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 17일 개최

성태용
건국대 교수
1. 三易가운데 어느 것과 불교가 연결될 수 있는가?

***주역을 이해하는 태도에 의리와 상수와 점복이 있다.

*이 가운데 점복은 불교와 연결될 가능성이 없다. - 사문과경의 엄격한 점복에 대한 배척을 생각할 것.

*상수역 또한 불교와 연결되기 힘들다.

*의리역의 주역 이해만이 불교와 연결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주역의 의리적 해석은 철저히 유학적 윤리에 치중하는 측면이 있어, 그러한 유학적 이해를 넘어서는 불교적 이해를 전제하지 않는 한 곧바로 불교와 연결될 수 없다.

***變易 不易 簡易의 삼역(三易)과 불교의 접합점은 바로 변역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불역 또한 변화 가운데의 불변의 이치를 논한다는 점에서 불교와 연결점을 찾을 수 있으나, 역시 불교와 가장 직접적으로 소통될 수 있는 것은 변화를 말하는 변역의 관점이다.

 


2. 변화를 중심으로 보는 철학과 주역

*파르메니데스적인 사고에 바탕한 철학과 헤라클레이토스 적인 사고에 바탕한 철학이 있다.

*전자는 불변의 존재를 근거로 하는 철학이며, 후자는 끊임없는 변화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불교는 분명 헤라클레이토스적인 사고에 가깝다. - 제행무상

*주역 또한 변화를 중심으로 한다는 점에에 불교와 그 철학적 바탕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주역에서의 변화는 음양 또는 강유라고 하는 것의 감응관계에서 일어난다고 하는 점에서, 그러한 전제 없이 변화를 말하는 불교와는 다르다.

*음양의 관계에서 변화를 말하기에 주역에서 말하는 변화는 예측 가능성에 있어서 불교에서 말하는 변화보다 뛰어난 점이 있다.

*그리고 이 음양의 상응관계에서 변화를 말하는 사유는 바로 관계론적 사유로 나가게 되며, 이 점에서 또한 불교와 연결점을 가진다.

3. 관계론적 관점과 실재론적 관점

*주역의 태극 음양 등은 실재가 아니다.

*만물과 만사를 거기에 대입하여 해석할 수 있는 부호이며, 그러하기에 관계론적 사유에 바탕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나라는 논재는 性的인 측면에서 말하면 양에 속하지만, 만약 내가 타인과의 관계에서 추종자의 입장이라면 음에 속할 수 있다.

*어떤 존재의 선악 또한 고정적으로 선 또는 악을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괘 전체의 상황과 다른 효들과의 상관관계 속에서 결정된다.

*존재의 선악 등이 본래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실재론적 사유와 다른 관계론적 사유는 불교의 연기설에서도 말해질 수 있다.

*이 점에서 주역의 관계론적 사유와 주역의 연기적 사유를 비교해 볼 수 있다.

*水雷屯괘와 山水蒙괘의 예 참조.


4. 판을 읽는 눈, 윤리적 실천강령의 제시

1) 변화를 어떻게 읽는가

*음양의 상응관계 - 應과 比

*正과 中

*괘가 상징하는 상황과 효의 위치

*주변 효와의 관계.

2)판을 읽는 눈

*불교에서는 연기와 변화를 말하지만, 그것이 개인의 수양과 관계된 차원에서 말해지는 경우가 많다. - 소승불교의 시간적, 종적인 연기설

*대승에 들어와 공간적, 횡적인 연기로 확장이 있지만, 대단히 추상적이고 원리적인 측면에 대하여 말할 뿐, 우리가 처하는 구체적인 상황에 대하여 말하고, 거기에서의 구체적인 대응방안을 말하지 않는 측면이 있다.

*주역은 괘라는 특별한 상황을 전제로 하고, 그 속에서 효의 위치에 따른 구체적인 대응방안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보다 현실적이라 할 수 있다.

*관계론적인 사유에 바탕하고, 또 변화를 중심으로 말한다는 점에서 불교와 연결점을 갖지만, 중국적인 사유 그 가은데서도 유가적인 사유의 특성을 강하게 보여주는 점에서 불교의 문제점을 보완하는 사유틀로 채택될 수 있다.

