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백인 계통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

1. 붓다는 유럽계 인종인가?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교조로 볼 수 있는 예수와 마호메트는 인종적으로 모두 셈족(Semites 또는 Semitic) 계통이다. 셈족은 유럽인과 다른 인종적 언어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의 유대 민족도 셈족에 속하고 이웃의 팔레스타인 등 대부분의 아랍 민족도 같은 셈족에 속한다. 유일신 종교인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는 같은 인종적 기원에 유래한다. 하지만 최근 예수의 경우 아프리카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중국의 공자나 노자의 경우는 남방계 몽골인 한족(漢族)에 속한다.
그렇다면 석가모니 붓다가 속한 석가족은 어느 인종에 속했을까? 전통적으로 동아시아 사람들은 같은 인종인 몽골 황인종일 것으로 간주한다. 동남아시아의 태국에서도 몽골 인종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고대 인도의 종교, 문화 등을 연구하기 시작한 유럽 학자들은 붓다를 백인종의 일족으로 여긴다. 최근 국내에 초청된 미국 인디애나대학의 크리스토퍼 벡위드(Christopher Beckwith) 교수는 석가모니 붓다를 스키타이인(Scythian)이라고 주장한다. 스키타이인은 고대 이란계 민족으로 인도 역사에서도 C.E. 1세기에 즈음하여 이주한 사카(Saka)족과 관련이 있다. 마찬가지로 최근 중앙아시아 우크라이나의 저명한 학자도 비슷한 주장을 하며 우크라이나 국회신문에 논문을 실었다. 마찬가지로 국내에서도 최근에 붓다의 스키타이인설을 주장하는 단행본이 출간되었다. 그런데 붓다가 이란계의 스키타이인이라고 한다면 유럽 백인 계통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유럽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이란인과 유럽인 그리고 고대 인도 아리안은 모두 같은 인종계통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까지 인도아대륙에 있는 석가족의 후예가 누구인지는 증명하지 못한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석가족의 후손들이 현재 인도에서 ‘샤끼방세’라는 카스트 이름으로 살고 있다고 보는 입장도 있다.
과연 붓다는 유럽 계통(백인종) 인종이었을까? 아니면 몽골 계통(황인종)이었을까? 아니면 드라비다(Dravida)인이나 호주-아시아(Austro-Asia)와 같은 인종 계통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이러한 인종들 간의 혼혈이었을까? 호주-아시아와 드라비다, 그리고 몽골계 그리고 유럽계는 모두 인더스 문명 이래 인도아대륙에 널리 퍼져 살면서 인도 역사를 이루어 온 주요 인종들이다. 특히 고고학적 발견에 의하면 드라비다인과 호주-아시아계는 인더스 문명의 주체자로 이야기된다. 이후 아대륙으로 이주한 인도-유럽어를 쓰는 아리야인이 드라비다인이나 호주-아시아인을 제압하고 아대륙의 새로운 주인공으로 부상한 것으로 본다.
인종 계통상에 있어 인도-아리야인은 인도-유럽인 가운데에서도 인도-이란인(Indo-Iranian)의 지파로 분류된다. 때문에 이들은 원래 인도아대륙에 살았던 사람들이 아니라 유럽과 인도아대륙의 중간에 있는 어느 지점에 살다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서쪽의 유럽과 동쪽의 인도 등으로 민족 이동을 한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한 시점은 대략 B.C.E. 1,700년경으로 인도-아리야인은 먼저 아대륙의 서북부 지역에 유입되었고 차츰 동남쪽의 야무나 강과 갠지스 강을 따라 이동하였다. 이러한 이주와 정착에 따른 흥망성쇠가 바로 아리야인을 중심으로 서술되는 인도 고대사이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2,600여 년 전에 동북부의, 석가모니가 속한 석가족 또한 이러한 아리야인들의 연장선에 있는 부족의 하나로 보고 있다. 따라서 불교의 기원과 관련하여 대부분의 서구학자나 인도학자 그리고 이에 영향을 받은 일본의 학자들도 석가족이 서북부로부터 동진한 아리야인으로 설명한다. 다시 말해 붓다가 속했던 석가족도 서북부에서 동북부로 이주한 아리안계의 한 부족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이러한 구도로 고대 인도사나 불교사를 서술한다. 이 같은 경향은 영국의 유명한 인도사학자인 빈센트 스미스(Vincent A. Smith)가 석가족을 아리야계가 아닌 티베트 계통의 몽골계라 주장하자 충격으로 받아들여지고, 그리고 다른 학자들에 의해 조롱을 받았다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다. 이처럼 서구학자들은 대체로 석가족이 아리야계로 자신들과 동족이었을 것으로 믿는 경향이 강하다.
