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 경허를 다시 읽는다

1. 경허와의 만남

2년 전 《경허집》을 자세히 읽을 기회가 있었다. 경허 선사의 법맥과 가풍이 이어지는 수덕사에서 《경허집》을 새롭게 번역, 출판할 계획이라고 하였다. 여기에 각주를 덧붙이고, 현대문으로 윤문하는 일에 동참하게 되었다.
《경허집》에는 선사의 생애와 수행, 고민과 사상이 올곧게 담겨 있다. 그런데 박학한 재량으로 이를 읽어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조선 후기 이후 근대 초기에 이르는 불교사의 몇몇 단편에만 제한된 내 지식으로는 참으로 주제넘은 일이었다. 다행히 초벌 번역이 워낙 꼼꼼하고, 또 동참하신 분들의 밝은 혜안이 있어 그저 한 귀퉁이에서 서기 노릇을 할 수 있었다. 이렇게 꼬박 1년간을 경허 선사와 만났고, 선사의 생각과 삶의 면모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조만간 수덕사에서 새롭게 탐색한 자료를 추가하여 출판할 예정이다.
《경허집》을 읽으면서 가장 궁금했던 것이 선사는 왜 떠났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19세기 말 사그라지는 수행 가풍에 불씨를 붙이고 활활 타오르게 한 실천수행자가 어느 날 갑자기 삼수갑산으로 사라져 버렸다. 최근 어떤 이는 음주식육 등의 막행막식에 대한 타인의 비방이 두려워 은둔하였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경허집》을 꼼꼼히 읽어 보면 선사의 거침없는 무애행은 애당초 남의 눈 따위를 신경 쓰지 않았음을 금방 알 수 있다. 승속을 막론하고 도처를 뛰어넘는 삶을 펼쳤던 선사가 남들의 말을 피해 산간벽지로 숨었다는 해석은 이해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글을 쓰는 지금도 이 의문은 여전히 그대로이다. 여러 연구자의 말처럼 구한말 격동기의 정세와 불교계의 상황 등에서 답을 찾아야 하겠지만 심증일 뿐, 여전히 실마리는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경허의 불교사적 위상을 쓰겠다고 승낙하였다. 어쩌면 경허를 이해하는 데 내가 가진 의문은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선사의 평생에 걸친 수행과 구도, 교육과 포교의 궤적에서 삼수갑산행은 가지 끝 나뭇잎에 불과하지 않을까? 메마른 불교의 싹을 틔우고 결사를 통해 선풍의 꽃을 활짝 피운 후, 선사는 할 일을 마친 마른 잎으로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사라진 듯하다. 그래서 이 글은 선사가 꽃피운 불교가 근대사회에서 어떠한 위상과 가치를 지니는가에만 주목하려고 한다.


