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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허균에게 불교는 무엇이었나 / 김문갑
[58호] 2014년 06월 01일 (일) 김문갑 meastree@naver.com

1. 문제 제기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허균(許筠, 1569~1618)은 기피인물이었다. 대역죄인으로 능지처참을 당한 인물. 허균은 사람이 아닌 짐승이었다. 조선 최대의 금기어가 되어 버린 그의 이름은 대한민국에서 되살아난다. 결코 상종해서는 안 될 인간 허균은 흠모의 대상이 되었다. 봉건적 신분질서를 비판하며 반상과 적서의 차별을 없애자고 주장한 사람. 그는 서얼들에게는 격의 없는 벗이 되었고, 천민 기생과도 우정을 맺었다. 어느덧 허균은 이상사회를 꿈꾼 혁명가로, 체제에 맞선 이단아로, 시대의 풍운아로 우리 곁에 와 있었다. 하지만 허균을 형용하는 이런 용어들이 과연 사실에 부합하는 것일까?
허균에게 붙는 모든 수식어는 특정한 이미지를 그려낸다. 예컨대 ‘유교반도(儒敎叛徒) 허균’이라고 하면 허균은 유교에 맞선 투사가 된다. 그렇다면 허균은 과연 유교에 맞섰을까? 어쩌면 허균은 그를 보는 사람의 시선대로 보였는지 모른다. 허균 본인과는 아무 상관 없이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보아 왔는지 모른다. 그리하여 조선시대에 허균은 금수만도 못한 요물이 되어야만 했고,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에서는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혁명가가 되는 건 아닐까?
이 모든 이미지는 허균의 실상과는 거리가 있다. 그렇다고 하여 민낯 그대로의 모습이 반드시 중요한 것만도 아니다. 오히려 한 이미지가 형성되는 과정을 추적함으로써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삶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허균과 불교의 관계를 살펴보는 글이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허균이 누구인지가 규명되어야 할 것이다. 허균이 혁명을 꿈꾼 사람이었다면 불교가 그의 혁명사상에 미친 영향을 탐색해 봐야 한다. 그러나 만약 허균이 혁명가가 아니라면 혁명가로 보고 이해한 불교와의 관계는 거짓이 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먼저 허균의 정체성이 해명되고 그 바탕 위에 불교와의 관계가 바르게 정립될 수 있을 것이다.


2. 허균은 누구인가

1) 혁명가 허균
혁명가에겐 뜨거운 열정이 있다. 청 말의 사상가 담사동(譚嗣同, 1865~1898)은 혁명에 희생이 필요하다면 자신이 앞장서겠다며 도망가지 않고 잡혀 죽는다. 이런 열정은 순수함과 함께할 때 더 강렬해진다. 순수하기 때문에 오직 자신이 믿는 바를 위해 몸을 던지는 것이다. 강유위(康有爲, 1858~1927)가 젊었을 때는 진실로 순수했다. 그의 순수한 열정은 인류는 물론 짐승들도 평등한 세계를 만들겠다는 열정으로 나타난다. 어린애와도 같은 순수함이다. 가족제도를 폐지하고 피부색 따지지 말고 서로 섞이자는 주장은 다 큰 어른의 눈으로 보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혁명가의 조건에는 이념성이 필수이다. 신분적 차별 없는 평등사회는 매우 훌륭한 이념이 될 수 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보편적인 근거가 제시되어야 한다. 즉 인간은 원래부터 평등한 존재로서 잘못된 제도에 의해 그 본래성이 억압되고 있음이 증명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평등사회를 향한 실천성이 더해지면 이념이 된다. 신분 차별을 비판하는 허균의 글은 〈유재론(遺才論)〉이 대표적인데, 여기에는 인간의 보편적 평등성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나, 평등사회를 구현코자 하는 강력한 행동지향성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서얼을 차별함으로써 국가가 부담하여야 하는 손실 등의 정책상의 오류가 주요한 지적사항이 되고 있다. 더구나 허균은 이런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서 실제 행동을 보여준 적이 거의 없다. 하다못해 서얼차대법을 폐지하자는 상소도 올라간 게 없다. 후대에 대역죄인의 글이라 하여 삭제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허균이 만약 혁명가적 이념과 열정으로 넘쳤다면 그는 시종일관 중앙의 정치무대에서 자신의 뜻을 실현하고자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허균은 언제나 지방관을 자청했다. 그가 중앙 정치무대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칠서의 옥을 계기로 이이첨에게 의지하면서부터이다. 그리고 그 후에 그가 보여준 모습은 혁명과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었다.

