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의 눈으로 자본주의를 말한다

1. 머리말

자본주의는 물질의 생산을 풍부하게 함으로써 인간 생활을 편리하게 하였지만 여러 가지 문제점을 일으켜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 있다. 자본주의의 결과로 소득 양극화와 대중빈곤이 초래되고, 가족과 지역공동체가 해체되며, 그로 인해 인간소외와 노동소외, 배금주의와 무한경쟁, 세계화로 인한 신식민주의가 초래되었다. 더 나아가 자원고갈과 지구파괴 때문에 인류의 영속성까지 의문시되게 되었다. 자본은 무한성장이라는 속성 때문에 과잉생산을 초래하고, 과잉소비를 창출시킨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질은 실제로 그리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은 사람들에게 결핍의식과 필요욕구를 자극시켜 소비시장을 창출한다. 그러면서 자본은 소유와 소비가 행복의 척도인 듯이 대중의식을 유도하며 사람들은 그러한 의식조작에 지배당한다. 그러나 불교는 인간의 행복이 물질에 있지 않고, 소비에 있지 않으며, 사람이 경제성장과 국민소득에 의해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가르친다.

경제에 대한 불교의 가르침은 재화의 창출을 위한 ‘성실한 노동’과 ‘절약’이다. 또한 그렇게 생산된 부는 자신의 생계는 물론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에 쓰여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에 따라 소비자는 소욕지족을 실천함으로써 소비에 대한 갈망, 물신주의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리고 그 결과 잃어버린 가족공동체와 지역공동체의 가치와 노동의 진정한 가치를 되찾을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소비주의와 물질만능주의의 극복은 팔정도와 육바라밀 수행을 통해서 가능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물질이 인간을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는 환상으로부터 깨어나야 한다. 정신적 깨달음은 ‘물질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깨달음을 우선 필요로 한다. 하지만 불교의 가르침에는 자본주의의 원리와 유사한 점도 없지 않다. 이 글에서는 현대 자본주의의 문제점 극복을 향한 방향 모색을 위해 불교의 기본입장과 여러 가르침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2. 자본주의에 대한 불교의 기본입장

1) 경제활동에 대한 불교의 기본 입장

출가 수행자에게는 모든 경제활동과 직업이 금지된다. 하지만 재가자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재가자는 세속에서 불교의 윤리에 따라서 생업을 영위한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재화의 소유와 관리, 분배 등의 원칙이 없을 수 없다. 경전은 세간의 재산소유, 관리, 분배 등의 경제행위를 모두 인정하고 있으며, 그 관심은 윤리적 측면에 있다. 즉, 경전은 정당한 방법으로 재산을 취득하고, 근면을 통해 사치와 향락에 빠지지 않는 검소한 소비생활을 권장하는 것이다. 앙굿다라 니까야는 다음처럼 재산을 취득함에서 올바르고 정당하게 그리고 슬기롭게 하여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무엇이 셋인가. 눈먼 사람, 한 눈 가진 사람, 두 눈 가진 사람이다. 비구들이여. 눈먼 사람이란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 여기에 어떤 사람은 재산을 얻거나 늘리는 눈을 갖고 있지 않다. 또한 악하고 선한 방법, 비난받고 칭찬받는 방법, 천하고 고상한 방법, 떳떳하고 어두운 방법을 잘 아는 눈을 갖고 있지 않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사람들을 눈먼 사람이라 부른다. ……비구들이여, 두 눈 가진 이는 어떤 종류의 사람들인가. 그는 재산을 얻거나 늘리는 눈을 갖고 있다. 그는 또한 선한 방법과 악한 방법, 비난받고 칭찬받는 방법, 천하고 고상한 방법, 떳떳하고 어두운 방법을 잘 분별하는 눈도 갖고 있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사람을 두 눈 가진 이라고 부른다.

