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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국불교의 정치참여와 평가 / 이학종
특집 | 불교와 정치참여
[58호] 2014년 06월 01일 (일) 이학종 urubella@hanmail.net

1. 들어가는 말

흔히 종교와 정치는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말한다. 정교분리(政敎分離)란 말이 그것이다. 불교계 안에서도 마치 정교분리가 이상적인 원칙인 것처럼 주장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특히 종교 편향 시비가 불거질 때마다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말이 정교분리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사회는 정치적 사회이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므로 정치를 떠나서는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다. 이런데도 ‘정교분리’나 ‘종교가 정치에 간여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여전히 회자되는 것은 숙고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정교분리는 흔히 정치가 종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하거나, 정치적 목적으로 특혜 또는 압박을 가하려 할 때에나 그 효력을 인정받는 제한적 용어에 지나지 않는다. 정교분리는 엄밀히 말하자면 성립될 수 없는 개념이다. 정치와 종교는 ‘분리’될 수 없으며, 다만 ‘구분’만 있을 뿐이다.

조광은 최근 〈실학산책〉에 기고한 ‘정교분리의 의미’라는 제목의 글에서 종교와 정치의 불가분의 관계를 밝히고 있다. 그는 “종교적 인간이라는 말, 즉 호모 렐리기우스(homo religius)는 사회적 존재인 인간이 본성상 종교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며 “인류의 역사에서 종교와 인간사회의 관계는 매우 밀접해서 물리적인 분리가 불가능함을 보여 준다”고 역설한다. 그는 또 정치인류학에서 ‘샤먼 킹(shaman king)’의 존재를 언급하면서 인류사의 초창기에는 샤먼, 즉 무당이 정치적 권력까지도 장악하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정치학계에서는 샤먼 킹을 신정정치(神政政治)의 원형으로 본다. 고대사회의 신정정치는 중세사회에서도 등장했으며, 실제 종교가 세속권력을 지배한 사례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현대사회에 있어서도 특정종교의 이념을 현실정치에 도입시키려는 시도가 지속되고 있다.

종교적 권위와 세속적 권력이 정교분리라는 합의에 도달하게 된 것은 근대국가 단계에 이르러서였다. 정교분리는 종교의 존재를 정치에서 인정하고, 동시에 종교는 정치에서 지향하는 세속적 가치의 정당성을 승인하는 일종의 타협안이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 이르러 종교는 여러 가지 반인륜적 사건을 경험하면서 개인윤리뿐만 아니라 사회윤리의 중요성을 심각하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종교는 개인 구원 위주의 교리뿐만 아니라 사회질서를 올바로 이끌기 위한 사회교리를 발전시켜 가게 되었다.

한국사회는 1945년 해방을 맞았지만, 곧이어 심각한 남북대립으로 점철됐다. 이 과정에서 북측의 공산주의 체제는 종교의 가치를 기본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반발한 많은 종교인은 반공주의 노선을 취하게 되었는데, 그들이 취했던 반공주의는 정치적 행동이었다. 그러나 당시 정부에서는 종교계의 정치참여를 나무라지 않았다. 종교계가 추구하는 가치와 정치계의 지향점이 서로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종교와 정치에 대한 이원론적 사고방식도 점차 극복되었다. 정치와 종교는 모두 각자가 지향하는 선성(善性)에 따라 인간의 발전과 사회의 구원을 추구했다. 특히 정치현실에 대한 종교의 발언은 사회윤리의 차원에서 활발히 전개되었다. 차츰 대중 사이에서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구분·구별될 뿐이라는 사고가 확산됐다. 그리고 종교인의 정치현실 문제에 대한 비판이나 지적은 점차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 글은 이처럼 인류사 초창기부터 어떤 형태로든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던 종교와 정치의 역학관계에 기반하여 해방 이후 현대 한국불교의 정치참여에 대한 개괄적인 검토와 함께, 그 평가에서도 무엇이 문제이고 지향해야 할 바인가를 고찰하는 데 지표를 두었다.