2) 이단아 허균
이가원 선생은 《유교반도(儒敎叛徒) 허균》에서, 허균은 당시 사회의 지나친 유교화 경향에 염증을 느끼고 반유교적인 성향을 띠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유교반도 소리를 듣는 명 말의 양명학자 이지(李贄, 1527~1602)와의 유사성에 주목하여 허균에게도 유교반도라는 명칭을 부여하고 있다. 최천건(崔天健, 1538~1617)에게 보낸 편지에서 허균은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저는 세상과 어긋나서 죽고 삶, 얻고 잃음을 마음속에 개의할 것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차차로 노자(老子)·불자(佛者)의 유를 따라 거기에 의탁하여 스스로 도피한 적이 오랜지라 저도 모르게 젖어들어 더욱 불경(佛經)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이 글만 놓고 보면 허균은 유교를 떠나 이단 속으로 들어간 것이 확실해 보인다. 하지만 같은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깊게 찾아내 연구하고 밑에 쌓인 온갖 것을 꿰뚫고 보니, 심성(心性)이 자연히 명료해져 마치 깨달음이 있는 듯하였습니다. 때때로 젊은 시절에 배웠던 사자(四子)·염락(濂洛)의 서(書)를 꺼내어 불교에서 심성(心性)에 대하여 말했던 곳과 비교하였습니다. 이동(異同)의 견해와 진위(眞僞)가 서로 한계 됨을 변석(辨析)하고 논변하니 제법 자신에게 얻어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서(著書)하여 그 의미를 밝혔는데, 이른바 영불(佞佛)이라고 했음은 반드시 이걸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사자(四子)는 사서(四書)를 말하고, 염락(濂洛)의 서는 염락관민(濂洛關閔), 즉 송(宋) 대 성리학자인 주돈이(周敦頤)·정호(程顥)·정이(程頤)·장재(張載)·주희(朱熹)의 책을 가리킨다. 허균은 도교와 불교를 선진 유교와 송 대 성리학과 비교하여 같은 점과 차이점, 그리고 진위와 한계를 밝혀 저술하였다는 것이다. 그 책이 어떤 건지 자세하지 않지만, 편지 내용대로라면 조선 사상계에 일대 획이 그어질 수도 있었겠다. 어찌 됐든 허균의 이 고백은 그가 도교와 불교를 유교적 관점에서 이해하였음을 나타낸다.
〈기달산(怾怛山)으로 돌아가는 이나옹(李懶翁)을 전송한 서(序)〉에서는 “이른바 불서의 성(性)을 논하고 심(心)을 논한 것은 비록 이치에 가깝다고 하지만 진실로 우리 유교와는 번번이 상반되는 것이고 그 환견(幻見)과 공설(空說)은 가지가지 천리(天理)에 위배되었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는 오히려 불교 이론을 비판하며 유학을 지키려는 호교적인 모습도 보인다. 그럼에도 허균을 이단아, 혹은 유교반도라고 하는 건 도교와 불교를 신봉하였다는 이유에서이다. 이는 탄핵의 사유가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사헌부의 탄핵에 대한 선조의 비답은 “예로부터 문장을 좋아하는 자는 혹 불경을 섭렵하였다”는 것이다.
세종에서 성종에 이르며 조선 전기의 성세를 이룬 김수온(金守溫)은 벼슬이 호조판서에까지 오르는데, 그는 현직에 있으면서 《석가보(釋迦譜)》를 증수하고 《금강경(金剛經)》 등의 번역에 참여하였으며, 〈원각사비명(圓覺寺碑銘)〉을 찬하였다. 그는 친형인 신미대사(信眉大師)와 함께 불교와 관계되는 많은 업적을 남긴다. 그렇다면 김수온이야말로 이단 중의 이단이며, 유교반도가 아니라 유교반왕(儒敎叛王)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조선에서도 손꼽히는 현신(賢臣) 중의 한 명으로 거론된다.
허균은 결코 이단아가 아니었다. 유교반도는 더더욱 아니다. 그는 시종일관 유학자였고, 유교적 질서 속에서 살고자 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이단아, 반도 등으로 불린다. 사실 이단아, 풍운아, 혁명가 등의 말이 품고 있는 의미는 저항과 자유의 이미지이다. 이런 이미지를 우리는 허균에게서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다만 우리의 느낌일 뿐이지 허균마저도 같이 느끼는 것은 아니다.


3. 허균을 찾아서

1) 화담 서경덕의 우주론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1489~1546)은 허균의 아버지 허엽(許曄, 1517~1580)의 스승이다. 율곡의 《석담일기(石潭日記)》에 다음과 같은 얘기가 전한다.

허엽이 매양 서경덕을 추존하여 가히 기자(箕子)의 도통을 이을 사람이라 하다가 이이(李珥)가 서경덕의 학문이 장횡거(張橫渠)한테서 나왔다고 논의했음을 듣고 이이를 책망하기를, “그대의 말이 이와 같은 것은 내가 깊이 근심한다. 이를테면, ‘서화담의 학문이 소옹(邵雍)·장재(張載)·정이(程頤)·주희(朱熹)를 겸하였다.’고 한다면 가할 것이다. 그대는 한 10여 년간을 독서에 전심한 뒤에라야 화담의 지위를 논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아마 이이가 독서를 오래 하면 할수록 더욱더 공(公)의 의견과는 다를 것이다.” 하였다. 이에 앞서 허엽이 이황(李滉)에게 말하기를 “화담은 횡거에 비할 만하오.” 하니, 이황이 말하기를 “화담의 저술 가운데 어느 글이 〈정몽(正蒙)〉에 비할 것이며 어느 것이 〈동서명(東西銘)〉에 비할 만한가?” 하니, 허엽이 그만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이때에 와서는 과장이 더욱 심하여 소옹·장재·정이·주희의 학문을 겸하였다고 하기에까지 이르니, 알지도 못하고 망언한다고 하겠다.