이에 우리나라에서도 별다른 검토 없이 석가족이 아리야인이라는 전제의 설명과 서술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왜 일찍이 유럽 학자들은 석가족을 자신들과 같은 인종적 계통으로 보려는 전제를 하였는지를 비판적으로 검토해보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2. 석가족의 유럽계 인종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

1) 인도-유럽어족의 불교 경전어가 인도-유럽인을 지시하는가?
유럽인에 의해 인도학이 연구되면서 고대 인도의 종교·철학을 포함한 모든 인도 문화나 사상이 베다(Veda)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 베다문화를 형성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인도아대륙 밖에서 이주해간 자신들의 조상들로 보았다. 그것은 베다의 연구와 함께 베다의 언어가 그들의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와 같은 언어 계통임을 알게 되면서이다. 나아가 그들은 불교와 자이나교의 경전어 또한 베다의 언어와 같은 어족(語族)에 속해 있음을 알았다.
현존하는 불교 경전어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빠알리어라 할 수 있는데 그러기에 석가모니 붓다와 그의 부족 집단 또한 빠알리와 같은 아리야계 언어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에서도 빠알리어가 석가모니 붓다와 그의 제자들이 직접 사용한 언어라도 되는 것처럼 이야기되는 경우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왜냐하면, 불멸 100년이나 200년 이후에 인도 각지에 쓰인 아쇼까 비문어(B.C.E. 3세기)와 비교해 볼 때도 빠알리어는 아쇼까 비문어보다 늦은 단계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 일반적으로 쓰인 일상어나 회화어라기보다는 불교경전을 담기 위한 목적에서 사용된 일종의 인공적 언어의 성격으로 파악된다. 지역에 있어서도 아소카 비문어와 관련해 볼 때 불교 발생 지역인 마가다(Magadha) 지역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서북부 인도가 유력하게 논의된다. 즉 불교 최고(最古)의 경전어인 빠알리어라 할지라도 이를 통해 그 이전의 정확한 언어적 상황을 짐작하기는 어렵다. 
언어와 인종 문제와 관련하여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과거에는 인종 집단과 어계(語系)를 같이 보려고 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현재의 문화인류학이나 언어학에서 보여주고 있는 주목할 만한 성과는 어계와 인종이 꼭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즉, 인종적으로 같은 집단이라 할지라도 단일한 어계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고 여러 어계의 다양한 종류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도도 마찬가지로 인도-유럽 계통의 언어를 쓴다고 해서 인종적으로 모두 인도-유럽인이 아니고 인도-유럽인 가운데도 드라비다 계통의 언어를 쓸 수 있고 드라비다인 가운데도 인도-아리야어를 쓴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이나교나 불교가 인도-아리야인이 아닌 부족들에 기원을 가지지만 언어적으로 인도-아리야어를 사용했을 수 있다는 말이다. 대표적으로 찻떠르지(S.K. Chatterji)의 주장에 따르면 티베트-버마계의 석가족과 다른 동북부 부족들이 일찍이 인도-아리야어화 한 부족들로 본다.
