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불교학자가 본 일본불교,일본불교의 렌즈에 비친 한국불교

책의 성격과 특징

김호성 교수의 《일본불교의 빛과 그림자》(정우서적, 2006)를 받자마자 하룻밤에 다 읽었다. 책을 펼쳐 처음의 글을 읽고 나니 다음의 글이 궁금하여 책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생각했다. 아니 내가 생각한 것이 아니라 이 책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끔 유도했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이다. 그만큼 이 책에서는 우리가 지금까지 소홀히 해온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그 때문에 다소 산만하다는 느낌도 받지만, 어느 것 하나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주제들로 가득 차 있다.

얼핏 보면 이 책은 일본불교의 빛과 그림자, 즉 일본불교의 장점과 단점〔明暗〕을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 내용은 일본불교라는 렌즈를 통해 한국불교의 빛과 그림자를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일본의 불교와 불교학계를 거울로 삼아 우리의 불교와 불교학계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 이 책의 가치와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저자 김호성 교수가 1년 동안(2002. 8. 26~2003. 8. 23) 일본 교토의 ‘불교대학(Bukkyo University)’에서 객원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보고 듣고 느낀 점을 기록한 33편의 글이 실려 있다. 그리고 ‘일본-한국 불교사 비교 연표’와 ‘일본불교 고유명사 소사전’이 부록으로 실려 있다. 이 책은 저자의 다른 논문에서는 접할 수 없는 그의 삶과 신앙, 그리고 학문의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생생한 기록들이 담겨져 있다. 또한 이 책에서는 일본과 외국 불교학계의 동향에 대한 많은 정보와 학문의 뒷이야기가 실려 있기 때문에 학문에 뜻을 둔 불교학도들에게는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자신이 1년간 일본에 머물면서 보고 배우고 느낀 것을 기록으로 남겨 ‘개인의 것’이 아닌 ‘공적(公的)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이 책을 발행하게 되었다고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이것은 엔닌(圓仁, 794~864)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서 배운 것이라고 한다. 저자는 기록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비록 현재의 상황에서는 하찮아 보이는 기록일지라도 후일에는 귀중한 자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음식을 담는 그릇도 중요하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일지라도 어떤 그릇에 담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진다. 이 책은 내용도 좋지만 책의 표지와 편집 등 어느 것 하나 나무랄 데 없는 훌륭한 작품으로 태어났다. 이런 일은 어느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원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절인연(時節因緣)이 도래(到來)해야 비로소 빛을 보게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 책은 불교를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학자는 물론 불교신자, 더 나아가 일반 독자들도 마음 편하게 읽고 음미해 볼 수 있는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저자의 학문세계

우선 이 책을 읽다 보면, 저자의 박학다식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초기불교에서부터 대승은 물론 티베트 불교에 이르기까지 불교학의 전 영역을 종횡무진 넘나들고 있다. 어느 특정한 분야만 연구해 온 학자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글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만큼 김 교수의 학문세계는 폭이 넓고 깊다. 그렇기 때문에 김 교수는 후일 ‘자기철학’을 형성할 가능성이 높다. 저자 자신도 이 점에 대해서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음을 내비치고 있다.

저자는 <이즈쓰 도시히코를 아십니까?>라는 글에서 자신은 ‘불교인문학’을 꿈꾸고 있음을 토로하고 있다. 그는 이상적인 학자의 모델로 이즈쓰 도시히코(井筒俊彦)를 상정하고, 그가 걸었던 학자의 길을 따르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의 말을 빌리면, “우리 역시 나름대로의 문제의식과 방법론으로 불교를 넘어서는 보편성을 추구하는 철학을 제시할 수 있는 학인이 나와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가능해진다면, 보편적인 철학 속에 불교가 살아 있게 되겠지요. 불교가 결코 불교도들만의 것이 아닌 것으로써 말입니다. 그때 불교는 세계 모든 인류의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며, 또 세계는 진정으로 한 떨기 꽃이 될 수 있으리라, 저는 굳게 믿습니다.”(106쪽)라고 했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학문하는 사람으로서 더욱 정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의 교수라면 분명히 전공이 있다. 그러나 그 전공은 대학에서 학문의 중복을 피하기 위한 것일 뿐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자기 전공 분야 이외에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자연적으로 학문의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다. 큰 의사, 대의왕(大醫王)이라면 인간의 모든 질병의 원인을 진단하고 그 치료법을 제시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큰 학자는 전공 분야는 물론 불교학이라는 울타리에서조차 벗어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간혹 평자(이하 필자로 함)에게 종파가 무엇이며 무엇을 전공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질문을 받으면 매우 난처해진다. 필자는 그저 붓다의 가르침을 공부하는 학인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이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만든 카테고리 속에서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고 한다. 승려학자라면 당연히 불교학 전반에 대해 능력이 닿는 데까지 공부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내 전공이 아니기 때문에 몰라도 된다는 것은 일반학자가 아닌 승려학자로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일 어떤 신도가 찾아와서 대승불교에 대해 묻는다면, 내 전공은 초기불교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말한다면 얼마나 크게 실망하겠는가?

