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 경허를 다시 읽는다

조선왕조가 국시를 유교로 전환하면서 불교가 사회적 규범으로는 한 걸음 물러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일반 대중의 종교로서 신념이나, 지식인의 교양적 수양으로는 그 위력이 그대로 유지되어 왔다. 그 위력의 중심에는 역대 고승들의 법력이 항시 버티면서, 대중의 지지는 말할 것이 없고 국가의 기틀까지도 지켜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큰 본보기가 국가적 위난이 있을 때마다 고승들의 구국위업으로 호국불교(護國佛敎)라는 일반적 정의가 타당하게 된 점이다. 아울러 이로 인해 스님들의 법맥이 이어져 조선조 5백 년의 불교사가 이어져 왔다.
이런 점에서 경허(鏡虛 1857~1912) 선사(이하 선사란 경허 선사를 지칭함)는 조선왕조의 불교를 마감하는 한 획을 그은 큰 스님이었다고 여겨진다. 생존의 시기 자체가 조선왕조의 마감과 함께한 셈일 뿐만 아니라, 그 행적 또한 조선조의 선풍(禪風)을 대표할 만한 행보를 보였음도 매우 의의 있는 일이다.
본 논고는 선사의 시문을 살피는 것으로 한정되었기에, 우선 그의 일상의 행적을 무애행(無碍行)으로 정의하고, 이 무애행의 표상으로 부각되는 일체의 언행이 바로 선적 수행이기에 그중의 시문을 선시(禪詩)로 규정함에도 주저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세속의 나이로 56세요 스님의 연세로 48년을 사신 일생이 어디에도 매임이 없는 명실상부한 자유인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스님은 그야말로 걸림이 없는 무애인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무애인의 막힘 없는 언행이 바로 선승(禪僧)의 표상이요, 이러한 선승의 시문은 곧바로 선시이다.
여기서는 문인 한암(漢岩)이 찬술한 〈선사경허화상행장(先師鏡虛和尙行狀)〉(이하 ‘행장’으로 표기함)을 바탕으로 하여, 이러한 무애의 실천이 언행으로 일치되어 곧바로 시문으로 표상화한 점을 살펴보려 한다.


