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원의 ‘성철 읽기’에 대한 비판적 검토

1. ‘성철 읽기’가 남긴 성찬(盛饌)

선(禪)사상사에서 성철(性徹, 1912~1993) 스님(이하 존칭 생략)만큼 단기간에 그 포폄(褒貶)이 극명하게 엇갈리는 사례를 찾기란 쉽지 않다. 신회(神會, 670~762)를 둘러싼 선종 내부의 극명한 시선 차이보다 오히려 더 선명한 시선 대립을 보여주는 것 같다. 성철은 당신이 돈오점수의 원조로 규정하며 비판했던 신회보다도 더 논쟁적 대상이 되었다. 성철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한국 선불교의 현재와 미래 행보가 크게 좌우될 정도다.
성철을 둘러싼 논쟁의 원점은 명백하다. 돈오점수에 대한 강한 비판이 그것이다. 특히 지눌(知訥, 1158~1210) 스님(이하 존칭 생략)을 정면으로 공박하는 형식을 취한 것이 불씨를 더했다. 지눌이 어떤 분이던가. 돈오점수론의 종합 체계를 구성하여 돈오점수를 선종 선수행의 표준으로 정착시킨 분이 아니던가. 선종의 돈점론을 가장 체계적이고도 성공적으로 종합하여 깨달음과 닦음의 선불교적 모범 답안을 마련한 분으로 평가받던 지눌을 직설적으로 비판하고, 한국 선불교의 표준 수행 준칙으로 간주되어 온 돈오점수를 선문 정통에 대한 배반이며 정법(正法)의 최대 장애물이라고 단죄하듯 비판하였으니, 그래도 잠잠하면 오히려 한국불교계는 죽은 불교다.
성철은 또 어떤 분이던가. 유례를 찾기 힘든 초인적 수행을 통해 탁월한 깨달음을 성취한 분으로 존중받던 분이 아니던가. 그런 분이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진정성을 가지고 실참(實參) 현장에서 간화문에 투신한 학인들에게 피 토하듯 돈오점수를 비판하였으니, 돈오점수의 정통적 지위에 익숙해 있던 학인들에게는 가히 전율적 충격이었다.
한국 선불교의 관행과 토대 자체를 흔들어 버리는 성철의 돈오점수 비판과 돈오돈수 천명이 종합적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은 《선문정로(禪門正路)》(1981)이다. 《선문정로》는 ‘백일법문(百日法問)’(1967)과 《한국불교의 법맥》(1976)에서 이미 제기되었던 돈오점수 비판과 선종 정통성 비판을 종합하여 이론적으로 체계화시키고 있다. 성철의 돈오점수 비판에 대한 공식적이고 학문적인 반응이 등장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선종이 주도하는 한국불교, 한국불교의 선사상을 대변해 온 지눌, 현대 한국불교계에서 성철이 확보한 종교적 권위, 보조의 사상과 수행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송광사와 성철이 이끄는 해인사 총림이 불교계에서 지니는 위상 등, 한국불교 지형도를 구성하는 특유의 조건들이 그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성철의 거론 내용이 워낙 근원적인 실참실수(實參實修)의 문제였기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1990년에 ‘보조사상연구원’은 송광사에서 ‘불교사상에서의 깨달음과 닦음’이라는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한다. 《선문정로》 이후 10여 년 만에 비로소 성철의 돈오점수 비판에 대한 본격적인 학문적 검토를 시도한 것이다. ‘백일법문(百日法問)’이나 《한국불교의 법맥》에서부터 기산한다면, 성철의 돈점론에 대한 한국불교계의 이론적 반응에는 근 20여 년이 넘는 시간이 걸린 셈이다. 한편 ‘백련불교문화재단’은 성철 입적 후 ‘성철선사상연구원’을 설립하고(1996), 이후 매년 학술회의를 개최하여 성철의 돈오돈수 사상을 이론적으로 검토하는 작업을 지속해 오고 있다.
지눌 이래의 돈오점수 전통을 대변하는 송광사 측이 한 축이 되고, 성철을 기점으로 돈오돈수를 주목하는 해인사 측이 다른 축이 된 이 양자 구도는, 매우 유익한 결실을 창출해 왔다. 돈오점수와 돈오돈수 각각의 입장을 집중적으로 탐구해 가는 양자의 관심과 노력은, 그 구도적 진정성과 상호 존중의 상호작용을 통해 한국불교계의 돈점론 이해와 탐구 수준을 지속적으로 향상시켜 왔다. 한국불교 사상사의 뜻깊은 족적으로 기록될 것이다.
 

2. 돈점논쟁은 권력담론이다−서명원의 성철 읽기

성철이 몸담았던 시대가 전례를 찾기 힘든 정치·사회적 격변기였고, 그가 단호한 언어에 담아 던진 돈오점수 비판과 돈오돈수 천명이 그 기간에 이루어졌으며, 그로 인해 활발하게 진행된 돈점논쟁 내지 돈점론 탐구에 송광사와 해인사가 실질적인 두 축으로 역할을 해 왔다는 점은, ‘성철 및 돈점논쟁 읽기’에서 간과할 수 없는 정치·사회적 조건이다.
이런 조건들을 특히 주목하여 성철과 돈점논쟁을 정치·사회적으로 읽은 글 하나가 최근 교계의 눈길을 끌었다. 신부인 서명원 교수(이하 서명원)의 〈퇴옹 성철선사의 유물: 돈점논쟁의 정치적 배경에 대한 고찰〉(《가야산 호랑이의 체취를 맡았다》에 수록. 서강대출판부, 2013. 이 논문만은 영문으로 게재하고 있다)이 그것이다. 이 글은 꽤나 돌출적이다. ‘돌출적’이라 표현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그 관점의 특이성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논리 구성의 특이성’ 때문이다. 게다가 글쓴이가 외국인 신부의 신분이면서 성철에 대한 연구논문으로 프랑스에서 학위를 받고 국내 학계에서도 성철 연구자로 활동해 왔다는 점이 이 ‘돌출성’을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서명원처럼 신부 입장에서 간화선을 즐긴다는 분을 보면 궁금증이 도진다. 신부님이 참선에 심취할 때는 참선의 철학적 토대를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는 호기심이다. 참선은 불변의 독자적 존재에 대한 근거 없는 신념을 체득적으로 해체하는 통로임이 명백한데, 만약 그런 참선에 몰두하는 것이라면 신/인간/구원에 대한 존재론적 시선을 실체 관념에서 출발시키는 전통적 신학의 통념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궁금하다. 종교적 호적이나 신분이 참선의 자격조건은 아니지만, 인간과 구원에 대한 고유의 철학적 시선 체계에 몸담은 분이 그 철학적 전제를 전혀 달리하는 참선을 한다고 할 때는 문제가 다르다. 무아/연기에 대한 지적 수용과 무관한 참선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참선의 철학적 토대와는 무관한 마음수양 테크닉을 참선으로 생각하는 것인지, 참선의 생명력과 제대로 접속해 보기 위해 인간/구원/신 등에 관한 시선마저 참선의 철학적 조건에 상응하는 것으로 처리하는지, 그 실존적 속내에 호기심이 일어날 때가 가끔 있다. 종교 다원주의적 상호 존중 및 개방성과는 무관한, 사실 이해에 관한 사적인 궁금증이다.)
돈점논쟁은 ‘성철 읽기’의 핵심이었고, 향후에도 그 지위를 유지할 것이다. 서명원은 돈점논쟁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법을 선택한다. ‘국가의 권력 방식과 성철의 삶/사상의 방식을 연결시켜 보겠다’는 태도는 자못 신선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서명원의 논지는 한국 불교인들을 꽤나 불편하게 만드는 시선을 담고 있다. 성철의 돈점론을 비판적으로 음미하는 사람들이라도 그의 관점에 동의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 불편함이 그의 견해에 대한 근거 없는 비난으로 비화되지 않고 성철 연구와 돈점론 탐구의 발전적 계기가 되면 좋겠다. 그것이 《불교평론》의 요청에 응하여 이 글을 쓰는 소이이다. 먼저 그 논문의 요점을 가급적 상세히 정리해 본다.

