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와 정치참여

1. 머리말

종교와 정치의 관계는 해묵은 관심거리이자 논쟁거리이다. 한국에서도 종교인들의 정치적 발언과 행동들이 많은 논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할 점들이 떠오른다. 종교가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옳은 일인가? 여기서 말하는 종교와 정치는 무엇을 말하는가? 정치와 종교의 분리, 즉 정교분리의 원칙은 역사적으로 어떻게 탄생하였고, 어떤 철학적 의미를 가지는가? 정교분리는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과연 가능한가? 정교분리는 종교의 정치참여를 부인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종교의 정치참여는 무엇을 의미하고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정치와 종교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되는 것이 바람직한가?
이런 여러 문제에 대해 지금까지 많은 논의가 있었다. 이 글은 이런 여러 문제를 모두 포괄하여 다루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기에는 비전문가인 글쓴이의 지식이 매우 짧다. 단지 몇몇 가지 기본 문제들에 대해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가지려고 한다.

이 글에서 생각해보려고 하는 문제들은 다음과 같다.

−종교가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
−또 종교가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가능한가의 문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무엇인가의 문제. 그 기준의 문제.
−정치에 참여하면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정교분리는 무엇을 말하나. 어떤 것이 정교분리인가.
−정교분리와 정치참여는 양립 가능한가.

이런 문제들을 간단히 살펴보고 한국의 경우 종교와 정치의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 고찰할 것이다. 그런데 먼저 말해 둘 것은, 당연한 말이기는 하나 여기서 종교의 정치참여라고 하는 것은 종교인이나 신도의 개인적 참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 집단 또는 제도로서 참여를 의미한다는 점이다. 단 개인 참여이더라도 종교 제도의 이름을 내걸면 종교의 정치참여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2. 정교분리의 의미, 역사, 실제

먼저 종교와 정치의 관계와 이에 관련하여 논의의 중심이 되는 정교분리의 의미와 역사, 그리고 실제를 간단히 살펴보자.

1) 정교분리의 의미와 역사
정치와 종교의 관계는 여러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정교일치, 정교분리, 정교유착, 종교의 정치참여, 종교의 정치화 등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로버트 벨라는 종교와 정치의 관계 유형을 유착, 분리, 창조적 긴장의 세 가지로 나누고, 이 중 창조적 긴장 관계가 가장 바람직하다고 보았다. 이는 종교와 정치의 관계에 관한 고전적인 유형 분류라고 할 수 있다. 또 ①정교일치 또는 융합의 경우(고대의 제정일치, 유럽의 국가교회주의), ②한쪽이 다른 쪽을 지배, 이용하는 경우(신권 정치, 고대, 유대, 가톨릭의 세속국가에 대한 전통적인 태도), ③긴장 또는 대립관계로 나눌 수도 있다. 위 벨라의 분류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정교일치의 경우를 제외하면 논리상 모두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전제로 하고 있다. 정교일치, 즉 신정체제가 아니면 정치와 종교는 일단 분리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위에서 나온 용어로 유착이든 지배든 긴장이든, 둘이 한 몸이 아니라 따로따로인 것을 전제로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보면 제정일치 즉 정교일치의 경우가 드문 현대 사회에서 대부분 정교분리가 시행되고 있다고 보아야 하며, 이럴 경우 정교분리라는 말 자체가 큰 의미가 없게 된다. 정경(政經) 분리가 너무 당연한 것이어서 그 용어가 사용되지 않듯이, 정교분리 역시 현대 세속화 사회에서는 글자 그대로라면 너무 당연한 것이어서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 만약 그것이 단순한 분리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면 다른 용어를 사용해야 할 것이나, 이미 정착된 것이어서 이 용어에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이렇게 보면 사실상 정교분리라는 말 자체가 잘못되었고, 그것이 의미가 있으려면 오히려 정교 ‘격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정교 격리, 즉 종교와 정치가 완전히 분리되어 서로 관계하지 않는 것은 현대 민주사회에서 결코 가능하지 않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에게 의미 있는 정교 ‘분리’란 무엇을 의미하나? 이는 종교와 정치가 서로 간의 독자적인 공간을 인정하고 그 독자적인 공간에 대해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여기서 서로 간의 독자적 공간 인정이라는 말은 별로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경계가 불분명할 경우가 있지만 말이다. 이에 비해 어느 한쪽의 다른 쪽에 대한 간섭이나 불간섭의 선을 가르는 것은 좀 더 어렵다. 아래에서 볼 것과 같이 대한민국 헌법도 이에 대해서는 구체적이지 않다. 오히려 그 뒤에 볼 일본의 헌법 해석이 도움이 될 듯하다. 분명한 것은 정교분리가 국가의 종교 제도에 대한 정당한 법적 간섭이나 종교의 정치참여 자체를 배제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차차 논의하기로 한다.

