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의 눈으로 자본주의를 말한다

우리 사회에 자본주의가 넘쳐나고 있다. 그것은 단지 시장, 공장, 회사 등 경제적 삶의 공간만이 아니라, 국가와 대학 등 공공성의 영역을 집어삼키고 가족, 심지어 우리 모두의 내면세계에까지 침투해 들어오고 있다. 자본주의는 이미 ‘전구적(全球的, global)’ 현상이 되었고 또 인류가 오래전부터 교환 없이 살 수 없게 되었지만, 현재 한반도의 남반부에서 작동하는 자본 축적의 논리는 가히 미증유의 괴력을 뽐낸다. ‘세월호 참사’는 단지 그 극적 표출의 하나일 뿐,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이 자본의 강력한 자장권(磁場圈) 안으로 빨려 들어가며 종교조차도 ‘힐링영성산업(healing 靈性産業)’의 한 부류로 전락한다.

사정이 이렇게 된 데는 자본주의 일반의 작동방식 이외에도 우리 사회에 특유한 몇 가지 요인이 작용하였다. 먼저 지적할 것은 ‘압축적 근대화’이다. 우리는 이를테면 도시화율, 농업 부문의 비중 축소, 사망률 및 출산율의 감소, 수도 및 통신기기 보급률, 문맹의 감소와 고등교육 취학률, 노령화, 가족구조의 변화 등 사회변동의 주요 지표에서 서구라면 두 세기가 넘는 기간에 일어났을 법한 변모를 단 반세기 만에 해치웠다. 놀라운 순발력이지만 그만큼 대가는 컸다. ‘비동시적인 것들의 동시성’이 바로 그것인데, 세계 첨단기업임을 자처하는 삼성이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는 가히 중세적 면모를 자랑한다.

다음으로 지적할 것은 농업을 거의 완벽하게 희생시킨 기반 위에서 진행된 왜곡된 산업화 정책이다. 농업은 단순히 산업의 한 부문이 아니라 위대한 고전문명의 토대로서 역사이며 전통이고 정서이다. 농업은 먹을거리의 생산에서 비롯하여 문화 및 경관으로 이어지는 인간적 자연의 총체이다. 농업의 죽음은 우리 음식의 생태를 저버리는 데 그치지 않고 자본주의로부터 우리가 탈출할 수 있는 주요한 통로의 하나를 폐색시키는 것이다. 농업은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적 상상력의 주요한 원천의 하나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지적할 것은 ‘신자유주의’이다. 신자유주의는 대처 및 레이건의 집권 이래 세계적 추세가 되었지만, 복지국가의 경험이 전무한 우리에게 미친 영향은 실로 파국적이다. 복지는 이미 ‘보편복지’를 전제하거늘 ‘선택적 복지’라는 형용모순의 용어가 신문지상을 장식하며, ‘능력에 따른 과세’는 근대국가의 기본원칙이거늘 ‘세금폭탄’이란 선정적인 용어가 재벌의 사실상의 면세특권을 호도한다. 모두가 노동자이거늘 노동의식의 실종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재벌회사의 ‘취직 턱’을 호텔 음식점에서 취업자의 부모가 내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한다. 국가란 말 그대로 우리 모두에게 공통된 ‘공공성’ 그 자체요 정부란 그것을 보듬어야 하는 책무를 지님에도, 어떤 대통령은 노골적으로 정부를 기업처럼 여겼고 또 다른 대통령은 무슨 사조직 운영하듯 꾸린다. 정권이 이러하니 재벌이 공화국 ‘주인’ 행세를 하고 판·검사를 비롯한 온 나라의 변호사들, 정부 관료들, 언론, 심지어 대학조차 앞다투어 그 ‘머슴’이 되고자 한다. 많은 이들의 희생 위에서 민주화가 진행되었다고 하지만, ‘민’의 존재성과 ‘민주’의 이상은 허공 속으로 증발해버리고 ‘민주주의가 밥 먹여 주느냐?’는 자조가 진보의 숨통을 옥죈다.

이런 ‘자본 독재’의 광풍 속에서 참으로 우리를 숨 막히게 하는 것은 사람들이 자본주의에 익숙해져 그것을 마치 공기처럼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긴다는 점이다. 그것이 특정의 역사적 형성물임에도 사람들은 시장에서 경쟁하는 경제적 주체로서 ‘개인’을 인간의 본질로 간주한다. 삶의 모든 측면이 자본 축적의 논리에 포섭되어 있기에, 인류에게 물질문명의 차원에서 자급자족의 삶을 영위했던 오랜 과거가 있었음이 쉽게 망각된다. 게다가 자본주의를 인간 본성에 걸맞은 경제체제로 보기에 그것이 없는 세계를, 그것을 넘어서는 세계를 상상하지 못한다. 대안적 전망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대안적 상상력의 부재 내지 결핍은 우리의 사회과학이, 특히 주류 경제학이 그야말로 비역사적, 반역사적, 몰역사적 접근방식을 가졌기에 더욱 문제 제기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이 글은 자본주의를 문명사적 관점에서 고찰하여, 역사화시키고 상대화시키려고 한다.

이는 자본주의의 대두가 갖는 역사적 의의를 축소시키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제대로 자리매김하여 최소한 그것을 길들일 수 있는 방안이 없는지 추구하기 위함이다. 참으로 인류는 자본주의와 함께 민주주의를 빚어내 ‘자본에 대한 민주적 통제’의 길을 준비하였다.

