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 경허를 다시 읽는다

1. 들어가는 말

불교란 나를 탐구하여 나의 정체를 알아 자유롭게 되는 길이다. 고따마 붓다는 그 길을 걸어 완전한 자유를 얻었고 그 길을 가르쳤고 많은 후학이 그 길을 따라 걸었다. 붓다 이래로 나타났던 불교를 시대순으로 나열해보면 초기불교−부파불교−대승불교−선불교라고 말할 수 있다. 유구한 2,600년의 흐름을 어떤 이들은 불교의 발달사라고 보고, 어떤 이들은 불교의 변천사, 또는 불교의 쇠퇴사라고 보기도 한다. 시대마다 소의경전과 수행방법도 달라졌고 언어 표현도 강조점도 달라진 불교들이 속속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불교는 늘 새롭게 변화하고 발전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 새로움이란 것은 언제나 근본을 여의지 말자 혹은 붓다에게 돌아가자는 운동이기도 하였다. 경허도 붓다의 제자로서 붓다를 따르는 길을 걸었지만 붓다의 길과 경허의 길은 많이 달라 보인다. 경허는 붓다의 제자이면서 왜 붓다와는 다른 길을 가야만 했을까?
지금 현대 한국선(韓國禪)이 선구자 경허의 압도적 영향하에 있음에도, 정작 경허 그 자신은 사람들에게 막행막식의 기행을 일삼는 파계승, 혹은 선문(禪門)의 이단자로 외면당한 채 세간에 횡행하는 억측과 통념의 소용돌이 속에서 홀로 고독의 끝에 서 있어야만 하는 극도로 모순에 찬 인물이다. 경허가 세상의 억측에 시달리게 된 것은 경허의 생애가 파란만장한 까닭이기도 하지만 《경허집(鏡虛集)》이 경허의 입적 30년 후에야 세상에 출간된 것이 결정적 계기였다.
경허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918년에 발행된 이능화(李能和, 1869~1943) 거사의 《조선불교통사》이다. 다음으로는 1931년에는 한암이 쓴 필사본 《경허집》이 있고 1938년에는 《비판(批判)》이란 잡지에 김태흡(金泰洽, 1899~1989)이 〈인간 경허〉를 연재했다. 공식적인 경허집은 경허의 입적 30년 후인 1943년에 오성월·송만공(1871~1946)·장석상(張石霜)·강도봉(康道峰)·김경산(金擎山)·설석우(薛石友)·김구하(金九河)·방한암·김경봉(金鏡峰)·이효봉(李曉峰) 등 당시 한국 선문을 대표하는 41인의 선사들이 선학원판 《경허집》을 발간하였다. 1981년에는 수덕사에서 기존의 《경허집》을 한글화하고 한암이 쓴 경허 행장과 38편의 일화를 더하여 《경허법어》를 출간하였다.
경허가 입적한 1912년부터 《경허집》이 세상에 나온 1943년까지의 기간은 우리 문화가 말살되어온 일제강점기였다. 이 기간에 경허에 대한 진실은 묻히고 유언비어와 악의적인 소문이 세상에 떠돌았다. 경허의 생애는 자극적인 이야깃거리에 탐착하는 세류에 왜곡되어 허공에 난무하였고, 경허에 대한 부정적인 인물평에는 식민통치 이념이 작동하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선학원판 《경허집》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 불교사학자 이능화와 포교사 김태흡은 세상에 떠도는 소문을 확인 없이 전하고 있다. 선학원판 《경허집》은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기 위해 한국불교가 시도한 경허 바로 알기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경허집》이 세상에 나온 이후에도 왜곡되었던 소문들은 사라지지 않고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2012년 윤창화가 《불교평론》에 발표한 〈경허의 주색(酒色)과 삼수갑산〉이라는 논문은 주로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경허는 주색을 일삼다가 말년에 자신의 삶을 부끄러워하며 자취를 감춘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을 기다렸다는 듯이 신문들은 일제히 자극적인 제목으로 경허가 주색잡기에 빠져 놀아난 스님이라고 보도했다. 언론들은 기회를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경허를 주색에 놀아난 스님으로 선전하고는 이후에 발표된 반박 논문과 글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른바 여론재판이었다.
이 글은 경허를 제대로 알기 위하여 그동안 경허를 평가할 때 쟁점이 되는 몇 가지 사항을 나름대로 평가해보고 경허가 어떤 의미로 이 시대의 우리에게 다가오는가를 고민해본 것이다. 경허를 평가함에 있어서 경허가 남긴 법어 등을 통해서 경허의 사상과 불교관을 이해하고, 경허가 살았던 사회상황을 파악하는 것과 아울러 유구한 불교의 흐름 속에서 경허의 불교가 어느 지점에 위치하고 어떠한 언어로 표현되고 있는가를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나긴 불교의 역사 속에서 경허라는 한 사람의 사상과 행동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허를 평가하고자 할 때 경허의 언어가 붓다의 언어와 다름을 이해하는 것도 필요하다. 붓다는 이렇게 사셨는데 경허는 왜 그렇게 살지 않았나, 경허를 따를 것인가 붓다를 따를 것인가 하는 양자택일의 문제로 접근하는 것은 위험하다. 이것은 경허와 붓다의 다름 이전에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혹은 초기불교와 선불교의 다름에서 비롯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를 무시하고 소승과 대승 혹은 종파주의에 갇힌 불교관으로 하나의 인물을 재단하려는 태도는 폭력이나 다름없다.