2. 현대 한국불교와 정치권력의 함수 관계

1) 해방 이후 불교교단의 현실

해방 이후 한국사는 세계사에서도 유례가 없을 정도로 급격한 변화를 겪은 시기였다. 특히 해방 이후 한국사회에서 종교는 정치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불교는 물론 개신교, 천주교, 원불교 등 이른바 4대 종교는 정치와 직·간접적인 영향을 끊임없이 주고받았으며, 또 받고 있는 중이다. 천주교는 매우 노회하고 적극적인 방식으로 정치권과 관계를 설정하고 있는 것으로, 개신교는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 정권 창출에 노골적으로 뛰어들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해가는 것으로, 원불교는 신생교단으로서 정치적 입지를 착실히 키워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불교는 노태우 정권 이래 김영삼 정권을 거치면서 정치적 영향력이 급속하게 축소되고 있다는 평가가 많다.

국회의원 불자 모임인 정각회(正覺會)의 회원, 즉 국회의원 불자의 수가 종교의 영향력을 재는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없지만, 불교의 교세가 최근 들어 급격히 줄어들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올해 초에 있었다. 지난 2월 26일 국회의사당 귀빈식당에서 한국불교종단협의회 회장인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을 법사로 초청해 열린 정각회 신년법회에는 불과 14명의 국회의원이 참석했다. 전체 국회의원 수가 299명에 이르는 것을 감안한다면 불자 국회의원 숫자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상황에 와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는 객관적 수치로서도 불교의 대(對)정치 영향력이 미미한 수준으로까지 급락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볼 수 있다.

따지고 보면 불교계는 노태우 대통령이 후보였던 시절에는 공공연하게 ‘불자 대통령 만들기’에 나섰고, 불교계의 지지에 의해 당선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당선에 상당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이처럼 힘을 결집하면 대통령을 당선시킬 수도 있을 만큼 막강했던 불교계의 정치적 영향력이 작금에 이르러서는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대통령을 만들기는커녕 정치권에서 불교계의 표를 그리 크게 의식하지 않을 지경에 와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같은 결과는 일차적으로 꾸준한 교세의 감소에 기인한 바 크다. 특히 우리 사회를 이끌고 있는 오피니언 리더 그룹에서 불자들이 주변으로 밀려나고 그 숫자가 소수로 전락한 것이 더 큰 원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한국불교는 오늘날 정치계는 물론 관계, 경제계, 학계, 문화예술계, 스포츠계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변방에 밀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한국불교의 특성은 오랫동안 국가주의 불교, 호국불교, 민족불교라는 개념으로 설명되어 왔다. 동시에 한국불교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의 주역이라는 설명도 부연되곤 했다.

김광식은 현대 한국불교를 해방공간(1945~1953), 정화공간(1954~1962), 산업화 공간(1963~1980), 민주화 운동기(1981~1994), 민주화 공간(1997~ )으로 구분해 불교와 국가권력의 상관성을 분석하고 있다. 김광식의 이 같은 구분은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저서 《불교와 국가》에서 현대불교사에서 불교계 내부에 팽배해 있는 자학적 소외의식을 비판한다. 불교의 문제를 불교 내부에서 원인을 찾으려 하지 않고, 특히 개신교에 대한 피해의식에 젖어 정교분리가 국가정책으로 구현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것에 대한 문제점을 예리하게 지적한다.

정교분리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가능한 것이 아니거니와, 피해의식의 발로에서 비롯된 수세적 정교분리 원칙의 주장은 향후 불교계의 정치적 행보에 되레 족쇄를 채우는 어리석은 결과를 부를 개연성이 크다는 점에서 위험한 행보라고 할 수 있다.

2) 한국불교와 정치권력의 유착
‘해방공간’에서 미 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원칙적으로는 정교분리와 종교자유를 천명하였으나, 개신교 중심의 정책을 구현했다는 것이 관련 학계의 평가다. 이 시기 불교계는 1945년 9월 22~23일 개최한 전국승려대회를 통해 일제강점기에 불교를 옥죄었던 사찰령 폐지를 요구했으나 미 군정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에도 미 군정은 적산사찰(일본불교의 사찰)이 불교 재산으로 될 것을 우려하여 불교계의 사찰령 폐지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는 미 군정 당시 한국불교계의 정치적 역량의 한계와 기독교 중심의 종교정책을 편 미 군정의 입장이 빚어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미 군정 시기에 조성된 이 같은 흐름은 이승만 정권으로 이어졌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라는 전환점에 선 한국불교의 교단 집행부는 이승만 정권과 정치적 보수우익이라는 동질적 기조를 가짐으로써 상통하는 입장을 취했다. 보수적인 교단 집행부는 당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불교 혁신세력의 도전에 자율적으로 대응하려는 태도보다는 정권의 비호를 받아 종권을 보호받으려는 행보를 보였다.