문헌 자료는 물론 성철을 직접 알고 있는 스님과 재가인들과의 인터뷰에 기초하였다는 그의 논문은, ‘성철과 국가체제와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한 논증 구조를 4단계로 구성한다. ‘성철은 출가인으로서 정치와 거리를 두려고 했다’는 관점에 대한 비판적 검토(2장), 불교가 항상 정치와 관련되어 왔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한 ‘불교와 국가체제 및 정치와의 관계에 대한 역사적 검토’(3장), 중국과 한국에서의 돈점논쟁 역사와 정치, 사회적 연관의 확인(4장), 국가의 통치방식과 성철의 방식 사이의 여섯 가지 구조적 일치(5장)가 그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논증 과정은 ‘성철의 개혁정신은 그 시대 정치 권력자(박정희·전두환)에 의해 암시적으로 형성되었다’는 결론으로 귀결된다.
구체적으로는, 성철이 국가체제와 어떠한 접촉도 거절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성철이 보여준 과학에 대한 관심, 역사비평적 방식의 도입, 불교 사회복지사업에 대한 관심, 승가제도의 개혁 노력 등을 감안할 때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성철은 국가체제와 잘 연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성철과 국가체제의 필연적 연관을 논증하기 위해 붓다로부터 아소카 시대의 국가체제와 불교 사이의 밀접한 관계, 중국과 한국에서 선종의 전개 및 돈점논쟁 등과 연관된 정치·사회적 배경에 관한 선행 연구들을 제시한다. 그리하여 불교는 시작부터 항상 그것이 생겨난 사회·정치적 배경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성철 역시 그 예외로 볼 수 없으므로, 성철이 공공연히 멀리하려 한 정치 영역이 사실은 그의 삶과 교의에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을 것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국가의 방식’과 ‘성철의 방식’이 구조적으로 조응·반향하고 있을 것이라는 가정을 이러한 논증 위에 수립한 후, 서명원은 그 구조적 조응을 여섯 가지로 읽어낸다. 그에 의하면 구조적 조응이란 “서로 완전히 관계없어 보이는 두 가지 혹은 더 많은 사실들이 밀접하게 유사하거나 혹은 근접함을 말하는 것으로서, 마치 두 개의 분리된 물체가 동일한 주파수로 진동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첫째는 ‘성철이 1967년의 백일법문에서 돈오돈수의 간화선으로 지눌의 돈오점수 전통을 끝내려고 한 교의적 쿠데타’와 ‘1961년과 1980년에 박정희와 전두환이 국민의 대통령을 폐위하고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것’이 조응하고 있고, 둘째는 ‘성철과 박정희 그리고 전두환 대통령은 모두 스스로 임명한 사람들로서 맡은 임무에 대한 깊은 사명감을 가졌다는 점, 즉 불교와 남한 각각의 구제에 대한 유일한 길이라는 신념을 지녔다’는 점에서 조응한다.
셋째 조응은 ‘박정희와 전두환의 담화와 성철의 교의에 충만해 있는 강력한 악마화와 적대화의 메커니즘’인데, 북한의 공산주의와 지눌의 점진주의를 각각의 대상으로 하고 있다. 경쟁자의 가르침을 유사한 양식으로 왜곡하는 것은 신회를 비판한 임제종, 그리고 대혜와 백파의 행동에서도 볼 수 있고, 그것은 항상 사회·정치적 동기와 연결되어 있다. 비록 성철의 동기를 직접 지적해 낼 수는 없지만, 그가 한국불교를 20세기 후반에 뜯어고치려 했고 지눌에게 언어적 폭력을 구사한 방식은 그 시대 독재정부의 냉전 시대 빨갱이 논쟁의 구조를 밀접하게 반영한다.
넷째는 ‘박정희와 전두환이 스스로 취임함에 따른 낮은 대중적 지지를 극복하고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무자비한 노력을 한 것’과 ‘자기 인가에 대한 대중들의 불신임을 극복하기 위한 성철의 노력’이 조응한다. 박정희와 전두환은 이를 위해 북한 위협을 지속적으로 강조하며 반민주적 정부의 취약성을 철권안보와 경제성장으로 정당화시켰고, 성철은 자신의 정통성과 지눌의 비정통성을 입증하기 위해 1967년에 초기불교를 시작으로 1987년에 혜능으로 끝나는 다양한 불교 전통의 해석에 호소하였다. 성철은 오직 돈오돈수만이 옳고 지눌의 돈오점수는 비정통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방대한 경론과 선장(禪藏)에서 돈오돈수를 입증하는 구절들을 집성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작업에는 여러 방법론적 하자가 있으며, 지눌의 말도 아전인수 격으로 인용하는 경향이 있다. ‘선림고경총서’가 소개하는 선사들이 성철의 주장처럼 모두 돈오돈수를 옹호한 것은 아니고 오히려 돈오점수를 더 선호하고 있다는 연구 성과 등을 볼 때, 돈오돈수를 정당화하기 위한 성철의 모든 노력은 시간이 흐를수록 모순이 드러나며, 이것은 마치 시간이 흐를수록 쇠퇴해 가는 박정희 유신체계의 독재주의가 빠져드는 모순과 같은 것이다.
다섯째로는 독재자(박정희, 전두환)의 시·공간적 위치와 한국 돈점논쟁의 그것이 유사하게 조응한다. 성철과 박정희, 전두환은 모두 경상도 출신이고 해인사는 전두환의 고향인 경남 합천군에 소재하고 있다. 경상도와 전라도는 오랜 적대적 역사가 있고,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 항쟁의 진압과, 1981년과 1982년에 성철이 《선문정로》와 《본지풍광》을 출판한 것은 서로 조응한다. 지눌 추종자들에게는 성철의 돈오돈수 주장을 담은 출판물 간행이 (경상도 정권이 전라도 민주화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것처럼) 한국불교에서 (경상도를 상징하는) 해인사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교의적 전쟁의 시작인 성철의 쿠데타로 보게 하였다. 성철이 약 30년 동안의 은거 후 1967년에 해인사 방장 임명을 수락한 것은 그때의 박정희 정권의 국가체제 안정 때문이며, 종정직을 수용한 것은(1981년 1월 10일)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 및 성철이 침묵을 지킨 법난이 있은 지 고작 몇 개월 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민주화 헌법이 승인되기 대략 1년 전에 성철의 활동은 급격히 감소하였다. 이 모든 자료는 20세기 후반에 남한의 독재자들과 성철의 활동이 시·공간적으로 중대한 부분이 겹친다는 것을 알려준다.
