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와 정치참여-중국과 한국의 국가불교를 중심으로

1. 불교의 정착과 정치에의 접근

종교는 일반적으로 세속을 벗어난 출세속을 지향하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세속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오히려 세속의 주요한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동아시아의 불교 역시 출세속을 지향하였지만 세속, 특히 정치권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동아시아의 불교가 정치와 관련을 맺은 것은 이 지역에서 불교가 주요 종교로 자리 잡은 시기, 즉 기원후 4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불교는 처음 외국인의 종교로 동아시아에 들어왔다. 기원전 3~4세기에 인도와 중국을 연결하는 교통로(이른바 육지와 바다의 비단길)가 생기고 이를 통해 상인들이 왕래하기 시작하면서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기원후 2세기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불교는 어디까지나 소수의 외국 상인과 이주민들에게 신앙이 되는 외국인들의 종교였다. 2세기 중엽 이후 불교에 관심을 갖고 신봉하는 중국인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그들을 위한 불경의 한문 번역이 활발히 전개되었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볼 때 불교는 여전히 소수의 특별한 사람들에 의해 신앙 되는 익숙하지 않은 종교였다. 당시 불교는 주로 외국인이 다수 거주하는 도시와 항구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하였고 중국인 신자들도 대부분 외국인들과 교류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4세기에 들어와 불교의 위상이 급격히 높아지고 불교는 상류층을 포함한 다수의 중국인에게 급속히 퍼져나가게 되었다. 이 시기는 북방 이민족의 침입으로 중원에 있던 한족 왕조가 남쪽으로 밀려나고, 북중국에서는 여러 이민족 정권들이 대립하고 있던 이른바 ‘5호16국(五胡十六國)·동진(東晋)’의 시기였다. 이 시기가 분열과 전쟁의 시기였던 것을 고려하면 불안정한 현실 속에서 불교가 사람들에게 심리적 안정을 줄 수 있는 새로운 가르침을 제시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실제로 이 시기에 불교가 중국 사회에 정착하고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에는 불교 자체의 가르침 내용 못지않게 불교계의 정치권력에 대한 접근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북중국과 남중국 모두에서 불교는 최고 권력자와 연결되어 그들의 존숭과 후원을 받음으로써 비로소 사회의 주류적 종교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2. 궁정승려 불도징과 북중국 불교계의 동향

중국 역사에서 최고 권력자의 불교 수용과 국가적 차원의 불교 후원은 4세기 전반기에 북중국을 석권하였던 단명의 후조(後趙) 왕조(319~351)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후조의 불교 수용은 황제의 정치적 고문이자 군사 참모의 역할을 하였던 중국 최초의 궁정승려 불도징(佛圖澄, 232~349)의 활약에 의한 것이었다. 쿠차 출신의 불도징은 310년 불교 홍포를 위해 서진(西晉)의 수도 장안에 찾아왔지만, 곧바로 북방 이민족의 침입으로 서진이 멸망하고 사회가 혼란에 빠지게 되어 그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지방에 피신해 있던 불도징은 319년 석륵(石勒)이 후조를 수립하자 그를 통하여 불교를 홍포하고자 하였다. 석륵 휘하의 장수를 통해 석륵에 접근한 불도징은 여러 차례 신이한 이적을 보이고 군사적 예언을 해주면서 석륵과 그 후계자 석호(石虎)의 절대적 신임을 얻어 ‘나라의 보배’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는 궁정에 거주하며 황제에게 자문하는 궁정승려가 되었고, 후조의 황제들은 그에 대한 신임을 계기로 불교를 적극적으로 수용, 후원하였다.

석륵은 자신의 아들들을 사찰에서 자라게 하였고, 매년 불탄일에는 사찰에 가서 직접 관욕(灌浴) 의례를 행하기도 하였다. 중국 역사상 최초로 황실이 공식적으로 불교를 숭상하였으며, 이러한 최고 권력자의 지원을 토대로 불교의 사회적 위상은 크게 높아지게 되었다. 수도였던 양국(襄國)과 업(鄴) 등에는 많은 사찰이 건립되었고 수백 명의 승려가 거주하는 이들 사찰에는 황제의 발원으로 화려한 보석으로 장식된 불상들이 봉안되었다. 이런 가운데 불도징은 1만 명 가까운 사람들을 출가시켜 제자로 양성하였고, 그들이 머물 수 있도록 전국 각지에 9백 개 가까운 사찰을 건립하였다. 그의 제자들 중에는 기존 명문 가문 출신들도 적지 않았으며 그들 중 적지 않은 승려들이 중국 각지로 퍼져 불교를 전파하였다. 불도징의 활동으로 ‘중원에 사는 대부분의 중국인과 이민족 사람들이 부처를 숭배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불도징은 황실의 신임을 받는 궁정승려로 활동하면서 불교에 대한 국가의 후원을 이끌어냈고 이를 통해 후조가 지배하는 북중국의 넓은 지역에서 불교는 이민족 중심의 소수 종교에서 사회의 주류적 종교로 등장하게 되었다. 왕실이 신비한 능력을 지닌 승려를 숭상하며 불교를 후원하는 모습은 이미 그 이전에 중앙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보이던 모습이지만 중국 사회에서는 전례가 없는 것이었다.