그런데 실제로 정치와 종교가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정치(또는 국가)와 기업이 서로 간섭하지 않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같다. 국가와 기업은 서로의 고유 영역을 가지고 ‘분리’된 실체들이지만, 서로 간의 상호작용과 간섭은 당연히 일어나는 일이다. 종교의 경우, 어떻게 국가가 종교 제도의 사회적 책임이나 법규 준수에 간섭하지 않고, 거꾸로 종교가 정치나 국가의 사회·정치적 옳음을 요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옳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

정교분리의 현실은 나라마다 다르다. 예를 들어, 프랑스와 터키는 이 원칙을 엄격하게 적용하고 있으나, 영국과 덴마크는 국교를 인정한다. 인도와 싱가포르에서는 헌법이 둘의 전적인 분리를 규정하고 있고, 몰디브 같은 나라에서는 국교를 정해 놓고 다른 종교는 전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그런데 국교를 인정한다고 해서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았다고 단언하지는 못한다. 오로지 국교만 인정하고 다른 종교의 존재나 믿을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체제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이렇게 보면 결국 정교분리는, 우선 정치 쪽에서 보면 국가가 종교에 대해 ‘중립’을 지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국가가 개개인의 종교 선택에 대해 간섭하지 아니하고 종교 제도의 독자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또 이를 종교 쪽에서 보면, 종교가 종교 제도로서 또는 종교인이 종교인의 자격으로서 국가권력에 직접 개입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라고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정교분리 개념은 유럽에서 시작되었다. 그 역사를 보면, 첫째 단계로 중세 시절, 종교가 국가와 사회를 지배하던 데서 탈피하여 근대로 오면서 국가가 종교의 역할을 차츰 대체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이 수백 년에 걸쳐 진행되었다. 이때의 정교분리는 종교가 국가와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것에서 탈피하여 국가의 세속화와 권한 강화를 위한 것이었다. 교회에서 국가가 해방되는 유럽 정교분리론의 철학적 기원은 근대국가의 이념이 영혼과 육체의 분리라는 이분법에 기초해 있는바, 이것이 정교분리의 원동력이 되었다.

둘째로 정교분리는 거꾸로 종교가 국가에서 독립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는 신교의 자유를 확보하고 종교단체가 제도, 의사결정, 재정 면에서 국가에서 독립하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가 국가의 박해를 벗어나기 위해 신교와 제도 운용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정교분리는 유럽에서 국가의 박해를 받은 교파들이 요구한 것이었다.

이러한 정교분리의 원칙은 지금에 와서는 앞서 말했듯이 ‘당연한’ 것이 되었지만 그 역사가 그렇게 쉽게 형성된 것은 아니었다. 오랜 기간의 투쟁과 고난을 겪어야 했다. 그러한 서양의 정교분리 개념이 한국에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도입되게 되었다.

