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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논단] 융심리학과 불교사상 / 이죽내
대구 수성중동병원 진료고문
[0호] 2014년 06월 18일 (수) 이죽내 kuhplzn@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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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죽내
대구 수성중동병원 진료고문

주어진 강의 제목이 ‘융심리학과 불교’가 아니라, ‘융심리학과 불교사상’이다. 융심리학을 불교의 사상적 측면과 비교해 보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불교사상은 일반적으로 중도(中道)사상으로 말해지고 있다. 그리고 융심리학을 관류하고 있는 사상은 대극의 합일(coniunctio oppositorum) 혹은 전일성(全一性, die Einheit und Ganzheit)이다. 그런데, 불교의 중도사상과 융심리학의 대극의 합일 사상이나 전일성 사상은 다르지 않다.

불교의 목표는 견성성불(見性成佛)하여 고통에서 벗어나는데 있다. 융심리학의 정신치료 역시 인간의 본성인 대극합일의 전일성을 실현하여 병화(病禍)로부터 해방되는데 궁극적 목표가 있다. 불교에서 성품을 보고 부처가 된다고 할 때의 그 성품은 중(中) 혹은 중도로서의 성품이다. 성품을 본다거나 깨닫는다는 것은 중도를 깨닫는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중도로서의 성품을 깨달았을 때 삼라만상은 참된 모습으로서의 중도실상(中道實相)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융심리학에 있어서의 자기실현은 정신의 전일성을 실현함인데, 그 전일성의 실현은 불가의 중도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는 중심화 과정(中心化 過程, Zentralvorgang) 또는 중향(中向, Zentroversion)이란 말로 표현되기도 한다.

중도사상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고ㆍ락, 유ㆍ무, 생ㆍ멸, 단ㆍ상 등 상대적인 양 극단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중도의 입장에서 보면, 일체법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면서(非有非無), 동시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이다(亦有亦無). 전자는 착각적인 현상계를 부정함이고(双遮), 후자는 그 부정을 통해 실상계가 긍정으로 드러남(双照)이다. 이 대극의 부정과 긍정을 융심리학에서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weder〜noch), 이것일 뿐만 아니라 저것이기도 하다(sowohl〜als auch)는 표현 형식을 취하고 있다. 상대적인 대극을 부정하거나 초월한 후에 그 대극을 다시 살리는 것이다. 대극을 죽였다가 다시 살리는 격이다. 죽기 전의 대극이 영도(零度)의 경계라면 죽어서 다시 살아난 대극은 360도의 경계다.

중도니 대극합일이니 하는 것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여실(如實)하게 보자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집착이 없어야 한다. 나에 대한 집착과 대상에 대한 집착이 없을 때 모든 것을 시시각각 변화하는 그대로 보게 되고 그 어떤 것에도 머무르지 않게 된다. 그러나 세간의 현실은 대극에 집착한 나머지 그 중 어느 한 쪽을 취하고 다른 한 쪽은 버리는, 이것 아니면 저것의 흑백 논리로 작동되고 있다. 그것으로 인해 중도의 온전한 삶을 살지 못하고, 반신불수의 편파적⋅편향적인 삶을 살게 된다. 그것이 다름 아닌 인간 고통의 뿌리다. 융심리학이나 불교의 존재 이유는 그 고통을 해결하는데 있다.

석가가 자신을 마음의 의사라고 말한 것처럼 불교는 이런 면에서는 정신치료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융심리학적 정신치료처럼 인간본성에 대한 통찰에 기초한 정신치료다. 융은 불교 등 동양의 종교나 사상은 서양의 종교나 철학에 상응하기보다는 서양의 정신치료에 해당한다고 했다. 그 밖에, 성공회 신부로서 선(禪)에 심취했던 A. Watts도 불교ㆍ유교ㆍ노장사상 등은 서양적 개념으로는 종교도 철학도 아닌 정신치료라고 했다.

따라서 여기서는 정신치료적 측면에서 불교와 융심리학의 사상이 어떤 중요성과 가치를 갖는지를 말해보고자 한다. 다시 말하면, 융심리학과 불교사상의 근본을 이루는, 인간의 본성 혹은 심성에 대한 통찰이 어떤 정신치료적 의의를 갖는지를 말해 보고자 함이다.