문명사의 차원에서 인류의 역사는 크게 네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인류의 탄생, 신석기혁명, 도시혁명, 산업혁명. 500만 년에 달하는 인류사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구석기 시대에 인류는 기껏 20명 정도의 무리를 이루어 떠돌며 생활했고, 이 시기에 우리 조상들은 모두 자기결정권의 주체였으며 다른 무리와의 접촉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거의 완벽한 자급자족의 세계에 살았다. 이 소규모의 ‘무리 사회’에 지배-예속의 관계가 뿌리내릴 리 없었으니, 만약 그랬다면 인류는 결코 오늘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인류가 다른 포유류 동물들과는 달리 문명을 이룩하게 된 것은 줄잡아 최소한 수십억 명에 달하는 우리 조상들이 경쟁이 아니라 협동을 통해 집단지성을 보듬었기 때문이다. ‘무리 사회’의 삶은 이후의 문명화된 농업사회나 산업사회의 그것에 결코 못하지 않았으니, 한 연구자는 이 사회를 ‘원시 풍요사회’라고 명명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약 1만여 년 전부터 인종과 관계없이 신·구대륙에서 적어도 아홉 곳에서 독자적으로 정착농업사회로 이행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채집사회 특유의 낮은 수준의 필요노동과 정착생활의 이점을 결합한 약탈농업사회가 등장했다. 이전에는 1년 동안 먹을 야생 곡물을 3주면 수확할 수 있었지만, 빙하의 후퇴에 따른 기후의 변화로 자연의 부족분을 보충하는 모종의 방법을 찾아야 했고, 그 결과 생계방식, 곧 노동과 생활방식에서 질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야생식물의 작물화와 야생동물의 가축화, 촌락 정착지 및 화전농법의 등장, 농작물 돌보기, 곡물 저장과 아이 양육, 자연에 대한 의식의 변화를 반영하는 지모신 숭배와 같은 새로운 세계관의 등장 등이 신석기 도구들의 출현과 함께 나타났고, 따라서 우리는 이를 ‘신석기혁명’이라고 부른다.

신석기혁명으로 당장에 계급이나 국가가 출현한 것은 아니었다. 최초의 정착지에서 무기가 많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전쟁이 빈발했음을 확인할 수 있으나, 이는 그만큼 정착민 사이에, 또는 정착민과 수렵채취인들 사이에 접촉이 빈번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와 더불어 다양한 종류의 교환이 이루어졌음을 반증한다. 이 약탈적 농업사회는 기본적으로 씨족사회의 특징을 보였다. 계급사회보다는 수렵-채취 사회에 더 가까웠으니, ‘모두가 굶어 죽기 전까지는 아무도 굶어 죽지 않았다.’ 인구가 증가하고 대가족이 등장하면서 느슨한 무리생활은 체계적인 혈족, 엄격한 사회 행동규범, 정교한 종교의식, 신화가 통제하는 촌락생활로 바뀌었다. 사회적 지위가 분화하여 족장제가 출현하고 연장자들로 이루어진 씨족회의가 등장했지만, 사유재산제는 아직 발달하지 못했다. 바꿔 말하면 잉여를 둘러싼 다툼이 시작되고 권위체제가 들어서기는 했지만 예속노동은 여전히 낯설었고, 촌락은 일부에게 국한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인류의 자기결정권의 거소(居所)였다.

드디어 인류는 약 5천여 년 전부터 역시 인종과 관계없이 신·구대륙의 여러 곳에서 ‘도시혁명’을 통해 ‘문명’을 이룩했다. 이제껏 우리의 경탄을 자아내는 온갖 거대한 건조물들은 모두 이 ‘위대한 농업문명’의 성취의 결과이다. 청동기, 관개시설, 쟁기, 비료, 성별 분업, 가부장제, 분업체계, 도시, 넓은 의미의 계급, 문자, 달력, 국가 등이 거의 동시에 생겨났다. 생계방식의 변화가 이러한 질적 도약을 추동했다. 정착생활에 들어선 집단이 계속 증가하는 인구를 부양하려면 다른 농경민을 습격하여 식량을 얻어내든지, 아니면 농업의 집약성과 생산성을 높여야 했다. 사실 이 두 가지 일이 동시에 발생했는데, 인류는 마침내 사회의 잉여를 흡수하고 그 재생산의 수단을 통제하는 법을 터득했다. 창고는 최초의 신전이었고, 창고관리자는 최초의 사제였다. 이렇듯 최초의 국가는 신정체제로부터 출발했고 신과 종교를 통해 정당화했다.

