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지 아키라 이형호 옮김

* 이 원고는 《佛敎學セミナ》 81호(大谷大學 佛敎學會, 2005)에 게재된 미야지 아키라 선생의 오타니 대학 강연원고를 번역한 것이다.

1. 처음에

불교학의 전통을 지닌 오타니(大谷) 대학에서 강연할 수 있게 되어 대단히 영광으로 여깁니다. ‘간다라 미술과 대승불교’라는 다소 큰 테마를 내걸었는데, 저는 불교학이나 불교경전에 관련된 지식은 모자라고 어둡습니다만, 불교미술사를 전공하고 특히 불교도상학(佛敎圖像學)에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불교학에 조예가 깊은 분들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면 대단히 감사할 것입니다.

저는 1990년 대학원 학생 때 처음으로, 파괴로 인해 유명해진 아프가니스탄 바미얀 조사에 참가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때 일본의 절이나 불상에서는 볼 수 없는 바미얀의 유적과 대불(大佛)의 거대한 스케일에 놀랐습니다. 그 후 파키스탄의 간다라 유적이나 인도의 불적을 열심히 돌아다니며 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계기로 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의 불교미술을 연구하게 되어서 후에는 중국 신강과 돈황 등에도 가보았습니다.

불교미술의 재미있는 점은 인도에서 흥한 불교미술이 중앙아시아, 실크로드를 지나 중국과 한국, 일본에 전파되는 사이에 여러 가지 문화와 교류하고 변화하여 각각의 토양이나 민족에 뿌리내려 전개를 이루는, 그런 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불교미술은 원래부터 석가모니불에 대한 신앙에서 일어났지만, 일본까지 전해지는 동안 여러 ‘불(佛)’들이 생겨나 조형되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예를 들어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가 많이 조형·조상(造像)되었는데, 그런 불상의 기원을 인도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려고 하면 묘하게도 대부분 헛수고가 되어 버립니다.

대승불교의 기원에 대해서는 불교학 방면에서도 큰 문제가 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불교미술의 방면에서 이 문제를 생각하면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 해볼까 합니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아미타여래, 약사여래, 관음보살, 지장보살, 문수보살이라는 소위 대승의 불상이 대단히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한 대승의 불(佛)들을 인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계통을 찾아보려 해도 명확해지지 않습니다.

인도의 팔라 조(8세기 중엽~11세기경)인 후기불교 시대가 되면, 소위 밀교의 존상인 대일여래라든가 금강계 오불(五佛)이라든가 혹은 팔대보살, 그리고 강삼세나 대위덕 등의 명왕(忿怒尊)이 조형되어서 비하르·벵갈과 오릿사 지방에서 출토되고 있습니다. 때문에 밀교의 존상에 대해서는 일본과의 관계도 어지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불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쿠샨 조(1세기 중엽~3세기 중엽)시대, 그리고 인도의 강성기로서 불교가 꽃핀 굽타 조(4세기 중엽~6세기 중엽), 이 쿠샨 조에서 굽타 조에 걸친 시대의 불교미술을 보면 석가불의 상(像) 혹은 불전도·본생도라는 석가의 설화도(부조, 회화)가 주요한 테마이기 때문에 아미타여래·약사여래·관음보살이라는 대승의 불(佛)을 확인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근년, 미국의 그레고리 쇼팽(G. Schopen)이라는 학자가 매우 흥미로운 연구를 발표했습니다. 쇼팽은 오타니 대학에도 강의하러 왔었기에, 그 강의록을 기본으로 한 저작을 오다니 노부치요(小谷信千代) 선생님이 번역하셔서 《대승불교흥기시대 : 인도의 승원생활(大乘佛敎興起時代 : インドの僧院生活)》이라는 이름으로 춘추사(春秋社)에서 간행하였습니다.

이 책에서는 “기원 1~5, 6세기의 시대는 일반적으로 대승불교의 시대라고 불리고 있지만, 실제로는 부파(소승)불교 전성의 시대로서 대승불교는 지역적으로도 승단 안에서도 주변적인 현상이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불교학 연구자에게 있어서는 조금 충격적인 발언이었다고 생각합니다만, 쇼팽은 다양한 각도에서 이것을 고찰하고 있습니다. 그 근거의 하나로서, “그 시기까지는 불교미술에 명확한 대승의 요소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미술사의 입장에서 보아도, 분명 이 시대에는 확실한 대승의 불상을 확인하기가 꽤 어렵습니다. 예외적인 것으로 중인도의 마투라에서 출토된 쿠산 조의 재명(在銘)아미타불이 있습니다. 이 불상은 안타깝게도 입상이어서 양발과 대좌가 남아 있을 뿐입니다만, 대좌에 ‘아미타바 붓다’의 이름이 새겨진 명문이 있어서, 인도에서 유일하게 밀교 이전임을 확인할 수 있는 아미타불상입니다.

4·5세기 무렵까지 인도 내부에서 확실한 대승의 불보살상으로서 확인할 수 있는 예는 이 아미타불 정도로 다른 것은 거의 없습니다. 5·6세기 이후가 되면 사르나트와 서인도의 후기 석굴, 아잔타·나식·엘로라 등의 석굴에 관음보살·미륵보살·금강수보살·문수보살 등의 보살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5세기 후반의 아잔타석굴에는 ‘제난구제(諸難救濟)의 관음보살’을 나타낸 회화와 부조가 있어서, 이 무렵부터 대승의 보살상이 명확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5세기 이전의 인도에서는 정말로 대승불교의 존상과 미술을 볼 수 없는가?’라는 것이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확실히 인도 내부에서는 5세기 무렵까지는 대승의 불상은 거의 확인할 수 없지만, 저는 아무래도 1세기부터 5세기 무렵까지 꽃핀 간다라 미술에서 대승불교에 관련된 존상이나 테마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미륵보살·관음보살·반가사유보살 등의 보살상, 그리고 중앙의 주존(主尊)에 불타가 있고 양옆에는 보살을 거느린 구성의 존상인 불삼존상(佛三尊像), 심지어 대신변도(大神變圖) 혹은 정토도(淨土圖)라는 의미도 있는 큰 주존의 불타를 중앙에 두고 많은 성중들이 둘러싼 대구도의 부조 등이 간다라 미술에 나타납니다. 이들 조상(彫像)과 부조(浮彫)는 대승불교와 밀접하게 관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2. 간다라 미술과 석가신앙

간다라 미술을 전체적으로 볼 때 기본적으로 석가신앙의 미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간다라는 인도아 대륙의 서북변경 지역에 해당하며, 지금은 파키스탄에 속하고 인더스 강의 상류 지역에 있습니다. 이 지역은 인도는 물론, 그리스·로마와 이란 등 다양한 문화가 들어와서 독특한 간다라 미술이 태어나게 됩니다. 그 이전 중인도의 전통적인 불교미술에서 크게 변화합니다. 불상의 탄생도 아마 간다라에서라고 추측됩니다. 석가의 전기적인 설화에 해당하는 불전미술이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간다라의 불전부조는 단편적으로 출토되고 있지만, 그것들을 정리하면 실로 120개 정도의 장면을 알 수 있습니다.

