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공 일과 깨달음’ 도량 농사꾼

올 겨울은 겨울치고 그렇게 춥지 않았다. 지구 온난화의 영향이라면 우리나라도 점차 겨울이 없어지는 것은 아닌지. 수십 년이 지나면 우리나라에 소나무가 자라지 못한다던가, 소나무 에이즈인 재선충에 의한 병도 알고 보면 기온상승이 원인일 수 있다는데,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다.

높은 산 홀로 솟은 바위에 소나무가 없으면 얼마나 서운하겠는가. 강원도의 산비탈에 눈에 맞아 어서 오라 손을 쭈~욱 내민 소나무가 없어지면 얼마나 섭섭하겠는가. 산사마다 지키는 허리 휜 소나무는 산사의 요사채 지붕만큼 휘어져 산사가 소나무인지 소나무가 산사인지 모를 만큼 절묘한 조화를 연출함은 모두 소나무 덕일진대, 허리 휜 소나무가 없는 산사 또한 즐거운 상상은 아닐 듯하다.

어렸을 적 땔감의 주재료는 소나무 부산물이었다. 청솔가지, 삭정이, 광솔, 떨어진 솔잎 등은 밥 하고, 방을 따뜻하게 하고, 물 데우는 요긴한 연료였다. 겨우내 농한기에 주요한 일거리가 솔밭에 기어올라 삭정이를 모으고 솔잎을 갈퀴로 한 짐 긁어모아 지게에 차곡차곡 쌓아 끙끙거리며 헛간에 부리는 것이었다.

한겨울이라도 솔밭에서는 포근하다. 소나무들이 바람을 막아주고 그들이 뿜어내는 산소와 향기는 포근함을 너머 정신을 또렷하게 한다.

육조 혜능이 오조 홍인의 가르침을 받을 때, 좌선만이 아닌 물을 긷고 디딜방아를 돌리는 등 신선한 노동이 있었기에, 삶(일행―노동) 속에서 부처를 구하라 역점을 두어 강조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내 생각에는 선방에 앉아 좌선하는 것보다 솔밭에서 노동을 하면서 솔향기에 정신이 맑아져서 깨우침이 더 컸으리라 짐작한다. 자연과 노동은 사람을 더욱 사람이게 한다.

겨우내 솔밭에서 솔잎을 긁어모았다. 고추밭고랑 사이에 풀이 자라지 않도록 솔잎을 깔아 주기 위해서다. 남들은 주로 볏짚을 깔아 주지만 하루 빨리 조금이라도 소나무 정기를 받아 깨달음에 다가가기 위한 안간힘으로 솔잎을 선택했다. 어떤 사람 말로는 나뭇잎도 산성비로 인해 잘 썩지가 않아서 산불이 자주 난다고 한다. 근거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나무를 하다 보면 나뭇잎들이 옛날 같지는 않다.

오래된 솔잎에 하얗게 낀 균주들이 그들을 분해하며 내뿜는 향기 또한 얼마나 머리를 맑게 하는지 산을 자주 찾는 이들은 아마 잊지 못할 것이다. 이 균주들은 유기농 밭에 가서도 밭을 튼튼하게 만드는 좋은 일들을 많이 한단다. 그런데 요즘은 농촌에서 주 연료를 석유나 전기로 사용하는 바람에 산에는 솔잎천지인데도 썩은 솔잎보다는 마른 솔잎이 두텁게 쌓여 있는 것을 보면 산성비 탓도 있는가 싶어 오히려 밭을 산성화시키지는 않을지 걱정이다.

볏짚도 산성비에 맞았으니 비닐하우스 속에서 벼를 키워야 하는가. 사실 비닐하우스 속에서 키우는 고추는 탄저병에 적게 걸린다고 들었다. 탄저병의 원인이 산성비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다가 자연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먹을거리가 없어지면 인간들은 로봇으로 개조할건가. 사람들은 우매한 게임을 하고 있다.

썩어야 할 것은 썩어야 한다. 소화가 잘 된다는 것은 뱃속에서 음식이 잘 분해되는 것, 즉 잘 썩는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음식도 상품이 되어 대량생산되어 장기 보관을 위해 방부제를 넣는다. 그러니 소화가 잘 안 되어 소화제를 먹고, 또 방부제 든 음식을 먹고 또 소화제를 먹는 악순환을 겪고 있다. 그러다가 각 장기들이 고장이 나면 이젠 그 장기마저 새롭게 바꾸려 하고 있다. 또한 육체적 노동의 양은 적어지고 머리로 궁리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만 많아지니 육체적 균형을 위해 돈을 들여가며 억지로 살을 빼느라 고생한다. 과연 이것이 잘사는(웰빙) 시대인가.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사람들도 대량생산을 위해 온갖 편리만을 좇아 씨앗을 유전자 변형하고 그에 맞는 제초제와 농약들을 독점하며 강요하고 있다.