그러나 문명은 엄청난 희생을 대가로 한 성취였다. 자유노동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정(正)이 아니라 반(反)이었다. 문명을 이룩한 어느 곳에서나 극소수의 지배층과 절대다수의 피지배층이 나타났다. 어느 문명이나 농업문명으로서 농업생산력의 한계가 있었기에 지배층이 누릴 수 있는 잉여는 제한적이었다. 따라서 지배층은 어김없이 전 인구의 1%를 넘을 수 없었고, 그러면서도 대체적으로 농업생산의 절반을 가져갔다. 적어도 수십만 명, 많으면 수백만 명에 달했던 초기 문명에서 국가의 등장은 지배층에게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엄청난 잉여를 가져다주었고, 이는 대규모 건조물 및 관개사업은 물론 지배층의 초월성을 보증해주는 물적 기반이었다. 더욱이 지배층은 농업생산의 특성상 언제나 생산과정의 ‘외부’에 위치했고, 따라서 농업생산의 담당자들은 예외 없이 ‘경제외적 강제’의 대상, 곧 예속적 신분으로 전락했다. 극소수의 잉여와 여유는 절대다수의 종속과 수취에 입각한 것이었고, 따라서 어느 문명이나 잉여생산물의 수취와 사회적 재생산의 유지 사이에서 평형점을 찾아내야 하는 절체절명의 과제에 직면했다. 초기 문명들은 대부분 이 평형점을 찾는 데 실패했다. 일정한 시기가 지난 뒤 ‘암흑기’가 찾아왔다. 이는 지배자들의 무자비한 착취의 결과이며, 지배층 내부의 충돌과 이들과 피지배층 사이의 온갖 계급투쟁 속에서 적대계급들의 공멸이 빚어졌다. 국가구조에 짓눌린 문명의 중심지가 스스로 무너져 내린 것이었다.

인류는 철기문명의 단계에 돌입하면서 착취와 예속노동에 입각한 공존의 방법을 찾아냈다. 철기문명과 함께 원거리 교역망, 알파벳, 물레방아, 순수 수학 등이 등장했음은 그것이 고전문명 등장의 물질적 토대임을 말해준다. 한 철학자가 ‘축(軸)의 시대’라고 부른 기원전 900~200년의 일이며, 바로 이 시기에 조로아스터, 엘리야와 이사야, 공자, 묵가, 장자, 노자,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석가 등을 통해 고등종교가 탄생하고 인간의 자기성찰이 체계적인 단계에 돌입했다. 이제 고등종교는 농업문명 속에서 모두에게 저승에서의 약속을 통해 이승에서의 갈등을 완화시키면서, 전통국가가 도저히 수행할 수 없는 구휼, 교육, 결혼 등의 사회적 재생산 장치들을 보듬었다.

이 시기에 인간의 자기성찰은 경신성(敬神性)과 사유의 혁명이라는 두 차원을 지녔고, 이는 각종 지배자들로 하여금 ‘치자(治者)의 학(學)’을 통해 ‘위민(爲民)정치’를 내세우도록 이끌었다. 사실 ‘위민’의 구호는 언제나 공염불(空念佛)로 그치긴 했지만, 군주제가 전통시대에 가장 폭넓은 지지를 받았음은 고전문명의 현실적 타협책이 그만큼 현실적 근거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잊어서 안 될 것은 온갖 수준의 예속농민이 가장 일반적 형태의 생산자였음에도 위대한 농업문명의 주변부에는 언제나 ‘생산자들의 자유로운 연합’이 잔존했었다는 사실이다. 왕조권력이 미치지 않는 태백산맥 오지의 화전민이 그러했으며, 유럽에서는 알프스 산지나 아이슬란드의 주민들이 그러했다. 공통의 권력이 부재한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자신의 본원적 존재성을 언제나 그렇게 드러내게 마련이었다. 간접지배 방식에 입각한 전통적인 ‘농업제국’의 변두리에서 ‘야만인들’은 온갖 차원의 자기결정권을 행사했을 것이지만, 문명 너머에서 아무런 기록을 남기지 못한 채 섬광처럼 흔적 없이 명멸했다. 참으로 생산자들의 자유는 문명의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었던가!

그런데 이 보편적 예속의 어둠 속에서 예외적으로 민주주의의 족적을 역사에 기록한 이들이 있었다. 바로 고대 그리스인들, 그 가운데 특히 아테네인들이었다. 이들 역시 오리엔트 문명의 주변부에 위치했으며, 문명 중심의 제국인 페르시아의 침입을 물리치지 못했더라면 민주주의의 실험은 중단됐을 것이다. 사실 역사학은 어떻게 하여 고대 그리스의 많은 폴리스에서 경제외적 강제로부터 해방된 자영농들로 이루어진 자유로운 시민단이 창출될 수 있었나에 초점을 맞추어 이를 해명하려고 하지만, 이런 존재가 문명의 주변부에서 언제나 꽤 강력한 생명력을 유지했음을 고려한다면 오히려 그런 주변부의 하나가 어떻게 하여 인류의 문명사의 한 중심을 이룰 수 있었는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특히 고대 아테네는 사료가 남겨진 문명 최초의 민주주의 사회였다. 제국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주변, 그리스 세계의 지리적 분산, 페니키아로부터의 알파벳 도입, 귀족층의 분열, 강력한 농민 자가 무장의 전통, 자기결정권과 권력 분담의 문화, 번영의 원천인 노예노동에 입각한 은광, 시민단을 결속시킨 외세의 위협, 다른 폴리스들과의 문화교류를 통한 개방성, 그리고 물론 이집트를 비롯한 오리엔트 문명의 영향 등의 어찌 보면 우연적이랄 수 있는 마주침 속에서 참으로 예외적인 정치적 실험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아테네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기에 몇 가지 요점만 지적하자. 먼저 그것은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만들어냈으며, ‘인민의 지배’라는 민주주의의 ‘이상’을 본보기로 제시했다. 비록 일급의 이론가 가운데 스피노자와 루소 이전에 어느 누구도 민주주의를 좋은 체제로 보지 않았지만, 아테네 민주주의의 기록과 기억은 후대에 마치 재 속 불씨처럼 살아남았다. 흔히 노예제가 민주주의의 물적 토대라고 운위되지만, 노예들의 집단노동에 입각한 은광으로 인해 농민들이 아무런 경제적 부담을 짊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맞지만 시민들이 노예들에게 모든 생산 활동을 맡겼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잘못이다. 오히려 고대 아테네가 정치적 조치를 통해 ‘채무노예’를 복권시키고 대규모 노예농장제를 키우지 않았음은 사실상 경제적 양극화가 폴리스의 기반을 무너뜨린다고 여겼음을 시사한다.