2) 엄격한 정교분리는 이루어지기 어렵다 : 미국과 일본의 경우
엄격한 의미의 정교분리, 즉 서로 간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거나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거나 전혀 간섭하지 않는 것은 현실적으로 실현하기 어렵다. 그런 사실을 우리는 정교분리의 선구적 국가인 미국에서도 볼 수 있다. 미국의 수정헌법은 국교를 금지하고 정교분리 원칙을 명기한 최초의 헌법이다. 교회와 국가의 분리는 미국적인 종교 신화이지만 이론, 실제 모두에서 정교분리가 미국에서 이루어진 적은 거의 없다. 오히려 미국에서는 종교가 ‘복음주의’와 ‘애국주의’를 통해 정치에 깊이 개입해 왔다.

미국에서 엄격한 정교분리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극단적인 보수주의 종파들이다. 나중에 볼 것처럼 한국에서도 정교분리를 외치는 사람들은 보수적인 종교 단체들이었다. 이들은 종교−교회가 국가−정치 밖에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이원론을 신봉한다. 이 이원론은 과거 종교 자유와 관용이 없을 때 정치나 국가가 그들에게 심한 박해를 가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미국 주류 개신교 교파들과 천주교회는 엄격 분리론과 이원론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배격하고 협의의 정교분리론을 지지한다. 즉 정치와 종교의 최소한의 사무적인 분리를 유지하되 밀접한 협력 관계를 상정한다. 정치−국가와 종교가 완전히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에서 우리는 종교와 정치는 엄격히 분리(즉 격리)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러면 정교분리 원칙은 실제의 경우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일본 헌법에 대한 일본 대법원의 해석이 도움을 준다. 좀 오래된 것이지만 여전히 유효하리라 본다.

일본 헌법은 정교분리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규정하고 있다. 한국 헌법보다 훨씬 자세하여서 정교분리의 구체적인 사항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헌법은 협의의 의미에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다음 조항들을 가진다: ‘신교의 자유는 누구에 대하여도 이를 보장한다’(20조 1항); ‘누구든지 종교상의 행위, 축전, 의식 또는 행사에 참가하도록 강제되지 아니한다’(20조 2항). 반면에 헌법은 정교분리의 원칙에 기초된 조항들을 아래와 같이 가진다: ‘여하한 종교 단체도 국가로부터 특권을 받거나 또는 정치상의 권력을 행사하여서는 아니 된다’(20조 1항); ‘국가 및 그 기관은 종교 교육 기타 여하한 종교 활동도 하여서는 아니 된다’(20조 3항); ‘공금 기타 고유 재산은 종교상의 조직이나 단체의 이용, 편익, 또는 유지를 위하여…… 사용 또는 충당되어서는 아니 된다’(89조).

이 헌법에 대해 일본 대법원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 바 있다.

메이지 유신 이후로 국가와 신도 간의 밀접한 관계로부터 생긴 과거의 갖가지 악폐들에 비추어서, 1946년 11월 3일 선포된 헌법은 종교 자유의 무조건적인 보장을 부여하며 그 보장을 더욱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 정교분리 조항을 명기하고 있다. 기독교 국가들이나 회교 국가들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여러 가지 종교들이 복수적으로 그리고 혼합적으로 발전해 왔고 공존해 왔다. 그런 종교적 상황에서 종교 자유의 보장을 실행하는 것은 무조건적인 보장을 필요로 할 뿐만 아니라 또한 국가와 어떤 종교 간의 관계를 제거하기 위해서 정교분리 조항을 필요로 한다. 이 모든 점을 고려해 볼 때 헌법의 분리 조항들하에서 종교와 국가의 완전한 분리가 이상적이며 국가의 세속성 또는 종교적 중립성이 보장된다고 해석되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일본 대법원은 이어서 정치와 종교의 완전한 분리(즉 이 글의 용어로 격리)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국가는 사회생활에 관한 그리고 교육, 복지, 문화 등에 대한 도움이나 협력 정책들에 관한 규정들을 실행함에서 종교와의 관련을 피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정부의 제도로서의 분리 원칙을 실제로 이행함에서 종교와 국가의 완전한 분리가 실현된다는 것은 거의 가능하지 않다. 정교분리 원칙은 종교적 자유의 보장과 같은 근본적인 목적과 관계해서 정부와 종교의 관련이 허용될 수 없는 정도를 고려해서, 개개 국가들에서의 사회적 및 문화적 조건들에 비추어서, 그리고 그런 관련이 어느 정도 피할 수 없다는 가정에서, 정부의 제도 속에 구체적인 표현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 대법원은 정부가 하면 안 되는 ‘종교 활동’의 기준들을 밝혔다.