2. 근대불교와 경허

경허에 관한 연구논문은 30여 편 정도이다. 이들에서 공통으로 등장하는 위상이 바로 ‘근대 선불교의 중흥조’이다. 일찍이 권상로의 평가 이래 대부분 공통된 견해이고, 보다 구체적으로 ‘보조선의 근대적 계승자’라고도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드는 의문은 ‘근대’라는 개념이 무엇을 말하는가이다. 경허가 근대 시기에 활동했으므로 ‘근대선’ ‘근대적’이라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경허불교가 중세와는 다른 ‘근대적’이라는 말인지 명확하지 않다. 아마도 별다른 개념 규정 없이 근대 시기에 불교를 부흥시켰기 때문에 ‘근대’라는 용어를 사용한 듯하다.
근대불교라는 개념에는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근대 시기의 불교’와 중세불교와는 다른 ‘근대적 불교’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근대불교는 근대 시기에 진행된 불교가 아니라 이전 시기와는 다른 ‘근대성’을 담보해야 한다고 한다. 역사학에서 시대 구분에 관한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다. 고대와 중세, 그리고 근대를 구분 짓는 일은 역사적 현상 혹은 상황이 이전 시기와 확연히 구분될 때 가능하다. 그렇다면 경허불교는 과연 근대불교일까? 다른 말로 하면 경허불교는 중세불교와는 차별화된 근대성을 지니고 있는가? 이 글에서 풀어보고자 하는 과제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경허불교는 근대불교적 지향점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측면, ①결사의 근대성, ②한글 불교가사의 근대성 ③법맥 계승과 근대불교 등을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이를 통해 경허불교의 근대지향적 성격, 나아가 그의 불교사적 위상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 결사의 근대성
선학들은 근대불교의 시작을 흔히 개항을 전후한 시기라고 한다. 개항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문명과 문화가 전파되었다. 불교계도 이에 따라 낡은 틀을 벗고 새 시대의 흐름을 수용하기 시작했다는 평가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해는 정밀한 연구와 검토를 통해 이루어진 결론이 아니라, 역사학 등의 일반적인 시대구분론을 답습한 결과이다. 사실 개항 이후의 불교에 대해 우리가 아는 사실은 별로 없다. 일본불교가 상륙하였고, 도성 출입 금지가 해금되었으며, 이동인과 무불 등의 개화승이 근대화에 헌신하였다는 사실 정도이다. 근대 초기 사찰의 모습과 신앙, 그리고 승가의 활동 등 많은 것이 미답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경허에 관해서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흔히 경허를 근대 선의 중흥조, 나아가 한국 선의 중흥조라고 하지만, 그에 관한 연구가 일천한 현실에서, 그것도 근거가 불분명한 구전과 설화적 내용에 의지하는 글이 적지 않다. 이러한 현실에서 심재룡은 경허를 근대 한국불교의 슈퍼스타이지만 극보수적 전통주의자, 또는 전통 묵수적 불교 유형이라고 평가하였다. 즉 경허불교의 본모습은 철저한 수행 중심의 전통적 선불교라는 설명이다.
이는 경허가 지닌 다양한 모습의 일부분만으로 재단한 결과이다. 보조의 정혜결사를 잇고, 철저한 수행을 강조하였다는 사실을 극보수적 전통주의라고 하였다. 계정혜 삼학을 닦고 깨달음을 위한 노력은 출가자의 본질이다. 불교의 본연이기도 하다. 어두운 현실에서 결사를 일으켜 참선수행의 풍토를 정립하려는 노력은 전통으로의 복귀가 아니라 새로운 불교의 방향을 제시한 선구적 제창이다.
경허는 1898년부터 1903년까지 모두 7건의 결사 관련 기록을 남겼다.

①해인사 수선사의 방함록(海印寺修禪社芳啣引) / 1899. 4.
②합천군 가야산 해인사의 수선사 창건기(陜川郡伽倻山海印寺修禪社創建記) / 1899. 9.
③정혜(定慧)를 함께 닦고 도솔천에 태어나 함께 불과를 이루려는 모임의 취지문(結同修定慧同生兜率同成佛果稧社文) / 1899. 11.
④화엄사 상원암에 선방을 다시 개설하고 청규를 정하는 글(華嚴寺上院庵復設禪室定完規文) / 1900. 12.
⑤범어사 계명암 수선사의 방함 청규(梵魚寺鷄鳴庵修禪社芳啣淸規) / 1902. 10.
⑥범어사에 수선사를 개설하는 취지문(梵魚寺設禪社契誼序) / 1902년 말~1903년 초.
⑦동래군 금정산 범어사 계명암의 수선사 창건기(東萊郡金井山梵魚寺鷄鳴庵創設禪社記) / 1903. 4월.

해인사를 시작으로 불과 5년 만에 범어사, 화엄사, 다시 범어사에 결사를 일으켰다. 결사는 경허를 이해하는 핵심이므로 일찍부터 연구자들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았다. 보조를 계승하면서 정토신앙 대신 미륵신앙을 독창적으로 제안하였고 선의 중흥을 통해 불교의 근본으로 돌아가려 하였다. 결사의 수행 방편으로 선정쌍수(禪淨雙修)를 겸행하였고, 그의 간화선 수행은 생사에 대한 강렬한 문제의식이 중심에 있었다고 한다.
결사를 보는 다양한 시각과 관점이 존재하지만 여기서 주목하는 부분은 경허가 지닌 불교대중화에 대한 의지이다. 정혜쌍수에 입각한 치열한 수행을 강조하면서도 정토신앙으로서 미륵신앙을 중요시하였다.