석가가 전생에서 연등불에게서 장래 불타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받는 ‘연등불수기(燃燈佛授記)’부터 시작해서, 어머니 마야부인이 석가를 임신하는 ‘탁태영몽(託胎靈夢)’, 그리고 나무 아래에서의 ‘탄생(誕生)’ 이야기, 그리고 소년·청년기의 갖가지 에피소드, 출가하여 수행하고 고행하는 이야기, 그리고 ‘항마성도(降魔成道)’라고 불리는 마왕(魔王)·마중(魔衆)을 멸하고 깨달음을 여는 이야기, 최초로 설법하는 ‘초전법륜(初轉法輪)’, 그리고 많은 설법과 이적, 불법을 넓혀가는 등의 다양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최후에 열반(涅槃), 납관(納棺), 다비(茶毘)를 치르고 사리를 배분하는 분사리(分舍利), 스투파를 세우는 기탑(起塔)에 이르기까지 실로 자세하게 석가의 생애를 부조조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간다라 미술의 큰 특징으로서, 그 표현은 중국과 일본의 불전미술에도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인도 내부에서도 마투라와 사르나트, 남인도(아마라바티, 나가르주나콘다)와 아잔타 등에서 불전미술이 선호되고 있지만 간다라만큼 많은 장면은 볼 수 없습니다. 또한 인도 내부에서 석가는 불타이면서 비슈누의 한 화신으로 보고 있습니다. 고대 인도의 사람들은 역사의식이 상당히 희박하였기에 시간을 초월한, 말하자면 신화적인 세계관 속에서 살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에 반해서 간다라에서는 석가를 역사화하려는 의식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석가를 역사적, 현실적인 위대한 성자로서 마음 속에 그렸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간다라에도 석가의 기적적인 이야기를 나타낸 부조가 많지만, 거기에서는 현실에서 그 기적을 일으켰다는 점을 의도하고 있습니다. 간다라 미술에도 석가의 전생 설화인 본생도가 조금은 있지만 인도 내부만큼은 없습니다. 게다가 인도 내부에서는 동물을 석가의 전생으로 하는 이야기도 적지 않은데 간다라에서는 자기 희생적인 인간의 이야기가 많습니다. 이러한 본생도의 태도에서 보아도 간다라에서는 석가를 현실적·역사적인 성자로서 찬탄하고자 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간다라의 설화도는 거의 전부가 불전도나 전생도이며 석가신앙이 기본이 되어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간다라에서는 단독의 불타상도 많이 만들어졌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볼 때 그것들은 대부분 석가불일 것이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다만 불타상은 거의 대부분 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니 명문(銘文)이라도 있지 않은 이상, 석가불인지 약사불인지 아니면 아미타불인지를 결정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불전미술이 매우 선호되었던 상황에서 볼 때, 태반이 석가불일 것이라 생각되는 것입니다. 석가불 이외에 확실한 것은 과거불입니다. 연등불은 ‘연등불수기(燃燈佛授記)’의 장면에서 알 수 있고, 그 외 과거칠불의 작품 예가 있습니다. 불타상으로 칠불을 함께 나타낸 부조가 몇 개인가 있기 때문에 과거칠불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으로부터 간다라 불교미술은 석가신앙을 기본으로 하는, 부파(소승)불교에 속한다는 것이 인도미술사 연구자의 일반적 견해입니다.

3. 간다라 미술과 보살신앙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다라에서 대승불교와 관련한 조형도 보인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첫째로 드는 것은 보살상입니다. 단독 보살상이 간다라에서 많이 제작되었습니다. 또한 불삼존상의 형식에는 중앙에 불타, 좌우에 보살상을 나타낸 예가 적지 않습니다. 보살이라는 것은 아시는 것처럼 보디사트바(Bodhisattva) 곧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이지만, 미술상에서는 석가의 성도 전 모습, 즉 싯다르타(悉澾) 태자의 모습을 기본으로 합니다. 불전부조 안에서 싯다르타 태자의 모습이 자주 나타나는데 그러한 모습을 단독 조상(彫像)으로 나타낸 것이 꽤 많이 있습니다.

대승불교에서는 특히 보살의 활동을 중시합니다. 보살의 활동으로 자주 말해지는 것이지만, ‘상구보리(上求菩提)’와 ‘하화중생(下化衆生)’이라는 두 방향의 활동이 있습니다. ‘상구보리’는 스스로 수행에 힘쓰고, 명상하고, 깨달음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활동입니다. ‘하화중생’은 타인에 대해 자비심을 일으켜 깨달음으로 이끌려고 노력하는 활동입니다. 전자가 스스로 깨달음을 얻으려는 보살임에 비해 후자는 타인에게 구제의 손길을 뻗는 모습의 보살이라 말할 수 있겠지요. 깨달음은 지혜와 결부되고 구제는 자비에 결부된다고 생각하지만 대승불교에서는 적어도 초기의 단계에서, 보살의 이 두 가지의 활동을 대단히 중시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간다라의 보살상을 보자면, 세 종류의 보살상이 확인됩니다. 우선 석가의 성도 전의 모습인 싯다르타 태자, 즉 석가보살 그리고 석가 다음에 나타난다는 미륵보살, 이 두 종류의 보살상으로 일단 구별됩니다. 간다라의 보살상은 모두 장신구를 가득, 즉 가슴장식인 영락과 부적장식, 귀걸이, 손목팔찌, 팔뚝에 차는 팔찌 등의 장식을 호화스럽게 달고 있어서, 아마도 당시의 왕후귀족을 모델로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머리의 장식과 머리모양의 표현, 그리고 가지고 있는 것, 즉 지물(持物)의 특징에 의해서 간다라의 보살상을 세 종류로 나누는 것이 가능합니다. 첫 번째 석가보살. 이것은 불전미술 가운데 성도 이전 태자 시절의 모습, 예를 들면 수하관경(樹下觀耕)의 싯다르타 태자상을 보자면, 머리에 터번 관식(冠飾)이라 불리는 터번 형식의 관장식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두 번째 미륵보살.