헌법 20조 3항은 ‘국가 및 그 기관은 종교 교육 기타 여하한 종교 활동도 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언급된 ‘종교 활동’은 앞서 말한 정교분리 원칙의 의의에 비추어 볼 때 종교와 관련을 가지는 ‘국가와 그 기관’의 모든 행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한계를 넘어선 관련만을 뜻해야 한다. 행위와 목적이 종교적인 것 그리고 그 효과가 종교를 돕고, 촉진하고, 조장시키거나 또는 종교를 억압하거나 간섭하는 것, 그런 ‘종교 활동’은 20조 3항에서 예를 든 ‘종교 교육’과 같은 종교의 전형적인 선전, 설교, 또는 포교이며 위에서 언급한 목적과 효과를 가진 종교의식과 행사를 포함해야 한다. 하나의 행동이 ‘종교 활동’에 해당되는지 아닌지 하는 판단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사회적 관념에 따라서 그리고 관계된 행동에 대한 모든 환경을 고려한 후에 객관적으로 내려져야 한다: 그 행위가 이루어지는 장소, 그것이 종교적인지 아닌지에 대한 일반 대중의 판단, 실행자들의 의도나 목적 그리고 그들의 종교의식의 실재나 정도, 그리고 일반 대중에 대한 효과와 영향.

이렇게 기준을 밝히기는 했으나 그 기준의 적용 또한 주관적일 수 있다. 따라서 정부의 어떤 행동이 종교 활동에 해당되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사안에 따라 논란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는 한국이나 일본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3. 종교의 정치참여

그러면 정교분리에 위배된다고 생각되는 종교의 정치참여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또 이 둘은 과연 상충하는 것일까? 정치참여의 종류와 방식, 정도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을 수 있으나 여기서 이를 다룰 필요는 없다. 여기서는 종교의 정치참여를 종교 단체나 종교인이 명시적으로 정치적 의사를 표명하거나 정치행위를 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여기서 단체란 공식 교회 제도나 그 하위 단체들만이 아니라, 일부 성직자들이 구성한 임의적이고 비공식적인 집단도 포함된다. 더 나아가서 성직자 개인에 의한 정치 행위도 사적 개인이 아니라 성직자 자격으로 한 것이라면 이에 포함된다. 여기서 정치행위란 정치 현안이나 정치 체제에 대한 공적인 의사 표명을 말하는데, 이는 시위나 성명 발표 등의 집단행동이나 예컨대 기독교사회당 등 특정 종교 정당의 활동 등을 포괄한다. SNS 공간의 의견 표명도 종교인의 공적 자격으로 한 것이라면 포함한다. 종교단체나 종교인이 선거에서 특정 정당이나 후보자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행동도 포함한다.