그러니까 고대 민주주의와 오늘날의 민주주의와의 중요한 차이는 민주주의의 직접성 여부와 함께, 아니 그것보다도 정치적 결정을 통한 사회경제적 문제의 완화 내지 해소, 곧 민주주의의 실체성에 있는 것이다. 아테네 민주주의가 이룩되는 과정(전 6세기)에서나 그 이후(전 5~4세기)에 그렇게도 시끄럽고 왕성한 계급투쟁의 면모를 보였던 이유이다. 신분적 질서가 사실상 사라진 자유로운 시민단에서 계급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사안이 무엇이 있었겠는가? 따라서 요즈음의 말로 정치, 국가, 민주주의는 모두 ‘politeia’로서 동의어였다. 폴리스 구성원 모두의 공통의 것, 이것이 바로 고대 민주주의 시대의 정치이자 국가였던 것이다.

농업문명에 입각한 전통사회에서 경제적 잉여의 가장 큰 몫은 언제나 토지로부터 왔다. 농업이나 목축 등 토지를 이용한 생산 활동을 통해 생겨난 ‘공(貢, tribute)’가 그것이다. 이런 경제행위를 우리는 흔히 ‘일차산업’이라고 부르는데, 이에 종사하는 이들은 최근까지도 거의 모든 사회에서 전 인구의 80~90%에 이르는 절대다수를 차지했다. 전통적인 농업사회에서 생산능력은 통상 인구 부양능력의 120%를 넘지 못하는데, 바로 그렇기에 농민들은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고수하려고 했고 전통국가 역시 인구가 밀집한 도시에 식량을 원활하게 공급하는 문제가 효율적인 통치의 가장 중요한 관건이었다. 흉작이 들면 잉여가 격감하면서 농촌 인구의 상당수가 즉각 기근의 위협에 직면하게 되고, 또 사치품이나 수공업 제품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어 도시의 하층민도 타격을 입는다. 이런 생산체제를 흔히 ‘경제적 구체제’라고 부르는데, 여기에는 언제나 ‘도덕경제’의 기본원리가 작동하였다.

또한 농민의 신분은 다양하여 그들은 노예, 농노, 노비, 기타 다양한 형태의 종속민을 이루었다. 흔히 전통국가를 아시아적 농업제국, 노예제에 입각한 고전고대국가, 봉건국가, 절대주의 국가 등으로 분류하는데, 이는 농민의 존재방식과 농업적 생산양식의 차이를 반영할 뿐 역사적 발전의 일련의 계기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오히려 ‘정치적 축적’의 관점에서 봉건국가는 전통적인 농업제국에 비해 후퇴했다고 볼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전통사회에서 농민들은 개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외적 강제’에 종속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규모와 차원의 공동체의 구성원이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들은 내부적으로 상당한 결속력을 가졌고 그런 경우에는 지배층에 맞서 잉여를 두고 눈에 보이지 않는 싸움을 끈질기게 벌일 수 있었지만, 이는 그만큼 농민의 인신적 해방의 계기가 복합적이고 중층적임을 말해준다.

농민은 거의 언제나 공동체를 통해 토지에 묶여 있었고, 지배층과 공동체와의 타협 속에서 자신이 경작하는 토지에 대한 일정한 보유권을 보장받았다. 공동체를 통한 토지에의 긴박(緊縛)은 농민에게 일정한 생존조건을 보증하는 동시에 해방의 계기가 그만큼 작동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이 점에서 봉건제의 역사적 경험은 특수하다. 대부분의 전통국가가 간접적인 지배방식을 보였다면, 봉건국가는 권력의 집중이 이루어지지 못해 정치계급이 통치력을 공유·분유하는 가운데 영주가 직접 생산현장인 장원에 관여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여 내포적(內包的) 성장의 발판을 이루었다. 그러니까 정치적 축적의 실패로 나타난 서구의 봉건국가는 오히려 지배층이 사회적 재생산의 핵심적인 장치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 줌으로써 후일의 역사적 발전의 질적 도약을 위한 가능성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전통사회에서 인신적 해방의 일정한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은 역시 도시였다. 전통도시는 지배층의 근거지이자 농업적 잉여의 집합소로서 농촌에 기생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부등가교환’이라는 다른 형태의 경제적 잉여의 산실이었다. 사실 ‘등가교환(等價交換)’은 하나의 이상이며, 시장관계가 완벽하게 구현된 곳에서만 나타날 수 있다. 시장이 발달하지 못하고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시간적, 공간적 거리가 먼 전통사회에서 교환은 비록 농업에서의 잉여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큰 이윤을 가져다주었고, 넓은 의미의 ‘상인’이라는 새로운 집단을 탄생시켰다. 그런데 전통도시는 비록 성격상 사회적 유동성의 발원지였고 따라서 전통국가로 보자면 위험한 존재였지만, 전통문명의 한계를 넘어설 수는 없었다. (부등가) 교환은 독점이나 특권이 보장될 때에 더 큰 이윤을 낼 수 있기에 상인들은 스스로 국가를 일으켜 일련의 도시국가나 도시연맹체를 이루거나 일반적으로 기존 국가권력에 기생하였으며, 따라서 전통국가 및 전통사회의 특권적인 일부를 이루기 마련이었다. 전통국가는 예외 없이 결국 도시를 길들이는 데 성공했고, 도시의 거주민들은 전통사회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이루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이렇듯 전통적인 농업문명은 예속노동이 생산한 제한된 잉여로 고등종교가 고양시킨 인간의 자기정체성을 신성한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렸지만, 그 한계의 포락선을 결코 넘어설 수 없었다. 그 가운데 예컨대 상업이나 상인층을 권력의 일부로 끌어들인 중국의 송(宋)이나 이슬람의 아바스 왕조는 그 포락선의 극한에 이르렀지만 결국 그것을 넘지 못했다. 경제적 잉여의 가장 큰 몫을 이루는 농업에서 질적인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그 한계는 결코 돌파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근대 초의 유럽이 이 한계를 돌파하여 ‘근대성’을 빚어내고 ‘근대세계’를 이룩했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19세기 마지막 3분기에 지구적 차원에서 패권을 이룩할 수 있었다. 이미 1840년대에 영국이 자신보다 수십 배나 덩치가 큰 중국이라는 거인을, 그것도 상대방의 대문 앞에서 한 방에 날렸으니, 이는 참으로 인류사의 대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기에 이를 ‘유럽의 기적’이라고 하고, 더 일반적으로 ‘서구의 대두’라고 한다.

