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인간화 과정에 비춰본 근본불교

하나조노 대학에서 불교학을 전공하는 저자 사사키 시즈카 교수는 ‘선과 생명과학’이라는 연속 강연회를 주최하면서, 싯다르타 부처님 시대의 불교와 과학이 갖는 정합성에 놀랐다고 고백한다. 우주의 진리를 자신의 힘으로 탐구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과학자나 수행자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수행자는 세계의 본질,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제거 방법을 탐구하는 반면 과학자는 외부 세계의 진리를 탐구하기 때문에, 그들이 추구하는 내용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저자는 그 둘 사이에 공통의 방향성이 있다고 본다.

이 책을 일관하는 저자의 논지는 과학의 다양한 분야에서 ‘인간화’가 일어나면서 신의 관점은 점차 사라진다는 것이다. 논리적 사고와 관측에 근거하여 신의 관점을 포기하는 과정을 과학의 발달로 파악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 고유의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스스로를 자각하면서 절대자를 상정하지 않고 법칙성만을 추구해 나가는 것이 불교라고 생각한다.

과학이 추구하는 바는 우리의 직감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것이라고 저자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 불가사의함은 논리적 사고와 합리적 판단에 의해 야기된 것일 뿐 신비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정치한 수학적 사고와 체계적인 관측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저자는 과학이 발전해 온 과정과 신을 상정하지 않는 불교가 발생한 역사를 추적하면서 발전 방향의 동일성을 찾고자 한다. 불교가 발생한 역사를 먼저 살펴보고, 과학의 발전에 대해 논의해 보자.

근본불교

인도에는 기원전 3000년경에 인더스문명이 번성하였으나, 기원전 1500년경부터 아리아인이 침입하면서 새로운 문화를 전파했다. 이 과정에서 원주민이 피지배계층으로 전락하면서 철저하게 혈통을 중시하는 신분차별사회인 바라문주의 사회가 형성됐다. 그리고 신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인 바라문은 바라문교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기원전 6세기경 농경의 발달로 부를 축적한 계층이 생기면서 신분제 사회에 대한 불만이 쌓이면서 바라문교를 부정하는 종교운동이 나타났다. 이들은 혈통에 의해 신분이 결정된다는 바라문교와 달리,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사람의 가치가 결정된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스스로의 노력으로 최상의 행복을 얻고자 수행하는 사람, 즉 ‘노력하는 사람’을 ‘사문’이라고 했다. 당시의 인도사회에는 다양한 사문 종교가 존재했다. 그들의 수행 방법은 고행과 명상의 두 방식으로 크게 나뉘는데, 불교는 명상만으로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종교였다고 저자는 이해한다.

불교는 절대자의 존재를 상정하지 않고 법칙성의 세계만으로도 최고의 자기실현이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므로 기적이나 계시 등의 신비적인 장치를 동원하지 않는다. 불교가 세계를 인과법칙으로 이해하려는 태도는 불교 문헌에 일관되게 흐르는 기본적인 자세이며, 근본불교의 문헌에서는 무언가 초월적인 존재에 의존한다는 생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불교는 초월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현상세계를 법칙성으로 설명한다. 경전에는 범천이나 제석천 등이 등장하지만, 이들은 세계를 관장하는 초월자가 아니라 우리보다 좀 나은 불교신자다. 심지어 석존도 세계의 지배자가 아니라 세계의 법칙을 스스로 깨달아 진정한 평안을 얻었고 그런 평안을 얻는 방법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줘 우리로 하여금 깨달음과 평안을 얻을 수 있게 해주는 스승이다.

이처럼 초월자를 인정하지 않고 법칙성만으로 세계를 이해하려는 불교의 태도는 현대의 과학적 세계관과 일치하는 점이 있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이런 의도에서 저자는 물리학, 진화생물학, 수학의 역사를 논의한다. 불교와 과학은 생각에 깊이 잠겨있는 명상상태에서 진리를 깨닫는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으며, 불교와 과학이 만나는 접점에는 인간화의 개념이 존재한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물리학

저자는 야마모토 요시다가의 《자력과 중력의 발견》을 인용하면서, 근대과학의 초창기에는 과학이 중세의 마술적 사고와 혼재돼 있었다고 이해한다. 일례로 길버트는 자기력이 신의 지성에 의해 발생하는 본원적 영력(靈力)이라고 생각했으며, 거대한 자석인 지구는 자기력 때문에 자전과 공전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를 받아들여, 케플러도 천체의 자기력을 중력이라고 해석했다.

데카르트는 이런 신비한 힘을 배격하고, 시계의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기계론적 우주를 상상했다. 신비로운 불합리성을 거부하고 합리적인 세계를 구성하려는 것이었다. 길버트와 케플러의 신비로운 원거리 작용력과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우주관은 뉴턴에 의해 절충됐다. 뉴턴은 중력의 원천을 신이라고 생각하는 한계를 드러내기는 했지만, 중력이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수학이라는 언어를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관측 결과를 잘 설명하는 역학체계를 구축했다. 이렇게 기계론적 세계의 동력학을 완벽하게 기술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세계의 모든 물리현상을 일괄적이고 정량적으로 기술할 수 있었다.

