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천 맑스와 자본론 연구소 연구원

1. 들어가면서

글의 시작이 범박하지만, 소수자란 어떤 사람들인가란 질문에서부터 시작하자. 도대체 소수자란 어떤 사람들인가? 적극적으로 말하면 소수자란 표준화를 거부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소수자는 표준화된 인간상으로부터의 거리에 의해 규정된다고 할 수 있겠다. 표준적인 인간상은 백인·남성·이성애자·본토박이·건강인·지성인·표준어를 쓰는 사람·현지 노동자 등등으로 표상된다. 그러한 다수자적 인간상은 표준화된 모형을 준거로 하여 광기를 배제하고 주변으로 통하는 모든 통로를 차단하려고 한다. 결국 이는 유색인·여성·동성애자·이주민·환자·무지렁이·사투리를 쓰는 사람·이주 노동자 등등을 배제하고 억압하는 지배권력과 연결된다.1)

그러나 그러한 권력에 대항하여 소수자들은 자신을 구성해나가는, 말하자면 소수자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이들 운동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이를테면 매춘여성운동, 장애인운동, 동성애자운동, 외국인노동자운동, 양심적 병역거부운동, 불안정노동자운동, 실업자운동, 부랑자운동, 노숙자운동, 혼혈아운동, 성폭력반대운동 등등이 그것들이다. 이러한 소수자 운동은 한국에서 최근 10년간 두드러지게 약진하였다.2)
그들은 누구인가, 그 운동이란 무엇인가 하는 등의 문제는 당연히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관점에서 해명해야 한다. 이 해명 작업은 그들과 그 운동이 자본주의 생산관계 속에서 차지하는 지위나 역할 또는 의미를 해명하는 작업이다. 이것은 결코 간단한 작업이 아니다. 또 이 작은 글의 범위를 훨씬 뛰어 넘는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소수자운동이 아니라 소수자 그 자신, 특히 이주 노동자의 문제를 신자유주의하의 자본주의 생산관계와 관련하여 취급하고자 한다. 그렇게 취급하면 이주 노동자는 계급문제, 인권문제, 고용문제, 노동력의 가치와 가격문제(임금문제), 인종문제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문제로 고통을 겪고 있다. 나는 이들 문제 중 특히 고용과 노동력의 가치(임금)를 둘러싼 문제를 해명하고자 한다. 특히 후자에 대한 작업은 노동가치론에서 요구하는 형식과 요건을 충족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두 문제 모두를 시론적인 수준에서 해명하고자 한다. 이 글은 이런 한계를 안고 출발한다.

2. 신자유주의적 생산관계와 이주 노동자의 고용문제

수백만의 이주 노동자들이 2006년 봄에 LA와 시카고, 그리고 다른 주요 도시들에서 행진에 나서 미국과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부분파업과 출근거부, 학생들의 동맹휴업이 대중운동의 흐름 속에 포괄되었다. 멕시코와 중남미의 여러 나라들에서 온 미등록 노동자들이 마침내 “어둠을 걷어내고 모습을 드러냈다.”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모든 이주 노동자들의 권리를 옹호하며 강력한 자부심을 불어넣는 대담한 운동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3월 25일 LA에서 1백만 명이 참여한 ‘대행진’과 5월 1일 미국 전역에서 벌어진 거대한 분출은 미국에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 결과 의회는 2005년 12월 하원을 통과했던, 노골적으로 인종적이며 반노동자적인 센센브레너 법안(하원 4437)으로부터 물러섰다. 공화당 하원 지도부가 지원한 이 법안은 모든 미등록 이주 노동자와 그들을 돕는 모든 사람들을 중죄인으로 낙인찍는 것이었다. 이와 달리 상원은 이주 노동자들의 비위를 다소 맞추는 “포괄적인 이민개혁법안”(상원 2611)을 채택했는데, 조지 부시는 그 기본 골격을 지지했다.3)