어떻게 지중해 문명의 가장 늦둥이인 유럽이 이슬람 문명이나 중국을 제치고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새 경지를 개척하여 이제껏 세계문명을 주도할 수 있었는가? 사실 ‘서구의 대두’는 지난 1천 년기 최대의 사건으로서, 19세기 전반기에 유럽에서 탄생하는 사회과학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학문적 정체성을 획득하였다. 이에 대한 가장 유력한 설명 방식으로 세 가지를 꼽을 수 있는데, 오늘날까지도 ‘유럽의 승리’를 설명하는 각종 이론들의 원형을 이룬다.

가장 유력한 설명 방식은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가 《자본론》(3권, 1867~1894), 특히 그 제1권의 ‘본원적 축적(primitive ac-cumulation)’에 관한 부분에서 제시했다. 그는 서구 대두의 핵심적인 요인으로서 자본주의를 지목했다. 즉 유럽은 자본주의를 빚어내어 어떤 문명도 도달하지 못한 높은 생산력을 이룩해내는 데 성공했음에 유럽 승리의 비결이 있다고 보았다. 그는 자본주의를 특정의 역사적 형성물로 파악하고 그것이 16세기 잉글랜드의 농촌에서 탄생했다고 특정하였다. “자본관계를 만들어내는 과정은 노동자를 자기 노동조건의 소유로부터 분리시키는 과정[즉 한편으로는 사회적 생활수단과 생산수단을 자본으로 전화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직접적 생산자를 임노동자로 전화시키는 과정]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이른바 본원적 축적이란 바로 생산자와 생산수단과의 역사적 분리 과정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구조는 봉건사회의 경제적 구조에서 생겨났다. 후자의 해체가 전자의 요소들을 해방시켰던 것이다.”

그 결과 16세기 잉글랜드의 농촌에 ‘농업의 3분구조’가 나타났다: 지주-차지농(농업경영자층)-농업노동자. 그리고 이것에 선행하여 이미 잉글랜드에서는 중세 말 이전에 농민들은 인신 해방을 이루었고, 이것이 1470년경부터 16세기 초의 수십 년 사이에 의회의 지원 아래서 인클로저(enclosure) 운동이라는 이름의 농민에 대한 토지 수탈과 겹쳐지면서 농업의 3분구조가 생겨났다. 아울러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탄생의 과정이 국가권력의 지원을 받은 지주들의 폭압적인 수탈 과정임을 보여주려고 했다. “교회령의 강탈, 국유지의 사기적 양도, 공유지의 약탈, 무자비한 폭행에 의해 이루어진 봉건적 소유와 씨족적 소유의 근대적 사유로의 전환, 이것들은 모두 본원적 축적의 목가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였다. 그것들은 자본주의적 농업을 위한 영역을 점령하고 토지를 자본에 통합시켰으며 도시공업에 필요한 보호받을 길 없는 프롤레타리아트를 만들어 내었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지적은 토지, 자본, 노동의 자유화가 자본관계 형성의 역사적 조건임을, 16세기 잉글랜드 농촌에서 일어난 변화는 결국 산업혁명을 위한 출발점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제2의 설명방식은 베버(Max Weber, 1864~1920)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 금욕과 탐욕 속에 숨겨진 역사적 진실》(1904~1905)이 제공했는데, 이는 마르크스의 명제에 대한 반박이자 보완이다. 즉 자본주의의 정신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보완이지만, 그 합리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직업으로서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정당한 이윤을 추구하려는 정신적 태도를, 이 책에서 잠정적으로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면 이는 역사적 이유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정신적 태도는 근대의 자본주의 기업에서 가장 적합한 형태를 발견했고, 반면에 자본주의 기업은 그 정신에서 가장 적합한 추진력을 찾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정신은 자본주의 발전에 선행했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베버는 개신교의 종교적 교리가 합리적인 생활태도를 야기했다는 매우 흥미로운 명제를 제시했다. 그는 루터의 직업관과 특히 칼뱅주의의 예정설, 선민사상 등이 매우 강력한 현세적 직업윤리(‘직업소명설’)를 만들어내는 데 기여했다고 주장했으며, ‘세속적 금욕의 종교적 기초’를 드러내주었다. 사실 그의 명제를 발전시키면 유럽은 다른 문명보다 더 합리적이었기에 앞설 수 있었다는 유럽 중심적 결론이 도출되며, 실제로 그는 다른 문명들의 고등종교에 대해 편향된 시각을 지녔다. 물론 베버가 합리성에 맹목적이었던 것은 아니어서 합목적적 합리성과 도구적 합리성을 구분하고 사회를 하나의 ‘철장(iron cage)’으로 보는 비판적 시각을 지녔지만, 역시 서구 대두의 비결을 자본주의로 보았고 그 역시 결정적인 시기를 종교개혁이 벌어졌던 16세기로 파악했다.