1. 행장에 보인 입불출유적(入佛出儒的) 자유인

선사의 법명은 성우(惺牛)이고 법호는 경허(鏡虛)이다. 제자인 한암(漢岩) 스님이 행장을 쓰면서 서두에 “《금강경》에서 말하기를 500세 뒤에 이 경을 들어 신심을 내게 하는 드문 공덕을 가진 이가 있으리라 했는데 우리 스승이신 경허 화상이 바로 이 분”이라 하면서 행장을 서술하였다.
선사는 출생에서부터 드문[稀有] 행적을 보인다. 태어나 사흘 동안 울지를 않다가 몸을 씻기고 나서 비로소 아기의 울음을 울어 사람들이 모두 신이하다고 칭찬했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어 9세에 청계사(淸溪寺)의 계허(桂虛) 스님에게 출가 수계하였다. 24세까지 학문에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가, 마침 한 유생이 함께 한 해 여름을 나게 되어 시험 삼아 천자문이나 통사(通史) 등을 가르쳐 주니 하루에도 5, 6장을 암송하여 비상한 재주에 감탄하였다.
계허 스님이 환속하면서 동학사의 만화(萬化)에게 천거하였다. 경소를 한 번만 보면 암송하니 종일 졸아도 다음날에 물어보면 의미를 모두 이해하여 마치 촛불을 밝히는 것 같았다. 유경과 노장(老莊)에도 정통하였다.
천성이 소탈하여 외형적 수식에 구애되지 않아 여름날 공부에 대중이 정장하여 더위 땀을 견디지 못하나, 선사는 홀로 벗어부치고 의식에 따르지 않았다.
23세에 대중의 소망에 따라 동학사에서 개강하니 사방에서 배우는 이들이 모여들었다. 하루는 계허 스승의 은혜를 생각하여 찾아뵈러 가다가 날이 저물어 동리에서 자고 가려 하였으나 한 집도 재우는 이가 없어 이유를 알아보니, 역질이 돌아 허락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런 사실을 알고는 심신이 황홀하여 생명이란 것이 일순간의 호흡에 있어 일체세간이 모두 꿈속에 있는 것이라 하고, 스스로 생각하되 이 생명이 차라리 치매한이 될지언정 문자에 구애되지 않겠다 하고는, 오로지 공안 화두에 몰두하여 대중을 해산하고 참선에만 몰두하였다.
이때 옆에서 시중드는 사미가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이처사(李處士)라 불리며 다년간의 좌선으로 깨달은 바가 있었다. 어느 날 이 사미의 스승인 스님이 찾아가자 이처사는 “중이 된 자는 끝내는 소가 된다.(爲僧者 畢竟爲牛)”하였다. 이 스님이 이 말의 뜻에 대답을 못 하니 처사가 “어째서 소가 된다면 코가 뚫린 곳이 없게 되겠다(爲牛則 爲無穿孔處)고 대답하지 못하느냐?” 했다는 말을 듣고, 선사는 “백천 법문의 한량 없는 오묘한 뜻이 바로 얼음이 풀리고 기와 해체되듯(百千法門 無量妙義 當下氷消瓦解)” 하였다 한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잠시 선사가 성우(惺牛)라는 법명을 쓰신 유래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선사께서 이 법호를 가지신 것이 이 일화와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닐까. 행장을 서술하는 한암 스님도 이 대목에 특별히 유의한 듯하니 “이때가 바로 고종 16년(1879, 23세) 기묘 동십일월 망간(時則高宗十六年十一月望間也)”이라 하여, 날짜까지를 들었다는 것은 바로 이 점을 특별히 강조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더구나 선사의 일생 행적이 이 콧구멍 뚫림이 없는 소인 자유인이었다 하여도 크게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까지가 선사의 행적 전반부로, 선사가 득도하기까지 과정인 셈인데 하염없는 무위(無爲)와 연계되는 느낌이다. 태어나 3일 동안 울음이 없었다는 기이한 행적[奇行]이 미래의 선적 행위의 중추인 무언(無言)의 예시인 것이고, 24세까지 학문에 나아가지 못했다 함이 배울 것이 없음의 무학(無學)이니 어디에도 집착되지 않을 무착행(無着行)의 예고였다. 만화(萬化) 스님에게서 경소를 배우되 한 번 보고 이해하여 유경, 노장(老壯)에도 정통했다 함은 자득(自得)의 터득이고, 더위 추위에 격식의 옷차림을 거부했다 함은 얽매이지 않는 불기(不羈)의 소탈함이다.
23세에 생사를 가르는 역질의 창궐에서 세간사가 꿈임을 깨닫고, 이처사의 코 뚫림이 없음[無穿孔處]을 듣고 얼음 풀리듯 함이 몰록 깨닫는 돈오(頓悟)의 순간이다. 여기에 선사의 일생에서 중요한 계기가 있음을 발견한다. 그야말로 줄탁동시(啐啄同時)의 무언의 교감이 이루어진 것이다. 역질에서 무상을 깨닫는 순간이 알을 깨려는 병아리의 갈망이었고, 이어 코 뚫림이 없다는 이처사의 일갈(一喝)이 껍질을 깨준 어미 닭의 부리였다.
여기까지가 선사가 돈오에 이르는 수련의 전반부이고, 다음은 돈오의 실천적 수련의 후반부인 셈이다.
다음 해(1880년)에 연암(燕岩)의 천장암(天藏庵)에 주석하면서 선사의 무애행이 실천으로 옮겨지는 출발점이 된다. 천장암에는 속가의 형인 태허(太虛) 선사가 어머니를 모시고 여기에 계셨기 때문이었지만, 여기서 가송(歌頌)으로 오도 증득처[悟證處]를 발휘하였다.

忽聞人於無鼻孔  누구에게 콧구멍 뚫림 없는 소란 말 홀연 듣고
頓覺三千是我家  문득 삼천 대천 세계가 내 집임을 깨달았구나
六月燕岩山下路  유월달 연암산의 산 아래 길에는
野人無事太平歌  들 사람들 일없이 태평가를 부르네.