2. 경허의 불교관

붓다 이래로 나타났던 2,600년 불교의 흐름을 다음과 같은 3가지 입장 즉, 불교의 발달사, 불교의 변천사 그리고 불교의 쇠퇴사라는 측면에서 관찰할 수가 있다. 불교의 발달사로 보는 것은 소승과 대승이라는 관점을 인정하는 것으로 아함경보다는 대승경전의 가치를 더 높게 보며 선(禪)을 최상승으로 보는 입장이다. 《경허집》에서 발견되는 경허가 인용하는 경전과 어록은 거의가 대승의 전적들뿐이다. 경허는 등암 화상에게 주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부처님이 일대장교를 설하시어 오계와 십선법(十善法)으로써 인천에 나게 하고, 고집멸도의 사제법으로써 아라한과를 증득하게 하며, 무명(無明) 행(行) 등 12인연법으로써 연각과 벽지불과를 증득하게 하고, 사홍서원과 육바라밀법으로써 보살도를 행하며 권교(權敎)의 보살은 아승지겁을 지나면서 사홍서원과 육바라밀을 행하되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의 과위를 지나도 오히려 묘도(妙道)를 통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아직도 유위법을 보고 희유하다는 생각을 내며 무상법(無相法)을 들으면 망연하여 어쩔 줄을 모른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일대장교 가운데 절반가량이 원만하지 못한 것은 방편설로서 실상이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요의경(了義經)에 의지하고 불요의경(不了義經)에 의지하지 말라.” 하시니 그 반이란 방편설이라 의지할 것이 못되니 그 이치가 명백하도다. 이제 수행자들을 보건대 모두가 방편설에 미혹되어 일생을 그르치니 슬프다.

위와 같은 인용문을 보면 경허는 불교 역사를 불교의 발달사로 보는 입장에 서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입장은 불교가 중국으로부터 한반도에 전래된 이래 지속되어 왔던 입장으로 보조지눌과 휴정 그리고 경허에 이르기까지 이 땅의 거의 모든 스님이 불교사를 이해하는 방식이었다. 기원전 1세기 무렵 출가 중심적인 불교의 반성으로 일어난 대승불교는 계율이나 교법에 얽매여 형식화되어 가는 부파불교의 벽을 깨뜨리고 보살의 길인 육바라밀을 닦음으로써 중생에게 더욱 다가가고자 하였다. 대승불교도들은 붓다관을 새롭게 해석하여 무수한 붓다와 보살을 창조해 내었고 육바라밀의 완성으로 아라한보다는 붓다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들은 새롭게 많은 대승경전을 지어 자신들의 불교를 전파했는데 자신들의 교리를 전파하기 위하여 부처님이 설하신 가르침을 성문장(聲聞藏) 혹은 소승삼장(小乘三藏)이라고 폄하하고 경전의 곳곳에 대승의 우월함을 주장하는 문구를 삽입하였다. 대승의 소승 폄하에 대한 사례는 《대지도론(大智度論)》 《소품반야경》 《법화경》 《열반경》 등의 많은 경전에서 발견된다. 선교일치를 주장했던 청허휴정(1520~1604년)도 《선교결》에서 작은 그물(小乘敎)로는 새우와 조개를 건지고, 중간 그물(中乘敎)로는 방어와 송어를 건지고, 큰 그물(大乘圓頓敎)로는 고래와 큰 자라를 건지는 것이라고 불교를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불교를 발전해온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중국과 한국에 불교가 전래될 때 대승경전 위주로 전래됨으로 인해 생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경허가 형식적으로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대승 우월적인 교판과 불교관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내용적으로는 깨달음에는 대·소승의 차별이 없다고 보고 있다. 경허는 해인사에서 주창한 결사인 동수정혜동생도솔동성불과계(同修定慧同生兜率同成佛果契)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한 사람에게 전한 것은 부처님이 열반하신 뒤에 한 사람을 내세워 일대교주(一代敎主)를 삼으려 함이니 마치 하늘에 해가 둘이 없고 나라에 두 임금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지 한 사람밖에 득도한 이가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만일 말세에 깨달은 바가 저 영산회상에서 부촉받은 바에 미치지 못한다고 비방한다면 이것은 더욱 옳지 못하다. ……만일 이러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이는 청하노니 지금부터라도 고치기를 바라는 바이다.

부처님이 꽃을 들자 오직 가섭만이 빙그레 웃었다는 염화미소 사건에서 오직 가섭만이 특별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라는 것이다. 경허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보고 염불이나 주력 등 여타 수행법을 모두 인정한다. 경허가 말하는 요의경(了義經)이란 화엄, 법화, 열반 등 대승경전과, 마명, 용수, 무착 등 대승론과, 전등, 종경, 염송 등 어록을 포함하는 것이지만 내용적으로 말하면 지계와 선정에만 머물지 않고 지혜와 깨달음을 강조하는 모든 경전이라고 볼 수 있다. 경허는 궁극의 깨달음을 구하지 않고 다만 손에 염주를 잡고 입으로 경을 외우고 절을 짓고 불상을 조성하는 등 공덕만을 바라는 사람들을 소승으로 파악한다. 이러한 회통의 입장에서 세세생생에 도반이 되어 함께 정혜를 닦아 함께 도솔천에 나되 한 사람이라도 따라오지 못한 이를 이끌어 주자는 약속이 결사운동인 것이다. 정토왕생이 쉽고 도솔왕생은 어렵다는데 왜 도솔왕생을 권하느냐고 어떤 이가 경허에게 물었다. 이때 경허는 모든 경론이 다만 강조하는 바가 다를 뿐이라고 말한다.
경론과 고인의 어록을 두루 살펴보면 특별히 정토와 도솔이 어렵고 쉽다는 것이 아니다. 강조해 찬탄하는 것이니 혹은 도를 이루는 데는 주문을 지니는 것만 한 것이 없다고 하며, 부처를 배우는 데는 경을 외우는 것만 한 것이 없다고 하며 ……만 가지 행을 어지러이 들고 있지만 그 법을 강조해 말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의 법만이 가하고 다른 법은 불가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당시에 교화를 주관하는 사람이 선방편을 써서 중생을 이롭게 할 뿐이다.