마지막으로 제3의 설명방식으로는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1790)의 《국부론》(1776)을 들 수 있다. 그는 베버는 물론 마르크스의 선배였고 분과학문으로서 경제학의 창시자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유명한 명제를 통해 중상주의를 비판하고 경제적 자유주의를 정책적 대안으로 권고한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필자가 그에게서 주목하는 것은 교환관계의 정치적 맥락, 곧 시장을 자율적인 영역으로 만들어주는 제도적 틀에 관한 그의 고찰이다. 이 점에서 ‘신제도주의 경제사’의 관점이 중요한데, 실제로 스미스는 위 책에서 부의 본질, 분업, 자본 축적, 시장의 효율성 등을 고찰한 뒤에 정부의 역할에 주목했다. 즉 그는 공정한 사회질서의 확립, 경쟁체제의 확립에서 국가의 역할, 법치주의(사유재산권의 확립)의 중요성, 국방, 공공사업과 사회간접자본, 초등교육, 금융규제 등, 경제활동을 포함한 사회적 행위를 투명하게, 곧 예측 가능하게 만드는 주체로서 근대국가에 주목했다. 마지막으로 스미스 역시 자본주의를 ‘서구의 대두’의 비결로, 그 역시 원거리 교역이 본격화하는 16세기를 결정적인 시기로 보았다.

이렇듯 유럽은 자본주의를 통해 어떤 전통문명도 상상하지 못했던 높은 물질적 생산력을 이룩해냈으며, 위의 세 거장의 설명방식에 대한 개괄적 고찰만으로도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것이 단지 물질적, 경제적 측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속노동의 종식을 통한 신분적 질서의 극복과 계급사회의 창출, 통치의 대상에 불과했던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인민(국민)주권과 근대국가의 이념, 근대적 주체로서 개인의 탄생과 자신의 삶을 스스로 조직할 수 있다는 합리주의의 배태, 적어도 경제행위를 예측 가능하게 해주는 법치와 이에 기반한 시민사회의 형성 등을 수반하는 그야말로 총체적인 역사적 구축물임을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다. 이는 아편전쟁(1840~1842)의 충격 속에서 유럽을 길들이고자 했던, 이를테면 동도서기(東道西器; 중국), 화혼양재(和魂洋才; 일본), 구본신참(舊本新參; 조선) 등의 문명 전략이 피상적일 수밖에 없음을 말해준다.

16세기 잉글랜드의 농촌에서 지주층이 유럽 특유의 경제외적 장치인 봉건제로부터 특별한 실익을 끌어낼 수 없었던 특수한 역사적 상황이 작용한 결과 ‘자유로운 임금노동의 창출’이라는 미증유의 사회적 소유관계의 전환이 나타났고, 이에 수반하여 생산방식만이 아니라 사회, 정치, 문화를 포함하는 총체적인 변모 과정 속에서 서구는 1800년을 전후하여 진정한 근대세계의 단계로 돌입하였다. 유럽은 기실 지중해 문명의 막둥이이며 거대한 유라시아 대륙의 주변부였다.

14세기까지도 이슬람 지식인들은 아예 야만인으로 취급하여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런 이들이 1750년경에 이르면 스스로 ‘문명’으로 자처하여 오스만 튀르크나 중국조차도 ‘계몽’의 대상으로 전락시켰다. 이제 유럽은 ‘예속노동’을 해외로 수출하기는 했지만 적어도 기독교 세계 안에서 ‘자유노동’을 보편화시켜 인간해방의 차원을 한 단계 끌어올리면서 문명의 변방에서 중심으로 우뚝 섰다. 물론 인류에게 약(藥)만 준 것은 아니었다. 토지소유관계의 전환을 통해 농민층을 분해시킴으로써 16세기에는 일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인신적으로 자유로운 농업노동자를, 결국 18세기 후반에는 노동력밖에는 팔 것이 없는 자유로운 산업노동자들을 대거 창출해내는 병(病)도 주었다. ‘자기결정권을 회복한 노동’이야말로 높은 생산력의 요체였으며, 그러기에 당장에는 유럽 안에서 지배층이 스스로 농노해방에 나섰으며, 급기야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 유럽 패권의 명분을 제공해 주었다.