이 동맹의 약속은 무엇인가? 함께 정혜를 닦아서 함께 도솔천에 태어나 세세생생 함께 도반이 되어 마침내 함께 정각을 이루는 것이다. 만일 도력을 먼저 이루는 자가 있다면 그 아직 이르지 못한 자를 인도하기를 서원하여 동맹한 바를 어기지 말지어다. 만약 견해가 같고 행실이 같은 사람이 있으면, 승속과 남녀노소, 현우귀천을 따지지 말고, 또 친소와 이합과 원근과 선후를 따지지 말고 모두 참여해 들어오길 허락할지어다. 이러한 까닭은 사람 사람마다 모두 무량한 보배창고가 있는 것이 부처와 다르지 않으나, 다만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안목을 틔워줄 좋은 벗을 만나지 못해 삼계에 기어 다니고 사생에 골몰하기 때문이다. ……정토와 도솔천은 그 수행하는 사람의 잠깐의 뜻과 원력을 따라 다름이 있을 뿐이니, 어찌 도솔천에 상생하려는 자는 미타여래를 친견하기를 원하지 않고 정토에 왕생하려는 자는 미륵존불을 받들어 모시기를 원치 않으리오. 비유컨대 저 백옥과 황금이 각각 참된 보물이 되고, 봄의 난초와 가을의 국화가 모두 맑은 향을 전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바라노니 우열과 난이로 옳고 그름과 남과 나의 견해를 다투어 일으키지 말지어다. ……지금 이 모임 안에 먼저 들어온 자는 이 상생의 행실과 원력이 있어야 하며 추후에 참여하는 자도 그 마음과 말을 같게 해야 한다. 설사 도력이 아직 성숙치 못한 자가 있더라도 이 원력을 타고 도솔천 내원궁에 상생하여 미륵존불의 위없는 설법을 몸소 듣고 큰 깨달음을 속히 증득하여 돌아와 중생을 구제한다면 어찌 유쾌하고 기쁘지 않겠는가?

1899년 해인사에서 작성한 정혜(定慧)를 함께 닦고 도솔천에 태어나 함께 불과(佛果)를 이루려는 모임의 취지문이다. 경허는 1879년 동학사에서 깨달음을 이룬 후, 결사를 맺을 뜻을 세웠지만 여의치 않았다. 이후 20년 만에야 해인사에서 실천에 옮겼다. 그러므로 이 결사문에는 오랜 수행과 공부에 대한 생각이 응집되어 있다고 하겠다. 즉 제목에 그대로 보이듯이 선정과 지혜를 닦고 도솔천에 태어나는 것이 경허 사상의 요체임을 알 수 있다. 이를 위해서 승속과 남녀노소, 현우귀천을 따지지 말고, 또 친소와 이합과 원근과 선후를 따지지 말고 모두 참여하게 한다는 것이다. 결사는 대개 상당한 수행력 혹은 일정한 근기를 가진 이들의 수행공동체를 연상한다. 그러나 경허는 일체의 능력과 조건을 규정하지 않았다. 또한 반드시 한자리에 모여 수행할 필요도 없고, 각자의 처소에서도 참여가 가능하다고 하였다. 결사의 개방성 다시 말하면 경허의 불교대중화에 대한 의지가 드러난다. 더 나아가 경허는 문자를 모르는 도반까지 선참자가 이끌어 주도록 당부하였다.

만약 결사에 참여하고자 하는 자는 이 규례와 계사문을 마땅히 상세히 열람할 것이요, 먼저 결사에 들어온 자는 마땅히 자세히 가르쳐 깨우쳐주어 진정한 신심을 발하여 바른 도업을 갖추게 할 것이며, 바람 따라 되는 대로 살거나 허깨비처럼 이리저리 변하거나 줏대 없이 어영부영 살게 하지 않아야 한다. 이 규례와 계사문은 하안거와 동안거에서 함께 일과를 보내는 가운데나, 혹 평소 함께 모여 공부할 때, 글 잘하고 종문(宗門)의 취지를 아는 자로 하여금 그 모임의 대중을 위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이끌어 주어서 초발심자와 문자를 알지 못하는 도반들이 잊어버리거나 뒤바뀜이 없도록 할 일이다.