이 가르침은 무엇보다도 먼저 재화를 창출하기 위해 경제활동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주장한다. 하지만 재산의 획득과 증식에는 일정한 윤리규범이 있어야 하는바, 자신은 물론 타인에게도 해로움을 주지 않는 정당한 방법에 의거해야 한다. 또한 정당한 방법에 의해 얻어진 재화라 하더라도 바르게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경제활동에 대한 불교의 기본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2) 재의 효용

재화는 인간의 기본적 생존을 수행하기 위한 기초이며, 더 나아가서는 해탈을 위한 수도를 성취하는 데 필요한 수단이다. 이러한 재화의 효용을 앙굿다라 니까야에서는 다섯 가지로 정리했는데 그것은 ①가족과 식솔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②친구와 동료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 ③환난에 대비하고 상속을 준비하기 위해서 ④왕과 대신에 대한 의무를 위해서 ⑤성자들을 공양하기 위해서이다. 즉 재화는 개인의 욕심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도리를 다하고 사회를 이롭게 회향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올바르고 고르게 분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불교에서는 복전을 강조한다. 복전이란 “적극적 복지행과 보시행을 통해서 복을 받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불설제덕복전경(佛說諸德福田經)》은 일곱 가지 복전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즉, 사원에 대한 다양한 보시뿐만 아니라, 과수원을 조성하고, 수목을 심으며, 병자에게 의약품을 주고, 선박을 마련하며, 다리를 건설하고, 도로 주변에 우물을 파는 행위 등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즉 사회복지가 공덕개념과 결부된 것이다. 또 《우바새계경(優婆塞戒經)》에서는 이 복전을 세가지로 세분하였는데, 첫째로 공덕전(公德田, 혹은 敬田)이란 불·법·승 3보에 대한 봉사를 가리키고, 보은전(報恩田, 恩田)이란 부모나 스승에 대한 봉사를 말하며, 빈궁전(貧窮田, 悲田)이란 빈곤자와 병자에 대한 봉사를 뜻한다. 이와 같이 복전은 당시 사회가 요구하는 공동이익에의 참여를 기본정신으로 하는 이타적 활동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공익을 증진시키기 위한 실천적 행위는 모두 복전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처럼 불교에서 재의 효용은 가족으로서의 신성한 생업의 의무와, 사회적 시여(施輿)인 복전사상의 실현으로 요약될 수 있다. 요컨대 재화란 개인 및 그 가족의 생계는 물론 이웃과 사회에 도리를 다하고, 인류 사회를 위해 쓰이는 것이 그 본래의 목표라는 것이다.

3) 생산: 노동의 가치

불교는 기본적으로 재화의 소유를 부정하지 않는다. 또한 건전한 노동을 통한 재화의 획득과 증식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권장한다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생산의 측면에서는 근면을, 소비의 측면에서는 절제를 주장한다. 또한 부의 축적은 개인의 탐욕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자로서 사회적 선행을 하고, 이타행을 통해서 복전을 짓기 위한 수단으로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불교의 경제원리는 근면을 통한 생산을 존중하고 장려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물자가 부족했고 물질에 따라 인간의 생존이 결정되었기 때문에 근면을 통하여 생산을 많이 하는 일이 권장되었다. 물자가 부족한 사회에서 헛된 일에 노동과 시간을 낭비하거나 생산물을 탕진하는 것은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죄악이었다. 그리하여 불교의 생산윤리에서는 무엇보다도 근면과 정려가 중요시되었으며, 사치와 낭비와 게으름이 극도로 경계되었다. 《육방예경》에서는 “여섯 가지 일 때문에 돈과 재산이 날로 줄어드니, 술 마시는 일과 도박을 즐기는 일, 그리고 초저녁에 자고 늦게 일어나는 일, 나쁜 친구와 사귀는 일, 교만하여 남을 업신여기는 일을 경계하라.”고 하였다.

노동은 토지 자본과 함께 생산의 3요소 중의 하나로 중시된다. 노동이 없다면 인간 세상의 재화가 없을 것이요, 더 이상 인류가 존속할 수도 없다. 노동은 우선 자신의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가족과 이웃을 위하고 사회 전체를 위하는 일이다. 경전에서는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이미 네 가지 은혜를 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나의 노동은 이러한 은혜를 갚는 길이 되는 것이다. 은혜에 보답하는 행(行)을 통해서 공동체는 더욱 공고해지는바, 노동은 결국 공동체를 유지하는 원천이 된다고 볼 수 있다.

4) 불교의 직업관

직업이란 개성을 발휘하고 역할을 실현하며 생계의 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계속적 인간활동으로 정의된다. 사회생활의 기초가 사회와 개인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다고 볼 때, 직업은 이 양쪽을 연결하는 매개체이다. 전체는 개인의 직업을 통해서 유지되며 개체는 직업을 통해서 전체에 귀속된다. 그러므로 직업은 사회생활의 기초를 이루는 골격이고, 개인을 사회의 구성원으로 되게 하는 필수요건이다.