이렇듯 자본주의의 역사는 그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4세기가 조금 넘었으며, 특정지역에서 지배적인 경제적 힘으로 작용하기 시작한 것은 고작 2세기에 불과하다. 유럽이 독자적인 국제질서의 구축을 통해 자본주의 세계질서를 형성하기 시작한 것은 겨우 19세기 마지막 3분기의 일이며, 이때부터 그 중심에서 1만 마일이나 떨어진 ‘은둔의 왕국’인 조선조차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신석기혁명이나 도시혁명 또는 고전문명 역시 ‘전구적’ 현상이었지만 서구가 개시한 ‘산업혁명’은 방관을 허락하지 않는 불가역적인 과정이었다. 이 자본주의 세계질서는 ‘전구적’ 체제이지만, 흥미롭게도 그 정치적 상부구조는 국민국가라는 복수의 정치적 단위로 이루어진 ‘국가 간 체제(inter-state system)’이다. 따라서 새로운 경제질서의 세계적 팽창은 19세기 말의 단 30년간에 걸쳐 ‘근대성’을 개시하거나 받아들여 길들이는 데 성공한 소수의 국가(식민제국)와 나머지 대부분의 식민지, 그리고 그나마 위대한 농업제국으로서 저력을 지녀 완전한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은 반(半)식민지로의 급속한 재편을 야기했고, 20세기에 민족해방과 신제국주의라는 전구적 추세 속에서 식민지들이 오늘날 200개가 넘는 독립국가를 이루었지만 여전히 중심부-주변부-반(半)주변부의 3분구조로 고착되어 있다.

이 150년에 이르는 고착된 자본주의 세계질서는 전구적인 차원의 극심한 불평등구조로 말미암아 영구평화의 초석을 놓을 ‘세계정부’의 실현을 근원적으로 차단한다. 사정이 이렇기에 근대국가체제는 중심부 국가들의 거대한 착취를 호도하는 이데올로기의 기능을 한다. 그나마 반주변부의 사회주의 실험은 돌이켜볼 때 지구적 차원이든 국내적 차원이든 불평등구조의 악화를 막아내는 안전판 구실을 했고, ‘현실사회주의’가 몰락한 뒤로는 1929년의 대공황 직전보다도 더 극심한 부의 불균형이 대다수의 삶을 옥죄고 있다. 이 세계질서에 중심 이동의 기미가 보이는데 문명사적 차원에서 그 역사적 의미를 헤아리기에는 아직 이르다. 오늘날 동아시아, 특히 중국이라는 새로운 무게중심의 등장을 둘러싸고 ‘서구의 대두’와 연관 지어 온갖 역사해석이 난무하고 있는데, 과연 그것이 자본주의 세계질서의 구조를 변화시키는 데까지 이를지는 속단하기 어렵다.

흥미롭게도 ‘근대성’ 형성에서 영국이 사회경제적인 영역에서 이룩한 것을 프랑스는 혁명이라는 정치적인 과정을 통해 달성했다. 헤겔은 이미 젊은 나이인 1790년대 말에 양국에서 거의 동시에 진행되고 있던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의 역사적 동질성을 예리하게 간파했다. 이는 ‘이중혁명(dual revolution)’이 기실 문명사적 구조를 바꾸는 총체적인 역사 과정의 운반체라는 깨달음을 보여주는데, 그렇기에 프랑스 혁명가들은 혁명의 원칙을 밝히는 가운데 근대 사회 및 국가의 원리를 참으로 극명하게 드러냈다. 이를 잘 보여주는 문건이 헌법과 그 전문(前文)으로 쓰인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다.

주지하다시피 프랑스혁명은 부르주아혁명(1789~1792), 민중혁명(1792~1794), 보수적인 공화국의 실험(1795~1799)을 거치는데, 각 혁명의 성격을 강령적인 차원에서 보여주는 것이 각기 ‘1791년의 헌법’(입헌군주제), ‘혁명력 1년의 헌법’(1793, 민주공화국), ‘혁명력 3년의 헌법’(1795, 자유공화국)이다. 그 유명한 1789년의 〈권리선언〉은 ‘1791년의 헌법’의 전문이고, ‘1793년의 헌법’은 당파들의 권력투쟁으로 〈지롱드파의 선언〉과 〈산악파의 선언〉이라는 두 개의 ‘선언’을 정본(正本)으로 지니며, 〈1795년의 선언〉은 혁명의 보수화를 반영하여 권리선언과 함께 의무선언이 첨가되어 〈인간과 신민의 권리·의무선언〉이 되었다. 헌법 그리고 그 전문인 〈권리선언〉의 기능은 한편으로 당시에 ‘자연권’이라고 부른 ‘기본권’을 천명하는 일이고, 다른 한편으로 기본권의 보장을 위해 새로운 정치체의 수립과 원리를 밝히는 일이었다. 기본권의 주체가 인간인 반면에, 권력형성의 주체를 시민으로 인식했기에 그냥 ‘인권선언’이 아니라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 되었다. 바로 이 인간과 시민의 괴리는 시민사회와 국가의 상상적 분리를 반영하는 것으로서, 바로 이러했기에 〈권리선언〉은 근대국가의 원리를 보여주는 동시에 자본주의의 요체를 섬광처럼 드러내 줄 수 있었다. 따라서 〈권리선언〉에서 자유로운 근대적 주체인 ‘개인’은 ‘주권자’로서 정치공동체의 일원이면서도 시민사회에서 경제행위를 하는 ‘경제인’으로 나타난다. 여기에 두 가지 모순이 보이는데, 하나는 기본권 보장과 정부 압제의 가능성 사이의 긴장이요, 다른 하나는 주권자와 경제인 사이의 길항관계이다.