서경덕은 이이와 이황 양쪽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특히 이황은 “그 저술에 병통이 없는 말이 하나도 없다.”라는 극단적인 비난까지 쏟아내고 있다. 반면 허엽은 서경덕을 매우 존경하여 그를 북송의 성리학자는 물론 남송의 주희까지를 모두 포괄하는 철학자로 대하고 있다. 허균도 허엽의 서경덕에 대한 존경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보여주는 고사를 전하며, 서경덕을 증자(曾子)에 비견하고 있다. 이런 정황을 고려해 보면 허균에게 영향을 끼친 철학은 율곡학도 퇴계학도 아닌, 화담의 철학으로 여겨진다.
화담은 기(氣)의 취산(聚散), 즉 기가 모이면 만물이 되고, 흩어지면 태허로 돌아간다고 한다. 태허는 텅 비어 있는 무(無)가 아니라 기(氣)로 충만하여 있다. 취산 작용이 일어나기 이전의 고요함, 이를 담일청허(湛一淸虛)라고 하며 담일청허한 일기(一氣)를 선천(先天)이라고 본다. 이 선천으로부터 취산 작용을 통해 만물이 생성되었다가 다시 소멸하며 삼라만상을 이루게 된다. 이 삼라만상의 우주를 후천(後天)이라고 보았다. 그의 우주관은 선천에서 후천으로 다시 후천에서 선천으로, 모였다 흩어지곤 다시 모였다 흩어지는 순환론적 특징을 보인다.
여기에서 기가 모여 생성하였다가 흩어져 소멸하는 것은 선천의 충만한 기로 돌아가는 것이기에 무(無)로 사라지는 게 아니다. 즉 우주 내의 기의 총량은 변화가 없다. 존재로 화하였다가 다시 태허로 돌아가는 것이기에 화담은 죽음을 내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편안히 여겼다고 한다. 매우 장자적(莊子的)인 풍모가 그려지는 순간이다.
홀연 도약하고 열리는데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할 뿐이다. 스스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이(理)가 발휘된 때라고 한다.

어떻게 삼라만상의 생멸변화가 가능한가? 이 물음에 대해 서경덕은 홀연히 저절로 그렇게 된다고 말한다. 〈복기견천지지심설(復其見天地之心說)〉에서도 “홀연히 뛰어올라 스스로 그만둘 수 없는 묘(妙)”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어서 그렇게 하는 것일 뿐이지 다른 어떤 이유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이는 곧 그래야 하니까 그런 것이지 다른 데서 이유를 찾지 말라는 의미이다. 우주의 존재 이유를 철저하게 개체의 자율에 맡기고 있다. 개체 스스로의 요인에 의해 때가 되면 문득 꽃망울을 터뜨리다가 때가 되면 시들어 떨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경덕은 ‘기외무리(氣外無理)’, 즉 기 밖에 이(理)는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앞에서 제기했던 숙제 하나 풀고 가자. 허균은 천주교 신자인가? 답은 ‘아니다’이다. 서경덕의 우주관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우주 밖에 초월하여 존재하면서 우주의 온갖 변화를 주재하는 절대적 인격신과 같은 개념은 결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이 양자 사이에는 공통점이 전혀 없다. 그런데 어떻게 천주교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후세에 허균이 천주교 신자라는 기록을 남긴 사람들은 다만 천주교에 대한 반감을 대역죄인 허균과 결합시킨 것에 불과하다고 추론된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초월적 주재자와 같은 어떤 절대적 존재를 인정하는 철학이 있다면 그들은 화담의 우주론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사단은 이(理)가 발하여 기(氣)가 따르고, 칠정은 기(氣)가 발하여 이(理)가 타는 것입니다. 기가 따르지 않는 이는 나올 수가 없고, 이가 타지 않는 기는 곧 이욕(利慾)에 빠져서 금수(禽獸)가 되는 것이니, 이것은 바뀔 수 없는 확고한 이치입니다.

이황을 주리론적 이기이원론자로 만든 유명한 말이다. 본래 이는 스스로 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는 원리인데 원리가 어떻게 작동하는가? 원리는 다만 작용을 설명하는 도구이지 그 자체로 작용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주희도 이에서 발한다[發於理]고 하였지 직접적으로 이가 발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황은 직접 이가 발한다고 주장한다. 즉 이의 주재성을 전면에 내세운 것인데, 이게 가능한 경우는 실상 신적 섭리(攝理) 말고는 없다. 즉 꽃이 피고 새가 우는 이 모든 자연현상에는 어떤 초월적인 주재자의 섭리가 작용하고 있다는 우주관이다.
이는 논리적으로는 그 정당성을 증명할 수 없다. 결국 이황은 기대승의 반론에 매번 후퇴하고 만다. 하지만 끝내 양보하지 않은 것은 이가 발한다는 것, 즉 이의 주재성이었다. 이황이 이런 태도를 견지했던 이유는 질서를 바로잡으려는 의도에서였다. 거듭된 사화(士禍)는 이황으로 하여금 군자와 소인, 선과 악이 뒤섞여 무엇을 따르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도 모르게 되었다는 현실인식을 갖게 하였다. 그리하여 이황은 유교적 도덕질서를 바로 세우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기고 시비선악의 근원을 엄격히 구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상은 결국 도덕이라는 사회규범에 인간의 본성을 종속시키고, 자유에 대한 통제를 정당화하고 말았다. 주희의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제거하라[存天理去人欲]”는 명령은 조선의 지배이념으로 정언명령이 되고 말았다. 주자학에서 욕망은 제거 대상이다. 욕망을 통제하지 못하는 인간은 금수와 다를 게 없다. 이런 억압적인 질서체제는 천리, 즉 하늘의 이치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다. 인간의 행동을 통제하고 만물의 변화를 주재하는 이는 이 현상세계와는 결코 섞이지 않는다. 이는 세계를 초월해 존재하는 것이다.
반면 화담에게서 하늘은 단지 자연일 뿐이다. 이 내재적 원리는 다만 마지못해 변화하는 일체의 변화상을 설명하기 위한 억지 이름이다. 불교로 말하면 가명(假名)이다.

