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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병고와 죽음에 대한 불교의 인식과 가르침 / 양정연
[58호] 2014년 06월 01일 (일) 양정연 zamyangtibet@hanmail.net

1. 들어가는 말

모 방송국에서 〈생로병사의 비밀〉이란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방송하고 있다. 건강을 지키고 질병을 이기는 방법 등 유익한 정보들을 소개해주는 까닭에 일부 흥미 위주의 드라마보다 시청률이 더 높다고 한다. 사람들의 관심이 양에서 질로 이동하면서 ‘오래 사는 것’보다 ‘어떻게 오래 살 것인가’에 대해 흥미를 더 갖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심은 ‘사는 것’에 대해서만 아니라 죽음이나 임종 과정에서도 보인다. 호스피스의 범위가 임종환자를 돌본다는 기존의 개념에서 인간 존엄성, 인간의 신체적, 정서적, 사회적, 영적인 측면으로까지 확장되어 정의되는 것을 보면 삶의 전반적인 측면에서 이러한 점을 논의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삶을 단순히 현생이 아니라 윤회적 세계관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존재의 형태 변화에 따라 금생에 태어나서[生有] 살아가고[本有] 죽음을 맞이한 뒤[死有], 다음 생에 이르기 전 단계인 중음의 존재[中有]로 설명한다. 불교에서 태어남과 늙음, 질병, 죽음을 ‘고(苦)’라고 말하는 것은 단지 심신의 통증이나 아픔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상하다는 것과 관련된 종교적인 해석이지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러한 불교의 가르침에 대해 비관적인 입장이라고 단정해버리기도 한다.
윤회세계에서 벗어나는 해탈이 궁극적인 가르침이라는 점에서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과정은 해탈과 대조적인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 진정한 목적이라면 현재의 삶은 임시적인 것이 되고, 해탈이 행복한 것이라면 이 세계는 불행한 것이고 고통인 것이 된다. 윤회세계가 고통이라면 현생의 삶이 건강하고 행복하다고 하더라도 진정한 의미에서 그것은 아닌 것이 된다.
그렇다면 불교에서 현생의 의미는 해탈이나 열반과의 관련성에서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음에 이르는 단계는 일상적인 삶의 과정에서 매듭이 될 수도 있고 성장점이 될 수도 있다. 일상생활에서 경험되는 이러한 단계들이 싯다르타 왕자의 사문유관(四門遊觀) 체험으로 이어질 수 있는가는 근본적인 자각과 인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2. 병고에 대한 불교 인식

불교는 윤회세계를 전전하는 유정들의 질병을 고쳐주는 가르침으로서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는 질병의 원인을 두 가지, 즉 업력에 따라 발생하는 것과 현세의 생활과 관련되어서 발생하는 것으로 말한다. 그리고 생활과 관련된 병의 원인으로는 몸과 마음의 병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병에는 두 종류가 있다. 전생에 행한 업보 때문에 여러 가지 병을 얻으며, 금생에 냉열의 풍(風)이 발생하기 때문에 또한 여러 가지 병을 얻는 것이다. 금생의 병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내병(內病)으로 오온이 조화롭지 못하여 굳어진 지병이다. 둘은 외병(外病)으로 달리는 수레, 달아나는 말, 눌림, 추락, 병기, 무기에 따른 여러 가지 병이다.

업에 따른 병은 종교적으로 해석된다는 점에서 병의 원인과 치유 역시 종교적인 해석을 통해 설명된다. 논에서는 병을 얻게 되는 인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생에 채찍이나 몽둥이질, 고문, 감금하고 결박하기를 좋아서 하고, 갖가지 번뇌가 발생하기 때문에 금생에 병을 얻게 된다. 현생의 병은 몸을 양육할 줄 모르고 음식을 절제하지 않고 눕고 일어나는 것이 규칙적이지 않기 때문에 여러 가지 병들이 생기는 것이다. 이와 같이 404가지 병이 있는데 부처의 신력으로 병자를 낫게 할 수 있다.
우리의 몸은 지수화풍(地水火風)의 화합으로 설명된다. 머리털, 손톱, 치아, 피부, 근육, 뼈 등 단단한 성질은 ‘지대(地大)’이며 침, 눈물, 고름, 피, 진액, 대소변 등 습한 성질은 ‘수대(水大)’, 체온 등 따뜻한 기운은 ‘화대(火大)’, 호흡이나 피의 흐름 등 움직임은 ‘풍대(風大)’로 귀결된다. 404가지의 병은 사대의 부조화로 인해서 발생하는 것으로, 사대 각각에 101가지의 병이 있다고 설명된다. 불교의학에서는 기본적으로 인체의 생명 유지란 점에서 사대를 통해 인체의 구성 요소와 치병의 요인들을 이해하고, 약 이외에도 음식을 통해 치유하는 방법을 모색한다.