결사는 공동체운동이다. 사부대중의 평등한 참여와 공동의 수행을 통해 불법을 닦고, 전하는 수행조직이다. 여기에는 차별과 차이를 두지 않는 철저한 평등의식이 바탕에 깔려 있고, 중세적 신분제도를 초월하는 근대적 대중불교의 실현을 위한 경허의 노력이라고 평가된다.
2) 한글 불교가사의 근대성
경허는 한글로 다양한 내용의 불교가사를 지었다. 국한문 혼용의 〈참선곡〉 〈가가가음〉 〈금강산 유산가〉 순 한글인 〈중노릇하는 법〉 〈법문곡〉 등이다. 불교가사는 고려 나옹화상(1320~1376)의 〈서왕가〉에서 비롯되었다. 불교의 진리를 대중화하기 위해 알기 쉽도록 노래의 형식으로 짓는다. 조선전기에는 사대부들의 정서가 담긴 가사문학으로 발전하였고, 18·9세기에는 불교를 비롯한 민족종교의 교리 전파에 활용되었다. 근대불교의 변화를 주도했던 경허, 용성(龍城), 학명(鶴鳴), 만해 등은 근대불교 혁신운동의 이상을 불교가사를 활용, 표출하여 전 시대와는 다른 공통의 지향성을 보여준다.
경허가 가사를 통해 얼마나 쉽게 불법을 설명하는가 보자.

이 내 말슴 자세 듣소 사람이라 하는 것이 몸뚱이는 송장이요. 허황한 빈 껍덕이 그 속에 한낯 부쳐 분명히 있는구나. 보고 듣고 앉고 서고 밥도 먹고 똥도 누고 언어수작 때로 하고 희로애락 분명하다. 그 마음을 알게 되면 진즉 부쳐 이것일세. 찾는 법을 일러보세. 누나 서나 밥먹으나 자나깨나 움즉이나 똥을 누나 오좀누나 웃을때나 골낼 때나 일체처 일쳬시에 항상 깊이 의심하야 궁구하되 이것이 무엇인고. 어떻게 생겼는가 큰가 작은가 긴가 짜른가 밝은가 어두운가 누른가 푸른가 있는것인가 없는것인가. 도시 어떻게 생겻는고. 시시때때로 의심하야 의심을 놓지 말고 념념불망 하여가면 마음은 점점 맑고 의심은 점점 깊어 상속부단할 지경에 홀연히 깨다르니 천진면목 좋은 부쳐 완연히 내게 있다. 살도죽도 않는 물건 완연히 이것이다. 금을 주니 바꿀소냐, 은을 주니 바꿀소냐. 부귀공명도 부럽지않다.

중생이 지닌 진면목의 불성을 이처럼 쉽게 풀어낸 글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것도 누구나 알기 쉽도록 순 한글로 말이다. 선사는 순 한글 가사 이전에 국한문 혼용으로 〈참선곡〉 〈가가가음〉 〈금강산 유산가〉 등을 썼다. 이 가운데 〈참선곡〉은 당시 12살의 어린 사미에게 써준 법문이었다. 선사가 해인사에 있을 때 설호 사미가 선사를 시봉하였다. 당시 학명도일(學明道一)이 설호에게 “너는 아직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저 노스님은 아주 훌륭한 스님이시다.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스님이시니 법문을 받아 두어라.”라고 하였다. 사미는 종이를 한 장 들고 가 경허 선사에게 법문을 청하였고, 선사는 주저하지 않고, 어린 사미를 위해 국한문 혼용체의 〈참선곡〉을 썼다. 훗날 설호(卞雪醐, 1888~1976) 사미는 이 〈참선곡〉을 보급하는 데 힘을 기울여 기회 있을 때마다 사비를 들여 인쇄하였다고 한다. 〈참선곡〉은 이후 학명, 만공, 한암 등의 〈참선곡〉 창제에 영향을 미쳐 근대불교의 대중화에 기여하였다.
선사의 가사는 대체로 유사한 내용을 지닌다. 인생사는 허망하니 부귀공명, 헛된 욕심 다 버리고 불법의 참된 삶을 깨닫자는 다분히 교훈적인 구조이다. 한문이 통용되지 않는 대중들에게 불법을 전하기 위해서는 한글, 그것도 가장 쉬운 구절로 다가가야 했다. 한글 가사를 택할 때는 이미 그 대상이 정해져 있다. 방대한 한문 경전의 불법을 쉽게 풀어내고 설득시키기 위해서는 12살의 어린 사미도 이해할 수 있는 한글 가사가 주효했던 것이다. 한편 한글 가사 중에는 출가수행자를 위한 〈중노릇하는 법〉이 이채롭다. 내용을 보자.