종교단체는 특별한 경우, 예컨대 종교가 억압받은 구(舊) 사회주의권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지닌다. 그 경우라도 종교의 사회적 영향은 무시하지 못한다. 큰 사회적 영향을 지니는 집단이 정치참여를 하지 않는 것은 바람직한지 아닌지를 떠나서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역사상 정교분리를 외친 집단들은 사실상 자기 종교를 보호하기 위해서이거나 기존 체제를 옹호하고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하였다. 따라서 정교분리 주장 자체가 정치적인 주장이다. 정교분리 원칙 자체에 정치적인 의미가 있다는 말이다. 한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지니는 집단은 자연히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위치를 지니게 된다. 이 집단이 명시적인 정치참여를 하지 않더라도 그 존재 자체가 특정한 정치 이념이나 제도에 유리 또는 불리하게 작용하게 된다. 따라서 그 영향력 있는 집단은 그 존재 자체로 이미 묵시적이고 미필적인 정치참여를 하는 셈이다.

그런 의미를 떠나서 좀 더 적극적인 의미로 보아도, 그렇게 영향력 있는 집단은 사회정치적 책무를 지는 것이 당연하다.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집단은 그 사회를 좀 더 나은 사회로 만들고자 애쓸 도덕적 의무를 지닌다. 정치는 사회를 더 낫게 발전시킬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통로이다. 물론 정치는 사회를 퇴보시킬 수 있는  직접적인 통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 집단은 사회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퇴보를 막기 위해서도 정치에 참여할 의무가 있다.

이런 점은 종교가 아니라 이윤 극대화를 목표로 삼는 기업에 적용해도 마찬가지다. 기업은 윤리 경영과 사회봉사의 사회적 책무를 지닌다. 이윤 극대화를 목표로 삼는 기업도 이럴진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존재하는 종교가 더 큰 사회적, 정치적 책무를 지니는 것은 당연하다.

4. 한국의 종교와 정치

1) 정교분리 원칙 헌법에
한국은 정교분리를 헌법에 규정하고 있다. 헌법 제20조 제1항은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이며, 2항은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이다.

여기서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와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한다’는 구절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어 나오는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는 구절은 그렇게 선명하지 않다. 그 구절은 둘이 분리된다는 당연한 현상 또는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규범을 기술하는 반면에, 그 둘의 관계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지 않기도 한다. 둘이 분리되지만, 그 관계가 어떻게 되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 설명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헌법에서 그것까지 설명할 수는 없을지 모른다. 그래서 2008년 개정된 국가공무원 복무규정 제9조 2항은 “공무원은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종교 등에 따른 차별 없이 공정하게 업무를 처리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국가의 종교 중립성에 대한 규정이다.

그런데 헌법으로 돌아가서, 제20조 2항의 논리 구조를 보면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는 규정을 그 앞 절인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한다’는 규정을 보충 설명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달리 말해,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는 말이 특별히 다른 뜻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한다’는 말을 부연 설명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보면 한국 헌법에서 규정하는 종교와 정치의 관계는 종교의 자유와 국교 불인정이다. 그런데 국교 불인정은 종교의 자유에 논리적으로 포함된다. 따라서 한국 헌법이 종교와 정치의 관계에 내린 규정은 ‘종교의 자유’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종교 선택의 자유와 종교에 따른 정치·사회적 특혜나 박해의 회피를 규정한 것이다. 이것이 한국 헌법에서 규정한 정교분리의 핵심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 문제는 헌법학자들이 좀 더 연구해 보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헌법 조문과는 관계없이 한국에서 국가와 종교는 언제나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다. 국가가 특정 종교에 편향된 정책을 펼치거나 종교단체들이 이런저런 방식으로 정치참여를 해 왔다.

2) 한국 종교와 정치의 관계
그러면 한국에서 종교와 정치의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 간단히 살펴보자. 이는 보수 교단의 정교유착과 진보 진영의 인권−사회−민주화 운동의 두 축으로 나눌 수 있다. 이 둘은 종교의 정치참여를 형성하는 두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중 전자가 주류를 이루었다. 이 두 모습을 한국의 대표적인 종교인 개신교, 가톨릭, 불교를 통해 알아보자.

구한말 개신교 선교사들은 엄격한 정교분리 원칙을 채택했다. 남의 나라에서 그럴 수밖에 없기도 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일제 식민지 지배 권력에 굴종하고 이를 옹호했다. 정교분리를 표면에 내세우면서도 정치와 유착하였다. 이런 모습은 대한민국 건국 후의 한국 보수 교회로 이어졌다.