만약 그렇다면 현존하는 대부분의 자이나교나 불교 경전들이 인도-유럽어 계통의 언어로만 전해 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한 주장에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 하나의 근거는 석가족의 근친종족인 릿차위(Licchavi)족이 티베트-버마계 부족으로 주장되었는데 그들이 아리야어의 반설음(retroflex)을 발음하기 힘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근거를 후세의 문헌은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으로서도 인종과 어계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과 불교 경전어로서 석가족을 인도-아리야인의 일족(一族)으로만 단정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예는 고대 인도에 있어 드라비다 사람의 샤따와하나(Śātavāhana) 왕조의 쁘라끄리뜨 비문에서도 비아리야인이 아리야어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과거에 석가족이 살았던 위치에서 조금 위쪽 지역에 살고 있는 네팔의 네와르(Newar)족은 티베트 계통의 사람들인데 그들이 인도-아리야어인 산스끄리뜨를 배우고, 산스끄리뜨 문헌들을 보존해 온 것은 지금으로부터 적어도 2,000년 이상 이전의 시대로부터일 것으로 보고 있다.


2) 불교 경전 속의 아리야(ariya)라는 말이 인종을 의미하는가?
불교 경전어의 인도-아리야어 전승과 함께 석가족이 인도-유럽인 계통이었다고 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주장은 ‘성(聖)’으로 한역된 초기불교 경전의 아리야(ariya)라는 말을 통해서이다. 초기경전에서 4성제는 짯따리 아리야 삿짜니(Cattāri ariya-saccāni) 그리고 8정도는 아리야 앗탕기까 막가(ariya-aṭṭhaṅgika-magga)라고 하는 데에서 볼 수 있듯이 아리야라는 말이 많이 사용되었다. 그런데 기존의 유럽 학자들은 이것이 바로 석가모니의 석가족이 인종적으로 아리야족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전반의 분위기가 잘 반영된 것 중의 하나는 P.T.S(Pāli Text Society)의 《빠알리어 사전(Pāli-English Dictionary)》에 기술된 ‘ariya’라는 말의 항목에서이다. 여기서 ariya라는 말에 대해 여러 가지 뜻을 설명하는데 그 가운데 첫 번째의 뜻으로 아리야족을 지시하는 인종적 의미라고 강조하고 있다.
많은 학자는 붓다 시대에 동북부 인도에서 아리야족이 비(非)아리야계 부족들을 제압하고 아리야인의 식민(植民)이 완성된 것으로 본다. 이러한 흐름은 인도학이 서구에 의해 본격적으로 시작된 18세기 후반부터이다. 그래서 유럽어의 인도 관련의 글에서 arya라는 말은 흔히 the Aryan tribe, the Aryan people 그리고 the Aryan race라는 말로 빈번하게 쓰이고 석가족과 관련하여서는 an Aryan tribe, named the Sakyas라는 말에서처럼 매우 구체적인 인종적 의미로 쓰이는 경우를 찾아볼 수 있다.
이는 막스 뮐러(Max Müller) 이래 다른 서구학자에 의한 산스끄리뜨 문헌의 번역이나 리즈 데이비스(T.W. Rhys Davids) 이외의 빠알리 경전의 번역에서부터 시작된 경향이다. 그리고 현재의 인도학·불교학 관련의 책자나 논문에서 크게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인종적 의미를 담은 채 정착되어 있다. 현재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권위 있는 고대인도 언어학자인 인도계 데스판데(M.M. Deshpande)에게도 이어지고 있다.
그렇지만 과연 ariya라는 말이 불교 경전을 포함해서 고대 인도 문헌에서 전적으로 인종적인 의미로만 사용되었을까? 고대 인도 문헌에서 ariya라는 말이 처음으로 나타나는 곳은 《리그베다(Ṛg Veda)》이다. 마찬가지로 같은 인도-유럽어계에 속하는 고대 페르시아의 아베스타(Avesta) 경전에는 나타나지만, 고대 유럽의 문헌에는 나타나지 않는 말이다. 그래서 이 말이 본래 그 어떠한 인종적인 의미도 담고 있지 않고, 오로지 숭배 대상의 차이에서 쓰인 말이라는 주장도 있다. 나아가 같은 인종 집단을 의미했다기보다 같은 언어집단을 의미하는 말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샤르마(R.S. Sharma)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Arya 문제를 깊이 연구한 학자들이 도달한 결론은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꼭 같은 인종이나 민족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말과 관련하여) 단일한 인종을 나타냈다기보다 차라리 원시 인도-유럽어라는 개념 속에서 이 말을 생각하고 있다.