불전에서는 사람이 천민이 되거나 바라문이 되거나 그것은 출생이나 신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업(業)에 의해서 정해진다고 말한다.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느냐가 그 사람을 결정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람직한 직업과 그렇지 못한 직업은 큰 차이가 있다. 이른바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것은 사회적 평가로서 천한 인식을 받는 직업도 소중하다는 뜻이지 결코 돈을 벌기 위해서는 어떤 직업도 괜찮다는 뜻은 아니다. 오늘날 자본주의에서 많은 이익을 얻는 직업이 숭상받고 그 사회적인 해악은 대개 무시되는 현실에서 직업윤리와 가치 있는 직업에 대한 강조는 매우 절실하다.

농업의 경우, 바라드바자 바라문과 불타와의 대화에서 보듯이 성직과 대등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취급되고 있으며, 기타 잡아함경에는 바람직한 직업으로 상업, 목축, 금대, 건축업, 관리, 무술, 서예, 계산, 그림 등이 열거되고 있다.

반면에 바르지 못한 직업으로는 어부, 엽사, 도살자 등의 살생과 관련된 직업과, 무기의 판매, 생물의 매매, 육류의 매매, 주류의 매매, 그리고 독의 매매 등 사회에 해악을 끼칠 수 있는 물건의 거래행위를 열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직업에서 귀천의 기준은 신분이나 직종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도덕성과 사회적 기여도에 있는 것이다.

5) 소비지출론: 사분법(四分法)

소비지출은 크게 보아 생산적 소비와 개인적 소비로 나뉜다. 잡아함경에는 사분법이 소개되어 있는데, 재화의 합리적 소비에 대한 규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수입의 4분의 1은 생계비에 사용하고, 4분의 2를 생업을 경영(營生業)하는 데 사용하며, 4분의 1은 저축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중아함경에는 전업(田業) 등의 영생업에 4분의 1을 쓰고, 4분의 1을 대여에 사용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이 표현은 경전에 따라서 조금씩 차이가 나고, 경전의 편찬 시대에 따라서도 조금씩 달라짐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생산과 소비의 형태는 시대와 생산양식에 따라서도 매우 달라지므로 이 수치를 고집할 필요는 없겠으나, 결국 경전이 가르치는 바는 재물의 지속적 취득을 위해서는 재산을 합리적으로 운용하고, 합리적으로 관리하라는 가르침으로 볼 수 있다.

한편 많은 경전에서 당시 사람들의 경제적 곤궁과 빚에 관해서 기록되고 있는바, 이자는 그것을 통해서 재산을 취하기보다는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돕고 빈궁한 사람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덜어주려는 방편으로 사용되었으리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나 이슬람교 등에서는 원천적으로 이자수입을 금지하고 있는 데 반해, 초기경전에서 이자수입을 권장하고 있는 것은 불교가 자본주의를 원론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할 것이다.

6) 행복과 만족의 원천

(1) 물질적 욕망의 헛됨

욕망 충족을 위한 끝없는 추구는 그 자체가 일종의 고통이다. 그래서 불교는 이런 종류의 욕망을 중지할 것을 권유한다. 사람들은 욕심이 채워지지 않기 때문에 만족할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욕심은 허상이고 불건전한 것이기에 그것은 채워질 필요가 없고 다 채워질 수도 없다. 그래서 만족(contentment)의 뜻은 ‘불건전한 욕망이 없을 때’를 의미한다. 적은 물질로 만족할 때, 우리는 욕망의 대상을 얻기 위해 낭비되는 시간과 노력을 줄일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절약된 시간과 노력은 심성의 개발에 이용될 수가 있는데 그것이 의욕이다. 욕망의 헛됨을 일깨우는 가르침이 여러 경전에 표현되어 있다.