경허는 기본적으로 정혜를 닦기를 권하지만 정혜를 닦을 수 없는 사람을 위하여 도솔왕생을 권하고 이미 극락왕생을 발원하고 있는 자는 극락왕생 염불을 권한다. 신·구역을 넘나드는 폭넓은 독서와 중생에 대한 자비심이 경허로 하여금 회통주의자의 길로 나아가게 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소승과 대승을 내용적으로 회통하는 경허의 입장은 성철에게 이어진다. 성철은 《백일법문》에서 “대승경전은 부처님 직설은 아니지만 중도사상이 있으므로 불설이라고 볼 수 있다.”라고 모든 불교를 ‘중도’라는 한 맛으로 정리해 내고 있다. 현응도 《깨달음과 역사》에서 이제까지 나타났던 불교의 흐름들은 “무상 무아 연기 공가중(空假中) 불성 진여 여래장, 마음이 부처, 만물이 부처라는 단계로 약간씩 뉘앙스가 달라지는 용어들로 다양하게 변천되었다”고 판단하고 있다. 각묵은 간화선과 위빠사나는 ‘근본적으로’ 같으며 이 둘은 서로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보며 화두공부 할 때 나타나는 다섯 가지 즉, 자성청정심과 선지식을 신뢰하는 믿음(信), 분발하는 정진(精進), 화두를 챙기는 마음챙김(念), 고요함(定), 그리고 통찰지(慧)는 초기불교의 오근오력(五根五力)과 같은 내용이라고 본다. 특히 간화선의 의정(疑情)은 초기불교와 상좌부불교에서 강조하는 염(念, 마음챙김), 정(定, 선정), 혜(慧, 통찰지)의 세 가지 심리현상이 극대화된 상태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회통의 태도는 다양한 불교가 전래된 현재 한국불교계가 치열하게 정리하고 다듬어 나가야 할 시대적 사명이 되었다.


3. 경허의 계율관
 
경허는 소승과 대승계를 구별하고 대승계를 다시 이계(理戒)와 사계(事戒), 유작계(有作戒)와 무작계(無作戒)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계율에는 대승계와 소승계가 있으며 이(理)와 사(事)가 있으며 지음(有作)과 지음 없는 것(無作)이 있다. 대개 처음 발심하여 원만한 마음으로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계를 받음을 지음 있는 계(作戒)라 한다. ……10가지 무거운 큰 계와 48가지 가벼운 계를 사계(事戒)라 이름하니 곧 범망경(梵網經)이다. 탐욕이 곧 대도(大道)이며 성냄도 또한 그러하니 이와 같은 세가지 법 가운데 일체의 불법이 갖추어져 있어서 모든 법을 널리 설하며 지니고 범함이 둘이 아닌 것을 이름하여 이계(理戒)라 하나니 곧 《제법무행경(諸法無行經)》의 법문이다.

경허가 참선곡이나 중노릇하는 법에서 제자들을 가르칠 때는 계율을 지킬 것을 당부하지만 스스로는 대승의 이계(理戒)와 무작계(無作戒)를 바탕으로 살아갔다고 본다. 경허가 취하고 있는 이 태도는 마음의 의도를 중요시하는 계율관으로 무애행의 근원지라 할 것이다. 하나하나의 계목을 지키는 것을 넘어서 “다만 너의 눈이 바름만 귀하게 여기고 행동거지는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위산 선사의 가르침이나 달마 스님의 ‘관심일법 총섭제행(觀心一法 總攝諸行)’이라는 가르침 등이 모두 대승의 이계(理戒)와 무작계(無作戒)인 것이다. 우두(牛頭) 선사는 “마음에는 다른 마음이 없으므로 탐욕과 음욕을 끊을 게 없기 때문에 선지식의 목우행(牧牛行) 81가지가 있으니 불행(佛行), 범행(梵行)으로부터 살생(殺生) 도둑질(偸盜) 음행(淫行) 음주(飮酒) 등이 있어도 도(道)의 눈이 분명하면 또한 걸릴 바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율장은 아니지만 《유마경》에서 유마 거사는 “탐욕의 행을 보이지만 모든 염착에서 벗어나 있으며 모든 중생에게 분노를 일으키지만 장애가 없으며, 어리석은 행위를 보이지만 지혜로서 그 마음을 조복한다.”라고 말한다. 경허가 자주 인용했던 이러한 경율론의 표현들은 빠알리 율장과 경장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파격적인 가르침이지만 이러한 표현은 마치 아공법유(我空法有)에 집착하는 무리를 위하여 아공법공(我空法空)을 설하게 되는 반야부 경전들이 일체를 부정하거나 일체를 긍정하는 표현들로 나열되고 있는 것과 같은 언어 표현들이다. 경허는 언어가 변화해온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고 다양한 가르침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알아서 스스로는 자유롭게 행동하고 제자들에게는 엄격하게 가르쳤다. 이것이 후대에 계행을 무시하고 막행막식을 저지르는 사람들에게 변명의 빌미가 되기도 했지만 경허를 직접 모시고 가르침을 받은 만공과 한암같은 직계제자들은 경허를 비판하지 않았다.
 

4. 경허가 살던 시대 상황

경허가 살았던 시대는 국제적으로 한반도에서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선진 열강들의 각축이 날로 심해져 국가의 존립이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 있었고 프랑스, 미국, 영국 등 제국주의 국가들의 문호를 개방하라는 압력이 날로 심해갔다. 경허가 18세 때인 1864년부터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은 나라 재정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임진왜란 때 불타서 소실된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그것을 위해 수많은 백성이 세금과 강제노동, 당백전으로 인한 엄청난 인플레이션에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흥선대원군은 프랑스와 미국의 통상강요를 물리치고 쇄국정책을 유지하여 1866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 1876년에는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농민층의 불안과 불만이 팽배해졌고, 정치·사회에 대한 의식이 급성장한 농촌 지식인과 농민들 사이에 사회 변혁의 욕구가 높아져서 1894년에는 인간 평등과 사회 개혁을 주장한 동학혁명이 일어났다. 경허는 1899년 결사문에 그 당시의 시대 상항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내가 지난 기묘년(1879년) 겨울에 계룡산 조사당에서 있으면서 조사활구를 참구하다가 홀연히 뜻을 얻은 곳이 있었다. 뜻이 맞는 이들과 함께 공부할 생각이 있었으나 그때 유행병이 그치지 않았고 마음의 의지 또한 굳세지 못하여 드디어 여유 있게 노닐며 속에만 쌓아두고 어촌과 주막으로 방랑하며 또는 그윽한 시냇물과 깊은 숲을 찾아 쉬며 마음 놓고 잊어버렸다. 그 뒤 소요사태가 잇달아 일어났으며 세상일이 어지러워 몸조차 감출 겨를이 없거니 어찌 다른 데 생각이 미치겠는가. 그럭저럭 20여 년이 흘렀다.