이는 ariya라는 말이 인종을 나타내는 개념보다도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의 집단을 지시했던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최근의 언어학이나 문화인류학의 성과에 따라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3) 부계사회와 고따마(Gotama)는 유럽계를 의미하는가?
인도아대륙의 역사에서 부계제 사회와 모계제 사회로 아리야와 비아리야계를 구분하려는 오래된 시도는 다시 석가족과 관련해서도 적용하고 있다. 그것은 “석가족의 사회가 부계사회로서 모계사회가 아니라는 점도 석가족이 아리야계 인물이라고 결론짓는 하나의 증거가 되고 있다.”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아리야계 이전의 아대륙의 사회, 특히 인더스 문명권의 사회를 일방적으로 모계제(母系制) 사회로 단정한 결과이다. 이는 인더스 문명권에서 발견된 여신 숭배 흔적이 바로 모계사회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려 했던 것에 근거를 두고 있다. 현재는 인더스 문명권의 사회도 부계제였다고 논의되고 있지만 설령 모계제라 하더라도 인더스 문명이 몰락한 이후 붓다 시대의 석가족까지 거의 1,000년 이상을 모계제 한 제도로 지속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따라서 부계제나 모계제 사회로 아리야와 비아리야계를 구분하는 것 자체가 무리이며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고따마(Gotama)는 석가모니 붓다의 성(姓)이라고 초기불교 경전은 전한다. 베다의 유명한 리쉬(Ṛsi)인 Gotama 혹은 Gautama의 가계와 관련시켜 사끼야(Sakya)족의 고따마 또한 아리야계로 보려고 한다. 그렇지만 서로 다른 점은 베다에 나타나는 Gotama 혹은 Gautama는 바라문 계급에 속하는 반면, 사끼야족의 고따마는 무사 계급(Sk. Ksatriya)으로 불린다는 것이다. 다시 이러한 중요한 차이와 함께 같은 초기불교 경전인 디가 니까야(Dīgha Nikāya)의 《암바타 수따(Ambaṭṭha Sutta)》에서는 석가모니의 친설(親說)의 형식을 빌어 사끼야족의 선조는 옥까까(Okkāka) 왕이라고 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베다의 Gotama라는 리쉬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점이다.
초기불교에서 고따마는 주로 붓다의 지칭으로 주로 외도(外道)들에 의해서만 불린다. 하지만 다른 사끼야 출신 비구들에 대한 쓰임새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아누룻다(Anuruddha), 아난다(Ānanda), 밧디야(Bhaddiya), 낌빌라(Kimbila), 바구(Bhagu), 데와다따(Devadatta) 그리고 우다이(Udāyī) 등이 모두 석가모니 붓다의 친족으로 나타나는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고따마(Gotama)라는 족성이 사용된 용례는 나타나지 않는다. 극히 예외적으로 초기 빠알리 경전의 단 한 군데에서 석가모니 붓다가 그의 친족 제자들을 고따마라고 부르는 경우가 나타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이른 시기부터 초기불교 경전의 저자 혹은 편집자는 석가모니 붓다를 베다 시대의 유명한 리쉬인 Gotama와 연계시킴으로써 그가 종교적으로 뼈대 있는 가계의 후손임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베다에 나타나는 유명한 리쉬들을 바라문 가계의 시조로 삼는 풍조는 원래 바라문들에 의해서이다. 그들만이 나머지 세 계급에 대해 특별히 선택받은 족성이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유명한 리쉬들과 자신의 가계를 연계시켜 바라문 계급의 권위를 올렸다. 이러한 바라문들의 경쟁은 바라문이 아닌 집단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초기불교의 몇몇 경전에서 그러한 시도와 예를 찾아볼 수 있는데, 이것은 차라리 초기불교 작성자에 의해 바라문들의 행태를 흉내 내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초기불교 경전에서 바라문계의 전통적인 사성계급의 순서를 부정하고 의도적으로 무사 계급을 첫 번째로 위치시켜 강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바라문들을 따라서 바라문 계급과 전혀 무관한 석가족에 베다의 리쉬들을 끌어들여 석가모니 족성의 위치를 승격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초기불교 경전은 석가모니 붓다와 늘 경쟁 관계에 있는 외도들에 의해서만 고따마라는 성이 불리도록 하였는지 모른다.