불교의 가르침은 물질적 욕심을 가능한 한 적게 가지고 만족하며 살아가라는 소욕지족(少欲知足)이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사회, 시장경제사회는 사람들에게 욕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야만 생산된 상품이 팔리기 때문이다. 결국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불교에서 가르치는 소욕지족의 경제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고, 욕심을 부추겨서 상품이 많이 팔리도록 해야만 기능할 수 있는 시장경제란 매우 부도덕한 경제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욕망이 무한하다는 것을 나타내어 《담마빠다》에서는 “참으로 금화의 비가 내려도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만족은 없다. 욕망에는 쾌락은 적고 고통뿐이다. 현명한 님은 이와 같이 안다.”라고 설하였다. 또 잡아함경에서도 “히말라야 산만큼이나 거대한 순금 덩어리를 한 사람이 가지고 쓴다고 해도 오히려 만족을 느끼지 못하리라.”라고 말하여 인간욕망의 무한함을 표현하였다. 이렇게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기 때문에 다 채워질 수도 없지만, 욕망이 채워지면 채워질수록 더욱 욕망에 대한 갈증은 커진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그래서 불교를 비롯한 모든 위대한 종교에서는 욕망의 헛됨을 가르치고, 적은 것에 만족하기를 가르친다. 자본주의 경제학에서는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이 경제학의 목표다.”라고 하는데,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욕망은 끝이 없기에 욕구의 충족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2) 검약과 절제-간소한 삶

소비생활은 재화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과정이다. 그러나 재화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재화와 욕구는 긴장관계에 있다. 재화를 얻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거나, 혹은 다른 사람을 시켜서 대신 생산하도록 해야 한다. 재화를 낭비하는 것은 부도덕한 일이며 재화를 취득하는 일로 일생을 헛되이 낭비하는 것도 옳지 않다. 그러므로 검약(儉約)의 정신은 언제 어디서나 필요하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소비가 미덕’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만 ‘기업을 위해서 소비자가 희생하라는 주장’으로 매우 이기적이고 인간을 타락시키는 주장이다.

경제행위의 올바른 목표는 물질적 욕망의 충족이 아니다. 인간의 경제행위는 가치 있는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불건전한 욕망은 ‘검약과 절제’라는 기준에 의해서 조절되어야 한다. 사람은 ‘재화가 허망한 것이고, 그것들이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는 데서 비로소 그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 가격화하는데, 이러한 과정이 헛것임을 알아차릴 때 인간은 금전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3) 과소비

과소비는 물자와 자원을 낭비할 뿐만 아니라, 그에 따른 사치와 낭비 풍조는 퇴폐와 향락으로 이어져서 도덕적 타락을 가져오게 된다. 디가 니까야에서는 재산을 잃게 되는 낭비를 다음과 같이 경계하였다.

장자의 아들이여, 방일(放逸)의 근본이 되는 곡주(穀酒)나 과일주 등에 취하는 것은 재물의 파멸문입니다. 때가 아닌 때에 거리를 배회하는 것도 재물의 파멸문입니다. 흥행거리를 찾아다니는 것도 재물의 파멸문입니다. 방일의 근본이 되는 노름에 미치는 것도 재물의 파멸문입니다. 악한 친구를 사귀는 것도 재물의 파멸문입니다. 나태에 빠지는 것도 재물의 파멸문입니다.

자본주의는 사람들에게 소비가 행복이라는 환상을 심어주어 물질에 탐착하도록 만들지만, 그러나 물질이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끊임없는 경쟁과 투쟁의 대열에 내몰리게 되고, 동시에 불만에 쌓여 살면서, 지나친 경쟁심으로 인해서 자신과 남의 인생을 망치게 되는 것이 바로 인생사의 고(苦)의 원인이 된다. 물질이 풍부해지고 소유가 많아지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오늘날의 가치구조가 바로 우리 사회를 불행하게 만드는 중요한 원인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시장 자본주의는 바로 물질적 소유가 행복의 척도인 것처럼 선전함으로써 소비시장을 유지하고 있고, 그 결과로 사람들은 스스로 한없이 불행하다고 여기면서 물질에 탐착하게 된다.