앞의 인(人)은 이처사(李處士)이고, 뒤의 인(人)은 자신인 셈이다. 이 야인이 태평인이 되어 〈태평가〉(太平歌, 《경허집》에는 悟道歌)를 부른다.
〈태평가〉는 “사고무인 의발수전(四顧無人 衣鉢誰傳, 사방을 돌아봐도 사람 없으니 의발을 누구에게 전하며), 의발수전 사고무인(衣鉢誰傳 四顧無人, 의발을 누구에게 전하나 사방을 돌아봐도 사람 없구나.)”으로 시작하여 장문의 노래로 이은 끝에 “의발수전 사고무인(衣鉢誰傳 四顧無人, 의발을 누구에게 전하나 사방을 돌아봐도 사람 없으니), 사고무인 의발수전(四顧無人 衣鉢誰傳, 사방을 돌아봐도 사람 없으니 의발을 누구에게 전하나.)”으로 결말하니, 이는 스승 제자의 연원적 이음이 없어, 인증되고 전수된 곳이 없음을 깊이 탄식한 것이다.
이렇게 연원도 전수받은 곳도 없는 선사의 길은 일상인의 길과는 정반대였다. 어느 스님이 묻기를 “옛말에 이르기를 ‘움직이는 몸가짐에 옛길을 드날리면 쓸쓸한 동기에 떨어지지 않는다(動容揚古路 不墮悄然機)’ 하였는데, 어떤 것이 옛길입니까?” 하니 스님은 “옛길에는 두 길이 있으니, 하나는 탄탄한 길이고 하나는 험난한 길이다. 험난한 길은 ‘가야산 아래 천 가닥의 길에 수레 말이 수시로 왕래하는 길이고(伽倻山下千岐路 車馬時時任往來)’이고, 탄탄한 길은 ‘천 길의 절벽에 오는 사람 없으니 오직 원숭이만이 거꾸로 오르는 길(千尋絶壁無人到 惟有猢猻倒上來)’이다.” 하였으니, 일상인의 생각과는 정반대이다. 험한 길에서는 왕래가 편하고 평탄한 길에 원숭이도 매달려 온다 함이 일상과는 정반대이니 그야말로 반상합도(反常合道)의 추구라 해야 할 것이다. 선사는 시적 언어의 구사만이 아니라 말씀과 행동 자체가 반상합도이니, 이것이 바로 선사의 언행일치적 선시가 된 것이다.
계묘년(1903, 46세)에 범어사에서 해인사로 가는 도중에 지은 시를 보자.

識淺名高世危亂  지식 낮은데 이름 높고 세상 위태로우니
不知何處可藏身  어느 곳이 이 몸을 숨길 곳인지 알지 못해
漁村酒肆豈無處  고기잡이 마을이나 술집 왜 장소 없으랴만
但恐匿名名益新  다만 이름 숨기다가 이름 더 새로움 두려워.

