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인과 무아의 동이(同異)를 읽다

1.
지금부터 2,500여 년 전 동양 인도에서 일어난 불교사상과 19세기 후반 서양 독일에서 등장한 니체의 철학사상을 함께 비교한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닐 것이다. 동서와 고금의 시공간적 간격을 넘어 두 사상 간의 유사성 내지 차이성을 밝힐 수는 있지만, 어떤 관점에서 그런 비교를 할 것인지, 그러한 비교의 관점의 정당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 나아가 문화와 역사 등 그 배경이 서로 다른 두 사상이 보여주는 유사성 내지 차이성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등 함께 생각해야만 할 문제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박찬국 교수의 《니체와 불교》(씨아이알, 2014)는 이러한 문제들을 충분히 고려하고 쓰인 책이라고 생각된다. 니체와 불교를 함께 비교 대상으로 놓고 고찰한 연구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적지 않다. 저자는 기존 연구에서 둘의 차이점으로 논의되었던 것들도 다른 문맥에서 보면 별반 다르지 않고, 둘의 유사점으로 논의되었던 것들도 또 다른 문맥에서 보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밝힌다. 이렇게 다른 것 같으면서도 유사하고, 유사한 것 같으면서도 다른 것을 여러 장에 걸쳐 논의하되 저자가 궁극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니체와 불교가 생각하는 이상적 인간상이 근본적으로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어느 인간상이 더 진실을 반영한 참된 인간상인가? 저자는 독자에게 결국 이 물음을 던지고 싶어 하는 것 같다.

2.
니체와 불교에 대한 기존의 비교연구는 대부분 둘의 공통점을 밝히는 데서 출발한다. 저자 또한 Ⅱ장에서 우선 니체와 불교 둘 간의 기본적 공통점을 비이원론적 입장(창조자의 부정, 심신이원론의 부정)과 문제의식(오류나 착각으로 인한 삶의 고통)으로 설명한다. 쇼펜하우어를 통해서 불교를 알게 된 니체는 이 지점까지는 불교와 의견을 같이했을 것이며, 니체에 공감하는 연구자들 또한 여기에서 공통점을 발견한다. 이어 Ⅲ장에서 저자는 니체의 불교비판을 통해 드러나는 니체와 불교의 차이를 부각시킨다. 니체가 불교를 ‘수동적 니힐리즘’으로, 자신의 관점을 ‘능동적 니힐리즘’으로 규정하면서 둘을 대비시켰기 때문이다. 니체에 따르면 불교는 생멸하는 현실의 고통에 좌절하여 내적 황홀경으로 도피하는 염세주의에 지나지 않고, 위대한 고통을 감수하고 현실을 긍정하는 적극성을 띠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니체의 관점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다시 니체를 따라 니체와 불교의 차이점에 주목한다. 그러나 저자는 Ⅳ장에서 그러한 니체의 불교해석이 정당하지 못하다고 논한다. 불교 또한 위대한 고통을 감수하며, 집착으로 왜곡된 현실은 부정하지만 왜곡을 벗은 참 현실에 대해서는 부정적이 아니었다고 밝힘으로써 니체와 불교가 니체가 생각하듯 그렇게 크게 다른 것이 아니라고 논한다. 그렇다면 니체와 불교 사상이 결국 같다는 말인가?
저자는 Ⅴ장에서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니체와 불교의 근본적 차이는 그 각각이 지향하는 사회사상과 인간상 내지 덕(德)의 차이에 있다고 주장한다.