풍병인 경우에는 유지(油脂)를 사용해 치료한다. 열병은 소(酥)를 사용해 치료한다. 수병에는 꿀을 사용한다. 잡병은 위의 세 가지 약을 사용해 치료한다.

음식을 통한 조절은 몸의 보양과 치료와 관련되지만, 적절하지 않은 음식을 섭취했을 경우에는 오히려 병을 일으키기도 한다. 일상에서 올바르지 못한 생활태도 또한 질병의 원인이 된다. 사람이 얻게 되는 병의 열 가지 인연을 보면, 다음과 같이 인체의 내적인 측면에서 설명한다.

오래 앉아만 있고 밥을 먹지 않는 것, 절제 없이 음식을 먹는 것, 근심이 많은 것, 피로가 과도한 것, 음욕, 진에, 대변을 참는 것, 소변을 참는 것, 호흡이나 하품 등을 참는 것, 방귀를 참는 것이다.

사대의 부조화로 인한 생리적인 질병의 경우, 음식이나 생활태도뿐만 아니라 계절의 변화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건강한 생활을 위해서는 절제된 행위와 올바른 습관이 요구된다.
《유마힐경》에서 보이는 유마 거사의 질병은 업에 따른 병이나 생리적인 병과는 다른 내용을 보여준다.

일체중생의 병으로 내게 병이 있다. 일체중생의 병이 없어진다면, 내 병이 없어진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보살은 중생을 위하여 생사에 들어오고, 생사가 있으면 병이 있는 것이다. 중생이 병을 여읠 수 있다면 보살에게 다시 병은 없다.

지금 나의 이 병은 모두 전생의 망상으로 전도된 번뇌들에서 나온 것이다. ……사대에는 주인이 없으므로 몸 역시 무아이다. 또한 이 병이 일어난 것은 아상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범부의 경우는 전생의 업과 인과의 과보에 따라 병을 받지만, 보살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윤회세계에 머물기 때문에, 병이 들더라도 이미 그것을 고통으로 받아들이는 경계를 초월한다. 질병은 중생교화를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서 심신의 질병과 업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가르침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다.
윤회세계로 이끄는 탐·진·치 등 욕망과 번뇌는 근본적으로 무명에서 나온다. 욕망은 사물이 실체로 존재한다는 분별작용에 따른 것으로서 이러한 분별 때문에 ‘나’ ‘나의 것’이라는 생각이 일어난다. 무명을 없앰으로써 모든 생사의 고통을 근본적으로 없애는 방법은 ‘계→정→혜’ 삼학이다. 계를 수지함으로써 다양한 심리작용과 행위를 절제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 여실하게 바라볼 수 있는 혜안을 지니게 된다. 생활에서 절제된 행위와 종교적 수행에서 지계가 요구되는 이유는 건강한 삶은 물론 종교적인 완성으로 이끄는 길이 되기 때문이다.