여섯째로는 성철과 박정희 그리고 전두환 모두가 비판에 무감각하고 때가 왔음을 알지 못하는 점에서 조응한다. 박정희는 1979년 10월 부마(釜馬) 민중항쟁에 어떻게 대응할지를 파악하는 것에 실패했기에 마침내 암살당했고, 전두환은 서울올림픽게임 몇 해 전에 어떻게 민주화가 불가항력적인 역동성을 갖게 되어 남한 독재의 종말로 이끌 것인지를 이해하는 데 실패하였다. 유사하게도 성철은 조계종의 최고 성직자로서 1987년 민주화 운동에 호의적인 말을 해 주길 요청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산승이라는 핑계로 거절하며 모든 비판에 무감각한 채 살았다. 성철의 미심쩍은 중립적 침묵은, 붓다조차 필요에 따라 왕과 관계를 개선하거나 유지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음을 고려할 때 더 모순적이다. 10월 27일 법난에 대한 성철의 침묵도 순전한 정치적 중립으로 보기 어렵다. 성철은 전두환이 비록 이상적 전륜성왕은 전혀 아닐지라도 전체적 안보를 제공하는 이상 그에게 도전할 의지가 없었다고 가정할 수 있다. 이러한 침묵은 분명히 정치적 결정에 따른 결과이기 때문에 중립일 수가 없다. 성철이 산승이라는 구실로 민주화 운동의 편에 서기를 거부한 것은, 그가 돈오돈수를 주장하기 위해 인용한 주요 선사들(신회, 대혜, 나옹, 태고, 서산)이 정치적인 문제들에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모순적이다.
결국, 성철이 역사의 중요한 변혁기에 완고한 침묵을 지킨 것은, 후대의 역사가들이 풀어야 할 수수께끼로 보면 제일 좋게 해석하는 것이고, 부정적으로 보면 말과 행동 사이의 모순과 불일치이다. 하지만 10·27법난과 민주화 운동에 대해 성철이 침묵을 지켰던 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신기원의 새벽에 한국불교가 필요로 하는 것이 화두선 절대주의가 아니라 교의와 수행의 다양성을 보급하는 일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점이다. ‘성철의 개혁은, 정치를 언급하지 않은 채 한국불교를 그와 그의 동료들이 이해한 부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의도로 행한 봉암결사의 궤도로 고정시켰기 때문에 불교 전통이 현대 세상에 적응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는 주장’(조성택)이나 ‘성철이 돈오돈수 같은 근본주의자적 이념으로써 한국불교가 필요했던 긴급한 출구의 논리적 기반을 구성한 것은 정체와 쇠퇴의 상태에서 억불의 유산과 새 문화 환경의 갑작스러운 변화를 적절히 극복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김종인)는 일부 학자들의 견해도 이러한 점을 지적하고 있다.
성철의 모든 제자들도 성철과 동일하게, 비판에 무감각하고 때가 도래했음을 인지하는 능력이 부재하다는 점도 중요하다. 그들은 돈오돈수 주장으로써 모든 논쟁을 회피하고, 큰스님의 약점과 모순을 지적하는 질문을 모두 날려버린다. 돈오돈수는 성철의 그것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견해를 거부하는 주관주의로서, 그런 주관주의는 깨달음의 경험에 절대적인 해석이 있을 수 없음을 알지 못하고 있다.
비록 성철은 분명한 정치적 입장을 취하지 않았지만, 이상의 구조적 반향의 내용으로 보면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그의 돈오돈수 논의는 독재주의를 반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돈오돈수 주장이 독재주의를 반영한 까닭은) 성철이 자신의 돈오돈수 주장의 한계를 알았고, 그가 최종적으로 열반송에서 자신을 부정하고 자신의 가르침을 부정하게 되는 필연적 모순을 알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성철의 교의와 그것이 가르쳐진 정치적 정황 사이의 구조적 반향에 관한 여섯 가지 요점은 개별적으로 보았을 때는 적절히 입증할 수 없지만, 각각이 서로 연결되면 그 중요성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져 설득력 있는 무더기가 된다. 특히 세 번째 반향인 악마화와 적대화의 구조는 돈점논쟁 전체를 관통한다. 사실상, 그 여섯 가지 구조적 조응의 내용 대부분을 개별적으로 분석해보면 한국의 돈점논쟁의 특성이 아니지만, 여섯 가지가 결합된 무더기는 성철의 삶과 그의 돈오의 가르침 전체 구조가 독재주의를 여러 관점에서 반영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것은 성철의 삶과 사상을 독재주의에서 연역 가능하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비록 청와대와 백련암에는 핫라인을 포함한 어떤 형태의 접촉도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가야산 호랑이가 속해 있던 독재국가의 방식은 산승이라는 그의 삶의 방식과 모순되게도 동일한 표준을 가진 것으로 분명히 나타난다.
현대 한국의 돈점논쟁은 사회·정치적 발달과 연관된 법칙으로부터 예외가 될 수 없음이 분명하다. 성철은 비록 출가인으로 살았고 국가로부터 지원을 받지 않았지만, 수 세기 동안의 억불정책으로부터 불교와 승려들의 사회·정치적인 위상을 증진시키기 위해 개혁을 이끌었고, 한국불교에서 해인사의 권위를 증강시키기 위해 돈오점수 이념을 탄압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성철의 행적, 그의 교의의 전체적 구성과 그가 불교의 전체적인 개조를 이끌었던 방식은, 같은 시·공간의 국가가 진행한 방식과 여섯 가지의 구조적 조응·반향을 보여준다. 이것은 성철의 개혁 정신이, 그것이 소속된 정치적이고 지역감정에 의지한 전략을 밑바탕에 두고 있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다른 말로 하면, 이것은 당대 한국의 돈점논쟁은 해방 시 두 개로 분할된 한반도의 두 개체의 사회·정치적 긴장과 냉전 시대의 세계적인 분위기를 반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반도에서 거의 항존하는 핵전쟁의 위기는 왜 돈점논쟁이 한국에서 전대미문의 상황으로 악화되었는지를 잘 설명해준다. 왜 성철이 정치적이 되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비록 그가 자신의 개혁을 석가모니불과 한중(韓中)의 법통 아래 추진하였지만, 그의 불교 교의와 수행관은 자신이 출가자로서 살아가고 수행한 국가의 평화와 안보를 보장한 정복자의 세계관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전체적으로 이해된다.
성철이 특별하게 위대한 승려였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그럼에도 그의 유산의 일부 양상에 있어서는 분명히 논쟁의 여지가 있다. 역사는, 예를 들어 1980년 10·27법난 때와 1987년 민주화 운동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그가 침묵을 지킨 것을 잊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그의 진실한 초상을 후손에게 전해주는 진실한 방식은, 그를 부정하거나 정당화하는 대신에 이런 양상을 인정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는 국가체제와 연결되어 있었지만, 그것은 그의 추종자들이 후손들이 믿었으면 하는 방식이 전혀 아니다. 그의 불교의 해석학, 즉 20세기 후반의 불교 해석 방식은 민주화 이후의 것이 아니라 민주화 이전의 정신을 전체적으로 반영한다. 우리가 한국 민주화 25주년을 기념함에서 당대의 한국 돈점논쟁이 태어나고 반영한 사회·정치적 정황에 유념하는 것은, 한반도와 한국불교의 미래와 화두선의 세계적 포교를 예견하는 데 가장 중요한 기반이 될 것이다.