베다 시대의 유명한 리쉬와 후대 부족들 간의 가계 연결이 실제로 역사적인 고리가 있었던 것으로 볼 수만은 없다. 인도사에서 남인도의 드라비다계 부족들이나 아쌈 지역의 티베트-버마계 부족들 그리고 호주-아시아계 부족들 가운데에서도 그러한 예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베다뿐만이 아니라 다른 고대 인도의 신화 속에 나타나는 영웅들을 선조로 하는 ‘족보 만들기’는 현재의 인도에 있어서도 계속 진행되고 있다. 그러므로 석가족의 성이 고따마라 할지라도 이것이 바로 아리야 인종을 나타내는 결정적인 증거로 생각할 수는 없다.

4) 앙기라사, 옥까까, 아딧짜반두라는 말은 인종적 의미인가
우리나라에서도 석가족이 아리야계 부족일 것이라는 구체적인 입장을 밝히는 경우도 있다. 이는 초기 빠알리 경전에서 석가족을 옥까까(Okkāka, Sk. Ikṣvaku) 왕을 시조로 잡는 것과 태양족(Ādiccabandhu)과 석가모니 붓다를 앙기라사(Aṅgīrasa)로 비유하는 점을 통해서이다. 이것은 오랫동안 서구에 의한 고대 인도 신화의 연구에 따른 설명이기도 하지만, 문헌적인 그리고 인도사의 전반적인 양상을 통해 볼 때 이는 설득력이 없다.
고따마라는 성과 관련하여 석가족을 아리야계로 보려는 또 다른 말이 앙기라사이다. 이는 베다 종교에서 제의를 수행한 10대 리쉬의 이름 가운데 하나로 나타난다. 《리그베다》에서부터 화신(火神) 아그니(Agni) 숭배의 전설적인 리쉬의 이름으로 나타나 같은 베다 안의 다른 많은 리쉬들이 자신들의 조상으로 삼고 있다. 이후 고대 인도나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부족들이 덩달아 이러한 리쉬들과 자신들의 족보를 연결시키고 있다. 이러한 앙기라사 계통에 고따마 성이 속한다고 베다 종교 전통에 나와 있다. 또 다른 바라문 문헌에는 고따마 성이 앙기라사를 선조로 한다고 하여 쁘라와라(Pravara) 의식에 같이 나열되어 있기도 한다. 그리고 초기불교 경전에서도 석가모니 붓다가 앙기라사로 비유되고 있다. 따라서 석가모니가 인도-유럽계, 즉 인도-아리야인임이 증명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초기불교 경전에서 앙기라사는 다른 수많은 석가모니 붓다를 찬탄하는 명호(名號) 중의 하나로 단지 몇 번에 걸쳐 나타나는데 대부분이 석가모니를 빛과 광명의 존재로 찬탄하기 위한 수식어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나아가 고따마의 성과 함께 앙기라사 가계는 사제계급인 바라문으로 나타난다는 점 역시 무사 계급으로 기술된 석가모니의 석가족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리고 《리그베다》 자체에서도 앙기라사는 전설적 존재로 기술될 뿐 역사적인 존재로 보지 않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후대의 여러 씨족들의 시조로 표현되는 경우가 지적되고 있듯이 고대 인도에서 유명한 신화적 존재를 자신들의 씨족들의 시조로 결부시켜 추앙해 왔던 것은 특정한 인종을 떠나 고대나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이를 가지고 역사적인 의미에서 석가족의 인종을 지시하는 것으로 단정하려는 것은 앙기라사와 관련한 전체적인 맥락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음으로는 《암밧따 숫따(Ambaṭṭha Sutta)》에서 석가모니의 친설을 빌어 석가족의 조상은 위에서 논의한 베다의 신격이나 바라문 계급의 리쉬와는 전혀 무관한 옥까까라고 하는 무사 계급의 왕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무사 계급으로 지칭된 석가족 내에 바라문 계급이 없었고, 단지 정치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부족 집단임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빠알리의 옥까까(Okkāka)는 산스끄리뜨형의 익쉬와꾸(Ikṣvāku)와 같은 말로 보지만, 이에 대해서는 음운학적인 논란의 여지가 있다. 