그 당시 혁신세력은 비구승단 옹호, 교도제 실시 등을 주장하면서 교단 집행부를 구성하고 있는 대처승을 밀어내고자 했다. 대처승 중심의 교단 집행부는 정권과의 친연성(親緣性)으로 인해 정권의 기독교 우대정책에 대해 변변한 비판조차 하지 못했다. 오히려 김구의 북행(北行)에 동참한 혁신세력을 진보좌파로 규정하면서 배척에 나섰다.

당시 교단 집행부는 대처승 중심의 교단 유지를 위해서 불교 내 혁신세력을 해소하려는 목적으로 국가권력과 협조체제를 유지·강화했다. 이 같은 국가권력과의 협조체제는 일정한 ‘성과’를 거둬들이기도 했다. 1950년 10월 10일 시행된 농지개혁 실시 및 임시조치(농지개혁법)로 인한 불교계 농지 상실 위기를 이승만의 ‘사찰유지대책 강구 지시(제25차 국무회의)’ 1953년 5월 7일 자 ‘대통령령 제788호’로 보호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의 사찰토지에 대한 보호는 사찰, 즉 당시 불교를 종교로 바라보기보다는 문화 또는 문화재로 인식했다는 주장도 있다.

‘정화공간’ 8년 동안의 불교와 국가권력의 관계는 오늘날의 한국불교계에 여전히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식민지 불교의 극복, 한국불교의 전통회복을 명분으로 전개된 불교계 내부의 움직임은 불교계가 가지고 있던 모순과 문제들을 일거에 폭발시켰다. 비구와 대처승으로 나뉘어 벌어진 치열한 갈등과 대립, 즉 ‘정화운동’은 현대 한국불교사에서 가장 큰 후유증을 야기한 일대 사건으로 기록된다. 통칭 ‘정화’로 불리는 이 사건은 여전히 한국불교의 불씨로 남아 있으며, 현재까지도 교단에 승풍실추 등의 범계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제2 정화’의 불가피성이 거론되는 등 현재진행형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수행에 전념하고 결혼하지 않는 것을 전통불교의 수호로 여겼던 비구승들은 해방 후 교단과 사찰의 운영을 독점한 대처승들로부터 배척을 받으면서 수행공간 박탈과 생존위협이라는 현실에 처했다. 이들은 1952년 교정이었던 만암 스님에게 비구승 전용의 수행사찰 지정을 요구했다. 비구승들의 건의를 받아들인 만암 스님은 1953년 4월 통도사 고승 모임과 1954년 4월 불국사 법규위원회에서 비구승에 18개 사찰을 제공한다는 방침을 정했으나 대처승 측이 이를 이행하지 않았다.

비구와 대처승의 갈등이 폭발 직전에 이르자 이승만은 1954년 5월 20일 비구승들의 정화를 지지하는 첫 유시를 발표했다. 이후 이승만의 유시는 무려 8차례나 이어졌다. 비구 측의 요청에 따른 대통령의 유시는 국가권력이 불교계 내부 문제에 개입하는 빌미를 제공했고, 권력에 의해 비구−대처승 싸움에서 승리한 비구 측의 권력예속을 관행화하는 전거가 되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외부권력을 끌어들이는 이런 관행은 지난 1994년 의현 스님에 의해, 1999년 총무원장 직무대행 도법 스님 등에 의해 공권력 투입이 요청되는 등 형태만 바꿔 그대로 재연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해방 이후 비구 측의 교단정화를 위한 최초의 모임인 전국비구승대표자대회(1954. 8. 25)에서는 이승만에게 감사장을 올리자는 안건이 채택되어 실제로 전달이 되었고,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경무대를 찾아가 호소하는 일이 스스럼없이 진행되었다. 이는 비구 측과 이승만이 상호이익을 위해 결탁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승만의 비구 측 비호로 수세에 몰린 대처승 측도 이후 사법부의 심판을 통해 타당성을 심판받고자 했다. 이 역시 스스로의 문제를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비구 측과 큰 차별을 두지 못했다. 결국 이승만 정권 당시 불교계는 스스로의 문제를 율장 등을 기준으로 자율적으로 해결하는 노력을 기울이지 못했다.

