙이다. 이것은 약속이행, 재산의 존중, 개인적 책임과 같은 도덕이다. 이것은 연대나 유대와 같은 공동체 도덕과는 성격상 전적으로 상이하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사회의 규모에 따라 사회의 기초가 되는 도덕도 다르다는 점이다. 연대감이나 이타심, 도덕 같은 소규모 사회의 공동체 도덕을 거대한 열린 사회에 적용할 수 없다.

유감스럽게도 불교경제학은 이와 같은 윤리적 국면을 간과하고 있다. 작은 사회를 지배하는 도덕을 거대한 사회에 적용하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스미스도 《도덕감정론》에서 적극적 도덕으로서 유대감, 사랑, 애착심 등 선행의 도덕과 소극적 도덕으로서 약속이행, 재산의 존중, 개인적 책임과 같은 도덕을 구분하면서 전자는 소규모 사회에 후자는 거대사회에 적용된다는 것을 주장한 건 우연이 아니다.

3) 정부가 전지전능한가?

불교경제학은 다른 간섭주의 경제학처럼 정부에게 ‘이것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저것을 하라’는 식의 제안을 한다. 이는 정부는 전지전능하고 아주 이타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나 이런 전제는 틀렸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이념을 제도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큰 도시, 큰 기업을, 넓게 말해서 모든 사회구조를 인위적으로 계획하여 통제해야 한다. 이것이 가능한가? 지식의 문제를 고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불교경제학의 치명적 오류이다.

가격을 규제하기 위해서는 그 상품의 수요와 공급의 탄력성을 알아야 한다. 이는 이론상에서나 알려져 있을 뿐이다. 기업의 규모를 정하기 위해서는 그 상품의 생산 기술 수준, 공급자의 수, 수요자의 선호와 수요 상태를 알아야 한다,

그런 지식은 각처에 분산되어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들어 있다. 규제를 담당하는 관료는 그런 지식을 수집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지식의 상당 부분은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자신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래서 규제자들에게 전달하기가 불가능한 암묵적 지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

그런데 불교경제학은 이 같은 지식의 문제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인위적으로 계획하여 사회질서를 만들 수 있다는 지적 자만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같은 자만은 사회주의의 몰락에서 보는 것처럼 치명적이다. 하이에크의 유명한 만년의 저서 《치명적 자만》은 매우 시사적이다.

우리가 지식의 문제를 고려한다면 개인들이 마음껏 자신들의 정신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도록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불교의 사회철학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불교의 사회철학은 ‘하고 싶음(will)’과 ‘할 수 있음(can)’을 구분하지 못하고 전자는 후자를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요컨대 불교경제학은 원시사회에 대한 본능적 향수를 인간 이성을 통해서 실현하려는 것이다. 이는 치명적 자만이다

4) 불교경제학과 정실주의

불교경제학은 시장참여자들은 이기적이고 부도덕하다고 여긴다. 그 대신에 정부의 관료나 정치가는 국리민복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로 취급한다. 그러니까 큰 정부, 작은 시장을 요구한다.

그러나 정부에 대한 그런 인식은 잘못된 것이다. 정부 사람들도 이기적이라는 사실이다. 정책을 만들 때나 결정을 내릴 때 자신들의 이익을 고려한다. 소득, 권력, 명예를 추구하는 사람, 제 것 챙기는 데 급급한 사람이라는 점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관료는 성공적인 의사결정에서 직접 이익을 얻는 게 아니라 나쁜 결정은 엄격히 처벌을 받는다. 그래서 기업가적이지 못하다.

예산 극대화를 추구하는 관료는 비효율적인 자원을 자신이 할당받으려고 노력한다. 선출된 정치인은 공익보다 재집권, 재선에 초점을 둔다. 정부 사람들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편익을 주어야 한다. 독재자도 자신을 따르는 인맥을 만들어 지원해야 한다. 선출된 자도 특수이익을 자신을 지지한 다수의 연립에게 제공해아 한다.