대저 중노릇 하는 것이 적은 일이리요. 잘 먹고 잘 입기 위하야 중노릇하는 것이 아니라 부쳐되여 살고 죽는 것을 면하자고 하는 것이니 부쳐되려면 내몸에 있는 내 마음을 찾아보아야 하는 것이니 내 마음을 찾으려면 몸뚱이는 송장으로 알고 세상일이 좋으나 좋지안으나 다 꿈으로 알고 사람 죽는 것이 아침에 있다가 저녁에 죽는 줄로 알고 죽으면 지옥에도 가고 즘생도 되고 귀신도 되여 한없는 고통을 받는 줄을 생각하야 세상만사를 다 잊어버리고 항상 내 마음을 궁구하되 보고 듯고 일체 일을 생각하는 놈이 모양이 어떻게 생겻는고 모양이 있는 것인가 모양이 없는 것인가 큰가 작은가 누른가 푸른가 밝은가 어두운가 의심을 내여 궁구하되 고양이가 쥐잡듯하며 닭이 알안듯하며 늙은 쥐가 쌀든 궤ㅅ작 좃듯하야 항상 마음을 한군데 두어 궁구하야 잊어버리지 말고 의심하야 일을 하더라도 의심을 놓지 말고 그저 있을 때라도 의심하야 지성으로 하여가면 필경에 내 마음을 깨다를 때가 있을 것이니 부대 신심을 내여 공부할지니라.

다른 불교가사와 마찬가지로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내용이다. 앞서 해인사의 결사문 규례에서 보았듯이 당시 불교계는 문자를 모르는 출가자들이 있었다. 조선 후기 세속의 고역을 피해 입산한 하층민들로 추정된다. 선사는 불교계의 현실을 직시하고 그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였다. 결사를 시작하면서 차별과 제한을 두지 않고 선배는 글을 모르는 후배들에게는 말로써 전할 것을 당부하였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한문을 모르는 출가자들에게 순 한글로 〈중노릇 하는 법〉을 가르쳤다. 제목에서부터 대중의 흥미를 끌어당기고, 승려로서 종교적 권위를 벗어 던졌다.
34세에 깨달음을 이룬 경허는 〈오도가〉에서 “사방 둘러봐도 사람이 없으니, 의발을 누구에게 전해 받으랴. 의발을 누구에게 전해 받을까, 사방을 둘러봐도 사람이 없구나.”라고 외친다. 스승 없이 홀로 깨달은 이의 절대 고독이 묻어난다. 19세기 불교는 오랜 억불의 시대에서 법등만을 겨우 유지할 뿐, 이미 법맥은 희미해졌다. 선사의 깨달음은 끝이 아니고 시작이었다. 격동기의 현실에서 불조의 혜명을 잇고, 선풍을 일으키기 위해 결사를 감행한다. 새로운 불교를 가꾸는 데 승속과 남녀, 근기의 높고 낮음, 법문의 형식은 일체 묻지 않았다. 고독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깨달음의 진리를 중생과 함께하려는 경허불교의 철저한 대중 지향성이 한글 가사에 그대로 드러난다.