− 이상의 서명원 논문 핵심은 ‘성철의 돈점론 및 한국불교의 돈점논쟁은 결국 권력담론이다’라는 주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3. 돈점논쟁은 진리담론인가 권력담론인가
 
‘한국 현대사의 정치적 독재와 성철의 삶은 구조적 반향으로 얽혀 있으며, 따라서 성철의 행적과 사상은 정확히 독재주의를 반영하고 있다. 성철의 돈점론과 현대 한국불교계의 돈점논쟁은 결국 권력담론이다.’ −성철의 삶을 폭언으로 들릴 정도로 비판하는 이러한 관점은 서명원 개인의 기발한 창의성인가? 평소 그가 보여준 성철에 대한 우호적 탐구는 위장이었고, 이제 숨기고 있던 본심을 드러낸 것인가? 성철과 그의 제자들에 대한 거의 욕설에 가까운 평가는 논리로 위장한 종교적 적대감의 표현인가?
그렇게 보고 싶지는 않다. 나는 서명원과 교분을 맺어 본 적도 없고, 그의 내면에 대해서도 아는 바 없다. 몇 년 전 내 글의 논평자로 학술발표회에서 잠깐 인사한 것이 인연의 전부다. 다만 이전까지 그가 발표한 성철 연구는, 그 내용의 깊이나 타당성은 어떻든 간에, 성철에 대한 진정성 있는 관심과 성철 사상의 긍정성을 탐구하려는 노력이 두드러진 것이었다고 기억한다.
성철에 대한 그의 돌변한 태도는 감춰온 진심인가, 관점의 변화인가? 나는 관점의 변화 쪽에 무게를 둔다. 성철에 대해 부정적 시선을 지닌 사람들과의 대화, 한국의 역사적 지역 갈등, 격동의 한국 근대 정치사회사 등이 서명원 자신의 돈점사상 이해 수준과 결합되어 수립된 변화된 관점으로 본다. 그렇다면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비판적 검토가 필요한 관점의 문제로 보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그럴듯한 구조주의적 접근으로 보이는, 그러나 논리 얼개가 너무 성긴 ‘국가 방식과 성철 방식의 구조적 반향’ 논증의 핵심은 ‘국가 방식(독재)과 성철 방식(돈오돈수/간화선 주장)의 연관과 일치’이다. 모든 종교나 종교인의 삶이 정치·사회적 조건들과 무관할 수 없다는 자명한 사실을 불교와 선종의 역사에서 확인하는 작업은 사실 그의 논리 구성에서 그다지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성철을 정치·사회적으로 읽기 위한 최소한의 논리적 고리일 뿐이다. 논증의 초점은 성철의 삶과 교의가 국가의 독재방식을 구조적으로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는 관점의 관철에 맞추어져 있다. 그러한 논지를 입증하기 위해 제시하는 논거와 관점은 대략 8가지로 요약된다.
 
