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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 실현을 위한 불교적 접근과 과제
박광준 교토불교대학 사회복지학과 교수
[30호] 2007년 03월 10일 (토) 박광준 교토불교대학 사회복지학과 교수

1. 들어가며

일본에서 불교사회복지사업이 시작된 지 이미 1세기를 넘었다. 사회복지학계나 실천현장에서 불교사회복지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고, 불교사회복지학회도 결성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사회복지라는 것이 일반적인 사회복지와는 구분되는 독특한 연구 영역과 실천방법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여전히 제기되고 있고, 학문적 차원에서 그에 대한 명쾌한 해명이 이루어져 있지 않다.

불교사회복지가 정체성을 가진 하나의 독립된 연구 및 활동 영역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인간관이나 사회문제관, 그리고 사회문제 해결의 접근방법에 있어서 ‘독자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불교인이나 사찰이 행하는 복지사업이 곧 불교사회복지라고 보는 것은 안이한 해석이며, 현대 사회복지에 대한 이해의 결핍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른 한편, 사회복지학계에서 불교사회복지에 대한 해석을 섣불리 행하는 것도 불교사회복지의 본질을 오도할 위험성이 있다. 불교사회복지는 불교사상과 사회복지 사상이 중첩되는 영역이고, 이 문제의 해명에는 양자에 대한 깊은 이해가 전제되기 때문에 학제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이 글은 불교의 아동복지관을 고찰해 보고자 하는 의도에서 작성되었다. 불교는 아동을 어떤 존재로 보고 있는가, 아동의 복지 실현은 어떤 방법으로 이룰 수 있는가, 누가 그 주체가 되어야 하는가 하는 근본적 질문에 대한 해명을 시도한다. 그 논의의 실마리는 일본의 불교아동복지의 발전과정에서 구하고자 한다. 다만 필자는 사회복지학자로서, 불교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부족하다. 그러므로 이 글에 불교의 가르침에 대한 비약적 해석이나 잘못된 해석이 있다면, 불교계의 기탄없는 지적과 조언을 바란다.

2. 불교사회복지의 의미

(1) 불교사회복지의 의미에 관한 논의


불교사회복지라는 용어는 한국과 일본에서 흔히 사용되고 있는 용어이지만 그 의미가 명확한 것은 아니며,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의미가 다르기도 한다. 불교와 사회복지라는 두 개의 학문 영역은 각기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한 부분이다. 각각의 영역에서는 정체성이 확립되어 있지만, 두 개의 영역이 중첩되는 불교사회복지의 내용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불교의 입장에서, 아니면 사회복지의 입장에서 볼 것인가에 따라 상당히 달라질 수 있다.

또한 불교사회복지라는 용어 이외에 불교복지라는 용어도 사용되고 있고, 양자를 구분하거나 혹은 구분 없이 사용하는 이도 있다. 권경임은 불교사회복지를 “불교와 사회복지의 관계를 연구하는 실천, 응용학문으로 불교에 의한 사회복지 활동을 총체적으로 의미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으며, 불교복지와 불교사회복지의 차이에 대해서는 “불교복지는 불교조직의 틀 속에서 이루어지는 각종의 복지 활동이며, 복지 활동의 주체와 대상이 불교의 제도의 틀 속에서 한정되는 반면에, 불교사회복지는 대사회적으로 각종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활동으로 볼 수 있으며, 주체는 불교이지만 대상은 불교의 제도나 틀이라는 범주를 벗어나 사회 전체를 포괄하는 것”1)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런데 필자는 불교사회복지가 그 실체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사회복지에 대한 불교의 독자적인 견해와 접근방법의 제시가 불가결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독자적인 가치와 독자적인 인식방법에 기초한 복지 실천이 없다면, 아무리 불교사회복지를 제대로 정의한다고 한들 실체가 없는 공허한 논의가 될 뿐이다.

그러나 19세기 말부터 불교사회사업이 시작되었다고 하는 일본에서도 불교사회복지란 무엇이며, 그것은 실체가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아직 해소되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불교계가 행하는 사회복지사업의 규모가 작아서도 아니고, 불교계가 사회과학적인 사회복지 실천에 관심을 덜 가지고 있어서도 아니다. 일본의 초기 불교사회사업은 사회사업의 한 분야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일본 전체의 사회사업 활동을 주도하는 성격도 강하게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예를 들어, 일본불교 사회사업의 개척자였던 와타나베 가이쿄쿠(渡?海旭, 1872~1933)는 1916년 <현대 감화구제사업의 5대방침>이라는 자신의 유명한 논문에서, ‘① 감정 중심주의에서 이성 중심주의로, ② 일시적 단편적 사업에서 과학적 계통적 사업으로, ③ 구휼(救恤)에서 공제(共濟)로, ④ 노예주의, 걸식주의에서 피구제자의 인격을 인정하는 인권 존중주의로, ⑤ 응급적 자선사업에서 예방적 자선사업으로’라는 5가지의 방향전환을 제시하였는데,2) 이것은 비단 불교사회복지계에 대해서가 아니라 일본의 전체 사회복지계에 사회복지의 방향성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에도 불교적 사회복지사업의 실체성과 정체성에 대한 의문이 해명되지 않고 있고, 오히려 그러한 근본적인 논의가 봉인되어 있는 상태이다. 그 이유는 불교계로부터의 접근에는 사회과학적 방법론이나 사회복지적 접근에 대한 이해를 결하기 쉽고, 반대로 사회복지로부터의 접근은 불교에 대한 깊은 이해를 결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학문으로서의 사회복지가 서구 사회에서 발전하였고, 그로 인하여 사회복지 실천에는 서구적 인간관이나 세계관이 내재하고 있는데, 그것을 불교적 관점에서 조명하고 비교하여, 불교사상의 독자성과 보편성을 명확하게 제시하지 못했던 것이다.

(2) 불교사회복지의 개념에 대한 두 가지 입장

일본에서 불교사회복지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가 가시화된 것은 1960년대 이후의 일인데, 그 계기가 된 것은 1965년 일본불교사회복지학회의 창립이었다. 이를 전후하여 많은 학자들이 불교사회복지란 무엇인가에 관하여 의견을 개진하였는데, 그 가장 중요한 논점은 역시 불교사회복지를 어느 학문의 범주에서 논의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단적으로 말하면 불교의 학문적 영역, 아니면 사회복지의 학문적 영역에 속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두 개의 학문 영역으로 이루어진 이 용어를 아무런 모순 없이 논의할 수 있는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불교계 중심의 견해와 사회복지계 중심의 견해로 대별된다.

