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기신론》 읽기와 여래장 비불설 문제

1.
불교에 대한 학적(學的) 탐구를 ‘불교학’이라 불러볼 때, 불교학의 내용은 매우 다양하다. 불교를 구성하는 모든 조건을 대상으로 하는 해당 학문 분야에서의 탐구가 불교학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의 지혜로서 통찰’이 불교의 중추적 생명력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불교에 대한 사상적 탐구’가 불교학의 중심을 형성하는 것은 불가피하며 또 자연스럽다. 통상적으로 ‘불교 교학의 탐구’를 불교학이라 부르는 것은 이러한 사정의 반영이다.

교학 탐구로서 불교학을 기준 삼아 볼 때, 한국에서 축적되어 가는 불교학에서는 크게 두 유형이 목격된다. 하나는 ‘주석적 불교학’이고 다른 하나는 ‘철학적 불교학’이다.

주석적 불교학은, 주석(註釋/注釋)이라는 말뜻처럼 ‘경론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작업’이다. 경론에 대한 문헌학적 탐구, 번역, 경론의 자구(字句) 풀이와 논리 파악, 주제에 따른 내용의 체계적 재구성이 그 내용이다. 한국 불교학계의 방법론적 경향은 주로 이러한 주석적 탐구이다. 주석적 탐구는 문헌학을 강점으로 하는 일본 불교학의 전통적 개성이기도 한데, 한국 불교학은 현재까지 일본 불교학의 방법론적 태도에 큰 영향을 받고 있는 듯하다.

주석적 탐구는 경론 내용의 탐구 기반을 제공해 주는 장점을 지닌다. 그러나 선행하는 언어와 그에 대한 해석학적 전통의 권위에 과다하게 의존하는 ‘닫힌 해석학’에 머물 위험이 있다. 기존의 해석학적 권위에 수동적으로 의존하는 불교 탐구는 진리 탐구의 정도(正道)도 아닐뿐더러 근원적으로 ‘비불교적’이다. 불교를 ‘불교적’으로 탐구하려면, 전통 언어와 관점을 경청하면서도 지배받지 않는 ‘열린 해석학적 탐구’가 필요하다. 이 요구에 응하려는 방법론적 선택을 ‘철학적 불교학’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무릇 모든 철학적 성찰의 생명력은 ‘일체 통념과 거리 두고 탐구하기’에 있으며, 이는 붓다가 권면하신 진리 탐구의 태도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불교적’이다. 불교학의 발전을 위해서는, 그 어떤 해석학적 권위나 전제도 괄호 치고 탐구해 보려는 태도를 축으로 삼는 철학적 방법론이 그 비중을 더욱 확대해 갈 필요가 있다.

철학적 불교학은 불교의 사유를 번쇄한 개념적 사변으로 요리하려는 것이 아니라, 불교의 사유를 구성하는 조건들을 선행 이해와 전통에 갇히지 않고 읽어 보려는 불교적 태도이자 방법론적 선택이다. 불교의 지혜를 구성하는 조건들을 관점과 사유, 인식, 언어, 논리, 욕망, 행위, 수행, 가치, 인간론, 존재론, 세계관 등 다채로운 각도에서 연기적으로 밝혀내고 음미하는 것이 ‘철학적 불교학’의 구체적 내용이 된다. 그러다 보니 철학적 불교학은 불교 교학을 구성하고 있는 사유들을 성찰적으로 읽어내는 작업이 주요 과제가 된다. 그러나 철학과는 달리 수행이라는 실존 차원의 검증과정이 수반되어야 성공할 수 있는 분야가 ‘철학적 불교학’이다.