한족의 통치 질서가 무너지고 이민족 왕조가 출현한 전환기에 사회적 소수자로서 자신들을 보호하고 후원해 줄 정치세력을 찾던 불교 공동체와 자신들의 통치를 도와줄 지적 능력과 사회 통합 사상을 갖춘 불교 승려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던 신흥 이민족 왕실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였고, 이를 배경으로 쿠차 출신의 불도징에 의하여 고승과 왕실의 긴밀한 유대 관계를 통한 불교 교단의 발전이라는 중앙아시아적 모습이 중국 사회에 수용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49년에 불도징이 죽고 2년 후에 후조가 멸망하였지만 후조의 불교 장려정책은 저(氐)족이 수립한 전진(前秦, 351~394) 왕조에서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특히 3대 황제 부견(苻堅)은 스스로 독실한 불교 신앙자로서 적극적으로 불교를 보호, 장려하였다. 그는 여러 사찰을 건립하고 후원하였을 뿐 아니라 외국에서 전해진 불경의 번역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그는 후조 황실과 마찬가지로 뛰어난 능력을 갖춘 궁정승려를 필요로 하였고, 불도징의 수제자 도안(道安)이 그 인물로 발탁되었다.

불도징의 제자였던 도안 역시 불교의 발전을 위해 최고 권력자의 후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먼 길을 떠나는 제자들에게 ‘이러한 혼란기에 나라의 통치자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불교의 가르침을 확고하게 할 수 없다’고 당부하기도 하였던 도안은 전진 황실의 궁정승려로서 활동하는 한편, 황실의 후원하에 경전들을 깊이 있게 연구하고 불교 의례와 계율을 정비하는 등 불교의 발전을 위한 많은 일들을 실행하였다. 도안은 자신을 이을 궁정승려로 쿠차에서 활동하는 구마라집을 추천하였고, 부견은 쿠차를 정복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였다. 하지만 구마라집을 확보한 군대가 돌아오기 전 부견은 반란군에 의해 살해당하였고, 10여 년 후 비로소 중국에 들어온 구마라집은 전진을 무너뜨린 후진(後秦, 384~417) 왕조의 궁정승려로 활동하게 되었다. 

3. 귀족 승려 축도잠의 활동과 남중국 불교계의 동향 

북중국의 후조와 전진에서 불교가 황실의 후원하에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해 가던 시기에 남중국의 동진(東晋)에서도 최고 권력층의 후원하에 불교는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해 가고 있었다. 동진에서 불교의 정착과 발전에 큰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은 명문 귀족 출신의 승려 축도잠(竺道潛, 286~374)이었다. 축도잠은 산동 지역에 기반을 둔 낭야(瑯琊) 왕(王)씨 출신이었는데, 이 집안은 북방 이민족의 침입으로 서진의 황족과 귀족들이 강남으로 피신하여 새로운 동진 왕조를 수립할 때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던 집안이었다. 축도잠의 형 왕돈(王敦)과 사촌 형 왕도(王導)는 독자적인 군사력을 갖추고 동진 초기 국정을 주도하고 있었다.

축도잠은 이러한 가문 배경을 토대로 황족 및 귀족들과 친밀하게 교류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동진의 상류층들에게 불교를 적극적으로 홍포할 수 있었다. 특히 그는 뛰어난 학식과 언변−특히 《반야경》에 대한 지식과 수사적 능력−으로 당시 상류층의 대표적 문화이던 청담(淸談)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상류층의 불교에 대한 관심과 지지를 이끌어냈다. 그는 많은 귀족들의 존숭을 받았는데, 동진 초기의 황제인 원제와 명제조차도 그를 예우하며 여러 차례 궁중에 초청하여 설법하게 하였다. 물론 여기에는 그의 뛰어난 학식 못지않게 최고 실력자의 동생이라는 집안 배경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궁중에서 설법할 때 그는 승복에 샌들이라는 당시로는 파격적인 복장으로 전각에 들어갔는데, 황실은 이를 ‘방외지사(方外之士)’의 모습으로 선뜻 용납하였다.