역시 반상합도적 역설적인 시이다. 몸을 숨길 곳이 없다 하고는 곧이어 왜 없는가 어촌 주사가 모두 숨을 곳이라 한다. 몸을 숨기겠다 하고는 또 이름은 새로 알려진다는 것이니, 모두가 모순의 연속이다. 그러나 모순을 모순이 아닌 자리로 돌리는 것이 바로 반상합도이다. 그러면서 이 시는 어쩌면 자신의 미래를 내다본 스스로의 예언인 듯도 하다. 다음 해 갑진년(1904) 석왕사의 오백나한 개금불사에 참여하였다가 행방을 감추었으니, 위의 시는 이를 미리 예고한 셈이다.
그로부터 10년 뒤 수월(水月) 화상의 편지가 예산의 언혜선원(言慧禪院)에 소식을 알려왔다. 선사께서는 머리를 기르고 유복을 입고 갑산, 강계 지방을 오가며 혹은 시골 글방에서 아동을 가르치고 혹은 시장 거리에서 술을 자시다가 임자년(1912, 56세) 봄, 갑산 웅이방 도하동 서재에서 입적했다는 것이다.
이로 본다면 선사는 세간을 벗어났다가[出世間] 다시 벗어난 세간마저 벗어난[出出世間] 초탈적 자유인이었다. 만년의 긴 머리에 선비 복장인 장발복유(長髮服儒)는 공자(孔子)가 강조한 사무(四毋), 곧 나라는 생각을 말며[毋意] 기필코라고 단정하지 말며[毋必] 고집하지 말며[毋固] 나를 주장하지 말라[毋我] 함의 실천적 상징이었다. 이런 행위를 유자로 보면 철저하게 가르침을 실천한 분이요, 불자로 보면 완벽하게 해탈한 분이다.
율곡(栗谷)이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을 심유적불(心儒跡佛)이라 하여, 필자는 이를 한 격 높여 진유진불(眞儒眞佛)이라 한 적이 있는데 오늘 이 경허 선사에게도 입불출유적(入佛出儒的) 진유진불의 이 칭호를 드리고 싶다.
지금까지 선사의 행적을 중심으로 평생을 대략 살펴보았다. 아울러 선사가 세상에 매이지 않은 자세의 시를 몇 편 더 보도록 한다.


2. 시선일치(詩禪一致)의 자유로운 시

철저하게 자유인이었던 선사의 시는 어떠했을까. 선사의 시는 그 행위 자체가 선경(禪境)의 실천이기에 시 자체가 선시 아님이 없다. 스님들의 시를 접하게 되면 스님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시를 대하여 교의적(敎義的) 시어에 시선이 이끌리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선사의 시에는 교의를 다룬 시는 거의 없고, 선어적(禪語的) 선택으로서 간접적 교의의 표현이 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스님이지만 그 신분에 얽매어 구속된 인상을 받게 하는 시어의 선택은 별로 없는 것 같고, 스님이기에 이런 생각이나 시어를 선택할 수 있겠다 하는 느낌을 받게 한다. 선사의 시는 승속을 넘나드는 반면, 당시의 종교적 대립으로 보이는 유불이나 노장의 교리적 수사에 구애됨이 없었다 하겠다. 이 역시 자유인으로서의 자유로운 작시 태도라 할 듯하다.
여기에 몇 수를 소개해 본다.

酒或放光色復然  술에 미친 방종이요 색에도 다시 그러해
貪嗔煩惱送驢年    탐진과 번뇌 속에 헛된 나이 보냈네
佛與衆生吾不識    부처와 중생을 나는 다 모르니
平生宜作醉狂僧    평생토록 의당히 취한 광기의 중이지.

행장에서도 기러기나 고니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기러기 고니의 의지를 알며 큰 깨우침이 아니면 어떻게 조그만 절개에 구애받지 않을 수 있느냐 하며 선사의 행적으로 소개한 시이다. 제자인 한암도 선생님의 자유로운 절개로 거론한 것이 분명하다. 스스로가 취광승이라고 호언함은 시는 시로서 의미를 갖는 것이지만, 세속적인 안목으로는 그런 평가를 할 수도 있다는 세속과의 소통적 표현이다.
행장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천장암에 거주할 때에 누더기옷 한 벌로 추위 더위에도 갈아입지 않아 모기 파리가 육신을 에워싸고 이 서캐가 옷에 가득하였다. 밤낮으로 침범해 씹어 살갗이 헐어도 조용히 움직이지 않고 산악처럼 앉아 계시다(住天藏庵時 一領鶉衣 寒暑不改 蚊蚋繞身 虱兒滿衣 晝宵侵囓 肌膚瘡爛 寂然不動 坐如山岳).

참선의 자세로 어떤 상황에도 요동되지 않음을 기린 표현이지만, 이는 제삼자의 시선에 비치는 선사의 행위이지, 당사자인 선사의 심중에야 어찌 외래적 괴로움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겠는가. 신체적 고통을 수도의 일환으로 억제하지만, 마음속의 괴로움과 싸워야 하는 갈등은 범인과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이에 대조되는 시가 한 편 있다.