이에 앞서, 동양사상에 대한 융의 관심과 태도, 그리고 동양사상에 대한 그의 논평을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융이 동양사상과 동양적 사고를 얼마나 높이 평가하고, 그의 사상과 사고가 동양의 그것과 얼마나 일치하고 있는가를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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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의 동양사상에 대한 관심은 1920년 전후에서 시작하여 도가사상과 역학(易學), 인도의 철학과 종교 그리고 불교의 선(禪)으로 이어진다.

융은 서양적 사고는 외향적 태도, 동양적 사고는 내향적 태도를 특징으로 한다고 언급하면서 그 근거로 동양의 종교와 서양의 종교를 예거하고 있다. 기독교적인 서구사회의 인간은 전적으로 신의 은총에 의존하고 있는데 반해, 동양인은 자기 스스로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서양인은 자기실현 혹은 자기구원을 자신 밖에 있는 절대 타자인 신에서 구하고 있는데 반해, 동양인은 불성(佛性) 및 일심(一心) 등으로 표현되는 마음에서 자기해탈을 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융은, “서양인은 신의 은총에 의지하기 때문에 서양인에게 인간이란 지극히 작은 것이며, ........ 인간이 신을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본다면, 신은 깨닫지 못한 인간 마음이 엮어낸 환상의 베일에 불과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라고 했다.

융은 “외향성의 입장에서는 인간이 그 자신 속에 스스로를 해탈케 할 가능성을 지닌다고 함은 분명 불경스러운 일이 될 것이며, 서양인에게 진리란 외부적 사실을 통하여 증명될 수 있을 때 비로소 설득력을 지닌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서양인은 자연에 대한 엄격한 관찰과 탐구를 신뢰하고, 서양인의 진리는 외부적 세계의 내용과 일치되어야만 하고, 그렇지 않을 때 그것은 다만 주관적일 뿐이다라는 것이다. 서양인의 절대적 확신이 외부에서 비롯됨은 ‘감관을 통하지 않은 인식은 없다.(nihil sit in intellectu quod non antea fuerit in sensu)’는 서양인의 외향적 표어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고 했다.

이와 같이, 융은 동양인의 내향적 사고를 서양인의 외향적 사고와 대비하면서, 서양인의 외향적 사고의 일방성을 비판하고 동양인의 내향적 사고, 즉 동양의 ‘마음’ 같은 것을 보완하여 마음의 전일성 혹은 중도(中道)를 회복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을 회복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동양이나 동양인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속에서 구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동양에서 그것을 구한다는 것은, 곧 다시 자신들의 내면에서 구하는 것이 아닌, 외부에서 구하는 외향적 태도와 다름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은 자기자신으로부터 출발하여야 하고, 자신의 마음 밖에서는 구할 것이 없다는 것이 동양사상과 융심리학의 기본태도이다.

다음은 융의 불교에 관한 논평이다. 불교에 대한 융의 견해는 유일하게 스즈키의『큰 자유로움, Die Grosse Befreiung』이란 책자의 서문에 나타나 있다. 여기서 융은 스즈키가 선(禪)의 본질을 ‘깨달음’이라고 말한 것에 주목하면서, 깨달음의 심리학적 의미를 말하고 있다.

스즈키가 ‘깨달음’이란 자기 본성의 통찰, 즉 견성(見性)이라고 한 데 대하여, 융은 선(禪)의 깨달음의 과정을 ‘의식적 자아’가 ‘무아적(無我的) 자기’에로 돌파(Durchbruch)하여 ‘무아적 자기’를 증득하는 과정으로 이해했다. 융심리학에서는 ‘자아’와 ‘자기’는 엄격히 구별되는, 망아(妄我)와 진아(眞我)에 대응하는 개념이다.