3. 죽음 억념의 필요성

불교에서는 어떤 마음의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하는가에 따라 다음 단계의 과정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설명한다. 인과의 법칙에 따라 평소 삶의 방식이나 습관 등이 다음 단계에 영향을 미치지만, 죽는 순간의 마음가짐은 그보다 더 크게 작용한다. 왜냐하면 죽음의 과정에서 우리의 마음은 어느 때보다 더욱 간절하기 때문이다.
《람림(Lam rim)》은 죽음에 대한 억념을 수행체계의 한 과정으로 끌어들여 궁극적인 진리의 길로 나아가는 방법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수행서이면서도 좋은 죽음준비 교육 교재가 된다. 《람림》에서는 죽음을 억념하지 않았을 때 ‘무상’ ‘고’ ‘무아’ ‘부정’에 대해 4가지 전도된 견해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무상’을 ‘상(常)’으로 오해하는 견해는 죽지 않는다는 생각, 그리고 설령 죽음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도 매일 ‘아직 안 죽었어. 아직 죽지 않았어.’라고 생각하면서 그 마음은 죽지 않는다는 쪽으로 집착하게 되는 견해이다. 이러한 마음에서는 금생의 안락을 성취하고 고통을 제거하는 방편만을 사유하면서 내세와 해탈, 일체지 등의 큰 이익에 대해서는 관찰하려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며 법에 들어가려는 마음도 생기지 않는다.
몸이 항상 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자신이 현세에서 누리는 재물과 명예 등도 항상 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생각 때문에 자신의 안락을 추구하게 되고 집착을 일으켜 결국 ‘고’의 세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윤회의 세계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죽음을 억념하지 않으면 악업의 힘이 증장함으로써 그에 대한 대치법(對治法)을 설한 가르침을 저버릴 수 있기 때문에 증상생(mngon mtho)과 지선의 명근(nges legs kyi srog)을 끊어버릴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죽음을 생각하는 수행을 통해 얻게 되는 이익은 세간에서 추구하던 재물이나 명예 등이 무상하다는 것을 체득함으로써 탐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점이다. 아직 죽지 않는다는 생각과 마주칠 때 마음은 죽지 않는다는 쪽으로만 쏠리게 된다는 점을 경계하고 바로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원만함으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마음을 어떻게 일으키는가에 대해서는 업과 번뇌 때문에 받은 몸이라는 것을 늘 염두에 두고 거듭하여 무상을 사유할 것을 제시한다. 이러한 수행을 통하여 결국 몸과 향락을 여의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육신이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은 결국 두려운 마음을 일으키고 그러한 마음으로 수행할 기회를 얻게 됨으로써 오히려 죽을 때에는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람림》에서 죽음은 종교적 수행으로 들어가는 첫 단계라고 할 수 있다. 현생과의 단절에 따른 공포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종교적 완성의 길로 승화시켜 나아간다. 현생과의 관계에서 육체의 무상을 억념하도록 하고 윤회 세계를 사유함으로써 정신적 완성을 모색하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수행의 내용은 세 가지 근본(rtsa ba gsum), 아홉 가지 인상(rgyu mtshan dgu), 세 가지 결단문(thag bcad pa rnam pa gsum)으로 제시된다.
세 가지 근본은 사유해야 하는 세 가지 법칙으로서 첫째, 반드시 죽는다는 것, 둘째, 언제 죽는지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 셋째, 죽음에 이르러서 법 이외에 어느 것도 유익하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이들 각각의 법칙에 세 가지 원인, 즉 아홉 가지의 인상을 제시한다.
첫째, 반드시 죽는다는 것에는
① 저승사자가 오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점
② 수명은 줄어들지 않은 때가 없다는 점
③ 살아가는 동안 법을 닦을 여유도 없이 반드시 죽는다는 점을 제시한다.
둘째, 언제 죽을지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에는
① 현 세계인 남섬부주 사람들의 수명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점
② 죽을 인연은 많지만 살 인연은 적다는 점
③몸이 쇠약해져 언제 죽을지 정해진 바가 없다는 점을 제시한다.
자연적인 재해든 인위적인 재해든 주위 환경의 위험에 늘 노출되어 있다는 점과 유한한 생명으로서 나 또한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점을 거듭 생각함으로써 바로 지금 정법을 수행해야 한다는 절박감을 강조한다.
셋째, 죽음에 이르러서 법 이외에는 어느 것도 유익하지 않다는 것에는
① 친족과 친구들이 아무리 사랑하고 마음 아파하며 신변을 에워싸더라도 어느 누구도 데려갈 수 없다는 점
② 소중히 하던 보물이 아무리 많아도 가져갈 수 없다는 점
③ 다른 모든 것뿐만 아니라 태어날 때 얻은 이 몸도 버린다는 점을 말함으로써 오직 법만이 귀의할 수 있는 대상이 된다는 점을 제시한다.
《람림》에서는 죽음을 수동적으로 맞이하게 된다는 점과 그러한 죽음이 중생의 삶에서 언제든지 올 수 있다는 점을 자각해야 한다고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통해 육체 이외의 존재로서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죽는다는 사실과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점에서 출발하여 죽음에 대한 본질을 사유하도록 한다.
죽는다는 법칙에 대해서는 “죽음을 사유함으로써 정법을 수행해야 한다”는 결단의 내용이 먼저 제시된다. 언제 죽을지 정해지지 않았다는 법칙에 대해서는 “지금 해야 한다”는 결단의 내용이 제시되고, 법 이외의 것은 유익하지 않다는 법칙에 대해서는 결국 “정법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 제시되고 있다. 세 가지 근본 가운데 특히 언제 죽을지 정해진 것이 없다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 왜냐하면 죽음을 통찰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죽음을 초극할 수 있는 방법, 즉 종교적인 수행이 제시되고 이를 통해서 일상적인 삶의 방식을 전환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전의 삶이 현생의 안락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었다면 죽음을 억념함으로써 새롭게 설정하게 된 삶의 방식은 궁극적인 삶의 완성을 위한 노력으로 전환하게 되는 것이다.