이것은 일곱의 불타상을 늘어놓은 과거칠불에 하나의 보살상, 즉 미륵보살을 나타낸 예에서 그 특징을 분별해내는 것이 가능합니다. 미륵보살은 속발(束髮)이라 하여, 머리카락을 묶고 반드시 손에 물병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관음보살로 추정되는 보살상이 있습니다. 이 보살은 석가보살과 같이 머리에 터번 관식(冠飾)을 하고 있지만, 손에 연화 혹은 화만(華?:花網)을 쥐고 있습니다. 시대는 내려갑니다만, 연화를 갖고 있는 사람 파드마파니(持蓮花)는 관음보살의 별칭이 되어 연꽃은 관음보살의 특징적인 지물이 되었습니다. 관음보살과 같다고 결정적으로는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중국 초기의 금동상(金銅像) 중 연화를 가진 보살상에 관세음보살·광세음보살의 글자〔銘〕가 새겨져 있는 것에서 생각해봐도 그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상에서 보듯이 간다라에서는 (1) 머리에 터번 관식(冠飾)을 하고 지물을 가지지 않은 석가보살, (2) 머리카락을 묶고 물병을 가진 미륵보살, (3) 머리에 터번 관식(冠飾)을 하고 손에는 연화, 혹은 화만을 가진 관음보살, 이러한 세 종류의 보살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것들의 특징을 가진 세 보살상이 하나의 부조 평면에 나타난 간다라의 작품(탁실라 고고박물관 소장)도 있어서 분명하게 보살의 존격을 구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40가지 이상의 작품이 있는 불삼존상의 부조 판넬을 조사하면 좌우에 협시보살이 석가보살과 미륵보살 혹은 관음보살과 미륵보살로, 어느 한쪽의 조합으로 되어 있습니다. 전체로 보면 후자, 즉 관음과 미륵의 조합이 대단히 많고 일반적입니다.

이와 같이 간다라에서는 세 종류의 보살상이 인정되지만 도상 형식 상에서는 머리에 터번관식을 하는 계열(석가보살과 관음보살)과 머리카락을 묶는 계열(미륵보살) 크게 둘로 나뉩니다. 머리에 터번관식이라 불리는 왕관풍의 관식을 하던가, 아니면 관식을 하지 않고 머리카락을 묶는 두 계통입니다.

이 두 계통의 도상형식이, 저는 제석천(인드라)과 범천(브라흐마)의 도상과 관계가 깊다고 생각합니다. 브라흐마(범천)는 우주의 근본원리 브라흐만을 신격화한 신으로 정신계의 주인입니다. 때문에 범천의 도상은 장신구를 일체 하지 않고 머리카락을 묶고 손에는 물병을 쥔 행자(行者)의 이미지로 나타납니다. 한편 인드라(제석천)는 신들의 왕으로 칭송받는 신으로서 세속적인 왕자(王者)의 이미지로 나타납니다. 제석천의 도상은 왕관을 쓰고, 다양한 장신구를 하고 손에는 모든 것을 때려 부수는 강력한 무기인 바즈라(金剛杵)를 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간다라에서는 중앙에 석가불을 두고 좌우에 범천과 제석천을 따르게 하는 구도를 취하는 부조조각이 적지 않습니다. 석가가 깨달음을 얻은 후 사람들에게 설법하기 망설이는 것을 알게 된, 범천을 앞세운 신들이 석가에게 설법해 주십사 부탁하는 ‘범천권청(梵天勸請)’의 장면에 반드시 범천과 제석천이 함께 나타나고 있습니다. 합장하고 있는 것이 많기 때문에 지물은 들지 않지만, 범천은 반드시 머리카락을 묶고 있는 것에 대해 제석천은 꼭 왕관 혹은 터번관식을 하고 있습니다.

이 범천과 제석천의 도상이 미륵보살과 관음보살의 원형이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미륵보살은 바라문 출신으로 불제자가 되어 수행에 힘쓰고, 마침내 석가에게서 장래 불타가 된다는 수기를 받는 것이 경전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러한 미륵보살의 성격이 범천의 도상과 융합해서 머리카락을 묶고 물병을 가진 미륵보살상이 성립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한편 관음보살은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구제에 힘쓰는 성격을 기본으로 하는데, 인드라(제석천)가 악룡을 죽여 사람들을 구하고 그 제석천의 후예인 왕은 백성의 안녕과 풍족함을 책임지는 것이라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에, 관음보살의 성격이 제석천의 도상과 융합하여 터번관식을 하는 관음보살상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석천은 왕(王者)이면서 또한 전사이기 때문에 금강저를 드는 반면, 관음보살에는 전사의 이미지가 없기 때문에 금강저 대신에 자비와 풍요의 상징인 연화를 들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대승불교에 있어서 ‘상구보리’와 ‘ 하화중생 ’이라는 보살의 두 가지 활동이 중시되고 있음을 말씀드렸는데, 간다라의 미륵보살은 그 성격과 도상에서 볼 때 스스로 깨달음을 구해 수행에 힘쓰는 ‘상구보리’의 보살상, 한편 관음보살은 그 성격과 도상에서 볼 때 사람들의 구제에 힘쓰는 ‘하화중생’의 보살상으로 대응한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범천과 제석천의 성격·도상을 원형으로 하면서, 불교의 사상과 신앙에 의해 새로운 보살의 존상이 탄생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4. 간다라의 반가사유상

그건 그렇고 간다라의 흥미로운 존상으로 반가사유상이 있습니다. 의자에 앉아 왼발은 내려 땅을 밟고, 오른발을 왼 무릎위에 두는 ‘반가’라 불리는 자세를 취하고 오른쪽 팔꿈치를 구부려 오른손을 뺨이나 이마에 가까이 하여 생각하는, 이른바 사유의 자세를 취한 상입니다. 간다라의 반가사유상은 일본의 코류지(廣隆寺)나 쥬쿠지(中宮寺)에 전해지는 대단히 멋진 반가사유상의 원류라 말할 수 있는데, 이 매력적인 자세의 상은 도대체 어떤 신앙에서 태어난 것일까요? 그리고 어떤 존격인 것일까요?

간다라의 반가사유상에 대해, 그레고리 쇼팽은 간다라에서 설일체유부가 유력했다는 것에서 출발하여, 이 사유의 자세가 산스크리트의 근본설일체유부율 중에 나타나는, “뺨에 손을 대고 불안한 듯 생각에 잠기는”이라는 구문에 대응한다고 봅니다. 이 구문은 불타를 믿고 설법을 듣기 위해 방문한 부자나 왕족의 고민하는 모습으로 경전에 나타납니다.