축도잠의 활동을 통해 불교는 동진의 상류층 사이에 친숙한 문화로 자리 잡았다. 황제들이 불교에 귀의하여 적극적으로 후원하였고, 다수의 귀족들 역시 불교에 호의적이었다. 특히 당시 귀족들은 청담과 현학(玄學)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축도잠이 설파한 불교의 사상과 이론은 청담과 현학의 논의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았다. 청담에서 나타난 실력은 귀족 사회 내부의 평판 및 위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므로 상류층 지식인들은 학식 있는 승려들과 교류하며 불교의 사상과 이론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자 하였다.

축도잠의 활동으로 동진의 상류층이 불교에 익숙해지고 청담에 뛰어난 승려와의 교유를 선호하는 가운데 4세기 중엽경에는 청담의 명인 지둔(支遁, 314~366)이 동진 불교계의 대표적 인물로 부상하였다. 그는 명가 출신은 아니었지만 청담 능력을 통하여 당시의 유력한 귀족들과 긴밀하게 교류하고 그들의 후원을 받았다. 유력한 장군이자 정치가인 사안(謝安)과 서성(書聖)으로 추앙받는 왕희지(王羲之)를 비롯하여 수많은 귀족과 학자들이 그와 가깝게 교류하며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4세기 후반의 황제였던 애제와 간문제도 그의 열렬한 후원자였다.

축도잠과 지둔의 활동 이후 불교는 남중국 사회, 특히 상류층 사이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수도와 지방에 황제와 귀족들의 후원으로 여러 사찰이 생겨나고 한족 및 외국 출신의 승려들이 지식층으로 인정받으며 상류층의 저택을 수시로 드나들게 되었다. 특히 4세기 말에 이르면 황제의 발원으로 도성 외곽에 대규모 사찰(=장간사)이 건립되고, 황제가 직접 보살계를 받고 궁궐 안에 승려들이 상시로 머무르는 사찰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북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4세기에 남중국에서도 불교는 사회에 깊이 뿌리를 내렸고, 그 배경에는 축도잠이나 지둔 같은 승려들의 황실 및 귀족들과의 긴밀한 교류가 있었다. 한편 축도잠과 지둔은 귀족들과 교류할 뿐 아니라 사찰에서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고, 그들이 동진 전역으로 퍼지면서 불교를 홍포하였다.  

4. 국가불교 체제의 형성

4세기를 거치며 북중국과 남중국 모두에서 불교는 정치권력의 후원하에 사회의 주요한 사상으로 확립되고 사회적 영향력과 위상이 강화되었다. 이처럼 불교의 위상이 높아지자 통치자들의 불교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아져 갔다. 그리고 그에 따라 정부의 불교에 대한 지원과 통제도 더욱 강화되었다. 이런 가운데 국가(정부)가 불교를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명망 있는 승려들을 성인으로 높여주는 한편, 불교를 이용하여 통치자의 권위를 높이고 불교교단과 승려들을 국가기구 속으로 편제하여 관리하는 ‘국가불교’ 체제가 자리 잡아 갔다.

국가불교 체제의 모습은 4세기 말에 개창되어 불과 40여 년 사이에 북중국 전체를 통일하고 대륙의 강자로 등장한 북위(北魏, 386~534) 왕조에서 처음 나타났다. 내몽골 지역에서 일어난 선비족 왕조 북위는 처음에는 불교에 대해 잘 알지 못하였지만, 북중국으로 영토를 확대하면서 그곳에 정착해 있던 불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태조 도무제는 이전 북중국 왕조들의 정책을 계승하여 불교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그는 수도를 새로 건설하면서 대규모 사찰을 건립하고 명망 있는 승려들을 궁중에 초빙하였다.

이때 계행이 뛰어난 승려로 궁중에 초빙되었던 법과(法果)는 황제로부터 불도징과 같은 존숭을 받았는데, 그는 도무제를 ‘현세의 여래’라고 칭송하며 승려들에게 황제를 여래와 같이 존숭하고 예를 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황제를 ‘현세의 여래’로 높이고 출가자인 승려가 세속의 군주에게 예를 표할 것을 주장한 것은 물론 불교에 대한 황실의 지속적 후원을 이끌어내는 동시에 불교를 견제하는 유교, 도교 세력의 견제로부터 불교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생각된다. 실제로 북위 3대 황제인 태무제는 유학자와 도교 도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불교를 억압하는 폐불 정책을 단행하였다. 법과를 비롯한 북위 승려들의 황제에 대한 존경 표현은 그러한 정치적 탄압을 예방하기 위한 현실과의 타협이었다.