4. 임종 과정에서 가르침

1) 출가자의 사례
붓다가 임종 과정에 있거나 중병에 걸린 제자들을 병문안했을 때의 모습은 잡아함경에 잘 나타난다. 중병에 걸린 앗사지를 방문했을 때 붓다는 먼저 번민하는가를 묻고 계를 범한 적이 있는가를 묻는다.

“너는 후회하며 걱정하는 일이 있는가?”
“세존이시여, 저에게는 사실 후회하며 걱정하는 일이 있습니다.”
“파계한 적이 있는가?”
“세존이시여! 저는 결코 파계한 적이 없습니다.”
“계를 깨뜨리지 않았는데, 무슨 일로 걱정하는가?”

세존은 제자가 후회하고 걱정한다는 점을 먼저 파계와 연결지어 묻는다. 불교에서 계는 깨달음이라는 종교적 완성을 위한 절대적인 전제조건이기 때문에, 수행자에게 먼저 올바로 계를 수지하고 있는지를 묻고 있다. 그리고 제자가 계를 올바로 수지하고 있다면 달리 후회하거나 걱정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다시 묻는다. 앗사지는 붓다에게 이전에 병이 들었을 때는 삼매에 들 수 있었지만, 병이 심해진 지금은 삼매에 들 수 없어, 삼매에서 쇠퇴하는 것이 아닌가 사유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붓다는 문답의 형식을 통하여 걱정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깨닫게 한다.

“색이 바로 ‘아(我)’인가, ‘아와 다른 것[異我]’인가, 이것도 저것도 아닌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수, 상, 행, 식이 ‘아’인가, ‘아와 다른 것’인가, 이것도 저것도 아닌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대는 이미 색이 ‘아’가 아닌 것을, ‘아와 다른 것’이 아닌 것을,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을 보았고, 수, 상, 행, 식이 ‘아’가 아닌 것을, ‘아와 다른 것’이 아닌 것을,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을 보았는데, 어떤 이유로 걱정하는가?”
“세존이시여! 올바르지 않은 사유 때문입니다.”

올바로 계를 수지하는 일은 삼매수행을 위한 전 단계이다. 그런데 계를 철저히 수지하고 있음에도 올바로 삼매에 들 수 없는 이유가 쇠약해진 신체 때문이기도 하지만, 붓다는 ‘삼매에서 쇠퇴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사유 자체가 문제라고 지적한다. 사문이나 바라문은 삼매를 핵심으로 하고 삼매를 사문 그 자체와 동일하다고 앗사지는 생각하고 있었다. 붓다는 앗사지의 잘못된 사유를 깨닫도록 하기 위하여 오온을 올바로 바라볼 것을 말하고, 삼매에서 쇠퇴한다는 것이 교법에서 쇠퇴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말한다.
임종이 다가온 젊은 새내기 비구를 병문안했을 때도 붓다는 먼저 후회하고 걱정하는 일이 있는지를 묻고 계를 어겼는지를 묻는다. 이러한 형태는 붓다가 중병이 들거나 임종이 가까운 제자들을 방문했을 때 나타나는 정형적인 방식이다.
새내기 비구는 계를 어기지 않았음에도 아직 뛰어난 법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죽었을 때 어느 곳에 윤회하여 태어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걱정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붓다는 육근의 작용으로 접촉과 감수 작용으로 이어지는 관계가 조건으로 일어나는 것일 뿐이라는 점을 올바로 사유할 것을 말한다. “본래의 업이 청정하고서 몸을 몸이라고 보는 생각을 유지할 수 있다면 모든 마귀들을 초월할 수 있다.”고 하듯이,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을 때 연상되거나 왜곡됨이 없이 대상을 올바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새내기 비구와 앗사지 존자의 사례에서 공통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들의 걱정이나 후회가 파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오온이나 육입을 ‘아’ ‘아와 다른 것’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으로 올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는 점이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만일 항상 하지 않고 괴로운 것이면 그것은 변하고 바뀌는 법이다. 그 속에 과연 탐하고 욕심낼 만한 것이 있겠는가?