동학혁명이 일어난 1894년 일본인 대정관(大庭寬)이 한국에서 조사수집 했다는 조세상황을 보면 (1)군청 비용으로 지방의 풍헌(면장,이장해당직책)인 말단소사들이 수령 명령으로 징수하는 세의 종류가 24종 (2)감영(監營), 병영의 비용을 위해 지방관(道司)의 명령으로 그들이 징수하는 세의 종류가 또한 24종 (3)중앙관(中央官)의 비용으로 특별한 관사(官史)를 파견해 직접 징수하는 세가 3종 등, 중앙에서 감사(監司)에게 감사가 다시 지방관사를 시켜 징수하는 세금의 종류가 총 52종으로 되어 있다. 
불교 내부적으로는 조선왕조의 계속적인 억불정책으로 사회 경제적인 토대를 완전히 침탈당하고 교단은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 위축된 상태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승려들은 관가의 잡역을 맡아서 하였으며 성내의 출입이 금지되었고 가장 천한 신분으로 대우받았다. 이렇게 계속되어 오던 중 1895년 일본인 승려의 주선으로 도성 출입금지가 해제되었다. 총독부가 종교를 통치하기 위한 수단으로 1911년에 공포한 사찰령은 승려의 독신 조항이 삽입되어 있었다. 그러나 1929년경에는 대부분의 본사에서 사찰령의 독신 조항을 개정하여 약 80% 정도가 독신 조항을 삭제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일제하 불교에서 비구승의 95%가 결혼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계율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는 상황은 1954년 불교정화운동이 일어나기까지 지속되었다.
 

5. 경허담론의 쟁점

1)무애행과 깨달음
경허에 대한 상반된 평가가 나오는 부분은 경허의 무애행과 깨달음 그리고 경허의 북행에 대해서다. 이 밖에도 경허의 출생연도와 경허의 법맥과 법제자 등에 대한 이견도 있지만 앞의 문제에 비하면 소소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무애행의 이유에 대해서 경허의 대승계율관 때문인 것으로 보기도 하고 조선 말 조국의 현실에 대한 절망에서 비롯된 몸부림이자 위정자들과 불교계의 지도자들에게 보내는 각성의 촉구로 보기도 하며 일본불교 영향, 세속화 심화, 막행막식이 반야에 무방하다는 수행론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일지는 경허의 무애행이 마땅히 가야 할 길(道)과 길 아닌 길(非道)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대승보살행으로 보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비도는 단순히 도의 대칭이 아니며 비윤리가 아니다. 청정과 오염, 선과 악, 유와 무의 경계를 넘어서 불성이 현재한다는 것을 입증해 보이는 보살의 행위다. ……유마힐의 설법처럼 비도는 일탈이자 역행이며 파괴를 거친 새로운 가치의 생성이다.

여기에 더하여 나는 경허의 무애행은 그에게 스승이 없었던 것과 관계가 있다고 본다. 마치 붓다가 그랬던 것처럼 경허를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고 깨달음을 증명해 줄 스승이 없었다. 붓다는 스승 없이 깨달았기에 여러 가지 번민을 하는 모습이 보인다. 첫째는 설법하기를 꺼리는 모습이다. 범천의 청원을 받고 자신이 중생들의 근기를 살펴보고 나서야 설법하기로 마음을 돌린다. 이것이 신화적인 표현이라 하더라도 홀로 깨달은 자의 고뇌를 엿볼 수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붓다는 정각을 이루고 나서도 의지할 곳을 찾는다. 경에서 붓다는 “아무도 존중할 사람이 없고 의지할 사람이 없이 머문다는 것은 괴로움이다. 참으로 나는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여 머물러야 하는가?”라며 의지할 곳을 찾는다. 붓다는 자신이 의지할 곳을 찾아보았지만 자신이 구족한 계와 삼매와 통찰지와 해탈을 자신보다 더 잘 구족한 자를 그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다. 그래서 마침내 이렇게 결론짓는다.

“참으로 나는 내가 바르게 깨달은 바로 이 법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여 머물리라.”