짧은 폐불 이후 다시 국가의 후원을 받으며 중흥하게 된 불교계는 황실에 대한 충성을 더욱 적극적으로 표현하였다. 폐불 직후 승려들은 황제의 신장과 형태가 동일한 불상을 만들어 예배하였고, 폐불 이후 승려들의 책임자로 임명된 담요(曇曜)는 이를 계승하여 운강에 석굴 사원을 만들면서 북위 역대 황제의 모습과 닮은 불상 5구를 조영하였다. 이러한 불교계의 충성에 대해 황실은 승기호(僧祇戶)와 불도호(佛圖戶) 등의 제도를 만들어 불교계를 후원하였다. 승기호는 백성들 중 일부를 국가 대신 사찰에 세금을 내게 하는 것이었고, 불도호는 죄수나 관노비를 사원에서 부리게 하는 것이었다. 한편으로 국가는 사찰과 승려들을 국가가 통제하는 정책을 폈다. 북위의 불교는 이와 같이 승려들이 황제를 여래로 받들며 충성하는 대신 황실이 불교계를 정치·경제적으로 보호, 지원하는 동시에 통제하는 ‘국가불교’적 성격을 띠었고, 이러한 국가불교적 모습은 이후의 북조 왕조에서도 큰 변화 없이 지속되었다. 

남중국에서도 승려들은 황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지원받았지만 북위와 같이 황실에 대한 예속과 국가의 지원이 노골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양(梁, 502~557) 왕조에 이르러 북위와는 다른 형태의 국가불교가 출현하였다. 양을 건국한 무제(武帝, 502~549 재위)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호불(好佛) 군주로, 스스로 불교적 성인이 되어 불교계를 이끌어 가고자 하였다. 그는 황제에 오른 지 얼마 안 되어 신료와 백성 2만여 명을 이끌고 도교를 버리고 불교에 귀의하는 의식을 거행한 후 스스로 술과 고기를 끊을 것을 선언하고, 보살계를 받아 계율에 따라 생활하였다. 또한 수도에 대규모 사찰을 연이어 건립하고 자신을 사찰의 노비로 희사하는 사신(捨身)을 여러 차례 행하였다. 나아가 불교 교리에 대한 연구에도 집중하여 수백 권에 달하는 경전의 주석서를 짓고, ‘신명성불론(神明成佛論)’ 같은 독자적인 불교 이론을 주창하였다. 또한 승려와 관료들을 모아 경전을 강의하고 토론하는 것을 즐겼다.

이러한 숭불 행적으로 인해 ‘황제보살’로 불리기도 했지만 그는 또한 전륜성왕으로서 자처하였다. 주지하듯이 전륜성왕은 인도의 아쇼까 왕(=아육왕)을 모델로 한 불교적 이상 군주인데, 양무제는 스스로 불교적 도덕을 체현한 전륜성왕이 되어 불교적 이념에 의해 통치함으로써 불전에 나오는 이상적 불교국가를 구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전륜성왕임을 대내외에 드러내기 위하여 불전에 나오는 아육왕의 행적을 따라 대형 미륵상을 건립하고,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아육왕 탑을 잇달아 건립하였다. 승려들 또한 그를 전륜성왕으로 칭송하였다. 한편 양무제는 전륜성왕으로서 불교계를 스스로 직접 관리하려 하였다. 주요 승려들의 발탁과 관리 등을 직접 담당하였고, 주요 불교 의례의 집전, 교학 연구의 방향 등도 황제 스스로 주도하였다. 그의 만년에 발생한 쿠데타로 인해 왕조가 멸망함으로써 그의 시도는 온전히 성공하지 못하였지만, 전륜성왕 이념은 후대의 여러 황제들, 특히 신성한 군주가 되기를 꿈꾼 군주들에게 많은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북위와 양에서 출현한 ‘황제여래’와 ‘전륜성왕’ 이념은 이후 역대 왕조에서 빈번하게 사용되었다. 불교계는 현실의 통치자를 ‘황제여래’ 혹은 ‘전륜성왕’으로 칭송하며 불교와 유대를 강화하려 하였고, 통치자들도 그러한 칭호를 통해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하였다. 3백여 년의 남북 분열을 마무리하고 통일 왕조를 수립한 수(隋)의 문제(文帝)는 전륜성왕을 자처하며 전국에 수많은 부처님의 사리탑을 건립하였고, 당나라 초기 후궁에서 황후를 거쳐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성 황제로 즉위한 측천무후는 미륵불로 자처하며 낙양의 용문에 자신의 모습을 닮은 불상을 만들게 하였다. 왕조에 따라, 황제에 따라 약간의 부침은 있었지만, 전통 시대 중국의 역대 왕조와 불교계는 이러한 이념을 공유하며 국가불교 체제를 지속시켜 갔다.
국가불교 체제에서 황제는 불교를 신앙하고 불교계를 지원하는 대신 불교계는 황제에 예속되어 그의 관리와 통제를 받았다. 황제의 불교 지원은 유명 고승에 대한 존숭과 후원, 사찰의 건립 및 유지, 승려들에 대한 우대조치 등이었고, 불교계에 대한 통제는 승려들의 승적 및 사찰 운영의 국가 관리, 주요 사찰의 주지 및 주요 승직의 임명, 교학 체계의 검열 등이었다. 승려의 출가는 반드시 국가의 허가를 받아야 했고, 황제의 평안과 장수를 기원하는 의식은 사찰의 필수적 의례로 자리 잡았다. 불교 문헌을 총결집한 대장경의 편집과 간행도 황제에 명령으로 이루어졌다.