이런 흐름은 박정희 정권에까지 계속 이어졌다. 박정희 정권은 불교계의 정화를 둘러싼 분규를 사회정화 차원으로 접근하는 자세를 보였다.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를 향해 비구·대처승 측은 공히 우호적 입지를 차지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구악 해소 차원에서 일단 비구·대처승 양측을 부인하는 자세를 보였다. 그리고는 ‘불교재건위원회’라는 단체를 활용해 통합을 시도했다. 비구·대처승 양측은 공히 군부가 제시한 불교정비 프로그램에 동의하지 않다가, 1962년 1월 군부가 강력한 입장을 밝히자 굴욕적인 동의를 했다. 당시 박정희는 존속되어 있던 사찰령으로 불교계를 압박했다.

이로 인해 1962년 4월 출범한 것이 이른바 통합종단이다. 권력에 의해 타율적으로 분규를 일단락했지만, 정상적 교단 운영이 가능할 리 없었다. 얼마 가지 않아 대처승 측이 잇따라 이탈을 했고, 이들은 1970년 태고종을 창종하기에 이르렀다. 태고종의 창종은 대처승 종단의 탄생과 오랜 분규에서 비구 측이 완승을 거두었음을 동시에 의미했다.

박정희가 이끄는 국가재건최고회의는 1962년 5월 28일 사찰령을 폐지하고 불교재산관리법 제정을 통과시켰다. 불교재산관리법의 시행령은 3개월 후 공포되었고, 이 법으로 한국불교계는 불교 재산의 관리 및 불교의 단체 등록, 재산관리 등 운영의 상당 부분에 국가의 개입을 허용했다. 해방 후 불교계가 요구했던 사찰령 폐지는 폐지가 아닌 대체입법으로 귀결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정화공간에서 불교계와 정치권력의 관계는 사찰령과 불교재산관리법을 놓고 서로 간의 이익을 추구하는 선에서 정리됐다. 이 관계는 주로 비구 측과 정권의 관계였지만, 대처승 측 또한 초창기 잠깐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는 듯하다가 이내 비구승 측과 정권이 만들어놓은 구조에 순응하게 되었다.

‘산업화 공간’에서도 불교와 국가권력의 관계는 1962년 제정된 불교재산관리법의 틀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다. 이후 불교사찰과 사찰 소유지가 포함되어 있는 천혜의 수행공간이 공원으로 지정되면서 불교계와 정치권력의 관계는 불교재산관리법과 함께 자연공원법(1967년 2월 6일 국회통과), 문화재보호법의 틀에 의해 전개되는 양상을 보였다. 일부 불교계의 반발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서슬 퍼런 국가권력 앞에 빛을 발하지 못했고 불교계는 예속의 길로 끝없이 빠져들었다.

불교계는 이후 빠르게 이들 법에 의한 공원입장료와 문화재 관람료, 문화재 보수비 지원 등과 같은 ‘단 꿀’에 길들기 시작했다. 불교계는 정부의 간섭 및 지원을 수용하면서 이런 제도를 용인하는 이념인 ‘호국불교’를 재생산하고 유포하기에 이르렀다. 1975년에 출범한 호국승군단은 정권과 불교계의 정치적 유착의 산물에 다름 아니었다. 또한 정부는 이 공간 동안 정권에 협조적인 불교계에 대해 ‘군승제도 실시(1969)’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1975)’ 등 불교계의 요구를 수용하는 ‘시혜’를 제공했다. 산업화 공간에서 불교계와 정치권력의 관계는 그야말로 서로의 이해를 위해 철저하게 밀착해갔던 시기였다. 이 시기 정부는 불교에 다소 우호적인 정책을 폈고, 그 덕분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1960년대 이후 불자의 숫자는 증가세를 보였다.