붓다와 같은 분도 깨달음을 얻은 뒤에 설법을 망설이고 의지할 대상을 찾았다는 것은 깨달으면 어떤 망설임이나 고민도 없어야 한다는 우리의 상식을 뒤흔든다. 이러한 상황은 경허에게도 나타났을 것으로 본다. 그리하여 동학사에서 깨닫고 나서 장소를 천장암으로 옮기고 1년 반을 더 치열하게 보림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경허에게 천장암에서 보림 후 오도송을 읊은 것이 공부의 끝이었을까? 나는 경허의 무애행이 끊임없이 자기 자신의 깨달음을 점검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경허 자신은 그 누구에게도 물을 수 없었다. 오직 자기 자신에게 물을 수 있을 뿐이다. 그가 자신에게 묻는 방법은 자신을 막다른 상황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온갖 비난과 폭력이 그에게 떨어질 줄 알면서 그는 고난의 길을 자초해 간 것이다. 스스로 감당해 내어야 하는 그 길의 고독함과 험난함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경허는 제자들에게 “대저 무상함을 경계하고 일대사를 깨쳐 밝히고자 한다면 급히 스승을 찾지 않으면 장차 어찌 바른길을 얻겠는가?”라고 말하며 급히 스승을 찾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경허는 마정령에서 만난 나무꾼들에게 “얘들아 내가 누군지 아느냐?” 하고 묻고 아이들이 모른다고 대답하자 경허는 다시 “그러면 나를 보느냐?”라고 묻는다. 아이들은 본다고 대답하자 “나를 모르면서 어떻게 나를 보느냐?”라고 말하고는 “너희가 만일 이 막대기로 나를 치면 과자와 돈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아이들이 경허를 몇 번이나 때렸지만 경허는 그때마다 “맞지 않았다”고 대답한다. 분명히 때렸는데 맞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과잣값을 주지 않으려는 수작이라고 불평하자 경허는 “만일 나를 친다면 부처도 치고 조사도 치고 삼세제불과 역대 조사와 내지 천하 노화상을 한 방망이로 치게 되리라.”라고 대답하고는 가던 길을 걸어갔다. 이와 같은 경허의 법문은 나무꾼 아이들에게 불법을 가르쳐주기 위한 법문이라기보다는 자기를 시험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경허가 어머니 앞에서 발가벗는 무애행과, 송광사에서 법문할 때 법상에서 돼지 다리와 술통을 꺼내놓고 데워 오라고 한 일도 듣는 사람들을 위한 법문이라기보다는 경허 스스로가 자신을 막다른 곳에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경허가 궁극의 깨달음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행동이 무애행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경허가 궁극의 깨달음을 얻지 못했기에 경허의 행동이 무애행이 아니라는 주장은 경허와 진응 화상과의 대화에서 비롯된다. 이때 진응 화상은 경허에게 “해인사의 인파(印波) 화상 같은 이는 일평생에 색(色)을 멀리하면서 동지섣달 설한풍에도 학인들을 마루에 앉히고 글을 가르쳤다고 하는데, 화상은 그만한 것을 제어치 못하니 어찌 후생의 사범(師範)이 되기를 기약하겠습니까?”라고 힐난하듯이 묻는다. 그러자 경허는 얼굴에 홍조(紅潮)를 띄우고 말하기를 “‘돈오는 비록 부처와 동일하지만 다생의 습기는 깊어서, 바람은 고요해도 파도는 용솟음치고, 이치는 분명하지만 생각은 여전히 침노한다.’라는 글도 있지 않소. 나야말로 그와 같소.”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한암의 《경허집》이나 선학원판 《경허집》 그리고 수덕사의 《경허법어》에는 나타나지 않는 이야기로 1938년에 김태흡이 쓴 〈인간 경허〉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같은 해 12월에 춘원 이광수는 김태흡의 이 대목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경허(鏡虛)가 얼굴이 붉어지며 ‘돈정난동불(頓情難同佛) 다생습기심(多生習氣深)’이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그럴 것입니다. 사람의 육체를 쓰고 나서 마음으로 부처님 되기를 원하고 바라지만 오래 가졌든 습생(習生)은 참 끊어 버리기가 어려운 것인 줄 알아요.

이러한 대화가 사실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것은 김태흡의 글 〈인간 경허〉를 어디까지 신뢰하느냐의 문제이다. 김태흡의 글에는 기존에 볼 수 없는 이야기들이 다수 실려 있다. 경허의 탄생연도가 1857년(철종 8년)이며 고향이 전주 자동리(子東里)가 아니라 우동리(旴東里)라고 나오고 송두옥은 슬하에 경허를 포함하여 4남매를 두었으며 경허가 청계사로 출가한 시기도 9세가 아니라 14세 때라고 한다. 경허의 부친 송두옥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려고 무리하게 세금을 거두어들일 때 십만 냥을 세금으로 수탈당하여 화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경허가 송광사 천자암에 머물 때 경허와 제자 강 처사의 믿기 어려운 이야기도 나오는 등 김태흡의 글에는 기존의 경허집과는 다른 부분이 많다.
진응 화상이 경허에게 물었을 때 경허가 자신의 생각을 직접 말하지 않고 보조 스님의 말을 인용하여 대답하고 있는 것은 묻는 사람이 요구하는 대답 혹은 묻는 이의 의도에 부응하기 위한 대답일 수도 있다. 그것은 경허가 대화의 말미에 동산 대사 등의 예를 들며 “동학사에서 개심(開心)이 된 이후로 아직까지 보임하되 무흠무여(無欠無餘)의 상태이니까 이대로만 가면 선종(善終)하리라고 생각하오”라고 덧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경허의 다생습기심(多生習氣深)이라는 대답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다른 이유는 선사의 언어와 경전의 언어가 많이 다르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열반을 탐진치의 소멸이라 표현하고 아라한의 오도송은 한결같이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梵行)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표현된다. 그러나 선사의 오도송은 이와 달리 다양하게 표현되고 부처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도 ‘불식(不識)’ ‘마른 똥막대기’나 ‘뜰앞의 잣나무’ 등으로 다양하다. 그래서 ‘경전의 언어’와 ‘선사의 언어’를 비교하는 것은 조심스러워야 한다. 경허에게서는 많은 부분에서 자신을 낮추고 겸양을 보이는 표현이 등장한다.
〈취은화상행장〉에서도 “나는 쓸모없는 존재로서 세상에 쓸데가 없고, 그리고 부처님 교화에도 폐단을 끼쳐 백 가지 잘못을 함께 일으켜서 도덕(道德)으로는 구제할 수 없는데, 문장으로 또 어떻게 구제할 수 있으리오?”라고 말하고 〈서룡화상 행장〉에서도 “내 나이 55세로서 털은 성글고 얼굴은 주름졌으나 저 불법에 개명(開明)한 바 없고 남에게나 나에게 이롭게 함이 없으니 탄식한들 무엇하리오.”라고 말한다. 이러한 경허의 표현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경허는 쓸모없는 존재이고 불법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선사의 언어는 그 표현에만 의존하지 말고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1993년 지하철을 타고 있는 나에게 어느 전도사가 성철 스님의 열반송이 적힌 신문을 들이대며 “거 보시오. 성철 스님도 죽을 때는 바른말을 하는군요. 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죄가 수미산만 하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산 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졌다고 하니 불교라는 종교 믿어봐야 이렇게 허무한 것이요. 이제라도 회개하고 교회 나오시오.”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성철 스님은 다른 법문에서 “사탄이여! 어서 오십시오, 나는 당신을 존경하며 예배합니다.”라는 등의 말을 하기도 하였다. 불교를 제대로 이해하는 불자들은 성철 스님의 언어를 표현 그 자체로 받아들여 성철 스님을 비판하지 않는다.
더구나 경허의 무애행은 습기로만 볼 수 없는 장면들이 너무 많다. 악취가 진동하고 코가 떨어지고 얼굴이 뭉개진 문둥병 걸린 여자와 어떻게 열흘 이상을 동거할 수 있는가? 아무리 술과 고기가 먹고 싶어도 어떻게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법당 안에서 법상에 올라가서 술과 돼지 다리를 꺼내놓고 그것들을 데워 오라고 하는가? 아낙네를 희롱한 뒤에 몰매를 맞을 때 어떻게 반항 한번 안 하고 죽기 직전까지 맞을 수 있는가? 나무꾼들에게 자신을 때리라고 하고서는 자신을 때린 대가로 그들에게 과잣값을 주는 이유는 무엇인가? 경허는 1904년 조실 자리와 승복을 벗어 던지고 함경도로 떠나기 전에 천장사에 들러 만공에게 전법게를 주고 떠났다. 자신의 깨달음에 확신이 없었다면 어떻게 만공에게 전법게를 주고 떠날 수 있었을까? 그러므로 선사의 언어를 곧이곧대로만 인용한다면 이러한 모순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2)말년의 북행(北行)
경허의 무애행의 끝은 북행이다. 왜 경허는 선원의 조실을 마다하고 이름을 박난주(朴蘭洲)로 바꾸고 스스로 속인이 되어 삼수갑산으로 향한 것일까? 그의 북행에 대하여 수수입전(垂手入廛), 이류중행(異類中行), 화광동진(和光同塵), 과거에 지은 업을 갚는다는 상채(償債), 자리 비워주기 등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경허의 북행을 입전수수와 이류중행이라고 보는 것은 그의 불교관을 따른 것이다. 경허가 설명한 심우가와 심우송에서 수행자의 마지막은 항상 수수입전(垂手入廛)과 이류중사(異類中事)로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광동진(和光同塵)도 한암에게 주는 전별사에서 경허가 언급한 말이다.
바랑을 지고 저자에 놀며, 요령을 흔들고 마을에 들어가는 것이 실로 일 마친 사람의 경계여라.
달리 동물류(動物類) 가운데 터럭을 쓰고 겸하여 뿔을 이었으니, 등탑(燈榻)이 말하기를, 추추하더라. 불조(佛祖) 밖의 이 몸이여, 긴 세월 저자 거리로 싸다니네.