해방 후 미 군정의 종교 정책은 명백히 기독교 우위 정책이었고, 그것이 이승만 정부로 이어졌다. 개신교를 사실상 국가종교로 만들었다고까지 평가된다. 해방 후 한국 사회 전반과 마찬가지로 종교는 고도로 정치화되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이승만의 반공주의와 친기독교 정책이 큰 영향을 미쳤다. 6·25 당시 한국 교회들은 한국기독교구국회를 결성하고 구국신도대회를 여는 등 전쟁을 적극 지원했다. 또 선거 개입을 통해 이승만을 전폭 지지하였으며, 4·19에 충격을 받고 5·16을 지지하기도 하였다. 개신교에 비해 천주교는 이승만에 비판적이었지만 반공주의를 고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불교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종교가 반공주의를 매개로 국가권력과 유착하였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정교유착과는 다른 형태의 정치참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정부 비판과 민주화 운동이었다. 1960년대 중반 한일협정 비준 반대로 종교계 일각의 반정부 활동이 활성화되었다. 1969년 박정희의 삼선개헌 시도를 둘러싸고 개신교의 보수, 진보가 갈라졌고, 1972년 10월 유신으로 이런 괴리가 강화되었다.

한국 개신교 정치참여의 신학적 근거는 세속화의 교리, 하나님의 선교, 민중신학이었다(정형호, 112 이하). 세계교회협의회의 선교 방침인 하나님의 선교는 교회가 세상 속에서 구원사업을 펼쳐가는 하나님의 선교 도구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기초해 있었다. 보수 진영의 선교 개념이 복음 전파라고 하는 전도의 자유에 머무른 반면, 진보 진영의 선교 개념은 ‘세상의 인간화’ ‘해방’을 의미하였다. 한국교회협의회(KNCC), 한국기독청년협의회, 한국기독학생총연맹 등이 주요 단체였다. 민중신학과 민중교회가 1984년 무렵부터 등장하였고, 보수 진영은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워서 이를 공격하였다. 그들은 진보 기독세력의 사회 비판과 독재에 대한 저항이 정교분리 원칙에 어긋나는 부당한 정치 개입이라고 주장하였다.

개신교와 국가의 유착은 조찬기도회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났다. 1965년 국회조찬기도회가 처음 열렸는데, 이것이 1966년 대통령조찬기도회로 이름이 바뀌었고, 1976년 이후 국가조찬기도회라는 이름으로 계속되고 있다. 보수 기독세력은 1980년 8월 6일 전두환 장군을 위한 기도회를 여는 등 이후에도 계속하여 정부와 체제를 옹호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보수 기독교 세력에는 반공주의와 숭미사상이 만연하였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2010년 6월 22일 서울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한국전쟁 60주년 평화기도회가 대표적인 사례였다. 이런 행태는 일본 강점기에 교회가 보였던 반민족 행위의 유산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의 도움으로 보수적 국가와 이와 유착한 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으며, 분단 상황으로 교회의 적으로 간주되는 북한의 존재를 위협으로 느끼기 때문이기도 하다.

2000년대 들어 보수세력이 좌파로 규정한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집권이 이어지자 위기감을 느낀 보수 기독교 세력은 당시까지의 수세적인 자세를 버리고 적극적인 공세로 돌아섰다. 자신의 기득권이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위기감의 발로였다. 2003년 전후로 대형교회 지도자들이 반격에 나섰고, 정부를 친북반미로 규정하였다. 이와 조금 다른 조류로서 개신교 시민단체들도 활동을 벌였다. 김진홍의 뉴라이트전국연합(2005), 서경석의 기독교사회책임(2004) 등이었다. 이와 더불어 불교계에서는 2006년 불교뉴라이트가, 가톨릭에서는 2007년 가톨릭뉴라이트 등이 나타났다.