니체는 이상사회를 힘의 경쟁과 투쟁이 끊이지 않는 귀족주의적 위계사회로 보았다면, 불교는 이상사회를 상호존중과 자비가 넘치고 사해동포주의가 실현된 평등사회로 보았다. 니체는 분별적 사유와 강함을 지향하는 귀족적 덕을 강조한 반면, 불교는 평정한 마음으로 분별을 넘어서는 자비의 덕을 강조하는 것이 근본적 차이가 된다. 이러한 차이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저자는 Ⅵ장에서 니체의 영원회귀사상과 불교의 열반 내지 깨달음의 사상, 니체의 초인 또는 아이의 정신과 불교의 무아(無我) 또는 무심(無心)의 정신이 서로 상통하는 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둘이 지향하는 인간상이 서로 다르므로 결코 동일시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니체의 초인의 정신은 자신의 강함을 의식하고 그것에 긍지를 갖는 확대된 자아의식인 데 반해, 불교의 무아의 정신은 그러한 분별적 자아의식을 벗은 정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간상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저자는 Ⅶ장에서 이 문제를 다룬다. 니체는 서양전통의 의식철학 내지 주체철학을 비판하면서 의식보다 더 깊은 실재인 욕망과 의지의 힘을 논하였다. 반면 불교는 우리의 의식보다 더 깊은 실재인 말나식(末那識)과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논하되 궁극적으로는 수행을 통해 말라식의 집착을 벗어 전식득지(轉識得智)를 이룸으로써 번뇌가 소멸한 청정심(淸淨心)을 회복할 것을 논한다. 결국 자기극복을 통해 도달된 이상적 자아를 니체는 강한 의지를 갖고 경쟁하는 힘의 소유자로 간주한 데 반해, 불교는 일체 분별과 아상(我相)을 벗어 세상과 하나 된 자비의 마음으로 간주한다. 니체는 경쟁심을 생명력과 창조력의 원천으로 보며 이로부터 문화가 나온다고 긍정하는 데 반해, 불교는 이러한 분별과 경쟁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근본적 차이를 통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Ⅷ장에서 저자는 프롬과 니체의 종교관 내지 인간관을 대비시킨다. 프롬에게는 부처와 예수가 이상적 인간상인 반면, 니체에게 부처와 예수는 힘에의 의지가 약한 퇴폐적 정신에 지나지 않는다. 프롬은 자비와 사랑으로 전 인류를 나와 하나로 느끼는 신비체험 또는 종교적 황홀경을 의미 있는 체험으로 긍정한 데 반해, 니체는 이런 체험을 강함을 상실한 자의 패배의식, 프로이트가 말하듯 인간의 개성과 자각이 소실된 퇴행으로 폄하한다. 이는 결국 인간 안에 내재된 무한한 잠재력, 신성(神性) 내지 하느님 마음 또는 불성(佛性)을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마지막 Ⅸ장에서 저자는 대립과 투쟁의 현실사회를 보면 니체의 인간상이 더 타당한 것 같지만, 인류의 정신적 진화를 가능하게 한 것은 그래도 불교를 포함한 차축시대 성인들이 제시한 이상적 인간상 때문이 아니겠는가 하고 반문한다. 우리는 둘 중 과연 어느 인간상을 우리의 지향점으로 선택할 것인가? 결단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3.
오늘날 서양철학은 모더니즘을 비판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주가 되며, 포스트모더니즘의 원조는 흔히 니체로 간주된다. 니체는 인간의 본질이 근대가 생각하듯 이성이나 절대정신이 아니라 이성보다 더 심층에서 작용하는 의지의 힘, 강함을 지향하는 의지력이라는 것을 밝힘으로써 근대의 이성 중심의 자아를 부정하고 해체하였으며, 이로부터 ‘자아의 해체’ ‘주체의 죽음’ ‘신의 죽음’ 등 포스트모더니즘의 모토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서양 포스트모던적 해체의 정신에 심취한 연구자들은 그 관점에서 동양의 불교에 접근하여 동서를 비교하는 연구 성과를 내놓다. 불교에서 자아를 오온(五蘊)으로 해체하여 자아의 실체성을 부정하는 ‘무아론’과 만물의 상호의존성을 강조하는 ‘연기론(緣起論)’은 포스트모던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니체와 불교 간에 보이는 이러한 유사성은 피상적인 형식적 유사성일 뿐이고, 자아의 해체 전후 문맥에 전제된 인간관이 근본적으로 서로 다르다는 것을 밝힌 것이 본 책의 특징이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어찌 보면 니체식 인간상은 오늘날 우리 정신과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전형적인 과학적(진화론적) 인간상, 우리의 상식적인 우주관 내지 역사관과 상응하는 인간상일 것이다. 남과 비교하고 경쟁하며 대립하고 투쟁하는 것이 바로 삶이고, 그 투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성공적 삶이라고 여기는 현대적 인간관이 그것이다. 불교가 제시하는 인간관은 그러한 인간관과 근본적으로 상충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제시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의미 있는 책이라고 생각된다.

4.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옥에 티를 찾아보자면, 다음과 같은 것들을 말할 수 있겠다. 