나는 천성이 인간 세상에 섞여 살기를 좋아하고(余姓好和光同塵) 겸하여 꼬리를 진흙 가운데 끌고 다니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1903년 가을 〈범어사에서 해인사로 가는 길에서 부른 노래(自梵魚寺向海印寺途中口號)〉에도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어촌과 술집이 있는 저자에 들어가 지낼 것을 암시하는 시 한 수를 짓는다.

아는 것 없이 이름만 높아서 세상의 액난을 만나니
어느 곳에 몸을 숨길지 알 수 없구나
어촌과 술집엔들 숨을 곳이 없으랴마는
다만 헛된 이름 날로 새로워지는 것이 두렵도다

이렇듯 경허의 북행은 그가 젊은 날부터 품어 왔던 사상의 실천이라고 보아야 한다. 천장암에서 오도가를 부를 때 스승이 없음을 한탄하고 의발을 전해줄 제자가 없음을 한탄하던 경허는 위로는 용암혜언에게 법을 잇는다고 선언하고 아래로는 혜월, 만공 등에게 법을 전한다. 특히 북행 직전에 마지막으로 만공에게 전법게를 내린 후 북행에 오르는 것을 보면 그의 북행은 예정된 수순을 밟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그가 세인들의 비난이 두렵고 자신의 삶이 부끄러웠다면 천장암에 들러 만공에게 법을 전하는 것으로 스승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일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북행 과정을 보면 더욱 그렇다. 가을에 광릉 봉선사에 나타나 월초거연(月初巨淵)을 만나고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에서는 당시 월정사 방장 유인명(柳寅明)의 부탁으로 3개월간 경허 특유의 기발한 《화엄경》 법회를 가진다. 이후 금강산을 관람하고 〈금강산유산가(金剛山遊山歌)〉 등 175편이 넘는 시를 짓고 유유자적하게 금강산을 유람한다. 1906년 봄에는 안변 석왕사(釋王寺) 나한개금불사의 증명을 하고 〈석왕사 영월루에 부쳐(題釋王寺映月樓)〉라는 시를 짓는다. 경허의 북행 과정은 전혀 서두름이 없이 느긋하였고 세간의 비난을 피해서 숨어들어 가는 자의 모습이 전혀 없었다. 이후 평안북도 강계, 삼수, 갑산 등지를 유행할 때도 은둔자의 모습이 아니라 거침없는 경허의 성격 그대로 살았다. 스스로 이름을 박난주(朴蘭洲)라 하고 머리를 기르고 선비의 갓을 쓰고 변신한 뒤, 서당의 훈장을 하며 김탁(金鐸), 김수장(金水長) 등과 술을 마시기도 하고 시를 지으며 세간의 풍진(風塵) 속에 자신을 묻어버린다. 강계에 사는 김탁이 경허를 발견한 것은 아낙네를 희롱했다고 마을 청년들에게 매를 맞고 있을 때였는데 이것은 경허의 무애행이 여기서도 이어지고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3)만공과 한암의 평가
경허의 법제자 만공은 사형 수월이 전해온 경허의 입적 소식을 듣고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선과 악이 호랑이와 부처보다 더한 그분이 바로 경허선사이시다. 열반하셨으니 어디로 가셨는가? 술에 취해 꽃처럼 붉은 얼굴로 누워계시네(善惡過虎佛, 是鏡虛禪師, 遷化向甚處, 酒醉花面臥)