오온과 육입을 통하여 강조되는 점은 올바른 관찰이며 인식이다. 항상 하지 않는 것에 대한 탐착은 윤회를 일으키는 번뇌로 작용한다. 따라서 오온을 비롯한 대상에 대해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바라봄으로써 ‘선종(善終)’을 맞이할 수 있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2) 재가자의 사례
재가자에 대한 임종 때의 내용은 잡아함 《장수경》에 나온다. 중병이 든 장수동자(Dīghāvu, 長壽童子)에게 고통의 정도를 묻고 나서 붓다는 사불괴정(四不壞淨)에 대한 가르침을 말한다.

어리석고 들은 적이 없는 범부인 경우는 불·법·승과 성스런 계에 대한 믿음을 지니지 못하기에 공포를 지니고 또한 목숨이 끝나는 것과 후세의 고통을 두려워한다.

이렇게 말하듯이 사불괴정은 불자에게 전제되는 요소이다. 사불괴정을 성취했을 때, 불자는 현생에서의 안락은 물론 다음 생에서도 좋은 결과를 얻게 된다.
사불괴정의 성취를 통해 얻는 공덕을 보면 궁극적으로 윤회에서 벗어나는 가르침이 직접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근기가 낮은 단계의 가르침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무상’ ‘고’ ‘무아’의 가르침과 연결되어 설명된다는 점에서 사불괴정은 불교 수행의 전체적인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한역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니까야에서는 장수동자가 불환과를 얻었다고 말하고 있다.
세존은 지혜 있는 재가자가 질병으로 고통받는 재가자를 어떻게 교화할 수 있느냐는 물음에 대해 불법승 삼보에 대한 청정한 믿음을 먼저 말하고 다음과 같은 순서로 가르침의 내용을 말한다.
① 부모를 걱정하여 그리워하는가?
② 그리워하여 살 수 있다면 그리워해도 된다.
③ (그러나) 그리워해도 살아갈 수 없는데, 그리워해서 무엇하는가?
④ 그리워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훌륭함을 칭찬하고 따라 기뻐해야 한다.

동일한 방식으로 처자와 노복, 재물들에 대해 말하고, 인간 오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① 그대는 인간 오욕에 대해 생각하는가?
② 인간의 오욕은 천상의 수승한 오욕만 못하다.
③ 천상의 오묘한 욕락은 무상, 고, 공, 변해 무너지는 법이다.
④ 몸이 있는 욕락은 무상하고 변해가며 무너지는 법이다.
⑤ 몸이 있는 그리움을 버릴 수 있다면, 열반을 즐거워하는 자이므로 훌륭하다고 감탄하고 기뻐하라.