오늘의 자본주의시대,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자본가는 이주 노동자의 잉여노동과 그들의 무보수 노동을 요구해왔다. 물론 이주 노동자에 대한 차별과 억압은 노동의 측면에 그치지 않고, 성·인종·인권 등에서도 드러나지만, 노동의 측면이 보다 근본적이다. 이는 평등의 원리가 보급되고 이주 노동자의 지위가 이전보다 더욱 상승했다고 말해지는 오늘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진실이다. 위의 인용된 글은 그러한 차별과 억압에 대항하여 미국의 이주 노동자들이 보여준 저항의 최근 사례를 소개하는 글이다.

이주 노동자들의 저항은 자신들에 대한 당장의 억압과 차별 철폐를 목적으로 하지만, 궁극적으로 자본주의의 철폐를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이주 노동자들의 저항에 대한 우리의 시각은 상당 정도 왜곡되어 있다. 십중팔구 지배계급이 유포한 이데올로기, 특히 민족주의나 인종차별주의나 그 밖의 다른 지배이데올로기의 영향 때문이리라.

우리가 이주 노동자들의 저항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 저항의 연대를 표명하려면 그들의 문제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즉 문제를 현지 자본주의 각국의 생산관계와 관련하여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제대로 된 이해란 그 문제가 현지 자본주의 각국의 고유한 생산관계의 산물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런 관계에 대한 정보와 지식을 전제한다. 그러나 나는 그 문제에 대하여 생산관계 일반의 수준에서 말하고자 한다. 따라서 논의가 추상적이 될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의 이주 노동자의 문제는 기본적으로 노동문제이다. 노동문제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고용문제이다. 다른 하나는 임금문제이다. 먼저 고용문제의 내용을 보자.

그에 앞서 신자유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알아보자. 신자유주의에 대한 정의는 부지기수로 많다. 그 정의를 무시하고 나는 일단 신자유주의는 자본들 간에 경쟁을 격화시키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맑스에 따르면 “경쟁은 자본들이 ‘자본으로’ 행동하도록 하는 것이다.” ‘자본으로’란 말에서 ‘자본’이란 ‘자본의 속성 혹은 본질’의 다른 표현이다. 이를 반영하여, 경쟁에 관한 맑스의 말을 재구성하면 “경쟁은 자본들이 ‘자본의 속성 혹은 본질’을 드러내도록 행동하게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자본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노동과정 모두를 자본의 자기 확장 과정(가치 및 잉여가치의 생산)으로 변형시킨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력 매매를 위한 사회관계의 완벽한 구축’이라는 것이며, 마지막은 ‘생산수단으로부터의 직접적 생산자의 완벽한 분리’라는 것이다. 맑스의 경쟁에 대한 정의에 따라 신자유주의를 재정의하면, 그 본질은 자본들 간에 경쟁을 격화시켜 자본들이 ‘자본의 속성, 혹은 본질’을 드러내도록 행동하게 한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생산관계와 관련하여 이주 노동자의 고용문제는 세 가지 정도로 정리될 수 있다. 그런데 그것들 각각은 앞서 말한 자본의 세 가지 본질과 관련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첫째, 이주 노동자는 현지 노동자의 임금수준보다 훨씬 낮은 임금수준, 즉 차별임금과 초과노동으로 현지 노동자의 그것보다 더 많이 착취를 당한다. 신자유주의는 자본들이 자본주의 노동과정을 철저한 가치 및 잉여가치 생산의 장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러한 과정이, 자본의 언론이 수없이 떠들어댔던 소위 합리화(구조조정)이란 것이다.

합리화란, 기원을 보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러시아에서 사회주의혁명이 성공하자 위기의식을 느낀 자본주의가 취한 특수한 노동지배, 착취강화 운동이었다. 이와 같이 특수한 역사적 성격을 가졌던 합리화의 본질은 조직적인 노동 강화를 행하여 잉여가치를 증대하려는 데 있고, 그 목적은 이러한 잉여가치의 증대에 의해 자본주의의 위기를 극복하여 그 지배를 안정시키려는 데 있다. 그러니까 합리화란 착취를 강화하기 위한 방법이다.