3) 법맥 계승과 근대불교
경허를 근대 선불교의 중흥조라고 하는 바탕에는 그의 법맥이 면면히 계승된다는 사실이 크게 작용한다. 선사의 법을 이은 제자는 침운현주(枕雲玄住), 혜월혜명(慧月慧明), 만공월면(滿空月面), 한암중원(漢岩重遠) 등 넷이다. 이들은 직접 가르침을 받은 수법제자(受法弟子)이지만, 수월관음(水月觀音) 등 많은 인물이 제자에 포함된다. 법손을 살펴보기에 앞서 먼저 선사의 법맥에 관한 연구에서 짚고 넘어갈 문제가 있다. 여러 연구자들은 “선사 스스로가 법맥을 규정하여 청허 아래 11세손이며 환성 아래 7세손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선사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경허는 스승 없이 스스로 깨달았다. 9세에 입산하였지만 14세가 돼서야 글을 배웠다. 청계사에서 처음 만난 스승 계허(桂虛)는 짧은 인연 만에 환속하였고, 동학사의 만화(萬化) 화상을 만나서야 비로소 경을 배웠다. 선사는 자신의 법맥을 언급하여 “용암(龍巖) 장로는 내 도통(道統)의 연원(淵源)이고 만화 강사는 나의 수업사(受業師)”라고 하였다. 법맥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기록이다. 즉 “청허 아래 11세손, 환성 아래 7세손”이라는 말은 선사의 말이 아니라 후대의 기록일 뿐이다.
그 근거가 되는 원문은 한암이 쓴 〈선사경허화상행장〉(1931)과 만해가 《경허집》(1943)을 간행하면서 쓴 〈약보(畧譜)〉이다. 두 기록을 보면 경허가 직접 이러한 법맥을 언급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훗날 나의 제자는 마땅히 나의 법맥이 용암장로에게서 이어진 그 도통의 연원을 바로 정립하고, 만화강사는 나의 수업 스승으로 삼아야 옳도다. 이제 가르침을 따라 법맥의 원류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곧 화상은 용암혜언(龍巖慧彦)을 이었고, 혜언은 금허법첨(錦虛法沾)을 이었으며, 법첨은 율봉청고(栗峰靑杲)에게, 청고는 청봉거안(靑峰巨岸)에게, 거안은 호암체정(虎巖體淨)에게 법을 이었다. 청허는 편양(鞭羊)에게 전했고, 편양은 풍담(楓潭)에게 전했으며, 풍담은 월담(月潭)에게, 월담은 환성(喚惺)에게 전했으니, 화상은 청허의 11세손이 되고, 환성의 7세손이 된다.

경허가 자신의 법맥을 말한 최초의 자료이다. 이 문장을 자세히 보면 경허가 직접 한 말은 “훗날 나의 제자는”부터 “만화강사는 나의 수업사로 삼아야 옳도다.”까지이다. 뒤이은 문장 “이제 가르침을 따라 법맥의 원류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하부터 끝까지는 모두 한암의 부연 설명이다. 즉 “화상은 청허 아래 11세손이며 환성 아래 7세손이다.”라는 말은 한암이 쓴 것이다. 경허의 말이 아니라 한암 자신의 말이기에 ‘화상은’이라는 주어를 명시하였다. 즉 경허는 “나는 청허의 11세손, 환성의 7세손”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한암의 행장은 만공과 만해의 노력으로 1943년에 출간되었다. 만해는 한암의 행장을 토대로 경허의 〈약보〉를 서술하였는데 여기서도 “청허의 11손 운운”은 경허 스스로의 말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32세 때 홍주 천장암에 머무르며 하루는 대중에게 설법하다가 특별히 전등의 연원을 밝혔다. 곧 용암 화상에게서부터 법을 이으니 스님은 청허의 11세손이요, 환성의 7세손이 된다.