하지만 간다라의 조각을 조사해 보면 반가사유의 모습을 취하는 인물상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재가신자나 불제자, 선인, 악마 마라 등도 생각하는 자세를 취하는 경우가 있으며 싯다르타 태자도 자주 반가사유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특히 ‘혼약(婚約)’ ‘수하관경사유(樹下觀耕思惟)’ ‘출가결의(出家決意)’라는, 성도 전의 싯다르타 태자의 중대한 전기를 말하는 장면에서 태자의 모습으로 채용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간다라의 조각 중에서 두광(頭光)을 지니고 왼손을 뺨에 가까이 한, 등좌에 반가사유의 모습으로 앉은 단독 반가사유상이 20가지 이상의 예가 있습니다. 쇼팽은 고뇌하여 세존에게 가르침을 들으러 온 높은 신분의 재가신자를 나타내고 있다고 말하지만, 과연 간다라의 사람들은 이러한 인물을 존상으로 만들어 예배한 것일까요? 저는 이것이 보살상이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간다라의 반가사유상을 잘 보면 모두 머리에 호화스러운 터번관식을 하고 있습니다. 오른손은 사유의 자세를 나타내고 있지만 왼손에는 연화를 쥐고 있는 것이 많습니다. 아무것도 들지 않는 상도 소수 있지만 대개는 연화를 쥐고 있습니다. 동경의 마츠오카 미술관에 소장된 반가사유상은 그 대표적인 예라 말할 수 있습니다. 간다라에서는 세 종류의 보살상을 구별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터번관식을 하고 지물을 들지 않은 보살을 석가(悉達)보살, 터번관식을 하고 손에 연화를 쥔 보살을 관음보살로 분류했습니다. 그래서 간다라의 반가사유상은 석가보살도 있지만, 대개는 연화를 손에 든 관음보살로서 신앙된 것이 아닌가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석가보살이나 관음보살은 사유하는 자세로 나타나고 있는 것일까요? 이 점을 생각할 때 중요한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그것은 불전 중에 ‘ 수하관경 ’의 에피소드입니다. 싯다르타 태자가 언젠가 애마 칸타카를 타고 농촌에 가서 농부가 밭을 가는 것을 보고 염부나무 아래에 앉아서 깊은 명상에 들어갔다고 하는 것으로, 많은 불전에 나옵니다. 이 이야기는 석가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여는 ‘성도(成道)’가, 태자 시절에 나타난 전조라 말할 수 있는 에피소드입니다. 많은 경전에서 세부적으로는 많은 이설(異說)이 있지만 ‘태자가 명상에 들어가 깊은 선정을 체험했다’라는 것은 공통적으로 설해지고 있습니다. 이 점과 대응하듯이 간다라의 ‘수하관경 ’의 부조에는 많은 장면에서 싯다르타 태자가 염부나무 아래에서 결가부좌를 하고 선정인을 맺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몇몇의 ‘수하관경’ 부조에서는 태자가 반가사유의 자세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일본의 개인이 소장한 ‘ 수하관경’ 부조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붓다차리타》와 그 한역인 《불소행찬(佛所行讚)》을 보면 태자가 농촌에 왔을 때, 밭에서 벌레가 죽거나 새에게 잡아먹히거나 하는 모습을 보고, 매우 슬퍼하며 깊은 연민을 느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에피소드는 깨달음의 전조일 뿐만 아니라 싯다르타 태자가 “생사(生死)의 괴로움에 대해 사유했다.”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과거현재인과경(過去現在因果經)》에서는 새가 벌레를 쪼아 먹는 것을 보고 태자가 ‘자비심을 일으켜’ 가엾이 여긴 점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볼 때, ‘수하관경’의 장면에서 싯다르타 태자가 반가사유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납득될 뿐만 아니라, 단독의 반가사유상이 “생사(生死)의 괴로움에 대해 사유하고” “자비심을 일으켜 가엾이 여기는”보살상으로 조형된 것이 이해되는 것이 아닐까요.

싯다르타 태자는 이처럼 반가사유의 보살상으로 만들어졌지만 간다라의 단독 반가사유상 대부분은 연화를 손에 든 관음보살로 여겨집니다. 관음보살은 대승불교에 있어서 특히 많은 신앙을 얻어서 도상적(圖像的)으로도 다양한 전개를 이룬 보살상이지만, 그 핵심이 되는 성격은 자비의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관음신앙의 근본경전인 《법화경》 <보문품>은 관음보살의 자비의 활동을 자세히 설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관음은 “생명으로서 사는 것 모두에 대해, 자비의 눈으로 본다.”라고 칭송되고 있습니다. 등나무 덩굴 대좌에 앉아서 손에는 자비와 풍요의 상징인 연꽃을 들고 조용히 사유하는 모습의 보살은 자비의 눈길로 중생의 구제를 이리저리 생각하는 관음보살로서 보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반가사유상은 간다라에서 석가보살, 그리고 관음보살로서 신앙되어 조상(造像)되었고, 인도 내부에서는 마투라에 간다라의 영향이 짙은 조상(彫像)의 예가 여럿 있지만 그 이외에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간다라에서 보살신앙이 높아짐과 동시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반가사유보살상이 간다라 주변의 서북인도에서 관음보살로서 정착한 것은 스와트지방에서 머리 위에 화불(化佛)이 나타나고 손에는 연화를 들고 어깨에 녹피를 걸친 관음보살 반가사유상의 많은 작품(석굴 및 금동상, 6~8세기 무렵)이 있는 것에서 볼 때도 확실합니다. 간다라에서 성립한 반가사유보살상은 중국과 한국, 일본에까지 전해지는데, 동아시아에서는 미륵신앙과 깊은 결합을 가지게 됩니다. 이 문제는 아쉽게도 넘어가지만 어차피 대승불교미술의 성립을 생각할 때, 반가사유상은 중요한 테마를 이루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5. 간다라의 불삼존상

그러면 다음으로, 간다라의 불삼존상(佛三尊像)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중앙에 주존인 불타를 나타내고 좌우에 보살이 따르는 형식으로, 불삼존상 혹은 삼존형식이라 말합니다. 간다라에서 고부조(高浮彫)로 나타낸 불삼존상의 석판조각의 예가 40가지 이상 있습니다. 주존의 불타는 일반적으로 연화좌에 결가부좌로 앉아 설법인을 맺고 있지만 사각의 대좌에 결가부좌로 앉거나 더러는 의좌(다리를 늘어뜨리고 의자나 대좌에 앉음), 혹은 입상인 것도 소수 있습니다. 양 협시보살은 입상이 일반적이지만 반가의 앉은 자세를 취하는 것도 있습니다.