정부 사람들이 돈을 지출하거나 규제를 만들고 실행할 권력을 갖게 되면 자신을 권력유지에 필요한 사람들을 지원하기 위해 타인들을 희생시킨다. 이게 정실주의의 기초가 된다. 정실자본주의는 개인 또는 기업의 이익과 경제적 성공이 정치적 인맥에 의해서 결정되는 사회시스템이다.

사람들은 정부의 편애를 추구하고 경쟁에서 불이익을 주는 규제나 지출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한다. 생산적인 경쟁을 통해서 얻는 이익보다 보호를 통해 얻는 이익이 크기 때문이다 그런 이익을 얻기 위해서는 정치 관료와 커넥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런 인맥이 경제적 성공을 결정하는 사회가 형성된다.

우리가 우려하는 것은 불교경제학이 그 같은 정실주의에 빠질 위험성이다. 정부의 경제 개입이 클수록, 기업의 성공 가능성이 생산적 활동보다는 정부의 지지에 좌우될수록, 정치적 커넥션이 경제적 성공을 위해서 그만큼 더 중요하다.

그런 정실주의는 경제발전도 없고 기다리는 것은 빈곤이다. 그 단적인 예가 슈마허가 동경하던 미얀마이다. 영국의 통치를 받고 있었던 미얀마는 제2차 세계대전 전에는 동남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였다.

그러나 기간산업의 국유화 등 정부 주도의 간섭주의 경제로 전환한 후에는 쌀 수출량은 3분의 2, 광물 수출량은 96%가 감소했다. 통화팽창을 통한 재원 조달 계획은 인플레이션을 초래, 미얀마는 세계의 빈곤국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1977년부터 폐쇄적 경제체제를 완화하였으며 서구의 원조를 받아들이면서 점진적으로 시장경제체제로 전환했다. 풍부한 천연자원과 값싼 노동력을 바탕으로 7% 이상의 고도성장을 하고 있다.

4.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의 허와 실

불교의 사회철학은 구조적으로 세 가지 오류를 범하고 있다. 하나는 탐욕을 취급하는 방법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다. 두 번째로 인식론적 국면에서 그리고 세 번째는 윤리적 측면의 오류이다.

1) 자유주의와 이기적 원자적 인간

자유주의는 자유시장과 법치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이념이다. 그런데 그 이념은 이기적이고 원자적 인간을 전제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비판은 옳지 않다. 자유주의는 그런 자기 완료적인 고립된 인간을 전제한 게 아니다.

스미스, 하이에크의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전통에 따른 자유주의 이념에서 사회와 독립적인 고립된 인간의 존재는 상상할 수 없다. 인간은 사회를 떠나 고립하여 존재할 수 없다. 사회적 관계 속에서 지식을 습득하고 모방하고 테스트하는 등, 학습하는 것이 인간이다. 학습을 통해서 개인 자신이 발전해간다. 사회적 관계 속에서 도덕적 행동도 개발하고 테스트하고 모방하고 학습한다.

자유주의는 이기심을 가진 인간을 전제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이 정의의 규칙을 지키는 한 이기적 행동을 하든 이타적 행동을 하든, 그건 자유롭다.

흥미로운 것은 자유사회에는 가족집단, 교회집단, 팬클럽, 범죄예방단체, 청소년 보호단체, 상보상조를 위한 친목단체, 자선단체 등, 수많은 공동체적 집단들이 자발적으로 형성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같은 집단을 구성하고 참여할 자유가 보장되는 것도 자유사회다.

따라서 자유사회의 묘미는 개인들은 한편으로는 마땅한 공동체적 집단을 자유롭게 선택하여 배려의 두터운 도덕적 욕구를 충족하고, 다른 한편 이 집단 밖에서는 엷은 배려나 또는 이기적 욕구를 충족할 수 있다는 점이다.