1989년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이 한국기독교협의회(NCC)와 대립하여 결성되었는데, 이후 최근까지 그들은 다음과 같은 정치 활동을 벌였다. 사학법 개정 반대, 개정된 사학법 재추진, 북한 규탄, 친미 활동, ‘북한 퍼주기’와 북핵 규탄, 북한 인권 촉구, 전시작전권 환수 반대, 미국 철수 반대, 반미 감정 반대, 국가보안법 고수, 대통령 탄핵 등.

오랫동안 이승만 정권과 대립관계를 보이던 가톨릭 교회가 본격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1974년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결성을 통해서였다. 반정부 활동 혐의로 지학순 주교가 구속된 것이 촉매가 되었다. 이후 진보적 사제들은 명동성당 3·1절 기도회 사건(1976), 동일방직 사건(1978), 오원춘 사건(1979) 등에 개입하였다. 정교분리를 어겼다는 교회 안팎의 비난에 대해 이들은 자신의 행동이 정치참여가 아니라 사회에 대한 윤리적 판단이라고 방어하였다. 이들의 행동은 제2차 공의회의 선언에 영향받은 것이었다. 1960년대 전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의 존재 목적은 교회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에 봉사하기 위해서이며, 인간의 기본권과 영혼들의 구원이 요구할 경우에는 정치 질서에 관해서도 윤리적 판단을 내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선언한 바 있다. 또 남미 해방신학의 영향을 받은 민중신학이 제기된바, 이는 1970년대 후반 가톨릭 사제들의 사회참여와 민주화 운동의 신학적 거름이 되었다. 가톨릭 진보 진영의 정치참여 단체들로는 전국사제단 외에도 가톨릭노동청년회, 농민회, 노무현과 함께 기도하는 사람 등이 있었다.

불교의 경우를 보자. 대한민국의 불교는 국가에 굴복하면서 이득을 챙기는 자세를 오랫동안 견지하였다. 군사정권에 충성하는 대가로 군종제도에 참여하게 되었고, 석탄일의 공휴일 지정 등 특권을 얻었다. 불교재산관리법 등 불교 관계 법령으로 불교계 재산에 대한 국가 통제가 확립되었고, 국가권력에 대한 불교계의 종속이 심화되었다. 불교 종단은 국가에 대한 철저한 지지세력이 되었다.

이러한 불교의 국가 예속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지시한 불교 정화를 통해서였다. 정부는 비구승이 대처승을 몰아내고 종단 권력을 장악하게 도움을 주었으며, 이를 통해 비구 측과 이 정권 사이에 공고한 지지−후원 관계가 형성되었다. 그 당시 내세웠던 대처승 축출과 토지 개혁 수용은 명분에 불과하였고, 사실은 불교 내부의 종권 획득을 위한 투쟁의 성격이 강하였다고 한다. 이 정권하 불교 신자들은 경무대 앞에서 북진통일을 지지하는 시위를 벌이고, 1956년 비구 측 대표들이 경무대를 방문하여 이승만의 대통령 선거 재출마를 호소하기도 했다. 3·15 부정선거에도 조계종단이 체계적으로 동원되었다. 박 정권 시절에는 불교의 친정부적 태도가 강화되었다. 불교계는 삼선개헌과 유신개헌을 지지하였고, 1980년 신군부의 10·27법난을 겪으면서도 ‘호국불교론’을 통해 정권을 적극 지지하였다.