신자유주의는 바로 자본들이 그러한 합리화를 강력히 추진해야 한다고 주문했던 것이다. 자본은 생산의 기계화, 과학화를 추진했다. 생산의 효율성을 핑계로 수많은 노동자를 공장에서 퇴출시켜 길거리로 내몰았다. 노동력의 가치 이하로 임금을 턱없이 깎아 내렸다. 이것들 보다 경제적인 착취강화와 영리에 유리한 방법이 있다면, 혹 그것이 무시무시한 전쟁일지라도 그런 방법도 택했다.

그러나 임노동관계의 역사는 이윤의 증대를 생사를 걸고 추구하는 자본가와 인간다운 생활을 바라는 노동자가 결코 평화 공존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양자는 절대적으로 대립관계에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자본의 합리화 운동 혹은 신자유주의적 운동은 전세계적 차원에서 노동자·민중의 강력한 저항을 받았다. 이 저항은 무슨 이데올로기에 고무되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인간성의 발로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났다.

인간으로서의 생존, 생명을 위협받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저항했다. 이 저항은 현지 노동자·민중·이주 노동자 모두가 참여한 저항이었다. 그러나 자본의 반격 또한 만만하지 않았다. 군사적인 무기, 문화적인 무기, 정치적인 무기, 경제적인 무기 등 한마디로 다양한 무기를 사용한 입체적인 반격이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주된 무기는 경제적인 것이었다. 이 반격으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것은 누구였을까? 이주 노동자였다.
그 피해의 하나는 차별임금이었다. 세계적 평균을 보면 이주 노동자의 임금은 현지 노동자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42.9%에 불과하다. 피해의 다른 하나는 초과노동이었다. 신자유주의로 해서 격렬해진 경쟁에서 이기기 위하여 이윤을 늘리는 수단으로 자본가는 이주 노동자에게 노동시간을 연장하고, 노동 강도를 증대시켰다. 세계적 평균을 보면 이주 노동자의 주당 평균 노동시간이 현지 노동자의 평균 노동시간에 비해 약 17%로 길다.

한편 현지 노동자·민중과의 헐렁하고 느슨한 연대의 끈, 그들을 위한 것이라고 하나 형식적이며 허술하기 짝이 없는 이주 노동자보호법, 소부르주아들 사이에 극도로 만연된 인종차별주의, 이주 노동자는 그러한 차별임금을 받고 초과노동을 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미신의 만연이 그들이 이 같은 피해를 받기에 더 없이 충분한 조건이 되었다.

둘째, 이주 노동자는 차별적인 취업구조 속에 결박되어 현지 자본의 노리개가 되어 있다. 신자유주의는 자본들이 노동력의 매매를 위한 자본에 유리한 사회관계(자본임노동관계)를 완벽하게 구축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 같은 관계의 구축을 위해 자본은 세계에 걸쳐 노조를 파괴하고, 노동운동을 무력화시키며, 나아가 노동자·민중을 앵글로색슨식 인간형(심성까지 자본에 깊숙이 예속되어 개인주의적이고 소비주의적으로 된)으로 개조하려고 했다.