불교계에서는 불교인이나 불교 조직, 사찰 혹은 사찰 조직이 노인이나 아동에 대한 보호 활동을 행하여 온 경위가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활동이 곧 불교사회복지라고 하는 상식적인 견해가 있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이러한 활동이 과학화, 조직화되어 현대적인 복지 활동으로도 평가받을 수 있는 사업으로 발전하게 된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불교계의 입장을 이론적으로 규명하려는 노력이 있었다.3)

불교사회복지는 인문과학으로서 불교의 범주에 속한다는 입장의 대표적인 논자는 미즈타니 고쇼(水谷幸正)였다. 그는 “불교사회복지학이란 사회과학의 한 부분으로서가 아니라 불교의 필연적인 전개로서의 사회복지를 해명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는 ‘실천불교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불교사회복지의 의의를 구하고자 하였다. 그 주장은 다음과 같다. “불교가 가진 훌륭한 사상이 역사적 산물로서의 사회를 만들어 내는 사회적 실천이론이 곧 실천불교학이다. 이 실천불교학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복지가 바로 불교사회복지이다. 물론 그 속에서의 구체적인 방법론에 관해서 사회과학적 인식이 필요하다는 것은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다.”4)

불교사회복지에 있어서는 물론 사회과학적인 인식이 요구되는 영역이지만, 불교가 본래 내부적으로 가지고 있는 모습을 사회에 나타낸 것이 불교사회복지에 다름 아니라고 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불교의 복지 실천 활동이 곧 불교사회복지라는 견해에 대해서는 사회복지학계로부터 비판이 이루어졌다. 불교사회복지는 어디까지나 사회복지의 한 영역이며, 당연히 구조적인 사회문제를 만들어 내고 있는 사회 그 자체에 대한 이해, 그리고 그 사회문제에 대한 대책으로서의 사회복지제도에 대한 이해 속에서 인식되어야 한다는 것이 사회복지 쪽에서 불교사회복지에 접근하는 사람들의 입장이었다.

예를 들어 우에다 교수5)는, 어디까지나 사회과학의 한 영역으로서 불교사회복지가 존재한다는 입장에서, 실천불교가 곧 불교사회복지라는 입장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고, 불교와 사회과학의 두 가지 입장에서 이 문제의 해명을 시도하였다. 그는 “현대사회에 있어서 사회문제대책의 하나인 불교사회사업의 성격이나 기능을 바르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사회사업과는 다른 대책체계로서의 사회정책과 사회보장정책과도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관련지으면서, 사회적 경제적 영역까지 최대한 관심영역을 확대시킬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곧 사회문제 대책의 하나가 불교사회복지라는 입장으로 불교사회복지의 사회적 기능을 사회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다만 ‘불교복지’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불교와 사회복지라는 양자의 영역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물론 불교의 실천 영역이 곧 불교사회복지라는 견해에 대해서는 보다 직접적인 비판도 있었다. 그러한 견해가 사회복지 그 자체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 기인하며, 그것은 일본 불교계가 사회적 현상의 사회과학적 탐구 혹은 구조적 이해의 결핍을 반영한 것이라는 견해가 제시되기도 하였다.

현재의 시점에서는 불교사회복지를 논의할 때, 불교의 원리를 사회복지의 상위개념에 두고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 일반적인 견해로 보인다. 이것은 사회복지사업에 대한 불교의 참여가 소극적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사회복지에 관여하는 불교계의 입장이, 사회복지 활동에는 사회문제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이 불가결하다는 입장을 일반적으로 수용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3. 일본 불교아동복지의 발전

(1) 초기의 육아사업과 아동보호사업


명치 시기(1868~1912)의 아동보호는 육아사업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고, 낙태 방지와 아동유기 방지에 중점을 둔 사업이 행해졌다. 명치 초기에 일본 정부는 유산과 아동유기 방지에 관한 교육을 불교계에 의뢰하였는데, 많은 승려들이 아동유기 방지 등의 계몽적 활동에 참여하여 큰 기여를 하였다.

명치 중기가 되면 육아사업이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육아사업에 있어서는 특히 불교계가 주도적으로 활동하였다. 지진 등의 재해나 흉작에 의한 빈곤아동문제, 여자재소자의 아동동거문제 등에 대한 대응도 이루어지는데, 이 시기의 대표적인 활동이라면 역시 근대불교사회사업의 선구라고 일컬어지는 복전회육아원(福田會育兒院)의 설립(1879년, 東京)이었다. 그 이념은 종교적 휴머니즘의 구체화, 생명의 보호 및 생존의 보전, 전인적 구제와 물심일여(物心一如)의 원칙이었다.

복전회육아원의 명명 이유를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는데, 이 사업의 근저에 깊은 불교사상이 자리 잡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복전이란 불경에 나오는 삼복전(三福田), 팔복전(八福田)의 뜻에서 따온 것이다. 삼복전이란, 부모, 국왕, 은사 등에는 보육, 보호, 경모의 큰 은혜가 있고, 그것을 공경하고 그 은혜에 보답하는 것을 보은복전이라고 한다. 불법승의 삼보에 귀의하고 그를 공경하여 무량의 공덕을 성취하는 것을 공경복전이라 한다. 빈곤하고 병약하여 의지할 곳 없는 사람을 가엾게 여겨, 필요한 보시를 행하여서 그를 구휼하는 것을 비민복전(悲愍福田)이라고 한다. 이상의 것을 은(恩)·경(敬)·비(悲)의 삼복전이라고 한다. 은·경·비의 삼복전을 세분한 것이 팔복전이다: ① 우물을 파서 목마름을 구제하는 것, ② 다리를 만들어서 사람들의 왕래를 구제하는 것, ③ 험한 길을 평탄한 길로 하여 통행을 하게 하는 것, ④ 부모를 효도로 봉양하여 은혜를 갚는 것, ⑤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여 깨달음을 얻는 것, ⑥ 병질환자에게 약을 제공하여 안위를 얻게 하는 것, ⑦ 빈곤하고 의지할 곳 없는 사람에게 구제를 행하는 것, ⑧ 일체의 혼을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선도에 인도하는 것. 이러한 행위는 복을 부르는 씨앗을 가꾸는 밭과 같은데, 본회의 육아구휼사업은 비전(悲田)의 복(福)에 속한다.”6)

명치 후기가 되면 러일전쟁이 격화되면서 출정(出征) 가족이나 유가족의 원호가 중요한 과제가 되었는데, 그것은 당연히 아동육아사업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출정에 의한 유아 및 고아의 수용사업이 시작되어 그로 인하여 불교의 유아보육 참여는 강화되었다. 예를 들면 1900년 도요하시(豊橋)육아원이 설립되어 출정군인 자녀의 육아교육을 행하였고, 1903년 후쿠치야마(福知山)불교육아원, 1904년 나고야의 출정군인 유아보육소가 설립되었으며, 1905년에는 진종본원사파(眞宗本願寺派) 자선회재단이 군인유고아양육원을, 1910년에 정토종이 군인유고양육원을 설립하였다.

불교보육사업시설의 개설은 다양한 경위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분류하면 다음의 세 가지 유형이 된다. 첫째는, 자연재해에 대한 가족원조의 형태로서의 보육사업이다. 둘째는, 농번기에 농가에 대한 가족원조, 도시지역에서는 인보(隣保)사업의 일환으로서 지역 문제에 대응하는 방식으로서의 보육사업이다. 그리고 셋째, 기념사업으로서의 보육사업이다.