1) 성철의 돈오돈수와 간화선 절대주의는 모든 수행의 다양한 방식과 수준, 상호 결합과 이론적 대화를 원천적으로 막아버리는 폐쇄적 독단성이 있다. 지눌의 돈오점수를 깨달음의 계보에서 배제하는 배타적 공격성도 이와 관련이 있다. 성철의 교의에는 상대를 악마로 왜곡하는 폭력적 적대성이 있으며, 지눌에 대한 성철의 비판은 언어적 폭력이다. 상대에 대한 이러한 악마화와 적대화는 전형적인 독재적 국가방식의 그것이다.
2) 돈오돈수의 확철대오를 주장하는 성철 자신의 깨달음은 타인의 인정과 무관한 일방적 자기 선언이다. 이것은 민주적 지지기반 없이 국가권력의 주인임을 선언하는 쿠데타적 방식이다.
3) 성철의 지눌 비판과 돈오돈수의 논거로서 선택하는 경론의 선택이 자의적이어서 타당성이 결핍되어 있다.
4) 성철은 비판에 무감각하고 때가 도래했음을 인지하는 능력이 부재하다. 그러한 면모는 제자들에게도 계승되어 있다.
5) 성철은 한국불교의 개혁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교학과 수행의 다양성 대신에 화두선 절대주의를 선택한 것은 잘못 짚은 것이다.
6) 1980년 10·27법난 때와 1987년 민주화 운동 때 침묵을 지켰다.
7) 영남과 호남의 오랜 적대적 관계는 한국의 국가 방식을 규정해 왔고, 한국불교계도 예외가 아니다. 성철이 주석하던 해인사는 영남 불교를, 지눌이 주석하던 송광사는 호남 불교를 대변한다. 따라서 성철이 돈오돈수로써 지눌의 돈오점수를 비판한 것은 호남 불교의 전통을 영남 불교가 전복시키는 교의적 쿠데타다. 성철이 경상도 출신이고 해인사가 전두환의 고향에 위치하는 것도 성철이 영남 세력을 정치적으로 지지하는 공간적 조건이다. 영호남 대립 구조에서 지눌 추종자들에게는 성철의 돈오돈수 주장과 지눌 비판이 한국불교에서 경상도를 상징하는 해인사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교의적 쿠데타로 간주된다. 성철의 돈오돈수 주장과 돈오점수 비판 및 불교개혁 방안은, 근본적으로 정치적이고 지역감정에 의지한 전략에 기초한다. 따라서 현대 한국의 돈점논쟁은 한반도의 분단 상황과 지역 갈등을 조건으로 하는 정치·사회적 산물이다.
8) 결국 성철의 삶과 그의 돈오돈수 가르침은 그 전체 구조가 독재주의를 여러 관점에서 반영하고 있다. 그의 불교 해석학도 반민주적이다. 성철은 이 점을 스스로 알고 있었고, 따라서 열반송에서 자신을 부정하고 자신의 가르침을 부정하게 되었다.

1)에서 5)까지는 돈오돈수 및 성철의 개인적 면모에 대한 이해와 평가이고, 6)과 7)은 한국의 지역 갈등과 정치 지형을 불교계와 돈점논쟁에 적용시키는 것이며, 8)은 성철의 삶과 사상에 대한 정치·사회적 독해의 결산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 여덟 가지 논지 가운데 서명원이 가장 비중을 두는 것은 ‘성철의 돈오점수 비판방식과 독재권력의 상대 진압 방식인 악마화와 적대화의 구조적 동일성’이다. 결국 성철의 돈점론과 한국의 돈점논쟁은 권력담론이라는 것이 논문의 요점이다.
각 논거와 주장은 막막할 정도로 손댈 곳이 많아 보인다. 제대로 분석하고 비판하려면 세세한 작업이 필요하지만, 이 글의 목표가 되기는 어렵다. 필자는 성철의 돈점론과 한국 돈점논쟁이 권력담론이 아니라 진리담론[法談]이라고 생각한다. 권력담론으로 보는 서명원의 관점을 비판적으로 논평하는 형태로 필자의 견해를 피력해 본다.

1) 인간은 세계와 다양한 문법으로 만난다. 개인과 세계는 다양한 문법을 통해 상호작용하면서 역동적으로 구성되어 간다. 이 다양한 다층적 문법은 상호 의존적이고 상호작용한다. 그러므로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포착하고 기술하기 위해서는, 구성문법의 다양성, 그들의 상호 의존성과 상호작용, 만남/접속과 갈라짐/떨어짐, 겹침과 어긋남, 개별 문법의 고유적 범주와 맥락 등을 가급적 정밀하고 적절하게 식별하고 처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서명원의 글은 우선 문법 식별과 상호 관계의 처리가 너무 거칠고 성글어 보인다. 무엇보다도 돈점사상 고유의 의미맥락을 너무 소홀히 했다. 범주 이탈 및 범주 통합의 오류가 너무 커 보인다.
서로 다른 문법을 접속시킬 때는 매우 세심하고 적절한 고리 걸기가 필요하다. 돈점사상 문법과 정치·사회적 문법은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각각의 범주와 고유적 의미맥락은 그 차이가 충분히 식별되고 배려되어야 한다. 정치·사회적 문법을 그릇 삼아 모든 다른 문법들을 담아내고자 하는 열정들은, 세심하게 배려해야 할 이질적 문법들을 흔히 하나의 범주와 맥락에 거칠게 통합하려 드는 경향을 보여준다. 붓다의 길에서 생명력을 지니는 ‘해탈의 자유/평등’이 정치·사회적 자유/평등과 무관한 것도 아니고 굳이 분리시키려 드는 것도 부당하지만, 그렇다고 양자가 지니는 고유의 범주와 맥락을 어느 한 길로 통합시키는 일도 명백히 부당하다. 겹침과 어긋남을 섬세하게 다루어야 한다.
성철의 돈오돈수론이 돈점사상 고유의 범주와 맥락에서 발산하고 있고 또 수렴되고 있다는 점은 ‘성철 읽기’에서 언제나 놓치지 말아야 할 초점이다. 출가승으로서 일관된 삶과 참선수행이 삶 구성의 중심 조건이 된 사람의 문법, 그리고 그 문법을 담아낸 언어를 전혀 이질적인, 그것도 세속적 문법의 중심부를 차지하는 정치·사회적 문법의 언어와 결합시키거나 치환시키는 작업은, 치밀하고 적절한 ‘조건적 접속 내지 변환 작업’이 선행되어야 의미가 있다. 설득력 있는 충분한 논거들이 수반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서명원의 작업은 정밀한 조건적 접속이 아닌, 성글다 못해 난폭하기까지 한, 수긍하기 어려운 거친 결합 및 치환으로 보인다.

