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한 교육과 삶의 양식

1. 지속가능성이라는 화두(話頭)

우리 지구별에 생명체가 살기 시작한 역사와 인간이 살기 시작한 역사는 일치하지 않는다. 전자에 비해 후자는 극히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것이고, 21세기 현재 과학이 밝혀내고 있는 사실에 비추어보면 특별할 것도 없는 생물학적 진화과정의 끝 부분 어딘가를 점유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초라함과 보잘것없음에 비해 인간의 위상과 비중은 엄청나게 크고 강하게 설정되어 있다. 세계 어느 곳도 인간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공간은 없고 특히 인간 대부분이 모여 사는 대도시의 경우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건물군들이 자리하고 있다. 우리의 경우는 거기에 더해 아파트 숲만으로 이루어진 도시들이 많아서 아마도 어떤 외계인이 보게 된다면 기괴한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비슷비슷한 구조의 아파트 한 칸을 차지하고 살면서 위아래로 연결되는 화장실과 때로 위층 남자의 코 고는 소리와 공허한 텔레비전 소리까지 공유하기도 하며 하루하루 견디는 우리 일상은 한편으로 허무함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나마 이런 공간이라도 차지하고 살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 억지로 잠을 청하곤 한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 하는 뜬금없는 물음과 마주할 때도 있지만, 그 물음 또한 오래 간직하지 못한 채 또 다른 하루를 맞이하는 일을 반복한다.

이렇게 우리 일상은 화두(話頭)를 간직하는 일과 상당한 긴장관계 속에서 전개된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삶의 부조리와 의미 물음을 제대로 화두로 삼을 수 있다면 일상과 깨침 사이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목표 지점을 헤아리기 어려운 무모한 경쟁으로 스스로를 내모는 자본주의적 일상은 이런 화두를 제대로 틀 수 있는 기회를 주지도 않을뿐더러 여행이나 템플스테이 같은 여유 공간을 만들어 겨우 지니게 된 화두를 간직하는 일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 폭력성을 지닌 채 도도히 흐르고 있다.

그런데 이런 일상의 위태로운 평온함마저 흔들릴 때가 있다. 해마다 늘어가기만 하는 황사와 미세먼지, 그로 인한 아토피 같은 질환들이 나 자신이나 가족, 친구 등을 공격해오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바로 그때다. 조금 느낌이 덜하기는 하지만, 아마존의 밀림이나 아프리카 초원의 코뿔소가 마구 훼손되거나 밀렵의 희생물이 되고 있는 모습을 텔레비전을 통해 접할 때도 우리는 이 일상의 외적인 평온함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하는 가벼운 두려움을 느끼기도 한다.

문제는 이런 느낌들이 단지 느낌의 수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구체적인 영역으로 파고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지속가능성 담론’은 이런 배경 속에서 등장해서 이미 이전 정권의 화려한 구호로 차용되는 일도 있었을 정도로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이 아닌가 착각을 하게 될 때가 있다. 그런데 ‘4대강 난개발’이라는 결과물에서 뼈저리게 자각하고 있고, 현 정권의 원전사업 확대를 통해서도 충분히 확인하고 있는 것처럼 그런 구호들은 말 그대로 공염불 또는 구두선(口頭禪)에 그치고 만다. 여전히 우리는 성장과 성공 신화라는 무명(無明)의 그림자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2. 생태사회 또는 생태적 대안사회의 모색

이런 상황과 맥락 속에서 출간된 유정길의 《생태사회와 녹색불교》는 순환이 가능한 사회를 회복해야 한다는 실천적인 문제의식을 생명의 가치와 녹색사회, 생태사회 또는 생태적 대안사회, 불교와 사찰의 생태적 가르침과 전통 등의 묶음으로 나누어 잘 보여주는 의미 있는 시도라고 평가될 만하다. 그는 이 책을 묶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개인주의적 욕망과 생산력주의의 근대사회에서 평등과 정의를 주장한 것이 과거 민중불교, 실천불교였다고 한다면, 탈근대사회에서 불교의 사회적 실천은 녹색적이며 생태적이어야 한다. 그래서 녹색불교이다.(11쪽)