1)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책 제목에서부터 드러나는 비교연구 대상의 비대칭성이다. 니체라는 한 명의 서양철학자와 불교를 통째로 비교하겠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서양철학은 다양한 스펙트럼의 사상 변화가 있어 세분화된 논의가 필요한 데 반해, 동양사상인 불교는 하나로 뭉뚱그려 논해도 된다는 선입견이 작동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사실 불교는 서양철학사 전체와 비교될 만한 다양성, 그보다 더 복합적인 깊이와 폭을 갖고 있다. 초기불교, 부파불교, 대승불교가 있고, 대승에서만도 인도의 중관사상, 유식사상, 여래장사상, 중국의 화엄, 천태, 선(禪) 등이 있다. 사상 흐름의 변천이 있기에 중국에서 교상판석을 행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저자가 보기에 불교의 사상 흐름 전체를 하나로 묶을 만한 핵심사상이 있어 그것을 ‘불교’로 총칭한 것이라면, 저자는 우선 그것이 무엇인지를 밝혔어야 할 것이다.

저자는 니체의 실체비판과 연관해서는 초기불교의 오취온(五趣蘊)과 무아(無我, 78쪽 이하)를 언급하고, 니체 인간관과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불성(佛性, 167쪽), 아뢰야식(272쪽), 여래장(如來藏, 281쪽), 진아(眞我, 282쪽), 자아의 무한한 잠재적 가능성(285쪽) 등을 언급한다. 이러한 자유자재한 취사선택에 앞서 초기불교의 무아론에서부터 여래장사상과 선에 이르기까지 하나로 관통하는 불교적 인간관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분명히 제시해야만, 니체와 불교의 인간관 대비가 좀 더 확실하게 부각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2) 저자는 니체와 불교의 인간 이해의 공통점을 의식보다 더 심층의 마음 활동의 발견이라고 논하면서, 그것을 유식불교에서는 ‘말나식과 아뢰야식’으로, 니체에서는 ‘전체적인 힘에의 의지 상태인 몸’으로 각각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의 의식은 두 번의 왜곡을 거친다. 즉 아뢰야식에 축적된 과거의 업과 그것에 대한 말나식의 애착에 의해서 왜곡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여러 가지 정보들을 의식을 통해서 종합하고 평가하지만 이러한 종합과 평가는 순수하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아뢰야식과 말나식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실재 그 자체를 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뢰야식과 아견과 아집과 아만 등에 의해서 왜곡된 실재를 본다.”(275쪽) “우리의 의식은 니체가 말하는 이러한 몸에 의해서 규정되어 있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사건들 중의 극소수만이, 아니 사건의 아주 작은 부분들만이 우리의 의식 속에 들어온다.

그러나 의식은 이러한 작은 부분들이 그것의 근저에 있는 거대한 맥락과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면서 이 작은 부분이 자신의 객관적인 사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집착한다.”(276쪽). 이 설명에 따르면 유식에서는 의식보다 더 심층 마음이 의식을 왜곡시키는 역할을 할 뿐이며 그러한 심층 마음에 의한 왜곡을 벗어나야 비로소 참된 실재를 보게 되는 데 반해, 니체에서는 의식보다 더 심층의 의지(몸)가 의식보다 더 거대한 맥락을 인지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유식에서 심층 마음의 활동을 이렇게 규정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불교에서 심층 마음은 실재의 인식을 왜곡시키는 것이 아니라, 실재 자체를 형성하는 것이 아닌가? 심층 마음을 떠난 실재 자체라는 것이 따로 있는가? 저자의 논지가 불교와 니체의 인간관이 근본적으로 서로 다르다는 것을 밝히는 것에 있는 만큼 불교의 인간관을 보다 더 철저하게 해명하는 것이 필요했으리라고 본다. 

3) 저자는 전체 불교사를 관통하는 하나의 인간관을 찾아 그러한 불교적 인간관을 니체의 인간관과 비교하고 있다. 여기서 한가지 욕심을 더 낸다면, 불교적 인간관을 단순히 한 명의 서양철학자 니체와만 비교하지 말고 서양철학 전반의 인간관과 비교하여 논의해본다면 어떨까? 그런 식으로 동양적 인간관과 서양적 인간관을 전반적으로 대비시켜 논의한다면, 그것은 동서 비교철학에서뿐 아니라, 동서양의 문화나 역사를 이해함에서도 의미 있는 연구 성과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

 

한자경 /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동 대학원 졸업. 독일 프라이브르크대학에서 박사학위(칸트철학),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박사학위(불교철학) 취득. 주요 저서로 《칸트와 초월철학》 《자아의 연구》 《유식무경》 《대승기신론 강해》 등이 있고, 역서로 《전체 지식론의 기초》 《자연철학의 이념》 등이 있다.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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