3. 자본주의의 문제점

1) 대중빈곤과 실업

자본주의(資本主義, capitalism)의 특징은 ①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②시장에 의한 생산분배 ③이윤의 획득이 목적 ④화폐 이용 ⑤상품경제를 전제로 함 ⑥소비를 초과하는 생산과 재투자 ⑦자기조절적 시장의 힘이다. 그러나 금본위제의 포기와 금융에 의한 시장지배로 인하여 세계 경제는 몇 차례의 경제위기를 겪었다. 그리고 이러한 원리에 의한 자본주의는 이제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으며, 수많은 인간에게 고통을 주고, 환경파괴로 인한 인간종의 공멸 위기를 초래하였다. 자본주의가 심화되어 갈수록 불평등은 심해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이 대기업으로 집중되고 자영업자와 중소기업이 몰락하여 대중빈곤의 사회가 초래되고, 빈익빈 부익부의 사회가 초래된다.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노동자나 실업자 혹은 빈한한 자영업자로 전락하는 상황에서, 대중은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게 되고 결국 이들은 최저생존, 절대생존을 위해서라도 우선적으로 돈의 지배를 받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실업과 빈곤은 어느 나라에서나 가장 큰 문제이다. 자본주의가 발달하여 실업과 빈곤이 사라지기를 기대했지만, 자본주의가 상당히 발달한 지금에도 여전히 실업과 빈곤의 문제는 가장 큰 문제가 되고 있다. 한편에서 실업과 빈곤이 만연하고 있는 동시에, 많은 물건은 매장에서 팔리지 않고 버려지는 불경기가 계속된다. 그리고 기업은 계속 도산하고, 소수의 대기업만이 살아남는다. 그 과정에서 인간이 받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물론 한 사회가 이렇게 되지 않으려면 노동자의 단결력이 강해서 기업으로부터 상당한 임금을 보장받거나 혹은 복지사회가 이룩되어 절대빈곤층이 사라지게 되면 가능하지만, 대부분의 사회는 그렇지 못하다.

2) 노동소외와 고향 상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는 인간이 노동을 강요당한다. 도시생활의 높은 생계비를 감당하기 위해서 노동자는 노동을 해야 하고, 소비시장에서 유혹하는 소비재들을 누리기 위해서는 자신의 노동을 노동시장에 팔아야 하며, 그 결과로 노동자는 만성적 채무자로 살아야 한다. 이러한 체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급자족적 소농(小農)으로 살아야 하지만 그렇게 살기에는 자본의 유혹과 주변의 강요가 심하다.

자본주의가 발달하면 인구가 도시로 이동하고 그에 따라 종전의 가족구조와 지역공동체가 파괴된다. 도시사회란 기본적으로 개인의 개별성과 익명성이 보장되어 이웃과의 유대가 어렵고, 직장에서도 공동체적 유대는 생길 수 없다. 직장 자체도 언제라도 해고될 수 있다. 따라서 공동체의 파괴는 도시화를 근간으로 하는 시장 자본주의의 필연적 결과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서 인간은 가족과 고향이라는 소중한 것을 잃게 되고, 가족과 이웃 없이, 친구 없이 정신적으로 고독하게 방황하게 되며, 인생의 어려움에 직면해서도 혼자서 감당해야 한다. 또 이러한 상황에서는 사회를 개선시킬 수 있는 공동체적 노력도 불가능하게 된다.

3) 소비욕구와 물질만능

사람들이 제품을 구매하는 필요성은 대개 기업이, 혹은 시장이 만들어 낸 것이다. 기업은 사람들로 하여금 사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하여 구매하도록 한다. 그러나 그러한 소비재들이 인간을 행복하게 해 주지 않는 것임은 물론이다. 물질 중에는 인간 생활에 큰 혜택을 주는 물질도 있고,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간 생활이 더욱 편리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현재 생산 판매되는 제품들의 경우 인간생활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거나 생존에 실질적인 필요성을 주는 것은 많지 않다. 또 인간 생활에 꼭 필요한 재화들은 경우에 따라서 공공재로서 공급될 수도 있다.