저자는 이를 머릿속에서 만들어 낸 직감과 현실에서 얻은 정보가 경합하여, 직감이 패배하고 정보가 승리하는 과정이라고 본다. 세계는 이래야 한다는 머리가 만들어낸 이상세계가 현실에서 관찰된 정보에 의해 수정되는 이 과정을 저자는 과학의 방향성이라고 파악한다.

아인슈타인은 인간의 관점에서 보는 우주의 모습을 수학적으로 기술한 최초의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상대론이 기술하는 것은 관측자가 보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특수상대성 이론에서는 운동계의 상태에 따라 시간과 공간이 수축한다. 이는 우리의 직감과 상반되는 설명이지만, 관측결과이기 때문에 거부하고 싶어도 받아들여야 한다. 저자는 이를 직감이 패배하고 정보가 승리하는 과정, 신의 관점이 인간의 관점으로 변하는 과정이라고 본다.

이 과정을 ‘과학의 인간화’라고 한다. 신의 관점이라고 해서 정말로 신을 상정한다는 것이 아니라, 신의 세계는 이래야만 한다는 견해 혹은 뇌의 직감이 만들어 낸 신의 완전한 세계를 뜻한다. 이러한 신의 완전한 세계가 현실에 대한 관찰로 점차 수정되는 과정이 ‘과학의 인간화’다.

뉴턴이 도입한 원격력으로서 중력이라는 불가사의한 개념은 일반상대론에 의해 부정된다. 시공간이 복잡하게 뒤틀려 있기 때문에 중력이 발생한다는 설명이 제시됐다. 시공간의 뒤틀림이라는 직감으로는 받아들이기 아주 곤란한 개념이 제시됐지만, 다시 한 번 직감은 패배하고 외부 세계에 대한 정보가 승리하는 과정이 전개됐다.

이런 상대론도 외부 세계의 객관성 혹은 실재성(reality)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는다. 여기서 객관성이란 외부세계의 현상은 인식 주체와 상관없이 발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상이 발생하는 외부세계와 이를 관측하는 인식 주체는 명확히 구분돼 있기 때문에, 인식주체인 내가 밤하늘을 보든 안 보든 상관없이 관측대상인 달은 떠 있어야 한다는 관점이다. 이렇게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외부세계라는 개념은 양자역학에 의해 부정된다.

플랑크의 양자가설과 아인슈타인의 광량자설은 전자기파인 빛이 입자처럼 행동하는 상황을 설명한다. 파동이라고 이해했던 빛은 때때로 입자처럼 행동하고, 입자라고 이해했던 전자는 때때로 파동처럼 행동하는데, 이를 이중성(duality)이라고 한다. 양자역학에서는 모든 입자가 이중성을 갖는데, 이중성을 포함하여 양자역학에서 관측에 관한 여러 논의는 우리의 직감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들이다.

상대론은 우리의 직감과 달리 시공간이 상대적이며, 더구나 질량에 의해 휘어져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양자역학에 오면 다시 이중성이나 확률론, 파동의 수축 등 우리의 직감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이 전개되지만, 이 또한 실험과 관측에 의해 확인되는 현실 세계의 모습이므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다시 직감이 그린 세계가 관측에 의해 붕괴되면서, 과학의 인간화가 진행된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진화생물학

진화생물학이 정립되기까지의 과정에서도 과학의 인간화가 나타난다. 박물학자 큐비에는 현존하지 않는 생명체의 화석이 발견되는 이유는 천재지변이 여러 차례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로 인해 대부분의 생명종이 절멸하고 나면 그때마다 신이 새로운 생명종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라마르크는 단순한 형태로 창조된 최초의 생명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복잡한 형태로 진화한다고 보았다. 생명을 보다 복잡하게 하는 외부의 불가사의한 힘과 스스로를 보다 좋게 변화시키려는 생명체의 적극적이고 절실한 요구가 진화의 원동력이라고 봤다. 라마르크는 생명 진화의 원동력으로 신의 힘을 빌리기도 했지만, 인간 역시 진화의 관점으로 보면 동물의 한 종이라고 함으로써 신의 관점을 배제하기도 했다.

찰스 다윈은 자연 관찰로 모은 광대한 정보와 폭넓은 사고력과 신의 관점을 배격하려는 강인한 저항력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는 진화의 동인을 변이와 자연도태로 파악함으로써 신이라는 신비적인 존재 없이 기계론적으로 진화를 설명했다. 유전학이 생겨나기 이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방향성이 없는 변이가 자연도태에 의해 선별된다고 봄으로써 진화의 원동력을 밝혀내고 종의 분화를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럼으로써 인간을 특별한 생명체로 간주하는 기독교적 생명관에 일격을 가하면서 진화생물학에서 신을 추방하여, 과학의 인간화에 이르는 여러 단계를 한 번에 달성할 수 있었다.