有此因緣故   이 인연 있어                 
則有此法生   이 법이 생하고               
無別有作者   따로 작자 있는 것이 아니나니 
是我之所說   이것이 내가 설하는 바이니라  

인연은 인연의 당사자들이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법이 생멸한다. 《능가경(楞伽經)》의 이 구절 또한 개체적 자율성에 따라 인연이 맺어지고 법이 생하는 우주를 펼쳐 보인다. 결국 생성소멸, 일체의 변화상은 오직 개체 하나하나의 내적 자율성에 의한 것이다. 개체적 자율성을 억압하는 그 어떤 외재적인 주재자는 인정되지 않는다. 이런 특성 때문에 화담은 어쩌면 유교적 문명질서를 세우려 했던 조선의 사림들 모두에게서 배척되었는지 모른다.
이황에 대해 허균은 거의 언급하고 있지 않다. 율곡에 대해서는 비교적 후한 평가를 한다. 그렇더라도 화담에게 보내는 존경에 비할 바는 아니다. 화담철학의 개체적 자율성은 허균의 자유로운 영혼을 깨운 주요한 철학이었던 것이다.

2) 방내지사와 방외지사
1601년(선조 34) 허균은 충청도와 전라도의 조운 업무를 감독하는 해운판관에 임명되었다. 이 벼슬은 조창(漕倉)을 순회하며 감독하는 자리여서 각 읍의 수령들은 감독관인 허균에게 극진히 대접할 수밖에 없었다. 놀기 좋아하는 그에게는 최고의 자리였던 셈이다. 서울에서 같이 놀던 기생 광산월(光山月)까지 내려와 가는 곳마다 함께 다니며 놀았다. 이때의 일을 기록한 글이 《조관기행(漕官紀行)》이다. 이 책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28일 광주에는 젊은 날 서울에서 정을 준 기녀 광산월이 있었는데 그를 보내어 굳이 독촉하니 할 수 없이 참석하였다. ……평생의 즐거움을 나누며 밤을 새웠다.
13일 ……저녁 무렵에 대부인(大夫人)이 설익은 감을 먹은 것이 체하여 부축하고 들어가더니 초저녁에 병이 매우 위태로워졌다.
14일 진시(辰時)에 병을 돌이키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나는 머물러 상사를 치르기로 하였다.
16일 상(喪)은 대렴(大斂)을 마치고 빈소를 마련하였다.
17일 성복(成服)하였다.
20일 군의 무거(武擧, 무과에 합격한 사람) 소문진(蘇文震)의 첩과 그의 집에서 같이 일하는 계집아이가 일에 매우 익숙하였다. 그들이 주안상을 차려 가지고 와서 위문하니 광산월도 함께 돌보았다. 종일토록 피리 불고 노래하여 즐거웠으며, 이유위는 일어나 춤을 추기도 하였다.

허균의 노모가 감을 먹은 게 잘못되어 그 길로 돌아가신다. 허균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4일째 되는 날 복을 입고, 복을 입은 지 3일 만에 소문진이라는 무관과 그의 첩, 그리고 허균의 정인인 기생 광산월 등과 함께 실컷 마시고 춤추며 놀았다.
이 사건은 장안의 화제가 되기에 충분하였다. 당시의 예법으로는 사실 용납하기 힘든 일이었다. 당연히 허균에겐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온갖 비난이 쏟아진다. 현재도 파면사유가 될 수 있는데, 하물며 조선시대에서랴. 당시에는 부모상을 당하면 즉각 벼슬을 내놓고 삼년상을 치렀다. 그리고 상중에는 아내와의 잠자리를 피하는 게 선비의 도리로 여겨졌다. 그런 시대에 허균의 행위는 미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다음의 《장자(莊子)》에 나오는 우화 두 가지를 들어보자.

1) 장자의 아내가 죽었다. 혜시(惠施)가 조문을 갔는데 장자는 마침 두 다리를 뻗고 앉아 동이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혜시가 책망하자, 장자는 “……태어났다가 다시 죽음으로 돌아가는 것은 마치 사시가 운행하는 것과 같네. 아내는 천지라는 큰 집에 누워 편히 쉬고 있으니 내가 울고불고 따라 곡한다면 이는 천명을 모르는 게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쳤다네.”라고 하였다.