3) 불교계의 민주화 운동과 정치권력
민주화운동기(1981~1994)는 10·27법난(1980)으로 시작된 전두환 정권과 그를 계승한 노태우 정권 기간을 통틀어 시민·학생·종교계 등을 중심으로 일어난 민주화 운동 공간을 의미한다. 1980년 10월 26일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에 의해 총칼과 구둣발로 처참하게 짓밟힌 불교계는 이 시기부터 크게 두 가지 흐름을 나타냈다. 종권을 장악하고 있는 종단 집행부는 더욱 철저하게 정권에 아부·유착하는 경향을 보였고,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정치권력의 문제점을 인식한 소장 승려들을 중심으로 민주화 의식이 일어나면서 교계 안에 조금씩 반정부적 움직임이 싹텄다.

10·27법난이 불교계에 준 충격은 엄청나게 큰 것이었다. 신군부의 정권장악 명분 구축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분석이 일반적이지만, 그 이면을 살펴보면 1979년을 정점으로 첨예화했던 종단분규, 즉 조계사파와 개운사파의 대결 과정에서 상대를 헐뜯기 위해 정치권력에 제공된 막대한 양의 ‘투서’로 빌미를 제공했다는 지적이 있다.

그럼에도 10·27법난은 불교계의 정치권력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비록 전두환 정권이 물러난 뒤에야 구성된 ‘10·27법난 진상규명추진위원회’가 1988년 11월 22일에 발표한 성명이기는 하지만, 불교계는 공식적으로 10·27법난에 대한 인식의 일단을 법난 발생 8년 만에 공개했다. 교단을 대표하는 기구에서 발표된 이 성명의 골자는 “10·27법난이 교단을 군사정권에 예속시키려는 의도에서 자행된 반민주적 만행이며, 전두환 장군 대통령 추대 지지성명 거부에 대한 보복이고, 정통성 없는 군사정권이 그들의 궁색한 입장을 호도하기 위해 자행한 대국민 사기극이며, 군사정권이 그들의 도덕성을 가장하기 위해 마치 불교계가 부정축재 재산이 많은 것처럼 과다선전하고 명분 없는 국고환수를 표방했다”는 것이었다.
불교계는 1980년 10월 27일의 사건을 8년이 지난 후에야 법난으로 공식 규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불교교단의 법난 규정은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대불련)를 중심으로 한 불교계 일각의 지난한 투쟁으로 얻어진 산물에 불과했다. 대불련은 법난 직후 처음으로(1980. 11. 22) 비판성명서를 발표했다. 대불련을 필두로 해 교계의 출·재가 단체들은 1984~1985년경부터 법난과 관련된 자료집 등을 발간하며 10·27법난에 대한 진상규명 촉구 및 정부의 사과를 거세가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법난에 대한 문제의식을 심각하게 가진 주체는 상당 기간 일부 학승과 대불련 소속 재가자 등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청년승려들이 자각하기 시작하면서 양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1981년 7월 11~16일, 중앙승가대에서 전국 학인들이 연합하여 ‘전국청년승가육화대회’를 열었고, 1982년 6월에는 전국 강원의 학인 500여 명이 전국학인연맹을 발족했다. 1983년 7월 17일 범어사에서 출가와 재가의 결속 하에 ‘청년불교도연합대회’가 개최되고 청년불교도연합이 결성되었고, 이런 흐름은 1983년 8월 16일 발생한 신흥사 승려 살인사건을 계기로 촉발된 종단 사태의 해결에 청년승가가 적극 나서는 흐름을 만들었다. 이들은 비상종단의 주역으로 나섰지만 역량과 경험의 한계 그리고 정치권력의 교묘한 방해 등으로 8개월 만에 물러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1975년 고은, 황석영, 여익구, 고준환, 최연, 전재성 등을 주축으로 개운사에서 가졌던 스터디 모임에서 태동한 이른바 ‘민중불교론’이 고개를 들었고, 그 일단이 전재성의 ‘민중불교론’ 발표(〈대화〉 1977)로 세상에 알려졌다. 이때부터 파급된 민중불교론은 법련사, 칠보사, 묘각사, 개운사 등지에서 불교학생회 학생들의 참가 속에 확산되었고, 이른바 사원화 운동으로 불리며 불교의 사회적 실천에 고민하는 세력의 확대로 이어졌다.