5. 국가불교의 그림자

불교 고승이 최고 권력자에 접근하여 불교의 영향력을 확대해 가고, 마침내 황제를 불교계 일부로 편입시켜 국가불교를 형성함으로써 불교는 전근대 동아시아의 가장 유력한 종교로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세력과의 접근을 통한 급속한 불교의 발전은 기성 정치세력과 다른 종교의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었다. 또한 불교계 내부에서도 승려들의 지나친 정치권력 접근은 불교 본연의 모습과는 일치하지 않는 것이라는 비판과 반성이 제기되었다. 

불도징이 후조 황실의 신임을 얻기 시작하였을 때 한족 유학자를 중심으로 한 일부 세력은 국가 운영에서 불교의 무용성을 주장하며 반대하였고, 전진의 황제 부견이 도안을 존숭하여 황제와 같은 예로 대우하였을 때도 유학자들은 신분에 맞지 않는 참람(僭濫)된 것이라며 비판하였다. 동진에서는 축도잠을 지지하던 낭야 왕씨 세력이 실각하자 반대 세력은 현실 세계를 중시하는 유교의 이념에 입각하여 ‘이 세계 너머의 세계’를 이야기하는 불교의 가르침이 군주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통치 질서를 어지럽힐 수 있다며 궁중의 불교 신앙을 폐지하고 승려들에 대한 지나친 특권을 축소하자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비판 속에 황실의 불교에 대한 후원이 축소되자 축도잠은 잠시 동안이지만 수도를 떠나 먼 산속으로 은거하였다.

5세기 이후 국가와 불교의 연결이 더욱 공고해져 국가불교로 발전하자 불교에 대한 비판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 시기에는 또한 새롭게 등장한 도교 교단 세력이 유학자와 연합하여 국가의 불교 후원을 비판하였다. 그들은 불교의 가르침이 중국의 전통과 배치되는 것이며, 불교의 발전은 국가와 군주의 신성함과 합리적인 국가 운영을 저해한다고 주장하였다. 불교 교단이 발전할수록 비판은 더욱 강화되었고, 점차 황실의 불교 숭상에 대한 반대를 넘어 불교 자체에 대한 부정과 불교 교단의 탄압 주장으로 내용이 확대되어 갔다.

한편 불교계 내부에서도 황실을 비롯한 정치세력과 교류에 집중하는 정치승려에 대한 비판이 나타났다. 도안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던 혜원(慧遠, 334~417)은 스승과 달리 정치세력과의 연결을 철저히 기피하였다. 스승과 헤어진 후 남중국으로 옮긴 그는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여산에 자리를 잡은 후 평생 그곳을 지키며 불교인들만의 수행공동체 운영에 힘을 쏟았다. 잦은 황실의 초대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궁중에 나아가지 않았고, 어떠한 정치세력과도 특별한 관계를 맺지 않았다. 혜원을 존경하는 여러 장군과 귀족들이 교류를 위해 찾아왔을 때 같은 불교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서 교류하기는 하였지만 그 이상의 개인적 관계를 맺지는 않았다. 그는 정치세력을 멀리하는 동시에 불교의 정치세력으로부터 독립과 자율성을 주장하였다. 정부가 승려들에게 군주에 대한 충성을 공식적으로 표현하게 하였을 때 그는 세속에 사는 일반인과 출가한 승려들은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면서 승려들의 군주에 대한 복종을 거부하였다.

이와 같이 불교와 정치세력이 긴밀한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하여 유교 관료들과 도교 세력이 반발하고 불교계 내부에서도 이에 대한 비판이 있었지만 이러한 반발과 비판이 불교와 정치의 연결을 저해하거나 국가불교 체제를 바꿀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정치와 불교의 관계는 더욱 긴밀해져 갔다. 유교와 도교 측의 비판을 의식하여 불교계는 군주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고 세속 권력의 현창에 더욱 노력하였으며, 대부분의 군주들에게 그러한 불교계의 모습은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 통치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유용한 사상이었다. 일부 마찰이 있기는 하였지만 불교와 황실은 대부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고, 불교는 군주의 통치를 보좌하는 이념으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해 갔다.