일본에서 아동보호사업에 대한 이론화가 이루어진 것은 대정 시기(1912~1926년의 15년간, 明治期와 昭和期의 중간)로 알려져 있다. 이 시기의 아동복지사업은 종래의 고아나 기아, 빈곤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구빈적 사업에 그치지 않고 임산부사업, 보육사업, 공교육을 받지 못하는 아동의 문제, 비행아동, 부랑아동, 장애아동보호와 아동학대방지 등에 걸쳐서 폭넓은 아동복지사업이 전개된다. 주목할 것은 이 시기에 아동보호사업에 대한 이론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보육사업의 이론화는 선진국의 보육사업의 소개에 그치지 않고 보육사업의 사회적 역할의 모색과 검토도 이루어졌다. 이 시기는 일본 자본주의의 급속한 발전기였고 도시빈민이 확대되는 등 사회문제가 심화되었는데, 이러한 문제에 대한 사회정책적인 대응이 바로 보육소의 창설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론적인 바탕 위에서 보육사업의 양적인 확대가 이루어졌다. 이 시기 15년간 창설된 보육시설의 수는 총399개에 달하고 있다. 이 보육사업에 불교의 역할은 매우 컸다. 보육시설의 수를 보더라도, 불교보육시설이 132개소로 1/3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이러한 보육사업에 있어서는 정토종의 활약이 두드러진다.7)

(2) 전후 불교아동복지의 발전

일본 패전 직후 아동의 보호는 전쟁 복구에 있어서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의 하나였다. 전쟁 중에도 전쟁고아 등이 도시에 집중되어 있었으나, 이 문제는 전후에 일거에 표면화되었다. 당시의 아동문제는 ‘피난아동문제, 영유아의 보건위생상황 악화, 비행소년의 증가, 전쟁고아 및 귀국고아의 길거리 부랑문제, 정신이상아동의 문제’ 등이었다. 이 중 가장 긴급한 과제는 고아의 길거리 부랑문제였다.

전쟁고아의 상당수는 공습의 결과로 발생하였다. 친척이 있는 경우 친척이 맡게 되거나 혹은 양자의 형태로 보호되는 경우도 있었고, 공적인 시설에서 보호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거처 없이 배회하는 아동도 많았다. 전쟁으로 인한 고아의 수는 1946년 5,667명으로 보고되어 있는데, 도쿄가 가장 많았다.

1945년 9월, ‘전쟁고아 등 보호대책 요강’이 발표되어 아동에 대한 육아원이나 보호시설 수용이 시작되었고, 이것은 지방 도시로 확대되었다. 불교계에서도 빈곤아동의 구제에 적극 참여하였다. 예를 들어 서본원사는 전쟁고아 보호육성을 위하여 ‘전쟁고아구제소운동’을 같은 계파의 사찰에 제창하여 1946년에는 그 최초의 시설인 세심료(洗心寮)가 개원되었다.8)

하지만 전후 불교아동복지를 대표하는 사업은 역시 보육 분야이다. 교토 지역에서는 불교보육에 관계하는 각 종파로 구성된 불교보육연맹이 결성되었고, 1948년에는 보육사업협회의 연구기관인 교토보육연구소가 개원되었다. 교토에서는 1948년 1년 동안 아동복지법에 근거한 보육시설의 인가 수가 56개소나 되고 있다. 그 배경에는 교토시가 보육소의 설립에 특별교부금을 지원하는 제도가 있었다.

이 시기 보육소 설치의 중심이 된 것이 불교 관계자를 중심으로 한 종교 관계자였다. 1945년~1955년 사이에 신설된 보육소의 58.5%(58개소)가 종교 관계자에 의한 것이었는데, 불교 관계자의 시설이 48개소로서 종교 관계자 시설의 82.8%를 차지하고 있다.9) 이것은 교토의 특징적인 현상이지만, 전후 보육사업의 확대에 불교계가 행한 기여를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경향에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이 1967년의 아동복지법 개정이다. 이 개정은 아동복지시설의 설치를 촉진하기 위하여 종전과 같이 시설 설치에 대한 국가의 보조금 지급을 명시하고 있었는데, 문제는 보조금 지급대상을 ‘사회복지법인이 설립한 시설’에만 한정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종교법인 등에 의한 아동복지시설의 설립에는 보조금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로 인하여 불교 관계자의 시설 신설은 크게 감소하였으나 이전의 시설이 계속 유지됨으로 인하여 민간보육시설에서 차지하는 불교보육시설의 비율은 상당히 높다.

이 시기 불교계의 아동복지 활동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불교보육 실천의 이론적 뒷받침을 제공하기 위한 연구의 추진, 보육 종사자의 연수교육, 보육교재의 개발 등에 있어서 불교보육협회가 보여주는 조직력과 추진력이다. 이 단체의 간단한 연혁은 다음의 표1과 같다.


불교의 각 종파는 독자적인 복지사업 조직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정토종의 불교보육연맹이 1951년 8월 결성되었고(1964년 정토종보육협회로 개칭), 이듬해에는 조동종 보육사업연합회와 천태종 보육연맹이 결성되었다. 이러한 협회나 연합회는 강습회와 연수회를 통하여 보육의 질을 확보하는 한편, 불교보육의 커리큘럼 개발과 교재 개발 등에 기여하였다.

그 후 지금까지 보육사업, 보모양성사업, 아동양호, 장애아동보호, 아동의 교통사고방지를 위한 활동, 개발도상국의 아동 지원, 지역사회에서의 아동의 건전육성 등의 사업을 행하여 오고 있다.

4. 일본 불교아동복지 발전의 시사점

일본 불교아동복지의 발전과정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고 불교계는 사회복지 활동에 사회과학적인 시각에 근거하여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왔다. 예를 들어 불교의 아동보육사업은 일찍이 1910년대에 농번기 농가아동의 보육을 통하여 가족을 원조하는 형태로 출발하였다. 전후 많이 설립된 보육시설은 사회복지법인화되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오랫동안 불교보육사업은 빈곤대책과 관련지어져 추진되어 왔으나, 1970년대 이후에는 여성의 사회진출을 지원하는 역할도 수행하였다.

그것은 연장보육, 유아보육, 장애아보육, 육아지원, 유병아동 보육 등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각 종파는 연수회나 보육대회를 개최하여, 시대적 과제의 토론이나 학습의 장을 제공하여 왔다. 불교계의 보육사업은 보육소를 운영하는 사원과 종교조직이라는 두 개의 바퀴에 의해 유지되어 왔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일본 불교사회복지의 발전과정은 앞으로 한국 사회가 불교아동복지, 불교사회복지를 모색하고 확립해 나가는 데에 많은 시사와 과제를 주고 있다. 여기에서는 불교계의 과제를 중심으로 검토하기로 한다.