2) 자상호(子桑戶)와 맹자반(孟子反)과 자금장(子琴張) 세 사람은 자유롭게 놀던 막역한 친구들이었다. 그러다가 자상호가 죽었는데 장사를 치르지 않자 공자(孔子)가 자공(子貢)을 시켜 장례를 도와주도록 하였다. 자공이 가보니 한 사람은 곡을 만들고, 한 사람은 거문고를 타면서 노래하고 있었다. 자공이 그들 앞에 나아가, “시신을 앞에 놓고 노래하는 것이 예입니까?”라고 묻자,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웃으며 “이 사람이 어찌 예를 알겠는가?”하는 것이었다. 자공이 돌아와 공자에게 이런 사실을 아뢰자, 공자는 “저들은 방외(方外)의 사람들이니라. 나는 방내(方內)의 사람이니, 예법(禮法)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예법의 안과 밖은 서로 관여하지 않는데 내가 괜히 너를 보냈다.”라고 하였다.

1)과 2)에서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공히 방외지사의 일이다. 방내는 예법의 질서 안을 의미하고 방외는 그 밖을 가리킨다. 예법이란 유교적 예교(禮敎)를 가리키므로 방외지사란 유교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겠다. 장자가 공자의 입을 빌려 하는 말은 방외와 방내가 나름 분리되어 각자가 서로의 영역을 존중했다는 말이다. 즉 방외지사에게는 방내의 예법을 적용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동진(東晉)의 고승 혜원(慧遠)에게 당시 최고 실력자 환현(桓玄)이 “사문(沙門)도 왕에게 공경을 다하여야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환현은 후에 동진(東晉)을 멸하고 스스로 황제를 칭하며 초(楚)나라를 세운 사람이다. 이에 대해 혜원은 “사문은 티끌 밖의 사람입니다. 그러니 왕자에게 공경할 이유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한다.
티끌과 먼지는 속세를 상징하니 티끌 밖의 사람은 속세를 떠난 사람을 가리킨다. 혜원의 대답은 승려는 속세를 떠난 사람이므로 세속의 예법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이런 일이 있고 난 후 혜원은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을 지어 정교분리를 분명히 한다. 혜원은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 앞을 흐르는 호계(虎溪) 밖으로 나가지 않음으로써 불교를 세속적 권력의 외풍으로부터 지켜냈다.
동양문화에서 유·불·도 3교가 나름의 이론과 영역을 지키며 공존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묵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서로의 영역이 다름을 인정하고 그 영역을 존중하는 것이다.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만 않는다면 각각 자신의 고유한 영역을 지키며 공존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허균이 어머니상을 당하여 취한 태도는 어떨까? 이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방외지사의 일이다. 하지만 허균은 방내의 인사이다. 더구나 현재 고위 관리로써 그에게는 유교적 예법질서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비난이 쏟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허균은 이렇게 항변한다.

남녀의 본성은 하늘의 이치이고 윤리는 성인의 가르침이다. 성인보다 하늘이 높으니 나는 하늘을 따르련다.

여기에서 하늘은 이황이 말하는 천리나 천명의 주재자인 하늘일 수는 없다. 장자의 자연이나, 서경덕의 기(氣)의 자연에 가까운 개념이다. 남녀가 서로에게 이끌리는 기, 그 에너지는 스스로 그러한 것으로 어쩔 수 없다는 인식이 깔려 있는 것이다. 삼척 부사로 부임했다가 불교에 아첨했다는 탄핵을 받고 13일 만에 사직하며 쓴 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禮敎寧拘放   예교가 어찌 자유를 구속하리요
浮沈只任情   마음 내키는 대로 부침을 거듭할 뿐
君須用君法   그대는 그대의 법을 쓰시게
吾自達吾生   나는 나대로 나의 생을 이루리니

이 시를 글자 그대로 이해한다면 허균은 유교의 예법질서를 거부하는 것이 된다. 유교적 질서체제를 따르지 않고 자유롭게 살겠다는 선언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것이다. 《성소부부고》 권 6 〈임창헌기(臨滄軒記)〉에서 허균은 “서울에서 벼슬하는 고관들은 관직으로 제 집을 삼고, 스스로 생각하기를 백 년이라도 이 집을 보존할 수 있을 줄 알지만, 하루아침에 쫓겨나 귀의할 땅도 없어 낭패하여 떠도는 자들이란 모두 이런 사람들이오.”라고 하면서 세상의 화(禍)에 어둡고 이익을 탐내는 자들에게 경고한다고 하였다.
방내의 질서를 거부하고 방외지사로 자유를 누리며 살고자 한다면 방내의 부귀영화는 포기하여야 한다. 도연명(陶淵明)처럼 시골로 내려가 가난하게 살면 누구도 간섭하지 않는다. 하지만 비록 닷 되의 곡식이라도 그 녹봉을 원한다면 허리를 굽혀야 한다. 지배체제에 종속되는 건 당연하다.
이런 이치를 허균이 몰랐을 리 없다. 그렇기 때문에 허균은 지방관을 선호하였는지도 모른다. 허균은 가난 때문에 벼슬한다는 말을 여러 번 한다. 하지만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나 돈이 부족할 리는 없다. 다만 놀기 좋아하는 성품에 기방에서 많은 돈을 축냈을 가능성은 있다. 지방관은 서울의 중앙무대보다 돈 만들기가 쉽다. 그래서 임금이 지방관으로 발령 내는 것을 부모 봉양하라는 은전으로 여겼다. 또 다른 하나는 붕당 간의 권력투쟁으로부터 한 발짝 물러나 있을 수 있다는 이유겠다.
하지만 이유가 무엇이든 방외의 자유를 누리고 싶으면 방내의 권력과는 절연하여야만 하였다. 그런데 칠서의 난 이후 허균은 누구보다도 지독하게 최고권력을 향해 돌진하였다. 사실 인목대비의 폐위에 앞장선 것은 어떤 이유로든 정당화하기 힘든 것이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더구나 영창대군이 선조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말까지 해가며 광해군의 눈에 들고자 한 행위, 더하여 자신의 딸을 광해군의 후궁으로 들이려는 행위는 모두 정치적 행위로 지극히 위험한 것이었다. 결국 허균은 정적이 아닌 과거 동기이자 가장 믿고 의지했던 이이첨에게서 배신을 당하고 능지처참된다.
누구를 탓할 수 없다. 필자가 볼 때 이런 결과는 허균의 잘못이다. 그는 선택을 하여야만 하였다. 방외의 자유를 누리며 살고 싶었으면 방내의 권력으로부터 멀어져야만 했다. 허균의 가장 큰 죄는 방내의 권력으로 방외의 자유를 누리려 했던 것이라고 하면 너무 심한 말일까.