깨달음의 중요한 방편인 화두에 관해서는, 융은 부분적ㆍ일방적 지적 태도나 사고를 타파하고 전일적 성격을 띤 대답을 촉구하는 생기발랄한 무의미(blühender Unsinn)라고 논평 했다. 여기서 무의미(無意味)는 역설적이다. 즉, 겉으로는 무의미하게 보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의미를 담고 있는 ‘의미있는 무의미’ 또는 ‘무의미한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세간의 합리적ㆍ지적 관점에서 보면, 화두는 그야말로 이해할 수 없고 의미 없는 답변이다. 예컨대, “부처가 무엇입니까?” 라는 물음에 “똥나무 막대기” 라고 대답한 화두에서 보면, 그 대답은 동문서답의 뚱딴지같은 소리다. 그러나 출세간의 전일적ㆍ중도적 관점에서 보면, ‘무의미’하게 들리는 대답을 통해 합리적ㆍ지적ㆍ일방적 태도나 사고를 뒤흔들어 전일성에 눈을 뜨게 하는 중도의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융은 선(禪)의 깨달음을 이야기하면서 이에 상응하는 것이 서양에는 없는가라고 반문하면서, 그런 깨달음이 특히 기독교적 신비주의자의 체험에서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융은 에카르트(Meister Eckhart)의 ≪마음이 가난한 자의 행복≫이라는 설교 내용 중에서 “......돌파속에서, 나는 비로소 신의 뜻 안에서 자유로우며, 역시 신의 뜻과 활동 그리고 신 차제로부터도 자유롭다. 그 때 나는 비로소 모든 피조물 이상의 것이 되며, 그곳에서 나는 신도 아니고 피조물도 아니다. .........돌파속에서 나와 신이 공동체적 하나임을 느낀다.”를 인용하고 있다. 또한 융은 신비가인 루이스 브뢱크(Ruysbroeck)의 말, “모든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고 모든 것을 비운다면 인간은 자유로워진다.”는 말을 인용하고 있다.

융은 현대 서양에서 선(禪)의 깨달음과 같은 체험을 이어갈 수 있는 분야는 정신치료라고 하면서, 정신치료자인 자신이 선(禪)의 깨달음을 다루고 있는 스즈키의 『큰 자유로움』이란 책의 서문을 쓰게 된 사실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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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융심리학과 불교사상의 인간본성에 대한 통찰이 정신치료적 실제에서 어떤 중요성이 있는가를 말할 차례다.

본성에 대한 통찰이란 본성이 본성을 보는 것이다. 소위 통찰치료에서 말하는 통찰은 어떤 심리적 문제에 대한 통찰이고, 그 통찰은 의식적 자아가 그 문제를 보는 것이다. 그래서 본성이 본성을 보는 본성의 통찰과 의식적 자아가 문제를 보는 문제의 통찰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본성의 통찰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의식적 자아의 태도가 바뀌어야 한다.

지금까지 자신의 본성을 망각한 채 외부의 집단적 가치만을 추구하던 태도가 자신의 고유한 본성(개성, 주체성)에 눈을 떠서 그 본성의 실현에로 나아가는 태도로 바뀌는 것을 가리킨다. 융심리학에서 말하는 자아중심적 태도에서 자기중심적 태도로, 불교에서는 바깥 상(相)을 취하던 태도를 버리고 자기 마음으로 돌아와서 그 마음을 밝히는(不取外相 自心返照) 태도에로의 전환이다. 본성이 본성을 본다는 것은 바로 ‘본성’에 눈 뜬 인간이 자신의 ‘본성’을 보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본성에 눈 뜬 의식적 자아만이 자신의 본성을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이를테면 융심리학에서의 자기실현은 그저 일상의 의식적 자아가 자기(無我)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 눈 뜬 의식적 자아가 자기를 실현하는 것이다. 자기에 눈 뜬 의식적 자아는 더 이상 의식적 자아로 작용하지 않고 자기와 더불어 작용하기 때문에, 자기실현은 자아가 자기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자기를 실현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분별과 대극의 성격을 띤 의식적 자아는「무」분별과 대극합일의 성격을 띤 자기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불교에서도 깨닫기 위해서는 유전연기에서 환멸연기에로 전환이 일어나고 시각(始覺)이 가동되어야 한다. 시각이 가동된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불각(不覺)에서 깨달음의 마음이 생겨난 것이다. 이것을 발심, 즉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 한다. 시각과 발심은 깨달음(本覺)으로 향한 여정의 첫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본성에 눈을 떴다는 것은 심안(心眼)이 열렸다는 것이고, 심안을 통해 본성을 보았기에 비로소 본성에 대한 믿음이 생긴다. 그래서 본성통찰에 근거한 치료는 본성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 치료이기도 하다.