2) 성철의 돈오돈수 언어가 모든 비판적 논의를 증발시켜 버리는 자폐적 용광로 같아 보이는 것은 일면 사실이다. 돈오돈수의 개념 자체에서 오는 속성이다. 만약 성철의 돈점론이 권력담론이라면, 돈오돈수 이론은 서명원의 표현처럼, 독재적 정치 방식이 즐겨 택하는 ‘악마화와 적대화’의 불교적 표현으로 간주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출가 선승의 방식에 누구보다 철저했던 성철의 돈오돈수 언어는 기본적으로 돈점사상 고유의 교학적, 수행론적 범주와 맥락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런 점에서 성철 읽기의 핵심 과제인 ‘성철은 왜 그토록 단호한 어조를 구사하면서까지 지눌의 돈오점수를 비판하였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은, 무엇보다도 돈점사상 고유의 문법과 맥락 속에서 발굴하는 것이 일차적이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 이 질문에 대해 충분히 응답하지 못하고 있다.
그 응답 과정에서, 관점에 따라서는 정치·사회적 조건들에 관한 고려가 필요한 정도로 채택될 수는 있다. 그러나 성철의 돈오돈수와 연관된 자료들을 공정하게 고려한다면, 돈오점수 비판으로 점화된 돈점논쟁의 탐구는 일차적으로 진리담론, 즉 돈점사상 고유의 문법 범주와 맥락 안에서 집중하는 것이 합리적이라 할 것이다. 서명원의 논리는 돈점사상 고유의 의미맥락을 타당한 논리적 가교도 없이 일탈해 버리고 있다. 게다가 이 느닷없어 보이는 범주/맥락 이탈의 오류가 너무도 원색적인 정치논리의 옷으로 치장되고 있다.
 
3) 성철로 인해 촉발된 돈점논쟁에서 흔히 간과되고 있는 대목이 있다. 돈오점수와 돈오돈수의 대비를 ‘점수의 여지를 남겨두는 돈오’와 ‘점수의 필요가 없는 돈오’의 대립으로 읽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럴 때는 돈오점수 비판이 ‘돈오의 수준/정도의 완전성에 관한 비판’이 된다. 돈점논쟁이 누구의 돈오가 더 완벽한 것인가를 따지는 수직 서열의 문제로 읽히면, 성철의 돈오돈수 주장은 그야말로 주관주의적이고 일방적인 도력 주장으로 보이기 쉽다. 실제로 그간의 돈점 논의에서는 지눌의 돈오점수를 지지하든 성철의 돈오돈수를 옹호하든, 논의의 초점을 여기에 두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 지눌 지지자에게는 성철의 비판이 일방적이고 주관주의적 독선의 횡포이며, 불순한 종교적 서열 다툼 내지 권력의지의 산물이고, 합리적 논거가 결핍된 도력 우열 겨루기로 보일 가능성이 높다. 반면 성철 지지자에게는 성철의 주장이 완벽한 경지의 돈오를 세워 선종의 궁극적 본분을 부활시키는 쾌거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독해들은 성철의 의도와도 무관하고, 돈점논쟁의 초점에서도 비켜난 것으로 보인다. 성철의 돈오점수 비판에는 ‘조건’이 있다. ‘무조건’ 돈오점수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화엄 원돈문(圓頓門, 圓頓信解門)이 조건이 된 돈오와 그에 수반되는 점수’를 비판한 것이다. 돈오점수의 ‘돈오’를 ‘해오(解悟)’라고 비판하는 것도 ‘원돈문을 조건으로 삼는 돈오’를 겨냥하는 것이다. 성철의 돈오점수 비판은, 원돈문을 해오로 판독하는 동시에 ‘해오인 원돈문을 조건 삼아 주장하는 돈오’에 대한 비판이며, 그런 점에서 돈오점수에 대한 ‘조건적 비판’이다. 이 점을 고려하면, 성철이 역설하는 간화선 수행의 삼관(三關, 動靜一如/夢中一如/熟眠一如) 돌파는, 성철 비판론들의 지적과는 달리 돈오돈수의 자기모순이 아니다. ‘원돈문을 조건으로 하는 돈오점수 비판’과 ‘간화선 삼관 돌파’는 문제의 맥락과 범주가 다르다고 볼 수 있다.(이러한 문제는 돈점논쟁에 담긴 주제들의 맥락 식별과 관련된 것인데, 기회가 되는 대로 정리된 논리에 담아 볼 것이다.)
그간의 돈점논쟁 연구는 아직 지눌과 성철의 의도와 논점을 제대로 혹은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지 모른다. 지눌과 성철의 언어에서 논점과 의도를 정밀하게 전개하는 현대적 논증성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지눌이나 성철이 익히고 구사하는 개념과 논리를 오늘의 언어에 담아내기 위해서는 적절한 해석학적 번역과정이 필요하며, 그것은 현대 학인의 몫이다. 돈점논쟁을 다루는 학인들은 돈점론 고유의 맥락과 범주에서 더 깊은 탐구를 진행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서명원의 정치·사회적 읽기는 너무 섣부른 일탈적 질주로 보인다.

4) 필자는 1980년대 초반에 성철의 돈오점수 비판과 돈오돈수 주장을 처음 접했을 때의 혼란과 불편함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앞뒤 안 가리고 선문(禪門)의 공부 지침에 깜냥대로 몰입하던 때였다. 선적(禪籍)이라면 닥치는 대로 읽고, 지눌의 글을 탐독하며 경탄하였었다. 성급하게 화두 들다 상기병도 걸려보았고, 어떤 때는 잠깐 눈 붙이는 동안에도 화두 의단이 챙겨지는 것 같아 ‘몽중에도 화두 챙긴다는 것이 헛말은 아니구나!’라며 끄덕여도 보았다. ‘화두 들어야 쉬는 국면’을 조금, 아주 조금 실감할 수 있었고, 화두 챙기고 안 챙기고에 따라 대쪽같이 나뉘는 ‘경계로 지어 붙드는 마음 국면과 안 그러는 마음 국면의 차이’ 정도는 제법 선명히 포착되는 것 같았다. 지눌의 ‘돈오 이후 점수 보임(保任)으로 성태(聖胎) 기르기’라는 지침은 실참의 금과옥조로 보였다.
그런데 돈오점수가 ‘지적 깨달음[解悟]’일 뿐 선문의 돈오는 아니라니! 사변적 알음알이로 끄덕거리는 일과는 전혀 다른 것이 화두 챙기는 국면이라는 것을 어쭙잖더라도 경험적으로 확인하였다고 여겼고, 지눌의 언어를 내 공부에 갖다 붙여보기도 하며 잔뜩 고무되어 있던 차에, ‘착각하지 마라!’는 듯 내치는 성철의 돈오점수 비판과 돈오돈수 설법은 꽤나 불편했다. 수긍하기가 어려웠다. ‘당신은 돈오돈수로써 공부 마쳤는가?’ 하는 감정 섞인 반문이 저절로 올라왔다. 근원적 완결성을 전면에 세운 돈오 설법은 너무 비현실적으로 보여서 그 의도를 의심해 보기도 했다. ‘결국 자기만 도인이라는 논리 아닌가?’라는 말도 입안에서 수시로 맴돌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성철 스님에 대한 시선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분수껏 정학에 대한 실존적 탐구를 지속하고, 니까야를 음미하며, 선종 선학에 대한 일반적 이해들 및 돈점논쟁을 유심히 살펴보면서 놓치고 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학과 선종 선학 및 돈점논쟁에 대한 기존의 통념적 이해에 중요한 결핍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갈수록 힘이 실리는 중이다. 지눌의 돈오점수와 그에 대한 성철의 비판 및 돈오돈수 주장에 관하여, 우리는 어쩌면 아직 핵심 논점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을 점점 주목하게 된다.