뿌라나(Purāṇa) 문헌에서 익쉬와꾸는 ‘아리야족의 태양계 씨족의 첫 왕’이기 때문에 석가족 또한 아리야족 즉 인도-유럽인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뿌라나 전통에 의하면 고대의 인도 종족들은 두 가지 계보로 나누어진다. 태양족(Sūryavaṁśa)과 달족(Candravaṁśa)이 그것이다. 그리고 태양족이라고 하는 부족은 아리야계라고 보고 달족은 비아리야계로 하는데 사실은 이러한 구분 자체에 설득력이 없다. 이 또한 앞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고대인도 부족들이 과거의 전설적인 영웅들을 자신들의 시조로 갖다 붙이려 했던 것 이상의 역사적인 사실이 담겨 있는 것으로 볼 수는 없다. 그것은 드라비다계의 남인도 제(諸) 부족들도 자신들의 조상을 익쉬와꾸 왕으로 구하고 있는 예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서 익쉬와꾸가 아리야계라고 하는 것에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원래 익쉬와꾸는 뿌루(Pūru)족의 왕자 계보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뿌루족의 인종적 성격이 무엇이냐에 따라 익쉬와꾸 또한 추정할 수 있는데, 《리그베다》에서 뿌루족은 다섯 부족과의 동맹 부족체의 하나로 오히려 아리야족을 공격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그중의 야두(Yadu)나 투르바사(Turvaśa) 부족은 아리야족의 적(敵)인 다사(Dāsa)로 불리고 있다. 그리고 뿌루족 역시 그들의 언어를 므리드라왁(mṛdhravāc)이라 하였다. 이것은 베다에서 아리야족이 아닌 다사의 ‘알 수 없는 말’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으며 일반적으로 아리야계가 아닌 선주민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경멸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에 따르면 뿌루족과 함께 익쉬와꾸가 비아리야계라는 인종적 성격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석가족을 아딧짜반두(Ādiccabhandhu) 즉, 태양의 후손이라 했기 때문에 아리야계라는 주장이다. 이는 앞의 익쉬와꾸가 태양족이라 하여 아리야계라 하는 주장과 같은 맥락에 있다. 이것은 막스 뮐러 이래 서구학자들에 의해 아리야족은 태양을 숭배하여 스스로 그 후손이라고 주장했기에 태양 숭배를 보여주는 부족은 바로 아리야계 사람을 의미한다고 본 것이다. 이 주장의 문제는 아리야족 이외의 다른 인종들은 태양신 숭배를 하지 않았다는 전제이다. 하지만 아리야 사람이 인도아대륙에 진출하기 이전의 인더스 문명권은 물론 현재의 비아리야계의 여러 부족들 또한 분명히 태양 숭배를 하고 있음이 잘 밝혀져 있다. 마찬가지로 다른 문명권에서도 자신들을 태양의 후손이라 결부시켜 태양을 숭배되는 예는 허다하다.