일본에서 사회복지사업의 발전에 대한 불교계의 공헌이라면 무엇보다도 사회사업의 인력양성과 사회사업의 조직화라는 분야로 보인다. 불교사회복지사업의 초기단계에서 압도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행했던 종파가 정토종인데, 19세기 말에 이미 국내 및 해외의 유학생 제도를 두어 인력을 양성하고 있었다. 앞장에서 언급한 정토종 승려 와타나베 가이쿄쿠는 인도학의 세계적 거장이면서 불교사회복지의 선구자였는데, 그는 1900년 정토종 제1회 해외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독일에서 10년간 유학한 경험이 있고, 귀국 후에 과학적 불교사회복지 실천을 주도하였다. 종파 내에서 이루어지는 많은 자선사업을 통괄하는 정토종 자선회가 결성된 것도 1900년의 일이다. 또한 1912년에는 불교도사회사업연구회가 결성되어 월례연구회 등의 활동이 이어졌다. 이 연구회의 주최로 제1회 전국불교도사회사업대회가 개최된 것은 1914년의 일이고 330명의 불교사회사업가들이 3일간의 일정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것은 불교사회사업의 조직화에 중요한 공헌을 하였고, 불교를 초월하여 일본 사회사업의 조직화를 선도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전후에도 불교사회사업의 과학화와 조직화는 불교사회복지에 관련된 각종 협회에 의하여 추진되었는데, 그 중요한 목적이 불교사회사업의 인력양성에 있었다는 점은 교훈적이다. 1950년대에는 거의 모든 불교 종파가 연수회나 인력양성 강좌를 가지고 있었다. 이 협회는 협회지 발간, 불교사회복지실천사례집 발간, 아동보육 커리큘럼 및 교재개발, 불교사회복지사업 실태조사 등을 통하여 불교사회복지의 질을 제고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였다.

또한 불교의 가르침을 사회복지 실천으로 연계하기 위한 이론적 윤리적 노력도 행하였다. 예를 들어 일본불교보육협회는 1960년 제6회 전국불교보육대회에서 1200명이 참가한 가운데 ‘불교보육강령’을 채택하였다.(표2 참조) 현재에도 이 협회는 불교보육의 조사연구와 불교 보육자의 자질향상을 위하여 연수와 커리큘럼 개발 등에 힘쓰고 있는데, ‘생명을 존중하는 보육의 확립과 마음 교육의 추진’이라는 목표 하에 (1) 생명 존중의 보육 추진, (2) 활력 있는 협회를 목표로 하여 회원을 위한 운영기반의 확립을 도모하기, (3) 매력 있는 협회를 확립하여 회원의 기대에 부응하기, (4) 국제교류와 사회공헌을 행하는 협회를 지향하기와 같은 세부 목표를 세우고 있다.

정토종보육협회의 <정토종 보육지침>에 의하면, 불교보육이 무엇인가가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불교보육, 혹은 정토종 보육이라는 것은 불교의 가르침, 정토종의 가르침을 유아에게 전하여 불교도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 정부에서 정한 보육 내용으로 유아보육을 실천해 가는데, 그 보육 효과에 있어 불교적인 신념, 혹은 불교적인 교재 혹은 불교적인 시설의 분위기에 의한 보육이 가장 보육 효과를 높이기 쉽다는 생각에 기초하여 보육을 행하는 것이다.

불교적 입장이라는 것은 물리적인 조건이나 물리적인 환경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의 마음이라는 것이 하나의 보육 기술을 통하여 흘러 들어간다고 하는 의미이다.”

실천 현장에서 불교보육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는 정토종보육협회의 <정토종 보육지침>을 통해서 본 것이 표3이다. 이 지침에는 보육 내용을 건강, 사회, 자연, 언어, 음악, 그림이라는 6개의 영역으로 나누어 그 각각의 분야에서 목표와 보육 내용을 규정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건강’ 영역만을 소개했다.

협력적 사업의 추진에 있어서 ‘네트워킹’만큼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 불교사회복지사업의 효과적인 추진 역시 다양한 불교사회사업의 네트워킹이 중요하다. 세계화는 빈부 격차 심화를 위시한 다양한 영역에서 부작용을 가져 왔으나, 그것의 가장 큰 기여는 지구적 규모의 네트워킹의 촉진에 있다고 평가되고 있다.

흔히 접근방법의 세계화(globalization of approach), 아젠다의 세계화(globalization of agenda)라고 표현되는 이 네트워킹은 일본 불교아동복지 발전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는 두드러진 경향이다. 일본의 불교사회복지발전이 한국사회에 주는 가장 큰 교훈은, 한국 불교사회복지계의 네트워킹과 그것을 통한 인력양성 및 사회교육에 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교훈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불교사회복지는 여전히 그 정체성을 완전히 확립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불교사회복지 실천의 독자적인 인간관과 독자적인 접근이 완전히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불교사회복지의 이론화를 이루지 못한 것이다. 불교사회복지의 이론화는 사회복지에 대한 불교적 해석이, 서구사회에서 발전한 사회복지사상과 비교분석될 때 비로소 그 독자성과 보편성이 확인될 수 있는 것이다. 이하에서는 일본 불교사회복지의 이러한 한계를 인식하고, 한국이나 일본에서 불교사회복지가 정체성을 인정받기 위해서 어떤 학문적인 노력이 필요하고, 어떤 학문적 질문들이 해명되어야 하는가를 아동복지 분야를 중심으로 검토하기로 한다.

5. 아동복지 실현의 불교적 접근

(1) 불교사회복지 성립의 전제


불교사회복지가 사회복지의 한 분야로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우선 두 가지의 문제를 해명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하나는 어떤 사회복지 현상이 왜 일어나는가에 대한 불교의 독자적인 해석이 전제되어야 하고, 더욱이 그 해석은 종교적이고 입증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사회과학적이고 입증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실천방법에 있어서 불교의 독자적이며 일관성 있는 접근이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한국에서 불교사회복지가 확립되기 위해서는 많은 과제가 남겨져 있다고 본다. 한국의 불교사회복지는 이제 출발점에 서 있다고 해야 할지 모른다. 그 중요한 이유는 불교의 가르침과 사상을 사회과학으로서의 사회복지의 관점에서 분석, 발견, 해석하는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불교계에서는 사회과학적인 관점이 모자라고, 사회복지학계에서는 불교사회복지학을 체계적으로 확립하는 데에 필요한 불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것에 그 원인이 있지 않나 생각한다.

불교의 본질은 자비에 있고 그것은 곧 현대사회복지의 원리라고 하면서, 예를 들어 전통적으로 사찰에서 고아 등을 보호해 왔다는 사실을 들어, 불교는 옛날부터 사회복지를 수행해 왔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다. 이는 사회복지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해석이다. 그러한 활동은 어떠한 종교에서도 그리고 어떠한 시대에서도 볼 수 있는 종교적 자선이며, 현대사회에서 말하는 사회복지는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불교인이나 사찰이 사회복지사업을 행하면 그것이 곧 불교사회복지라고 하는 이도 있다. 예를 들어 한 불교복지재단이 공적인 사회복지시설을 위탁 운영하면 그것을 불교사회복지로 보는 것이다. 이것은 오류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이러한 안이한 해석이 이루어지는 분위기 속에서 불교사회복지의 독자성이 성립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불교사회복지의 영역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불교의 가르침과 사상을 사회과학적인 관점에서 해석하고 발견하고자 하는 노력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불교의 사회복지적 성격은 일차적으로 부처님의 행적과 설법 속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에는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이 역사적, 지역적, 특수성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현대사회와는 현저히 다른 고대사회였고, 지역적으로도 인도 지역의 특수한 현상을 배경으로 한 가르침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일반화하기 위해서는, 다른 지역에서나 다른 종교에서 바라보는 해석과 관련지어 볼 필요가 있고, 그것이 가능할 때 비로소 불교가 갖는 사회복지적 성격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동시에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 불교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사회복지학자이다. 그러한 한계를 인식하면서, 여기에서는 아동복지라는 영역에 한정하여, 불교의 원리를 사회복지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발견해 보고자 한다. 즉 아동은 누구인가, 아동 문제는 왜 일어나며 불교는 이 문제를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것으로 보는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에 대해서, 서구에서 발전한 사회복지사상과 관련지으면서 불교적 대답을 모색하고자 한다.