그 다음은 본성에 대한 통찰이 갖는 정신치료적 의의에 대한 이야기다. 정신치료에서 가장 중요한 치유인자는 치료자-내담자 관계와 이해(해석의 문제)로 알려져 있다. 말하자면, 치료자의 이해방식과 내담자와의 관계방식이 치유의 결정적 인자라는 것이다. 사실은 치료자와 내담자의 관계방식은 치료자의 이해방식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이해방식이 치유의 결정적 인자라고 할 수 있다. 불교에서의 깨달음, 융심리학적 정신치료에서의 자기실현(개성화)등은 모두 이해의 문제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이해를 중심으로 본성에 대한 통찰이 갖는 정신치료적 중요성을 몇 가지 말해보고자 한다.

첫째, 주객일여(主客一如)적 이해다. 주객일여적 이해는 주객이원적 이해와 대비된다. 주객이원적 이해는 주관과 객관의 대극적 구조인데 반해, 주객일여적 이해는 주관과 객관이 하나가 되는 대극합일의 구조다. 주객이원적 이해가 지식으로의 앎이라면, 주객일여적 이해는 지혜로서의 앎이다. 지식으로서의 앎은 대극성ㆍ상대성ㆍ외부지향성ㆍ분별성ㆍ표상성ㆍ소유의 성격을 갖고 있다. 이에 반해, 지혜로서의 앎은 대극합일성ㆍ절대성ㆍ내부지향성ㆍ「무」분별성ㆍ실상(實相)성ㆍ존재의 성격을 갖고 있다. 지식으로서의 앎이 유위적ㆍ자아적 이해라면, 지혜로서의 앎은 무위(無爲)적ㆍ무아(無我)적 이해다.

학문이 지식으로서의 앎의 이론이라면, 본성통찰에 근거한 치료는 지혜로서의 앎의 실천이다. 융심리학적 정신치료에서 중요한 치료방법인 치료자의 인격은 지혜로서의 앎을 가리킨다. 불교에서도 보살이 갖추어야 할 기본은 자비와 더불어 지혜다. 보살의 마음은 지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무엇이든 지혜의 눈으로 본다. 본성의 깨우침은 주객일여적 이해, 즉 지혜로서의 앎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본성의 깨우침을 통해서만 근본적으로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주객일여적 이해는 융심리학에서는 상징적 이해, 불교에서 지관(止觀) 혹은 정혜(定慧)의 이해방식에서 볼 수 있다.

둘째, 내담자를 대상화하지 않는다. 대상화한다는 것은 사물화 한다는 것과 같다. 인간은 본성상 대상화될 수 없다. 인간의 본성은 대극을 떠난 혹은 대극합일적인 성격이기 때문에 대상적으로 이해될 수 없다. 대상이 된다면 인간의 본성이 억압된다. 치료자-내담자 관계는 크게 대상적 관계와 체험적 관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자가 치료자의 지식ㆍ기술과 내담자의 문제나 병과의 사물적 관계라면, 후자는 치료자와 내담자간의 의미이해의 공감적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치유인자로서의 치료자-내담자 관계는 말할 필요도 없이 체험적 관계이다. 이 체험적 관계는 융심리학적 정신치료에서는 변증법적 대화치료에서 볼 수 있다. 치료자는 모든 전제ㆍ지식ㆍ권위ㆍ작용하고자 하는 의지 등을 포기하고, 치료자는 더 이상 치료하는 주체가 아니고 환자와의 공(共)체험자이다. 불교에서는 보살의 자비행에서 엿볼 수 있다.