3) 예술과 금기
조선시대의 사대부 대부분은 예술을 즐겼다. 그들은 시와 문장을 지었고, 거문고를 탔으며, 매화나 난을 쳤다. 이를 풍류(風流)라고 하여 풍류를 아는 것은 커다란 자랑이었다. 풍류를 잘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조선의 사대부들은 벼슬과 경제적 풍요를 누릴 수 있었다. 흔히 한문 4대가라고 하는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계곡(谿谷) 장유(張維), 택당(澤堂) 이식(李植), 상촌(象村) 신흠(申欽) 등은 문장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고 벼슬은 정승의 반열에 올랐다.
이들은 당시의 지배이념에 매우 투철하였다. 삼년상은 물론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예법에 어긋나지 않도록 조심하였다. 이들에게 삼강오륜은 천명이었다. 이들의 예술세계는 이런 이념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 한가(閑暇)와 은일(隱逸)을 읊는 것조차 예교의 연장선에 있었다. 즉 평생을 임금과 부모에게 충효를 다한 후에 늙어 은퇴 후에 누릴 호사였던 것이다.
예술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이런 이유로 예로부터 예술은 백성을 교화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심청전》과 《춘향전》은 예술이란 형식을 빌린 교육이기도 하였다. 삼강(三綱) 중의 효(孝)와 열(列)을 교육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조선의 사대부들의 문학과 예술세계에는 이런 유교적 가치질서가 매우 잘 녹아 있었다. 하지만 허균은 달랐다.

老妻殘日哭荒村   해 지는 황폐한 마을에 통곡하는 늙은 아낙
蓬鬢如霜兩眼昏   쑥대머리엔 서리 짙고 두 눈동자 흐릿하네
夫欠債錢囚北戶   남편은 빚 못 갚아 차가운 감옥에 갇혀 있고
子從都尉向西原   아들은 도위 따라 청주로 갔다네

시의 제목 자체가 〈본 대로 기록하다[記見]〉란 시이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피난 중에 본 것을 읊은 시이다. 시에는 남편은 감옥에 있고 아들놈은 징병당하여 왜군과 싸우러 가서 의지할 데 없는 늙은 아낙의 휑한 눈동자가 선명하게 그려지고 있다. 늙은 아낙에게 닥친 비극적 상황이 고스란히 폭로되고 있다. 그 어떤 설명보다도 더 절실하게 사회적 모순과 비극적 상황이 고발되고 있다.
《성소부부고》 8권은 전(傳)이다. 전은 특정 인물의 일대를 기록하는 것으로 사마천의 《사기열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전은 대개 지위가 높거나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의 생애가 기록된다. 하지만 《성소부부고》의 전은 버려져서 내력을 알 수 없는 사람, 당질과 놀아난 애첩을 죽이고 도망자로 산 사람, 서자, 거지 등의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대개 사회에서 소외되거나 멸시받던 사람들이다. 루카치의 용어를 빌린다면 문제적 개인을 찾아 그들의 인생 스토리를 전한 것이다. 궁녀들의 일상을 읊은 〈궁사(宮詞)〉에는 이런 시도 있다.

初年抱被直春堂   젊어서는 이불 안고 춘당에서 숙직했는데
因病休閒在曲房   병 들어 쉬라고 골방으로 내몰렸네
强就小娥來對食   굳이 어린 궁녀 데려다가 대식하고는
手開箱篋乞羅裳   손수 옷상자 열고 비단치마 꺼내주네

늙은 궁녀가 어린 궁녀를 데려다가 동성애를 하고는 그 대가로 비단치마를 주고 있다. 대식은 궁녀들끼리 부부가 되는 것이다. 일반인들은 결코 들여다볼 수 없는 궁궐 깊숙한 세계가 허균의 시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났던 것이다.
문학은 금기를 들춰내야 한다. 피차간에 뻔히 아는 내용은 문학의 소재가 되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금기시 되는 영역이야말로 문학이 다루어야 할 곳이다. 체제의 치부를 드러내고, 평범하지 못한 사람들의 기구한 삶이 펼쳐져야 문학이 된다. 그런 면에서 허균은 독보적인 문학가이다. 유교라는 지배이념에 충실한 조선의 문장가들과는 다르게 허균은 과감하게 금지된 영역을 드러내었던 것이다. 이런 허균의 문학관 혹은 예술관에는 사회적 소수자 혹은 소외된 사람들을 향한 따뜻한 인간애가 담겨 있음도 사실이다.
4. 허균에게 불교는 무엇인가