한암도 〈경허화상 행장〉에서 “가위 선도저 악도저(可謂 善到底 惡到底, 선도 끝까지 이르렀고 악도 끝까지 이르렀다)”고 하여 두 제자가 같이 선악으로 경허의 경계를 표현했다. 그런데 윤창화는 이 선악을 “선(善)이란 깨달은 경지가 특별했음을 말하는 것이고, 악(惡)이란 바로 여색과 음주식육 등을 즐겨 했던 점을 가리킨다.”라고 번역하여 마치 만공과 한암이 경허의 무애행을 비판한 것처럼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선악이라는 것은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살활자재(殺活自在)하고, 입파무애(立破無碍)하는 경허의 선지(禪旨)를 말하는 것이다. 중생의 입장에서는 호랑이는 사람을 죽이니 나쁘고 부처는 사람을 살리니 좋은 것이다. 그러나 부처는 선이요, 호랑이는 악이라는 관점이 과연 경허와 만공의 입장일까? 선악 시비가 끊어진 그 자리에서 오히려 경허는 선도 철저하고 악에도 철저했다. 이것은 경허의 교화 방편이 살활자재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후대의 학인들이 화상의 법과 교화(法化)를 배우는 것은 옳으나, 화상의 행리를 배우는 것은 옳지 못하다. 사람들이 믿을 수는 있으나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然, 後之學者, 學和尙之法化則可, 學和尙之行履則不可, 人信而不解也)”라는 한암의 말도 경허의 무애행을 비난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곤란하다.
한암은 이 말을 하기 전에 ‘홍곡이 아니면 어찌 홍곡의 뜻을 알 수 있겠는가’라고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한암은 다시 왜 그런 말을 하는지에 대하여 다시 설명한다.

이는 다만 법을 간택하는 눈은 갖추지 못하고 먼저 그 행리의 걸림 없는 것만 본받는 자를 꾸짖음이며, 또한 유위상견(有爲相見)에 집착하여 마음 근원을 밝게 사무치지 못하는 자를 꾸짖음이다. 만약 법을 간택할 수 있는 바른 눈을 갖추어서 마음 근원을 밝게 사무친즉, 행리가 자연히 참되어서 행주좌와에 항상 청정할 것이니 어찌 겉모습에 현혹되어 미워하고 사랑하며 네다 내다 하는 견해를 일으키겠는가.

한암이 강조하는 바는 다만 법을 간택하는 눈은 갖추지 못하고 먼저 그 행리의 걸림 없는 것만 본받는 자를 꾸짖음이며, 또한 보이는 모양에 집착하여 숨은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는 자를 꾸짖는 것이지 경허의 무애행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바른 눈을 갖추어서 마음 근원을 밝게 사무친즉, 행리가 자연히 참되어서 행주좌와에 항상 청정할 것이다’라는 해석이 어찌 경허의 무애행 비판으로 읽히는가? 이 대목은 오히려 경허의 행위가 막행막식의 파계행이 아니고 걸림 없는 무애행임을 증거하는 문장이다. 이것을 마치 한암이 경허의 행동을 비판한 것처럼 해석하는 것은 한암의 의중을 거스르는 것이다.


6. 경허의 현재적 의미

한국 근대 선불교의 찬연한 불꽃을 지폈던 경허성우(鏡虛惺牛). 탁월한 선승으로서 일반에 널리 알려졌으면서도 ‘마종’ ‘파계승’ ‘한국의 달마’ ‘선불교의 중흥조’ 등 상반된 평가를 받아왔다. 이와 같은 상반된 평가는 역설적으로 경허의 생명력이 되고 있다. 경허는 세상에 67년을 머물다 갔지만 몇백 년의 이야기를 남기고 갔다. 누구든 경허를 말하지만 누구도 경허를 알지 못하여 경허는 존재 그 자체로 한국불교의 화두가 되었다. 그를 대하면 까마득하고 암담하면서도 경허처럼 흥미롭고 쾌활하고 매력적인 인물이 또 어디에 있을 것인가? 목숨을 건 치열한 수행 끝에 부처님처럼 스승 없이 깨달음을 얻은 선사이면서, 자신의 고독한 내면과 아름다운 자연풍경을 읊는 시인이면서, 다양한 불교를 회통하여 다양한 수행법을 장려한 사상가이다. 또한 기발한 무애행을 펼치면서도 한글 법문곡과 참선곡 등을 지어 불교 대중화에 앞장섰던 보살이면서, 끝내 승복을 벗고 시골 서당의 훈장으로 돌아간 이름없는 훈장이면서, 수월, 혜월, 만공, 한암 등을 길러내어 한국불교를 되살린 중흥조 경허. 한국불교사에서 결코 지워질 수 없는 경허라는 이름은 세월이 가면 갈수록 대한민국뿐 아니라 세계 속에서 빛나리라 생각한다. 경허가 현대인들에게 주는 가치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가. 유교와 도교와 불교의 신구역을 섭렵하는 광범위한 독서를 바탕으로 다양함 속에서 공통점을 발견하고 소승과 대승을 회통하는 경허의 불교관은 세계의 모든 불교가 한반도에 들어와 갈등과 혼란한 상황에서 회통과 융합의 모범을 보여준다. 현재 초기불교가 한국에 들어와 대승불교와 마찰을 이루고 있는 상황에서 불교역사를 통한 언어의 변천과 사상의 흐름이 일맥상통하다는 것을 정리해 내는 작업이 요구된다. 경전뿐만이 아니라 승려의 생활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초기계율과 대승계율의 심각한 모순과 대립을 해소하는 것도 필요하다.  
나. 세세생생에 도반이 되어 함께 정혜를 닦아 함께 도솔천에 나되 필경에는 함께 정각을 이루어 따라오지 못한 이를 이끌어 주기로 약속하는 결사운동은 지금 되살려야 하는 자비정신이며 공동체적 삶의 모델이다. 경허의 결사는 되도록 함께 모여 생활하기를 권고하지만 여건에 따라서는 멀리 떨어져 있어도 얼마든지 결사가 가능한 시스템이다. 더군다나 다른 공동체들이 현재의 삶에 초점이 맞추어 있다면 경허의 결사는 현재는 물론 내세의 문제까지 관련되어 있으므로 사부대중이 참여할 수 있는 결사운동이다.
다. 홀로 태어나 홀로 죽어가야 하는 고독한 인간이면서 경허는 깨달음도 혼자 감당해야 했다. 그런 경허의 치열한 자기 점검, 여유와 웃음, 고난을 자초하는 무애행의 이야기는 현대인들에 친근하게 다가가서 삶의 여유를 갖게 할 것이다. 특히 비불교인들과 무종교인들도 경허의 삶과 이야기에 많은 흥미와 관심을 보이는 것은 경허가 종교적인 권위와 틀을 벗어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보왕삼매론〉에 이르기를 “수행에 마(魔)가 없기를 바라지 마라. 수행에 마가 없으면 서원이 견고하지 못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마구니를 법의 도반으로 삼으라 하였느니라.”라는 말이 있듯이 경허는 그 무엇도 겁내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살아갔다. 진리를 향해 모든 것을 바치는 치열한 수행자로서 살았다.
라. 자유롭고 거침없이 살면서 존경과 비판을 한몸에 받다가 말년에 모든 것을 놓아버린 경허의 무소유는 현대인들에게 아름다운 마무리가 무엇이며 웰다잉(well-dying)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붓다의 제자 중에 앙굴리말라와 목갈라나가 최후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아무런 저항 없이 자신들의 죽음을 수용하였듯이 경허는 몰매를 맞거나 누명을 쓰거나 야유를 받거나 비난을 받을 때,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고 변명도 반박도 하지 않았다.