甘口時行蝎處深  입맛 날 때 빈대는 깊이 들고
蟻群蠅隊總難禁  개미 떼 파리 떼 모두 금하기 어려워
四物侵尋忙拂拭  온갖 벌레 침입에 내쫓기 바쁘니
仍忘庭栢歲寒心  인해서 뜰 잣나무의 추위 마음을 잊었다.
— 〈卽事〉(《경허집》 p.172)

앞의 기사가 천장암에서 있었던 일이요, 이 시는 있던 사실의 기록인 즉사(卽事)이니 어쩌면 동시 동일 공간에서 이루어진 일일지도 모르겠다. 이렇듯 스님뿐만 아니라 일반적 시인의 시라 하더라도 외부적 행위의 기록과 내면적 심리적 갈등의 표현에는 거리가 있는 것이고, 행위적 서사보다도 내면적 서정이나 상상을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이 문학이 이루어내야 할 속성일 수도 있다.
행위와 기록, 말과 실천의 일치로 사물에 이끌림이 없는 것이 선정(禪定)이지만, 이를 내면적 언어로 표현함에서 갈등이 시가 되고 이러한 진실을 담은 것의 하나가 선시라 할 수 있다면, 선사의 시는 시선일여(詩禪一如)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世與靑山何者是  세상과 푸른 산 어느 것이 옳은가
春城無處不開花  봄 성 안에 꽃 피지 않은 곳이 없는데
傍人若問惺牛事  옆 사람이 만일 성우의 일을 묻는다면
石女聲中劫外歌  돌 여인의 가락 속에 겁 밖의 노래 있다고.
— 〈題天藏庵〉

청산도 세상이기에 대립시켜 분별할 일이 아니지만, 세상은 일반인의 삶의 공간이고 청산은 삶과는 거리를 둔 은둔의 공간으로 보이기에 마주해서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기에 여기서의 봄 성[春城]은 삶의 공간을 대표한 것이다. 꽃은 자연인 산과의 동일 공간이지만 세속인 봄 성에도 꽃은 만발한다. 곧 청산이든 춘성이든 동일 공간이니 성(聖)과 속(俗)이 동일하다. 작자인 나는 이 동일한 공간의 어디에도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다. 그러기에 있지도 않을 돌 여인의 세속 밖의 노래를 듣고 있는 것이다.
이 시는 천장암에서 지었다고 행장에는 기록하고 있으니 천장암에 어머니가 계셔서 오신 것이 26세 때인 경진년(1880)이었다. 이때가 이처사(李處士)의 ‘코뚜레 없는 소[牛無鼻孔]’의 말에서 깨달은 뒤였다. 이미 고삐 풀린 소의 자유인으로 들어선 때였던 것이요, 아직도 20대의 청년 시절이었으니, 선사의 조숙했던 인품에 감동된다.

佛與衆生吾不識  부처니 중생이니 나는 알지를 못해
年年宜作醉狂僧  해마다 의당히 취해 미친 중이 되네
有時無事閑眺望  때로는 일이 없어 한가히 바라보면
遠山雲外碧層層  먼 산은 구름 밖에 푸르름만 층층.
— 〈偶吟 8〉(《경허집》 p.187)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음이 부처님의 본뜻이지만, 굳이 이마저도 나는 모른다 함이 애초에 이런 구분부터 부정하면서 어디에도 집착되지 않으려는 무애행이다.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취하고 미친 중이라고 선언한다. 스스로 남의 비방을 앞당기면서 대담하게 맞서는 용기이다. 저 구름을 벗어난 푸른 산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이다.