주존의 불타상에 특별히 눈에 띄는 특징은 없고 양 협시보살의 위치는 일정하지 않은데, 머리카락을 묶는 형태와 터번관식을 하는 형태(持物을 들지 않고 있는 것도 있지만 대개는 연화를 든다)가 반드시 쌍을 이루고 있습니다. 즉 미륵보살과 석가보살의 조합도 소수 있지만, 대개는 미륵보살과 관음보살을 협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불삼존상의 주존인 불타는 어떤 존격의 불(佛)인가, 그리고 미륵보살과 관음보살을 함께 하는 전거(典據)나 사상적 배경은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 점을 생각할 때 간과해선 안 되는 작품이 있습니다. 주존이 연화좌에 앉아 설법인을 맺은 불타이며, 좌협시는 터번관식을 하고 손에 연화를 쥔 반가사유형의 보살입니다. 안타깝게도 우협시는 소실되었지만 대좌에 카로슈티의 명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일찍이 브로(J. Brough)는 사진으로 이 명문을 보고 “붓다미트라의 관음, 성스러운 기진(寄進), 붓다미트라의 아미타……”라고 해석, 기진자(寄進者)가 붓다미트라이며 주존이 아미타불, 좌협시가 관음보살이고 소실된 우협시에는 세지보살이 나타나 있었다고 추정했습니다.1) 요컨대 이 불삼존상(당시 소재 불명이었다)은 아미타삼존상 바로 그것이라는 것입니다. 브로의 이 해석에 근거해 간다라 불삼존상의 대부분은 아미타삼존상을 나타낸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근년에 살몬(R. Salmon)과 쇼팽(G.Schopen) 공저의 논문이 발표되었는데, 이것에 의하면 브로의 해석은 전면적으로 부정되어, 아미타도 관음도 명문에서는 전혀 볼 수 없다고 합니다. 그들은 “오로이슈파라의 다미트라의 기진(寄進)…… 붓다미트라의 불사를 위해서”라고 해독하였습니다. 브로가 아미타라고 해석한 amridaha는 amiridae로 읽어야 하며 ‘불사(열반을 의미)를 위하여’라고 해석해야 하며, 또한 관음이라 이해한 oloi큦pare는 지명 등의 고유명사(오로이슈파라)였습니다.2) 이 간다라의 불삼존상은 현재 미국의 플로리다 주립 링링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어, 살몬은 실지조사를 하였기 때문에 그 고찰 또한 자세한 설득력을 가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때문에 간다라에는 명문에 의해 확인할 수 있는 아미타삼존불은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저는 간다라 불삼존상의 대부분은 불타와 미륵보살·관음보살의 조합이라고 추정합니다. 이러한 조합의 불삼존상은 지금의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보이지 않으며, 경전상의 전거도 명확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제일 먼저 생각해야만 하는 것은, 경전과 미술작품의 관계입니다. 확실히 중국 당대 이후, 그리고 인도에서도 포스트 굽타 조(6세기 중엽~8세기 중엽) 이후가 되면, 경전과 미술작품의 관계가 밀접해져 경전을 전거로 미술작품이 많이 제작되지만, 그 이전의 시대는 아무래도 경전과 미술작품이 직접적인 대응관계를 가지는 것이 적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인도에서는 포스트 굽타 조부터 팔라 조(8세기 중엽~11세기경)에 걸쳐서 불타와 미륵보살·관음보살이라는 조합이 대단히 많은 것입니다. 현장삼장은 《대당서역기》의 마가다국 조목에서 보드가야 대탑의 문 좌우에는 관자재(관음)보살상과 미륵(慈氏)보살상이 각각 감실에 있다고 전하고 있으며, 사르나트나 서인도의 후기 석굴에는 이 조합의 불삼존이 많이 보입니다.

특히 팔라 조가 되면 확실히 불타·미륵보살·관음보살의 조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팔라 조가 되면 존상의 특징이 명확해지고 고정됨과 동시에, 밀교경전에도 존상의 특징이 기록되어 쉽게 존상을 분류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즉 미륵보살이 나가케샤(龍華)라는 꽃을 가지고 머리에 스투파(佛塔)를 나타낸 것에 대해, 관음보살은 파드마(紅蓮華) 꽃을 가지고 머리에 아미타의 화불(化佛)을 나타낸 것이 명확해집니다. 이것은 후기 밀교경전 《사다나말라》에도 기록되어 있어, 실제 작품 예도 확실히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사다나말라》 중의 <바즈라사나 사다나(金剛座成就法)>에 중앙에 깨달음을 여는 불타, 양 옆에 미륵보살과 관음보살이 있는 삼존불상의 명상법을 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앙의 불타는 성도의 석가불을 원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말하자면 밀교화한 석가불이라 말할 수 있겠지요.

포스트 굽타 조 이후, 석가불·미륵보살·관음보살의 불삼존상은 인도에서 일반적이고 주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 불삼존상이라고 한다면 미륵보살·관음보살·세지보살, 혹은 약사불·일광보살·월광보살, 또는 석가불·문수보살·보현보살의 조합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면 인도의 미륵보살과 관음보살을 양 협시로 하는 불삼존상의 주존의 불타는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까요? 이 문제에 대해서 저는 아직 충분한 해답을 도출할 수 없지만, 지금은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간다라 불삼존상에서 주존의 불타는 대승불교에서 설해지는 영원한 존재로서의 석가불, 혹은 화신(化身)으로서의 석가불로서 좌우의 미륵보살과 관음보살이 그 현실적인 활동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행자적(行者的)인 모습을 취하는 미륵보살은 상구보리의 활동으로써 ‘깨달음’과 ‘지혜’를 상징하고, 왕자적(王者的)인 모습을 취하는 관음보살은 하화중생의 활동으로써 ‘구제’와 ‘자비’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주존의 석가불이 좌우의 협시불에 의해서 현실적인 활동을 행함을 나타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대승불교는 석가불을 과거의 그것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것으로 하려는 움직임이라는 생각이 있는데, 그러한 대승불교의 불신론이나 보살관과 관계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 불교학 전공 선생님들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면 다행이겠습니다.