7. 나가는 말

경허는 잿밥에만 골몰하며 목탁을 두드리던 구한말 불교계에 선의 정신과 선종 교단으로서 한국불교가 지녀야 할 전통의 복원을 이룬 인물이다. 경허는 형식상으로는 전통적인 견해를 따라서 대승과 소승을 구별하는 불교관을 가졌지만 내용적으로는 대승과 소승을 회통하는 불교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회통의 입장에서 경허는 정혜를 닦고 함께 도솔천에 나기를 발원하는 결사운동을 펼쳤다. 경허는 이계(理戒)와 사계(事戒)로 나누어 제자들을 가르칠 때는 사계의 입장에서 계율 하나하나를 지키라고 가르쳤고 깨달음을 얻고 나서 스스로는 마음의 의도를 중요시하는 이계와 무작계(無作戒)의 입장에서 살아갔다. 한암이 “후대의 학인들이 화상의 법과 교화(法化)를 배우는 것은 옳으나, 화상의 행리를 배우는 것은 옳지 못하다.”라고 한 것은 무애행의 비판이 아니라 경허를 흉내를 내려는 후학들을 향한 경책이었다. 선과 악이 호랑이와 부처보다 더하다는 만공의 뜻은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살활자재(殺活自在)하고, 입파무애(立破無碍)하는 경허의 선지(禪旨)를 말한 것이다. 누구보다도 경허를 가까이 오래도록 모신 수월, 혜월, 만공은 경허의 무애행을 비판하지 않았다. 오히려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스승의 경지를 엿보고는 더욱 존경하였다. 경허는 붓다처럼 스승 없이 홀로 깨달았기 때문에 인가해줄 스승이 없었기에 오직 스스로에게서 인가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스스로를 치열하게 점검하였다. 그 치열한 자기점검의 행위들이 경허의 무애행으로 나타났다고 본다. 경허의 북행은 그의 불교관에 따라 예정된 실천이었으며 우리는 그의 북행에서 떠나야 할 때를 알고 가는 이의 아름다운 뒷모습을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불교 교단의 비구승의 95%가 결혼을 할 수밖에 없었던 특수한 시대 상황과 그 후 불교정화의 과정에서 무자격자가 출가하는 등의 상황을 무시하고 오늘날 승려들의 막행막식을 경허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은 너무나 안일한 태도이다.

필자는 경허가 오래 머물렀던 천장사의 주지 소임을 살게 되면서 경허 바로 알기를 위하여 세미나를 해마다 개최하고 경허기념관을 짓고 경허의 이름을 딴 도로명 ‘경허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경허는 서산시에서 자랑하는 ‘서산의 인물’에도 들어가 있지 못하고 경허의 이름을 딴 도로명 ‘경허로’도 갖지 못하는 등 경허가 가장 오래 머무르고 가장 사랑했던 지역에서조차도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후학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럽고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 가득하다. 경허가 머물던 곳에 소임을 산다고 해서 경허를 무조건 찬탄하고 칭송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소문의 안갯속에 감추어져 있는 경허를 제대로 보고 제대로 이해하고자 노력할 뿐이다. 고백하건대 예전에 나도 《경허집》을 한 번도 읽지 않은 상태에서 세간의 소문만을 믿고 경허를 말하고 비판한 적이 있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경허집》을 거듭 읽고 경허를 알아갈수록 경허에 대한 존경심이 가슴에서 우러나왔다. 내가 보는 경허는 언제 어디서나 솔직했다. 어떤 길이든 알고 갔다. 그리고 어떤 과보든 당당하게 감당했다. 그것이 내가 경허를 좋아하고 존경하면서도 경허의 길이 아득한 이유다. ■

 


허정
대한불교 조계종 천장사 주지. 1987년 수덕사에서 사미계 수계. 1988년 봉암사 하안거 이래 제방선원 20안거. 2005년 실상사 화엄학림 졸업. 2009년 인도 뿌네대학교 빠알리어학과 석사. 대한불교 조계종 불학연구소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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