唱出無生一曲歌  무생곡의 한 곡조 노래를 부르면
大千世界湧金波  삼천대천의 세계에 황금 물결이 솟는다
雖云大道不人遠  비록 큰 길은 사람에게서 멀지 않다 하나
其奈浮生如夢何  뜬 구름의 인생이란 꿈 같은데 어찌하라고
永日山光淸入座  긴 해에 산 빛깔은 사람 자리에 들어 맑고
遙村林影亂連坡  아득한 마을 숲 그림자 어지러이 언덕에 닿아
拈來物物皆眞面  물건 물건을 움켜 오면 모두 진여 면목인데
何必紫黃辨佛魔  어찌 꼭 누렇다 붉다 하여 부처 마귀 구별해.
— 〈坐熙川頭疊寺〉(《경허집》 p.233)

무생곡을 불렀다 하는 자체가 나고 멸함이 없는 노래를 불렀다 함이니 일체가 공(空)임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삼천대천의 세계가 존재하여 거기에 황금의 물결이 인다 하니 절대의 없음에 다시 절대의 있음을 인정한다.
진리의 큰길이란 사람 자신에게 있는 것이니 내가 바로 진리의 큰길이지만, 삶이 구름처럼 허무한 것이니 또다시 없음으로 돌아간다. 그러니 저 산 빛이나 숲 그림자가 그대로의 있음이요 그것이 바로 진리의 큰길이다. 사물 낱낱의 면목이 바로 진리이니 여기에 현상적 경계를 놓고 진짜다 가짜다 할 수가 있는가. 결론은 결국 현상의 존재를 뛰어넘는 것이다. 노랗거나 자주색이거나 사물의 참모습이지, 어느 것이 옳다 그르다 함이 있을 수 없다. 부처와 마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詩聲酒力擬豪英  시의 명성 술의 힘으로 영웅호걸 기대기도
新市場中遣旅情  새로운 시장 안에서 나그네 정을 달래다
大水淼茫千里走  강물은 아득히 출렁여 천 리를 내닫고
雄峰嶄屹萬崖傾  큰 봉우리 높이 솟아 일만 언덕으로 기운다
薰天道德誰能仰  하늘에 불탈 도덕을 누가 우러를 수 있으며
量海文章不待鳴  바다로 헤아릴 문장이야 울림을 기다리지도
                           않아
桎梏榮名都棄拂  질곡의 매임이나 명예의 이름 모두 떨쳐 버리
                          고
自饒雲鶴半餘生  스스로 구름 학에 넉넉하게 남은 여생이 반이
                           네.
— 〈過寧邊新市場〉(《경허집》 p.223)

영변에서 시장을 지나며 지은 시이다. 어젯날 대중을 교화하던 스님이 지금은 속세에서도 삶의 아귀다툼이 이루어지는 시장 바닥을 지나며 장사치와 어울리고 있다. 천 리를 내닫는 강물이나 일만 봉우리로 나열되는 산맥은 자신의 포부를 빗댄 시구일 것이니 성인의 도덕이야 아우르기 어렵지만, 바다를 짝할 만함 문장력은 기다리지 않아도 세상을 울리는 처지이다.
그러니 지금의 생활이 질곡의 얽매임이든 과거가 영예로운 명성이었든 다 내치고 구름의 학처럼 여생을 맡기겠다는 속박을 여의는 자유인의 자세이다. 세상을 벗어났다가[出世間] 다시 벗어난 세간을 벗어나는[出出世間] 자세이다.

酒婆商老與之班  주점의 노파나 장사 늙은이와 더불어 짝이 되
                          어
韜晦元來好圓圜  자취를 감춤이 원래 원만 두루함이 좋아서지
未暮火行山豹下  저물기도 전에 불 밝히는 것은 표범이 내려옴
                           이고
深秋風搏塞雁還  깊은 가을에 바람이 치는 것은 변방 기러기 돌
                          아옴
不貪金玉人間寶  황금 백옥의 인간세상 보배는 탐하지 않고
亦忘煙霞物外閑  역시 안개 자연인 사물 밖의 한가함도 잊었다
超脫無疑心自得  뛰어 벗어나 의심 없음은 스스로 마음의 터득
                          이니
只緣曩日窺玄關  다만 지난날의 오묘한 문을 엿보았기 때문이
                           지요.
— 〈書懷 2〉(《경허집》 p.205)