저자는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성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는 이 시점에 근대화 과정의 민중불교나 실천불교가 아닌 녹색불교가 요청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녹색불교가 진보적이기는 하지만 진보주의에 속하지는 않아서 이전에 함께 운동했던 동지들이 ‘사상적 변절’이라고 주저하고 있다면, 바로 그들이야말로 ‘전환’의 가치가 필요한 사람들이라고 강한 목소리로 자신의 신념을 펼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학술서라기보다 한 불교 생태운동가의 신념과 실천적 지향을 담고 있는 21세기적 불교 계몽서라고 보는 것이 적절할 듯하다.

사실 이 책을 학술서로 분류할 경우 한 가지 심각한 문제를 노출시킬 가능성이 있다. 우선 상당히 많은 학자의 주장을 인용하면서도 각주를 달지 않고 책 제목만 제시하고 있다. 그 책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담은 참고문헌이 있으면 더 좋을 텐데 뒷부분을 찾아봐도 참고문헌이 보이지 않는다. 학술서 읽기에 익숙해 있는 평자에게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 되었지만, 대중이 편안하게 읽기에는 오히려 그런 편이 더 나을 것도 같다는 생각을 해가면서 끝까지 읽고자 노력했다.

저자는 책의 서두에서 우리 사회의 진보에 대한 성찰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진보가 현재와는 다른 세상을 꿈꾸면서도 여전한 성장주의나 무한자원주의, 국가주의, 인간중심주의 같은 이념의 한계 속에 머물고 있다는 비판이다. 우리 사회에서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행태를 보면 분명히 그런 한계들이 드러나고 있다. 진보와 보수라는 틀은 본래 ‘지킬 것은 지키고 바꿀 것은 바꿔야 한다.’는 당위적 명제 속에서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지점을 공유해야 마땅하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에서 진보는 자신들만이 진리와 변화를 독점할 수 있다는 아집에 빠진 것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을 불러오고 있고, 다른 편에 있는 보수 또한 자신들이 지키고자 하는 가치에 대한 성찰을 결여한 맹목적인 수구(守舊)의 행태를 드러내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저자의 지적은 그중에서도 이른바 진보세력을 향하는 생태론적 성찰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만하다.

또한 저자는 이제 한국인으로 사는 행태를 넘어서서 지구인으로 살아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기도 하다. ‘지역적으로 사고하고 지구적으로 실천하라’는 제안을 인용하면서 이제는 전 지구적인 책임감을 가져야 할 때라고 강조한다. 이런 저자의 제안은 특히 환경 문제가 한 지역이나 국가에 머물지 않는 확산과 의존의 맥락을 여실히 체험하고 있는 우리 한국인들에게 더 이상 구호의 수준이 아니라 삶의 실천 지침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요청이라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평화와 통일의 문제 또한 생태적 사고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 생태적 사고가 곧 연기적 사고이자 관계망적 사고라는 점에서 불교와 깊은 관련성이 있다고 말한다. 불교는 본래 숲과 나무의 종교이기도 하고 산속에서 산을 지켜온 것이 사찰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생태적 사고를 바탕에 깔고 있는 종교이기에 먼저 사찰 스스로가 에너지 자립에서 시범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기도 한다. 절도 사람이 사는 곳이고 그러다 보니 컴퓨터나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일이 꼭 필요할 때도 있지만 그렇게 사용하는 에너지를 태양열 등을 통해서 스스로 자급자족할 수 있는 생태적 삶의 모형을 보여주는 것이 바람직하고 특히 템플스테이를 통해서 그런 삶을 불교인들과 일반인들에게 확산시키는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있기도 하다.

3. 어떻게 해야 이런 삶을 실현할 수 있을까    : 교육과 삶의 양식 변화

이 물음에 대해 저자는 다양한 방식으로 생태적 사고와 일상 속에서의 실천을 해답으로 제안하고 있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자신이 직접 참여한 경험이 있는 실상사 생명공동체와 정토회라는 불교공동체 운동을 소개하면서 우리 사회에서 불교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공동체 운동의 가능성과 필요성을 동시에 강조하고 있기도 하다.