이처럼 불교와 정치의 긴밀한 연결은 중국에서 불교 발전의 중요한 배경이었지만 동시에 그러한 긴밀한 관계는 때로 고승 개인이나 불교계 전체에 치명적인 상처를 줄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5세기 초 감숙성에 자리잡고 있던 북량(北凉, 401~439) 왕조에서 불도징과 같은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축법호(竺法護, 385~433)는 북량이 위기에 처하자 자신을 존숭하던 군주 본인에 의해 비극적 최후를 맞았다.

북중국을 석권하게 된 북위의 도무제가 북량에 고승 축법호의 인도를 요구하자, 축법호는 북량에 충성을 맹세하며 서역으로 길을 떠났다. 하지만 신비한 능력을 지닌 고승의 적국 유출을 염려한 북량 군주 저거몽손(沮渠蒙遜)은 축법호가 나라를 떠난 직후 자객을 보내 그를 살해하였다. 역시 북량 지역에서 신승으로 명성을 떨치던 현고(玄高, 402~444)는 북량 멸망 후 북위 궁중에 초빙되어 태자에게 가르침을 주며 황실의 존숭을 받았지만, 황제가 태자를 의심하면서 태자를 잘못 인도한 인물로 몰려 극형에 처해졌다.

불교 전체에 대한 대대적 탄압인 폐불도 국가불교 체제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스스로의 생각에 의해 혹은 주변 인물들의 충고에 의해 불교 승려들이 기대했던 만큼 신성하지 못할 뿐 아니라 지나치게 많은 승려와 막대한 사찰의 재산이 국가의 통치기반을 잠식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 일부 황제들은 지금까지의 불교계에 대한 지원을 철회함은 물론 불교계의 인적, 경제적 기반을 몰수하는 폐불 정책을 단행하였다. 대부분의 승려들을 환속시켜 국가의 역을 부담하게 하였고, 사찰의 건물과 재산을 몰수하여 황실과 국가 재정의 결핍을 보완하고자 하였다. 특히 국가 재정이 어려운 상태에서 이러한 폐불 정책이 자주 실행되었다.

폐불 정책은 북위 태무제, 북주 무제, 당나라 무종, 후주 세종 등에 의한 이른바 ‘3무 1종’의 폐불이 대표적이지만 그 밖에도 작은 규모의 폐불 혹은 불교 억제 정책은 종종 시행되었다. 다만 대부분의 폐불 정책은 수도와 도시 지역의 대규모 사찰을 대상으로 하였고, 지방과 산속의 작은 사찰과 암자들은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러한 폐불 정책들은 대부분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북위의 폐불은 6년, 북주의 폐불은 4년, 당의 폐불은 2년, 후주의 폐불은 4년여 만에 중단되었다. 폐불을 단행한 황제가 죽고 새로운 황제가 즉위하면 폐불 정책은 철회되고 다시 국가불교 체제가 복원되었다. 몇 년 동안의 폐불을 통하여 국가 재정이 충실해진 상태에서 군주의 자리에 오른 새로운 군주는 다시 불교를 인정하고 후원함으로써 민심을 수습하고 자신들의 통치에 대한 정당성을 보증받고자 하였다. 불교계도 새 황제를 황제여래나 전륜성왕으로 칭송함으로써 불교에 대한 국가의 지원을 다시 이끌어내고자 노력하였다. 

국가불교 체제에서는 황실과 국가의 통제를 받지 않는 완전히 독립적인 교단의 설립과 운영도 위험시되었다. 말법 사상과 여래장 사상에 입각하여 모든 중생을 부처로 받들어 예경할 것을 주장하였던 삼계교(三階敎)는 자신들만의 사찰을 만들고 신자들의 재산을 모아 공동체적 생활을 하였는데, 수나라와 당나라 황실은 이들을 사교로 규정하여 철저히 탄압하고 그들이 공동 재산인 무진장원(無盡藏院)을 몰수하였다. 승려와 재가 신자의 구분 없이 철저한 계행 실천과 공동체적 생활로 강남 지역에 수십 만의 신도를 모았던 백운종(白雲宗) 역시 송나라와 원나라 황실에 의해 사교로 규정되어 강제 해체되었고, 그들의 재산과 토지 역시 국가에 몰수되었다.

6. 한국의 국가불교

중국에서 형성된 국가불교 체제는 한국에도 수용되었다. 한반도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것은 4~5세기경으로 추정되지만 본격적으로 수용되어 사회 전반에 광범한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은 그로부터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였다. 특히 백제와 신라 등 한반도 남부 지역에 불교가 본격적으로 신앙 되기 시작한 것은 6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였고, 이를 주도한 것은 백제였다.