〈권리선언〉들은 공통적으로 자유, 소유권, 안전, 압제에 대한 저항권을 인간의 기본권으로 규정한다. 이 기본권들이 우리 모두에게 가장 소중한 하나뿐인 목숨을,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품위를 지키면서 유지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근대적 주체인 개인들의 생명권이야말로 인권의 요체인 것이다. 자유란 자존(自存)의 토대이며, 소유권은 자존의 수단이다. 자존이 위협받을 때, 저항권은 각자의 권리이자 의무이다. 특히 우리의 주목을 받는 것은 안전이 가장 중요한 기본권의 하나로 간주되고 있다는 점이다. “안전은 시민의 인신, 소유권, 권리를 보존하기 위해 사회가 각 시민에게 제공하는 보호에 있다.”(지롱드파의 〈권리선언〉 제9조) 그리고 이러한 기본권을 보존하기 위하여 정부가 존재하며, 모든 정치적 결합의 목적은 바로 이를 위한 것이다. 정부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아, 군대와 관료제를 유지하고 세금을 징수한다. ‘국가’란 우리 모두에게 공통된 것의 총합(總合)이니, 정부는 이를 대표하고 관리한다. 이렇듯 〈권리선언〉은, 그리고 헌법은 기본적 인권을 제시하고 이를 지키기 위한 ‘공통의 권력’의 원리를 밝힌다. 따라서 ‘헌법(Constitution)’은 질서 유지를 위한 ‘법’의 일종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나라의 몸체요, 국가의 대강(大綱)이자 명분인 것이다.

여기서 의문이 떠오른다. 국가를 대변하고 국민주권에 입각해 있다는 정부가 우리 각자의 권리를 얼마든지 침해할 수 있지 않은가? 실제로 우리는 ‘국가폭력’이 그 어떤 폭력보다도 더 참혹할 수 있음을 20세기의 역사를 통해 목격하지 않았던가? 〈권리선언〉은 일견 이에 대해 단호하다. 온갖 종류의 압제에 대한 저항권을 소리 높여 외치고 있거니와 더 구체적으로 “정부가 인민의 권리를 침해할 때, 봉기는 인민과 인민의 각 부분에게 가장 신성한 권리이자 가장 불가결한 의무이다.”(산악파의 〈권리선언〉 제35조)라고 명시했다. 그렇기에 국가와 정부를 심급이 다른 존재로 준별했던 것이다. 하지만 같은 〈권리선언〉은 제10조에서 “법의 권한으로 소환되거나 체포된 모든 시민은 즉시 이에 복종해야 한다. 저항하는 사람은 범죄자가 된다.” 과연 기존의 법체계를 거스르지 않고 저항하고 봉기를 일으킬 수 있는가? 기실 이에 대해 〈권리선언〉은 아무런 방안을 제시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저항권이나 봉기권은 기왕의 혁명을 정당화한 것에 불과하고 〈권리선언〉은 새로운 근대권력의 호교론(護敎論)에 그친 것인가?

다른 한편, 〈권리선언〉은 근대사회의 원리, 곧 자본주의의 존재 근거를 제시한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용역과 시간을 고용 대상으로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팔 수도, 판매의 대상이 되게 할 수도 없다. 그의 인신은 양도할 수 있는 소유물이 아니다. 법은 하인의 신분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노동하는 사람과 그를 고용하는 사람 사이에는 배려와 감사의 계약만이 존재할 수 있다.”(산악파의 〈권리선언〉 제18조) 이렇듯 흥미롭게도 기본권의 설정과 공통 권력의 설립을 핵심적인 내용으로 하는 〈권리선언〉에 ‘자유로운 임금노동’의 문제가 마치 소나무 줄기의 송진처럼 박혀 있는 것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그것이 자유의 진정성(眞正性)을 문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 사회는 각자가 자신의 육체의 주인이면서도 자신의 시간과 노동을 파는 것을 가능하게 했는데, 그는 과연 자신의 노동을 타인에게 팔면서도 자유롭다고 느끼는가? 쉽게 말해 일하지 않으면 먹고살 방편이 없어 회사에 취직했는데, 그는 그러면서도 고용주 의지의 영향을 받지 않는 자존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이러한 프랑스혁명의 여러 선언이 지닌 함의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것은 자유와 소유권을 통해 자본주의의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평등과 안전을 통해 민주주의 정치의 가능성을 열었다. 자본 축적의 동학(動學)이 야기할 불평등을 교정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주권은 인민에게 있기”(산악파의 〈권리선언〉 제25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문서를 부르주아혁명의 모순으로 읽을 수도 있지만, 차라리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상보적 관계를 주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소유권의 유지라는 터전 위에서 자유의 내용을 채우고 평등의 외연을 설정하여 주권자 인민의 안전을 보장하는 일, 이것을 근대의 정치에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위대한 농업문명이 경제외적 강제에 입각한 착취와 인간의 생존 사이의 타협 내지 균형점을 고등종교와 위민정치에서 찾았듯이, 프랑스혁명은 자본주의 탄생의 현장에서 자본에 대한 민주적 통제의 가능성을 제기했던 것이다. ■

 

최갑수 /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서양사학과, 동 대학원 서양사학과 졸업. 서울대학교에서 〈생시몽의 사회사상〉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 《서양사강의》 《근대 유럽의 형성: 16-18세기》(이상 공저) 등과 옮긴 책으로 《프랑스대혁명사》 《왕정의 몰락과 프랑스혁명》 등이 있다. 한국서양사학회 회장, 한국프랑스사학회 회장,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상임의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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