5) 지눌의 돈오점수론에 대한 성철의 비판과 돈오돈수 및 간화선 강조는 ‘정학(定學)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근원적 문제 제기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그 핵심 논점은 ‘이해/언어 방식과 마음 방식의 차이와 위상 및 상호 관계의 문제’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눌과 성철 두 분 모두 이 문제를 정학의 관건으로 포착했으며, 지눌은 그에 대한 원만한 관점을 체계적으로 표현하였다. 한편 성철은 지눌선이 화엄 원돈신해문을 돈오체계에 끌어들임으로써 생겨날 수 있게 된 이해/언어 방식의 그늘(그것이 지눌의 의도와 무관할지라도) 내지 지눌선 해석학에 축적되어 왔던 정학 및 선(禪)에 대한 문제점을 예리하게 들춰내고 있다. 성철의 돈점론은 지눌을 매개로 형성된 정학/선에 대한 부적절한 이해들을 겨냥하는 측면이 있다.결과적으로 성철과 지눌은 서로를 살리고 있다. 전형적인 진리담론이다. 지눌과 성철은 정학에서의 ‘이해 방식과 마음 방식의 차이와 위상 및 상호 관계’의 문제를 그들이 몸으로 익혔던 언어와 논리에 담아내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언어와 논리에 담긴 의도와 의미를 읽어내기 위해서는, 직접 참선에 접속해 보는 실참실구를 비롯한 불교해석학적 조건들을 갖추는 노력이 꾸준히 병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언제라도 소홀히 처리해서는 안 된다.
6) 지눌과 성철을 매개로 한 돈점논쟁의 초점을 이렇게 이동해 본다면, 성철에 대한 비판이론의 상당 부분은 오해 내지 부당한 평가일 수 있다. 성철 비판의 주된 논거의 하나인 ‘인용문의 자의적 해석’ 같은 문제도, 성철의 무지나 오류라기보다는 자신의 문제의식과 관점을 천명하기 위한 과도한 해석학적 편집 내지 선택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해 볼 필요가 있다. 또 성철의 돈오돈수나 간화선 지상주의는, 현대 한국불교의 활로와 무관하거나 퇴행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요긴한 근원적 전망일 수 있다.
서명원은 ‘때를 알지 못한다’고 혹평하지만, 오히려 ‘때를 깊은 수준에서 읽는 안목’일 수도 있다. 정학에 대한 현대인들의 갈증과 요청을 감안할 때, ‘정학에 대한 근원적 물음’인 성철의 의제 설정은 선구성과 적절성을 지닌다고 볼 수도 있다. 특히 정학에 대한 남전(南傳)의 해석학 및 북전과 선종의 해석학이 상호작용하여 니까야가 전하는 붓다의 정학을 더욱 온전하게 탐구해 가는 작업의 필요성에 눈길을 둔다면, 돈점론 내지 성철의 ‘조건적 돈오점수 비판’은 결코 ‘때를 모르는 의제 설정’도 아니고 ‘시대착오적 퇴행’도 아니다.
선문(禪門)의 돈오사상, 그리고 이에 관한 지눌과 성철의 대조적 시선은, 붓다의 정학을 읽어내는 데 매우 요긴한 단서를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선종 선학에 관한 일반적 이해의 현황을 감안하면, 성철의 해오 비판은 선학의 생명력을 가리는 해석학적 왜곡과 혼란의 정곡을 찌르는 측면이 있다고 본다. 그의 배타적일 정도로 단호한 해오(解悟) 비판 언어는, 정학의 본령 유지와 복원이라는 의제와 관련된 성철의 절절한 문제의식의 반영이라는 측면이 있다. 그리고 성철의 지눌 비판은 결코 ‘욕설 퍼붓기’나 ‘언어폭력’은 아니다. 우회적으로 꾸밀 줄 모르는 직설적 비판의 투박성을 지적할 수는 있어도, 성철의 비판 언어를 ‘욕설이자 언어폭력’으로 평가하는 것은 ‘성철 읽기’ 수준의 심각한 결핍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성철의 열반송을 자기 삶과 가르침의 부정이자 모순 고백이라고 읽는 서명원의 시선 역시 그의 ‘성철 읽기’ 수준을 의심하게 한다. 열반 선구(禪句)에 관한 이런 정도의 이해는 간화선을 즐기고 성철을 연구하는 전문가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수준 이하이다. 흔히 이웃 종교의 원색적 근본주의자들이 불교를 공격할 때 입에 올리는 악의에 찬 왜곡의 무지와 동일하지 않은가. 그들은 성철의 열반송을 이렇게 읽는다던가. − ‘성철의 열반송은 성철이 죽기 전에 자기 죄를 고백한 것이다. 불교계의 수장도 마지막에는 자기 삶이 거짓이었다는 것을 고백할 정도이니, 불교는 말짱 거짓이다.’ 이쯤 되면 서명원의 성철 읽기가 오히려 ‘욕설이자 언어폭력’으로 들린다.
‘성철처럼 그의 제자들도 비판에 닫혀 있고 때의 도래를 모른다’는 비판은 거의 인신공격성 비난이다. 적어도 성철의 제자 원택 스님이 ‘성철선사상연구소’를 통해 지금까지 진행해온 ‘성철 읽기’는 그 개방성과 품격에서 탁월했다고 생각한다. 학술지원에 담보된 ‘성철 읽기’의 요구조건은 없었으며, 실제로 ‘성철선사상연구소’의 지원에 의해 산출된 연구 성과들에는 날카로운 ‘성철 비판’이 널려 있다. 종교 영역에서, 존경하는 스승에 대한 탐구를 이렇게 개방시켜 지속하는 경우는 결코 쉽지도 흔하지도 않다. 돈점논쟁을 권력담론으로 보는 관점을 관철하기 위한 무리한 인신공격으로 보인다.