근대 이후의 학문 방법론을 소화해 낸 불교학 연구자와 그들의 연구 성과들을 양적 비율로 볼 때, 현재까지는 주석적 불교학이 압도적이다. 주석적 불교학과 철학적 불교학을 대쪽 가르듯 나누기는 어려우며, 양자에 걸쳐 있는 경우가 실제에 가까울 것이다. 사실 양쪽을 아우르는 종합 불교학이 이상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철학적 불교학의 필요성은 시간이 흐를수록 증대하고 있고, 국내외에 걸쳐 이 범주에 배속시킬 수 있는 연구 성과들도 점증하는 추세로 보인다. 필자가 볼 때, 한국 불교학의 새로운 지평 전개는 결국 철학적 불교학의 활성화 정도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한자경 교수는 불교에 대한 철학적 성찰에 접속해 가는 많지 않은 연구자 중 한 분이다. 그런 그의 역량이 이번에는 《대승기신론 강해》(불광출판사, 2013)로 표현되었다. 견실한 철학적 소양에 입각한 그의 언어는 선행하는 《대승기신론》 해설서들과 차별화되는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한자경 교수의 글들에서는 언제나 명석한 논리적 사유와 쉽지 않은 철학적 사유를 쉽게 풀어내는 능력 및 핵심에 집중하는 구도적 열정이 돋보인다. 원효와 법장의 주석에 의지하면서 《대승기신론》의 사유를 정련된 개념들로써 풀어내는 《대승기신론 강해》는, 《대승기신론》 해설의 견실한 사례로 남을 것이다.

2.
《대승기신론》을 읽는 한자경 교수의 교학적 입장은 이른바 ‘여래장 사상’ 및 ‘진여연기설’을 취하고 있다. 진여와 여래장 및 일심을 존재론적으로 등치시키면서, ‘불생불멸의 진여/여래장/일심에 대한 믿음을 일깨우고자 하는 것이 《대승기신론》의 취지’(20-21, 29쪽)라는 관점을 기신론 독해의 해석학적 기본 원리로 채용하고 있다. 법장의 관점이자 기신론 이해의 지배적인 해석학적 관점으로 채용되어온 것이 진여/여래장 연기설이다. 한자경 교수의 《대승기신론 강해》는 ‘《대승기신론》에 대한 진여/여래장 연기설의 존재론적 읽기’로 보인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이 책의 가치와 한계가 교차한다.

대승불교 사상사에서 여래장 사상의 지위는 묘하다. 기본적으로 여래장 사상은 해탈의 능력과 가능성 및 해탈의 경지를 긍정형 서술을 통해 명확히 해보려는 태도의 표현이다. 그런데 이러한 언어 전략으로 인해 불교 이해의 혼란을 발생시킨다는 것이 문제다. 여래장 사상은 자칫 붓다가 명백히 거부했던 아뜨만적 실체론의 변형된 유형으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여래장의 공성을 천명하는 등 다양한 언어 출구전략을 구사할지라도, 유식과 여래장을 결합시켜 진여를 존재론적으로 이해하거나 기술하려는 시도는 ‘실체−현상’의 사유 범주에서 빠져나오기가 어려워 보인다. ‘여래장 비불설(非佛說)’의 혐의를 해소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법장은 기신론 해석(《의기》)에서 여래장 개념을 주목하여 기신론의 사상사적 의미를 여래장 연기설로 판독하고 있고, 일본 불교학계가 축적한 여래장 사상에 대한 학문적 성과는 법장의 기신론 이해와 결합한 것이다. 그리고 기신론에 대한 이해는 현재까지 ‘법장−여래장 사상’ 유(類)의 관점이 압도하고 있다. 한자경 교수의 기신론 독해는 그러한 관점의 존재론적 계승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심층 아뢰야식을 하나의 우주를 만드는 하나의 식으로서 일체중생 안에 내재된 보편적 마음, 각각의 중생이 모두 하나로 공명하는 공통된 한 마음(一心)이라고 생각한다. ……유식이 아뢰야식을 번뇌에 물든 염오(染汚)의 망식이라고 불러도 그것은 아뢰야식이 만들어 놓은 영상인 이 고통스런 세간에 집착하지 말라는 의미이지 영상을 산출하는 심층마음의 활동성 자체를 부정하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주가 아뢰야식의 활동산물이라는 의타기(依他起)를 아는 것은 곧 유식성(唯識性)을 아는 것이고, 그것은 곧 우주를 형성하는 광원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 우주의 근원이 모든 중생의 심층의 한마음, 일심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유식은 아뢰야식으로부터 현상세계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밝히고, 여래장은 그렇게 세계를 만드는 아뢰야식이 바로 진여이고 법신이며 광원이라는 것을 밝힌 것이다.(6-8쪽)