475년 고구려의 공격으로 일시 멸망했다가 충청도 지역에서 다시 일어난 백제는 정치적, 문화적으로 앞선 남중국 왕조로부터 선진 문물을 수용하여 국가 체제를 정비하는 한편, 수용한 선진 문물을 매개로 주변의 신라와 일본 등으로부터 정치, 군사적 후원을 얻어내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특히 무령왕(501~523 재위)이 즉위한 이후에 본격적으로 실행되었다. 그는 당시 남중국에 있던 양과 우호적 관계를 맺고 그 문화와 선진 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당시 주변 국가들에 대해 적극적 외교 정책을 펴고 있던 양나라 역시 백제의 정책에 동조하여 문화, 기술의 제공에 적극적이었다. 이러한 관계는 무령왕의 후계자인 성왕(523~554 재위)의 시기까지 지속되었고, 이 무령왕과 성왕의 시기에 백제는 국가의 규모를 일신하고 중흥에 성공하였다. 그런데 이 시기에 받아들인 양의 문화와 기술은 불교를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당시 양의 황제는 대표적인 호불 군주인 무제로서 내치는 물론 외교도 불교에 중점을 두어 추진하고 있었다.

주변 국가들은 양과 교류하기 위해 불교적 측면을 강조하였고, 이 점은 백제도 예외가 아니었다. 적극적으로 양의 불교문화를 수용하고 이를 통해 양과의 유대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한편으로 양의 불교문화는 실제 백제의 국가 재건에 큰 도움을 주는 것이었다. 대규모 사찰 건설에 필요한 건축, 조각, 회화 등의 기술은 백제의 문화 수준을 단기간에 크게 향상시켰고, 전륜성왕 이념에 기초한 통치 방식도 왕권 강화와 통치구조 안정에 모범이 되었다. 이처럼 백제는 6세기 전반 양과 교류하면서 불교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고, 이 과정에서 양 무제의 국가불교 체제도 백제에 수용되었다. 

한편 백제는 자신들이 양으로부터 수용한 문화와 문물을 다시 이웃 신라와 일본에 적극적으로 제공하였다. 당시 백제는 고구려와의 대결 및 국가체제 정비를 위해 신라와 일본으로부터 적지 않은 도움을 받고 있었는데, 양으로부터 수용한 선진 문화와 문물의 제공은 그에 대한 보상이자 계속적인 지원을 이끌어내기 위한 선물이었다. 백제가 신라와 일본에 제공한 문화와 문물 역시 불교를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백제는 특히 자신들이 익힌 대형 사찰과 불상의 건립, 그리고 불교 이념에 기초한 통치 방식 등을 적극적으로 전달하였다. 백제의 적극적인 외교적 노력 속에 신라와 일본도 순차적으로 불교문화를 수용하고 국가불교 체제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강력한 군주권이 확립되어 있었던 중국의 경우 불교계가 최고 권력자의 호의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국가불교 체제가 성립되었던 것과 달리 한국과 일본에서는 최고 권력자들이 불교의 수용에 적극적이었고 불교문화 및 국가불교 체제 수용 과정을 통하여 군주권이 확립되어 갔다. 6세기 중엽 이후 백제와 신라에서는 양 무제를 모방한 전륜성왕 이념에 의한 통치가 추진되었고 이 과정에서 중앙집권과 왕권 안정이 이루어졌다. 호족들의 세력이 강하고 왕권이 미약했던 일본에서도 6세기 말에 이르러서 왕실이 불교 수용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국가불교 체제를 도입하여 왕권을 강화해 갔다.   

7세기 중엽 한반도의 통일 왕조로 등장한 통일신라는 앞 시기의 국가불교 체제를 더욱 발전시켜 갔다. 왕실은 불교를 숭상하고 고승들을 정치의 고문으로 받들며 여러 대형 사찰을 건립하고 승려들을 우대하였다. 동시에 불교를 관장하는 국가 기구를 설립하여 승려와 사찰을 통제하였다. 승려의 출가와 인사, 새로운 사찰의 건립 등은 모두 국가의 관리하에 이루어졌다. 비록 당나라의 영향하에 유교를 정치의 기본 이념으로 삼고 불교의 직접적인 정치 관여를 제한하기는 하였지만 유교의 세력과 영향력은 불교에 미치지 못하였다. 중앙집권적 통치 질서와 왕실의 권위가 불교를 토대로 하여 만들어진 것이었으므로 불교의 위상은 절대적이었다. 더욱이 중국과 같이 불교와 경쟁하며 비판하는 도교와 같은 다른 사상체계도 없었으므로 불교의 위상은 어떠한 도전도 받지 않았다. 유교를 중시하는 학자나 관료들조차도 불교 사상과 국가불교 체제에 대해 어떠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물론 중국에서와 같은 폐불 정책이 시도되는 일도 없었다.