1) 선종과 능가경
《성소부부고》에 언급되고 있는 불경은 《반야심경》 《능가경》 《능엄경》 《원각경》 등이다. 이 중 다른 책에서 인용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즉 허균 자신의 판단이나 행위와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경우는 《반야심경》과 《능가경》이다. 먼저 《반야심경》에 대한 이야기는 두 번 나오는 데 내용은 하나로 허균이 《선문법보(禪門法寶)》란 책을 엮으며 한석봉에게 금자(金字)로 써 줄 것을 부탁하였다는 얘기이다. 이 이야기에서는 《반야심경》보다도 《선문법보》라는 책 제목에 더 눈길이 간다.

異地春將晩   객지에 봄이 장차 저물어가니
年光奈老何   늙은이에게 세월은 어떠한가
林花經雨少   꽃들은 비 지나니 적어졌는데
鳥語得晴多   새들은 날 개어 많이 떠드네
身世悠悠客   신세는 유유한 나그네 처지
乾坤浩浩歌   천지엔 가득한 노래 소리
忘生憑底物   생을 잊었는데 무엇에 의지하리오
案上有楞伽   책상 위에 능가경 있도다

이 시는 백거이(白居易)의 시에 운자를 맞춰 지은 것이다. 허균이 과거시험 감독관으로 있으면서 조카와 사위 등을 부정합격시켰다는 탄핵을 받고 이듬해인 1611년에 전라도 함열(咸悅)로 유배되었을 때 지은 시이다. 허균 입장에서는 억울한 면도 있었겠지만, 유배 중에 지은 화백시에는 일말의 원망이나 애원도 비치지 않는다.
원시(原詩)인 백거이의 시에서 느껴지는 비관적인 인식이 전혀 없이 밝다. 백거이의 원시는 기막히게 좋은 계절에 봄날은 짧고, 세계에 사람들의 고통은 많으니, 근심에 취하니 술 때문이 아니요 슬픔에 읊조리니 노래 아니다. 스님에게 이 병 어떻게 치료하느냐고 물으니 《능가경》 읽으라고 권한다는 내용이다. 이런 시에 대해 허균은 비록 유배객일지라도 유유자적하며 《능가경》 읽고 있다고 화답하는 것이다.

그런데 동파(東坡)가 《능엄경(楞嚴經)》을 읽고 나서 해외(海外)의 문(文)이 더욱 지극히 높고 묘하여졌고, 근세의 양명(陽明)과 형천(荊川)의 글도 모두 불경을 말미암아 깨우친 바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속으로 아름답게 여기어 자주 상문(桑門)의 선비를 따라 소위 불교의 경전을 구하여 읽어보니, 그 달견은 과연 도랑이 패이고 하수가 무너지는 듯하며, 그 뜻을 놀리고 말을 부리는 것은 나는 용이 구름을 탄 듯하여 아득해서 도무지 형상(形象)할 수가 없었다. 참으로 글에 있어서는 귀신 같은 것이었다.
시름겨울 때 그것을 읽으면 즐거워지고 지루할 때 읽으면 정신이 나서, 이것을 읽지 않았으면 이 생을 거의 헛되이 넘길 뻔하였다고 생각하고, 1년이 못 되어 1백여 상자를 모두 읽었는데, 마음을 밝히고 성(性)을 정(定)하는 대목이 환하게 깨달아짐이 있는 듯하여 마음속에 엉켜 있는 세속의 일들이 훨훨 그 매임을 벗어버리는 듯하였다. 글이 또 따라서 술술 나와 넘실거림이 한계를 잡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남몰래 마음에 얻음이 있다고 자부하여 아껴 보며 그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었다.

《능가경》이나 《능엄경》은 모두 선종의 소의경전이다. 달마 대사가 서쪽에서 건너오며 소지한 경전이다. 이런 점을 허균도 잘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1606년 〈송운(松雲) 대사에게 보낸 편지〉에 “《능가경(楞伽經)》 4권은 바로 초조(初祖) 달마 선사의 심인(心印)입니다.”라고 하고 있다. 송운 대사는 사명당(四溟堂) 유정(惟政)으로 허균과는 젊어서부터 교류가 있었다. 유정에게 보낸 편지는 허균이 유정의 부탁을 받고 자신이 소지한 《능가경》을 출간을 위한 판본으로 빌려주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허균은 선종(禪宗)에 심취해 있었다. 그렇다면 선종의 무엇이 허균으로 하여금 빠져들게 하였나? 중국불교는 크게 교종과 선종이 양대산맥을 형성하고 있다. 필자의 생각에 교종은 필연적으로 권력지향적이거나 권력과 밀착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고 본다. 교종은 방대한 이론체계를 갖추고 있다. 이런 이론을 습득하고 개발시키기 위한 시간과 장소가 필요하고, 이는 외부의 지원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고대 왕조체제에서 교종의 방대한 체계를 지원해줄 수 있는 곳은 사실상 왕실밖에 없다. 따라서 교종의 이론에는 왕조체제에 도움이 되는 요소들로 채워지게 되는 것도 필연이다. 화엄종의 법계연기설은 화엄종의 승려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통일왕조가 가장 원하는 우주관을 담고 있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이런 상호 유익한 구조가 정교의 밀착관계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형태의 정교 관계는 세속적 권력에 예속을 가져온다. 종단 입장에서는 권력의 지원을 얻는 대가로 권력에 종속되어야 한다. 이런 세속적 권력을 보다 더 많이 분담하면 할수록 종단 입장에서는 매우 위태로워지는 것도 사실이다. 종단의 확대는 세속 권력에 의해 급격히 축소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짐을 의미한다. 당말(唐末)의 법난(法難)이 이를 증명한다고 하겠다.
선종은 이런 권력에 예속을 지양하고 자유를 추구하면 나타나는 것이다. 선종이 추구하는 것은 일체 종속의 거부, 절대 자유의 추구라고 하겠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권력의 지원을 거부하고 자립의 기반을 갖추어야 한다. 백장회해(百丈懷海)의 ‘일일부작 일일부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이 탄생하게 되는 이유라고 하겠다. 노동의 자유를 통한 절대자유가 선종의 출발이었던 것이다.