(2) 불교적 아동관

불교는 아동을 두 가지 측면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불교의 평등주의적 원리가 반영된 시선이다. 인간은 남녀와 노소, 신분 등의 구별 없이 누구나 모두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존재이므로, 아동 역시 불법을 성취할 수 있는 존재로 보는 것이다.

다른 한편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상의 어려움으로 말미암아 아동의 출가를 금하거나 승려가 되는 자격으로서 연령 규정을 둔 것을 보면, 아동이 완전히 성숙된 존재가 아니라 현실적인 문제에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지 못한 존재, 혹은 그러한 능력을 갖추어가는 과정 중에 있는 존재로 간주되고 있는 측면도 있다. 수행 과정에서의 현실적인 문제로 20세 미만의 사람에게는 비구 되는 것을 부처님이 금지한 적도 있었고, 12세 이하 아동의 출가를 금지시킨 적도 있었다. 예를 들면 이렇다.

나이가 아직 20이 차지 않은 사람에게는 응당 구족계를 주지 말라. 무슨 이유에서인가. 나이가 아직 20이 차지 않으면 추위와 더위, 허기와 갈증, 바람과 비, 모기와 독충 등을 감당해 내지 못하고, 험악한 말을 참지 못하며, 또 만약 몸에 여러 가지 고통이 있으면 참고 견디지 못하며, 지계(持戒)와 일일일식의 규칙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분율》

다른 한편 부모에 대해서는 아동을 보호해야 할 책임을 다음과 같이 적시하고 있다.

부모가 자식을 돌봄에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당연히 악을 버리고 선에 나아가도록 유의해야 하며, 둘째는 마땅히 학문에 힘쓰도록 가르쳐야 하며, 셋째는 응당 경전과 계율을 지니도록 가르쳐야 하며, 넷째는 적당한 때에 결혼을 시켜 주어야 하며, 다섯째로는 집안의 재산을 응당 주어야 한다.
《육방예경》

이것은 부모의 책임을 논하고 있지만, 바꾸어 말하면 아동의 권리를 논한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통하여 불교의 아동관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아동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아동은 완전히 성숙한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중요한 문제에 주체적으로 대처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이 완성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아동을 보호하는 부모에게는 막중한 책임이 따르고, 아동은 보호받을 권리를 가진다.’

불교의 아동관을 논하기 위해서는 불교의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믿고 따르기보다는, 현재적으로 해석하여 현대적 사회복지와 양립될 수 있는 불교적 아동관을 재발견하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흔히 동양의 아동관은 아동의 권리에 대한 관념이 희박하다고 지적되어 왔다. 그리고 그것은 유교 문화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서양 문화에 비하여 유교 문화가 노인이나 부모를 공경하는 문화라고 말한다. 이러한 견해가 틀린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서양 사회가 노인이나 부모를 존중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미국에서도 결혼이나 사회생활을 포기하고 부모의 수발에 전념하는 경우가 결코 적지 않다고 알려져 있다.

가족에 관한 관념을 비교할 때 중요한 것은 가족성원 중 누구에게 우선순위를 두는가 하는 것이다.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보편적인 가치이다. 동서양의 차이는 가족성원 중에서 아동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가 아니면 노인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가에 있다고 본다. 유교 문화에서는 장유유서 등의 가르침으로 인하여 노인이 우선시되는 반면, 서양에서는 노인에 비하여 아동을 우선시한다는 것이다. 서양의 가족(family)이라는 용어는 실제에 있어서는 아동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고 특히 사회복지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원래 인권사상이 일찍부터 발전하였던 영향도 있어서 인격체로서 아동을 중요하게 보는 경향이 동양에 비하여 강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회복지의 발전과정을 보면, 어떤 사회복지 제도의 생성과 변화에는 반드시 그러한 제도개혁을 뒷받침하는 ‘아동관’이 자리 잡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처음으로 복지문제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명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영국의 구빈법(Poor Law)은 중상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았는데, 중상주의의 아동관은 아동을 노동력의 수단으로 보는 것이었다.

인구 증가는 그만큼 생산을 증가시킬 것이므로, 인구 증가를 거의 광적으로 추진하였다. 많은 아이를 낳는 사람에게 인센티브를 주어 다산(多産)을 장려하는 한편, 독신을 억압하여 독신자의 공직을 금지하고 조혼을 장려하였으며, 배우자가 사망하면 가능한 한 빨리 재혼할 것을 강요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이 시기 사생아의 처우를 크게 개선하면서 성범죄의 처벌도 완화하였는데, 그것은 사생아에 대한 차별과 스티그마가 혼인 외 자녀의 출산을 기피하게 하는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었다.10)

그러나 역사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이러한 아동관은 현재의 한국 사회에서 그대로 보여지고 있다.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아동을 생산 활동의 수단으로 보는 아동관은, 최근 급속한 저출산 고령화 사회를 맞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정부가 보여주고 있는 태도에서 명백하게 나타나고 있다.

2004년의 출산율이 1.16으로 세계 최저의 수준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정부는 저출산 고령 사회대책을 서둘러 내놓고 있다. 사실 한국은 1960년대부터 경제개발정책의 추진을 위하여 강력한 출산억제정책을 수행한 바 있다.

그 당시에는 다산이 경제발전을 저해하는 것으로 인식되었고, 아이들 많이 낳는 것은 낡은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의 무지한 행위라고 간주되어 타파의 대상이 되었다. 중국과 같은 초강경의 인구억제정책은 아니었어도 강력한 억제력을 가지는 인구정책을 시행하였던 것이다. 정부는 마치 계몽군주적인 입장에서 무지한 전통 가족을 근대화된 가족으로 변화시키는 주체인 양 활동하였다.

근대화된 가족이란 것이 출산 아동의 수로만 평가될 수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아들딸의 평등, 가족 간 및 배우자 간의 평등한 관계와 인격체로서의 인정 등이 진정한 근대 가족 형성을 위해서는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은 간과되었다. 그리하여 아동이나 가족에 대한 의식적인 성숙이 수반되지 않은 채로 급격한 인구 저출산을 경험하게 되었는데, 출산율이 급격하게 떨어지게 되자 정부는 그것을 위기적 상황으로 간주하여, 직접적인 출산 장려 정책을 추진하려고 하고 있다.