7) ‘성철은 1980년 10·27법난 때와 1987년 민주화 운동 때 침묵을 지켰다. 그러므로 그의 정치적 태도는 반민주적이다’ −직접 겪어 보지도 못한 사람, 그것도 출가 산승의 정치·사회적 내면을 그 정도의 근거를 가지고 확정적으로 규정하는 태도는, 서명원이 성철에게 적용하는 말 그대로 ‘폭력적’이다. 영호남의 역사적, 현실적 불화, 성철과 박정희·전두환의 출생 지역, 해인사 위치와 전두환 고향까지 거론하면서 ‘국가의 독재 방식과 성철 방식의 일치’를 입증하려는 논리는, 너무나 비약적이고 빈약한 정황 논리라서 검토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다만 ‘법난 때의 침묵’과 관련하여 내가 들은 사실 하나를 밝혀 둔다.

오랜 인연의 존경하는 노스님 한 분이 계신다. 지금도 형안으로 치열하게 공부하는 수행승이시다. 출가구도자의 세속 이력을 언급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고 외람된 무례임을 알지만, 어쩔 수 없어 필요한 부분만 언급한다. 지금이야 선호도가 달라졌지만, 그분이 대학에 진학할 시절에는 문과 입시생들에게 법학과와 더불어 최고 선망학과였던 모 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신 분이다. 그래서인지 그분의 정치·사회적 안목과 언어는 그 스케일과 수준이 탁월하다는 것이 그분을 아는 이들의 하나같은 평이다. 필자도 전적으로 공감한다.
출세간 공부와 세간 견식이 모두 출중한 그분을, 10·27법난 직후 성철 스님이 불렀다. 그분을 비롯한 몇 분에게 연락을 취하여 아무 날에 꼭 보자고 하시더란다. 산승으로서 자신이 선택한 방식의 역할에 흔들림이 없었던 성철 스님이었지만, 법난을 당해서는 무언가 정치·사회적 발언을 하려는 마음을 일으킨 것 같았고, 불교계의 의견을 듣고자 몇 분을 청한 것이다. 그때 그분은 성철 스님의 대화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성철 스님은 역시 기존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에서 그러셨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성철 스님의 초대를 받은 다른 분들도 역시 같은 생각에서인지 성철 스님을 피해 버렸더란다. 시간이 지난 후 성철 스님을 만나는 기회가 있었는데, 먼발치에서 보더니 ‘아무개야!’ 하시면서 반갑게 다가와 아무 흔적 없이 흔쾌히 맞아 주시더란다. 그 일을 회고하는 그분의 말씀에서 ‘역시 산중의 큰 어른이시더군!’ 하는 뉘앙스가 전해져 왔다.(그분 자신은 법난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무작정 상경하였고, 법난 수습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성실히 다한 후 다시 선방으로 가셨다. 그때의 일을 소상히 회고하는 것을 필자가 직접 들은 것이다.)

반듯하게 길을 걷는 한국 승려들의 정치·사회적 관심과 인식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높고 견실하다. 정치·사회적 문법과 구도자 문법의 고유성에 관한 문제, 상호접속 문제 등에 관한 성찰과 안목은 다차원적으로 켜켜이 쌓여 있다. 한국불교를 강물에 비유하자면, 수면 아래가 생각보다 다층적이고 또 깊다. 모양과 소리를 확인할 수 있는 표층수면이 있는가 하면, 그 아래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고요히 흐르는 심층수가 있다. 한국불교의 생명력은 사실 그 심층수에서 나온다. 요란한 자기주장적 종교문화의 눈으로는 포착하기 어려운 이 고요하면서도 강력한 심층수가 한국불교의 저력이다. 비록 충분한 정도는 아니지만, 출·재가의 도처에서는 이 고요한 내공이 살아 숨 쉰다. 성철 내지 불교에 대한 정치·사회적 읽기는 이 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8) 한국의 역사와 현실에서 영남과 호남의 불화 지형은 아닌게 아니라 전방위적이다. 종교계도 예외라고하기 어렵다. 필자도 출·재가의 불교인들이 사안에 따라서는 지역논리에 영향을 받는 것을 드물지 않게 목격한다. 아마도 서명원이 들은 성철에 대한 한국 불교인들의 견해들 가운데도, 지역논리를 반영한 것들이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돈점논쟁이 전라도의 지눌/송광사와 경상도의 성철/해인사 구도를 반영하고 있는 측면이 분명 있으니, 돈점논쟁과 성철에 대한 지역주의적 관점들이 서명원에게는 인상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도 서명원의 이 글은 그러한 인터뷰가 결정적 계기로 작용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한국불교계에도 지역논리가 여러 형태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 없지만, 동시에 불교 특유의 근원적 평등성도 그 왕성한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다는 점을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필자가 보기에, 적어도 지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불교적’인 사람들에게는, 지역주의 차별문화보다는 불성(佛性)의 평등문화가 더 중심부를 차지하고 상위에 놓여 있다. 아직 필자는 ‘전라도 불교인’ ‘경상도 불교인’으로 갈라지는 것을 본 적이 없다. 특히 출가 구도자들에게는, 출가수행의 동기와 의지가 진정한 경우라면, 지역감정이나 논리는 어떤 경우에도 실존의 중심부를 차지하기가 어렵다. 송광사 법정 스님과 해인사 성철 스님의 관계는 평범한 일반 모델이다. 한국불교에 대한 정치·사회적 읽기에 지역주의 담론을 접목할 때는, 자칫 현실과 무관한 관념적 논리로 빠져들지 않는지 세심하고 신중해야 한다.

서명원의 글은 돈점논쟁에 연루된 다채로운 시선들을 유심히 재음미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기에 유익했다. 성철의 돈점론과 한국불교의 돈점논쟁은 아직 탐구와 이해의 초기 단계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돈점논쟁은, 권력담론이기는커녕 강력한 진리담론이라는 생각을 다질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진리담론은 한국불교뿐만 아니라 불교 자체의 미래 전망에도 중차대한 의미를 지닌다. 그 의미를 발굴하여 현실에 재귀시키는 것은 학인들의 몫으로 남는다. ■

 

박태원 / 울산대 철학과 교수. 한양대 법학과, 고려대 철학과 대학원 졸업(석사·박사). 주요 논저로 《대승기신론사상연구(1)》 《원효와 의상의 통합사상》 《정념과 화두》 《인문고전 깊이 읽기−원효》 《원효의 십문화쟁론−번역과 해설 그리고 화쟁의 철학》 등과 원효, 의상, 지눌, 선에 관한 연구논문 다수. 원효학술상(2011), 대정학술상(2013)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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