이 같은 움직임은 1985년 5월 4일 민중불교운동연합 출범으로 구체화했고, 이들은 1980년 광주항쟁 및 10·27법난 등에 대해 정부와 국가권력을 본격적으로, 강력하게 비판하기 시작했다. 민불련이 재가 지식인들 중심의 활동이었다면, 1986년 9·7 해인사승려대회는 승려들의 국가권력에 대한 비판과 대안 논리가 확연하게 표출된 일대 사건이었다. 당시 승려대회에 참석한 승려들은 10·27법난을 폭거로 규정하고, 호국불교의 개념을 특정 정당이나 정권을 비호하는 것이 아닌 국민을 위한 개념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선언, 불교자주의 깃발을 높이 세웠다. 9·7해인사승려대회는 1980년대 불교사에서 한국불교의 흐름을 바꾼 하나의 분수령으로 평가된다.

4) ’94 종단개혁 이후 정교유착의 양상
지금으로부터 꼭 20년 전인 1994년의 이른바 ‘조계종 종단개혁불사’는 1980년대 들어 본격화한 불교계의 자주화 및 민주역량 확대에 힘입은 일종의 아래로부터의 혁명이었다. 1980년대의 현대 한국불교사의 분수령이 9·7 해인사승려대회라면 1990년대의 최대의 분수령은 ‘1994년 종단개혁불사’라고 할 수 있다. 1994년 종단개혁의 의미는 매우 다양하지만, 특히 정치권력과의 관계에서 국가권력에 매우 비판적인 세력이 개혁의 주축을 이룸으로써 불교와 정치권력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서의현의 퇴진으로 종단개혁이 성공한 후 1994년 4월 13일 조계사에서 열린 범불교도대회에서 종단개혁 주체들은 의현 스님을 비호했던 김영삼 대통령의 사과와 최형우 내무부 장관의 해임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이렇듯 1994년 종단개혁은 불교계 안으로는 종단개혁의 현안이 있었지만, 바깥으로는 부당한 종단권력을 비호하며 유착 관계에 있던 김영삼 정부와 정치권력의 부당성을 함께 드러냈다는 점에서 매우 큰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당시 출범했던 개혁회의는 출범 이후 종단의 전근대적 요소를 없애고 종단의 민주화와 자주화, 사회화를 목표로 각종 법령을 입안하고, 근현대 불교사상 처음으로, 아니 어쩌면 역사상 최초로 정부와 대등한 관계의 종단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개혁 이후 5월 11일에 종정에 통도사 방장 월하 스님이 추대되었고, 같은 날 ‘김영삼 정권 불교계 유린 규탄 법난대책위원회’가 구성됐다. 불교계의 대정부 규탄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당시 내무부 장관 최형우가 6월 16일 개혁회의 총무원장 탄성 스님을 방문, 조계사에 경찰을 투입했던 것과 승려들을 연행한 것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이렇듯 1994년 종단개혁 이후 불교계와 정치권력(국가)은 점차 대등한 관계로 재편되었다.

그러나 1994년 종단개혁은 개혁회의에서 제정한 개혁입법에 강력한 ‘재정과 인사의 통제’ 등의 개혁입법에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개혁회의 집권기가 끝난 후 총무원의 행정수반이 된 월주 스님이 1998년 다시금 총무원장 출마를 표명하면서 불거진 ‘3선 시비’로 종단분규가 발생해 그 고귀한 성과에 찬물을 끼얹는 안타까운 결과를 초래했다. 당시 월주 총무원장과 그를 지지하는 세력들은 3선이냐 아니냐의 시비가 들끓는 가운데 3선을 강행하려 하면서 분규를 일으키는 원인을 제공했고, 분규의 과정에서 어떤 이유에서든 조계사에 공권력을 불러들임으로써 1994년 종단개혁 당시 성취했던 불교자주화에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히고 말았다.

그러나 1998년 분규사태를 거치면서 상처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교자주와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율성 확보의 성과는 그 맥을 아주 잃지는 않았다. 1994년 종단개혁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정치권력과 불교계의 대등한 관계는 불교계를 의식한 권력의 합법적인 지원 속에 새로운 형태의 유착으로 보다 교묘하게 변질되어 갔다.