정부의 기본 인식은 출산율의 감소가 생산 인구의 감소와 노인 부양 부담의 증가를 가져와서 사회발전을 위협하기 때문이라는 논리이며, 국가 사회를 위하여 더 많이 출산하라는 논리이다. 역시 이러한 정책에는 경제성장 이데올로기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고, 아동은 경제성장의 수단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러한 논리는 지난 40여 년간 전혀 변화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을 지적하는 필자의 의도는 정부의 졸속을 비난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배후에 우리들의 잘못된 아동관이 자리 잡고 있고, 그것에 대한 심각한 반성 없이는 어떤 출산 장려 정책도 장기적인 효과를 갖기 힘들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아동관은 저출산의 원인을 과학적으로 규명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게 한다. 최근 삼성경제연구소(2005)는 저출산의 원인을 네 가지로 나누어서 한국의 급격한 저출산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규명하였다. 4가지 원인이란 ① 소득 요인(미래의 경제적 불안의 증가), ② 자녀 요인(교육비의 급증과 교육비 지출 편익의 감소), ③ 가치관 요인(자녀에게 얽매이지 않는 개인적 라이프스타일을 중시하는 것), ④ 사회, 직장 요인(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 노력을 게을리한 것, 여성 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지원의 후진성)이다.

이러한 요인들 중에서 한국의 출산율 저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사회, 직장 요인’으로서, 남성 임금에 비하여 여성 임금이 매우 낮은 것, 남녀 간 평균 교육 기간의 차이 등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분석에 근거하여 교육 부담을 줄이는 등 ‘자녀 요인의 개선’에 중점을 둔 노력은 그 효과가 한계가 있으므로, 출산을 장려하기 위해서는 ‘사회 직장 요인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제언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아동관과 여성관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학적 제언은 우리 사회의 주류적 아동관의 문제를 과학적 관점에서 지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동을 사회발전의 수단으로 보는 아동관은, 아동의 주체성과 그 보호의 필요성을 동시에 인정하고 있는 불교적 아동관과도 배치된다. 필요한 것은 우리 사회의 불교적 아동관을 우리 사회가 자각하도록 하는 것인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불교가 진부한 아동관에 근거한 정책에 공개적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것을 통하여 사회성원들이 우리 사회의 왜곡된 아동관을 인식하고, 불교적 아동관을 발견하게 할 수 있다고 본다.

(3) 불교적 접근

아동의 복지, 아동의 성장발달이 무엇이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대일경》의 “해탈을 바라는 중생이 선심을 상속시켜 점차 무르익어 가는 과정은 8단계로 구분되는데, 이 8단계는 초목의 성장과정을 비유하여 종자심(種子心), 아종심(牙種心), 포종심(疱種心), 엽종심(葉種心), 부화심(敷華心), 성과심(成果心), 수용종자심(受用種子心), 영동심(텊童心)으로 최상의 단계인 제8단계가 영동심이다.” 는 사상이 큰 시사를 주는 것으로 보인다. 어린 아이는 마음에 아무런 잡념과 사심과 편견이 없이,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존재로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11)

필자가 여기에서 주목하는 것은, 아동의 마음을 최상의 단계에 두고 있는 그 사실이 아니라 ‘인간의 성장과정을 나무의 성장에 비유하고 있는 사고방식’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불교적 생각이 현대사회에서 최근에 이르러서야 강조되고 있는 ‘내발적 발전(內發的發展)’이라는 관념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발적 발전이란 ‘development’라는 관념의 통찰을 통하여 이루어진 아이디어로서, 인간이나 사회의 잠재적 발전 가능성을 강조한다.

발전 내지 발달이라는 뜻의 ‘development’는 ‘어느 한 단계에서 보다 바람직한 한 단계로 변화되어 가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하지만, 바람직한 단계라는 것은 매우 추상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그 개념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가 어렵다. 그 개념의 본질을 파악하는 더 좋은 방법은 ‘development’의 반대개념이 무엇인가를 규명해 보는 것이다.

develop의 반대개념은 envelop이다. envelop란 봉한다는 뜻이다. 무엇인가를 넣어서 나오지 못하도록 봉인하는 것이다. 그러니 무엇인가를 가두어 속박하고 있는 그 봉투(envelope)와 같은 것을 개봉하여 그 무엇을 밖으로 나오게 하는 것이 곧 development라는 것이다.

우리는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었다고 해서 ‘대나무가 피리로 발전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원래 가지고 있는 내재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development’의 본질이며, 씨앗이 움을 터서 묘목이 되고, 그것이 큰 나무로 성장하여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은 것이 ‘development’이다. 원래 가지고 있는 발전하는 힘이 자연스럽게 발휘되어 가는 과정이 곧 그 뜻인 것이다. 예를 들자면 야채와 곡식을 만들어 내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토지라고 하는 생각이다. 적절한 영양을 가진 땅을 만들어 주면 그 속에서 야채나 곡식의 씨앗이 스스로 발전하여 성장할 뿐, 인력으로 성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발적 발전이라는 것은 원래 국제사회에서 개발도상국에의 원조에 관련하여 개발된 개념이다. 선진국의 많은 직접적 원조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제3세계의 생활여건이 개선되지 않고 있다는 현실인식 하에 외부적인 힘을 가하여 제3세계를 바꾸려 할 것이 아니라 원래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잠재적인 힘을 발휘하게 하여 안으로부터 발전할 수 있도록 하자는 어프로치가 내발적 발전이라는 아이디어이다.

이러한 내발적 발전이라는 개념을 중시하는 이유는, 그것이 어떤 가치를 실현해 가는 방법에 관한 시사를 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제3세계 여성의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여성에게 직접적인 사회복지 급여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을 속박하는 다양한 억압 요소를 제거하는 데 초점을 두어, 여성에 대한 권능부여(empowerment)의 일환으로 여성 의원 수를 의회의 일정 비율로 확보하도록 원조함으로써 여성 스스로가 자신들이 가진 잠재적 능력을 개발해 가도록 유도해 나가는 것이 내발적 발전전략이라는 것이다.
불교는 잡념과 사심, 두려움을 초월한 갓난아이의 마음을 이상적인 인간의 경지로 보고 있다.

그런데 현실 세계는 이러한 갓난아이 마음의 유지와 성장을 방해하는 많은 요소들이 있다. 그러한 요소들을 제거하여 아동이 가진 본래의 힘이 자라도록 하는 것이 발전의 본래의 뜻이자 불교적 접근의 특징이라고 본다.

현대사회에는 아동복지의 실현을 방해하는 다양한 문제가 존재한다. 아동학대, 아동에 대한 성차별, 아동을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풍조 등이 그것이다. 내발적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학대를 방지하고 아동의 성차별을 없애고, 아동의 주체성을 인정하게 되면, 아동은 자신이 가진 잠재적인 능력을 발휘하며 발달한다. 아동복지의 실현, 아동발달의 보장을 위해서는 아동의 성장발전을 봉인하고 있는 봉투와 같은 것을 제거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 억압적 요소는 제도와 의식, 그리고 그 양자에 관련된다. 제도의 개선이 의식의 변화를 가져오기도 하고, 의식의 변화가 제도의 개선을 가져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아동학대의 범위는 계속 확대되어 가고 있는데, 그 확대된 개념을 제도화하는 것은 아동학대에 관한 의식의 성숙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일본의 ‘아동학대방지 등에 관한 법률’(최종개정 2006.6.7)은 신체적인 폭력, 아동에게 외설적인 행위를 하는 것 혹은 아동으로 하여금 외설적인 행위를 하게 하는 것, 아동의 심신의 정상적인 발달을 방해하는 것, 방치, 보호자로서의 감호 태만을 아동학대로 규정하고 있었다. 최근에는 다음과 같은 주목할 만한 규정이 추가되었다. ‘아동에 대한 현저하게 거부적인 대응, 아동과 동거하는 가족에 있어서 배우자에 대한 폭력(배우자에게는 혼인 관계의 신고 여부에 관계없이 사실혼 관계와 같은 경우도 포함하여, 배우자의 신체에 대한 불법적인 공격으로, 생명 혹은 신체에 위해를 끼치거나 위해에 준하는 유해한 영향을 미치는 언동을 말함), 기타 아동에 심리적 상처를 주는 행위’, 말하자면 부모 중 한 사람이 아동이 보는 앞에서 배우자에게 폭행이나 폭언을 행하는 것을 아동학대로 규정한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제도개선은 아동학대에 대한 성숙한 의식을 가져올 수 있다.