2) 자유와 평등
선종은 저항과 자유를 특징으로 한다. 권력의 지원을 받지 않으면 가난은 필연이다. 따라서 선종은 몸소 노동하여야 하는 수고를 짊어져야만 한다. 그 대가로 이들은 자유를 얻었다. 선종에 빠져든 허균의 “마음속에 엉켜 있는 세속의 일들이 훨훨 그 매임을 벗어버리는 듯하다.”는 말은 결코 허언은 아니다. 더구나 《능가경》 같은 경전은 많은 게송(偈頌)으로 이루어져 시인에게는 또 다른 맛을 느끼게 해준다. “뜻을 놀리고 말을 부리는 것은 나는 용이 구름을 탄 듯하여 아득해서 도무지 형상(形象)할 수가 없었다. 참으로 글에 있어서는 귀신 같은” 문장에서 허균은 자유를 느꼈다.

왜 비천한 사람이 있고
이들은 누가 만든 것입니까

여자와 남자 그리고 남자 아닌 것
이들은 모두 왜 생기는 것입니까

대승경전에는 평등이란 단어가 넘친다. 일체평등, 절대평등 등등의 개념에 무차별까지 평등을 의미하는 어휘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아도 무리는 아닐 성싶다. 대승경전의 평등은 깨달음의 경지를 드러내는 개념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문명사회의 지배질서에 의해 내면화된 차별의식의 허구성을 여실히 드러내기도 한다. 허균 또한 이런 정치적 의미로 대승경전의 평등 개념을 이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허균에게 중요한 경계는 진정한 자유의 자각이다.

봉래산(蓬萊山)의 가을이 한창 무르익었으리니, 돌아가려는 흥취가 도도하오. 아가씨는 반드시 성성옹(惺惺翁)이 시골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어겼다고 웃을 걸세. 그 시절에 만약 한 생각이 잘못됐더라면 나와 아가씨의 사귐이 어떻게 10년 동안이나 그토록 다정할 수 있었겠는가.
 
이는 부안의 기생 계랑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허균과 계랑은 이미 10년 우정을 나누고 있었다. 조선 최고 명문가의 자제분이 천한 신분의 일개 기생과 10년 우정을 나누는 일은 어떤 걸까? 불교가 가르쳐주는 중요한 깨달음은 일체의 차별의식을 여의어야만 진정한 해탈, 즉 절대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계랑의 본래면목을 본 사람은 허균이 유일한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미 남녀와 신분적 차별의식을 버린 허균이었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계랑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자유연애를 즐겼을 것이다.
더도 덜도 없이 딱 계랑과의 관계만 같았어도 좋았는지 모른다. 딱 거기까지만. 더 이상 욕심부리지 말고. 하지만 허균은 방내의 풍요와 방외의 자유를 모두 누리고자 하였다. 이는 판단착오다. 하나는 포기하여야만 했다. 선종의 개창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가난을 선택하는 대신 자유를 얻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허균은 여전히 방내에 머물렀다. 1613년 그의 나이 45세, 계축옥사에서 살아남은 허균은 무섭게 권력을 향해 나아갔다. 이것이 본인이 살기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정말로 혁명을 위한 것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이때부터 죽임을 당하기까지 5년은 실상 권력의 사냥개가 되어 살았던 기간이기도 하다.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는 삶아지는 법이다. 권력의 정점에 오를수록 추락은 치명적인 법이다. 《한정록》을 쓰면서까지 평화로운 은거를 꿈꾸었던 허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분명한 건 이 마지막 5년 동안 세속적 지위는 가장 높았으나 가장 자유롭지 못했던 시기였음은 분명해 보인다.
적어도 마지막 5년을 제외하고 허균에게 불교는 도피처이며 의지처이고, 또한 낙토(樂土)였다.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비난의 화살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곳이면서, 이런 고난에 저항할 수 있는 용기를 북돋아 주는 의지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안에서는 자유로울 수 있는 극락정토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5년 동안에도 그랬었길 희망해 본다. ■

 

김문갑 / 충남대학교 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충남대학교 철학과 제적. 한남대 대학원에서 〈소옹의 선천역학 연구〉로 박사학위. 현재 한국고전번역원 중부권 고전번역실 전임연구원이며, 월간 《선원》과 인터넷신문 〈불교저널〉에 〈21세기 불교철학이야기〉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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