자본주의의 기본모순인 생산과 소비모순의 계급적 표현은 노동자와 자본가의 대립이다. 노동자와 자본가의 대립모순은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심화되며 점차 그 모순 중 노동이 주요한 측면으로 전화된다.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란 이 같은 노·자의 역관계, 노동운동의 주체적인 힘을 사상하고서는 이해될 수 없다.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노동자민중들이 자본의 공격(자본이 자신들에 유리한 사회관계의 구축을 위해 노동자들에게 가하는 공격)에 조직적으로 저항했다. 자본에 대하여 효과적으로 싸우기 위해서는 노동자는 단결해야 한다. 개개인으로 뿔뿔이 흩어져 있어서는 싸우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조직과 연대를 통해서 싸워야 한다. 투쟁력은 무엇보다 단결된 힘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주 노동자는 조직된 힘도 연대도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그들이 현지 국가의 사법과 경찰력의 단속으로 대부분 각자 고립되어 일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주 노동자의 이런 처지는 그들이 차별적인 취업구조 속으로 손쉽게 빠져들게 만들었다. 별다른 기술을 갖고 있지 못한 이주 노동자 대다수는 당연히 단순노동·미숙련노동에 취업하게 된다. 그러나 그 취업도 중간 하청업자나 소개업자를 통해 이루어지게 되고, 한 장소에서 함께 일하기보다는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일하기 때문에 그들은 전근대적인 노사관계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또한 항상 일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경기변동에 매우 민감하다. 기술이 별달리 필요하지 않은 단순노동이기 때문에 상당기간 그 일에 종사했다고 해도 기술이 늘고 임금이 올라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정말 최하위의 임시노동인 것이다.

더욱이 이주 노동자는 각기 고립되어 일하고, 중간 소개업자에게 잘 보여야 일거리라든가 임금계산에 유리하기 때문에 하청업자가 횡포를 부리더라도 반발할 수 없는 처지이며, 이주 노동자들끼리의 단결은 생각할 수조차 없다. 이 때문에 이주 노동자는 현지 자본의 노리개로 전락했다.

셋째, 이주 노동자는 항상 불안정한 고용에 시달리며, 그들 중 일부는 그런 고용의 기회조차 없어 생존의 위협에 처해 있다.

신자유주의는 자본들이 생산수단으로부터 직접적 생산자를 분리하는 일에 철저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즉 신자유주의는, 자본들이 노동자에게 그들의 노동력 가치에도 훨씬 못 미치는 저임금과 그런 임금구조를 강요하여, 그들이 생산수단에 접근하여 자립하는 길을 원천적으로 봉쇄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또 신자유주의는 자본들이 그러한 봉쇄는 생산과정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유통과정을 통해서도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오늘날과 같이 자본의 지배기반이 극히 취약하여 국가의 절대적 지원이 그들의 존립에 불가결한 조건을 이루고 있는 상황에서는 인플레나 조세 등의 수단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운동의 관철에 빼놓을 수 없으며, 따라서 노동자민중의 생활에 있어서도 무시될 수 없는 부분이 되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이 인플레나 조세 등의 수단을 유통과정 속에서도 사용하여 저임금을 다시 수탈하라고 주문했던 것이다.

그 결과가 사뭇 대조적이었다. 자본은 엄청난 양의 잉여가치의 착취를 통해 부를 축적했지만, 노동자·민중의 삶은 극도로 피폐해졌다. 특히 그 피폐한 삶은 항상 그리고 매우 불안정한 고용상태에 있는 이주 노동자에게 두드러졌다. 자본주의는 불경기와 호경기가 매우 자주 반복되어 변동이 심하다. 그러기에 트로츠키는 자본주의는 호황이라는 들숨과 불황이라는 날숨을 쉬는 체제라고 했지 않던가? 그런데 불황이 되거나 기타의 사정으로 감원을 하게 될 때에는 이주 노동자의 노동이 주변적이라는 이유로 가장 먼저 해고된다.

그 과정에서 이주 노동자의 일부는 빈민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맑스는 빈민이란 임노동관계에 의해 재생산되지 못하고, 자본주의 생산 외부에서 얻게 되는 생활수단에 의해서나 총 잉여가치로부터 공제되는 보조금에 의해서 재생산되는 담당자라고 했다. 그러나 일부 빈민으로 전락한 이주 노동자는 이런 보조금 같은 것을 받을 수 없도록 현지 국가가 제도화하고 있기 때문에 생존의 벼랑 끝에 서 있다.