아동이 부모끼리 폭언, 폭행을 하는 것을 보는 것은 아동의 복지와 성장발달을 저해하는 환경이다. 그러한 환경을 제거해 준다면 아동은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능력이 발휘된다. 우리는 이렇게 아동복지를 억제하는 환경을 제거해 줌으로써 아동 스스로의 성장과 복지 실현의 능력을 보장해 주려고 하는 접근은 앞서 언급한 《대일경》의 사고방식과 흡사하며, 불교적 접근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접근은 19세기 말 영국 복지 국가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한 그린(T.H. Green: 1836~1882)의 사상과 흡사하여 사회복지사상으로서의 보편성도 가진다. 그린은 개인의 복지 실현을 ‘인격의 성장’으로 표현하였는데, 그것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도록 보장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회에는 인격의 성장을 저해하는 다양한 유해한 환경이 존재하는데, 그것을 적극적으로 제거하는 것이 국가의 책무라는 점을 이론적으로 역설하였고, 그것을 사회적으로 실현하기 위하여 직접적인 사회개량 운동을 주도하기도 하였다.12) 그가 의무교육의 실시를 주장했던 것은, 아동에게 기술과 교육을 제공하지 않고 방치하는 것이 아동복지의 실현을 저해하는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린의 접근은 인간을 억압하는 요인을 제거하여 그 억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면 그 인간은 스스로 복지를 실현할 힘을 발휘해 간다고 보는 불교적 접근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4) 아동복지 실현의 주체

앞장에서 《육방예경》에 나타난 아동에 대한 부모의 다섯 가지 의무를 언급하였다. 아동은 아직 완전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나타낸 것인데, 이 경에서는 아동을 보호해야 할 존재가 부모임을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을 근거로 해서 현 시점에서 불교는 ‘아동보호에 대한 부모의 책임을 강조한다.

나아가 아동을 보호할 책임은 부모에게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은 난센스이다. 부처님이 생존해 있던 시기는 소위 사회제도가 분화되지 않았던 시기이고, 현재 교육제도, 정치제도, 사회제도, 사회복지제도 등 공식적인 사회제도들이 수행하는 거의 모든 기능이 ‘가족’이라는 단일 제도에 의해 수행되던 시대였다. 그러므로 그 시대에 아동을 보호할 책임이 부모와 가족에게 있다고 한 것은 자연스러운 가르침일 뿐이다. 오히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불교가 ‘아동이 보호받아야 할 존재라는 점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는 것’에 있다.

여기에서는 근대 이전에 가족이 갖고 있던 다양한 사회적 기능들이 어떻게 사회제도화 되었는가를 보여주기 위하여 다음의 표4를 제시해 본다. 이 표에 의하면, 사회의 주기능인 사회화(Socialization), 생산-분배, 사회통제, 상호부조 등의 기능은 근대 이전에는 모두 가족이 수행하던 기능이었다. 그러나 사회가 발전하고 사회문제가 다양화되면서, 가족이 그 모든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에 사회제도의 분화가 촉진되어 그 이전에 가족이 떠맡아 있던 다양한 기능들이 경제제도, 정치제도, 사회복지제도 등의 새로운 사회제도들에 의해서 수행되게 되었고, 결국 가족은 그 중에서 사회화라고 하는 기능만을 수행하고 있다는 변화를 나타내고 있다.

아동 의무교육은 아동복지 실현의 중요한 정책수단이다. 일본에서는 아동에 대한 국가의 의무적 교육을 의미하는 강제적 교육(Compulsory Education)을 처음으로 도입할 때, 그것을 ‘의무교육’으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된 번역이라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이유는 의무교육이라는 용어가 아동을 교육시키는 것이 아동 자신의 의무 혹은 부모의 의무라고 하는 잘못된 관념을 국민에게 심어 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원래 이 용어는 아동이나 부모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회나 국가가 아동을 일정 기간 강제적으로 교육시키는 제도를 의미하는 것이었는데, 마치 아동교육의 책임이 아동 자신이나 가족에 있는 것이라는 오해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은 아동복지를 실현할 책임이 어디에 있는가를 규명하는 데 있어 중요한 시사를 주고 있다.

거듭 강조하지만, 부처님의 시대에 아동보호의 책임이 부모에게 있다는 점이 설해졌다고 해서, 불교가 아동에 대한 부모의 책임만을 강조하고, ‘아동의 복지 실현에 대한 사회와 국가의 의무를 간과’했다고 해석하는 것은 오류이다. 그것은 불교적 가르침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아동복지를 실현하는 주체에 관한 불교의 관점을 ‘아동은 성인이 될 때까지 교육적 보호 등 특별한 보호를 받아야 하는 존재인데, 아동보호의 책임을 현대적으로 해석한다면, 그 책임이 부모를 포함하여 사회 전체에 있다’고 보는 것은, 불교의 가르침을 전혀 비약하여 해석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러한 현대적 해석이 보다 많은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앞 절에서 언급한 그린의 아동 의무교육 주장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아동 의무교육이 왜 국가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는가에 관한 그의 논리이다. 그는 국가의 의무란, ‘국민의 인간다운 삶의 실현을 방해하는 요인들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규정하였는데, 사회는 끊임없이 변화 발전하고 그에 따라 그러한 장애도 각기 다르게 나타나므로, 무엇을 장애 요인으로 볼 것이며, 그것을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 하는 판단은 그 시대의 사회상황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린은 ‘아동교육을 행하지 않는 것은 그 아동의 능력성장을 방해하는 것이므로, 아동교육은 부모의 도덕적 의무에 의해서가 아니라 아동성장에 대한 장애 요인을 제거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마땅히 국가에 의해 강제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전개하였던 것이다. 1908년 영국에서 성립한 아동법(Children Act)은 부모가 아동의 건강문제를 방치하는 것을 불법행위로 규정하였고, 거리에서의 아동의 끽연을 금지하였으며, 아동에 대한 담배 판매를 범죄로 규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것은 아동이 쉽게 담배에 접하는 생활환경이 아동의 복지 실현에 장애가 되는 것이므로, 그 유해 환경을 제거하는 것이 국가의 임무라고 하는 그린의 사상과 접근법이 크게 반영된 입법이었다.

6. 불교아동복지 실현의 과제

이상의 논의를 요약하자면, 불교의 아동관은 ‘만약 아동의 복지 실현을 저해하는 요소를 제거해 준다면, 아동 스스로가 성장발달하고 복지를 실현할 잠재적 능력을 가진 존재’로 여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아동복지는 아동에 대한 직접적인 원조 서비스에 의하여 실현된다’고 보는 입장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것이며, 불교의 독자적인 관점이 농축되어 있는 접근방식이다.