회포를 쓴다는 시이니, 이는 선사가 자신의 마음속을 서술한 것이다. 인간 세상의 보배는 원래 탐낼 생각이 없고 더구나 사물 밖의 한가함도 잊었다. 이러한 세상의 초탈을 마음속으로 자득된 것이기는 하지만, 이 또한 그래도 지난날의 참선 강구의 힘으로 인한 것임도 솔직히 고백하고 있다.
47세 이후로 행방을 알리지 않고 북방의 변경을 유랑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자유인의 실천이었다 해야 할 것이다. 조심스레 다시 강조하자면 그야말로 해탈의 경지이었던 것이니 ‘머리를 기르고 유생의 옷을 입었다’는 장발복유(長髮服儒)는 바로 출출세간(出出世間)적 자세였다 하겠다.


3. 반상합도적(反常合道的) 선시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선사의 행적이 속박을 벗은 자유인이었다고 한다면, 그가 대중과의 소통을 위한 언행을 기록으로 제시한 문자도 당연 세속적 논리를 초탈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런 점을 시에서 찾아보려 하였다. 이러한 시들은 일상의 논리와는 거리가 있어 반상적(反常的) 수사라 정의해 온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선사의 시에는 일률적으로 일상과는 거리가 있는 시어들이 많지만, 유독 ‘우음(偶吟)’이란 시제에 두드러진 것 같아 거기에서 살펴보기로 하였다. 우음이라는 시제는 글자 그대로 우연히 읊다라는 의미이니, 이는 자신이 평소에 간직했던 마음속의 생각을 우연한 기회에 쓰는 것이다. 그러기에 평소에 간직했거나 느낀 바를 우연한 기회에 서술하는 것이어서 작자의 심중을 이해하기에 좋은 자료라 여겨진다.
《경허집》에 수록된 우음이란 제하의 시를 모두 열거해보니 총 61수나 된다. 또한 우음이라 할 때는 1수로 끝내지 않았으니, 이는 심중에 간직된 상상들이 이어져 나온다는 것이 아닐까.

眼裏江聲急  시선 안으로 강물 소리가 거세고
耳畔電光閃  귓가에는 번개 빛이 번쩍거린다
古今無限事  고금의 한없는 일을
石人心自點  돌사람이 마음으로 인정하네요.
— 〈偶吟 29〉(《경허집》 p.157)

철저하게 반상적 시상이다. 시선 안으로 강물 소리가 들려오고, 귓가로 번갯불이 비친다. 소리를 시각으로 듣고 빛을 청각으로 느낀다니 이런 모순이 어디 있는가. 이렇게 무한의 시간을 이어왔다. 이런 사실을 인정하려면 일상적인 우리 인간으로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기에 이를 돌사람[石人]만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석인은 경전에서는 석녀(石女)로 등장하여 목인(木人)과 대칭적으로 인용된다. 석녀란 음정(淫情)을 모르는 여인이니, 정서의 알음알이를 멀리 여읜 천진스러운 여인으로 작위적 행위가 없는 사람으로 비유된다. 이러한 돌사람이 머리를 끄덕여 인정한다는 말은 일상적 정서에 사로잡힌 사람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고 세속적 감성을 여의어야 이해된다는 말이다.

石人乘興玩三春  돌 사람이 흥이 나서 석 달 봄 구경인데
不成虎畵更看新  범 그리다 못 이루어 다시 새것을 찾네
林壑在天星月下  숲 골짜기 하늘에 있고 별 달은 내려와
死鷄捕鼠祭亡人  죽은 닭이 쥐를 잡아 가신 이 제사한다.
— 〈偶吟 其六〉(《경허집》 p.186)

돌사람이 봄을 구경하니 그 봄은 일상인의 봄과는 확연히 다를 것이다. 그러니 범을 그리다가 잘못되면 개는 되지마는 이 석인에게는 새로운 그림이어야지 개도 아닌 것이다.
숲이나 개천은 하늘 위에 있고 별이나 달은 땅에 있다 하니 극도의 뒤집음이다. 죽은 닭이 쥐를 잡아서 제사를 드린다니 이도 인간 세상사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언어도단이란 말이 이런 때에는 길이 끊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논리에 맞는다.
포서(捕鼠)는 부처님께서 파계한 승려를 비유한 말이니, 포서(捕鼠)나 사계(死鷄)가 이러한 파계적 승려를 이른 말일 듯도 하나, 여기서는 그저 문맥대로 읽었지만 어찌 되었든 모순적 어법임에는 틀림이 없다.
다음의 시는 조금 특수한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어 선택해 본 것이다.