3)일상적 삶 속에서의 실천

*불교는 중국에 오면서 삶 전체를 이끄는 종교로서의 위치를 스스로 포기한 듯한 점이 있다.
*개인의 수행, 또는 신앙심의 영역에만 관계할 뿐, 일상적 삶의 윤리가 나오지 않는다.
*예들 들어 ‘隨處作主’라는 말을 하지만, 그 주인됨이 사회적 관계 등에서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한다는 구체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을 챙긴다는 정신적인 자세를 강조하는 쪽으로 흐른다.
*주역의 틀을 채용하거나, 사유방식을 도입한다면 그러한 추상성과 관념성을 넘어서서 구체적인 현장에서의 실천에로 나갈 길이 열릴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 수뢰준(水雷屯)


屯, 元亨, 利貞, 勿用有攸往, 利建侯.
준, 원형, 리정, 물용유유왕, 리건후.
彖曰, 屯, 剛柔始交而難生, 動乎險中, 大亨貞. 雷雨之動滿盈, 天造草昧, 宜建侯而不寧.
단왈, 준, 강유시교이난생, 동호험중, 대형정, 뇌우지동만영, 천조초매, 의건후이불녕.
象曰, 雲雷, 屯, 君子以經綸.
상왈, 운뢰, 준. 군자이경륜.
初九, 磐桓, 利居貞, 利建侯
초구, 반환, 리거정, 리건후
象曰, 雖磐桓, 志行正也, 以貴下賤, 大得民也.
상왈, 수반환, 지행정야, 이귀하천, 대득민야.
六二, 屯如, 邅如. 乘馬班如, 匪寇婚媾, 女子貞不字, 十年乃字.
육이, 준여, 전여, 승마반여, 비구혼구, 여자정부자, 십년내자.
象曰, 六二之難, 乘剛也, 十年乃字, 反常也.
상왈, 육이지난, 승강야, 십년내자, 반상야.
六三, 卽鹿无虞, 惟入于林中, 君子幾, 不如舍, 往吝.
육삼, 즉록무우, 유입우립중, 군자기, 불여사, 왕인.
象曰, “卽鹿无虞”, 以從禽也, “君子舍之, 往吝”, 窮也.
상왈, “즉록무우”, 이종금야, “군자사지, 왕인”. 궁야.
六四, 乘馬班如, 求婚媾, 往吉, 无不利.
육사, 승마반여, 구혼구, 왕길, 무불리.
象曰, 求而往, 明也.
상왈, 구이왕, 명야.
九五, 屯其膏. 小貞吉, 大貞凶.
구오, 준기고, 소정길, 대정흉.
象曰, “屯其膏”, 施未光也.
상왈, “준기고”, 시미광야.
上六, 乘馬班如, 泣血漣如.
상육, 승마반여, 읍혈련여.
象曰, “泣血漣如”, 何可長也?
상왈, “읍혈연여”, 하가장야?

☶ 산수몽(山水蒙)


蒙, 亨. 匪我求童蒙, 童蒙求我, 初筮告, 再三瀆, 瀆則不告. 利貞.
몽, 형, 비아구동몽, 동몽구아, 초서곡, 재삼독, 독즉불곡, 리정

彖曰, 蒙, 山下有險, 險而止, 蒙. “蒙, 亨”, 以亨行時中也. “匪我求童蒙, 童蒙求我”, 志應也.
단왈, 몽, 산하유혐, 험이지, 몽, “몽, 형”, 이형행시중야, “비아구동몽, 동몽구아”, 지응야.
“初筮告”, 以剛中也, “再三瀆, 瀆則不告”, 瀆蒙也. 蒙以養正, 聖功也.
“초서곡”, 이강중야, “재삼독, 독즉불곡”, 독몽야. 몽이양정, 성공야.
象曰, 山下出泉, 蒙, 君子以果行育德.
상왈, 산하출천, 몽, 군자이과행육덕.
初六, 發蒙, 利用刑人, 用說桎梏, 以往吝.
초육, 발몽, 리용형인, 용탈질곡, 이왕인.
象曰, 利用刑人, 以正法也.
상왈, 리용형인, 이정법야.
九二, 包蒙, 吉. 納婦, 吉, 子克家.
구이, 포몽, 길, 납부, 길, 자극가.
象曰, “子克家”, 剛柔接也.
상왈, “자극가”, 강유접야.
六三, 勿用取女, 見金夫, 不有躬, 无攸利.
육삼, 물용취녀, 견금부, 불유궁, 무유리.
象曰, “勿用取女”, 行不順也.
상왈, “물용취녀”, 행불순야.
六四, 困蒙, 吝.
육사, 곤몽, 인.
象曰, “困蒙之吝”, 獨遠實也.
상왈, “곤몽지인”, 독원실야.
六五, 童蒙, 吉.
육오, 동몽, 길.
象曰, “童蒙之吉”, 順以巽也.
상왈, “동몽지길”, 순이손야.
上九, 擊蒙, 不利爲寇, 利禦寇.
상구, 격몽, 불리위구, 리어구.
象曰, “利用禦寇”, 上下順也.
상왈, “리용어구”, 상하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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