6. 간다라의 대구도부조

마지막으로 대신변도, 혹은 정토도라고 여겨지고 있는 간다라의 대구도부조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보통 간다라의 부조는 높이 20~30㎝에서 50㎝정도의 작은 것이 많지만 드물게 1m 이상의 큰 석판에 조각한 예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는 모하마드·나리에서 출토되어 라호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작품으로, 2002~2003년에 동경국립박물관 등에서 열렸던 <파키스탄 간다라 조각전>에도 출품되었기 때문에 직접 보신 분들도 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작품은 폭 90㎝, 높이120㎝의 큰 석판에 환조(丸彫:거의 재료를 통째로 조각한)에 가까운 형태로, 대구도를 부조조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단에 연꽃과 물고기를 나타낸 연지(蓮池)가 있고 화면 중앙에는 큰 연화대좌에 결가부좌하고 설법인을 맺은 불타가 한층 더 크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불타의 주위에는 다선 단에 걸쳐 매우 많은 보살형의 사람들이 모두 연대좌(蓮台座)에 서거나 앉아 있습니다. 그들은 놀란 듯한 기색으로 불타 쪽을 올려다보거나, 아니면 옆의 인물과 이야기하는 모습입니다.

화면의 위쪽에도 불타의 모습이 몇인가 있으며 그 중에는 화불(化佛)을 나타내는 많은 불타도 보입니다. 중심의 주존 불타의 머리 위에는 두 개의 날개를 가진 큐피트형의 비천(飛天)이 화환을 받들고, 더욱 위쪽에는 팔멧트 모양의 꽃에서 상반신을 나타낸 천인들이 산개(傘蓋)를 높이 들고 찬탄하고 있습니다. 매우 흥미로운 대부조로서 일반적인 불전부조의 도상과는 그 양상이 상당히 다릅니다.

이 대부조의 구도는 도대체 무엇을 나타낸 것인지, 간다라 미술연구로 이름 높은 푸쉐(A·Foucher) 이래 다양한 연구가 있었습니다. 푸쉐는 《디비야·아바다나》의 <프라티하르야·스투라>의 기술(記述)과 관련지어서, 불전 중의 ‘사위성(舍衛城)의 신변(神變)’을 나타낸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석가가 이교도를 불교에 귀의시키기 위해서 사위성(쉬라바스티)의 교외에서 여러 가지 신변(神變)을 행하는 것인데, 마지막에 석가는 깊은 명상에 들어가 많은 연화 위에 화불(化佛)을 출현시켰다는 설화입니다.

‘사위성(舍衛城)의 신변(神變)’ 아니면 ‘천불화현(千佛化現)’이라고 불리는 이 설화의 테마는 사르나트나 아잔타 등 굽타 조 이후 불전의 중요한 장면으로서 기껍게 표현되고 있는 것 이 사실입니다. 팔라 조에서는 석가팔상도라는 불전의 여덟 장면의 하나로서 이 ‘사위성의 신변’이 반드시 나타납니다. 푸쉐는 인도에서 중시되는 ‘사위성의 신변’이 간다라에서도 나타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해서, 연화좌에 앉은 대불(大佛)을 중심으로 많은 연화좌 위의 성중이 표현된 대구도부조를 그것으로 분류했습니다.

하지만 푸쉐의 해석에서 최대의 난점은 중앙의 주존의 불타 주위에 나타난 많은 성중이 화현한 불타 곧 화불(化佛)이 아니라 보살의 형태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불타도 조금은 보이지만 대개는 보살로 여겨지는 인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푸쉐의 해석에 일찍이 의문을 드러내는 학자도 있었지만, 그렇다면 어떤 장면을 나타내고 있는 것인지 적극적으로 제시 가능한 견해를 내는 것도 역시 어렵습니다.

일본에서는 미나모토 도요무네(源 豊宗)가 모하마드 나리에서 출토된 대부조는 ‘사위성(舍衛城)의 신변(神變)’이 아니라 아미타정토도를 나타낸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를 1926년에 발표했습니다. 하단에 연지(蓮池)가 있고 연화 위에 앉아서 설법의 상을 행하는 불타를 중심으로 많은 인물이 서 있거나 앉아 있는 모습은 호류지 금당(法隆寺金堂)의 아미타정토도에 보이는 주생자의 모습을 방불케 함으로써 서방정토의 광경을 나타낸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원래 이 주장은 동아시아 아미타정토도와의 구도상의 유사점에서, 간다라부조 또한 아미타정토도를 나타낸 것일 거라 추측한 것입니다.

근년이라고 하기엔 이상하지만 1980년에 미국의 헌팅턴(J.C.Huting -ton)이라는 학자가 모하마드 나리 부조의 도상을 경전 텍스트와 서로 맞추어보는 방법을 통해, 아미타정토도설을 적극적으로 주장했습니다.3)

그는 정토삼부경 중에 《무량수경(無量壽經·大經)》과 《아미타경(阿彌陀經)》, 특히 전자가 부조의 도상과 관계한다고 말하며, 그 이유로써 네 가지 정도를 들었습니다. 첫째, 부조 안의 모든 인물은 대부분 연화좌에 받쳐진 법신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에 반해, 연화좌를 취하지 않은 한 불타가 있는 것에 주목해서 그 불타는 대경에서 아난이 석가에게 아미타를 보고 싶다고 원하는 부분을 나타내고 있음이 틀림없다고 합니다.