……념에서 멸상, 이상, 주상, 생상을 차례로 없애 무념에 이르고자 하는 것은 마음 심층에서 자신을 광원으로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확인되는 무념무상의 진여가 어찌 빛을 발해 우주를 만드는 아뢰야식의 광명의 근원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유식은 ‘주기만 하고 빼앗지는 않지만(與而不奪)’ 여래장은 ‘다 주어서 빼앗는다(窮與而奪)’는 원효의 말은 여래장이 유식과 다르다는 말이 아니라 여래장이 유식을 완성한다는 화쟁의 말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9쪽)

……유식이 심층마음의 생멸활동을 강조하고 있다면 기신론은 그렇게 생멸활동하는 심층마음 자체는 생멸의 바탕으로서 불생불멸의 심체(心體)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현상세계를 형성하는 중생의 생멸심 안에 불생불멸의 진여심이 있다는 것, 진여심이 곧 여래법신이며 그 안에서 일체중생은 모두 하나라는 것, 모두 일심(一心)이라는 것을 강조한다.(28-29쪽)

……일체중생의 몸과 그 몸들이 의거해 사는 우주 세간은 시간에 따라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이지만 모든 생멸하는 것을 바라보는 중생의 눈, 그 생멸을 느끼고 지각하는 중생의 마음은 생멸 너머의 빛, 불생불멸의 광명, 바로 법신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일체중생심 안의 불생불멸의 진여심, 여래법신이다. 변화하는 생멸의 지평 너머 일체중생 안에서 하나로 빛나는 광명, 즉 일심이다. 결국 중생은 불생불멸의 진여심과 인연따라 생멸하는 생멸심의 양면을 가진다. 이로써 기신론의 일심이문(一心二門)이 성립한다.(31쪽)

……‘마음이 심층으로 내려갈수록 개인의 범위를 넘어서서 다른 마음과 직접적으로 서로 소통하게 된다. 마음의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가면, 일체중생의 마음이 하나가 된다. 이 바닥에서의 하나의 마음을 일심이라 한다.(38쪽)

……기신론은 그러한 마음의 심층세계, 모든 마음이 서로 소통하는 세계, 일체 세간과 출세간을 만들어내는 자신 안의 법신의 활동이 그대로 자각되는 일법계(一法界), 그 진여의 세계를 제시함으로써 대승법인 일심 내지 진여에 대한 믿음을 일깨워주는 논서이다.(39)

‘변화 생멸하는 현상의 이면에 바탕으로서 존재하는 불생불멸의 심체(心體), 세간과 출세간을 지어내는 일점 근원으로서의 보편적 광원, 우주와 현상세계의 창출 하는 아뢰야식의 광명 근원인 일심/여래장/진여, 현상세계를 형성하는 중생의 생멸심 안에 존재하는 불생불멸의 진여심, 마음의 심층에 존재하는 불생불멸의 일심과 그 일심의 보편성, 중생의 마음은 불생불멸의 진여심과 생멸하는 생멸심의 이중 구성이며 그것이 기신론의 일심이문(一心二門)이라는 것.’ −유식, 기신론, 여래장, 일심, 진여를 읽는 한자경 교수의 관점을 관통하는 내용들이다. 그리고 이것은 여래장 사상으로 기신론을 읽을 때 등장하는 해석학적 시선의 전형이다.

생멸 변화하는 모든 현상의 근거이자 그 현상의 기저(基底)에 존재하는 불생불멸의 그 무엇, 마음의 심층에 존재하는 불생불멸의 바탕이면서 생멸하는 세계를 창출하는 광원, 그것이 일심이고 여래장/진여/법신이며, 개별 존재들의 우주적 동일성과 보편성의 근거라고 읽는 시선. −문득 기시감이 솟구친다. 때로는 아뜨만/브라흐만으로, 때로는 실체/현상론으로 표현되는 존재 형이상학, 그 깊고 질긴 실체 선호의 존재론적 사유 습벽과 그 언어적 연출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필자만의 오해인가.