2) 자유주의와 배려 윤리

자유주의는 배려의 윤리를 무시한다고 비판한다. 배려와 호의는 소규모 사회에서만 빈번히 목격할 수 있다. 그러나 거대한 익명의 시장사회에서는 그런 도덕이 공동체만큼 그렇게 견고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살아 있다.

성실성과 호의를 가지고 고객들을 대할 뿐만 아니라 잘못된 제품, 파손된 제품을 지체하지 않고 교환해주고 또 판매한 후에도 일정 기간 무료로 사후관리도 해준다. 백화점은 고객들을 배려하기 위해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기업들은 소비자들의 선호를 최대한 배려한다.

기업들이 장기적인 이익을 바라고 선행을 하기 때문에 진정한 배려와 거리가 멀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동기가 아니라 행동의 결과이다.

동기야 어쨌든 경쟁사회는 결코 선행을 버린 것이 아니라 이를 권장하고 장려한다. 회사에서 직원들에게 협동심을 키우기 위한 교육이나 훈련을 시키는 것이 단적인 예다. 친절하지 못한 백화점은 경쟁에서 밀려난다. 고객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3) 경쟁이 악인가?

불교경제학은 간섭주의 경제학이나 사회주의 경제학과 마찬가지로 경쟁에 대하여 매우 비관적이다. 정말로 경쟁이 나쁜가? 본능적으로 우리는 경쟁을 싫어한다. 경쟁은 생물학적인 본능의 소산이 아니라 문화적 진화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경쟁은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해 버르장머리 없는 기업들을 길들이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확립한 인물이 애덤 스미스이다.

애덤 스미스 이후 자유주의자들은 경쟁의 여러 가지 사회적 역할을 발견했다. 예를 들면 품질은 나쁨에도 값은 비싸게 파는 대기업의 독점적 행위도 막을 수 있는 게 경쟁이다.

경쟁은 인간에게 절제의 도덕과 신중의 도덕, 배려의 도덕을 촉진한다. 경쟁은 권력을 해체하기도 한다. 권력의 집중을 막는 효과적인 방법은 경쟁이다.

하이에크가 인식론적 입장에서 경쟁을 발견의 절차라고 말한 것은 경쟁의 사회적 역할의 최고봉이다. 이 절차는 알려져 있지 않은 지식의 발견이다. 이 같은 경쟁의 역할 때문에 자유주의에서 경쟁은 법으로 억압할 것이 아니라 보호해야 할 대상이다. 개인적 또는 사회적 차원의 번영은 바로 이 경쟁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경쟁이 그 같은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무제한적이어서는 안 된다. 폭력, 사기, 기만, 담합 등과 같은 행동을 제한하는 법을 필요로 한다.

4) 탐욕이 문제인가?

불교경제학은 인간의 탐욕을 비판한다. 이것이 환경위기, 경제위기 등을 야기한다고 주장한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실천적 원칙은 탐욕 억제를 위한 정치적 개념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불교의 사회철학이 인간의 탐욕을 다루는 방법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물론 인간의 탐욕 또는 이기심이 무제한적이면 그것은 문제인 것은 사실이다. 자유주의에서도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자유주의는 탐욕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려 했는가? 자유주의와 시장경제에는 내부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장치가 세 가지가 들어 있다.

시장경제를 구성하는 원칙을 보자. 이것은 재산권 규칙, 계약과 관련된 규칙 그리고 책임 규칙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규칙들은 시장참여자들이 해서는 안 될 행동을 금지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장경제의 바탕에 두껍게 깔려 있는 행동규칙들은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위반할 경우 사회의 강력한 비난이 뒤따르는 비공식 규칙과, 위반하면 국가의 제재가 따르는 공식 규칙의 구분이다.

따라서 이기심과 탐욕을 통제하는 첫 번째가 비공식 규칙이다. 두 번째 통제 메커니즘이 민법, 형법과 같은 공식 규칙이다. 무제한적 이기심을 억제하는 마지막 세 번째 통제는 이 같은 행동규칙의 틀 내에서 이루어지는 경쟁을 통해서이다.