둘째, 부조의 상단 양측에 선정인의 좌불이 방사하는 모양으로 작은 입불(立佛)을 발하고 있는 것을 문제 삼아, 그것은 대경에서 말하는 옥석(玉石)의 연화에서 빛이 발해져, 각각의 빛에서 무수한 불타가 출현한다는 기술에 일치한다고 봅니다. 셋째, 부조의 하단에 나타난 두 사람의 세속형의 인물도 연화좌를 취하고 있는 것을 지적하며, 그들은 대경이 설하는 것처럼 정토에 다시 태어난(化生)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봅니다. 넷째, 부조 하단의 연지(蓮池)에 새가 표현되어 있고, 또 화면 중앙의 건물에도 새가 쉬고 있는 것에 주목하여 대경과 소경에서 아미타정토에는 불사의 새가 있음을, 특히 대경에 많은 새의 이름이 기록되어 신묘한 울음소리로 가득 차 있다고 하는 것에 합치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헌팅턴은 모하마드 나리의 부조 도상이 산스크리트본 《무량수경》의 내용에 가깝다고 보고 아미타정토를 나타낸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헌팅턴설은 경전 텍스트의 기술과 부조도상과의 관련을 구체적으로 지적한 점에서 도상해석을 크게 전진시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구미의 연구자 사이에서는 이 설을 채용하는 학자가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헌팅턴설이 아직은 검토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문제점을 여기서 자세하게 설명할 여유는 없지만 헌팅턴이 아미타정토도의 근거로 들었던 점의 대부분은 정토경전에만 설해지는 특징이라 보기 어렵고, 다른 대승경전에도 같은 종류의 것이 설해지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도상과 경전 텍스트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어 경전의 기술을 그대로 도상화 하려 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 스스로가 모하마드 나리에서 출토된 부조를 시작으로 하는 대구도부조에 대해 충분한 도상해석에는 이르지 못하였지만 하나의 방향성을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대구도부조의 주존인 불타는 불삼존상에서 보신 것처럼, 역시 대승적인 불신관(佛身觀)에 기초한 석가불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이 점을 시사하는 부조가 있습니다. 역시 모하마드 나리에서 출토된 것으로 찬디가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대구도부조입니다. 이 부조는 상중하에 삼단의 구획(區畵)으로 나뉘어 있으며, 중단의 제일 큰 구획에서, 앞의 모하마드 나리 출토, 라호르 박물관 소장의 부조와 거의 같은 구도를 볼 수 있습니다. 그에 반해 상단에는 머리카락을 묶고 손에 물병을 들고 다리를 교차해서 앉은 미륵보살이 중앙에 나타나며, 그 주위에서 신들이 찬탄하는 구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 구도는 중앙아시아에서 일반화한 ‘도솔천상(兜率天上)의 미륵보살’을 나타낸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니까 중단구역은 석가불의 설법장면을 나타내며 상단에 표현된 미륵보살에게 불법이 똑바로 이어짐을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단의 좁은 구역에는 불발(佛鉢)에 예배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는데, 불발은 불법의 상징이 되어 있기 때문에 석가불이 설한 불법이 미륵보살에게 전해지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간다라의 대구도부조는 《법화경》 《해심밀경》 《여래장경》 등의 대승경전에 설해진 불타의 기적을 묘사한 것과 가까운 관계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경전들에는 각각 첫머리 부분에 석가불이 위대한 삼매에 들어 빛을 발해서 불국토를 명확히 보이거나 연화나 화불(化佛)을 화현시키는 등 진실한 법을 나타내는 불가사의한 모습, 기서(奇瑞)의 광경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법화경》 서품에서는 세존(석가)이 깊은 명상에 들어가 백호에서 대광명을 발하는 신통변화〔神變〕를 표현, 그 대광명에 의해 불국토 전체가 명확히 보여서, 거기에는 불타들과 보살들의 모습이 비춰지는 것이 설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여래장경》에는 세존이 선정에 들어가면 불의 위신력에 의해 많은 연화가 출현하고, 거기에 전부 화불이 나타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화엄경》<여래성기품>을 보면 다음과 같이 설해져 있습니다.

세존 아래에 많은 불세계에서 모인 보살들이, 각자의 서원에 의해 출현한, 옥으로 된 꽃받침에 앉아 있었다. 그 때 세존의 백호에서 광명이 뿜어져 일체의 세계가 두려움 없이 밝게 비추어졌다. 거기서 그 자리에 모인 보살들은 모두 희유한 일이라 받아들이고 매우 기뻐해, 이러한 광명이 나타난 것에는 분명 위대한 설법이 설해지는 것이 틀림없고 생각하며 맑고 깨끗한 지혜를 얻었다.

모하마드 나리에서 출토된 대구도부조는 이렇게 대승경전에 설해진 ‘ 대광명의 신변(神變) ’을 나타낸 것이 아닐까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세존이 깊은 명상에 들어 백호에서 광명이 뿜어져, 많은 불국토가 나타나고 연화가 출현, 화불이 나타나고 많은 보살들이 모여서 세존의 위대한 설법에 기뻐하며 찬탄한다는 광경을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조의 보살들의 시선이 불타의 백호에 모이는 듯이 조형화되어 있는 것도 불타의 대광명을 의도한 것이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간다라의 대구도부조의 도상은 대승적인 불신관에 기초한 석가불의 ‘대광명의 신변’과 그것에 이어지는 불타의 대승설법의 광경이 아닌가라는 것이 저의 생각이지만, 아직은 부족한 시론적인 것입니다.

7. 맺음말

마지막으로 대승적인 테마를 가진 간다라 미술이 언제부터 제작되었는가 하는 연대에 대해서 한마디 말해두고 싶습니다. 간다라에서 언제 불상이 만들어지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가 있는데, 일찍이 다카다 오사무(高田修) 박사가 《불상의 기원》이라는 대작을 출판해서 대단히 자세한 연구를 발표했습니다. 다카다 박사는 그때까지의 발굴 성과와 많은 연구를 검토해서 기원전 1세기말 무렵에 최초의 간다라 불상이 제작되었다고 결론지었습니다.

그때부터 40년 가까이 경과하였고, 그 후 새로운 발굴과 연구도 발표되어 현재에는 불상의 탄생이 기원전 1세기 전반까지 올라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견이 유력하게 되었습니다. 쿠산 조의 왕통보(王統譜)와 연대에 관해서도 아프가니스탄의 라바타크에서 새로운 연구자료(刻文)가 발견되어 재점검되고 있습니다. 카니시카 왕(2세기 초 즉위?)의 금화에는 ‘붓다’‘샤키야무니 붓다’의 글자〔銘〕를 가진 불(佛) 입상(立像)이 새겨져 있어서, 그 시대에는 왕성하게 불상이 만들어져 양식적으로도 완성도가 높은 불상이 제작된 것이 아닐까 추측됩니다.

단독 보살상도 양식적으로 뛰어난 조상이 나오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기원전 2세기에는 만들어졌던 것이 아닐까요? 카니시카 왕의 동화에는 미륵보살좌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다만 그 글자〔銘〕에는 ‘ 마이트리야 붓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표현된 미륵상은 분명하게 장신구를 한 보살의 형태이면서 글자〔銘〕는 ‘보살(菩薩, Bodhisattva)’이 아닌, ‘붓다(佛陀)’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째서 이렇게 표현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단지 단독 반가사유의 보살상은 현재 알려진 작품에서 보는 한 양식적으로 완성도가 높은 것이 거의 없고 약간 뒤처진 듯 보입니다.