3. 이주 노동자의 노동력 가치의 문제

신자유주의적 생산관계와 관련하여 이주 노동자의 고용문제를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해 보았다. 이제 다시 노동문제의 다른 하나인 임금문제, 즉 이주 노동자의 노동력의 가치·가격의 문제를 살펴보자.

이주 노동자의 임금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왜 그들의 임금은 그토록 낮은 것일까? 이러한 문제를 살펴보는 것은 임금인상이라고 하는 그들의 경제적 문제뿐만 아니라 전체 노동자의 행복과 노동자 해방이라는 정치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력4)이 상품으로 매매된다. 노동력이 상품화되어 일반적으로 매매되면 그 가격은 가치5)를 기준으로 하여 결정되게 된다. 그리고 그 상품의 가치는 다른 일반상품과 마찬가지로 그 생산과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규정된다. 노동력 상품도 가치의 관점에서 보면 그 상품에 대상화되어 있는 사회적 평균노동의 일정량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노동력은 살아 있는 사람의 능력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의 재생산은 살아 있는 사람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노동력의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은 노동력의 소유자인 노동자가 생활자료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으로 귀착된다.

그리하여 노동력의 가치는 다른 일반상품처럼 그 상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직접적으로 결정되지 않고 노동자가 생활을 유지하고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해 필요한 생활수단의 가치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노동력 상품은 다른 일반상품과 마찬가지로 가치법칙6)의 적용을 받는다.

그런데 노동력의 가치란 노동자를 노동자로서 유지하고 또한 그들을 육성하는 데 드는 비용이다. 이것은 노동자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부단히 노동력을 발휘할 수 있는 건강상태를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이다. 이 비용은 노동자와 그의 가족들이 살아가는 데 일상적으로 필요한 생활필수품의 가격에 따라 결정된다. 물론 노동력의 가치, 즉 생산비는 시대나 사회, 민족에 따라 상이하나 한 국가의 특정 시대에 있어서 노동력의 유지와 재생산에 필요한 생활수단의 가치는 평균적으로 주어져 있다. 따라서 이를 고려해서 노동력의 가치구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노동자 자신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생활자료의 생산에 소요되는 노동시간이다.

둘째는 노동자가 그의 가족을 부양하는 데 필요로 하는 생활수단의 가치이다. 셋째, 수업이나 기능육성에 드는 비용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현지 노동자와 이주 노동자의 노동력의 가치를 비교해보면 둘 사이의 가치에는 상당한 차이가 존재한다.

첫째, 노동자 자신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생활비가 다르다.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력의 재생산에 필요한 생활수단의 가치에 의해 결정되는데, 이 생활수단의 평균범위와 충족방식이 현지 노동자와 이주 노동자 간에 차이를 보이고 있어, 이것이 현지 노동자와 이주 노동자의 노동력 간의 가치 차이를 낳는다. 다시 말하면 이주 노동자는 생활에 대한 법적, 제도적 차별을 받고 있어 그 생활수단의 범위와 양은 현지 노동자에 비해 적게 마련이다.

둘째, 노동자가 그의 가족을 부양하는 데 필요로 하는 비용에서 차이가 난다. 사회적 평균을 보면, 현지 노동자는 남성이 주가 될 뿐만 아니라 세대주인 경우가 더 많다. 반면에 이주 노동자는 혼자인 경우가 많다.

셋째, 수업이나 기능육성에 드는 비용에 차이가 있다. 동일 노동을 한다는 것은 똑같은 숙련도를 갖고 있다는 말이다. 현지 노동자와 이주 노동자가 그 숙련을 취득하는 데 드는 비용은 똑같다고 하더라도 훈련기간 중에 드는 생활비의 차이로 인하여 약간의 차이가 생겨난다.