‘돌고돌고 다시 또 돌고~’라는 유행가 가사가 생각난다. 업은 윤회한다. 윤회를 끊는 것이 수행이다. 수행은 몸과 마음을 조화롭고 지속 가능하게 하는 연습이다. 마음과 육체, 자연과 사람이 조화롭게 하도록 끊임없이 지혜를 내고 행동하는 것이 수행이다. 썩어야 할 것을 잘 썩게 만들고, 썩어가는 것(무상)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여 썩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수행이다.

썩어야 새로 태어난다. 썩지 않으면 재생은 불가능하다. 썩지 않는 거름을 주면 그 독으로 인해 작물은 죽는다. 이것이 법이요, 세상의 이치이다.

지금 우리들은 과유불급의 시대에 살고 있다. 자그마한 욕망이 빚어내는 결과가 심히 우려스러운 지경에 이르렀다. 욕망의 질주는 브레이크가 없어 보인다. 수많은 사람들이 경고와 반성을 하지만 실제로 몸을 움직이는 사람은 드물다. 이것 또한 습관의 관성이겠지만 수행은 이 관성을 멈추게 하고 올바른 습관으로 바꿔 내는 것이다. 올바른 습관으로 바꾸도록 인도하는 것이 수행자요, 보살이요, 부처님일 것이다. 남악회양이 좌선하여 깨닫겠다는 마조 앞에서 기왓장을 갈았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왜 우리 선사들은 애써 외면하시는가. 아니면 혹시 그냥 전설이기만을 바라시는가.

별일 없는 것, 즉 무사(無事)가 깨달음이라고들 한, 다시 말하면 별일 없게 만드는 것도 깨달음인 것이다. 별일 없이 잘 썩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썩게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 잘 안 썩을 땐 잘 썩게 만들어야 한다. 잘 안 썩는데 가만히 있으면 수행자의 바른 태도가 아니다.

우리가 석가모니 부처님께 예를 표하는 것은 그 분의 올바른 생각과 실천에 감동하고 그 분을 닮겠다는 자기와의 약속 행위이다. 그 분의 삶은 세간의 부조화의 원인을 잘 살펴 그 조화로운 대안을 제시하고 그 현장을 찾아가 조화롭게 인도하셨다.

잘 안 썩는 곳을 찾아다니시며 썩는 것이 세상의 이치임을 설득하고, 잘 썩게 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잘 썩게 만드신 분이셨다. 안 썩는 것을 가만히 앉아 구경만 하거나 말로만 잘 썩게 하라 하신 게 아니었다.

입니입수(入泥入水), 즉 맑은 물과 흙탕물은 본래 하나이다. 맑은 물이 흙탕물이 되는 것이며 흙탕물이 맑은 물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흙탕물에도 들어가고 맑은 물에도 들어가서 흙탕물과 맑은 물이 본디 하나임을 깨닫고 맑은 물과 흙탕물이 본래 같으니 서로 차별하지 말게 타이르고 서로 상생하는 본질을 깨우쳐 주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이다.

미꾸라지에게 진흙은 고마운 존재이지만 맑은 물에 사는 민물새우에겐 전혀 반갑지 않은 환경이다. 언제나 맑은 물만을 좋은 것이라 고집하는 편집적 사고와 행위는 스스로를 돌고 또 돌게 만들고 주변을 돌고 또 돌게 만든다. 부처님은 썩는 것을 잘 썩게 만들었고 또한 맑은 물과 흙탕물이 하나임을 보아 맑은 물에도 들어가셨고 진흙탕에도 똑같이 들어가 조화롭도록 이끄셨다.

늘 푸른 솔은 늘 푸른 게 아니다. 낙엽이 되어 떨어지고 그 낙엽이 잘 썩어야 그 밑거름으로 새롭게 거듭나서 또 푸르게 된다. 늘 푸른 솔잎도 누런 낙엽이 된 솔잎도 서로 자기만을 고집하지 않고 떨어질 때, 떨어지고 썩을 때 썩어서 또 새로이 푸르름을 유지한다. 솔밭에 앉아서 솔향에 취해 그 또렷함으로 오랜만에 좋은 생각을 하는 사이, 솔잎 하나가 머리에 내려앉는다.

이 무슨 소식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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