5) 사성계급은 인종 구성과 관련 있는가
석가족을 아리야계로 보려는 또 다른 태도의 하나는 석가족이 바라문 사회의 사성계급 구조 안에 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사성계급 또는 마지막 천민계급을 제외한 상층의 세 계급만이 아리야라는 인종 집단을 형성하고 있다고 하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례 중의 하나는 대표적으로 석가족과 근친 종족으로 생각되는 릿차위(Licchavi)족의 몽골 인종설이 빈센트 스미스에 의해 제기되자 이에 대한 반박으로 석가족이 바라문 사회의 사성계급 제도에 속해 있는 아리야계의 무사 계급임을 상기시키면서 몽골 인종이 아니라고 반박하고 있다는 것이다. 래이차우두리(H.C. Raychaudhuri)와 로(B.C. Law)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인도사회의 특수한 성격으로 알려진 사성계급 제도가 본래 드라비다 사람들로부터 기원한다는 설도 있지만, 고대 인도에서 보여주는 것은 사성계급은 단일한 인종이나 민족뿐만이 아닌 잡다한 민족과 인종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음이 증명되고 있다. 즉, 바라문 종교 체제를 중심으로 하는 아리야 계통만이 사성계급 속에 들어 있지 않았음은 고대 인도사를 통해 많은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비아리야계로 보이는 수많은 고대 인도의 부족들이 모두 사성계급 속에 편입되어 있다.
그렇지만 원래 붓다가 속했던 석가족과 인근해 있었던 당시의 부족들은 엄격한 의미에서 사성계급에 속하지 않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석가족과 같은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모두 무사 계급(Khatthiya)으로만 구성되어 있지 바라문이나 상인 계급(Vessa), 그리고 천민(Suddha) 계급을 말하고 있지 않다. 즉 사성계급이란 말 그대로 네 가지 계급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오로지 한 계급만으로 이루어진 사회나 집단이라면 바라문 사회의 사성계급과는 다른 차원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찻떠르지(A.K. Chatterjee)가 “사끼야(Sakya) 부족 내에서는 어떠한 바라문들이 있었다는 언급이 없다. 그렇지만 이웃의 꼬살라(Kosala) 대국에 많은 바라문들이 언급되어 있다.”라고 밝히는 이유이다. 당시 석가족이나 인근에 있었던 동북부의 부족들도 이와 같은 점에서 자신들을 무사 계급으로 부른 듯하지만, 실제로는 정통 바라문 사회의 4성계급 중의 무사 계급과 같이 볼 수 없다.
석가모니 붓다 시대의 석가족의 근친 부족인 말라(Malla)족이나 릿차위(Licchavi)족은 바라문계의 마누법전이 성립할 시기까지 내려오는데, 여기에서 그들은 브라띠야(Vrātya)로 불린다. 바라문 문헌에서 브라띠야는 아리야족 아닌 이질적인 집단이나 또는 천민계급으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석가족은 말라족이나 릿차위족과 함께 브라띠야의 일원으로서 바라문 사회의 분화된 사성계급 제도와는 달리 상가(Saṁgha) 체제로서 동등한 지위의 부족 집단 사회였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그러므로 바라문교의 사성계급과 관련하여 석가족을 아리야계로 보려는 것 또한 타당하지 않다.

3. 마치는 말

우리는 나치 히틀러의 가공할 백인 우월의 인종주의 구호가 다름 아닌 아리야니즘(Arianism)이라는 말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지금도 미국이나 유럽 등지의 백인 우월주의자들은 과거 아리얀(Aryan)의 영광을 거론하며 유럽계를 중심으로 다른 민족과 인종을 배타적으로 차별하고 공격한다. 그들은 이렇게 인종을 우열로 위계화하는 인종차별주의도 바로 아리얀이라는 말을 곧잘 사용한다. 석가모니 붓다가 속한 석가족의 인도-유럽 인종설은 유럽인의 인도 진출 이후 그 지파(支派)인 아리야인만이 인도사를 주도한 것으로 생각하려는 서구 학계의 경향에 기인한다.