이 때문에 이주 노동자의 노동력의 가치는 동일 노동에 대한 현지 노동자의 그것의 가치보다 낮아진다. 그리고 이러한 노동력 가치 간의 차이는 노동력의 가치를 화폐로 나타낸 임금의 차원에서 현지 노동자와 이주 노동자의 차이로 나타난다.7)

이제 이를 구체적인 현실의 차원에서 이야기해 보자. 아직 노동시장에서의 노동력 판매와 구매의 경쟁은 고려되어 있지 않고, 노동력의 가치에 따라 노동력의 가격인 임금이 정해진다는 조건으로 되어 있으며, 더구나 노동력의 가치는 재생산비용으로서만 고찰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의 임금은 노동시장에서 결정된다. 일반시장과 마찬가지로 노동시장에서는 현지와 이주 노동자 사이의 경쟁,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경쟁, 자본가 사이의 경쟁이라는 세 가지 종류의 경쟁이 동시에 복잡하게 전개된다.

노동력의 가치·가격은 이러한 경쟁상태에서 노동력의 시장가치·시장가격으로 전화한다. 물론 이 노동시장은 경쟁이 제한되거나 방해받아 복잡한 구조를 띠게 된다. 산업예비군과 노동자의 빈곤이 증대해 구직경쟁이 치열해지고, 노동력의 가치 이하로 인하된 임금을 지불하고, 인플레이션을 창출하여 생활수단의 가격을 현저하게 상승시켜 이미 인하된 임금을 다시 인하시키는 자본가의 횡포에 대해서 노동조합이 반작용을 가하곤 한다. 그 결과 노동력의 가격은 노동력의 가치대로 지불되지 않고, 가치 이상이나 이하로 부단히 변동하게 된다.

그러나 완전경쟁이 이루어지는 노동시장에서는 동일 직종 내에서 노동력의 개별적인 가치 차이를 평균화한 하나의 사회적 가치, 즉 시장가치가 결정된다. <표1>에서 A, B, C 세 노동력은 동일 노동으로서, 모두 그 양이 20인 사용가치를 생산하고 있다. 그러나 생활수단의 가치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개별가치는 10, 11, 12로 나누어진다. 각각의 노동력은 생산한 사용가치에 따른 분배에 의해서 동일한 임금률을 적용받는다. 그래서 개별적 가치를 모두 합한 33을 A, B, C에 똑같이 분배하면 각자의 시장가치는 모두 11로 된다. 여기에서 이주 노동자는 비록 그 재생산비용이 적다고 할지라도 동일한 임금률을 적용받아, 동일한 임금을 받게 된다. 이것은 동일 노동에 동일 임금이 실현되는 모델로서, 개별적인 가치에 사회적 평균임금률을 적용하여 주는 임금을 뜻한다.

그렇다면 노동이 다른 경우, 즉 노동력의 사용가치8)가 다른 경우(각기 다른 양의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경우)는 어떻게 될까? 그 경우는 <표2>와 같다. 이때 노동력의 개별가치(노동력의 육성비의 차이를 반영한)와 노동력의 시장가치 사이에는 약간의 격차가 생기지만 어쨌든 개별가치의 총합계와 시장가치의 총합계는 일치한다.

이것은 노동시장에서 직종이나 숙련도에 따라 임금률이 다르게 형성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현실의 노동시장은 자본축적의 과정에 의해서 경쟁이 변용되어 노동력의 종류마다 노동시장이 각각 존재하고 있어 차별임금이 형성되고 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은 신자유주의적 상황 속에서는 이주 노동자의 경우는 현지 노동자보다도 상대적 과잉인구(산업예비군)의 압력을 더 강하게 받을 뿐만 아니라 이들에 대한 현지 국가와 자본가 집단의 제도적물리적인 탄압정책 때문에 동일한 노동을 행하여 동일한 사용가치를 생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임금률이 적용되지 못하여 그 임금은 더욱 낮아진다. 그리하여 이주 노동자의 임금은 완전경쟁적 노동시장의 수준 이하로 떨어져 개별가치와 똑같게 되거나 그 이하로 된다. <표1>, <표2>를 예로 설명하면 동일한 임금률이 적용될 경우는 <표1>처럼 A, B, C 세 노동의 개별가치는 10,11,12로 다르지만 시장가치는 모두 11로서 동일하다.