수학

직감적이고 무의식적으로 형성된 과학이론이 외부 정보를 기반으로 하는 이론에 의해 변화되는 과정을 과학의 인간화라고 한다면, 수학에서도 무리수, 복소수, 초한수 등의 개념이 도입되면서 인간화의 과정이 있었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신비주의를 신봉했던 피타고라스학파에게 무리수의 존재는 신성한 수학이 오염되는 심각한 위협이었다. 완전한 조화를 보여주는 유리수의 세계에 무리수가 등장하는 것은 수에 대한 신의 관점이 논리적 사고로 부정되는 수학의 인간화의 과정이라고 저자는 판단한다. 이처럼 직감이 상상한 세계가 논리적 사고에 의해 붕괴되는 수학의 인간화 과정은 허수와 초한수가 도입되면서도 비슷하게 전개됐다.

인간은 외부의 자극을 받아 인식하고 사고하고 종합하고 체계화한다. 따라서 과학에는 인간 특유의 인식과 인간의 사고와 인간의 종합 방식이 내포돼 있다. 저자는 우주공간, 역학, 공간과 시간, 수와 양 등의 개념에도 인간 특유의 방식이 내포돼 있다고 본다. 이처럼 인간은 외부세계의 정보를 인간 특유의 방식으로 받아들여 독자적인 세계상을 구축하지만, 그것이 인간에게만 통용되는 세계관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외부 세계가 실제로 그런 양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자각한 푸앵카레는 수학이 인간 존재를 넘어선 보편적 진리가 아니라 인간이 독자적인 규칙을 사용하여 만든 특수한 구조 체계라고 봤다.

그런데 그 체계 안에는 모순이 없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저자는 칸토의 집합론과 괴델의 정리를 논의한다. 칸토의 집합론을 사용하여 완벽한 수학의 체계를 구축할 수 있다고 믿었던 힐베르트와 달리, 푸앵카레는 집합론이 자기 자신을 다루는 데 있어서 반드시 모순을 야기한다고 생각했다. 엄밀한 증명과 명확한 형태로 그 모순을 지적한 것이 괴델의 정리라고 저자는 소개한다. 괴델의 정리에 의해 수학 체계가 지닌 한계가 명확해졌으므로, 수학마저도 본질적으로 인간 존재라는 면에서 제한을 받는 특수한 체계라는 점을 자각해야 한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비판

저자는 과학의 인간화 과정과 바라문교의 배경에서 불교가 생겨나는 과정을 유사한 과정이라고 파악한다. 진화생물학과 관련하여 이런 관점을 갖는 데에는 이의가 없지만, 수학이나 물리학에 경우에는 신비로운 개념을 설령 빌려온다 하더라도 신이 이론 체계 내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런 관점이 정당한지에 대해 의심이 든다.

물리학에서 인간화는 신의 존재 유무와는 상관없이, ‘선험적으로 정의된 세계를 상정’하려는 입장에서 ‘실험과 관측을 통해 경험적으로 관측된 세계를 기술’하려는 입장으로의 태도 변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신비로운 신의 개입을 상정한다 하더라도 이는 부수적인 장치일 뿐이지만, 바라문교의 시대적 배경에서 근본불교와 같은 사문종교가 탄생하는 과정에서 신의 존재 여부는 결정적인 요소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근본불교의 고찰 영역이 정신세계에 한정된다고 생각한다.(p.249) 그러나 무명연기와 탐애연기에 의해 고뇌가 발생한다는 12연기에는 육처, 촉, 유, 생, 노사 등 정신세계라고만 보기는 어려운 항이 존재한다. 근본불교 경전에 나오는 부처님의 가르침에도 우리 주변의 사물에 대한 설명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궁극적인 목표는 우리 마음의 해탈과 열반이지만, 이를 위해서도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을 고찰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 불교라고 생각한다.

저자의 주장과 같이 부파불교의 시대를 거쳐 대승불교가 성립되면서 수행에서 구원으로, 자력에서 타력으로 불교의 모습이 변했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며 그 과정에서 석존이 설파하였던 가르침의 일부가 훼손됐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하더라도, 부처를 신격화한 것이 대승불교의 전부라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대승불교의 출현으로 석존의 의도가 보다 명확해지면서 불교의 내용이 풍부해졌다는 것도 또한 인정해야 한다. 일례로, 중국 선종의 역사는 근본불교에서 부처님이 보여줬던 치열한 수행정신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공과 화엄 등 대승불교의 핵심사상은 부처의 신격화나 구원이나 타력 등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며, 이를 수용한다면 불교와 과학에 대한 논의가 보다 풍부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2, 3]

책을 읽으며 이런 아쉬움들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대승불교의 영향권에 있는 우리에게 근본불교의 가치를 다시 한 번 조망해 보게 하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더구나, 물리학과 진화생물학과 수학을 아우르면서 그 전체의 발전과정을 단일한 축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탁월한 관점을 제시해 주는 책이기도 하다. ■

 

양형진 / 고려대 물리학과 교수. 서울대 물리학과 졸업, 미국 인디애나대학 물리학 박사. 주요 논문으로 〈불교와 과학에서 평등과 차별, 중도(中道)〉 〈물리학을 통해 보는 불교의 중심사상〉 등이 있고, 저서로 《과학으로 보는 불교》 《산하대지가 참빛이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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