이러한 경향에 따라 선주민인 호주-아시아계나 드라비다계 그리고 티베트-버마계와 같은 비아리야 사람의 인도 문명에 대한 역할이나 기여도는 거의 소외되거나 경시되어 왔다. 다만 아리야라는 말을 통해 아리야 중심 사관이 정착되어 석가모니 붓다의 석가족 또한 동진해 온 고대 아리야인의 일족으로 전제되고 주장되어 왔다. 그러한 주장들 가운데 주요한 이유는 현존하는 불교나 자이나교의 원전적 성격의 모든 경전이 인도-유럽어족에 속한다는 것과 함께 그러한 문헌 안에서 쓰인 아리야라는 말을 통해서 석가족이 바로 인도-유럽어 계통의 언어를 사용한 아리야인이라고 본 것이다.
또한 고따마(Gotama), 앙기라사(Aṅgīrasa), 옥까까(Okkāka) 그리고 아딧짜반두(Ādiccabandhu)라는 말과 관련하여서도 아리야족의 후손으로 주장되었고, 더 나아가 아리야인의 사회만을 부계제나 사성 계급과 관련지어 석가족의 아리야 인종설이 주장되어 왔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서구 학계의 주장들은 시기적으로 인종과 언어의 상관관계, 그리고 불교 경전어의 역사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전에 가정되고 주장되기 시작한 이해이다. 즉 그런 주장들은 아리야만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제도나 신화 이해에 따른 것이었다. 따라서 현재의 시점에 있어 이러한 점들을 들어 석가족이 아리야계 인종이라고 단정하려는 기존의 입장은 크게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없다.

지금까지 본고는 석가족을 인도-아리야계 즉, 인도-유럽인의 일족(一族)이라고 전제되고 주장되었던 기존의 입장들을 검토하고 비판해 보았다. 인류는 근대 이후 유럽의 백인 우월주의의 발흥으로 홍역을 치른 이후 특정 인종 문제를 쟁점화시키는 것을 금기시해 오고 있다. 본고 또한 문제 삼고 있는 점은 암묵리에 고정화되어 있는 기존의 유럽 중심의 석가모니 붓다에 대한 인종관이지, 새삼스럽게 석가모니 붓다가 어느 인종에 속했는가를 밝혀 부각시키려는 것은 아니다. 이유야 어떻든 간에 불교라는 종교 속에서 석가모니 붓다가 어느 인종 또는 어느 민족에 속하였는지는 전통적으로 크게 문제시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불교는 어떠한 인종적, 민족적, 계급적 선민의식을 철저히 배제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더하고 싶은 말은 현재 네팔에는 석가족이라는 이름의 부족이 있지만 그들이 석가족의 후손임을 학문적으로 증명하지 못한다. 이는 미얀마의 미얀마족을 위시하여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불교국의 많은 민족이 스스로가 석가족의 후예임을 주장한 경우와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앞에서 말한 석가족을 스키타이인(Scythian) 계통의 사카(Saka)족이라는 주장도 발음상 유사한 이유 등을 들어 오래전부터 유럽 학자들 가운데 주장이 제기되어 왔으나 설득력을 얻지 못한다. 사실 피부색을 기준으로 인종을 구분하자면 붓다의 제자들 가운데는 바라문 출신이라도 검은 피부 빛을 가진 사람들이 상당히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상층 석가족이라도 ‘흑인 석가(Black Sakya)’는 초기경전에서만도 많이 열거할 수 있다. 여러 가지 점에서 필자는 석가족을, 인도 전반의 역사에서 보여주듯이 혼혈이 상당히 진행된 부족으로 본다. 여기에는 피부 빛이 검은 호주-아시아계와 함께 티베트 몽골계의 영향이 함께 논의될 수 있다. 이는 앞으로의 연구과제이다. ■

 

조준호 / 한국외대 인도연구소 연구교수. 동국대 및 인도 델리대 불교학과 석사·박사. BK 21 불교사상연구단, 동국대 불교학술원 전임연구원,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교수 등 역임. 저서로 《우파니샤드 철학과 불교》 등과 역서로 《인도불교 부흥운동의 선구자―제2의 아소카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 주요 논문으로 〈대승의 소승폄하에 대한 반론〉 〈위빠사나 수행의 인식론적 근거〉 등이 있다.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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