시장은 생산된 제품을 경쟁적으로 많이 팔기 위해서 인간의 구매 욕구를 자극한다. 그리고 이렇게 자극받은 인간은 많은 돈을 필요로 하게 되고, 결국 많은 돈을 추구하며, 돈에 따라 울고 웃는 존재가 되고, 스스로를 매우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며, 돈을 다른 어떤 것보다도 가치의 우위에 두게 된다. 즉 사람들은 돈의 노예가 되고, 물신주의에 사로잡히게 되는데, 이러한 가치관은 인간파괴를 초래하고 더 나아가서 공동체 파괴를 초래한다. 그리하여 국민들의 가치관은 돈에 의해서 결정되며, 함께 사는 사회가 돈을 위해 죽고 사는 비참한 사회가 되어 버린다. 그리고 결국 이런 경제 시스템은 자연까지도 파괴시킨다. 보드리야르(Baudrillard)는 현대사회에서는 소비가 인간부족(人間部族)의 새로운 신화가 되었고, 현대세계의 도덕이 되었다고 비판한다. 물론 이것은 자본과 그에 봉사하는 매스컴, 지식체계, 문화체계 등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4) 환경파괴와 기후변화

자본에 의한 생산과정은 대부분 자연파괴적이다. 그러나 자본은 이러한 파괴의 대가를 사회에 지불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파괴와 소모의 양은 매우 크다. 화석연료를 고갈시켜 미래 에너지 사용을 불가능하게 한다든가, 원자력 발전으로 발전소 주위를 방사성 물질로 오염시키고, 방사성 폐기물을 처리하기 어려워서 방치하는 일도 심각한 자연파괴를 불러온다. 오늘날 지구 온난화 문제로 전체 인류가 심각한 위기상황에 처해 있는데, 이러한 결과도 결국 자본이 생산과 소비과정에서 이산화탄소를 과다하게 배출하여 자연을 파괴하여 온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와 연관하여 생태체계의 회복을 위해 필요한 도덕적 자산은 결여되어 있으며, 어떤 형태로든 외부의 충격이 추가되면 사회체제는 파괴된다. 여기서 외부의 충격이란 곧 석유시대의 종말 혹은 원자력이나 기후로 인한 재앙 등이다. 사람들은 오늘날의 기술 진보가 자본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 기술진보와 편리성에 대한 오류, 그리고 감각적 선호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해악성을 이해하는 데에 큰 장애가 된다. 현대인은 과학기술의 진보를 대부분 자본의 덕으로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본은 이러한 생각을 사람들의 뇌리에 꾸준히 심어놓는다.

4. 자본의 문제를 넘어서
-돈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한 전략


1) 올바른 가치관의 정립

이스털린의 역설(Easterlin Paradox)이란 경제성장과 행복수준이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는 이론이다. 이스털린은 국민총생산이 높아진다고 해서 반드시 국민이 행복해진다고 볼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소득이 일정 수준에 미치지 못할 때는 소득이 그 사람의 행복에 영향을 미치지만, 일정 수준을 넘어가면 소득에 따라서 그 사람의 행복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불교는 안분지족과 소욕지족을 가르치고, 물질적 소유가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그러한 입장에서 보면 오늘날의 소비사회, 시장경제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광고와 소비문화는 인간을 타락시키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광고는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과장과 거짓말투성이이다. 그것은 우리 사회에서 언어와 관계의 불신을 초래하기 때문에 불교의 오계와도 정면으로 배치된다. 존 갤브레이스는 일찍이 1958년에 그의 저서 《풍요한 사회》에서 자유주의자들이 생산 확대를 기본으로 하여 사회의 발달 정도를 평가하는 방식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렇다면 행복하고 풍요로운 사회란 대체 어떤 사회일까. 그것은 생산의 효율 지상주의로부터 탈피한 사회이며, 민간의 영리적인 경제와 공공의 비영리적인 경제, 그리고 복지라는 세 가지 기둥이 사회적 균형을 이루고 있는 사회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가 초래하는 많은 부정적인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소비 절제가 필요하다. 이러한 의도에서 캐나다의 테드 데이브(Ted Dave)는 소비극복운동을 벌였는데, 1992년 11월 26일부터 아무것도 사지 않는 날(BND: buy nothing day)이라는 운동을 벌였다. 또 TV를 켜지 않는 주간이란 운동도 있다. 기업의 소비는 주로 TV 광고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2) 간소한 삶

4성제의 하나인 집성제(集聖諦)에서는 고(苦)의 원인이 탐욕이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탐욕은 세 가지 근본 번뇌인 탐진치 중의 하나이다. 여기서 말하는 탐욕이란 물질적 탐욕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물질적 탐욕도 그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이상적인 목표인 열반[滅聖諦]을 이루기 위해서는 탐욕을 끊는 일이 우선 필수적이다. 소욕(少欲)으로 만족할 줄 알 때 인간관계에서는 긴장과 갈등이 제거되고, 상호 우호적으로 바뀌어갈 수 있다. 특히 출가수행자의 생활은 지극히 간소하여서 하루 한 번 정해진 시간의 탁발을 통해서 음식을 얻고, 다 떨어진 천 조각을 여러 번 기워서 옷을 해 입고, 주거에 대한 애착을 줄이기 위해선 나무 밑에서 잠을 자야 할 정도로 검약을 강조한다.