그런데 <표2>의 경우처럼 서로 다른 임금률이 적용될 경우 A처럼 개별가치 10이하로 시장가치가 정해지거나 B처럼 개별가치와 똑같이 시장가치가 정해진다. 반면에 C는 개별가치가 12보다 더 높게 시장가치가 정해진다.

앞서 우리는 <표2>의 경우를, 직종이 다르거나 숙련도가 달라서 그것이 생산하는 사용가치가 다르기 때문에 적용되는 임금률도 달라져, 임금에 차이가 나게 되는 사례로서 살펴보았다. 임금률 15/60, 20/60, 25/60은 다만 직종이나 숙련도의 차이로 인해 생산해 낸 사용가치가 다르기 때문에 다르게 나타난 임금률이다.

그런데 현지 노동자와 이주 노동자의 경우는 이와는 달리 생산해 낸 사용가치가 똑같은데 임금률이 아주 낮은 수준으로 적용된다. 그리하여 동일 임금률이 적용되는 <표1>의 경우가 아니라 가혹한 차등 임금률이 적용되는 <표2>의 경우가 되어 현지 노동자와 이주 노동자의 임금 사이에는 현저한 차이가 나타나게 된다.

현지 노동자와 이주 노동자는 동일 노동을 행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노동시장은 현지 국가와 자본에 의해 고립, 분단되어 있어 그들은 현지 노동자와 다른 임금률, 즉 차등 임금률을 적용받는다. 그에 따라 시장가치와 달라져 임금에 차별이 생기게 된다. 즉 생존임금을 받는 것이다.

이것은 같은 양의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동일 노동이 아닌 각기 다른 양의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이종 노동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주 노동자들은 고숙련이 필요하지 않은 단순노동에 많이 배치되어 있어 그들 간의 경쟁 또한 심하다. 게다가 그들은 현지 국가와 자본가 집단의 제도적·물리적인 탄압정책 외에도 상대적 과잉인구의 압력까지 받고 있다. 그리하여 <표2>의 A노동처럼 노동력 가치 이하의 임금을 받고 노동하는 것이 보편적으로 된다.

4. 마치면서

이주 노동자의 고용문제와 그 노동력의 가치·가격에 관한 문제를 신자유주의적 생산관계와 관련하여 시론적으로 살펴보았다. 그 고용문제는 심각했으며, 노동력의 가격(임금)은 노동력의 가치 이하의 수준에서 맴도는 생존임금이었다. 그런 이주 노동자들이 현지 자본가로부터 ‘고통을 참는 자에게 희망이 있다’는 믿음을 강요받으면서 자본의 굴종적인 임금노예로 살아가도록 강요받고 있다. 만약 그러한 강요를 거부하면 현지 자본가는 사법과 경찰력을 동원하여 그들을 강제추방하려고 했다.

이 일련의 압박 속에서 이주 노동자는 무한착취의 노동과정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들을 위한 저항의 연대를 구축해야 한다. 그 연대는 그들의 생존권적 기본권적인 생활상의 요구에 기초해야 한다. 신자유주의는 바로 그 요구의 파괴를 추구하고 있고, 바로 그곳에서 신자유주의와 그들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저항의 연대는 지금 매우 긴급을 요하고 있다. 이주 노동자의 권리를 요구하는 현지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인간해방을 갈망하는 민중들 모두가 이 저항의 연대에 참여해야 한다. ■

이경천
현재 맑스와 자본론 연구소 연구원. 논문으로 <생산가격 범주의 본질은 양적 문제의 해결에 있는가> <마르크스의 순수경제학과 경제수학> <기호학은 자본을 뛰어 넘을 수 있는가> <노동가치론으로 읽는 상품기호학> <가치론의 이단적 해석에 대한 마르크스적 비판> <정보재의 생산과정과 그 가치 및 가격의 방정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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