문화재 관리 및 보수, 템플스테이 사업 지원, 방재예산 지원, 각종 불교행사 지원 등 국가는 불교계를 예산을 통해 에둘러 관리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불교계 주요 전통사찰들은 포교에 의한 신도 확보, 신도들의 시주에 의한 사찰 운영이라는 전통적이고 정통적인 사원경제 시스템이 붕괴되면서 경제적 자립기반이 쇠약해지거나 상실되었고, 정부의 지원에 사원경제 상당 부분을 의탁하게 되는 새로운 형태의 예속이 오늘날에도 가속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따라 국보나 보물, 유형문화재 등을 보유하고 있거나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는 전통사찰들 상당수는 사찰의 재정 기반이 시주가 아닌 문화재보호법, 자연공원법 등에 의한 지원금에 의지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최근 들어서는 유형문화재만이 아닌 무형문화재, 템플스테이 지원금 등 정부의 지원도 다양해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승려의 능력을 평가하는 기준이 중앙 및 지방정부로부터 각종 보조금이나 교부세 등 지원금을 타내는 로비 수완으로 여겨지는 현상도 만연하고 있다. 이 같은 흐름과 관련, 조계종 승려 모임 가운데 최대 계파로 평가되는 화엄광장과 실천승가회 산하 단체인 ‘불교미래사회연구소’는 2013년 3월 정부 각 부처의 종교지원 예산 현황을 분석한 자료집 〈정부 종교지원예산 분석−중앙정부부처 민간지원사업을 중심으로〉를 발간하기도 했다.

이런 흐름에 편승해 종단의 기득권 세력들은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특정 후보를 공공연하게 지원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고, 정치권력이 사찰의 인사에까지 개입하는 정황까지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특히 2011년 5월 봉은사 주지를 교체하는 배경에 여권 핵심의 ‘좌파주지’ 교체를 요구가 있었다는 증언이 나오면서 파장이 일기도 했다.

이처럼 정교유착에 따른 명분 약한 정부의 지원이 이루어진다든가 국립공원입장료나 관광사찰의 관람료가 종단운영의 재원으로 충당된다면 이미 그 한계는 분명하다. 종단의 사부대중이 종단운영 재정을 스스로 충당할 때만이 결사도 가능하고 불교적인 사회비판과 감시 기능도 가능한 일이다.

3. 불교의 정치적 공공성과 과제

현대기 불교계의 정치참여와 그 양상들을 살펴보면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정치의 참된 가치가 어떤 것이며, 해방 이후 정치권력과 불교계가 이어온 여러 형태의 관계를 모두 다 정치로 볼 것이냐의 문제이다. 즉 ‘정치의 공공성(公共性)’ 문제를 따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정치는 사회 내의 대립과 분쟁을 통합하고, 법질서를 창조·유지하고, 국가의 생존과 독립에 대해서 국가의 목적을 실현하는 것으로 항상 국가의 공적인 의사와 이익을 전제로 하는 공공성을 띤다. 정치의 충분조건은 ‘공공성’이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공적인 의사나 이익도 현실적으로는 사적 또는 부분적인 의사나 이익이 통합되어서 성립된다. 따라서 국가의 의사라고 해도 현실적으로는 지배적 계급이나 정당의 의사를 대변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국가의 의사로 인정되는 것은 계급이나 정당의 사적 또는 부분적인 의사가 아니고, 법질서와 정치조직 내에서 일정한 절차를 통해서 정당화될 때에 비로소 그것이 국가의 의사로 인정된다.
정치에는 이처럼 공적인 권위, 공동의사, 공공이익이라고 하는 이념이 전제가 된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곧 정치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의 가치는 개인의 도덕적 가치나 종교적 가치와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국가의 일원이 아닌 개인은 없고, 개인과 상관없는 국가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정치적 가치와 개인의 도덕적 가치가 밀접한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정치는 사회 내의 대립항쟁을 권력적으로 통합해서 국가의 의사와 질서를 수립하고, 국민의 생존과 독립과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정치적 가치를 개인의 안심입명(安心立命)과 영혼의 구원과 관련한 종교적 가치, 정의와 선(善)을 지향하는 인간의 자유의사인 도덕적 가치와 동일시할 수는 없다.