한편 이 책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것들은 대부분 필자도 공감하는 내용들이다. 이 책의 내용과 똑같은 주장을 필자도 다른 지면을 통해 피력한 것도 있다. 전혀 다른 입장에서 쓴 글이지만 내용적으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간혹 견해가 약간 다른 부분도 있다. 이것은 접근하는 방법이 서로 다를 뿐 불교와 불교학 발전을 염려하는 마음은 똑같다.

여기서 저자가 제기한 많은 주제에 대해서 다 거론할 수는 없지만, 그 중에서 몇 가지만 골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한다. 특히 저자는 이 책에서 일본불교는 ‘종파불교(宗派佛敎)’이지만 한국불교는 ‘회통불교(會通佛敎)’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한국불교는 중국불교의 복사’가 아니라는 점도 힘주어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불교는 장례불교’라고 비판하고 있다. 우선 저자의 주장 내용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필자의 소견을 덧붙이고자 한다.

종파불교와 회통불교

저자는 일본불교의 특징 혹은 문제점으로 ‘종파불교’를 지적하고 있다. 그는 여러 곳에서 일본불교는 종파불교이기 때문에 한국의 회통불교가 약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일본의 종파불교보다는 회통불교를 지향하는 한국불교가 더 우수하다는 것을 직·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특히 <범음교와 일음교>라는 글에서 일본의 종파불교는 ‘가마쿠라 신불교(新佛敎)’ 이후 형성된 것으로 어느 하나를 선택하여 전적으로 수행하는 것을 최상으로 삼아 왔기 때문에 ‘선택’과 ‘전수(專修)’가 종파불교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교판론 대신 회통론을, 선택 대신 융합을, 전수 대신 겸수(兼修)를 지향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 근거로 회통불교의 입장은 ‘이치는 하나이고, 수행은 겸비하자〔理同事兼〕’는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이러한 회통불교는 ‘일음교(一音敎)’에 해당된다고 말하고, 이에 상응하는 산스크리트는 에카라사바다(ekar칊sav칊da, 一味論)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면서 일본에서도 예전에는 회통사상을 주장한 사람이 있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히에이잔(比叡山)의 사이쵸(最澄, 767~822)는 천태종의 소의경전인 《법화경》을 중심으로 일불승(一佛乘)의 회통을 시도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나 많은 종파로 분열되어 오늘날에는 《일본불교종파사전》까지 나오게 된 현실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 불교가 갖는 회통성은 일본불교에는 큰 약방문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예전의 한국불교는 분명 회통적(會通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현재의 한국불교는 회통불교인가?’라고 묻는다면 답변이 궁색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 한국의 불교도들은 한국에 몇 개의 종파가 있는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자고 나면 새로운 종파가 만들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대로 가면 일사일종(一寺一宗)의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1962년 제정되어 1988년 폐지된 불교재산관리법 이후 우후죽순처럼 늘어난 것이 바로 종파들이다. 이미 100여 개의 종파로 난립된 우리 불교가 일본의 종파불교를 비판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다. 일본에 《일본불교종파사전》이 있듯이, 우리도 앞으로 《한국불교종파사전》이 반드시 필요하게 될 것이다. 다만 저자는 ‘교단적 선택과 전수냐 회통론적 융합과 겸수냐’라는 문제를 우리에게 던져 주고 있다.