불교의 가치관을 실천하는 사람은 스스로가 자원의 낭비를 줄이고 꼭 필요한 물건만을 사용함으로써 물질에 대한 의존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느끼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모범을 보이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이는 상가(Sangha) 생활의 초기부터 매우 강조되었던 규범이다. 소욕과 지족을 이념으로 하는 두타행은 의식주 전반에 걸쳐서 검약과 청빈을 강조한다.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에 의하면, 가섭이 두타행을 실천하는 이유는 첫째, 안락한 수행과 법을 얻었다는 것을 널리 드러내 보이는 것이며, 동시에 후세의 중생들을 위하여 연민하는 마음을 내는 것으로 자신의 삶을 본보기로 삼아서 수행하고 실천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행자에게 두타행을 권장한 본래 목적은 소욕과 지족을 바탕으로 물질에 대한 의존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데 있는 것이다. 이러한 두타행은 비단 출가 수행자에게뿐만 아니라, 오늘날 물질과 재화로 인한 자본주의의 피해를 극복하기 위해서 재가생활을 하는 불자들에게도 요구된다. 물론 재가자들이 불전의 가르침대로 생활하기는 어렵겠지만, 두타행의 정신이 현실 생활에서 실천되어야만 물질에 종속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다. 불자의 생활 목적은 지혜를 증득하고 그것을 법답게 실천하는 데 있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는 먼저 물질생활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며, 물질에 대한 의존을 최대한으로 줄여야 한다.

현대인이 이러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것은 개인적인 실천보다는 공동체적인 운동으로써 가능하다. 개인적인 노력만으로 사회 전체를 변혁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불교적 수행을 필요로 한다. 불교적 집단수행이 아니라면 물질과 소유의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심성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제적인 측면에서 그것은 무엇보다도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기 때문에 소비절약을 필요로 한다.

5. 맺음말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불교는 자본주의 이념을 일정 부분 수용하지만, 이기적 탐욕과 이윤의 무한추구는 적극적으로 경계한다. 불교는 의식주에 필요한 재화의 생산을 위해서 근면을 강조하였고, 이러한 재화의 낭비를 극도로 경계하였다. 동시에 재화는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사용되는 복전과 적극적 복지의 의미로 생각되었다. 오늘날 대량소비사회에서 인간이 받는 결핍감과 욕구불만은 주로 도시생활과 자본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적극적인 검약과 절제에 의해서 이러한 소비의 허상은 극복되어야 한다.

자본주의는 물질의 생산력을 높여서 인간생활을 편리하게 해 준 점도 있지만, 그 결과로 농업과 가족공동체, 지역공동체를 파괴시키고, 부익부 빈익빈의 대중빈곤을 초래하고, 인간을 생산과 소비의 수단으로 삼고, 소비욕구와 결핍의식을 통하여 물신주의를 초래하였다. 그 결과 인간이 경제적으로 고통받게 되었고, 재화의 추구가 인생의 목적이 되는 불행한 사태를 맞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본주의적 가치관을 극복하여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서 올바른 가치관에 따라 움직이는 사회를 건설하는 일이 시급하다. 한편, 대중빈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영업자와 소기업의 보호, 농업의 육성을 통한 실업문제의 해결, 자립경제를 통한 세계지배 저지 등과 같은 국가 정책을 필요로 하는바, 이를 개선하기 위한 집단적이고 조직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이상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자발적 검약과 자립적 경제’가 될 것이다. ■

 

김광수 / 한양여자대학교 교수.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동 대학원 졸업(치의학 박사). 동국대 불교대학 대학원 졸업(철학박사). 주요 논문으로 〈시장경제에 대한 불교경제학적 연구〉 〈불교의 가치관을 통해본 심층생태론 비판〉 〈소비사회에 대한 불교의 역할〉 등이 있다. 동국대학교 평생교육원 불교사회경제사상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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