따라서 해방 이후 불교계와 정치권력 사이의 관계 중에서 이러한 정치적 공공성, 즉 불교계 전체의 이익이나 일반사회 전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경우를 담보한 관계만이 비로소 ‘정치’ 또는 ‘정치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준에 의하면 해방 후 현재까지 70년 동안 불교계와 국가 사이에 이루어진 진정한 의미의 정치는 거의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호이해를 위한 유착, 결탁, 거래는 정치가 아니라 야합이자 부도덕한 범죄에 가깝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한국불교사에서 ‘정치’로 평가할 수 있는 사례는 그런 의미에서 해방 직후의 불교계 재산를 지켜낸 노력(이승만의 사찰유지대책 강구 유시)을 비롯하여, 1980년 ‘10·27법난’ 이후 불교자주화를 되찾기 위한 지난한 노력, 1986년 ‘불교자주’를 대내외에 선언했던 ‘9·7 해인사승려대회’와 그 이후 정치권력과 이루어진 대화와 긴장 국면, 불교자주와 종단 민주화를 외쳤던 1994년 ‘조계종 종단개혁’과 그 이후 정치권력과 이루어진 대화와 긴장 국면 정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들어서는 유력한 정치인으로 부상한 안철수의 멘토로 알려진 ‘정토회’의 지도법사 법륜 스님이 스스로 가진 정치적 역량을 통해 조국통일에 기여하기 위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또 아직은 미흡한 면이 없지 않지만 조계종 노동위원회(위원장 종호 스님)가 ‘신자유주의의 폐해’에 주목하며 ‘노동, 차별금지’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등 노동문제의 불교적 해법 창출에 관심을 갖고 꾸준히 활동하며, 불교생명윤리협회(대표 박광서·법응 스님)가 ‘원전위험과 국가위기관리시스템’ 등에 대한 관심을 갖고 다양한 토론과 세미나를 통해 불교계 안팎의 관심 확산에 나서고 있다. 이런 활동 등을 그나마 ‘공공성’을 지닌 바람직한 불교적 정치의 한 예로 들 수 있으며, 불교계가 지향해야 할 지남(指南)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불교적 정치라고 하겠다.

4. 나오는 말

해방 이후 현재까지의 불교와 정치권력의 관계는 크게 ▶상호 이익을 위해 힘을 가진 정치권력과의 유착 및 결탁에 따른 예속 ▶이에 따라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종단권력의 부패와 반민주성 심화 ▶종단권력 부패 심화에 따른 권력에의 종속 심화 ▶부패한 종단권력과 유착한 정치권력에 종단개혁세력의 반감 증대 ▶종단개혁으로 인한 불교자주화 및 불교와 정치권력과의 대등한 관계 설정 ▶정부의 문화재보호법, 자연공원법, 기타 법령에 의한 지원 증가에 따른 새로운 형태(재화에 의한)의 종속관계 형성 ▶불교계의 재정 자립도 약화 및 대 정치권력 종속성 심화 ▶정치권력과 유착된 종단 기득권 승려의 이권 독점 및 범계 행위 등 부패 심화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서로의 이해를 획득하기 위해 유착, 결탁 관계를 유지하면서 점차 종속적 관계로 변질되고, 정치권력에의 종속적 관계로 공고해진 교단 기득권의 독점은 범계 및 부패로 이어지면서 교단 내 대중들의 반발을 부르고, 공고한 관계를 가진 기득권 세력을 정치권력이 비호하면서 문제가 심화되는 악순환은 1986년 9·7 해인사승려대회와 1994년 조계종 종단개혁이라는 불교자주의 획기적인 가치를 송두리째 무색하게 하고 있는 것이 현 한국불교의 정치권력과 교단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이 같은 현대불교사가 주는 교훈은 불교자주 및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유는 혁명과 같은 일시적 사건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꾸준한 제도개혁과 종단 민주화 역량의 강화, 사회적 존경과 신뢰를 받을 만큼의 청정한 교단 건설 및 종단 기득권 세력의 부패 및 범계에 대한 자율적인 감시역량 강화 등이 뒷받침되어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2014년 6·4 지방선거를 앞둔 현재, 한국불교의 정치참여는 어느 지점에 서 있는가? 이 물음을 끝으로 글을 맺는다. ■

 

이학종 / 미디어붓다 대표.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불교학과 석사과정 수료. 저서로 《선을 찾아서》 《돌에 새긴 희망》 《인도에 가면 누구나 붓다가 된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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