한국불교는 중국불교의 복사인가?

이 책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부분은 ‘한국불교는 중국불교의 카피(copy)’론 비판(1·2)이다. 이 글은 유일하게 같은 제목으로 2편의 글이 실려 있다. 그리고 저자는 이 글을 통해 한국불교는 중국불교의 복사가 아니라고 강하게 어필하고 있다. 저자는 “제가 다른 나라에 갔더라면, 경험할 수 없는 일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52쪽)라고 말했다. 이것은 저자가 일본에 갔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말한 것으로 개인적인 감상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다른 나라에 갔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필자는 외국학자들로부터 ‘한국불교는 중국불교의 복사 혹은 아류(亞流)가 아니냐?’라는 질문을 수없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일본뿐만 아니다. 전 세계 도처에 한국과 한국불교에 대한 잘못된 정보가 흘러 다닌다. 이러한 잘못된 정보를 바로잡는 것은 현재 한국의 불교학자들의 몫이다. 사실 안에 있을 때에는 한국불교의 단점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밖에 나가 보면 보이지 않던 단점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필자는 한국불교의 잘못된 점들을 지적하는 글을 많이 써왔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한국불교가 세계에서 최고라고 외치고 있다. 우물 안 개구리 식의 안목에서 빨리 벗어나야만 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한국불교의 세계화를 외치고 있다. 한국불교의 세계화는 한국의 사찰을 외국에 건립하고 한국의 승려를 외국에 파견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잘못 알려진 정보들을 하나하나 바꾸어 가는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한국불교를 세계에 널리 알리기 위해서는 영문 서적들이 많이 발행되어야만 한다. 이제 전문적인 학술 논문들은 영어로 씌어져야 할 것이다. 저자도 지적했듯이 “일본 학계에서도 영어를 하는 분들이, 이제는 일본 학계의 중심으로 활약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175쪽)라고 했다. 일본의 아라마키 노리토시(荒牧典俊) 선생은 가능한 일어로 논문을 안 쓰려고 애를 쓰고, 일본 국내에서 나오는 논문집에도 영어로 논문을 쓰고 있다는 대목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 앞으로 우리 불교학계에서도 이런 추세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래야 세계 속에 한국불교와 한국불교학을 알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일본불교와 일본 승려

다음으로 눈여겨볼 대목은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일본불교의 빛과 그림자’이다. 일본불교의 어두운 단면 가운데 하나가 ‘장례불교’라는 점이다. 일본에서도 이제 그 오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에서 실패한 장례불교를 우리가 그대로 모방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글은 저자가 이미 《불교평론》 제18호(2004년 봄)에서 발표한 적이 있다. 거의 같은 시기에 필자도 불교 장례문화에 대하여 강하게 비판하는 논문(<초기불교적 시각에서 본 오늘의 불교장례문화>, 《참여불교》, 2004년 0506호)을 발표하였기 때문에 매우 관심을 갖고 읽어 보았다.

이 글에서 저자는 일본 사원의 기능이 장례의식과 죽은 자를 위한 뒤처리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 불교가 죽은 사람 뒤치다꺼리나 해서 되겠느냐’고 강하게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또한 스님의 역할이 바라문교의 바라문처럼, 사제자 역할만 하고 있는 것은 불교의 본의에서 벗어난 것임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의 장례불교 소산인 납골묘원을 본받아 한국에서도 앞 다투어 납골당을 만드는 것에 대해서도 강한 거부감을 표시하고 있다.

유골을 자연 속으로 되돌리는 ‘자연장(自然葬)’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라는 말로 끝맺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평소 필자가 주장해 왔던 내용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일본불교가 장례불교’라고 비판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불교가 바라문화, 장례불교화 되어 가고 있는 점을 먼저 반성해야 할 것이다.