사실 기신론은 이런 식의 독해로 나아가기 쉬운 언어들을 간직하고 있다. “심성이라고 하는 것은 불생불멸이다.” “심생멸이라는 것은 여래장에 의거하기 때문에 생멸심이 있는 것이니, 소위 불생불멸과 생멸이 화합하여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닌 것을 이라야식이라 부른다.” “이른바 멸이라는 것은 오직 심상(心相)이 멸하는 것이지 심체(心體)가 멸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심체가 멸하는 것이라면 곧 중생이 끊겨 의지할 바가 없지만, 심체는 멸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상속(相續)할 수 있다. 오직 어리석음만이 멸하기에 심상(心相)이 따라 멸하지 마음의 지혜가 멸하는 것은 아니다.” 등등. −생멸 현상의 근거이자 현상 이면에 존재하는 불생불멸의 기체(基體)를 상정케 하는, 전형적인 ‘본체−현상’의 존재론으로 읽기 쉬운 언어들이다.

그런 구절들에 언어의 세간적 일상 의미를 적용해 이해한다면, 기신론은 ‘불생불멸의 본체적 존재와 그것이 자아내는 생멸 현상세계에 관한 교설’이 되고 만다. 그럴 경우 기신론이 아무리 불교 계보에 등재되어 있는 권위 있는 교설이라 할지라도, 불교 언어로 포장된 아뜨만 사상 내지 실체적 존재 형이상학의 아류라는 혐의를 벗기가 어렵게 된다. 흔히 시도되는 것처럼 연기와 공성의 의미를 이런저런 방식으로 접목시켜 실체적 본체/현상 존재론의 덫에서 벗어나고자 할지라도, 과연 제대로 된 탈출이 가능할지 솔직히 의문이다. 기신론의 이런 구절들을 ‘실체/현상 존재론’에 빠뜨리지 않으려면, 이 언어들의 독특한 의미맥락을 포착하는 새로운 독법이 필요하다. 그리고 전통 주석과 불교학계는 아직 그러한 독법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원효의 평가처럼, 기신론은 그 이전까지 등장한 대승교학의 주요 개념과 이론들을 종합하고 있지만, 동시에 원효의 극찬처럼 기신론이 불교의 정수를 적절한 언어로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모든 경전을 붓다의 설법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 대승교학이 붓다의 지혜를 제대로 드러낸다고 확신했던 언어 환경을 감안한다면, 기신론에서 불교 이론의 종합과 정수를 읽어내고자 했던 원효의 태도는 충분히 적절하다. 기신론을 비롯한 방대한 대, 소승경론을 통해 붓다의 지혜를 읽어내는 원효의 안목과 성과는 실로 경이로운 것이어서, 그를 능가할 내·외공을 구사할 수 있는 후학의 등장은 결코 쉽지 않아 보인다.

원효의 글을 읽다 보면, 현학적일 정도로 현란한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읽는 사람의 생각을 장악하여 끌고 가면서 사유 지평을 툭 터주고 훌쩍 높여주는 강한 힘을 느끼게 된다. 그와 동시대의 불교 언어들은 물론, 한껏 유식해지고 똑똑하며 정교해진 오늘의 불교 언어 속에서도 그런 힘을 갖는 언어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그런 원효의 기신론 읽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그가 기신론의 언어를 실체적 본체/현상론으로 전락시키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다는 점이다. 그 점이 법장 내지 여래장/진여연기설 유(類)의 해석학적 시선과 구분되어 음미되어야 할 주요한 차이이기도 하다.

3.
유식, 여래장, 진여, 일심의 언어들과 실체적 본체/현상론과의 접속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은 충분히 고려되어야 한다. 또한 이러한 언어들을 적극 채용하고 있는 선종의 돈오견성 교설도 자칫 변형된 실체론의 덫에 걸려들 수 있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사실 선불교에 대한 이해들 가운데 이 덫에 걸린 사례는 쉽게 목격될 정도로 널려 있다.