低頭常睡眠  머리 숙여 항상 졸고 있어
睡外更無事  졸음 밖에는 다시 일이 없다
睡外更無事  졸음 밖에 다시 일이 없으니
低頭常睡眠  머리 숙여 항상 졸고 있네.
— 〈偶吟 六〉(《경허집》 p.148)

이 시의 소재는 셋이지만 내용은 하나에 불과하다. 머리 숙임[低頭], 졸음[睡眠], 일 없음[無事]인데, 이 셋은 결국은 일 없음의 무사로 귀일된다. 그러니 이리 보아도 일 없음이고 저리 보아도 일 없음이다. 그래서 기승구의 이어짐이 다시 전결로 되돌려 이어지게 된다. 세상살이의 순환적 일상을 암시한 것이 아닌가 하는 해석도 해 보게 된다.
이런 시를 회문시(回文詩)라 할 수 있으니, 작자인 선사도 이를 의식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회문시란 한 편의 시를 순독해도 되고 역독(逆讀)해도 된다. 다음은 뒤에서 읽도록 필자가 재구성한 것이다.

眠睡常頭低  졸음으로 항상 머리 숙이니
事無更外睡  일이 없으니 다시 그 외는 졸음
事無更外睡  일이 없어 다시 그 외의 졸음이니
眠睡常頭低  졸음으로 항상 머리 숙이네.


4. 맺는말

선사의 시를 대충 살펴보았다. 선사 무애행의 막힘없는 행적은 그야말로 벗어난 세간마저도 다시 벗어나는 출출세간의 해탈적 실현이고, 머리 기르고 유자의 옷을 입은 것은 바로 공자(孔子)의 사무(四毋)를 실천한 참된 유자의 본보기이다. 그래서 감히 입불출유적(入佛出儒的) 진유진불(眞儒眞佛)이라는 정의를 하고 싶었다. 선사의 행적을 서술하는 한암 스님이 “선생의 법화(法化)를 배우는 것은 옳지만 선생의 행적을 배움은 옳지 않다[學和尙之法化 則可 學和尙之行履 則不可]” 했는데, 선사의 외면적 행적이 바로 유자의 사무적(四毋的) 실천이었음을 알고 배운다면 옳지 않을 것도 없다. 그러니 행적에 대한 어설픈 살핌으로 그 옳지 않은 편견을 갖지 않으려면, 선사야말로 참다운 불자요 참다운 유자임을 알고, 내면세계를 표출한 시에서 법화의 언어를 살피는 것이 옳을 듯하다.
그래서 선사의 언행을 있는 그대로 보고 시문을 있는 그대로 살펴 말과 글과 행위가 하나로 이어지는 선적 표상이기에 언행일치의 선시라 정의하였다. 움직임[行] 멈춤[住] 앉음[坐] 누움[臥]이 선이 아님이 없다는 수선의 본질에서 벗어남이 없었던 선사의 시야말로 법화적 언어로 남아 있는 살아 있는 문학이라 하겠다. 이렇듯 선사의 시문은 일상적 언어를 초탈한 반상적 언어였으니, 어설픈 식견으로 접근하면 오해할 수도 있을 것임을 경계하며 이 글을 맺는다. ■

 

이종찬 
동국대 명예교수. 동국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석사), 한양대 대학원(박사) 졸업. 동국대 국문과 교수, 문과대학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한문학회 고문으로 활동 중이다. 주요 저서로 《조선선가의 시문》 《韓國佛家詩文學史論》 《韓國禪詩의 이론과 실제》 등과 수상록 《옛 시에 취하다》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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