예를 들면 나쁜 상품을 비싼 값으로 파는 기업은 시장에서 도태된다. 왜냐 하면 좋은 상품을 값싸게 공급하여 이윤을 추구하려는 경쟁기업이 당장 등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철학이 분명히 거부하겠지만, 경쟁이야말로 인간의 탐욕을 가장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메커니즘이다. 이 세 가지가 이기심, 탐욕을 통제하는 자유주의 원리이다.

요컨대 시장을 구성하는 원칙만을 제대로 지킨다면 이기심과 탐욕은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개인들의 이기심과 탐욕은 사회 전체에 이익을 가져다준다.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한다는 말이다.
흥미롭게도 인류 역사에서 비록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인간의 무제한적 탐욕을 제한하는 행동규칙들이 자생적으로 형성되어 왔다. 이 같은 행동규칙들을 기초로 하여 개인들의 이기적인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 분업과 협력이 가능하게 되었고 이로써 오늘날과 같이 거대한 번영을 달성한 것이다.

그런데 불교철학자들은 탐욕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이다. 인간이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리고 탐욕이나 이타심은 체제와 관계없이 늘 어디에서나 목격되는 인간의 불변적인 심성이다. 그것은 물리학의 중력(gravity)의 법칙에 해당된다.

탐욕은 인간 본성을 구성하는 고칠 수 없는 요소이다. 따라서 건설적인 담론은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을 사실로 인정하고 이것이 생산적인 방향으로 작용하기 위해서 필요한 게임규칙이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의 사회철학은 이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있다. 탐욕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병폐의 원인으로 보기 때문이다.

5. 맺는말

불교경제학의 가치들은 욕구의 다양화에서 문명의 핵심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 특성의 순수성에서 그것을 보고 있다. 그러나 순수성은 이상주의적 가치일 뿐이다. 이 가치가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소규모 사회이다.

작은 것을 아름답다고 보는 태도는 인류가 장구한 기간 살아온 원시사회에서 습득한 정신이다. 진화심리학자 코스미데스(L. Cosmides)와 투비(J. Tooby)는 이를 “석기시대의 정신(stone age mind)”이라고 말한다. 이런 정신이 현대인의 DNA 속에 들어 있다.

불교경제학이 이런 도덕적 가치를 설교하고 이런 가치를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반대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자유로이 사람들이 불교적 도덕의 가치를 택하는 것은 반대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자유사회에서는 그래서 도덕적 행동을 선택할 자유가 허용되어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이상주의의 도덕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법을 정하고 이를 강제로 집행하는 것은 성공할 수도 없고 오히려 그런 도덕의 실현을 위한 정부 개입은 필연적으로 정실주의가 지배한다. 정실주의는 특정 그룹에 대한 정치적 법적 편애를 뜻한다. 이는 자유주의가 아니다. 그리고 그런 정실주의는 번영을 파괴할 뿐이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선택하도록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 이런 자유 자본주의에서 가난한 사람도 부자가 될 수 있다. 경쟁력 있는 일자리가 창출될 수 있고 빈곤도 지속적으로 해소될 수 있다. 고된 노동을 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기술발전도 가능하고, 일하고 남은 인간의 에너지를 교육에 쏟을 수 있다.

불교적 도덕, 즉 스미스의 적극적인 도덕은 가족, 친구, 혈연집단, 종교공동체 등 소규모 사회에서 실현할 수 있다. 이런 소규모 사회를 품는 게 열린 거대한 사회, 즉 자유사회이다. ■

 

민경국 / 강원대 경제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졸업. 독일 프라이브르크 대학교 경제학 석사 박사. 주요 저서로 《하이에크의 자유주의 사상연구》 《자유주의 지혜》 《경제사상사 여행》 등이 있다. 한국하이에크소사이어티 회장, 한국제도경제학회 회장 등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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