셋째, 문제나 병보다도 인간이나 건강을 일차적으로 보고 다룬다. 본성에 대한 통찰이 없는 정신치료가 병리중심의 치료모형이라면, 본성통찰에 근거한 치료는 건강중심의 치료모형이다. 달리 말하면, 전자가 병이란 부분을 그 자체로서 다루는 지식중심의 치료라면, 후자는 병이란 부분을 인간 혹은 정신의 전체성 속에서 다루는 지혜중심의 치료다. 융심리학적 정신치료의 경우, 정신병리현상은 정신의 전체성 속에서 이해된다. 이를테면 노이로제는 원인이야 어떻든 간에 정신의 전일성에서 일탈한 현상이다. 그래서 치료도 전일성의 회복이다. 불교에서도 깨달음을 중심으로, 모든 번뇌망상은 깨닫지 못한데서 생겨난다. 참선을 비롯한 모든 불교적 수행은 긍정적인 힘을 동원하여 부정적인 번뇌망상을 타파한다. 이와 같이 문제나 병적인 면보다 인간이나 건강한 면을 일차적으로 보는 것은 근본을 먼저 보는 것으로서 실제적이고 근치(根治)적이다. 본말(本末)을 알고하는 치료다.

마지막으로, 모든 이론과 기법에 대해 개방적이다. 어떤 이론과 기법도 전체로서 존재하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나 실제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다룰 수 없다. 어떤 관점에서 어느 일면을 이해하고 다룰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많은 이론과 기법이 있다. 그런데 인간의 본성에 대한 통찰, 즉 전일성에 대한 통찰이 없을 때는 그 이론과 기법들 간에는 갈등이 생기고 서로 우위를 내세우기 쉽다.

그러나 그런 통찰이 있을 때는 그 이론과 기법들은 상호보완적인 관계 속에서 조화를 이루게 된다. 이론과 기법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론과 기법은 어디까지나 현실과 실제를 다루는 방편에 불과하다. 방편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 그래서 융은 가능한 많은 이론과 기법을 습득할 것을 권고하면서, 이론과 기법을 잊으라고 했다. 이는 원효의 입파(立破)와 여탈(與奪)의 원융무애(圓融無礙)의 논리에서 잘 드러난다. 즉, 이론과 기법을 세우고 허락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것을 부수어 버리고 빼앗아 버리는 것이다. 이런 역설의 논리, 즉 전일성의 논리나 중도의 논리 속에서 모든 이론과 기법은 살아서 내담자의 그 때 그 때의 상황에 따라 적절하고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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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맺으면서, ‘자신 밖에서는 구할 것이 없고, 자기 밖에는 믿을 데가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환기하고 싶다. 불교의 깨달음의 길이나 융심리학의 자기실현의 길은 석가와 융의 고행의 길, 고독의 길이다. 석가는 6년의 고독한 고행을 통해 중도를 정등각 하였고, 융은 1913년 프로이트와 결별한 후 6년간 일체 외부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자신의 무의식을 관찰ㆍ체험한 결과 정신의 전일성을 체득하고 그의 기본 이론인 원형이론을 싹 틔웠다.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그들의 사상이나 이론이기 보다는 그들이 걸어갔던, 자신의 내면으로 향한 고독한 고행의 길을 스스로 체험하는 일이다. 그렇지 않고 그들의 사상이나 이론에 매달린다면, 그것은 자신 밖에서 구하는 외도(外道)다. 그들의 사상이나 이론의 존재 의의는 그들이 체험한 것처럼, 우리도 체험하라고 가리켜 보이고 있는데 있다.

 

이죽내
경북대 의과대학 졸업. 신경정신과 전문의. 스위스 취리히 대학 철학 제1부 심리학 전공 졸업.철학 박사 . 스위스 취리히 융 연구소 수료.(융학파 분석가), 스위스 취리히 현존재분석 연구소 수료.(현존재 분석가),경북대 의과대학 정신의학 교수. 현재, 경북대 의과대학 명예교수, 대구 수성 중동병원 진료고문, 한국 융연구원 상임교수 및 교육 분석가 . 저서로 <융과 상징적 이해 : C. G Jung und Symbolisches Verstehen,  Peter Lang> ,  <융심리학과 동양사상, 하나 의학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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