불삼존상에 관해서는 양식적으로 꽤 들쭉날쭉해서, 연대적으로도 상당히 폭이 있는 듯합니다. 불삼존상 중에서 기진의 년월일(五年, 파르구나의 五日)을 기록한 작품의 예가 하나 있지만, 어느 기원(紀元)에 속하는지 명확하지 않아 많은 이론이 있어서 제작연대를 정하는 것이 어려운 상황입니다. 하지만 사리 바로르에서 출토된 페샤와르 박물관 소장의 불삼존 등은 양식적으로 완성도가 높은 뛰어난 작품으로, 2세기까지 올라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대신변도 혹은 정토도라 생각되는 대구도부조에 대해서는 성행기보다 조금 내려온 시기의 작품이 많은 듯합니다. 일반적으로 3~4세기 중엽이라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상으로 간다라의 대승적 테마에 관한 조각의 제작연대에 대해서 대략 말씀드렸습니다. 간다라 미술의 연대는 불명확한 부분이 극히 많은 실정입니다. 하지만 미술사의 측면에서 볼 때 간다라에서 2~3세기 이후, 대승불교와 관련한 조형이 나타나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에 초기 대승불교가 전파된 것을 생각해 볼 때, 간다라의 중요성은 더욱 강조되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간다라 미술을 대승경전, 대승사상과 관련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더욱이 경전과 미술작품을 자세하게 비교하여 도상과 존상의 특정, 해석이 충분히 가능하다면, 당시의 불교신앙의 모습이 명확해지는 것이 아닐까요. 경전은 내용에 대해 많은 말을 하지만 언제, 어디서 만들어져 유포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한편 미술작품은 그 내용에 대해서 스스로는 입을 다물고 있지만 언제, 어디서 만들어졌는가는 특정할 수 있습니다. 경전과 미술작품을 비교하는 것에 의해, 양자의 차가 보완되어 역사 속의 불교신앙의 모습이 떠오를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쉽게도 불교학과 미술사의 연구 교류는 지금까지 그다지 행해지지 않고 있지만, 교류를 돈독히 함으로써 인도 대승불교의 양상도 좀더 구체적인 모습으로 확실해 질 것이라 기대됩니다. 최근 연구 상황의 일부분을 말씀드렸습니다. 지금까지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질의 응답

(1) 아라마키(荒木典俊) 선생님으로부터, “《십지경》이라는 경전 중에 바이로차나(毘盧遮那)가 석가불의 모습으로 나오고, 또 《관보현보살행법경(觀普賢菩薩行法經)》이라는 경전에서는 비로자나불이라 불리는 석가불이라는 표현이 있다, 그래서 석가불이라고 해서 반드시 소승의 불타라고는 말할 수 없으며, 대승의 불타일 가능성도 있지 않은가”라는 취지의 질문을 받았습니다.

대단히 시사하는 바가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저도 정말 그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미술사의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구체적으로 어느 불상이 ‘비로자나불인 석가불’인가를 명확히 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린 대구도부조는 《화엄경》 <여래성기품>의 기술과 가까운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십지경》이라던가 60권본 《화엄경》에서 말하는 석가의 대승적인 모습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막연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화엄경》에서도, 아마 60권본 《화엄경》에서는 노사나불은 석가불과 같다고 생각되고 있고, 80권본 《화엄경》에 이르면 비로자나불과 석가불은 서로 다른 존격이 된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간다라·인도에서는 불삼존상의 주존이 대승적인 석가불이고 좌우에 미륵보살과 관음보살이 따르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습니다. 이 경우 주존은 비로자나로서의 석가불인지 어떤지, 저는 아직 생각이 미치지 못합니다.

‘석가불=비로자나불’의 문제에 대해 매우 흥미로운 불상이 있습니다. 신강(호탄, 키질)과 중국 북제(北齊)~당대(唐代)의 불상(회화와 조각)에, 불신에 세계도를 나타낸 도상이 있어서 일반에는 비로자나불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도상을 자세히 검토해보면, 아무래도 두 종류의 계통으로 나뉘는 듯합니다. 《화엄경》이 말하는 세계도를 나타낸 도상의 계통과 아함경전에 설해진 세계관을 나타낸 도상의 계통입니다. 호탄의 회화에는 전자가, 키질석굴의 벽화에는 후자가 나옵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후자는 비로자나이며 석가불인 것에 반해, 전자는 석가불과는 다른 비로자나불이라 생각합니다. 미국의 하워드(A. Howard)라는 학자가 코스모로지컬 붓다(宇宙的 佛陀)라는 표현으로 이 문제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박형국 씨의 <비로자나불의 도상학적(圖像學的) 연구>도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2) 오다〔織田〕 선생님으로부터, “미륵보살의 ‘미륵’, 마이트리야는 마이트리 곧 ‘자비〔慈〕’라는 의미를 가지고, 또한 관음보살도 자비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간다라 불삼존상의 협시인 미륵보살과 관음보살의 관계는 어떤 식으로 해석해야 하는가”라는 취지의 질문을 받았습니다.

확실히 미륵보살은 ‘자씨(慈氏)’보살이라고도 할 수 있어서, 그 이름에는 자애를 가진다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륵보살은 중앙아시아, 중국에서 크게 변화, 발전합니다. 그 과정에서 동아시아에서는 ‘자씨’ 보살적 성격이 현저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간다라의 도상에서 보면, 미륵보살은 모두 머리를 묶고 반드시 물병을 가진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인도에서 범천(브라흐마)이라든가 행자(行者)의 이미지를 원형으로 하는 도상입니다. 미륵이 오래된 경전에서는 불제자의 한 사람으로서, 수행자의 이미지로 나오는 것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승불교의 보살사상에서는 ‘상구보리’라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활동과 ‘하화중생’이라는 타인의 구제에 힘쓰는 활동이 중시된다고 생각하는데, 특히 미륵보살은 전자와, 관음보살은 후자와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조형상의 차이에서 그렇게 추측되는 것입니다. 미륵보살과 관음보살은 각각 ‘깨달음’과 ‘구제’ 혹은 ‘지혜’와 ‘자비’라는 상호 보완적인 활동에 의해 표현되었다고 생각합니다. ■

미야지 아키라(宮治 昭)
나고야(名古屋)대학 문학부(美學美術史)와 동 대학원 문학연구과(印度哲學) 수사(修士)과정 수료,동 박사과정 중퇴. 현재 나고야대학 대학원 문학연구과 교수. 인도 및 중앙아시아 불교미술사의 저명한 연구자이며, 저서로 《印度美術史》 《涅槃と彌勒の圖像學-インドから中央アジアへ-》 《佛敎美術のイコノロジ-》 《バ-ミヤ-ン,遙かなり》 등이 있다.

이형호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4학년 재학.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