만해가 약보를 정리하면서 “스님은 청허의 11세손, 환성의 7세손이 된다.”라고 썼다. 즉 경허 스스로의 말이 아니다. 만해는 한암의 행장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경허집》에서 이 두 인용문 이외에 법맥 전승에 관한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경허가 스스로를 청허의 11세손, 환성의 7세손이라 말했다는 설명은 사실이 아니다. 한암과 만해의 부연 설명일 뿐이다.
최근 선사에 대한 평가가 불교계와 학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고 끝내 논쟁으로 이어졌다. 무애행과 삼수갑산행을 어떻게 평가하는가의 문제인데 이에 관해서는 별다른 생각이 없다.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모르기 때문이다. 왜 막행막식을 하고, 왜 갑자기 은둔하였는가에 대한 일말의 단서도 찾지 못했는데 어떻게 평가가 가능한지 모르겠다. 경허의 제자 한암은 “(선사는) 먹고 마시는 것이 자유롭고 성색에 구애받지 않았으므로 널리 세간에 유희함에, 사람들의 의심과 비방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곧 광대한 마음 불이문을 증득했기 때문으로 초탈 방광함이 이통현(李通玄) 장자나 종도자(宗道者)와 같은 류인가, 그렇지 않으면 시절을 만나지 못해 비분강개하여 세상의 밑바닥에 몸을 감추고 낮은 것으로써 자신을 기르고 도로써 스스로를 즐기기 위함인가, 홍곡(鴻鵠)이 아니면 뉘라서 홍곡의 뜻을 알 수 있을 것인가.”라고 하였다. 경허의 선상(禪床)에서 법을 배우고 지음(知音)으로 칭송받았던 한암조차도 선사의 경계를 판단하지 않았다. 선사에 관한 자료를 탐색하고, 신앙과 사상 등의 실체를 이해하는 데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사실을 파악하는 일이라 생각된다. 분명한 사실조차도 잘못 이해하고, 이를 답습하는 오류는 더 이상 없어야 하겠다.
선사의 제자에 관해서는 여러 논고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침운현주(枕雲玄住)와 혜월혜명(慧月慧明, 1861~1937), 만공월면(滿空月面, 1871~1946)과 한암중원(漢岩重遠, 1876~1951) 등은 근현대 불교의 발전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세세한 행장과 자취는 제외하고 만공과 한암을 중심으로 오늘날의 불교에 미친 영향만을 살펴보자.
개항과 함께 시작된 근대불교는 중세사회의 질곡을 벗어나지 못한 채, 서구의 외래종교와 일본불교의 도전에 직면하였다. 억불의 시대 도성출입마저 금지되었던 불교계가 이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02년 정부는 원흥사를 창건하고 사사관리서를 출범시켜 불교를 국가의 직접적인 관리하에 편제하였다. 전국 13도에 각각 1개소의 으뜸 사찰, 즉 중법산을 두어 도내 사찰의 행정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원흥사의 창건과 승직의 설치는 조선시대 억불정책의 기조에서 본다면 승정의 대변화를 가져온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오랜 기간의 무종단 시대를 지내오면서 불교계는 체계적인 승단을 수립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였다. 국가의 계획 역시 적극적인 불교정책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사사관리서는 2년 만에 폐지되었다.
국가와 불교계의 지지부진과는 달리 일본불교의 침투는 빠르고 저돌적으로 진행되었다. 1877년 일본 정토진종 본원사의 부산별원을 시작으로 진종·정토종·일련종·진언종·조동종·임제종 등 많은 종파가 앞다투어 포교를 시작하였다. 1911년까지 한국에 상륙한 종단은 6개 종단 11종파로서 전국에 무려 167여 개소의 사찰, 별원, 포교소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전 국토가 일본불교의 각축장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허는 주변 사람들이 도회지에 나가 교화하기를 권하면 “내게 서원이 있으니, 발이 경성 땅을 밟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1910년 주권을 상실한 이후 일본불교의 득세는 더욱 강화되었고, 한국불교의 정체성은 더욱 약화되었다. 이러한 시대에 불교의 자주성과 역량을 지키려는 노력이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그 중심에서 만공과 한암 등 경허의 문손들이 크게 활약하였다. 만공은 한국불교의 자주성을 지키려는 선학원 설립운동을 주도하였다. 일제의 강압적인 불교정책과 주지들의 세속화 등이 팽배한 풍토에서 전통 선을 중흥하기 위한 결단이었다. 남전, 도봉, 석두, 용성, 상월 등이 함께하였고, 1930년대에는 적음, 오성월, 만해 등이 난관을 겪어가며 선학원을 지켜냈다. 오성월은 경허가 범어사에서 결사를 일으킬 때 주지로서 궂은일을 도맡았던 인물이다. 만공은 서슬 퍼런 일제의 압제하에서도 그 수장인 미나미 총독에게 “일본불교는 부처님의 계율을 파계하게 만든 장본인으로 무간아비지옥에 떨어져서 한량없이 고통을 받아야 한다.”며 거침없는 기개를 펼치기도 하였다.
한암은 1899년 청암사 수도암에서 경허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1929년 오대산 상원사로 가서 이후 27년 동안 산을 내려오지 않은 채 수도에만 전념하였다. 1941년 오늘날 조계종의 모태가 되는 조선불교 조계종의 초대 종정에 추대되었다.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오대산의 전 사찰이 소각될 위기에 처했을 때, 죽음을 마다치 않고 상원사를 지켜낸 일화가 유명하다.
이상과 같이 스승 없이 홀로 깨우친 경허지만 그에게는 많은 제자들이 있었다. 이들에 의해 국권상실의 고통 속에서도 불교의 자주성을 지키려는 노력이 계속되었다.