불교는 다른 종교보다 정치권력과 돈을 매개로 더 강하게 묶여 있는 편이다. 사찰 재산 유지와 관람료 등으로 유착되어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국가와 불교계 사이의 ‘보조금, 관람료 동맹’을 지적하기도 한다.
이명박 정부가 친기독교 정책을 펼치고 불교를 홀대하자 불교 종단은 크게 반발하였다. 그러나 조계종 총무원장이 템플스테이 등 불교에 대한 정부보조금 지원을 밀실에서 여당 원내대표에게 청탁하고 그 대가로 정부에 비판적인 봉은사 주지의 퇴진 요구를 받아들인 듯한 상황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러한 일은 불교계와 정부 사이에 “‘돈과 충성(지지)의 교환’이라는 부끄러운 과정이 실제로 존재했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종단과 국가의 정교유착이 민주주의 시대에도 계속되는 증거이다.

민주화 과정에서 불교계도 일부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1980년의 법난 이후 새로운 흐름으로 민중불교 운동이 나타나고, 1985년 민중불교연합이 결성되기도 하였다. 인권, 민주화, 환경 운동 등에서 진보적 불교 인사들의 참여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그러나 개신교나 가톨릭에 비해 미약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상으로 간단히 살펴본 바에 따르면 한국의 종교와 정치는 언제나 유착 관계 아니면 대립 관계였다. 종교와 정치가 ‘격리(좁은 의미의 정교분리)’된 적은 한 번도 없었고, 국가와 종교 제도가 유착하거나 대립하였다. 유착이든 대립이든 종교는 언제나 정치에 참여해 왔다.
 

5. 결론

정교분리는 종교와 정치의 고유한 영역을 인정하고 국가가 종교적 중립을 지키며 종교가 국가권력에 직접 개입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둘 사이의 상호작용이나 상호 개입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윤리적이나 사회적으로도 옳지 않다. 정치적 선을 추구하기 위해 막강한 사회적 영향을 지닌 종교계가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당연하다. 또 국가는 종교의 자유와 종교 간 중립에 충실해야 함과 동시에 종교의 사회정치적 악에 대해서는 법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종교의 정치참여는 정교분리와 모순되지 않는다. 종교의 정치참여가 바람직한지의 여부를 따지기 전에 종교가 정치참여를 하지 않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정교분리를 내세워 정치참여를 비판하는 논리는 그 자체가 일종의 정치참여이다. 참여든 참여 반대든 정부나 체제에 대한 찬반, 정책에 대한 선호를 반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떤 형태의 정치참여인가이다. 이에 대해서는 여기서 자세히 논할 수 없고 간단한 원칙만 제시한다. 종교계가 정치 현안마다 발언하고 참여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서로 간의 고유 영역’을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민주화, 인권, 환경 등 종교적 선과 관련되는 큰 정치적 흐름이나 쟁점에 목소리를 내야 한다. 정치적 옳음의 큰 흐름 형성에 참여해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종교제도 전체와 하위 단체나 개인의 정치참여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종교제도 전체는 큰 흐름에 주로 참여하되, 작은 단위들은 중요한 현안에 참여할 수 있다고 본다. 시국 선언, 성명 발표, 평화 시위 등이 흔히 보는 방법이다. 종교 정당 창설은 원칙적으로 가능하다고 보나 한국 현실에서는 실현 가능성이 낮다.

어떤 차원이든 어떤 형태이든 종교의 정치참여는 궁극적으로 종교에서 지향하는 선한 세계를 이 땅에 실현함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평화와 인권 신장과 사람다운 삶의 보장에 기여해야 한다. 이는 종교의 원래 목적 또는 고유한 기능 중 하나이다. 정치적 외도가 아니다.

정교분리와 종교의 정치참여는 모순이 아니다. 양립 가능하다. 어떤 방식의 정치참여인지가 문제일 뿐이다. ■

 


김영명 / 한림대학교 정치행정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뉴욕주립대학교(버팔로) 졸업(정치학 박사). 도쿄대 동양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한국정치학회 부회장, 한글문화연대 대표 등 역임. 주요 저서로 《한국 현대정치사》 《고쳐 쓴 한국 현대 정치사》 《한국의 정치변동》 등이 있다. 한국정치학회 학술상, 세종문화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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