이러한 접근은 19세기 말 영국 복지국가 성립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였던 그린의 적극 국가론의 논리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자, 내발적 발전이라는 아이디어의 사상적 원류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불교적인 사상은 사회복지에 대한 독자적이면서 보편적인 복지사상체계 및 접근방법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다운 삶의 실현을 방해하는 요인들이 사회의 변화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 장애 요인들과 그 제거 방법은 시대상황에 따라 판단되어야 한다는 그린의 주장은 현재 불교사회복지의 확립이 요구되는 시점에서 우리에게 남겨준 시급한 과제가 무한한 불교의 가르침을 현대적으로, 그리고 사회과학적으로 해석해 나가는 것이라는 점을 시사해 주고 있다.

한국불교는 불교 이념의 사회적 실천에 소극적이었다고 본다. 하지만 그 원인을 규명하고 불교의 가르침을 현대사회에 맞도록 해석하는 노력 또한 부단히 이루어져 왔다. 조성택13)은 “수행의 목표는 깨달음에 있지 않다. 수행의 목표는 자신과 타인의 행복의 증진에 있다.”고 하여 깨달음 지상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박호남14)은 종교가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지만, 불교의 특이함이란 구체적 실천을 위주로 삼는다는 것에 있다고 하고 있다.

홍사성15)(2004)은 상구보리(上求菩提 :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보리의 지혜를 구하고 수행하는 것)와 하화중생(下化衆生 : 중생을 교화하고 제도하는 일)은 선후의 문제가 아니라 동시적인 것임에도 그것을 상하의 개념으로 보는 그릇된 풍조가 있음을 인식하여, 좌구보리 우화중생(左求菩提 右化衆生)이 원래의 가르침에 합당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깨달음이란 불교의 시작이며 열반의 수단이라고 하며, “교에서 바르게 산다는 것은 바른 수행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른 수행은 팔정도와 사념처를 닦는 것을 말한다. 또한 보시 등의 덕목을 실천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견해들은 불교사회복지의 실현에 있어서도 중요한 시사를 가진다. 자신과 타인의 행복을 증진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의 행위인가? 불교사회복지의 핵심적인 이념 중의 하나로 꼽히는 것이 보시(布施)이다. 보시는 대승불교의 핵심적인 실천 수행법의 하나이며, 육바라밀(六波羅蜜)의 제1덕목이다. 《대반열반경》에는 다음과 같이 설해져 있다.16)

걸인에게 물건을 주는 것은 보시이지만 진정한 보시는 아니다. 보시 후에 후회하거나 그 대가를 바라는 것도 참된 보시가 아니며, 두려움으로 인해, 명예나 이익을 위해 행하는 것도 참된 보시가 아니다. 보시한 자신과 그것을 받은 사람과 보시한 내용 이 세 가지를 잊어버리는 것〔三輪淸淨〕이 참된 보시이다.

이 보시라는 이타행이 현대사회에서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가는, 복지 사회의 핵심적 요소로 일컬어지는 이타주의(利他主義)를 구체적으로 개념화하고 그 사회적 역할을 규정한 티트무스(Richard Titmuss)의 논의와 관련지어 볼 때 보다 명백해진다고 생각된다.

티트무스는 어떤 모습의 사회가 진정한 복지사회인가를 과학적이면서도 윤리적으로 증명하는 일에 진력한 영국 학자이다. 1970년에 그는 《증여관계》라는 책을 저술하였는데, 그것은 영국과 미국, 소련 등의 혈액 공급 방식을 비교 연구한 것이었다. 그는 매매를 통하여 혈액을 공급받는 국가와 헌혈을 통하여 혈액을 공급받는 국가를 비교하여 어떤 형태의 혈액공급이 보다 복지사회에 가까운 사회인가를 논의하였다.

그는 ‘헌혈하는 행위’를 이타주의의 한 형태로 간주하여, 헌혈에 의하여 혈액을 공급받는 영국과 같은 나라가 보다 복지사회에 가까운 나라임을 설하였다. 쉽게 말하면, 이타주의의 구체적인 형태는 ‘혈액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고, 어떤 사람에게 자신의 혈액이 공급될지도 모르지만, 그 얼굴 모르는 사람이 자신과 같은 사회의 성원이라는 강한 연대의식을 가지고 기꺼이 헌혈하는 행위’였던 것이다. 티트무스가 과학적으로 증명하고자 하였던 이러한 행위야말로 불교에서 말하는 삼륜청정의 보시와 다르지 않다.

보시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행위와 생활방식을 찾으려고 하는 행위이며, 사회연대 의식의 표현이요, 타인의 행복을 증진시킴으로써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행위이다. 이것은 성숙된 복지사회의 필수조건이다. 다만 보시를 사회연대사상으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보시를 행하는 자가 언제든지 보시 받는 자가 될 수 있다는 입장의 변화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누군가를 위해서 헌혈하는 경우도 있고, 누군가의 헌혈로 수혈 받는 경우가 있음이 인정되어야 한다. 불교적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이란 단지 5온(五蘊 : 色·受·想·行·識)―색은 육체를 구성하는 물질적 요소, 수(감각작용)·상(지각작용)·행(의지작용)·식(의식작용)은 정신적 요소―이 결합하여 일시적으로 조직됨으로써 유기적 운동과 의식적 작용이 일어나는 일시적 존재일 뿐이다. 인간을 영원한 존재인 양 집착하는 것에서 번뇌가 일어난다고 가르치고 있는데, 이것은 인간 사회의 다양한 환경 변화를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본다.

불교는 그 가르침을 사회복지사상과 관련지으면서 이론화해 간다면, 독자적인 불교사회복지체계가 확립될 수 있을 만큼 풍부한 교의와 현대성을 가진 종교이다. 문제는 그 행위를 구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장(場)이다. 필자는 우리 사회의 성원들이 불교적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불교적으로 아동의 복지를 증진시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인 형태로 보여 줄 수 있는 장이 극도로 부족한 것이 한국 불교사회복지 실현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어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출발하는 자세로 장을 새로이 만드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종단이 설립한 초등학교, 중·고등학교에서 우선 불교적인 가르침과 불교적인 접근을 실천하는 것이다. 아동의 복지와 발전을 저해하는 유해한 환경의 목록을 만들어, 그 유해환경을 제거함으로써 아동 본래의 잠재력이 발휘되도록 하는 불교적 접근을 구체적으로 사회에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 조직이 운영하는 아동복지시설은, 불교적 가르침을 구체적인 복지 실천에 반영할 수 있는 윤리강령과 행동강령을 만들고 실천하며, 그 강령들을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구체화해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구체적인 실천이 인정되고, 그것이 축적됨으로써 비로소 불교사회복지 분야가 명실공히 확립될 수 있을 것이다.17)■

박광준
부산대학교 및 교토불교대학 사회복지학과 졸업. 현재 교토불교대학 사회복지학과 교수. 저서로 《사회복지의 사상과 역사》 《고령화 사회와 노인복지》 The Social Impact of Economic Crisis in Corea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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