위의 가르침에서 세존은 정형적으로 삼보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먼저 말한다. 그런 뒤에 부모와 처자, 재산 등 세간에서 그리워하거나 걱정할 대상들에 대한 욕락을 버릴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말한다. 세간의 욕락은 천상의 욕락과 비교했을 때 부정적인 것이다. 먼저 인간의 애정과 오욕락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하고 생천을 희구하도록 한다. 그리고 천상세계에서의 삶 역시 윤회세계에서 본다면 무상한 것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무상’ ‘고’ ‘공’인 것을 알아서 열반적멸을 희구하게 한다. 이러한 차제적인 가르침을 통하여 범부는 세속의 안락을 추구하는 삶에서 종교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으로 전환하게 된다.
임종 과정에 있거나 중병에 든 출가자와 재가자에게 근심을 근본적으로 해소시켜 주는 핵심내용은 오온과 육입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다. 이러한 인식은 오온과 육입이 ‘아’가 아닌 것, ‘아와 다른 것’이 아닌 것,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을 올바로 본다는 것으로서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에 대한 그릇된 사유를 제거하는 것이다.
세간에서 연기에 의해 이뤄진 모든 현상은 항상 하지 않는 것이고 이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통하여 해탈이라는 종교적인 완성으로 나아가게 된다. 항상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탐하고 욕심낼 만한 것이 없게 되는 마음이 바로 염리로서, 세간에 대한 애착은 종교적 완성을 위한 추동작용을 한다.
올바른 관찰은 자신을 포함한 외적 대상의 진실을 파악함으로써 그에 대한 관심이 무의미한 것임을 체득하도록 한다. 염리심을 통하여 외적 대상을 구하려는 세간에서 마음가짐은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인식 태도를 가져오게 된다. 유신견은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기 위해서 끊어야 하는 세 가지 번뇌, 즉 유신견, 계금취견, 의심 가운데 하나로서 자신의 몸에 대한 집착을 말한다.
일체 현상에 대한 존재론적 설명은 오온과 육입처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설명된다. 그 절대성이 부정되기 때문에 그에 대한 탐착도 무의미한 것이 되며 염리하게 되는 것이다. 외적 대상을 접하면서 마음 작용이 일어나는 관계는 ‘육입→촉→수→애’라는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나타난다. 그리고 감수 과정에서 외적 대상에 대한 좋고 나쁨 등의 분별을 일으키기 때문에 왜곡된 반응이 일어난다.
감수과정의 느낌은 윤회하게 되는 탐·진·치, 삼독심(三毒心)과 연계되고 삼독심을 끊지 못하기 때문에 중생은 늙음과 병, 죽음을 떠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여실하게 알지 못하는 것이 무명이고 중생은 무명에 덮여 생사윤회를 하며 삼계의 고(苦)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여실하게 대상을 파악함으로써 외적 대상에 대한 ‘아’ ‘상’이란 존재는 ‘무아’ ‘무상’의 존재임을 알게 되고, 세속에서의 향수를 추구하는 애탐의 마음은 염리심의 마음으로 전환되어 종교적 수행을 추구하게 된다. 이러한 논리는 존재 자체에 대한 집착을 타파하고 인식적인 측면에서 진리를 확신하도록 하는 것이다.


5. 나가는 말

우리는 인생을 ‘생로병사’라는 말로 요약하여 말한다. 연속된 삶의 과정을 특정 시간과 단계로 구분하고 의미를 부여한다. 태어남은 긍정적인 것으로 축복을 받지만 늙음과 병듦, 죽음은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애써 회피하려고 한다. 사대의 화합으로 이뤄진 존재에게 병듦과 늙음, 죽음은 회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과정으로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럼에도 집착과 번뇌로 왜곡되어 진실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된다. 특히 병듦과 죽음은 현재까지 내가 경험하고 있던 익숙한 환경에서 떠날 수도 있다는 강한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불교에서 궁극적인 가르침은 윤회세계에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현재의 우리 삶은 열반을 위한 준비과정일 때 진실한 의미를 갖는다. 일상과 종교적인 생활에서 절제된 행위와 계율이 요구되는 것은 일상적인 삶을 궁극적인 삶을 위한 준비 과정으로 유지시키는 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윤회세계에서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기회인가는 ‘눈먼 거북이’의 비유에서 잘 나타난다. 이처럼 희귀한 기회를 얻은 인간이 삶을 살아가면서 일상성 속에서 그 의미를 잃어버릴 때 병듦과 늙음, 죽음은 고통으로 작용할 뿐이다. 불교의 가르침은 이러한 부정적인 단계와 과정에서 느끼는 두려움을 오히려 수행할 기회를 얻는 계기로 전환시킨다. 불교는 현재의 상황을 직시하게 함으로써, 현생의 삶이 ‘인간 의미’를 완성하는 실천의 과정이어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


양정연 / 한림대 생사학연구소 HK교수. 서울대 종교학과, 동국대 대학원 불교학과 졸업(석사, 박사). 주요 논저로 〈중국불교의 근대적 ‘자유’개념의 수용과 전개〉 〈람림(Lam rim)에 나타난 계율관 고찰〉 〈근대시기 여성 지식인의 삶·죽음에 대한 인식과 불교관〉 등의 논문과 《인간불교의 경영과 실천》(역서), 《(한 권으로 보는) 세계불교사》(공저)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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