이 문제에 대한 종래의 비판과 반론들은 그다지 충실한 내용도 아니고 성공적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유식/유심/일심/여래장/진여 등 기신론이 종합하고 있는 대승의 언어들을 현양매구(懸羊賣狗)의 비불설(非佛說)이라고 질타하는 경우들은 초기경전의 무아나 연기의 언어를 논거로 들이대고 있으나, 혐의와 비판 의식만 고조되어 있을 뿐 초기 교설이나 대승 교학 내지 선종의 언어에 대한 상투적, 피상적 독해로 인해 그 설득력이 제한되어 있다. 반면 유심/일심/여래장/진여의 언어가 무아와 해탈의 정수를 제대로 담아내는 기호라며 반론에 나서는 경우도, 일심/여래장/진여는 실체가 아니라 공성이라고 주장하는 정도를 넘어서지 않는다. 그런 방식과 수준으로는 비판과 반론 모두 성공하기 어렵다.

유식/유심의 교학에 관한 전통적 이해가 중요한 해석학적 오해나 일탈일 수도 있고, 유식/유심의 교학 자체가 과도한 언어 선택 등으로써 ‘너무 나간’ 것일 수도 있다. 진실이 무엇이건 간에, 후학들에게 주어진 과제 하나는 해석학적 선택을 통해 불교의 계보에 등재된 언어들을 ‘불교적’으로 소화해 내는 일이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이 문제를 다루는 데 가장 중요한 관문은 정학(定學)의 선(禪)이라고 본다. 유식의 ‘만법유식(萬法唯識) 유식무경(唯識無境)’ 기신론의 ‘불생불멸과 생멸’ ‘일심’도 결국은 정학의 맥락에서 접근해야 그 특유의 의미 지평이 드러날 수 있다. 유식사상 역시 기본적으로는 정학의 교학적 표현으로 보는 것이 적절할 터인데, 유식 내지 유심의 언어를 어떤 맥락에서 읽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 지평이 펼쳐진다. 종래의 여래장사상 맥락으로 읽으면, 유식 및 여래장은 생멸세계를 연출하는 불생불멸의 인식적 기체(基體)를 드러내고자 하는 교학이 되고 만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읽는 유식/유심 교학은, 읽는 이의 의도와는 달리, 어느새 ‘실체/현상 존재론’의 범주로 미끄러져 들어가기 쉽다. 유식/유심의 언어를 읽는 새로운 독법의 확보는 불교학의 중차대한 과제이다.

4.
“우심기자 무유초상가지 이언지초상자 즉위무념(又心起者 無有初相可知 而言知初相者 卽謂無念)”을 “또 마음이 일어나면 알 수 있는 초상이 없다. 그런데도 초상을 안다고 말하는 것은 곧 무념이라는 뜻이다.”라고 번역하고 있는데(135쪽), 이것은 “또 ‘마음이 일어난다’는 것은 알 수 있는 초상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초상을 안다’고 말하는 것은 곧 무념을 일컫는 것이다.”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이 구절을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기신론이 언급하는 일심과 수행론에 대한 이해가 완연하게 달라진다. 또 “불각심기 이유기념(不覺心起 而有其念)”을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일어나 그 염이 있게 되는 것을 뜻한다.”고 번역했는데(152쪽), 여기서 ‘불각심기’는 “깨닫지 못하여 마음이 일어나”로 하는 것이 좋겠다.

5.
한자경 교수의 《대승기신론 강해》는 기신론에 종합된 대승불교의 언어를 읽는 종래의 해석학적 주류 관점을 존재론적으로 재현하고 있다. 기신론의 수행론에 대한 저자의 이해 역시 그러한 존재론적 이해의 연장선에 있다. 그 결과, 저자가 의도하지는 않았겠으나, 기신론과 ‘대승/여래장 비불설’의 연관 논거를 따져보게 해 준다. 기신론 철학 내지 불교철학의 핵심 과제 하나를 환기시켜 주는 것이다. 저자의 관점에 대해 수용적이건 비판적이건 간에, 바로 이 점이 이 책의 한 장점이다. ■

 

 

박태원
울산대 철학과 교수. 한양대 법학과, 고려대 철학과 대학원 졸업(석사·박사). 주요 논저로 《대승기신론사상연구(1)》 《원효와 의상의 통합사상》 《정념과 화두》 《인문고전 깊이 읽기−원효》 《원효의 십문화쟁론−번역과 해설 그리고 화쟁의 철학》 등과 원효/의상/지눌/선에 관한 연구논문 다수. 원효학술상(2011), 대정학술상(2013)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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