3. 경허의 역사적 위상

경허가 살았던 시대 불교계에는 또 다른 위인이 있었다. 이동인(李東仁)이다. 그는 한국 근대불교의 전개과정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인물 가운데 한사람이다. 이동인은 근대사회의 격동기였던 1877년 무렵 어느 날 등장하였다가 1881년 갑자기 사라졌다. 불과 4년간의 짧은 활동이었지만, 근대불교의 형성과 조선의 근대화 과정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당시 30대 중반이었으므로 경허와 거의 동년배이다. 두 인물은 동시대를 살았지만 생애와 활동은 극명하게 다르다. 경허는 말년을 제외하고 평생을 수행에 전념하였지만, 이동인은 격동기의 정치와 외교무대에서 활동하였다. 즉 경허는 결사 등을 통해 불교의 중흥에 헌신하였고, 이동인은 일본을 오가며 조선의 근대화에 힘을 쏟았다. 얼핏 보면 출가 승려라는 공통점만 있을 뿐 두 인물의 공통분모는 없어 보인다.
그러나 불교가 지닌 본연의 가치, 곧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생각하면 이들의 행보는 결국 하나의 접점에서 만나는 것이라 생각된다. 수행을 통한 깨달음은 다시 중생에게 회향할 때 진정한 가치를 찾을 수 있다. 경허의 깨달음이 소중한 까닭이다. 이동인은 국가의 운명이 위태로운 현실에서 수행처가 아니라 예토(穢土)에 직접 뛰어들어 국가와 중생을 구제할 방책을 모색하였다. 이동인의 근대개혁운동은 결실을 보지 못한 채 실종으로 마감된다. 뜻을 함께했던 김옥균 등의 갑신정변도 3일천하로 끝났다. 이처럼 개화파의 개혁운동은 좌절되고 말았지만, 그들이 남긴 의지와 열망은 조선의 새로운 각성을 불러일으켜 근대화의 서막을 불러왔다.
법등이 꺼져가던 시대 경허는 인고의 수행을 통해 결사를 일으켜 마침내 선풍을 중흥시켰다. 이후 “할 일을 마친 사람의 경계”인 듯 홀연히 삼수갑산으로 떠났다. 그러나 선사가 평생 이룩한 불교 중흥의 의지는 결사와 불교가사, 법맥 계승으로 면면히 이어져 근대불교의 여명을 열었던 것이다. ■


한상길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전임연구원. 동국대 사학과 졸업, 동 대학원 석사·박사. 저서로 《조선후기 불교와 사찰계》 《마곡사》 역서로 《역주 조선불교통사》 등이 있다. 논문으로 〈개화사상의 형성과 근대불교〉 〈개화기 일본불교의 전파와 한국불교〉 〈이동인과 만해; 근대불교의 개화와 유신〉 〈팔관회의 복원과 재현을 위한 과제〉 등이 있다.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