9세기 후반 신라가 쇠퇴하고 중앙정부가 몰락하면서 국가불교 체제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하지만 후삼국의 분열을 통합한 고려 왕조는 국가불교 체제를 다시 정비하였다. 고려의 전신인 후고(구)려를 건국한 궁예는 스스로를 미륵불로 자처하며 경전을 찬술하고, 기존 불교계를 억압하며 자신을 중심으로 불교와 정치를 일원화하려고 시도하였다. 하지만 이는 기존 불교계를 포함한 여러 세력의 반발로 실패하였고, 이 과정에서 일부 승려들이 희생되기도 하였다. 궁예를 축출하고 왕위에 오른 왕건은 기존 불교계를 존중하되 국가가 이를 관리할 수 있는 체제를 추구하였다.

그는 명망 있는 승려들을 궁중으로 초빙하여 예우하는 동시에 후삼국의 혼란기에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던 불교 세력들을 중앙 정부의 통제하에 두고자 하였다. 이후 고려 왕실은 주요 종파의 대표적 승려를 국사와 왕사로 책봉하여 예우하는 한편 승과(僧科)와 승계(僧階) 제도를 만들고 이를 사찰 주지 등의 승직(僧職)과 연결시키는 관료적 승려 인사 체제를 만들어 승려들에 대한 인사권을 장악하였다. 동시에 역대 국왕들은 불교의 발전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기존 사찰과 승려들에 많은 지원을 하는 동시에 자신 혹은 부모의 원찰로 거대한 사찰을 새롭게 만들었고, 연등회와 팔관회 같은 국가적 불교 의례를 장려하였다. 왕실의 지원 속에 불교는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었다.

7. 조선시대 억불정책과 국가불교의 종언

6세기부터 고려 말까지 지속되었던 국가불교 체제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사라지게 되었다. 성리학을 건국이념으로 삼은 조선은 불교를 억압하는 억불정책을 실시하였다. 정부가 인정하였던 수많은 사찰 중 극소수만을 남기고 모두 철폐하였으며, 이곳에서 수행할 소수의 승려를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의 승려들은 강제적으로 환속되었다. 철폐된 사찰의 재산은 국가에 몰수되었고, 폐지된 사찰 터는 향교나 서원으로 전용되었다.

더 이상 불교의 고승은 예경의 대상으로 인정받지 못하였고, 남겨진 사찰에 대한 지원도 최소한으로 축소되었다. 물론 국가 운영에서 불교는 중요한 고려 대상이 되지 못하였다. 불교는 과거와 같이 통치에 도움이 되는 가르침이 아니라 성인의 통치를 방해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세조와 명종 때에 일시적으로 고승을 궁중에 초빙하고 불교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였지만 짧은 기간의 일시적 현상으로 그쳤다.

하지만 조선의 불교 정책은 불교를 완전히 없애는 ‘폐불’이 아니라 불교의 세력을 축소하고 영향력을 최소화하는 ‘억불’을 지향한 것이었다. 건국 초기에는 ‘폐불’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최종적으로는 개인적 차원의 신앙은 인정하되 국가의 불교에 대한 공적인 부담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결정되었다. 승려가 되는 것을 완전히 금지하는 대신 승려가 되려는 사람들로부터 육체적 노역이나 금품을 징수하였고, 사찰과 승려들에게는 지원 대신 여러 가지 부담이 부과되었다. 하지만 민간이 주도하는 사찰의 건립과 운영, 승려와 신자들의 신앙 행위는 원칙적으로 금지의 대상이 아니었다. 

조선시대의 불교는 과거와 같이 국가에 의해 지원과 통제를 받는 국가불교가 아니라 민간의 자율적인 신앙이 되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국가의 지원에 의지해 온 불교계로서는 이러한 변화를 감당하기 쉽지 않았다. 공적인 존중과 경제적 지원이 사라지면서 승려들의 위상은 급격히 하락하였고, 신자들의 시주만으로는 사찰 운영이 쉽지 않았다. 더욱이 관료와 지방의 유력자들은 이단으로 몰린 사찰을 침탈의 대상으로 삼곤 하였다. 이런 가운데 많은 사찰들은 왕실과 명문 가문의 원찰을 자처하며 그들의 지원을 얻어내고자 하였다. 유력한 후원자를 확보한 사찰들은 억불정책 속에서도 계속 유지될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사찰들은 지속되기 어려웠다. 국가불교가 사라진 후에도 승려들은 자신들의 사찰을 지원하고 보호해 줄 정치적 유력자들을 더욱 열심히 찾아야 했다. ■

 

최연식 / 동국대 사학과 교수. 목포대 사학과 교수 및 한국학중앙연구원 사학과 교수 역임. 한국불교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고중세 불교사상사 전공. 《교감 대승사론현의기》 《역주 일승법계도원통기》 등의 연구서와 《새롭게 다시 쓰는 중국 선의 역사》 《불교의 중국정복》 등의 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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