한편 저자는 일본의 승려들은 ‘학문의 길과 신행의 길’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일본 학승들의 삶은 진정한 의미의 수행자라고 할 수 없다. 즉 ‘행자(行者)’의 모습이 아니다. 학문과 신행이 다르다는 것은 자기모순에 빠질 확률이 높다. 주지하다시피 인도철학의 한 특징은 ‘종교의 이론이 곧 철학이요, 철학의 실천이 곧 종교이다.’ 즉 종교와 철학은 둘로 구분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전공 분야에 대한 확실한 이론을 바탕으로 실천에 옮기는 수행론, 수증론(修證論)이 뒤따라야만 힘을 얻게 된다. 여기에 다시 의례, 의궤(儀軌)가 뒷받침이 되어야 비로소 종교로서의 기능을 다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론과 수행이 별개인 일본의 학승들은 붓다의 가르침에서 보면 그 본질에서 벗어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김 교수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가르침을 “연대하지 않는 각성”으로 새롭게 해석하였다. 즉 “그러니까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성을 하되, 그 각성된 개인이 연대하지는 말자는 것입니다.”(79쪽)라고 주장하였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일부 공감이 가기도 하지만, 무언가 한 가지 빠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마스다니 후미오(增谷文雄)가 말한 “인간은 개인적인 존재이면서 사회적인 존재이다.”라는 말이 머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각자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자기의 몫을 다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교단사적인 입장에서 보면 파승(破僧)을 권장하는 것과 같은 뉘앙스를 주고 있다. 사실 오늘날 한국불교 승단의 병폐 가운데 하나가 바로 ‘독살이’다. 점차 대중처소에는 스님이 줄고, 토굴이라는 명목으로 밖으로 나가 혼자 산다. 이제 승려가 한 자리에 모여 의례를 집행할 경우에도 전혀 호흡이 맞지 않는다. 앞으로는 ‘일인일사(一人一寺)’로 변하게 될 것으로 예측된다.

만일 승가공동체가 유지되지 않으면 불교라는 종교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과거의 많은 부파가 오늘날 현존하지 않는 것은 그 부파의 전통을 계승한 출가집단의 맥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이제 그 부파의 사상과 실천 수행법은 책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현대 서구 불교의 특징이 바로 무소의 뿔처럼 각자 자기 나름대로 불교를 실천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서구인들은 승가제도로서의 불교보다는 불교가 주장하는 가르침, 엄밀히 말하면 철학적인 면이나 개인적인 실천의 문제에 더 관심이 많다. 현재 서구에는 출가 공동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종교로서의 불교교단은 존재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불교를 탐구하는 사람들만 넘쳐나고 있다.

필자는 출가자의 한 사람으로서 또 승단의 전통을 계승해 가야 할 의무를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하면 미래에까지 불교 승가가 존속할 것인가를 늘 걱정하고 있다. 필자가 학문하는 것도 불교 승가의 발전과 법이 오래 머물게 하기 위해서다. 필자의 최대 관심사는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마지막도 좋은’ 승가가 미래에까지 존속하기를 바라는 것뿐이다.

그런데 만일 승가의 맥이 끊어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한번 끊어진 승가의 맥은 다시 복구하기 어렵다. 현재 상좌부 불교 국가에 비구니 승단이 존재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오늘날 불법을 배우고 익힐 수 있는 것도 승단 내부에서 그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현전승가가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 점을 우리는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일본불교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최근 마츠오 겐지 지음/김호성 옮김 《인물로 보는 일본 불교사》(동국대 출판부, 2005)와 《일본불교의 빛과 그림자》를 통해 막연히 혐오해 왔던 일본과 일본불교에 대해 조금씩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저자는 이 책을 계기로 양국의 불교학자들이 서로 관심을 갖고 진지하게 공부할 수 있는 가교의 역할을 담당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아무쪼록 이 책이 그러한 역할을 다할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일본과 일본의 불교에 대해 혐오감을 갖고 있는 한국의 불자들이 이 책을 일독(一讀)하기를 권한다. ■

마성
스리랑카 팔리불교대학교 불교사회철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현재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불교학과 강사, 팔리문헌연구소 소장. 논문으로 <불교도의 관점에서 본 인간(Man in Buddhist Perspective)> <포살과 팔재계에 관한 고찰>, <자등명 법등명의 번역에 대한 고찰> 등 다수가 있다.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