우리 사회에서 개인주의적 삶의 한계를 근원적으로 넘어서고자 하는 공동체 운동은 끊이지 않고 지속되어 왔다. 농부 철학자 윤구병 선생이 주도한 변산공동체라든지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어온 협동조합 운동, 그리고 저자가 예시하고 있는 실상사 중심의 인드라망 생명공동체와 도심 중심의 정토회공동체 등을 그런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다. 이들 운동은 대부분 현재진행형이어서 그 성공 여부를 평가하는 일이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최소한 공동체 운동의 의미와 지속가능성을 보여주는 데는 일정하게 성공하고 있다는 평가는 가능한 수준이다.

문제는 그런 운동들이 여전히 사회를 움직이는 중심축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고 그러다 보니 그 공동체에 속해 있는 사람들도 자녀교육이나 일상적 소비를 위한 최소한의 돈벌이 요구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는 데서 생긴다. 그들이 자신의 공동체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거나 아니라면 다른 공동체와의 물물교환 등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그 범위를 넘어서는 일들이 지속적으로 생기고 그것은 결국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영역으로서의 편입을 강제하는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다 보면 그 공동체 구성원 누군가는 외부와의 연결을 통한 돈벌이에 나서거나 아예 벗어나 버리는 일도 생기게 마련이다. 다시 말해서 공동체 자체의 와해로 이어질 가능성이 상존한다는 것이다.

이런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저자가 제안하고 있는 생태적 사고의 확산과 공동체 운동 말고도 좀 더 근원적이고 적극적인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그것이 과연 무엇일 수 있을까? 평자는 저자의 제안 중에서 특히 ‘살림의 교육’에 주목해 보고자 한다. 저자는 거창고등학교의 사례나 공동육아, 산촌학교 등의 예를 들면서 다양한 대안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더 나아가 발도르프학교 같은 외국의 사례까지 언급하면서 이제는 무한한 경쟁을 강화시키는 교육이 아니라 ‘서로 의존하며 협력하며 사는 것을 배우는 것이 생태교육의 근본’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79쪽)

저자의 이런 문제의식에 대해 평자는 충분히 공감한다. 다만 그런 교육이 대안교육의 수준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덧붙이고 싶다. 물론 저자도 거창고등학교의 사례를 통해 일반 공교육 체제 속에서 생태교육의 가능성을 일부 암시하고는 있지만, 대안교육은 전체적인 공교육을 이끌어가는 모형으로서 역할을 해낼 수 있을 때 그 임무를 다하는 것이 된다. 만약 극히 일부의 제한된 공간에만 남아 있을 경우 나머지 대부분의 아이는 여전히 경쟁을 중심에 두는 죽임의 교육 속에서 고통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을 고려하여 우리는 일부 진보적인 교육감들이 주도하는 시도교육청의 선도적인 학교 변화 노력에 대해서도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더 중요한 지점은 그런 교육이 단지 교육의 수준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학생들의 생활세계는 물론 그들 가정과 사회로 확산될 수 있도록 일상적인 삶의 양식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운동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모든 사람이 한꺼번에 이런 변화를 시도하는 일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현전승가와 사방승가 모두를 포괄하는 승가 공동체에서 시작해서 사부대중 공동체로 확산하고 그것이 다시 한국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는 생태적 삶의 모형이 하루빨리 나타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 책에 기반한 저자의 삶이 그런 기대를 현실화하는 촉매제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

 

박병기 
한국교원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서울대학교 윤리교육과, 동 대학원 졸업(윤리학, 도덕교육학 석사·박사). 불교원전전문학림 삼학원에서 불교윤리를 수학했으며 전주교육대학교 교수,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 전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 《윤리학과 도덕교육1, 2》 《동양 도덕교육론의 현대적 해석》 《의미의 시대와 불교윤리》 등이 있다.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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